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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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가 소설을 구상한 계기는 9·11 테러였을지 모른다. 전세계에 탈레반이라는 무장단체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국가를 각인시킨 그 재앙은 분명 미국에 살고 있던 작가의 일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떠나 온 고향의 추억과 파괴된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고, 마침내 잊힌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다시 찾으려고 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과거의 파편을 끼워맞추는 하나의 여정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자전적 모습을 반영하는 주인공 아미르에게는 죄책감에 대한 신념이, 바바에게는 명예에 대한 신념이, 하잔에게는 충성에 대한 신념이 있다. 이들 중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사는 이는 누구인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각자의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려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할까? 어쩌면 천 번, 아니 그 이상일 수 있다. 이런 실패 속에서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단어 하나다. 인종도, 종교도, 심지어 시간의 벽도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그 한 마디로 무너진다. 예전에 존재하던 마을의 모습은 사라지고 탈레반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참혹한 현장을 지나면서도 아미르는 과거의 회환 속을 맴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속죄할 방법을 찾는다.
 
 어렸을 때 아미르는 스스로를 아버지인 바바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고, 강인하고 진취적인 아버지와 달리 자신을 나약한 배신자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바 역시 부끄러움을 숨긴 채 살아가는 약한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아미르와 바바가 같은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나는 그 교차로에서 그들과 만났다.
  결국 나는 파쉬툰인이었고 그는 하자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였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기어다니는 법을 같이 배웠다. 역사, 인종, 사회, 종교 중 어느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p.40)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우정, 그것은 나의 신-너의 신, 주인과 하인의 이분법 사이에 놓인 문턱이다. 나는 언제나 우리가 문턱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직 그 문턱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분명 그것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이 우리를 평등하게 만들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게 한다.


 『연을 쫓는 아이』는 사랑이 때로는 인생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소년의 미숙한 우정이 시간이 지나 한 어른과 한 소년의 삶을 완전히 이어준다. '연'은 그저 연일 뿐이다. 여기에 어떤 상징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헛되리라. 중요한 것은 아미르가 한 소년의 마음을 열기 위해 과거로 떠나, 어린아이처럼 달려갔다는 사실이다. 나는 과연 그런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자책한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위험한 짓이다.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데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자신에게 짐을 떠맡긴 자는 그 짐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법에 있어서 바바와 나는 생각이 같다.

  그 모든 것이 속죄하고자 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게 진짜 구원이다. 죄책감이 선으로 이어지는 것 말이다. (p.444)


 사실 나는 여전히 선과 악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문턱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 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는 진실 말이다. 바바와 아미르, 라힘 칸, 하산은 성공했다. 남은 것은 달려가는 부자를 바라보는 나다. 여전히 이야기는 남아 있다. 아미르의 어머니를 기억하는 노인, 편견에서 벗어나 타인을 이해하게 된 파리드,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한 소랍, 그리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저 연을 왜 쫓아가지?"라고 말하며 비웃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럴 수 있다. 신념은 총알보다 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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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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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대상 수상작의 흥미로운 제목에 끌려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다시 한달을 지나 설산을 넘으면‘과 ‘완전한 항해‘였다. 전자는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려는 작지만 위대한 시도를, 후자는 훗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실존의 문제를 엿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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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를 비롯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독창적인 세계에 겨우 발을 디뎠을 뿐이다. 그래서 아직 내가 읽은 서사시를 리뷰하는 것은 조금 이른 일이다. 다만 여기에 『개미』에서 읽은 인상적인 구절만 남기겠다. 그와 나의 생각이 만나는 순간.


 


추리소설에 푹 빠질 수 있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요.

그런 바보들과 똑같은 야망을 갖지 말아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너만의 어떤 것을 찾아내어 진부한 삶을 뛰어 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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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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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나는 역사 공부에 몰두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 중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애썼고 교재뿐만 아니라 관련된 역사책을 찾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수능 공부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 자체에 흥미를 가졌기에 그런 노력이 재미있고 뜻깊은 기억으로 남은 것 같다. 시간이 좀 지나니 외웠던 연도도 기억나지 않고 역사적 인물의 업적도 희미해졌고 대신 한 가지 인상만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함석헌이 말했듯,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는 것.

 

 『위대한 패배자』를 읽고 난 뒤 다시 한 번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고난이란 곧 패배의 결과 혹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언급된 영광스러운 패배자나 치욕스러운 패자의 개인적인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비운의 문학 천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신기했을 뿐이다. 저자 자신도 인정한다. 개인의 역사는 승리하든 패배하든 위대해질 수 있지만 우리의 역사는 패배가 흉터로 남는다는 점을 말이다. 

 

 사람들은 패자에 열광한다. 희극보다는 비극이 인상 깊게 남고, 패자의 명예에 따라 때로는 승자가 영광을 잃기도 한다.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가보다 사후에 주목을 받은 화가나 철학자가 후세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준다.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추락한 인물의 이야기는 마치 전래동화처럼 대대로 타산지석이 된다. 또한 비극적 운명을 맞은 이들의 삶을 신화처럼 칭송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그들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는 결국 패배할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자신이 꿈꾸었던 목표나 사업을 포기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승리를 향한 치열한 경쟁이 없다면 수많은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패자를 승자보다 느긋하고 선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죽을 듯이 노력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승리한 자들만 기억되고, 패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 채 잊혀진다. 지금도 지하실과 도서관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 "당신은 실패할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라는 볼프 슈나이더의 외침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한 한민족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이미 커다란 패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일제강점으로 온 민족이 수탈당했고 이념 전쟁으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으며 지도자의 개인적인 욕심과 무지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모든 사람에겐 이 두 가지 상처가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다. 우리는 상처를 잊으려고 애쓰는 대신 그 패배를 인정하고 진정한 승리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즉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까지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추악한 승자들보다 위대한 패자가 낫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지만 패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패배자였다. 그래서 나는 도전할 수 있다.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실패한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것도 좀 더 영리하게 출발할 기회를. -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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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기리기 위해 인상깊게 읽은 구절들 몇 개를 적어본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p.13)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중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p.93).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p.98).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p.315).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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