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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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 한 번도 대한민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17일 동안 쏘롱라패스를 넘는 히말라야 환상종주를 마치고 온 소설가 정유정의 여행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해외에서 마주할 강렬한 문화적 충격을 대비하기에도 바쁜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작가는 산적과 고산병, 구조헬기를 위한 비상금을 걱정해야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것을.

 

어느 모로 보나 여행 체질은 아닌 것이 분명한 작가를 해외로 그것도 하필 히말라야로 이끈 것이 작가가 창조한 작품 속 인물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 승민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땅으로서 작가의 부름을 받았던 히말라야가, 이번에는 거꾸로 작가를 향해 손짓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가로서는 절망적이었을 '새 소설을 상상해도 피가 뜨거워지지 않'는 상황에서 운명같기도 한 그 부름에 작가는 순순히 응답한다. 꿈속의 땅으로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히말라야가 슬그머니 베일을 벗기 시작한 뒤로, 막막함과 불안감, 두려움을 부추기는 주변의 우려를 뒤로하고 카트만두에 첫발을 디디기까지의 과정은 관동에 관찰사로 부임받아 떠나는 정철의 여정만큼이나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요란한 프롤로그에서 밝힌 바대로 초보 여행자의 최초 해외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대부분의 여행 에세이는 나름 여행깨나 했다는 베테랑 여행가들의 여유와 달관 속에서 다소 낭만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반면에 이 책은 매사에 우왕좌왕하는 초보 여행자의 어설픔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사부'와 '구세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 같은 작가의 모습을 킬킬대며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영어 벙어리로서 우격다짐으로 소통을 이루어내는 장면이나 히말라야 한가운데서 택배 기사의 전화를 받고 통신사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에피소드는 '척'하지 않는 솔직하고 담백한 체험담이 그 체험을 얼마나 생동감있게 전해줄 수 있는지를 증명해준다. 좌충우돌이라해도 좋을만큼 숱한 시행착오와 위기들은 처음으로 여행의 본질에 맞딱뜨리는 초보 여행자가 여행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매력에 성큼 다가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개인적 체험에 보다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

 

논픽션으로서 분명한 캐릭터화를 이루어낸 것은 이 책이 지닌 또 다른 쾌거이다. 작가자신과 동행인 김혜나 작가를 제외하고도 가이드 검부, 포터 버럼, 트래킹 중 스쳐지나가는 세계 각국에서 온 트래커들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이 여행기에서는 단역처럼 스쳐가는 사람 하나하나마저도 고유한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호기 넘치게 가이드 없이 출발한 베네수엘라 청년, '도를 믿습니다'를 말하는 듯한 부담스러운 미소의 폴란드 처자, '잘생기고 섹시한 데다, 스마트해 보이는' 코리안 보이 등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작가는 객관적 관찰에 자의적 해석을 더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이 논픽션은 픽션의 세계만큼이나 역동적이고 재미있게 탈바꿈된다.

 

작가는 히말라야의 매력에 대해 설파하는 대신 불면과 변비, 추위, 고산증 같은 고생스러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책 속의 히말라야는 끔찍한 고행길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고난의 행군 속에서 끊임없이 내면의 대화를 끌어내고 있는 모습에서 히말라야는 차라리 한 사람의 생애의 메타포가 된다. 작가는 그 속에서 웃고 울고 아파하고 마침내 성장한다. 작가는 스치는 풍경, 육체적 고행, 밤과 낮에 찾아오는 꿈과 환각에서 과거의 자신과 직면한다.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어린 가장, 힘들었던 초보 간호사, 창작열을 불태우는 작가. 험난한 여정에 끼어드는 한 개인의 역사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하여 작가에게 또 독자에게 인상적으로 스며든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오르락 내리락하는 고도처럼, 작가는 독자를 들었다 놨다한다. 완전한 '골방 체질'인 작가가 '네팔병'에 걸려 에베레스트를 꿈꾸게 되는 마지막 장면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킬킬대며 웃다가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홍보 문구는 정확하다. 고백컨대 글쟁이라기보다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러라고 여겼던 정유정 작가가 엄청난 내공의 글쟁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누군가의 여행기는 독자의 대리만족이다. 여행지에 가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거나, 아예 그 여행지로 이끄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말할 것도 없이 둘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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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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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새 소설이 나왔다는 것은 또 한번 소설의 정통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는 말이다. 소설의 정통성을 논하는 일은 개성과 다양성을 짓밟는 폭력이나 다름 없지만, 기법의 다양성을 무기로 서사의 부실함을 감추려는 몇몇 소설들을 만난 뒤라면 별 수 없이 깊은 맛을 내는 본격 소설을 갈망하게 된다. 성석제의 소설은 언제나 이야기의 본령을 준수하며 소설의 언어에 충실히 부합한다. 그의 소설이 이야기하는 '인간'은 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되며 그 개인은 현실적 공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완벽한 허구의 서사를 통해 현실을 더 현실답게 보여주는 힘이 성석제 소설이 갖는 정통성의 근원일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를 막힘없이 기술하기란 어렵다. 한 인간의 삶이 요소요소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느닷없는 도약과 느닷없는 하강을 겪기도 하고 기대되는 것과는 다른 엉뚱한 결과를 맞이하기도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안타깝게도 권선징악의 법칙이 깨어진지도 오래다. 간단히 말해 개인의 인생은 복잡할 뿐 아니라 예측하기가 어렵다. 인생이 흘러갈 방향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단서는 그 인물의 성격이다. 그러나 성격만이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면 억울한 사람이 제법 많을 것이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은 개인의 성격이 환경에 의해 좌절을 겪게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한 사회의 흐름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시대적으로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를 아우르는 이 소설은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가족, 정확히는 한 개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단 하나의 인물 만수는 '인간이 안 될' 것 같다는 주변의 우려에 걸맞게 볼품없는 몰골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의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면에 주목한다. 만수는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만으로 뚝심있게 자기의 할 일을 한다. 평생을 신의와 희생만이 삶의 전부인 것 같이 살아 온 그의 주위에는 늘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이다. 태생적인 불리함을 남다른 성품으로 극복해내는 그의 모습은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성석제 소설 특유의 휴머니즘을 전해준다.

 

소설은 이처럼 시종 혼탁한 시대를 저 홀로 투명하게 살아가는 만수의 삶을 좇고 있지만 그의 됨됨이를 미화하거나 그 행적을 영웅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시류를 읽는 안목이 부족하며 부당함에 항의할 줄 아는 기백을 갖추지도 못한 만수의 소시민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혼란한 시대에 필요한 고결한 이상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편법의 유혹을 뿌리칠 만큼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저 위에서 고뇌하는 인물이기보다 밑바닥을 뒹구는 범인(凡人)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의 집념과 끈기에 걸맞는 거대한 성공을 마련해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만수의 삶은 시종 평균 언저리에 걸쳐져 있다.

 

<투명인간>은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한 평범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이 인물담에는 신화와 같은 신성함도, 민담과 같은 통쾌함도 없다. 그런 만수가 소설의 문제적 인물일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의 삶에 대한 성실한 태도와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부조리한 환경의 영향으로 거듭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그 부적절한 삶의 하중을 견디기에 그의 육체와 정신은 가녀리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만수 뿐 아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 좌절을 겪으며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진다. 그들의 존재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부정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자기 앞에 놓인 삶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밝힐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투명인간>은 불투명한 오늘날을 비추는 우화이지만, 맹렬한 저항을 대신해 진정한 공감으로 소소한 위안을 주므로 비극적이지는 않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우리를 좌절케 하는 사회 보다는 좌절하는 개인의 모습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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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 책을 쓰는 사람이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
임승수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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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즐겨 읽는 많은 사람들도 책이라는 것이 독자에게 주는 의미는 숱하게 체험했어도 그것이 작가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상투적인 정의에서부터 책이 '도끼'라는 다소 의아스럽고 도발적인 정의에 이르기까지 숱한 은유들이 넘쳐나는데 그 어느것도 그 본질을 정공법으로 알려주지는 못한다. 독자 측면의 효용론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별 수 없다. 그런데 사회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임승수는 이에 대해 책은 '원고지 1,000장'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대략 300쪽 내외인 단행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량을 의미한다. 책에 대해 작가가 내릴 수 있는 정의로는 가장 정직하다 할 수 있다. 그의 책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는 이처럼 책의 본질을 에두르는 법 없이 알려주는 책이다.

 

앞서 말한 책에 대한 저자의 정의에서 보듯이, 이 책은 '책'의 실체에 집중한다. 글을 쓰는 사람을 겨냥한 책이지만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글쓰기 교본류와는 그 성격이 명백히 다르다. 글을 쓰는 것 외에도 글의 기획, 출판, 홍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글이 책이라는 옷을 입고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과정에 더 주목하게 된다. 글이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그것을 실어 나르는 책은 아무나 낼 수 없다는 일종의 오해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들려주는 '책을 낸다는 것'에 대한 진솔하고도 직설적인 의미는 보다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는 학창시절 A4용지 한 장도 채우기 힘들었던 글치 공학도인 저자가 사회 과학 분야에서 가장 잘팔리는 작가 중 하나가 되기까지의 체험이 진솔하게 녹아 있다. 삶이 글이 되고, 그 글이 또 책이 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자신의 체험과 느낌을 거의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 보낸 편지와 그에 대한 답장의 원문을 공개하는가 하면, 책이 나온 뒤에 이름난 커뮤니티에 직접 홍보글을 올리던 구차한 과거마저 솔직하게 고백한다. 심지어는 책 한권에서 파생되는 수익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여 밝힌다. 이 책이 공연히 바람만 잡고 부추기는 여타의 글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또한 저자의 이야기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작가들의 체험도 싣고 있다. 저자는 직접 여행작가, 여성학자, 역사학자, 장르 문학가, 동화 작가, 번역가 등 각기 다른 분야의 다양한 작가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자기 책을 갖기까지 살아온 삶을 보여주며 '삶'이 '책'이 되는 과정의 공통분모를 탐색한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는 구체적 수치를 활용한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화법으로 잠재적 저자에게 강한 동기를 심어준다. 그러나 이 책은 책을 내는 것이 소원인 일부 독자들을 위한 단순한 지침서 그 이상이다. 인터넷을 비롯해 개인이 글을 공개할 수 있는 매체들이 넘쳐나는 와중에도, 책만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의 과정은 한 편의 글이 독자와 만나기 위해 거쳐가는 고된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은 분명 인터넷에 무수히 실린 다른 글들과 달라야한다. 책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진정성있고 정련된 완성품이다. 힘들게 탄생하는 만큼 남다른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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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R. K. 나라얀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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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다보면 수많은 종교적 상징들과 마주하게 된다. 조지프 캠벨은 일찍이 신화는 거짓이 아닌 은유라고 말했지만, 숱한 신화의 유물들과 마주하다 보면 신화 자체가 비유이기보다 차라리 직설적으로 기술된 사실이 아닐까 착각마저 든다. 그만큼 동남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종교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제각기 독자적인 종교적 토대를 지니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서도 동일한 신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이다. 태국 에메랄드 사원을 둘러싼 회랑 내부에는 <라마야나>의 이야기가 세밀화로 그려져 있으며, 앙코르왓의 1층 회랑 부조에는 '랑카의 전투' 장면이 한쪽 벽면 가득 새겨져 있다. 좀 더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하누만의 모험을 각색한 께짝댄스가 일몰직후 상시 공연된다. 이처럼 범아시아적으로 퍼져있는 이 인도의 신화는 그 나라의 문화와 민족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는 했지만, 단순히 화소만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플롯까지 고스란히 전승된 모습이다. 이는 <라마야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를 보여준다.

 

인도의 소설가 나라얀이 다시 쓴 <라마야나>는 10,500연에 이르는 캄반의 서사시를 간결하게 다시 써낸 책이다. 다양한 이본 중 표준이라 여겨지는 발미키의 <라마야나>와 큰 줄거리는 같이하지만 라마의 도덕성과 권선징악의 교훈을 좀더 명징하게 그려내려 했다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비슈누가 라마로 환생하는 이야기와, 라마와 그의 동생 락슈마나가 현자 비스와미트를 따라 여행을 떠나며 겪는 모험이야기로 채워진다.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비스와미트의 입을 통해 인도 신화의 다양한 유래가 곁가지로 떠오른다. 유명한 강가(갠즈스강)의 유래나 인드라가 천개의 눈을 가지게 된 배경설화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본격적으로 라마의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그가 미틸라에서 시타를 만나면서부터다. 라마는 이후 권력에 대한 암투와 욕정에의 유혹 같은 속세적 시련을 겪지만 타고난 성품으로 이를 현명하게 이겨낸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악의 근본을 상징하며 비슈누를 환생하게 만든 본질적 이유인 라바나다. 시타를 빼앗긴 라마는 시타를 구하고 라바나를 물리치기 위한 모험을 강행하고 그 와중에 자타유와 하누만 등의 도움을 받는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이 쉴새 없는 이야기의 향연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와 소통되는 삶의 모습을 함의한다. 우리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과장과 기이함으로 낯설게 다가올 방콕 에메랄드 사원의 세밀화는 판타지가 아닌 (다시 캠벨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 세상의 은유들인 것이다. 특유의 기이함을 걷어낸 신화라는 보조관념은 현재의 삶이라는 원관념을 정확히 겨냥한다. 선과 악에 대한 관념의 일치는 물론이고, 탐욕, 질투, 나태, 우애, 의리와 충성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명료한 인과관계에 따라 보여준다.

 

<라마야나>는 종교적으로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숭배사상을 강화하는 이야기지만, 영웅의 일대기라는 범세계적인 화소를 담고 있어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이야기의 양면적이며 본질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신화의 측면을 비껴나더라도 <라마야나>는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인물들과 자연과 초자연을 넘나드는 선과 악의 대결, 명쾌한 선의 승리 등은 어떤 실증주의도 반기를 들 수 없는 창조적 서사의 완벽한 모범을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라마야나>가 아시아 전역에 걸처 다양한 예술 장르로 차용되고 변형될 수 있게 해온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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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의 목가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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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는 일찍이 출간된 그의 대표작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휴먼 스테인>에 앞서 쓰여진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의 출발점을 알리는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이고 유려하며 지극히 미국적이다. 이 소설에는 미국의 과거와 현재, 사상과 가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미국적이라는 것에 한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제목에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미국의 근현대사와 별개로 읽히지 않는다.

 

소설은 완벽함 뒤에 감추어진 그늘을 시모어 레보브라는 인물과 그의 가정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화자인 네이선 주커먼이 기억하는 시모어 레보브는 '마법'이자 '기쁨의 원천'이었다. 이런 집단적 영웅만들기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출구를 찾아왔다. 이 완벽한 인물과 그들의 가정이 무너져가는 과정 속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미국에게는 다소 치욕스러웠던 역사적 사건이 끼어든다. 전쟁은 사회와 개인의 광기어린 폭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사회의 역사가 한 개인의 운명에 미치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 작가는 치열하게 그려 보여준다.

 

이 소설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 문제다. 시모어 레보브는 스웨덴풍의 외모를 가졌다하여 스위드라는 별명을 지닌 유대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럭저럭 미국적인 기질에 맞게 행동했으며 미국인의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딸 메리는 그런 그의 정체성에 문제제기를 한다. 유대인도 카톨릭교도도 아닌 그녀의 돌발적 행동은 아버지의 이중적인 삶을 까발리는 동시에 미국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결국 한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자신의 본질을 억압하는 삶을 혐오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모어 레보브가 이루어 온 삶이 허구적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 대한 메리의 혐오는 고스란히 아버지에 대한 의식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결국 스위드의 삶은 현대의 미국에 대한 적절한 알레고리다. 근현대의 국제사회에서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겪어오는 동안 미국인이 지니게 된 시혜의식과 자기만족은 스위드라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에 열광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스위드의 삶이 그렇듯 미국의 완벽한 삶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흠집이 나고, 그들이 지닌 우월함에 대한 가치는 메리의 개종을 통해 부정된다. 이 소설을 통해 '미국의 목가'는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필립 로스는 엄중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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