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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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다음 뷰에 연재한 것으로, 고전을 읽는 것이 우리의 성공 비결이라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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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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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0년 9월 15일 6시경, 프랑스의 생 베르나르 부두에, 어느 젊은이가 나타난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중 그 혼자만 돋보인다. 그의 눈에 있는 야심이, 그 곳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깊게 그리고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은 어느 한 여인만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바로 프레데릭 모로이고, 그가 뚫어져라 쳐다 본 그 여인은 바로 아르누 부인이었다. 권력과 야심으로 불타오르던 그의 눈은 일순간, 사랑과 감성으로 물든다.
 

 1840년........ 아직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끝나지 않아 언제 혁명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기였다. 이 시절의 파리의 부조리함을 풍자하거나 고발하는 작품은 많았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스탕달의 『적과 흑』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적 대작인 『레 미제라블』, 플로베르의 작품 등. 그 중에서, 혁명기의 파리의 허망함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이 바로 플로베르의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바로 주인공 프레데릭 모로의 '감정교육'이다. '감정교육(Sentimental Education)'이란, '감정의 순화를 통해서 심미적, 도덕적 마음을 기르는 교육(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지만 그 외에도 프레데릭이 자신의 변호사 친구 데로리에가 먼저 결혼하거나,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는 등의 사건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프레데릭 모로는 아르누 부인에게 연정을 가지지만, 그 미숙한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이 아니다.

 

 그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당브뢰즈 씨를 이용하고, 창녀 로자네트를 거짓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용한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르누 부인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는 아르누 부인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로자네트를 통해 사랑의 만족감을 느낀다.

 

 이 야심가는 사랑을 얻는 데에 실패한다. 그렇다고 그는 어떤 출세를 하지도 않았다(그가 법학도로 공부해서 되려고 했던 판사는 당시 프랑스에서 높은 권력을 상징한다). 사랑도 실패하고, 권력을 얻는 데에도 실패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이 된단 말인가? 격변기의 시대에서는 사랑과 권력, 이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이 아니라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불행한가? 잘못된 시대에서는 자신의 꿈을 모두 다 이룰 수 없으니.......

 

 아르누 부인, 프레데릭의 마음 속에서 항상 불타오르고 있는 그녀. 권력, 프레데릭이 이루려고 했던 것.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친구 데로리에와 만나 옛날을 회상한다. 또한, 그들 외에 등장한 인물들의 운명도 결정한다. 18세에, 야심으로 불타올랐던 그의 열정은 2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식고 말았다. 44세의 중년이 된 프레데릭은 더 이상 권력을 얻을수도, 사랑을 얻을수도 없다.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망가지고 말았다.

 

 '파리 그리고 야심가'라는 제목이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리 그리고 실패자'라는 제목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품 끝에서 프레데릭 모로가 실패자, 즉 루저로써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권력이면 권력, 사랑이면 사랑, 이 모두를 다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플로베르는 사실주의의 거장이다. 그는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하는 데 수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한다. 그는 작품 하나하나에 수많은 교정을 들여서 완성할 만큼, 작품에 관심을 많이 들였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보바리 부인』이나 『성 앙투안느의 유혹』같은 그의 멋진 작품들에서 느꼈던 감동을,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나는 이제 에밀 졸라가 이 책을 "내가 읽어본 유일한 역사소설"이라고 평하고, 카프카가 "이 작품에 굴복했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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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펭귄클래식 1
토머스 모어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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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적인,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그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그 유래를 두고 있으며 '없는', '좋은'이라는 뜻을 지닌 'U'와 '공간', '장소'라는 뜻을 지닌 'topia'의 합성어이다. 즉, '유토피아'의 뜻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좋은 공간'을 일컫는다. 흔히 사람들은 '유토피아'라는 이름 말고도 '이상향', '낙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 1부는 저자 토머스 모어 자신이 친구인 페터 힐레스와 가상의 인물로 알려진 라파엘과 대화하는 부분이고, 제 2부는 유토피아를 갔다 왔다는 라파엘이 들려주는 유토피아 이야기이다. 제 1부의 내용은 모어 당신의 영국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제 2부의 내용은 이 책의 본 내용으로서, 누구나 꿈꾸는 세상, 즉 유토피아에 대한 내용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씌어진 동기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모어가 살았을 당시의 르네상스 휴머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개혁, 마지막 하나는 유럽 세계의 개척이다. 토머스 모어가 살았던 시기는 그야말로 유럽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우선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을 생각해 보자. 르네상스, 즉 문예 부흥 운동은 중세 시대에 유럽을 휩쓸어 중세를 몰락시키고 근대를 열어젖힌 근본적인 계기이며, 이 시기에 씌어진 작품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이 시기에 씌어진 작품 중 하나로, 그가 살았던 영국은 헨리 8세가 교황의 권력에 저항하고 성공회를 연 16세기 초의 시대였다. 그 때 유럽에서 르네상스를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휴머니즘(인문주의)를 지향한 휴머니스트였다. 프랑스의 데카르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나 스피노자, 그리고 영국의 모어 등이 대표적인 휴머니스트였다.

 르네상스가 진행됨에 따라서, 종교 개혁도 진행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는 사실 유럽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요불가결적인 것이었다. 교회의 타락상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교황을 등에 업은 가톨릭교는 신부와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백성들은 힘들어지고, 왕과 귀족 역시 교황에게 무릎 끓으면서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르네상스가 몰아닥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르틴 루터 같은 종교 개혁가들이 일어나 종교 개혁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 개혁은 영국에서는 변질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교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공회'라는 신흥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르틴 루터와 같이 종교 대 종교로써 이루어 질 줄 알았던 영국의 종교 개혁은 모어의 기대와는 달리 교황과 영국 왕이라는 잘못된 구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토머스 모어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토피아』 안에 자신이 꿈꾼 종교 정책을 놓아두었다.

 『유토피아』의 배경을 이루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이 유럽의 영역 확대였다. 아직 제국주의가 시작되지 않았을 때, 영국이나 에스파냐 같은 몇몇 해양 강대국들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번 모험을 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사람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한다. 토머스 모어는 이들의 발견에 큰 영감을 받아 『유토피아』의 공간적 배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가 도저히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지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곳을 이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마치 그것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공간적 요소와 비슷하다.

 








걸리버 여행기

조나단 스위프트 |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2010.10.07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한 네 개의 섬은 각각 인간이 갈 수 없는 그 어떤 곳이다. 물론 그곳이 유토피아인지 아닌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지만, 『걸리버 여행기』의 공간적 배경이 『유토피아』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주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영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인클로저'를 제 1부에서 비판하고 있다(본격적인 비판은 제 2부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인클로저'는 '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를 둘러막아 사유지로 하는 것'을 말한다. 뜻으로만 보아도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인데, 실제로 영국에서는 토지 소유자들이 더 많은 양들을 기르기 위해 농민 보유지를 뻬앗는 일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이 도시 빈민 또는 노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빈민이 된 자들은 먹고 살려면 '노동' 또는 '범죄' 밖에 방법이 없는데, 노동은 지나치게 가혹하여 도저히 할 수도 없는 데다가 그것마저 만원이다. 그렇다면 빈민은 이제 '범죄'밖에 방법이 없다. 그런데 영국의 형벌 제도는 너무나 가혹하다. '도둑질'만 했는데도 '교수형'이 내려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어가 『유토피아』 제 1부에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이런 것이다. 토지 소유자들이 더 많은 양들을 기르기 위해 '인클로저'를 빙자하여 농민 보유지를 빼앗아 농민들은 빈민 또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겨난 빈민들은 '범죄'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를 하다가 걸리면 교수형을 받게 된다.

 이 가혹한 처벌을 보여준 책이 한 권 더 있다. 바로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이다.

 

 







왕자와 거지

마크 트웨인 | 남문희 옮김

웅진씽크빅 2008.10.31







 『왕자와 거지』의 시대적 배경 역시 헨리 8세가 지배하던 16세기 초반이다(물론 소설에서는 헨리 8세가 곧 죽지만). 그리고 왕자 에드워드와 옷을 뒤바꿔 왕이 된 '도시 빈민' 톰 캔티는 '가혹한 처벌'에 대해 자비를 베푼다. 이것은 에드워드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 둘은 가혹한 처벌을 훨씬 더 완화 시킨다.

 

 『유토피아』의 본격적인 내용은 제 2부에서 등장한다. 라파엘이 점심을 먹은 후, 토머스 모어와 페터 힐레스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읽은 이든 듣는 이든 모두를 기분 좋게 한다. 왜? 라파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꿈 같기 때문이다. 즉,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의 2부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결혼 제도, 노동 제도, 예배 방식, 전쟁 방법, 믿는 종교, 풍습, 지형, 너비, 특징 등. 라파엘은 그렇게 장광설을 우리에게 들려주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모어는 불행한 우리에게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유토피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유토피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있다.

 

 나는 정말 『유토피아』가 부럽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공상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정치공상소설'이다. 그만큼 이 책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되는 유토피아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유토피아의 정치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토머스 모어는 영국의 정치 현실을 무엇보다도 비판하고 싶었던 걸까?

 

 

 2. 과학적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앞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정치적 유토피아를 다루었다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과학적 유토피아를 다루었다(참고로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 『학문의 진보』 등 경험철학적인 저술을 많이 쓴 철학자이다).

 








새로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 | 김종갑 옮김

에코리브르 2002.01.24







 아틀란티스는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크리티아스』에 나오는 전설의 섬이다. 대서양의 어느 곳에 있었다는 그 섬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연상시킬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섬은 어느 순간에 바닷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런데 17세기초 에 베이컨은 바닷 속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런데 새로 올라 온 아틀란티스는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보였다.

 

 







크리티아스

플라톤 | 이정호 옮김

이제이북스 2007.04.13







 

 이 소설 같은 작품은 그들이 타던 배가 난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항해 중에 배가 난파하여 어느 정체불명의 섬(벤살렘)에 가게 되는데, 어떤 외부인이 오면 늘 그렇듯이, 처음에 섬의 사람들은 그들을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그들이 위험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둘러다보다가 '솔로몬 학술원'이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일종의 조직으로, 이 나라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고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본 모습은, 솔로몬 학술원 중의 어떤 한 사람의 설명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베이컨은 이 작품을 과학적 유토피아 픽션으로 만들었다. 이 소설과 가장 비교해 보아야 할 책은 다름 아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이다. 토머스 모어가 이 정치공상소설에서 그리스도교적 공산사회를 만들어냈다면, 베이컨은 이 작품에서 과학적 산업사회를 묘사했다.

 토머스 모어가『유토피아』에서 노동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이론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경험주의적(실용주의적 사상과 관련) 사상을 지닌 베이컨으로서는, 그런 교훈적인 유토피아보다는 진짜 유토피아가 필요했다. 즉, 일하지 않아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유토피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베이컨은 과학이야말로 인류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에 동감한다. 정말 과학이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요인에 의해 과학 문명은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끔찍한 결과를 담아놓은 것이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가 바로 조지 오웰의 『1984』이고,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디스토피아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4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겠다.

 

 

 3. 조선인이 생각한 유토피아란?

 

 







조선인의 유토피아

서신혜

문학동네 2010.01.08







 이 학술을 아는 사람은 꽤 드물 것이다. 사실 나도 이 책에 대해 잘 몰랐는데, 타 출판사 카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책일까 하고 궁금했는데,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유토피아』 소개서와 다름이 없었다.

 

 "이상향은 사람이 살고 싶어하는 공간으로, 서양 식으로 말하자면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는 영국 사람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그의 책 제목을 『유토피아Utopia』라고 하면서 만들어낸 용어이다. 그리스어에 연원을 둔 이 말에서 'u'는 '없다ou'라는 의미와 '좋다eu'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글자이다. 'topia'는 장소를 의미하므로 이 둘을 합치면 세상에 '없는 곳' 또는 '좋은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유토피아는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동시에 세상과 다른 좋은 곳을 뜻하는 말이다(p.51)."

 

 이 학술은 조선 사람들이 왜 유토피아를 꿈꾸게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드러났는지, 그들이 꿈꾼 것이 어떻게 현실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내는 글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드러났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와 <몽유도원도>이다.

 

 사전 썸네일 (몽유도원도.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이 작품은 다만 조선인이 어떻게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다룬 책이므로 여기서 자세한 리뷰를 쓰지는 않겠다.

 

 

 4. 너무나 불행하기 때문에 유토피아조차 생각할 수 없다-디스토피아

 우리가 유토피아를 알았다면, 이제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것의 개념을 알 차례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출처: 네이버 백과사전)'을 일컫는 말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지만, 엄연히 세계 디스토피아 3대 소설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자먀찐의 『우리들』이 그것이다.

 

  1. 정치적 디스토피아-『1984』

 

 







1984

조지 오웰 |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3.06.16







 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쓴 시기는 그의 사망 1년전에 쓴 1949년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지나간 연도지만, 조지 오웰에게는 가까운 미래였던 것이다. 조지 오웰이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과는 달리 이렇게 가까운 미래를 두고 쓴 이유는 그만큼 그가 살던 시대의 세계가 디스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비록 1984년은 지나갔지만『1984』는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정치적 암울한 미래는 어쩌면 우리 세대가 겪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겪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후손들이 이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 2의 윈스턴 스미스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제 2의 빅 브라더가 나오지 않기 위해.

 

 2. 과학적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이덕형 옮김

문예출판사 1998.10.01







 올더스 헉슬리가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니만큼, 그는 생명 과학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때문에 올더스 헉슬리는 이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생명 과학의 지나친 발전에 의한 비극'을 다루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지는' 비극을 다룬 이 소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제시한 과학적 유토피아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분명히 알려준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곧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마치 두 개의 느긋한 나침반의 바늘처럼 그 다리는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북, 북동, 동, 남동, 남, 남남서, 그리다 다시 몇 초 후에는 전처럼 서서히 왼쪽으로 회전했다. 남남서, 남, 남동, 동(p.328)……."

 

 3. 그리고 저항하는 인간의 죽음- 『우리들』

 

 (이미지 대신 관련 리뷰 주소를 올림)

 

 http://cafe.naver.com/openbooks21/564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은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가장 먼저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작가들 중 하나이다. 어쨌거나 자먀찐의 『우리들』은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슬픈 결말을 가진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번호'로 불린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개인으로서의 존재', '개인 그 자체'의 상실이다. 결국 이 작품의 주인공인 D-503도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위 주소를 참고하시길.

 

 

 5. 유토피아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그렇다면 진짜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까? 모어의 정치적 유토피아에 있을까?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에 있을까? 아니면 조선인의 유토피아에 있을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 나름대로이다. 결국 유토피아는 생각하는 사람 나름대로이다. 유토피아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이 유토피아라고 여겨진다. 결국 유토피아도 궁극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4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여기에 새겨놓으며 이 리뷰를 마치겠다.

 

 "모든 종류의 앎과 선택이 어떤 좋음을 욕구하고 있으므로, 정치학이 추구한다고 지적했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eudaimonia)'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과 '잘 행위하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동일한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령 즐거움이나 부나 명예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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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숙한 번역이지만, 잘 봐 주십시오) 

  (추천의 글 옆에 있는 글. 나는 그것을 저자가 썼으므로 '저자의 글'이라고 부르겠다.)

  

 엄마에게, 엄마는 제가 풀이 죽을 때마다 저를 위로해주셨죠. 

 아빠에게, 아빠는 로마사에 대한 저의 장황한 이야기를 들여주셨죠. 

 나의 앵무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너는 로마에서 나를 즐겁게 해 주었지. 

 

 그리고 나의 친구들 역시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들 중 몇 명에게 나는 줄거리를 밝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말해 준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어찌됐든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고, 이 말은 아직도 나를 격려하고 있다. 까다롭지 않게 부탁한(?) 나의 친구들인 손정윤, 한나 남현정, 정다혜, 유성주, 그리고 임예윤이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또한 나의 모든 친구들과 나의 소설을 흥미롭게 받아주신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비록 공간(페이지)의 제약이 있어 그들의 모든 이름을 여기에 명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나를 위해 나의 책을 출판해 줄 수 있도록 적지않은 비용을 들인 일송북 출판사와 소중한 비판을 해 주신 오영숙님께. 

감사드린다. 

 

  

 역사적 기록(Historical Note) 

 

 스파르타쿠스 전쟁, 또는 3차 노예 전쟁은 가장 모호한 전쟁 중 하나이다. 그것은 노예 무리가 무엇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기록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만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로마인들이 “정확히” “단지” 노예에 의한 반역을 무력으로 짓밟는 것을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많이 살펴보았다는 사실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렇게, 반역에 대한 사실을 써내려가는 것을 그들이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의 역사에서 일부 로마의 고전 작가들, 아피아와 플루타르크와 같은 사람들이 3차노예전쟁에 대한 사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서로 크게 다르다. 노예 군대도 알지 못했던 동기 부여-아피아는 그것이 로마 스스로의 조화라고 주장했다, 한편 플루타르크는 스파르타쿠스가 그저 이탈리아와 갈리아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피아와 플루타르크 둘 다 반역이 더 일찍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에 다소 동의했다 그들에 따르면, 기원전 73년에 70명의 검투사가 렌툴러스 배티애터스의 검투사 학교에서 도망가 그들의 검투사의 무기를 사용하여 카푸아에서 고대 로마 군단을 쳐부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이 카푸아, 캄파니아, 베수비오 화산을 근거지로 삼아 그 주변의 부유한 지역들을 약탈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로마인들은 노예들이 아주 무의미한 일을 진짜 위협보다는 오히려 죄에 가까운 어떤 것을 고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 해가 지난 후, 로마 원로원은 가이우스 글라디우스 글라베르 같은 집정관을 보내 반역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로마인들이 검투사들을 위협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조직적인 군대를 명령하는 글라베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용군은 3000명의 남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글라베르는 오직 산으로 가는 길을 봉쇄하는 것만 알고 있었고 노예들을 굶겨 죽이는 것을 원했다. 비록(글라베르가 산으로 가는 길을 봉쇄했더라도-필자) 스파르타쿠스는 그가 가진 것을 실행할 계획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줄과 사닥다리를 만들어 덩굴 밖에서 그것을 사용하여 글라베르의 무리 맞은 편의 절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노예들은 산의 기슭로 이동하여 이상한 낌채를 못 채고 있는 글라베르 곁으로 가 로마군을 완파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글라베르의 군대와 바리니우스의 군대의 살육은 하루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글라베르의 패배(혹은 죽음-필자)를 들은 후, 원로원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에게 정규군의 명령권을 주고 검투사를 물리칠 것을 그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바리니우스가 반나체로 폭포로 도망친 부분은 사실이다-그는 친구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반역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바리니우스의 패배 이후,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은 기원전 73년의 겨울을 놀라, 너세르아, 더리, 그리고 메타폰튬과 같은 다른 도시를 정복하는 데에 보냈다. 노예들의 반역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 크릭수스, 오이노머우스, 간니쿠스는 별 문제로 하고 비록 오이노머우스는 언젠가 겨울에 지긴 했지만 말이다(?). 

 기원전 72년 봄에 원로원은 마침내 반역자들에게 루키우스 겔라우스 퍼블리콜라와 그네이우스 콜리넬리우스 렌툴루스 하의 집정관군을 파견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이 책략의 의도에 대해 나는 크라수스의 명령하에 놓인 겔리우스, 렌툴라스 그리고 바리니우스를 두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편, 반역자들은 두 무리(또는 군대-필자)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있는 무리이고 다른 하나는 크릭수스의 명령하에 있는 무리이다. 이 사건의 정확한 동기 부여는 알려지지 않았다.  

 겔리우스는 크릭수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일의 경과 과정에서 크릭수스를 죽였다. 후에 일어난 사건은 분명하지 않고 아피아와 플루타르크에 의한 원전 때문에 모순되었다(어쩌면 모순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다른 사건으로 언급된다는 원천). 

 그들의 기록은 합의를 이루었지만, 기원전 73년에 일찍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그의 명령에 8개의 정규군과 함께 집정관을 비난했다. 가장 큰 대립은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피세눔 근처에서 일어난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대립이다. 여기서 그는 반역자들 뒤에서 책략을 짜는 뭄미우스에게 두 군대를 주고 그에게 노예들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뭄미우스는 불복종하여, 두 군대를 완패시키고 말았다. 크라수스는 이것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간신히 이겼다. 비록 로마인 피해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크라수스는 이 전투 후에 대량으로 죽였다고 보고했다, 비록 역사학자마다 각기 다른 대량학살된 로마인들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것 또한 이 전투 후에 아피아는 3000 군단의 병사가 포로에 의한 반역자들이 힘 있게 싸우고 검투사답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피세눔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진 후에, 그를 수송시키라고 해적과 협상했고 그를 시칠리아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는 일의 경과 중 그들을 배신했다. M.J. 트로우와 같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크라수스가 배신의 요소에 진저리가 났을 것이고, 스파르타쿠스가 제의했던 것보다 더 액수가 컸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레기움에서 퇴각 강행군을 했고, 그 곳에서 그들은 포위되어 이탈리아 반도의 발가락의 위에서 아래까지 있는 로마인에 의한 "휴먼월(Humanwall, 인간의 벽)"에 굶어죽었다. 그 후, 카스투스와 간니쿠스하에 있던 반역자들 중 일부는 휴먼월을 통해 깨뜨릴 수 있었고, 도망갔지만 끝내 죽거나 로마군의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스파르타쿠스는 레기움에서 80킬로미터 북동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로마 군대와 만나 마지막으로 그의 온 힘을 다해 군대에 저항하다가 패배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저항은 이 싸움에서 완벽하게 완패를 당한 것이다. 

 한편 폼페이 역시 전쟁에 참가하여, 퀴니투스 세르토리우스에 의한 반역을 정복한 후 스페인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화제에 오르는 동안 나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절대 카이사르의 임기기간이 사실상 3년 더 길다는 것으로 스페인에서 만날 기회에 넌더리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폼페이는 스파르타쿠스의 반역자들의 나머지를 살육하거나 포로로 잡지도 않고 완벽한 반역군으로 파괴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폼페이와 크라수스 둘 다 잇따르는 해인 기원전 70년에 영사에 선출되었다. 약 6000명의 포로들이 로마에서 카푸아의 아피아 길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리고 이야기에 따르면, 반역자들의 몸이 그들의 다른 노예들에게 죽을 거라고 경고한 것이 훨씬 후에도 십자가에 남아있다고 한다. 하여간 그것은은 이것(이 사건, 즉 3차 노예 전쟁-필자) 때문에, 로마에서는 다시는 또 다른 노예의 반역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로마인들이 많이 시도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며, 그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몸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진실이다. 

 

 

 충성(Allegiance)-나는 이것을 '등장 인물 소개'라고 부르겠다. 

 

 

 

 로마인들 

  

 

 

 -그네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퍼스 

 신분: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정상적으로 부르는 트리부네. 군대의 두 번째 사령관.) 

 관계: 크라수스의 조카, 루키우스, 티투스, 루키아, 율리우스 카이사르,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친구.  

 정부 고위층(자신보다 높은 신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필자): 크라수스, 수에토니우스. 

 

 -퀸투스 루키우스 막시무스 

 신분: 백부장(정상적으로 한 세기의 60명~80명의 사람을 이끄는 중간공직계급자.) 

 관계: 루키아의 형, 옥타비우스, 티투스, 스파르타쿠스의 친구. 

 정부 고위층: 크라수스, 수에토니우스, 옥타비우스. 

 

 -티투스 에이밀라우스 플라비우스 

 신분: 백부장 

 관계: 옥타비우스를 양자로 삼은 형.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 

 정부 고위층: 크라수스, 수에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신분: 집정관(고대 로마 공화 정체에 해마다 선출되는 행정 장관, 하위 신분이지만 대강 같은 영사 구실을 한다. 대부분 군인과 관계가 있다.) 

 관계: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옥타비우스의 삼촌. 율리우스 카이사르, 수에토니우스의 친구. 

 

 -세르비우스 호르티우스 수에토니우스 

 신분: 지방 총독. 

 관계: 옥타비우스의 정부 고위층, 크라수스의 친구. 

 정부 고위층: 크라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신분: 재무관, 재판관(정부와 군대의 여러 영역에서 재정과 행정에 책임이 있는 고대 로마의 여러 공립 공무원의 종류). 

 관계: 마르쿠스, 루퍼스의 친구-옥타비우스, 크라수스, 티투스의 아버지.

  

 -카이킬리우스 

 신분: 퇴역 백부장. 

 관계: 옥타비우스의 친구. 

 정부 고위층: 크라수스, 수에토니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아 막시무스 

 관계: 옥타비우스의 친구. 

  

 -퀸투스 아리우스 

 신분: 높이 존경 받는 원로원 의원. 

  

 -그네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신분: 군대의 지휘관. 

 

 

 노예 군대 

 

 -스파르타쿠스 

 트라키아의 검투사, 노예 군대의 지휘관. 

 

 -크릭수스 

 군대의 두 번째 명령자, 무자비한 검투사. 

  

 -오이노마우스 

 크릭수스와 함께 군대의 두 번째 명령자. 몰지식한 해적, 검투사. 

 

 -다비드 

  유대인 검투사, 노예 군대에서 장교. 

 

 -셈프로니우스 

 스파르타쿠스를 도와주기에 동의한 로마의 해적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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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이 어때서? - 노경실 작가의 최초의 성장소설
노경실 지음 / 홍익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노경실 작가 최초의 성장 소설인 이 책은 평소 고전적인 작품만 읽는 나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정말 나는 이 책을 작가의 말처럼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청소년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바로 작품의 첫 부분이다. 

  "365×14=5,110.  

 '겨우 오천백십 일?' 

 연주는 휴대전화 뚜껑을 화닥 덮었다.  

 '14년이나 살아왔는데, 고작 5천 일 정도라고?' 

  연주는 사회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고민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연주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온 날을 계산하는 부정적 입장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연주는 이 소설 속에서 나날이 성장하여, 앞으로 자신이 살 날이 30,000여 일밖에 남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긍정적 입장이다. 또한, 이 다짐은 연주가 아픔을 겪는 과정 속에서 성장을 했다는 증거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가수가 꿈인 14살의 연주는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 민지를 친구로 사귀면서 즐겁게 지낸다. 한편, 연주는 자신을 도와 준 지섭 선배를 은근히 좋아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지섭 선배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학교에서는 일종의 '노래 대회'가 열린다. 지섭 선배를 떠나보낸 연주는 이윽고 그 대회를 준비하지만, 결국 떨어진다. 하지만 연주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 성장할 준비를 한다. 밝고 힘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말이었지만, 대회에서 떨어지는 부분은 약간 반전이었다. 그것도 아주 냉담한 문체로, "연주는 노래자랑대회의 예선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연주의 심리 묘사 역시 자세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중간 단계에 속한(정체성이 상실된 시기) 14살 연주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드러난다. 그리고 노경실 작가는 그 과정을 연주의 심리 묘사로써 밝혀낸다.

 "세상은 연극 무대인가?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니! 

 세상은 패션쇼 무대인가? 

 등장하는 사람마다 모두 나보란 듯이 잘난 존재들이니! 

 세상은 신생아 병동인가? 

 TV를 켤 때마다 어제보다 더 잘나고 멋진 인물들이 탄생하니! 

 아니면 다윈의 진화론대로 사람들이 진화해서일까?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대신, 이제는 사람이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p.20~21)." 

 

 "어쨌든 나는 '아직' 열네 살이고, '겨우' 열네 살이고, 어쩌면 '벌써' 열네 살이고, '어느새' 열네 살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p.122)." 

 

 "-그럼 도대체 몇 살 때부터 남자 선배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열여섯 살! 춘향이도 열여섯 살에 연애했잖아. 

 -열여섯? 바보냐, 넌 그 나이 되면 고등학교 준비해야 해. 너희 엄마는 네 성적을 알면서도 너를 특목고에 보내려고 하잖아!  

 -바보! 너 모르니? 

 -뭘? 

 -로미오와 줄리엣 알지? 거기서 줄리엣이 몇 살에 연애를 시작했는지 알아? 

 -몇 살인데? 

 -열네 살! 그리고 로미오는 거의 지섭이 선배 나이 정도이고! 

 -정말? 정말? 줄리엣이 열네 살이었어? 그럼 내가 비정상인 거 아니네? 

 -그럼! 줄리엣이 죽은 나이도 열네 살일 거야.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불행에 빠지는 것도 모두 열네 살 때에 일어난 거네. 그 말은 진짜 인생의 역사가 시작되는 게 열네 살이라는 거야? 

 -옳지, 옳지! 잘 알아듣는구나(p.154~155)."  

 

 "이거 하나만 기억해라. 너희가 울든, 웃든, 노력하든 포기하든, 주저앉든 다시 일어나든…… 시간은 단 한 번도 멈추거나 쉬거나 요령 피우지 않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만 가고 있다는 것을(p.166)." 

  

 "내가 살아온 날은 겨우 오천백십 일. 우리가 평균 백 살까지 산다면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은…….' 

 365×85=31,025. 

 연주는 휴대전화 뚜껑을 화닥 덮었다. 

 '앞으로 내가 살 날이 고작 3만 일 정도라고?' 

 85년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숨이 탁 막힐 정도로 길고 긴 날들인데, 날수로 3만 일이라고 하니 얼마 되지 않는 시간들로 여겨졌다.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하다 만 숙제도 해야 하고, 노래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갈 수만 있다면 미국에 가서 지섭 선배도 만나고! 이렇게 인생이 바쁜데 엄마는 지리산에 다녀와서는 만날 느림, 내려놓음, 슬로우 라이프, 버리기, 비우기를 말한다. 

 '엄마는, 어른들은 해볼 것 다 하고 살아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겠지만,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우리한테 그런 식의 삶을 강요하면 너무하잖아!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본 다음에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 아냐?' 

 연주는 엄마가 청소를 하고 있는 거실 쪽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p.250~251)."  

  

 (윗 부분은 작품의 첫 부분과 운율 혹은 리듬을 형성한다.)

 

 "그 때 연주의 가슴속 글에 응원을 보내듯 파란 시계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또, 다시…….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p.253)."  

 

 현대 사회는 순수함이 사라지고 '로스트 제네레이션(잃어버린 세대)'가 반복되고 있는 사회이다. 다시 한 번, 21세기 초에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가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와는 뭔가 다르다. 분명 그 때 젊은이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전쟁도 없고, 가난함도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 가고 있는가? 그들이 육체적으로 방황하고, 정신적으로도 방황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열네 살들은 학교에서 학원, 학원에서 학원, 학원에서 집으로 옮겨가는 삶을 반복하면서 몸이 지쳐간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왜 내가 이런 지겨운 삶을 반복해야 하지?'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할 생각이 그들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굴복된 열네 살들은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나쁘게 물들게 된다. 작품 속의 연주처럼 성장하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머러스한 철학자 같은 민지 같은 열네 살 역시 드물다.

 사람의 인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유년기, 청소년기, 성숙기(어른의 시기)로 말이다. 그리고 유년기와 성숙기의 중간인 청소년기는 매우 중립적인 관계에 놓였으며, 정체성이 쉽게 상실된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가장 첫 부분에 위치한 열네 살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또한 강하지도 못하다. 유년기의 첫 부분은 강한 자에 의해 보호받고, 성숙기의 첫 부분은 스스로 강하여 보호할 수 있지만, 청소년기의 가장 첫 부분, 즉 열네 살은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열네 살은 현대 사회의 '로스트 제네레이션', '잃어버린 세대'가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작품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나도 14살이기 때문이다. 14살의 설움이 무엇인지 안다. 14살은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서, 어린이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모두 날아가버린다. 그렇지만 14살은 성인도 아니다. 성인이 되려면 15살이 된 후, 자신의 생일이 지나야만 성인이 된다. 즉, 14살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혜택 같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시기이다. 어른들은 "이제 어른이니까 철이 들어야지"라고 14살의 '어른'에게 말하면서도, "너희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참견 말아"라며 14살의 '어린이'에게 말한다. 하지만 14살은 온통 그 설움을 참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 성장 소설은 당당하게 "열네 살이 어때서!"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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