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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나는 종종 아무도 없는 폐허 속을 홀로 걷는 상상을 한다. 모든 질서가 붕괴된 종말을 목격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말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야 하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내가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어쩌면 종말 이후의 삶은 세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로드』의 부자가 그토록 살기 위해 투쟁한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작품의 제목인 로드(Road), 즉 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름 모를 두 남자는 어떤 위협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닥칠 때마다 길에서 벗어나 몸을 피했다. 남자가 '나쁜 사람'들이라 부르는 낯선 무리들도 모두 길 위를 지나갔다. 이처럼 길은 파괴된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길을 통해 목적지로 나아가고 길 위에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다. 언제나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만남을 이어간다. 즉 길은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시련의 공간인 동시에 희망의 지표인 것이다.
익명의 부자가 살아남으려 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잿빛으로 가득한 땅, 부식된 건물들과 녹아버린 시체들로 채워진 도시,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기대를 철저히 삼켜버린 검은 바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정적의 시대이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코맥 매카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우주적 묘사를 통해 태양의 폭발로 인한 재앙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계속 걷는다. 그것은 아마 서로를 위한 투쟁일 것이다. 만약 남자 혼자 살아남았다면 그는 길 위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남자의 힘과 행운, 그리고 타인을 향한 소년의 자비가 그들을 또 다른 희망으로 이어주었다. 이미 불조차 죽은 세상이기 때문에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득 남아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떠올려 본다. 우리에겐 어떻게 죽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이다. 선택은 여러 가지다. 남자의 사랑, 소년의 순수함,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들이 추구하는 가치, 이들 중 어떤 것을 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답을 창고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길 위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코맥 매카시가 제시한 흑백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훨씬 많은 색깔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