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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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목표는 사실을 진술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서술자를 믿을 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물론 작가는 그 판단에 대한 단서를 곳곳에 심어 놓는다. 영리한 작가는 이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해서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이 놀라운 것은 이 때문이다.


한 젊은 여자가 어떤 집안의 가정교사로 입주하면서 귀신을 보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서사인데, 소설의 묘미는 이 기묘한 이야기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모호하게 하는 작가의 기교가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이 섬뜩한 이야기는 추운 겨울날 난롯가에서 더글라스라는 신사에 의해 낭독된다. 이 수기를 쓴 여자는 더글라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력적인 젊은 가정교사로, 내화의 대부분은 이 여인에 의해 서술된다. 그러나 이 원고는 훨씬 시간이 흐른 뒤 외화의 화자인 '나'에게 전해져 세상에 공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소설은 세 사람의 손을 거쳐 오는 동안 최초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각색 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처럼 귀신 이야기가 담긴 원고 자체의 진실성도 모호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분명해지는 것은 없다. 독자는 이제 베일에 싸인 화자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것인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믿는다면, 무대가 되는 저택은 고딕 호러의 스산한 배경이 된다. 때마침 전직 가정교사와 하인이 죽었다는 사실이 귀신의 존재를 더 확고하게 해 준다. 오로지 화자의 눈에만 보이는 귀신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할 존재처럼 여겨진다. 자신이 목격한 귀신에 대한 확고한 화자의 신념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행동하는 집안 사람들의 행위를 가증스럽고 기괴하게 만든다. 특히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유령의 존재보다 더 섬뜩해 보인다.


반면 믿지 않는다면, 화자가 벌이는 모든 행동과 고군분투는 젊은 여자의 이상한 광기로 비쳐진다. 아이들에게로 향한 맹목적인 애정은 지나쳐보이고, 모든 간섭과 통제는 가정교사로는 월권으로 보인다. 흡사 주인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가 나아가 안주인의 지위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뒤틀린 인물의 심리는 유령 따위는 없다는 마일스 부인의 폭로와 겁에 질린 플로라의 모습에서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소설 속의 모든  오로지 화자의 심리 속에서만 벌어지며 그것을 외부 사건과 연결짓는 것도 오로지 화자 자신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서술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심리를 그 허점까지도 정확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치밀함에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 그것을 바라보는 층위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 되는가. 이를 오로지 한 인물의 심리를 통해서만 보여주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헨리 제임스의 소설적 기법이 얼마나 진일보한 것이었는지 알게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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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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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진실은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반복된다. 설령 그것이 오류의 역사라 할지라도 인간은 같은 오류를 계속 반복해왔다. 이 끊임없는 오류의 쳇바퀴를 지켜 보면서 인류의 진보나 변증법적 낙관론 같은 것을 기대하기에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누군가 저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우리네 삶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비춰질 것이다. 타자에 대한 담론은 역사 이래 계속 되어왔고 여전히 유효하다.


토니 모리슨이 <빌러비드>를 출간한 지 30년이 지났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간으로부터 150년 이상이 지났다. 그러나 소설은 과거의 회환과 한탄으로 읽히지 않는다. 대신에 여전한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의 폭력에 무너져버린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 이런 주제를 대하는 작품 안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배여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감을 잃게 된다. 주제의 건강성과 무관하게 공감의 강요는 어딘가 편파적으로 느껴져서일 것이다. 그러나 <빌러비드>는 처절하고 얄궂은 운명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려낸다. 과도한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독특한 기법과 함축적인 언어가 두드러진다. 작가는 사실적인 소재에 환상적인 기법을 가미했으며 실화에 기반한 서사이면서 시적으로 표현했다. 가령 구구절절한 흑인 박해의 역사를 '세상에 불운 따위는 없어. 흰둥이들이 있을 뿐이지' 같은 한 마디 대사를 통해 전달하는 식이다.


소설은 노예의 삶에서 탈출해 자유를 얻은 흑인 여인 세서의 삶을 추적한다. 노예로서의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노예로서 세서의 삶은 당시 다른 노예들의 참담한 삶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인간으로서 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분명한 자식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지만 그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그 시대 노예들의 일반적인 삶이었다. 게다가 세서는 집단 탈출 계획에서 유일하게 발각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당시의 노예로서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조차도 노예로서의 삶은 죽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알게된 이후에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세서는 그 운명의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인성과 모성을 모두 내던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마침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세서는 노예제도의 피해자이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로서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에 놓인다. 피해자로서의 최소한 동정조차 얻지 못한 채 고립되어 죽음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 과거의 망령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빌러비드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여자는 세서의 죄의식과 회한의 현신이다. 빌러비드를 통해 세서는 기나긴 속죄의 의식을 치르지만 '짙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것은 모든 것을 내던진 파멸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과거의 삶은 현재의 삶을 잠식하고 미래의 희망마저 빼앗아 버렸다. 작가는 이 기구한 운명을 놓고 사회 구조적 모순을 파고 들거나 개인 성격의 결함을 탓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실화에 기반한 비극적 운명이 특수한 인물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도처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소설은 흑인이자 여성 노예로서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담론은 확장될 수 있다. 세서와 빌러비드의 기묘한 관계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외적 갈등이 아니라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유령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회한의 망령이므로 결국에는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유령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또한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과거의 망령은 개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과거의 유령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트라우마인 동시에 미국의 오랜 치부의 역사가 현현된 망령이기도 하다. 이민자의 나라'이자 인류 박해에 관한한 뼈아픈 오류를 경험한 미국이 지금 새로운 박해의 역사를 쓰려고 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가 아니지만 여전히 소수자로 머물러 있는 타자에 대한 담론이 왜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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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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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선 소설가의 스테레오타입을 내던진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이를테면 '비주류 작가'의 소설과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비주류이기는 커녕 일본 작가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을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당연히 비판도 많았지만, 그 결과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든 아니든 그가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 쓰기는 제도화된 문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는 대중성에서도 작품성에서도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는 소설을 쓰고 읽는데 있어서 개인의 영감과 꾸준함, 치열함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는 기성의 순수문학에 걸맞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에도, 이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한 작가라는 한계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다. 오히려 일본 순문학계의 외면은 그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하루키를 국제적 작가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런 독자적인 행보는 우리의 문학계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기성 문단이 요구하는 적절한 기준에 맞는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역으로 이 책은 우리가 제도 문학 속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검수된 작품만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치열하게 쓰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인데,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들이 많다는 말이 되겠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 소설이 재미있는가? 대부분이 '소설에 따라서'라고 하겠지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외국의 장편소설들에 비해 우리 소설은 그저 한국어의 아름다운 문체와 유려한 쓰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다가 멈춘 뒤에 다시 손이 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스토리텔러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너무 없다. 적어도 문학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나 어떤 이유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소설만 보면 그렇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이 전부가 아니고 일종의 언어 예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역시 스토리텔링에 있다. 한국 소설에는 이것이 너무 철저하게 빈약하다. 장편소설이라고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대개가 단편의 장면들을 확장해서 장황하게 늘려놓았다는 느낌이 들 뿐, 단편에 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하고 쓸 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제도 어느 한 구석에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손에 닿기 전에 그 무언가에 의해 엄중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독자가 볼 수 있는 글은 한정되어 있다. 그 '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작가들은 재미있는 글 같은 것은 애초에 쓸 생각을 않는다. 독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만을 수용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소설은 '재미없는 것' 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독서 인구가 낮다고 한탄하는 말이 많이 들린다. 다른 국가와 독서량을 비교해 놓은 수치에서 우리나라는 항상 꼴찌다.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탓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는 대체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제도 문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 공간을 떠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즐거워한다. 이야기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이야기만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통로는 무언가로 꽉 막혀버렸다. 독서 인구 수치에 대해서 독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간단히 말해 재미가 없으니 안 읽는 것이다. 독자 이전에 그 생산의 매커니즘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고 잘 쓴 소설은 평론보다 독자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독자는 재미있는 소설을 향유할 기회를 일정부분 박탈당하고 있으니 읽을 소설을 고르는 안목도 역시 무뎌졌다. 그래서 '수상작'이거나 '베스트셀러' 따위의 문구에 현혹되어 그것이 훌륭한 소설인냥 받아들이게 된다. 훌륭해 보이지 않고 간혹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 교양의 일천함이나 수준 낮음 탓이지 책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준을 제멋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쿠타가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라는 말에 훌륭한 책이라고 판단하고는 책을 집어든다.


문학이란 창의적인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등단이라는 예술발전을 저해하는 기형적인 제도가 있어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야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신춘문예나 이런 저런 문학상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틀이 있고 그에 맞지 않으면 비난받고 '정식'으로 작가가 될 기회가 차단된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직업에 모범답안이 있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가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 문학은 영원히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기성 제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해 냈다.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제도 문단을 해외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는 너무나 견고한 기성 체계의 틀을 깨고 자신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없거나, 지나치게 외면당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 지망생들의 서재 서랍 속에는 수많은 놀라운 이야기가 먼지가 소복히 앉은 채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독자의 평가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창작할 자유도 향유할 자유도 제도라는 틀 속에 갇혀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하루키처럼 치열함과 확신으로 가득찬 외골수가 어디선가 튀어 나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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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에 대한 논평.
    from 별처럼님의 서재 2017-03-18 17:26 
    한 블로거의 서평에서 전재.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의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박민우 글.사진 / 플럼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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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비행기의 도착과 호텔 도착 사이의 여백을 무수히 많은 순간들로 채우면서, 여행 책자의 추상적 이미지가 여행의 전부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무릎을 쳤다. 여행은 추상화된 이미지가 전복되는 순간에 흥미로워진다. 만약 이 책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자아를 되돌아 보기 위해 인도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식의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했다면 (샀으니 읽기는 하겠지만) 읽는 내내 '퍽이나, 잘도' 따위의 추임새를 동반한 뒤틀린 시선을 자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혼돈 속에서 깨닫는 영혼의 자유 같은 식의 환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탓이 크다. 인도는 그런 곳이 맞을지언정,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행은 개인과 장소가 우연히 만나 일으키는 예상 밖의 화학 작용까지를 포함한다. 가령 편도 20만원이라는 에어아시아의 계시를 받은 가난한 여행자가 인도와 만나는 우연한 순간 같은.


박민우의 인도 파키스탄 여행기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시작부터 지지리 궁상이 따로 없다. 모처럼 크게 투자한 비행기 프리미엄 좌석 이벤트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매대의 염가 판매 등산화는 빼도박도 못하게 파키스탄행을 제 스스로 결정지었다. 첫 도난 사고는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는 순간 벌어지고 만다. 이렇게 상처받은 베테랑 여행자의 자존심을 달래주는 것은 인도의 이국적이고 웅장한 풍광이 아니라 빨간 토마토로 속을 채운 촉촉한 오믈렛이다. 작가는 여행 베테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휘몰아치듯 연이어 벌어지는 사기 사건과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글은 생지옥을 묘사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황당함의 극치에 배를 잡고 웃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인도가 싫어졌을까? 여행은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뜻밖의 반전을 내어 놓는다. 함피의 풀냄새와 값싸고 당도가 높은 포도 한 송이는 까칠한 여행자의 마음을 무력하게 한다. 사진기 앞에서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는 사람들, 조미료를 잔뜩 넣은 짭짤한 볶음면, 한 밤에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 사원 같은 것들은 연이어 여행자의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폭력적인 더위로 인한 불면의 밤은 오히려 메헤랑가르 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옥상에서의 황홀한 잠을 선사한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저도 모르게 찾아온다.


결론은 해피앤딩. 이 가난한 여행자는 서문에서 30만원도 채 안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고백하는데, 이 생고생 이야기를 읽으면 그것이 사실임을 별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전세 자금이 억이 넘는데, 그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란 말을 들어야 한다.' 작가는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깊은 병을 무덤덤히 꼬집는다. 우리는 200원도 안 하는 포도 두 송이에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존재인데,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이미지 사진들보다 이 구질구질한 체험담이 더 마음을 울리는 까닭은 도처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문득 깨우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타지마할의 수려함에 대한 감탄사도, 갠지스 강가에서 깨닫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도 없다. 이 책은 여행자와 장소와의 궁합,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고도로 디테일하게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이 언급했던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는 점은 바로 이런 생생한 여행기를 통해 증명된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여행이란 개별적인 사람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각자의 느낌을 담은 철저한 자신만의 영역임을 역설한다. 몇몇 화려한 이미지 몇 점과 광활한 진공으로 채워진 여행기를 읽을 바에는 '론니 플래닛'을 읽겠다. 진짜 여행기는 이미지 사이의 공백을  체험으로 촘촘히 채워 놓은 글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개별적이라도 별 수 없다. 여행은 그렇게 개별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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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9-14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세요~~~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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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하디의 초기 출세작이며 '최초의 페미니스트 문학'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Far from the madding crowd)>는 19세기 영국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전원 소설이다. <테스>를 기억한다면 목가적인 풍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함께 인물의 운명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웨식스 소설'의 계보를 이루는 작품인 만큼 전원의 낭만이 한껏 느껴지는 묘사가 일품이다. 농부들이 낡은 선술집에 모여 싸구려 술을 걸치며 몸을 녹이는 모습이나 구슬픈 피리 소리가 퍼지는 해질녘의 서쪽 하늘의 쓸쓸한 풍경이 눈에 들어올 듯 서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배경이 소설의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인물에 집중한다. 소설은 <테스>와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주인공 밧세바 에버딘과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의 사랑이야기라는 플롯을 가진 이 책은 인물의 성품을 묘사하는데 유독 공을 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밧세바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가 오늘날까지도 러브 스토리 속에 꾸준히 반복되는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밧세바를 사랑하는 세 명의 남자는 지금도 텔레비전을 켜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형성을 뚜렷하게 띤다. 이는 시간의 내압에도 살아남은 고전의 힘을 다시 확인시킨다.


가브리엘 오크는 뛰어난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재능이 있고 성실하다. 강한 남성성에 어필하지는 못하므로 처음에는 늘 히로인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마다 안팎으로 큰 도움을 발휘하며 조금씩 신뢰를 쌓는다. 이러한 성실함과 우직함으로 마지막에는 사랑을 쟁취하고야마는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혹은 사랑을 끝내 쟁취하지 못할 때는 그 애틋함으로 인한 동정이 히로인에 대한 비난으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트로이는 가브리엘 오크와는 대척점에 놓인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근사한 배경과 외모 때문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편이고, 강한 남성성을 보인다. 이성으로서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 히로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제격인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은 그 사랑이 진실할 경우 많은 지지를 얻지만, 대개는 '나쁜 남자'라는 오명대로 여자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볼드우드 같은 경우는 여자 앞에서 서툰 쑥맥의 이미지를 가지는데, 그 때문에 여자에게 휘둘리기 쉽고 한번 사랑에 빠지면 망상과 집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인물은 유약함이라는 결점 때문에 결코 히로인을 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이처럼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는 세 유형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차례대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소품처럼 소모되고 있지는 않다. 소설은 히로인을 둘러싼 구애와 거절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이들 간의 얽힌 관계는 단조로운 사랑 놀음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부각되어 역동적인 플롯을 완성한다. 한 여자를 둘러싼 각기 다른 남자들의 구애는 여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 이상으로 기능한다.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 욕망과 질투, 체념과 인내 등의 인간 감정을 두루두루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일련의 감정들이 개연성있게 흘러가며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조직한다. 성격과 환경이 하나의 상황을 만나 어떻게 운명을 이끌어 가는지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드러난다.


고전이 그리는 세계는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선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책들이 결국 살아남는다. 그것은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질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그 형태를 더 분명히 드러낸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일견 바람직한 배우자상에 대한 진부한 논점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 가치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보성을 보여준다. 과연 거장의 작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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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7-1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그리는 세계는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고 현실을 새로 그린다는 말 정말 감동이네요 :) 이말 밑줄 안 그어도 잘 기억될 거 같습니다.
책도 장바구니에 넣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