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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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상상에 즐겨 빠지며,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자기 자신에게 병적으로 엄격하다. 그들이 쓰는 정신적 수고는 때로 그들을 병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 소설가는 너무나 태평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편협한 존재, 내지는 사회의 생산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도태된 부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혹자는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에 뭐라도 하라는 조소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에 진입한 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한가로이 소설의 영감을 구상하는 시대, 소수의 독자 또는 자기 만족을 위한 글을 쓰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짧다는 것을. 한때는 무모한 이상을 좇기도 했으나, 현실과 타협하면서 그 꿈을 포기하는 이름 없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이들은 멸종 위기 직전인 순수 소설가의 생태에 한숨을 쉴 뿐이다.


 나에게 잭 런던은 소설이 이상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소중한 작가들 중 한 명이었다. 알베르 카뮈, 조지 오웰 등의 20세기에 나타난 걸출한 문인들은 문학이 현실 도피나 이상의 맹목적인 추구가 아닌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요, 사회를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잭 런던은 자신의 유성과도 같은 삶을 통해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인생을 걸어 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독자를 위해,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소설가는 현실을 견뎌 내며 그가 겪었던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필요가 있음을, 그는 후기 과학 소설을 통해 드러냈다. 『암살주식회사』는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미완성된 후기작으로,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수작이다. 


 2020년대 초반부터 영화, 드라마, 웹툰, 웹소설을 망라하는 주요한 트렌드는 이른바 '사이다 서사'로 불리는 '정의 구현'이었다. 악한 인물이 더 잔인하고 비열할 수록, 그들이 몰락하는 서사는 컨텐츠를 소비하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독자들과 시청자들은 악한 인물을 '참교육'하는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며, 때로는 답답한 자신의 현실을, 때로는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절망적인 사회의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러한 정의의 구현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악한 이들은 대개 자신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으로 악인을 심판하던 고대의 법전이 연상되는 전개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로 '정의'의 구현일까? 자신을 정의라고 포장하는 또 다른 악의 반복이 아닐까?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 폭력을 감행한 이는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암살주식회사』에서 잭 런던이 던지는 물음이 이런 것이다. 사회적인 악한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들이 얼마나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는지 작가는 관심이 없다.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회주의와 자연주의를 신봉했던 그에게 인간의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으니까. 암살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자를 죽여 달라는 청부를 받으면, 그 임무를 반드시 수행한다. 오늘날 액션 스릴러의 단골 소재인 '사적 제재'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셈인데, 여기서 딜레마는 드라고밀로프와 그의 부하들은 "죽어 마땅한 자"의 범주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드라고밀로프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신념에 휩쓸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세운 이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기까지 한다. 누가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런던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판을 잠시 하고 싶다. 런던이 만든 메모 등의 여러 가지 맥락으로 보아, 드라고밀로프의 오른손인 하스가 마차 사고로 죽는 결말은 지나치게 허무하다. 또한, 단체의 근간을 흔들었던 윈터 홀과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의 사랑 이야기가 그녀의 아버지의 추적극과 따로 논다는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홀이든, 그루냐든 단체의 이상을 따라서 드라고밀로프를 독으로 살해하는 결말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드라고밀로프가 죽이지 못했던 하스가 끝내 그의 상사를 처단하는 결말도 좋았을 것이다. 작가가 생전에 완성했더라면 분명 그의 주요한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피시가 완성한 플롯도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암살주식회사』가 지닌 근원적인 물음을 변질시키지도 않는다. 암살주식회사의 인물들은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적 제재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하는 일에 주력한다. 심지어 그들은 살해를 사고나 자살 등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영향력이나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암살주식회사의 시작과 끝을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이 만든 이상의 왕국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현실을 전혀 바꿀 수 없는 이상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에게, 그들의 지식 수준이나 육체적 능력이 탁월한다 한들, 어떻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 드라고밀로프는 많은 부를 거머쥐고 있었으나, 그의 이상에 의해 사랑을 잃고, 동료를 잃었다. 신념의 차이로 동료를 죽이는 자를 나는 결코 옹호할 수 없다. 다르다면, 그대로 두어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 내 이상이 틀렸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자는 어리석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으면 쌓을수록 나는 이 땅에 주어진 현실을 감당해야 함을 느낀다. 궁극적인 이상과 비전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상 속에서 사느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지나친 이상은 우리를 눈 멀게 한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눈앞에 있는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은 이상으로 현실을 덮는 속임수가 아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으로부터 작은 희망은 출발한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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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 쉽게 풀어 쓴 신국원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신국원 지음 / IVP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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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주는 책. 쉬운 만큼이나 거기서 얻은 깨달음은 생각보다 쉽게 휘발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리를 알고자 했던 니고데모의 결단만큼은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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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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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사회적 통념을 지적하는 책들은 열렬한 지지를 받거나,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하기야 "당신 생각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책들에 마냥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이클 셸런버거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도 없고, 서점에서 우연히 끌려서 구매한 것이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도 했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그의 주장에 부족한 점이나 논리적 허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다만, 종말론적 환경주의, 나아가 환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인 나로서는 저자의 기획 의도에는 적잖이 동감하는 바이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과서나 공익 광고에서 배운 대로라면, 우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전기를 아껴 쓰며, 고기 섭취를 지양해야 한다. 얼마 전에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 육식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제로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에 재활용품만 사용하는 아날로그 인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지구를 지키는 데에 한층 더 기여하고 있을까? 슬프게도, 그것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빠르게 녹아가는 만년설과 한반도보다 커지는 쓰레기 섬, 몇 달씩 지속되는 산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좌절되곤 한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가?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인류가 병들어가는 지구를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고, 지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명을 모두 뒤엎는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다. 그들의 행동 방식은 환경 파괴의 앞잡이로 여겨지는 육식, 도시 개발, 그리고 원자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각 장마다 그것들이 사실은 환상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원전을 모두 해체하고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에 반박한다. 또한, 환경 보호를 내세우며 개발도상국이 성장하는 것을 원천에 차단하는 선진국의 위선을 고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의 요지일지도 모른다. 왜 환경주의자들은 호화로운 전용기를 몰고 다니며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부르짖는가? 어째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도시화를 가로막는가? 그저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마는 환경주의자들이야말로 지구를 진정으로 위험에 빠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이들은 걱정한다. 현재 농업, 어업 기반의 국가들마저 공업, 첨단 산업으로 전환하면 지구에 남아 있는 자원이 없지 않겠냐고. 식량 부족과 에너지 고갈로 현재의 인구가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지 않겠냐고. 글쎄, 그걸 인식하는 사람들은 아마 기존의 편한 생활(언제든 온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 원하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여건, 필요할 때만 일회용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의 힘으로 현재의 문화적 흐름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환경에 유해한 것들을 줄이려는 인식이 확산되면, 생산하는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원자력에 대한 지나친 옹호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사고가 날 확률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한 번 발생하면 생태계에 반영구적인 손상을 주는 것이 원전인데, 조금 비효율적이고, 저자의 주장대로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 해도 신재생 에너지로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재생 에너지가 도입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기대도 든다. 그리고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저자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다소 정치적으로 보인다. 본래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교육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데, 환경 휴머니즘을 주창하기에는 아직 보여준 것이 많이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에서 더 풍성한 논의가 나온다면, 그때 이 책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자연(nature)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연은 자기 통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내지는 진화하고, 기존의 종이 멸종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일부이다. 기후와 지구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도 점진적이고 순차적이다. 어떤 특정한 기간의 기후 변화를 놓고 '위기'나 '종말'을 언급하는 것은 지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아무리 현상을 보존하려 해도, 특정한 종의 탄생과 절멸은 필연적이다. 이것을 인식한 이들은 인간의 시대가 다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인류세'(anthropocene)의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요컨대, 인간을 생태계에 속한 일부로 보고, 그들이 멸종한 이후에는 새로운 종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주장이다.


 미래에는 어떤 시대가 도래할까? 그야 아무도 모른다. 기후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해서 전 세대가 조화롭게 풍요 속에 살아갈 수도 있고,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파멸적인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과학 기술과 자연 환경의 균형이 유지될 수도 있고,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에 대해 우리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지구는 그 명제를 증명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만족을 위한 명제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 지구는 당신의 생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지구를 지구스럽게 만들자. 해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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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 Pray, Love (Paperback)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원서
Elizabeth Gilbert 지음 / Penguin U.S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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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원서로만 읽은 책을 리뷰하는 것은 정말 간만이다. 워낙 유명한 책이기에 한 번쯤 읽고 싶었고, 에세이 형식의 여행기인 것을 알았기에 독해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예상대로, 엘리자베스 길버트(Elizabeth Gilbert)의 Eat, Pray, Love는 무리 없이 읽혔고, 생각 이상으로 작가의 재치와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다. 직접 접하면 그녀 특유의 유머러스한 톤과 솔직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으니, 나는 각 권마다 인상적인 장을 소개하려 한다.


 1권 4장은 신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낸 부분이다. 1권에서 저자는 이탈리아 여행을 배경으로, 이혼을 비롯한 과거에 신을 만났던 경험을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새롭게 만나는 사랑과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4장에서는 기도를 통한 신과의 대화를 보여줌으로써 이 책의 제목 중 하나인 pray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신을 믿지 않게 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은 다른 종교를 대하는 관점이나 글의 후반부에 나오는 초월적인 경험에 대한 노력의 발판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Eat, Pray, Love이 주는 의미는 관용(tolerance)이 아닌가 싶다. 나는 신을 믿기 때문에 식전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나에게는 '기도하고, 먹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먹고(나의 욕구를 채우고), 기도하고(종교적 체험을 시도하고), 사랑하라(주변 사람들을 만나라)'는 명령이 더 익숙하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마냥 비난할 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 역시 신과의 만남을 겪었고 단순히 그 믿음에서 떠난 것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비록 작가로서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울 수도 있는 과거와 솔직한 심경을 고백했으나 나는 여전히 그녀의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2권 57장에서 엘리자베스는 신들의 나라인 인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에 대해 피력한다. 

 믿음은 일종의 "그래, 나는 우주의 말들을 진작 받아들이고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미리 포용해"라고 말하기이다. 우리가 "믿음의 도약"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신성에 대한 어떤 생각에 동의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이성에서 불가지로의 대단한 발돋움이고, 나는 모든 종교의 학자들이 책들을 쌓아 놓고 당신을 앉힌 후 경전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진실로 이성적임을 얼마나 성실하게 증명하려 하는지 관심 없다. 만약 믿음이 이성적이라면, 그건 정의상 믿음이 아닐 것이다. 믿음은 당신이 보거나 증명하거나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은 얼굴을 먼저 들이밀고 어둠 속을 전력질주하는 것이다(p.233).

 믿음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만약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나에게 납득이 되는 것만 믿는다면, 그것은 거짓 믿음이다. 오히려 그것은 "합리적인 믿음을 가진 나"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에 가깝다. 한때 나도 신을 믿었던 이유가 그것이 세계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인격적 만남 이후,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이 세상이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님을, 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야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딥러닝으로 오류를 아무리 최소화한다 해도,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논리학 등의 학문은 지성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서 인간의 업적 중에 가장 대단한 축에 속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물론 그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힘과 지식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이 오히려 더 어리석다. '믿음의 도약'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믿음은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최소한의 자기를 지키기 위해 도약하지 않는 그 선택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다만, 날고 있는 이들에게 추락을 바라지는 않길 바란다.


 3권 83장에서는 유디(Yudhi)라는 친구가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저자가 만난 친구인데,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서 그 꿈을 펼치기 위해 뉴욕으로 갔고, 거기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지만,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 대한 엄격한 단속이 이루어지자,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탄하게는 아니었고, 아주 부당하게. 테러라는 역사적 비극의 한복판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이 세계의 부조리들에 대해 우리는 배운다. 인간 사회는 누군가가 피를 흘리면, 다른 누군가의 살점을 이용해 그것을 감쌀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피로 맺어진 악순환은 누군가가 자신의 살을 모두 내어주는 희생이 없으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다. 과학, 이성, 논리로 무장하고 첨단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과연 그 슬픈 굴레가 멈추게 될까? 많은 생각이 드는 에피소드였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높이만큼 풍경을 볼 수 있고, 자신이 아는 만큼만 상상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여행기를 보고 누군가는 가볍게 즐기고, 누군가는 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는 그것을 즐기면서도 그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기에 안도하거나 아쉬워 한다. 하지만 실화의 무게 앞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나는 숙연해진다. 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여행을 하는가? 거기에는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를 돌아다니며 저자는 분명 성장했을 것이다. "여행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시간에, 여행지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라. 그것이 어렵다면, 눈앞의 사람들을 사랑하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려보라. 그들의 시선이 어디에 향해 있는지 그제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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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과 루시엔 톨킨 문학선
존 로널드 루엘 톨킨 지음, 크리스토퍼 톨킨 엮음, 앨런 리 그림, 김번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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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현대 신화를 만들고자 했던 톨킨의 무수한 파편들 중 하나를 아들인 크리스토퍼 톨킨이 엮어내었다. 방대한 분량의 글을 정리한 노고 및 번역에 애쓴 역자에게 참으로 감사하나, 톨킨 마니아거나 책을 소장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 아니라면, 빌려서 하루만에 완독하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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