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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1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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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정만화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90년대 만화가들의 최근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21세기 들어 급격히 변화한 새로운 문화 속에서 순정만화란 장르가 자연히 도태된 이유도 있지만 한국 만화 시장이 불안정하여 작품을 실을 안정적인 매체를 찾기가 힘든 탓이 크다. 이유야 어떻든 90년대의 감성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세대는 슬프게도 재출간된 과거의 작품만을 뒤적여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강경옥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90년대 이후부터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온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게다가 한번 시작한 작품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완결을 내놓는 성실함도 갖추고 있어 작품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경옥의 신작이, 그것도 스케일이 큰 장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은 충분히 한국 순정만화계의 화제가 될 만하다.

강경옥의 신작 '설희'는 환타지와 멜로, 추리 등 다양한 장르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작품이다. 만화는 한국계 미국인 설희(알리사)가 미국의 거부인 양아버지로부터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유산상속을 둘러싸고 유가족들이 벌이는 시기와 암투가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설희의 특별한 능력이 드러난다. 설희가 가진 능력이란 초능력 같은 미스테리한 힘에 놓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비정상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성격에 있다. 강경옥 만화 속 희로인의 특징은 대체로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주인공'으로 집약된다. 설희는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 나아가 하이아(라비헴 폴리스)의 무신경함과 마르스(노말시티)의 대범함이 덧씌워져 있다. 또한 설희는 무척 영리하기까지 하다. 더없이 순진해 보이는가 하면 말할 수 없이 영악한 양면성을 보여준다.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손쉽게 움직이는 것도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 그러나 대체로 그녀가 가진 미스테리한 비밀에 대한 실마리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희'는 아직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숨겨놓은 듯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2부는 설희가 꿈 속의 인연을 찾기 위해 서울에 가서 세이와 세라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설희와 묘한 인연으로 엮여있는 또 다른 인물 세라는 강경옥의 단편집이나 현대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캐릭터의 모습을 잇고 있다. 비록 강하고 아름답고 당당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깊고 감성이 풍부한 타입의 인물이다. 강경옥이 자랑하는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는 미스테리한 인물인 설희보다 세라에 의해 이루어진다.
설희와 얽혀있는 중요한 인물 세이도 강경옥 만화 속 남주인공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여성 캐릭터에 비해 다소 연약하면서 아름답고 다소 까칠한 성격의 인물이다.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설희와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변모하게될 인물이다.
'설희'는 아직 도입부인 만큼 본격적인 이야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위의 세 인물을 중심으로 앞서 등장한 마커스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몇몇 인물들이 얽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기나긴 실타래를 풀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강경옥은 '별빛속에'와 '노말시티', '라비헴 폴리스' 등 주옥같은 장편을 통해 한국 순정만화계에서 SF의 여왕이라고 칭해져 왔다. 그런가하면 '17세의 나레이션', '스타가 되고 싶어' 등의 중편과 여러 단편을 통해 탁월한 심리 묘사의 대가로 칭송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경옥에 대해서 섣불리 규정지을 말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강경옥은 특정한 장르에 머물러 있기 보다 판타지, 동화, 미스테리의 세계 까지 넘나들며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해 왔기 때문이다. '설희'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강경옥의 역량을 모두 결집시킨 대작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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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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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의 원형을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 왕정과 화랑도를 쥐고 흔들었던 미실에 이른다. 뛰어난 미색으로 남성들을 휘어잡았던 팜므파탈의 원형을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또한 3대에 걸쳐 신라의 왕을 모셨던 미실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드러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미실은 모습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원류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미실이라는 한 여자의, 한 인간의 참모습일까? 우리는 문헌상에 기록된 한 인물의 극히 축소된 일생을 놓고 그 인물의 참모습을 파악했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아쉽게도 천오백 년 전의 인물의 실체를 복원하기 위해 문헌을 읽어나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라는 장르는 편리하고도 매력적이다. 역사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넣으면서, 역사 속 인물에 가공을 가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고증을 거치는 것은 기본이지만 말이다.

김별아의 '미실'은 미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의 빌미를 제공해 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미실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들이 곁들여지며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

미실은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인통 중에서도 대원신통 계통의 여인으로, 당대에도 보기드문 미와 매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흥-진지-진평왕 3대를 섬겼으며, 사다함, 세종, 설원랑 등 당대의 화랑들과 몇몇 왕자를 비롯한 숱한 호걸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오늘날의 잣대로 미실의 연애행각을 평가하여, 그녀를 욕망의 화신이자 시대의 요부로 단정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환경의 영향을 간과한 해석이다. 김별아가 말하는 미실은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도 아니고 팜므파탈의 원형도 아닌, 천오백 년 전 신라 시대를 살았던 한 여인이자 한 인간일 뿐이다.

신라는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최대한 존중해야할 것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것이 인간을 억압하기 이전, 오늘날과 같은 성관념이 자리잡기 이전의 사회였다. 제도라는 틀에 속박되지 않은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원초적인 상태로 존재했으며 이들간의 교합의 본능은 죄악이라기보다 하나의 미덕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제도라는 틀안에서 여타의 것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산, 강, 바람, 흙과 같이 자연의 일부를 이루며 자연이 정해 놓은 본성에 알맞게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미실은 색(色)으로 왕을 섬겨야 하는 색공지신으로서 인간의 본성이 존중받던 사회의 중심에서 당연하게 살아갔을 뿐이다. 따라서 유교 사상이 인간 본성을 억압하기 이전의 자유분방한 신라 사회를 이해하지 않고, 오늘의 관점으로 미실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실'은 현대의 도덕관념에 비추어보면 난잡하기 그지없는 외설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재현해 놓은 신라 사회의 가치관과 풍속을 이해한 뒤에야 인물들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실'은 흥미진진한 서사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적나라한 내용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속된 표현을 지양하고 담백한 문체로 잘 버무려 놓은 작가의 문장력은 매 구절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곳곳에 우아한 단어가 쏟아져 나오고, 비유와 묘사에 있어서도 잘 다듬어진 신선한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화랑도의 생활상이나 왕실의 풍속에 대한 생생한 재현도 흥미롭다. 또한 미실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역사나 문학을 통해 알려진 신라시대의 일화들이 불현듯 그려지며 작품 속 세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사다함과 무원랑의 우정, 원광대사의 탄생 비화, 비형랑사라는 주술가의 기원 등이 주요 서사의 줄기에서 일탈해 불현듯 서술되며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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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스페셜 에디션 2
김진 지음 / 이코믹스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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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정만화의 전성기였던 90년대를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순정만화 작가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 있는 김진. 그의 대표작 '바람의 나라'는 그의 이름을 대신할 정도로 막강한 네이밍 파워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문화 컨텐츠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드라마로 제작된 까닭이기도 하지만 원작 자체가 가진 강력한 흡인력이야말로 작품이 십수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 초 '댕기'라는 만화 잡지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바람의 나라'는 학원물이나 로맨스가 주류였던 순정만화계에서는 다분히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한국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시대물이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물에 판타지를 접목시켜 독창적인 신장르를 개척했다는 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신선함과 난해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바람의 나라'는 매니악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까지 놓치지 않고 있어 순정만화치고 제법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아들, 혹은 호동왕자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사실 대무신왕은 꾀꼬리에 의탁하여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을 노래했다는 유리왕보다도, 낙랑공주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설화 속에 오르내리는 호동왕자보다도 유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왕으로서 그의 업적은 굳이 역사책을 뒤적이지 않고 그의 시호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시킨 고대사의 여러 문헌들 탓에, 대무신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지극히 적다. '바람의 나라'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무신왕 무휼의 생애와 업적을 복원하는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 탄생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당연히 작가적 상상력에 더욱 의존한다.  

'바람의 나라'는 왕이기 이전에 무휼이라는 한 인간의 고뇌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무휼은 부여의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부여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무고한 아들을 잇달아 희생시킨 아버지 유리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태자 시절을 보낸다. 왕이 된 후에는 부여의 정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마저 지우려 한다. 그러나 그가 부여를 치기 위해 이끌고 간 군사는 대부분 동명왕의 구신들이거나 죽은 해명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강인함의 이면에는 이처럼 철저한 외로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고독 속에 자신을 철저히 유폐하며 급기야는 그토록 증오해왔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되는 아이러니한 운명이 가슴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는 대무신왕의 정치적, 인간적 고뇌를 묘사하는 것에만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만화라는 영역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역사에 대해 조심스런 재해석을 내리면서도 순정만화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 '바람의 나라'는 역사를 곁들인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 작품 전체에서 무휼의 정치적 업적과 인간적 고뇌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애틋한 사랑이 그려진다.


이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안타깝고 애절하다. 죽은 연에 대한 그리움과 정치적 야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무휼, 하늘로부터 목숨을 빌려 살고 있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괴유를 사랑하는 세류, 죽음을 앞둔 해명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고 그를 보내버려야 했던 혜압 등 아픈 사랑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이들의 사랑 속에는 고귀한 희생이 있으며, 애절한 한(恨)도 묻어난다. 깊이 있고 절절한 감정 묘사가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과 잘 어우러져서 사랑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켜 준다. 

작가는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호신, 천녀, 요물, 귀신 등이 공존하는 기이한 고대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냈다. 이들 초현실적 존재들은 인물의 힘의 상징하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하늘로부터 주어진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휼, 세류, 괴유, 운 등의 인물이 보여주는 천기를 읽는 비범한 능력은 그들이 부리는 신수의 힘으로 상징된다. 이들이 부리는 청룡, 백호, 주작과 달리 현무는 부여왕 대소의 신수로 악의 힘을 상징한다. 이는 아마도 방위로는 '북', 색으로는 '흑'을 나타내는 현무의 차가운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무는 대소의 신하로 화신하여 고구려를 부여에 귀속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무휼의 청룡과 대립한다. 신수의 대립은 운명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인간사가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무와 청룡의 대립은 결국 무휼과 대소의 대립으로 구체화 되고 있으며, 대소왕의 죽음은 청룡의 힘이 현무를 압도하는 천기(天氣)의 흐름을 통해 암시된다. 또 무휼과 호동의 비극적 운명은 그들의 신수가 상극인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인간사의 갈등이기 이전에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는 뜻이다.


현무 뿐 아니라 다양한 요물들이 고구려와 대적하는 부여의 세력으로 출현한다. 원 모습이 뱀인 부여의 신하 흑귀사조나, 여우가 둔갑한 원비 이지의 몸종 등이 그렇다. 귀신의 존재는 무속적 세계관과 통한다. 무당인 혜압이나 해오녀에 의해 해명의 혼이 이승에 머무를 수 있는 설정이 이를 말해준다. 
 

이처럼 '바람의 나라'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면서 그 어떤 작품보다 장대한 고구려 역사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화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를 묘사하면서 인간 보편인 감정인 사랑을 애절하게 그려냈다. 또한 전통적인 그림체와 의고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깊이있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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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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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에서,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넘나들며 다작을 해온 작가 최인호가 새로 내놓은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머저리 클럽'은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작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반추하며 써내려간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잘 쓰여진 글은 아니다. 치열한 소설적 탐색과정이 드러나기보다 다분히 고백적이고 사색적이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었을, 혹은 겪어야 할 '고교시절'이라는 눈부신 소재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 한편으로는 가장 많은 고민을 떠안고 사는 고교시절에 대한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앞서 말했듯이 '머저리 클럽'은 작가 자신의 고교시절 일기장을 펼쳐 놓은 듯, 다분히 고백적이다. 소설은 주인공 동순과 그의 다섯 친구가 고교시절동안 겪는 사랑과 우정, 고민에 대한 이야기다. 밝고 진지하며 때로는 서툴러서 더욱 순수한 그들의 고교생활이 여과없이 그려진다. 동순과 몇몇 친구들은 전학생 영민의 합류를 계기로 그들의 모임을 조직적으로 정비하며 '머저리 클럽'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지만 '우리는 모두 머저리'라고 단정짓는 영민의 말을 통해 그들의 불완전한 현재의 모습을 여과없이 표현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머저리 클럽이란 클럽의 명칭에 걸맞게 여섯 모임의 일원들은 서툴고 미숙한 고교생활에 첫 발을 들여 놓는다. 샛별 클럽이라는 여학생들의 모임과 결연하여 청춘의 찬란한 특권이라할 수 있는 여러 즐거운 경험들도 한다. 빵집에서 빵을 씹으며 노닥거리는 의미 없는 일과도, 실연과 고통만을 안겨준 첫사랑도, 중국집에서 빼갈로 쓰린 속을 다스리던 방황도 아련한 추억처럼 그려진다. 이 모든 것이 조금씩 그들을 성장시키는 발판이 된다.

이 소설에는 전체적으로 인물 사이의 뚜렷한 갈등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고교 3년간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이 삽화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유기성을 갖는 것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청춘의 풍부한 감수성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나 감정들에 더없이 솔직하고 진지하게 임한다. 오늘날에 비추어 보면 저돌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행동이 자신의 감정에 진지하게 직면할 수 있었던 그 시대 청소년들의 감성이고 용기였던 것이다. 그 중 타칭 '개똥철학자'인 주인공 동순의 내면은 유리처럼 예민하고 섬세하게 묘사된다. 동순이야말로 고독과 사색을 즐길 줄 알고 사랑을 하는 방법을 아는 인물이다. 작가는 동순의 내면 갈등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를 인용한다.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감정에 인색하지도 않은 모습, 계산하지 않는 솔직함 등이 그 시대 청소년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라면 그 시대를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행운이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어떤 것은 분명하게 변한다. 변한 것 중에는 참 아쉬운 것들도 많다. 삭막한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면서, 청소년들의 내면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오늘날 청소년들을 잠식하고 있는 MP3, PMP 같은 기계가 동순과 친구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고전과 시집을 대신한 것은 문명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만 보기에는 많은 아쉬움을 준다.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는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정반대로 메말라가고 있는 오늘날 청소년들의 감성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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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2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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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공상 과학 소설이 미래 혹은 과거와 같은 시간의 넘나듦, 우주와 같은 장소의 확장 혹은 기발한 최첨단 기계의 발명 등을 소재로 하여 그 나름의 상상의 세계를 펼쳤다. 그러나 공간적 개념도 아니고 시간적 개념도 아니며 어떤 물리적인 개념도 아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별개로 분류되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펼친 작가가 있다.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이다.

그는 그의 소설 '타나토노트'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기발한 탐험을 시도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후 세계에 대해 알기를 원하면서 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전생, 귀신, 지옥, 천당 등과 같은 '삶'의 바깥에 있는 다양한 세계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을 담은 서사문학이 무수히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심령이나 판타지의 세계로 개연성 있는 허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타나토노트'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상당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사후세계의 진정한 이면을 들춰내어 샅샅이 알아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한 진실만은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남기를 바란다.
그러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금기시 되다시피 한 '사후 세계에 대한 신비'라는 주제에 과감히 도전한다. 그가 이에 관한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제시한 방법은 너무나 과학적이어서 사실처럼 믿어버릴 정도이다.

그는 기어이 그의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사후 세계의 이면을 완전히 들추어 내보인다. 독자들은 소설에 몰입한 나머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탄생한 영계 지도가 진실인 듯 믿어버리고 스스로도 영계 탐사에 동참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과 함께 현세와 영계를 누비며 탐험을 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

소설은 결말에서 죽음에 대한 혹은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지나친 개입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를 던진다. 미지의 영역은 손닿지 않은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오만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현대 과학에 대한 극단적인 경고일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통해 동전의 앞뒤와도 같아진 과학과 윤리의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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