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니콜라 (양장) 꼬마 니콜라 1
르네 고시니 글, 장 자끄 상뻬 그림, 윤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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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 니콜라』의 내용은 대단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에 전율을 일으키는 서사도 없고, 이야기가 남기는 교훈도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있다. 때로는 짖궂기도, 더러는 순수한 그들의 사소한 여정이 이 두꺼운 책을 가득 채운다. 에피소드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기에, 나는 일상을 살아가며 꼬마 니콜라와 그의 유쾌한 친구들이 벌이는 이야기들을 가볍게 엿볼 수 있었다. 마치 프랑스의 어딘가에 이 장난꾸러기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작가는 이토록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헤아렸을까, 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어른들은 자꾸 자신의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직업이 교사든 그렇지 않든, 친자식이든 처음 보는 아이든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참 가혹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낼 권리가 있다. 물론 니콜라와 친구들이 벌이는 행적이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언제나 용인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면 학교 폭력 등의 사유로 처벌 받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제는 금지된 체벌로 그 대가를 치르긴 하지나 말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른들이 세운 기준과 가치관은 편향적일 때가 많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의견의 차이로 싸워도 서로의 말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인다. 중재하는 자가 나서면, 씩씩거리다가도 금새 잠잠해지곤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한쪽의 의견이 꺾일 때까지 도무지 굽히질 않는다. 그 양상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니콜라, 알세스트, 아냥, 외드, 조프루아와 같은 아이들이 없다. 있다 해도 금방 낙오되거나 변하고 만다. 개인의 다름을 존중해주지 않는 분위기와 성적이 '좋은 아이'의 기준이 되어버린 교육 현장에서 꼬마 니콜라의 재기발랄한 일탈은 처벌의 대상일 뿐, 그를 인정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가상의 인물이기에 너무 잣대가 느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니콜라처럼 학교에서 꼴찌를 밥 먹듯이 해도 위축되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용인할까? 부모든 교사든 어떠한 조치를 취해서 친구들과 분리하거나 그 아이를 '치료'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니콜라보다 어린 나이부터 아이들은 교육 시스템 속에서 획일하게 양산된다. '공부'라고 불리는 입시 제도에 대부분 순응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니콜라가 학급 친구들과 벌이는 말썽들과 좌충우돌한 여름방학의 시간들은 공부가 아니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눈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모든 과정이 곧 공부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그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한 가지 길로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기에, 마침내 부모의 간섭에 벗어났을 때 다시 그 미숙한 행동을 반복한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할 줄 알았지만,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배우지 못했다. 성공하라는 강요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만,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난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 세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니콜라와 같이 순수했던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시간을 돌려받지 못할 만큼 험난하게 발전해 온 시대의 결과이리라. 대한민국의 처참한 교육 현실에 대해 통탄하지만, 이것조차 최선의 결과일 수 있었다. 그 치열한 교육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지금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그 마음은 스스로 되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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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71
찰스 디킨스 지음, 원은주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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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자녀가 꼭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책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것을 출판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작가가 죽은 지 64년이 지나서야 증손자의 요청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이야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기독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에서는 사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킨스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예수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이유는,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것에 간절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이미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훨씬 더 풍부하게 담겨 있고, 여기서는 디킨스가 자식들을 위해 쓴 논평에 가까운 글들을 살펴보면 된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자'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들 한가운데로 내려가 그들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그분의 보살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떠올리거라.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가능한 좋게 생각하거라"(p.28) 등의 구절은 유일한 독자인 자녀들에게 전하는 진심이다. 디킨스 역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고, 그 사실을 잊지 않은 채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이 역경을 극복하는 소설들을 숱하게 써 내려갔다. 아무리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어도, 디킨스의 초점은 언제나 가난한 아이들과 힘든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그는 놓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쓴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도 항상 선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용서를 해 주며, 그러한 미덕을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고 그 사실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또는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겸손하게 묵묵하게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기독교란다."(p.113) 참으로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되묻는다. 여기에 쓰인 대로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 대문호이자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애썼던 찰스 디킨스도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위대한 작가는 그의 작품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자신의 꿈에 사로잡혀 가정을 소홀히 하고, 자신을 혹사한 디킨스의 모습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녀에게 전달하는 개인적인 호소가 놀라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


 로마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도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사적인 바람으로 이어져 왔다.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적인 바람은 인류의 구원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해함으로써 확장된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이나 내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원수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가 황금률을 따라야 하는 이유이자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강제적인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 역시 한 치의 줄임 없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그 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음을 인정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나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가정이 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서 평안이 찾아오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번 알게 된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단 한 번, 그 결정적 순간을 위해 나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실패와 가난과 아픔과 고난은 두렵지 않다. 이미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실패를 이겨내신 예수님께서 나를 받쳐주고 계시니까. "어떻게 하면 눈앞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신다. 나를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나서야, 나 하나만을 위한 삶을 벗어나 가장 사적인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꿈을 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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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03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재 미국에서 기생충보다 더 많이 미국인들이 본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의 원작이 바로 찰스 디킨스의 예수의 생애지요.찰스 디킨스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 에수의 생애란 책을 지은 것은 알았지만 온전히 자녀들에게만 들려주고 살아 생전 출판을 안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starover 2025-06-07 23: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그 뉴스를 보고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서 찾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가 선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느껴졌어요.
 
가든 파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5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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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호기심에 구매한 작품.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기적처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은 서사 속에 보편적 심리를 끌어내는 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단편에 함축된 깊이를 이해하려면 좀 더 살아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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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 높아진 자아, 하나님을 거부하다
팀 켈러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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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를 듣다 보면, 참 많이 인용되는 목사인 팀 켈러의 저서를 생일 선물로 처음 읽어본다. 이 책은 <요나서>를 중심으로 한 강해를 모아놓은 일종의 설교집이다. 4장이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 속에 이토록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나, 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구절과 구절, 그리고 그 사이마다 숨겨 놓은 성경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다. '선지자'라는 직분 때문에 요나를 의인으로 생각하던 지난 날을 돌아본다.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요나 역시 우리와 같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비록 또 다른 실수를 반복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신다. 타국을 상대로 잔혹한 학살을 벌이던 니느웨에게도,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에게도 자비를 보이신다. 니느웨의 심판은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에 주님은 심판을 연기하신다. 이에 대해 요나는 분노하여 그들의 성이 무너질 때까지 떠나지 않기로 한다. 마치 그는 이렇게 따지는 것 같다. "당신이 니느웨를 반드시 심판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절대불변의 예언은 어디 가고, 이제 와서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을 하십니까? 내가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당신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우유부단한 신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맞닥뜨리는 시험들은 요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내 죄를 용서했다고 하셨는데, 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요!"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요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니느웨가 멸망하길 바라며 다시스로 갔다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도,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겠다는 주님의 뜻을 확인했을 때에도, 주님은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고집을 피운다. 한 번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겠느냐고, 한 번만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주시면 안 되냐고. 하지만 요나는 박넝쿨 아래에 있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도 모자라 주님의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깨닫는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들도 주님께서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그제야 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박넝쿨이 있다. 자신에게 편안함과 이익을 주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또는 친구가, 아니면 고마운 은인들이 박넝쿨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 준다. 박넝쿨과 니느웨, 그 두 가지 선택지를 고르라 하면 모두가 요나가 된다. 우리는 박넝쿨이 말라 버리느니, 니느웨가 멸망당하기를 택한다. 그들은 나와 상관 없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민족에게 저지른 끔찍한 짓을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 증오의 사슬 속에서 우리는 잊는다. 하나님은 나만큼, 내 원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이들을 사랑하신다. 이것은 도무지 우리 힘과 지혜로 알 수 없는 범위이다.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 그는 영원 존귀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모든 수치와 고통과 분노와 증오를 받으셨다. 그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우리는 여전히 박넝쿨 아래에서 원수가 언제 망할지 투덜대고 있다. 나는 이제 박넝쿨 아래를 벗어나고 싶다. 하루 사이에 생겼다가 말라 비틀어지는 허망한 것들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 단지 모든 역사와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다. 그분의 뜻이 온전히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틀림없이 그렇다. 남아 있는 선택지는 믿음뿐이다. 자신이 겪은 이적과 과오를 남김없이 전달하는 요나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의 실패를 일으켜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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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더스토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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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맑은 날을 거니는 순수한 영혼이여, 이제 편히 쉬기를. 자유를 찾아 떠났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여, 이제 빛 속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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