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피노키오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카를로 콜로디 지음, 엔리코 마잔티 그림, 이시연 옮김 / 더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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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읽었던 대부분의 동화는 원작과 큰 거리를 둔다. 많은 곁가지 이야기들이 삭제되거나 수정되고, 행복한 결말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안데르센, 이솝, 그림형제의 신비한 이야기들은 현실의 잔혹한 면을 동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피노키오』는 이러한 괴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노키오가 겪은 모험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선행의 보답과 우정, 착하고 정직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 등은 아이들을 위해 읽히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원래 이 이야기는 목각인형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독자들의 갖은 항의로 원작자인 카를로 콜로디는 푸른 요정을 등장해 피노키오를 위기에서 구한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에도 작가의 냉철한 시선은 남아 있다. 푸른 요정이 피노키오에게 버림받아서 여기 누워 있다는 묘사, 피노키오를 당나귀로 만들어 서커스에 내보내는 상인 등은 아이들의 동화로만 읽기에는 무거운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주제의식은 기존의 동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거나 다리가 짧아진다는 발칙한 상상은 피노키오라는 목각인형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현실이 된다. 세상을 모르는 피노키오는 진실된 미숙함 속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푸른 요정이 그를 소년으로 만들어주었을 때, 피노키오는 더 이상 어리숙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간직하는 것이라고 소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피노키오』 내내 강조되는 진실된 태도는 사랑과 우정을 완성시키는 것이 솔직하고 진중한 마음임을 제시한다.


 작품 내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열거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만, 상어가 삼킨 제페토 할아버지를 피노키오가 구한다는 거대한 이야기의 틀 안에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에 간 피노키오가 해변에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과 맞서는 장면이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피노키오의 모습 때문에 선생님에게 낙인이 찍히고 그를 괴롭히다가 제풀에 다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웃기면서도 안쓰럽다. 또한, 피노키오의 책을 뺏어서 해치려다가 도리어 경찰에게 오해받는 모습 등은 피노키오라는 이방인을 다른 대상에 적용했을 때, 인간 사회에서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이질적인 존재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집단에 속해 있을 때는 내가 그 존재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 대면했을 때 그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나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소설 속에서는 순진한 아이들이 그랬지만, 책장을 벗어나면 자신이 피노키오보다 더 성숙하다고, 더 인간답다고 믿는 어른들이 타인을 억압한다. 


 소설가의 의무는 인정하기 싫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동화를 쓰는 작가들은 대부분 미래의 세대들이 어른의 실수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말을 한다고 상대방의 코가 길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피노키오는 미숙한 존재로서 세상에 던져진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 튀김으로 만들고, 속여서 상품으로 팔기에 바쁘다. 피노키오가 소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이전보다 성장했다고 해서, 세상이 그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똑바로 선다고 사회도 바르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만들고 있다. 2년간 상어 뱃속에서 살아남은 제페토처럼, 한없이 아이들을 품어주는 푸른 요정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년이 된 피노키오는 타락과 희망 중 어떤 길을 걸어갈까?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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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범우문고 259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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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과 상관없이 눈으로 덮여 있는 공간이 있다. 아니, 그렇게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사방이 하얗게 덮여 모든 소리까지 얼어버린 땅에 설 때면 괜시리 숙연해진다. 『설국』에 처음 방문한 여행자들은 눈에 대한 저마다의 인상을 간직한 채 입장한다. 누군가에게 눈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기억이요, 또 다른 이에게 눈은 악몽의 전조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눈은 따뜻함의 다른 표현이다. 눈이 내릴 때가 그칠 때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통념 때문만은 아니다. 환경이 추운 곳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해진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본 문학을 시도한다. 일본의 감성이 맞지 않다거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냥' 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히가시노 게이고나 하루키 등의 유명한 현대 작가들의 소설들은 가끔 읽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오랫 동안 사랑받는, 이른바 고전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인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숙원을 해소한 기분이다.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아름답게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온천장에서 머무는 시마무라와 그가 만나는 게이샤들은 그들을 둘러싼 설국만큼이나 하얗다. 아름다우나 어딘가 비어 있다. 인물 간의 대화들이 특히 그렇다. 눈이 펑펑 내리는 길을 혼자 걸을 때 느끼는 적막과 쓸쓸함이 묻어 있다. 소설 말미에 누에고치 창고에서 불이 나는 순간에야 설국은 생동감을 확보한다. 고마코와 시마무라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대화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도 같은 소리"이다. 고마코가 좋은 사람이라는 시마무라의 말에는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을까? 독자는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도 빈말일 수도 있고. 


 그리하여 드디어 흰 지지미를 다 바랬을 때 아침해가 떠올라 붉게 비치는 광경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가 없다. 남쪽 따뜻한 고장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다고 옛사람도 적어놓았다. 또한, 지지미 바래는 일이 끝난다는 것은 눈고장에 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으리라(171).


 『설국』을 읽을 때는 색채가 주는 인상을 기억하면 편리하다. 하얀색이 아닌 다른 색은 설국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겨울이 하얀색이라면, 봄은 빨간색이다. 온천장에서 난 화재는 봄을 앞당기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봄이 온다는 것은 시마무라가 떠나야 하며, 고마코와의 사랑도 끝남을 의미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존재한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이 있어야 할 자리가 온통 비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환상으로 살아가는 나그네라면 떠남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은하수는 아름답게 비어 있는 것을 대표한다. 별과 은하수는 아름답게 빛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다. "은하수는 또 이 대지를 안으려고 내려오는 것 같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았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아름답다고 해서 별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온도에 타버리고 만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공포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색깔에 반응한다. 낯선 색은 거부감을 일으키고, 눈에 익은 것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것도 괜찮다. 어떻게 우리가 본질에 닿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아름다우나 비어 있는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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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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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듯한 교육을 받고, 반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진 남자가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인생에 대해 무난하다, 평범하다, 혹은 성공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있다. 남들이 절대 감지하지 못하는 비밀로 인해 그는 무너진다. 남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유년 시절에 목격했던 폭력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한다. 평범하지 않은 요소가 자신을 침범할것이 두려워 도망쳤지만, 이미 폭력은 남자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시대 상황 역시 그러한 인식을 바꿔놓았음도 드러난다. 물론 카렐 차페크는 이 작품에서 남자의 내면을 그리는 데에 더 집중한다. 


 『평범한 인생』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지점은 20장부터이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여겨진 남자의 삶에 균열이 시작되고,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나 그동안의 삶에 대해 질문한다. 먼저 "평범한 인생이 대체 무엇인가?"이다. 20장이 시작하자마자 서술자는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올바르고 유일한 목표란 가능한 한 출세하여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쓰고,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서전을 쓰고 있는 남자는 철도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고위 관료의 지위까지 얻는다. 하지만 승진, 나아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사건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때문에 높은 지위를 향해 달려갔던 것일까? 


 액자 소설 속의 주인공은 분명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철도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이고 명예로운 지위를 가졌고, 역장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사랑과 사회적 평판을 모두 얻었다. 평범하다는 말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즉,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어떤 이에게 평범한 인생은 과분하고, 또 다른 이에게 평범한 인생은 모욕이다. 서술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특별한 것이 없는 인생으로 생각할까? 아니면 괴물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나 세상 속에 어떻게든 조화롭게 지낸 사람으로 여길까? 적어도 또 다른 자아와 싸우는 장면만 보면 후자로 보인다.


 카렐 차페크는 후기를 통해 형제애와 다양성을 외쳤고, '나'가 아닌 '우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평범한 인생』은 분명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액자의 바깥에는 정원이 있고 담당 의사는 진심을 다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SF 문학의 대가로 여긴 카렐 차페크의 새로운 면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특별한 소재가 없어도,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여러 모로 씁쓸한 면이 남는다. 유년 시절의 어긋난 기억이 끝내 개인을 괴롭히는 모습이 그렇고, 또 다른 자아가 마치 완벽한 타인처럼 남자를 얽매는 묘사들이 그렇다. 그것이 평범한 인생이라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더 절망적이어야 할까?


 타인을 이해하는 시작점은 결국 자신에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감정을 이입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린다 해도, 상상력의 한계가 존재한다. 자신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우리' 안에는 반드시 내가 있다. 나를 뺀다면 '너희'나 '그들'일 뿐, '우리'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미워도, 타인에 비해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도 어떻게든 자신과 함께 가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모습이 곧 나의 일부이다. 누군가를 항상 용서할 필요는 없어도, 그들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본다면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삶이란 두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니까. 그 싸움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자신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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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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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이 동원된 디스토피아에 정치, 종교적 상징을 추가했다. 거기에 시나리오 형식을 차용했다. <유인원들의 행성(The Planet of the Apes)>에 상당한 영향을 준 듯하다. 호언장담하는 문구에 비해 오타가 상당히 거슬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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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짐 열린책들 세계문학 266
조셉 콘래드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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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나 모임에서 다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지닌 사람은 흐름에 따라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인원이 모이는 일이 줄어들었을 때, 사람들이 눈을 돌린 것은 OTT와 유튜브였다. 그들은 이야기의 바다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또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이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 더 강렬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내가 이야기를 이끌거나, 그 흐름에 완전히 따라가야 몰입이 잘 되는 법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재생되는 것을 사용자가 주도하는 경험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컨텐츠를 추천하고 관람하는 이유는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로드 짐(Lord Jim)』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인 조지프 콘래드를 알게 된 계기는 잭 런던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선원 생활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작품에 담긴 뱃사람의 면모에 감탄했고, 특히 잭 런던은 공개적으로 그의 작품에 찬사를 남겼다. 게다가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의 명성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소설 아닌가? 그래서 그의 작품들 중 무엇을 먼저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전반부의 이야기를 보고 이끌리듯 책을 집었을 것이다. 뛰어난 항해사 짐은 파트나호를 타고 가던 중,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승객은 800명이지만, 구명정은 일곱 척뿐이었다. 짐은 고민하다가 승객들을 깨우지 않고 구명정으로 몰래 빠져나간다. 하지만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선장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은 행적을 감춘다. 결국 짐만 재판정에 서서 증언을 한다. 당연하게도 유죄가 선고되고 짐은 항해사 자격을 잃은 채 고국을 떠나게 된다. 그러던 그가 파투산에 정착하고 그곳 원주민을 다스리는 '로드 짐'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속을 종잡을 수 없는 행적으로 방문자들과 원주민들 모두의 원성을 산 그는 총에 맞아 쓸쓸히 사망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말로라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콘래드는 이것을 소설이 아니라, 어떤 구전된 이야기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전반부 이야기의 중심 소재인 파트나호 사건을 실화에서 끌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후반부 이야기는 기존의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상상력의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가 자신도 인정했듯이, 전반부의 이야기와 후반부의 사건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정확히 말해 말로의 증언을 끝까지 경청하고 나면 알게 된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영화나 책의 서평에 적힌 대략적인 줄거리와 감상, 비판점을 보고 난 후, "그 작품을 봤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말이 통하기도 한다. 직접 작품을 감상한 사람도 사소한 사항들은 놓치기 마련이고, 대략적인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야기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흐름이 있고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을 때 작품에 대한 인상은 희미해지겠지만,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더 오래 남으리라. 조셉 콘래드는 짐이 <우리 중의 한 명>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하지만, 말로야말로 독자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끈기있게 기억하고, 시작한 말을 끝마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는 인생과 같다. 시작된 이상 반드시 끝난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짐의 고민과 선택, 후회와 도피, 지배와 최후는 각자의 매력적인 지점이 있다. 독자는 원하는 만큼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흥미가 떨어진다면, 즉시 책을 덮고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린 다음, 먼지가 쌓일 때까지 내버려둘 수도 있다. 만약 계속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루만에도 가능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토록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큰 특권이다. 모두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스릴 주도권이 있다. 컨텐츠가 넘치다 못해 만연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에 대한 인식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이유이다. 


 이 소설이 처음 책의 형태로 나왔을 때, 작품이 나를 이끌었다는 말들이 있었다. 어떤 평론가들은 단편소설로 시작된 이 작품이 급기야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한두 명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적 증거를 찾아내고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그 사람들은 서술 형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한 사람이 그토록 오랜 시간 혼자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내내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상황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약 16년을 이 문제로 숙고해 보았지만, 아직도 그 주장에 수긍이 되지 않는다. 열대와 온대 지역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모험담을 주고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하나의 모험담만 담겨 있으며, 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해 몇 차례 중단되기도 한다. 듣는 이들의 참을성에 관해 말하자면,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처음부터 가정되는 필수사항이다. 재미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나는 애초에 이 이야기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p.577~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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