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편지 문지 스펙트럼
에드가 앨런 포 지음, 김진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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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대체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고상하지 못한, 소위 말하는 B급 장르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업자본과 타협한 공포물은 그 선정성과 자극성을 십분 활용하여 대중의 일회성 구미를 만족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유발된 공포가 소모적일 뿐 아니라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공포를 유발하는 것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것인데, 이것들을 감각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분명 책을 덮거나 영화관을 나올 때 즈음이면 한껏 고조되었던 감정들이 어떠한 잔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포물은 세월이 지나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소비된다. 그렇게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은 대부분의 공포물은 그것이 오컬트이든 크리쳐든, 잔혹한 범죄이든 간에 인간에 대한 통찰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이 공포물로 분류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나온 포의 소설집 <도둑맞은 편지>안에는 동명의 단편 외에 '아몬티아도 술통', '어셔가의 몰락', '고자질하는 심장', '황금 풍뎅이'가 실려있다. 이 다섯 편의 소설은 각각 포의 여러 경향들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도둑맞은 편지', '황금 풍뎅이' 등은 추리소설 계열이고, '아몬티아도 술통', '고자질하는 심장'은 일종의 범죄 소설, '어셔가의 몰락'은 고딕호러 소설의 성격을 갖는다. 고작 다섯 편의 단편이지만 오늘날 이와 같은 장르들에 꽤 많은 모티프를 가져다 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세련된 트릭이나 반전의 장치는 현대 소설에 비해 빈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위기와 속도감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현대 소설의 감각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서스펜스를 다루는 솜씨는 독보적이다. 각각의 단편 분량이 매우 짧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끊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이는 그가 공포의 대상보다 그 주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공포의 대상보다 인간의 의식과 심리를 더 강조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또한 작품의 서스펜스를 높여준다. 그의 소설은 하나의 범죄나 사건의 내적 인과성에 집착하기 보다 그 사건 자체에 곧장 시선을 돌린다. 범죄를 둘러싼 배경에 긴 설명을 할애하기보다 이미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상황을 설정하고 서둘러 문제 자체를 파고든다. 이후에는 인물들이 사건의 해결이든 범죄의 완성이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무엇보다도 작품 속 배경이 조성하는 분위기야말로 포의 소설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배경 자체가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함과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성이 빚어내는 부조리는 공포를 감각적 차원에서 심연의 어떤 것으로 격상시킨다. 이는 딱 맞아 떨어지는 논리와 기막힌 반전, 혹은 시각적 자극으로 무장한 세련된 현대 공포물보다 더 오싹하다. 이는 어떤 기술보다 공포를 일으키는 정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싸이코>가 히치콕의 오리지널을 따라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포의 소설의 장점은 드러나는 기교나 감각이 아니라 심리와 정서를 파고드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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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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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 중 구조담이야말로 희생과 구원을 아우르는 인간 정신의 가장 고결한 지점이며 따라서 태생적으로 가장 숭고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포레스트 검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거쳐 최근의 <핵소 고지>에 이르기 까지 '전쟁'과 '구조'는 미국적 휴머니즘을 선전하는 가장 강력한 소재였다. 벤 파운틴의 <빌리 린의 전쟁같은 하루>도 그런 구조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정치적 선전 도구로서의 의도가 다분한 어설픈 휴머니티에 칼을 들이댄다. 전쟁의 직간접적 피해자나 미국의 패권주의에 냉소적인 외부인들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의 부조리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조롱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쟁 자체를 향한 일방향적 야유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이야깃거리를 둘러싼 사회 각계의 행동 양상을 통해 미국 사회를 다양한 측면에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브라보 분대'가 승전 기념으로 짧은 휴가를 얻게 되어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분대원들은 영웅으로 칭송되어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는데 그 시끌벅적한 환대 속에서 사회 각층의 인물들은 전쟁을 향한 개인적 신념에서 모순과 허구를 드러내게 된다. 요란한 일련의 사건들보다 더 소란스러운 것은 주인공 빌리의 내면이다. 승전 여행 내내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며 대중을 감화시킬 어떤 제스처나 연설을 종용받지만, 정작 그의 내면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한 고민보다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더 닿아있다. 이처럼 외부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시끌벅적한 사건들과 빌리의 내면의 불일치, 이러한 충돌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에서 전쟁은 소설적 배경이기보다 미국 사회를 투영하는 메타포 내지는 객관적 상관물이라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인류의 비극,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의 실존적 내면 따위의 본질에는 무심한 채, 이해 득실만을 따져 '전쟁 영웅'이라는 좋은 소재를 이용하려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풍자의 핵심이다. 이 인물 군상들은 미국 전체를 대변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전쟁이라는 행위에 용맹과 승리, 영광 따위의 허울 좋은 말들을 얹어 인류의 참상을 화려하게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브라보 분대의 행로는 어느 모로 보나 전쟁의 선전용임에 분명하다.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의 자본주의도 한 몫 거든다. 흥행성을 담보로 자본이 움직이고, 분대원들의 죽음과 생사를 가르는 전선은 자본 주의의 논리로 값이 매겨진다. 전쟁의 본질은 일찌감치 멀리 재껴버리고 자본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헐리우드의 생태와 홀린 듯이 그 논리에 동조해가는 대원들의 모습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미국적인 코드들의 현란한 연쇄와 비속어의 남발, 불쑥 끼어드는 불규칙적인 의식의 흐름은 소설의 생동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잘 써진 소설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전쟁 구조담이라는 뻔한 클리셰를 교묘하게 비틀어 미국 사회 전반의 허위 의식을 폭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헐리우드의 국제적 흥행 덕분에 미국 우월주의에 서서히 세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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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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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베이츠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 더 유명한 패니 플래그의 소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위로가 거창한 데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릴과 긴장 같은 페이지 터너의 요소 없이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큰 상승과 하강의 반복이기보다 소소한 일상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해 내는 슬로 라이프 소설(혹은 영화)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에는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과 환희, 기쁨과 분노가 모두 들어있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끌어 당기는 것은 극적인 사건들보다 사소한 시골 마을의 마법같은 일상들이다. 마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요리처럼 가장 소박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최고의 맛을 내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소소한 드라마의 모양새를 한 것 치고는 꽤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에 돌연 찾아오는 어떤 사건들은 이 소설이 인간 개인사의 참혹한 비극의 플롯으로 읽히게도 한다. 나아가 영웅서사와 범죄 사건을 미스테리한 방식으로 드러내며 소설적 재미를 더한다. 담론을 조금 더 확장시키면 인종과 성,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편견에 항의하는 사회 비판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에 무엇보다 적합한 것은 것은 '휘슬스톱'이라는 시골마을 카페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의식이다.  

사실 이를 단순히 시골 마을의 넉넉한 인심과 공동체 의식의 향수처럼 낭만적으로만 보기에 소설의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인종 문제가 심각하던 1920~30년대의 미국 남부의 시골 마을이 소설의 배경임을 상기한다면,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 뒤에 감추어진 위선의 추한 얼굴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KKK단이라는 섬뜩한 단체가 활동하고 거주할 집, 이용할 수 있는 열차의 칸 같은 것들이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곳에서 모욕을 저항 없이 받아들어야만 했던 흑인들의 모습이 작품 곳곳에는 그려진다. 그럼에도 소설 속의 흑인들은 그들의 삶과 존재를 사랑하고 긍정한다. 사람들은 증오보다는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약한 존재임을 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대개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파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모럴이 긍정된다. 소설 속에서는 활빈당의 홍길동을 연상시키는 절도도, 살인과 은폐, 방조까지도 통쾌한 모험으로 여겨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에벌린의  삶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1980년대의 에벌린에게는 어떠한 사고도 범죄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녀를 둘러싼 절망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짙게 드러난다. '혐오'라는 말을 참 쉽게 입에 담는 시대다. 차별과 편견이 핏속 깊이 흐르던 20년대 미국 남부의 마을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남을 혐오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을 함부로 부정한다. 마치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에벌린이 느끼는 환멸은 반 세기 전 휘슬스톱 카페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녹아 내린다. 사람에게는 캔디나 케이크의 달콤함보다 인정과 따스한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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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왓치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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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스티븐 킹의 장기는 공포 스릴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질을 굳게 믿기 때문에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탐정'에 대한 일련의 스테레오타입들은 - 홈즈의 괴짜같은 성품, 포와로의 날카로움, 필립 말로의 고독 같은 - 장르의 매력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대가 컸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미스터 메르세데스>로 시작된 스티븐 킹의 추리소설은 관습적인 장르 문법에서 매력적인 부분만 제거하는 파격을 시도한 것 같다. 인물의 매력도를 결정짓는 육체적인 매력같은 것은 배 나온 60대의 은퇴한 경찰 빌 호지스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소위 뇌색남이라고 일컬어지는 명민하고 재빠른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어서 머리 좋고 사리에 밝은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이 조력자들에게서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소극적이고 소심한 편이다. 빌 호지스는 한 마디로 '은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쇠락해 있다. 탐정이라 하기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해 캐릭터성이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범인을 사이코패스로 설정한 것도 파격적인 도전이다. 사이코패스물이 플롯을 단조롭게 만드는 이유는 사이코패스에게는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막가파식 범죄를 저지르고도 인간적인 심리적 갈등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이코패스가 범인인 이상 일반적인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범인의 추리는 인성에 근거한 추론보다는 사실적인 정보의 수집 차원에 국한되어 버린다.

게다가 스티븐 킹은 추리 소설의 묘미인 '범인 찾기'라는 내러티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범인을 소설의 도입부에서 밝혀 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반전도 허용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수법을 통해 긴장감을 주기 보다 탐정과 범인의 밀고 당기는 대결을 통해 스릴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로는 꽤나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인 것이다.

추리 소설에서 기대되는 다양한 공식들을 배반하면서까지 스티븐 킹이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지금의 현실에 가깝다. 작가는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애가 사라져버린 냉혹한 현실 사회를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은 실제로 빌 호지스의 무능력(고전적인 탐정에 비해)을 부각시켜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대사회의 각종 문제들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실업과 구직난, 대형 콘서트장 테러, 게임 중독 같은 현대 사회 이슈들을 표면화 시킴으로써 인간의 무력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빌 호지스 트릴로지로 일컬어지는 소설 - <미스터 메르세데스>, <파인더스 키퍼스>, <엔드 오브 왓치>는 스티븐 킹의 첫 탐정소설이라는 의의보다 오히려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운 소설이라는 평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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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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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잘 읽히는 로맨스에도 언제나 한 가지 눈여겨 봐야 할 점이 있다.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가 주인공의 최종 상대로 낙점(?)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승자가 되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다. 적어도 작가가 추구하는 윤리적 이상에 부합한다. 비록 규범적으로나 관습적으로는 어긋나 보일지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로맨스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른 인간상을 드러내 보이는 간접적인 수단인 셈이다.


에드워드 포스터의 대표작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에는 몇 군데 웃음 포인트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하나 있다. 피렌체 한 호텔의 투숙객끼리 떠난 소풍에서 일행과 떨어진 여주인공 루시가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인 마부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인데, 이탈리아어를 잘 모르는 그녀는 '신사(gentle men)'라는 말을 '좋은 남자들(buoni uomini)'이라고 바꾸어 말한다. 그것을 나름대로 알아들은 마부는 루시를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남자'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그 곳에 서 있던 남자는 루시의 상대가 될 조지다. 중요한 것은 조지를 '좋은 남자'로 단정하고 루시를 그리로 이끈 사람이 아무런 인습의 구애를 받지 않는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포스터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전망 좋은 방>은 로맨스의 옷을 걸치고 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도덕적 교양서처럼 읽힌다. 범위를 좁히자면 좋은 배우자에 대한 윤리적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훌륭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싹트는 과정에 대한 감정적 깊이가 절실하게 드러나지 않고 사랑의 감정은 다소 과장되었고 지나친 도약을 거듭한다. 그러니 이 소설은 루시를 둘러싼 두 남자의 대립을 첨예하게 그리며 사랑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기보다 루시의 짝으로 어울리는 남자가 어떤 부류인지를 보여주는데 더 치중한다. 그러니까 두 남자 - 세실과 조지의 성격을 극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신사'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제목대로 '전망 좋은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논의는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되며 소설의 주제를 구현한다. 루시가 추구하는 전망이 문자 그대로의 전망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선율로 암시된다. 소설은 20세기 초 에드워드 왕조 시대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는데, 예법이라는 구태한 관습을 벗어내지 못한 사회는 전망 없이 꽉 막힌 방과 같다. 특히 루시로 대표되는 '숙녀'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소위 '신사'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의 구식 관념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전망에 연연하지 않는 조지의 자유분방함은 내면에 보헤미안 기질을 감추고 있는 루시의 영혼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의 인연을 통해 피어오르기 시작한 루시의 열망은 그녀가 속해 있는 원래 사회로 돌아오게 되면서 다시금 봉인된다. 세실의 약혼자로서 예법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된 루시는 그 꼭두각시같은 삶 속에서 자신이 열망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게 된다.  

<전망 좋은 방>은 여행지의 로맨스라는 꽤나 근대적인 요소를 사용했다는 점 뿐 아니라 그 여행지에 대한 섬세하고 깊이 있는 묘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장소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여행지에서 싹트는 교류와 감정들, 낯선 문화에 대한 이질감까지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여행지로서의 이탈리아를 찬양하면서도 그들의 미개성을 지적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는 오늘날 선진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은연중에 과시하며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중성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무엇보다 현실의 갑갑함에서 벗어날 출구로서 여행의 효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고전 답지 않은 근대성을 엿볼 수 있다. 루시가 세실이라는 전근대적 인습에서 달아날 수단으로 -당시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을-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꿈꾸는 것은 조지를 선택한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스캔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조지를 선택했다고해서 그것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는 결국 루시와 조지라는 '아웃사이더'를 통해 당시 사회상과 세태를 은근히 꼬집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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