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콘서트 KTV 한국정책방송 인문학 열전 1
고미숙 외 지음 / 이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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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은 좁은 길이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지만 가야 하는 길, 그 목적지가 행복임을 알면서도 과정의 고통이 두려워 꺼려하는 길, 인생에 쉽고 빠른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떈 이미 인문학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어 보인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옛날에 사람에 대한 학문을 배우지 않았을까? 『인문학 콘서트』는 이러한 후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넓은 길로 가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본래 이 도서는 KTV의 「인문학 열전」에서 글 13편을 뽑아 만들어진 책인데, 이 13편은 다양한 인물들의 주장으로 인해 제각기 존재하는 것 같지만, 마치 비빔밥처럼 한데 어우러지면서 그 자체에선 만들 수 없었던 놀라운 맛을 만들어 낸다. 이 중에 몇 가지 반찬을 골라내 본다.

 

 첫 번째는 '통섭의 길'을 제시한 최재천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통섭이란 개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본래 '통섭(consilience)'은 휴월의 저술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이것을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지식의 재통합』이라는 책을 냄으로써 재조명되고, 국내에는 그의 제자이자 열전의 게스트인 최재천이 번역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통섭의 유래만 알 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 안 가, 생물학 박사인 그는 그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합침입니다.

 그렇자면 삶에 어떻게 통섭을 적용해야 하는가? 그는 학교 교육을 예로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는 과목만 공부하다 보니, 그것을 다른 분야에 조금만 응용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외국의 학생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스스로 탐구하지 않는다. 학문의 통섭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노력이 우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섭해야 하는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길이 나온다.

 

 두 번째, '생명의 길'을 보여준 차윤정은 통섭의 방법을 보여준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는 성선설이 깔려 있어야 한다. 측은지심, '인(仁)'의 사랑이야말로 통섭으로 가는 열쇠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윤정이 말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의미가 크다.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그녀를 위한 시를 한 편 써 보았다.

 

 〈숲 속에서〉

 숲속을 걷는다.

 할머니와 함께.

 오솔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

 아마

 나무일 거야

 

 저 나무가 무슨 나무

 은행나무

 저 나무가 은행 나무

 생명나무

 수많은 할머니들을 내려다보며

 그늘이 되어 준 할머니

 

 그녀는 죽었지만 오늘도 그곳에 서 있다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이제 할머니는 없지만

 할머니가 있었던 땅에 서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저 멀리서 더글라스 전나무의 고독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하얼빈 숲에서 울었다

 높이 뻗은 나무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명을 위해 나의 양분을 공급하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내가 생명이 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인문학의 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도 가려 하지 않지만, 그 곳이 행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책읽는사회만들기' 대표 도정일 교수다. 세 번째, '인문학의 길'의 핵심 주장은 "고전을 읽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왜? 인문학은 쓸모 없어. 고전은 옛날 이야기 아니야? 도정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평생 고민하는 문제(삶의 유한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고전은 제공한다. 그리고 당신이 고전을 읽는 순간, 과거의 기록이었던 그 책이 당신 앞에 실존하여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보여줄 것이다. 선택은 물론 당신의 몫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나는 대답해야 한다. 통섭의 길, 생명의 길, 인문학의 길. 어느 쪽으로 가든 고통이 따르게 됨을 알고 있다. 오늘날은 갈등의 세상이고, 낱생명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인문학이 점점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종교의 화해와 온생명이 필요하다. 이 콘서트의 주제는 무엇인가? 콘서트를 감상한 사람이 그것을 감상만 한다면 그 사람은 콘서트를 보지 않은 것이다. 개그콘서트를 보고 유행어를 따라 하는 것도 참여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인문학 콘서트를 봤다면 인문학적 삶의 자세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답이 나왔다.

 좁은 길로 가라. 타인을 위해 삶의 양분을 공급함으로써 오히려 생명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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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7편 은어가 무의미한 장인 줄 알았다. 빅토르 위고의 잡설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 말이 아니었을까?

 

 

 

 

 

 

 

 

 

 

 

 작자는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 말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아무것도 없이 고생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할 것, 그들을 위로할 것, 그들에게 공기와 빛을 줄 것, 그들을 사랑할 것, 그들을 위해 널찍하게 지평선을 펼쳐 줄 것, 온갖 형식으로 아낌없이 교육을 베풀어 줄 것, 그들에게 부지런한 에를 보여줄 것, 결코 게으른 예를 보여주지 말 것, 보편된 목적의 관념을 증대하는 동시에 개인의 짐을 덜어줄 것, 부를 제한하지 말고 가난을 제한할 것, 공중을 위한, 민중을 위한 넓은 활동 분야를 만들 것, 브리아레우스의 100개의 손처럼 피로하고 여윈 자들을 사방에서 어루만져 줄 것, 공장을 모든 기술자에게 개방하고 학교를 모든 재능에서 개방하고 실험실을 모든 지력에 개방하는 위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집단의 힘을 쓸 것, 임금을 높일 것, 노고를 덜어 줄 것, 채무와 채권을 평균화시킬 것, 다시 말해 향락을 노력과 균형을 이루게 하고 만족을 요구와 맞게 할 것, 한 마디로 말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한층 큰 광명과 복리를 사회 조직에서 끌어낼 것, 이것이야말로 동정심 많은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국민의 첫째 가는 의무이며 이기적인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정치의 급선무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쌍한 사람들, 즉 프랑스 시민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며, 빅토르 위고가 평생을 달리며 추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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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납세라는 것은 국민의 동등한 의무로서, 세금을 많이 내는 자가 의정에 뽑힐 권리를 가지며, 세금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국민 자격을 잃는 것이 각국의 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와 반대로 세금을 내는 자는 천하고 자격이 없으며, 세금을 내지 않는 자가 귀하고 권리가 있었다."

 -박은식, 『한국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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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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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in(접두사): 한계, 문턱

 

 <참말 하느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

 

 이윤기는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살았던 시대는 달랐지만, 그의 의식에는 언제나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성찰한다. 에피소드처럼 나열된 의식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한 전제가 되고, 페이지가 더할수록, 문을 향한 달림은 빨라진다. 어디를 향한 문인가? 창세기에 묘사된, 야곱의 꿈에 나왔던 하늘의 문이다. 그 문이야말로 이윤기가 평생을 추구했던 길이요 삶이요 진리였다.

 

 도대체 이윤기, 라는 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소설가도, 번역가도, 시인도,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나는 그를 '하늘의 문턱에 선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밖에 갇힌 자"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허물로 낙원을 잃고 밖에서 그 허물을 한하며 이를 가는 자. 열쇠가 들어 있는 낙원으로 열쇠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자. 따라서 문을 부수지 않고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는 자……." 이것이야말로 이윤기의 모습 그 자체이다.

 

 본래 『하늘의 문』은 1994년에 출간된 이윤기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담긴 소설이다. 

 

 『하늘의 문』에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다분히 투영되어 있다. 국토를 도보로 일주하려는 야망과 베트남 전 참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겪는 문화의 차이에 대한 깨달음,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 이러한 부분은 번역하듯 묘사되어 있어 자서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자전적인 면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기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작품들이 곳곳에 숨어 하늘의 문으로 가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윤기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말은 늘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이 세상의 사물은 어차피 개인의 경험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히기 마련이므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모두 자전의 운명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것 역시 바른 방식이 아니다. 이윤기는 이 책 속에서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하늘의 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바뀌어야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의 문』은 결국 고백록이다.

 

 한 마디로 이윤기는 그리스 인 조르바

이다.

 

 최근에 나는 이윤기의 딸, 이다혜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2013년에 사서 1년만에 『하늘의 문』을 완독했다. 그 동안 나는 정말로 즐거웠고, 이윤기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그를 소리꾼, 조르바, 똥폼의 사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문턱의 남자'라고 부른다. 사실, 난 아직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문턱"이라는 말을 내 삶에 쓸 수 있다면, 그 때는 알게 되겠지.

 

 limin: 문턱, 경계.

 문턱: 1.문짝의 밑이 닿는 문지방의 윗부분.

 2. 어떤 일이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려는 무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limin으로서의 문턱: 두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문턱의 남자는, 이분법의 세상에서 벗어난 하늘의 남자, 야곱인 것이다. 헬라인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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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독에서 벗어나시옵소서. 이제서야 그대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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