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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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청소년 소설들이 그렇듯 최상희의 소설집 <델 문도>가 던지는 질문은 '성장'이다.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성장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인생의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 순간들은 소설 속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다른 배경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한 가지 접점을 향해 모여있다. 바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이다. 즉 성장이란 미지의 영역으로 존재하던 넓은 세계로 한 발짝 내딛는 일임을 이 책 속 인물들은 깨달아 간다.


여행 작가라는 작가 이력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천편일률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세계를 지구 곳곳으로 확장시킨 것이 그 첫 번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영국의 국제 공항, 이탈리아 베니스,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있다. 심지어 다른 정서와 문화적 배경을 안고 살아가는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리지도 않고, 지나친 기술과 문명의 혜택으로 고립되어 있지도 않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매몰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성장의 본질에 접근해 있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성장의 문제를 사회학적 보고서 내지는 시사 논평의 연장선으로 활용하려는 최근의 청소년 소설들의 경향에 비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선한 시도인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떠남'이라는 상황을 성장의 소재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여행과 성장의 비례관계는 여행의 효용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념이다. 작가는 이러한 신념을 소설 속 플롯으로 끌어들인다. 'missing'에서 클로이 할머니가 주인공에게 한 말은 이 소설집 전체의 주제를 아우른다.  "하지만 가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애들이 있지.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다시 나타난단다. 조금 야위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힘이 넘쳐서 돌아와. 나는 알고 있지. 그 녀석들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거야." 인물들이 여행지에서 겪는 경험을 그대로 소설의 핵심 스토리로 활용하는가 하면('내기', '페이퍼 컷'), 여행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필름'). 과거 떠나온 곳에서의 기억이 현재 삶의 변화에 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고('missing', '기적 소리'), 현재의 삶이 인물들을 떠나게 만들기도 한다('노 프라블럼', '시튀스테쿰'). 그들이 떠나 온 곳이나 떠나 갈 곳은 모두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세계다. 아이들은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여 놓으며 세계의 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가 언제나 낭만적이지는 않다. 환상은 대부분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키워지는 경우가 많고, 더 넓은 세계는 더 많은 위험을 예비한다. 안온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은 울타리 없는 야생에 그대로 내던져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책 속 주인공들의 떠남은 낭만으로서의 여정이 아니라 혹독한 세상에 대면하기 위한 준비다. 친구의 죽음이나 절연, 배신과 같은 일상을 흔드는 큰 사건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닥쳐온 여러 시련들은 주인공의 일상을 뒤흔든다. 뿐만 아니라 궁색한 생활의 현장과 위태로운 가족 공동체의 잔영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현실 극복에 대한 드라마틱한 액션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은 아이가 냉혹한 삶의 진실과 최초로 마주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델 문도(Del Mundo)'는 스페인 어로 '세상 어딘가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설집 <델 문도>는 말 그대로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다시 '이곳'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단순히 낭만적이거나 이국적인 체험으로 현혹하기보다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귀기울인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통해 수렴되는 인식이야말로 삶의 비밀이자 성장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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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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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우월하거나 결함이 있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김이 빠지는 일이다. 사이코패스가 활약하는 범죄소설 같은 것을 상상해보라. 이야기가 얼마나 시시하게 흘러갈지 뻔하지 않은가. 태생적인 범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가 벌이는 참극 같은 것은 서스펜스가 아닌 말초적 자극밖에는 주지 못한다. 그에게 범죄의 동기라는 것은 아예 없거나 일차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나 김영하처럼 이런 소재를 세련되게 풀어낸 작가도 물론 있지만, 사건이 플롯을 주도하는 스릴러 장르에 와서는 이런 인물들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한날 미쳐서 벌인 사건이라면 이야기의 개연성은 작아지고 상상의 통로는 좁아질 것이 뻔하다. 흡사 좀비 영화처럼 좀비는 쫓고 사람들은 쫓길 뿐이다.


스릴러 소설을 긴장감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는 무엇보다 개연성인데, 그 개연성은 대체로 동기에서 나온다. 그럴 법한 동기가 있고 그럴 법한 사건이 일어날 때 독자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한다. 사소한 계기로 평범한 일상이 돌연히 끔찍한 지옥으로 바뀌는 과정이 비약없이 서술되고 있을 때 우리 삶에서 비극같은 낯선 경험이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는 것이다. 스콧 스미스의 처녀작 <심플 플랜>은 바로 그런 소설이다. 평범한 일상에 끼어든 사소한 사건이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되어가는 과정이 매순간 납득할 수 있게 그려진다. 순간 순간을 수긍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문득 너무 멀리 와 있는 인물의 처지에 맞딱뜨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하고 생각하는 사이 소설은 더 이상 동떨어진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이야기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확히 평균 언저리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어느 날 거액의 현금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현장에는 그의 형과 형의 친구가 함께 있었다.스콧 스미스의 놀라운 재능이 발견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돈을 발견한 인물이 한 명이었거나 두 명이었다면 갈등이 고조되는 치밀한 심리적 정황을 설정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이라는 숫자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과 사회적 입지의 차이, 미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부각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불안감은 증폭되며 단조로운 플롯은 순식간에 숨막히는 스릴러로 돌변한다. 두 명의 인물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의심과 경계 사이에 한 명이 더 개입함으로써 인물들은 게임처럼 복잡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사람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평범한 주인공은 평범한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소설에서 범죄의 가해자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은 또한 희생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원한과 보복, 이해관계가 얽혀 범죄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된다. 가령 파티에 필요한 샴페인을 사는 일을 포기하지 못해 닫힌 가게 문을 두드린다던가 하는 시시한 이유로 말이다. 범인은 사이코패스나 악당이 아닌데도 일은 벌어진다. 초현실적이거나 파괴적인 힘에 의한 공포는 허구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어 자극적일지언정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진정한 공포는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찾아온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인간은 잘 없기 때문이다.


스콧 스미스의 장기는 발군의 심리묘사에 있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결론은 나 있다. 추적할 범인도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는 오로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인물의 심리 변화만을 좇는다. 마치 <죄와 벌>의 살인에서 시작된 도입부와 자수로 끝나는 대단원 사이에 자리잡은 장황한 갈등과 번민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인물의 일탈적인 행동과는 별개로 그들의 심리상태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더없이 리얼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콧 스미스는 지금까지 단 두편의 소설-한 편의 범죄 소설과, 한 편의 공포 소설-만을 발표했다. 두 작품 모두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뚜렷한 장르적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 서스펜스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 안에 인간을 던져 놓고 그들을 관찰한다. 최초의 상황 외에는 아무런 작위적인 개입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지만 그 과정은 조금도 비약적이지 않다. 스콧 스미스가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서 인간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하는 한 품격있는 페이지터너로서의 명성은 유지될 것이다. 그의 완벽주의로 인해 기다리는 팬들은 속이 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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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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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상상이라는 것이 필요없을 정도로 진보된 기술을 누리고 있다. 약 600년 이후의 미래를 그린 헉슬리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정보통신 분야의 눈부신 혁신을 비롯해 오늘날 과학 기술은 이미 전방위적으로 성취를 이루고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의 가장 무서운 상황은 전체주의적 통제하에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체제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가 과학 기술에 완벽히 종속되어 버린 끔찍한 전복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은 당연히 이를 깨닫지 못하도록 세뇌되어 있다. 완벽하게 비판능력이 상실된 사람들에 의해 세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이것을 먼 미래, 디스토피아로 치부할 것인가. 어쩌면 너무나 많은 혁신의 성취에 눈이 멀어 비판 능력을 상실해 버린 우리는 이미 헉슬리가 예언했던 디스토피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려내는 세계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행동주의 심리학과 같은 지금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이론에 기반을 둔 미래 사회이다. 지금 우리는 유전보다는 환경 결정론에 더 많은 손을 들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인지에 대한 믿음을 넘어 인간 의지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실존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나드는 우리 현재의 삶에서 헉슬리가 그려내는 '멋진 신세계'는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인다. 술을 마셔도 진담이 나온다는 인간들이 기껏 '소마' 한 알에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MP3 파일 조차 상상하지 못해 600년 이후에도 기껏 '녹음 테이프'를 이용해야했던 헉슬리와의 시대적 갭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룩한 미래 사회의 전근대성을 지적하기보다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훨씬 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가 태블릿 피씨를 손에 쥔 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오늘날 인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전쟁과 전체주의에 의해 피흘리는 세계를 직접 목도한 시대의 증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그려내는 미래사회는 현대와 완벽하게 단절된 세상이다. 따라서 현실 기반의 비판적 소양의 확장보다는 과장을 통한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곳은 기계 문명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성취들이 거세된 세계, 즉 예술이나 종교는 물론이고 순수 과학조차 통제되는 세계이다.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는 인간들에게서 감정을 앗아간다. 설령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어휘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수천년을 이어온 가족 공동체가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모든 사람은 사회의 안정이라는 공동체의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유혹과 투쟁, 회의 같은 불안정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행복'이 대가로 주어진다.


그러나 소설은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인 불순분자인 버나드, 헬름홀츠, 존을 등장시켜 비극이 없는 삶은 예술을 창조하지 못하며, 영원한 행복은 종교와의 단절을 낳게 된다는 섬뜩한 진리를 역설한다. 사랑이 수치스러운 감정이 되고 예술이 조롱거리가 되며 도덕은 알약 한 알의 가치로 전락해 버린 사회를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고 일컫는다. 헉슬리의 이러한 반어와 경고는 그가 만들어낸 미래 사회의 디테일을 넘어서 인류 보편의 반성을 촉구한다. 물질의 맹목적인 추종이 가져온 영혼의 파괴는 각종 질병과 기아, 불안 보다도 더 끔찍한 결말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발표된 <멋진 신세계>는 미래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그리면서 동시대에 경고한다. 그러나 오늘날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경계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엄격한 성찰을 요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헉슬리의 예언처럼 오늘날 사회는 기술 문명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공계 쏠림 현상과 더불어 세계는 언어, 예술,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을 점차 등한시 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는 물질 문명이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소마'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알파 플러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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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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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후각은 인간보다 약 1억 배쯤 더 민감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감각의 어마어마한 차이는 개와 인간이 받아들이는 세계의 모습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차이는 동일한 개체 안에서도 당연하게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세계는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 아님에도 이것을 확인 하는 일은 매번 놀랍다. 기발한 이야기를 만날 때 그 이야기가 탄생한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할지를 상상하면 당연히 작가의 삶이 궁금해진다. 소설가는 과연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경이로운 세계에서 온 것인가. 김연수의 대답은 이렇다. 자기 바깥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라고. 


<소설가의 일>은 아주 기발한 산문집이다. 표면적으로는 소설 쓰기의 실전적 비법 정도로 읽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아니다. 소설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루카치의 영역을 넘보는 것도 아니고, 소설 쓰기의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만 시중에 넘쳐나는 매뉴얼같은 실용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소설 작법에 대해 단순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라면 얼마든지 있는데 그 대상이 소설인 이상 이런 지시적인 방식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시험 공부할 때나 볼 법한 책을 소설 쓰기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세상에 소설 읽는 재미란 깡그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소설가의 일>은 소설 쓰기의 지침이라는 목표에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소설가의 마음 자세에서부터 플롯, 캐릭터, 문장, 시점에 이르기까지 소설가로서 느낀 바를 한 편의 에세이처럼 기록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모든 제재는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취하고 있어서 보다 실재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무엇보다 그 사소한 삶의 경험이 소설의 원리로 바뀌어가는 명쾌한 과정이 글맛을 더해준다. 이런 저런 경험에서 취합해 마구잡이로 늘어 놓은 것 같은 사설들이 일정한 결론을 향해 수렴되는 것을 확인하는 쾌감. 김연수의 다른 산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특징이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이런 특징 덕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이토록 많은 추상적인 개념들의 메타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가의 일>은 사람의 마음, 이를테면 사랑의 감정이나 욕망, 좌절 같은 것을 심리학서보다 더 예리하게 포착한다. 등장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현실의 사랑과 다르지 않고 인물의 성장 과정은 현실의 그것처럼 역동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뻔하지만 깨닫기 힘든 진리들을 다양한 경험적 보조관념을 통해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경험이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역설적 진리들이 자리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라든지 '위대한 소설가는 실패작만 쓴다'같은 위트 있고 절묘한 깨달음들이 글마다 넘쳐난다. <소설가의 일>은 이런 식으로 삶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거듭 파고든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같은 세계를 경험해도 그것을 감각해서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개인차는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김연수가 가진 '소설가의 시선'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별 수 없이 그가 소설가일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게 된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의 차이가 이토록 다르다면 소설을 써야지 달리 무엇을 하겠는가. 김연수는 결국 이 책에서 소설 쓰기의 과정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소 시범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쓰기의 지침으로 이런저런 말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삶을 섬세하게 감각하는 것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말하자면 소설가의 일이란 개의 후각만큼 예민하게 이 세상을 감각하는 것, 그래서 소설가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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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 아시아 문학선 6
타예브 살리흐 지음, 이상숙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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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경험은 종종 타자성을 부각시키는 형태로 드러난다. 특히 문학 속에 드러난 문화충돌의 양상은 많은 경우 선진문화가 후진문화를 잠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문화적 파급력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탈식민 담론을 펼친다고 해도 주류의 언어가 이른바 주류의 문화를 실어나르는 구조 속에서는 이 논의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법이다. 타예브 살리흐가 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키플링보다 더 많이 읽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반대로 존 쿳시는 제3세계 출신의 작가임에도 주류의 언어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이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위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는 비주류 언어권 소설이 담고 있는 생각들은 그들 언어만큼이나 생소해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늘 타자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목소리를 내도 목소리를 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 나온 희귀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단순히 생소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고 패러다임의 변화마저 가져다 준다. 아프리카 수단 출신의 작가 타예브 살리흐가 아랍어로 쓴 소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은 아프리카의 문화가 영국으로 대표되는 선진 문화와 충돌하는 경험을 그들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시선의 역전은 당연히 신비와 환상, 비합리와 미개로 정의되는 오리엔탈리즘을 탈피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주인공인 무스타파 사이드와 그의 관찰자이자 서술자가 된 '나'는 모두 수단 출신의 흑인으로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경험하고 서구의 학문을 습득한 엘리트다. 아직 서구적 정의로서의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한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 역할은 분명하다. 이들에게 근대 문화를 전파하고 이들을 오랜 부패와 악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시혜자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그 역할을 당연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무스타파 사이드의 행보는 '나'와 다르다. 그는 서구 문화를 습득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마을의 일원으로서 그들과도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하는 상태다. 소설은 '나'를 앞세워 무스타파 사이드의 정체성 해명에 나선다.


뛰어난 지성으로 유럽사회의 주류에 속하게 된 무스타파 사이드는 유럽 사회에서 그가 가진 태생적인 타자성을 전복시키기 위해 전위적인 행위를 감행한다. 바로 백인 여성들을 유혹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식민지적 침탈에 비유되는 그의 여성편력은 침략과 강제라는 측면에서 제국주의가 맛보았을 통쾌함을 어느 정도 흉내내고 있다. 서구의 야만성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그들이 행했던 야만적 행태를 번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복수라 할 수 있는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에게 통쾌함을 주기보다 오히려 환부를 더 쓰리게 할 뿐이다. 무스타파가 서구 사회에서 행한 혹은 겪은 일련의 일들은 결국 제국주의가 행한 약탈이 물질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도 큰 상처를 남겼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무스타파에게 제국주의의 환영은 아픔인 동시에 떨쳐낼 수 없는 거대한 동경의 세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고국의 시혜자도 제국주의의 정복자도 될 수 없었던 그는 고국의 생명력을 껴안은 채 문명의 유산들을 깊숙이 감추어 놓게 된다. 그는 성적 에너지로 상징되는 고국의 생명력을 지닌 웃드 라이스에게 깊은 관심을 보임으로써 흑인의 성적 신화를 일부 긍정하는가 하면, 서구적 문명에 깊이 접촉해온 '나'를 가족의 후견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서구적 합리성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다. 이렇게 무스타파는 정체성의 혼돈을 가져오는 사상적 불구가 되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것이다.  


무스타파 사이드가 가진 이 입체성으로 인해 타자성을 전복시키려는 대담한 작가의 시도는 도식적인 결말을 맞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검은 백인'이라는 기형의 상태는 강자의 침탈이 약자에게 미치는 상처를 복합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 내세운 탈식민지적 담론은 그 사상적 토대를 넘어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적인 담론을 걷어내고 인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제3세계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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