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걸 인생 상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맥주 집 마담이 좋은 말씀으로 제 친구 좀 진정시켜주세요.’하며 그녀를 의뢰하면서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녀의 이름, 가족사항 등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설정했다. 마담한테 얘기 들어서 심적 방황의 개요까지 다 알고 있지만 그렇게 설정되어야만 상담이 이뤄질 것 같았다.

 

사실, 그녀를 처음 보는 건 아니고 정식으로 인사소개를 나누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가 마담이 잡아끄는 대로 수줍게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나는 예를 갖추었다.

허허허……반갑습니다. 저는 이 집의 단골이구요, 뭐 제가 생맥주를 한 잔 사 드려도 실례는 아니겠지요?”

그녀는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마담과 고등학교 동기라고 했으니 50? 그렇다면 나보다 여덟 살 아래 나이다. 마담한테 메뉴판을 갖고 오라 해서 그녀한테 펼쳐 보이며 생맥주 500cc는 기본이고요…… 좋아하는 안주가 있으시면 주문하세요.’라고 권했다. 그녀는 안주주문에 별 생각이 없다는 표정이다가, 마담이 어깨를 툭 치며 채근하자 피식 웃으면서 노가리 구이항목을 가리켰다.

불경기는 술값 싼 생맥주집에도 영향을 주는지, 근래 들어 손님이 많이 줄어 든 느낌이다. 작년에만 해도 열 개의 테이블 중 예닐곱 개에 손님이 차는 것 같더니, 오늘은 이 테이블까지 세 개밖에 차지 않았다. 마담이 생맥주 갖다 주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앉아 있는 첫 대면시간이란 얼마나 겸연쩍은지, 그나마 흐린 조명불빛 아래라서 다행이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고개 숙여 시선 교환을 피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평범하게 생긴 여자가 심적 방황이 심하다니, 참 모를 일이다. 마담이 거품 오른 맥주잔들을 갖다 놓고 돌아갔다. 그녀와 함께 잔을 들어 가볍게 맞부딪친 뒤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젊었을 때 재건학교 선생을 몇 년 했습니다. 봉사활동 차원으로 수업한 거지요. 그 때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상담을 많이 해줬습니다. 학업 문제, 취업 문제, 빚 문제, 심지어는 결혼 문제까지 말입니다. 허허허허. 여기 마담이 그런 나를 믿고 친한 친구가 마음고생이 심하니까 선생님이 좋은 말씀 좀 들려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 댁의 말씀부터 우선 듣고 싶네요. 상담의 시작입니다. 물론 상담 내용은 비밀로 지켜집니다."

그녀가 맥주잔을 삼분지 일쯤 비우더니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처한 심적 방황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얼마 전까지는, 마음고생 한 번 하는 일 없이 잘 살아왔어요. 남편은 시청 공무원인데 워낙 샌님같이 얌전한 사람이라, 속 한 번 썩이는 일 없이 저를 잘 대해 주었거든요. 지금도 잘 대해 주고 있어요. 바람 피우는 일도 없고 술 담배도 안 하는, 아주 착실한 가장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남편한테 불만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여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저는 속상하기 짝이 없다니까요. 남편이 무슨 흠을 보여야 그걸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겠는데 그러지를 못하니까 말이에요.”

상담원칙에 우선 피상담자의 말에 경청하라는 항목이 있다. 조리정연하게 말을 잘하는 여자다. 결코 일시적인 감정에 흔들릴 성격은 아닌 듯싶은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연을 털어놓으려는데 마담이 구운 노가리들을 접시에 담아 갖다 놓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툭 치며 잘 말씀드리고 있니?’ 하는 눈짓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돌아도 안 보며 자기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남편은 요즘도 내가 뭘 잘못했니? 잘못을 지적해주면 시정하겠다면서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지요. 그러나 남편은 제게 잘못한 게 없어요. 잘못이라면 제가 하는 셈인데…… 저는 결혼한 뒤 처음으로 남편한테 제 소원을 말한 것이거든요. 그냥 이혼해 달라고 말입니다. 정말 처음이에요. 그런데도 제 소원을 받아주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결혼해서 잘 살다가 첫 소원이 이혼이라니……. 나는 노가리 하나를 집어서 한 입 뜯어 먹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댁의 말씀이 영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렇게 착한 부군과 왜 갈라서려 합니까?”

어떤 남자를 만나면서부터였어요. 이상한 남자가 아니에요.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남자입니다. 걔를 몇 십 년 만에 만난 순간 온몸이 감전된 듯이 떨리는 거 있지요? 쉰 살 된 나이인데도 청바지에 장발인 걔를 본 순간 내가 왜 반했는지, 저는 정말 제 자신을 알 수 없어요. 그 날 맥주가 몇 잔 오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술 취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걔는 아파트 인테리어 일로 먹고 산다는데 일이 없을 때에는 노가다도 뛰며 산다더라고요. 솔직히 직업도 별로이고 그런 애인데…… 너무나 사정이 딱한 거에요. 십 년 전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아비로 산다잖아요? 자식은 둘이 있는데 결혼도 늦어서 큰애는 고등학교, 작은애는 중학교롤 다닌다더라고요.”

그녀는 속이 다 타는지 잔에 남은 맥주를 비웠다. 나도 따라서 잔을 비운 뒤 마담 있는 주방 쪽을 보며 두 잔 추가!’를 입모양으로 알렸다. 무슨 안주를 다듬던 마담이 즉각 두 잔 주문을 포착하고는 흰 거품이 넘치려는 두 잔을 만들어 갖고 왔다. 마담의 그런 능력에 나는 매번 감탄한다. 거품이 넘칠락 말락 하게 생맥주를 담아오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면서도 다른 기척을 즉시 포착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손님의 말동무가 돼 대화하면서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에게서 무슨 기척이 나면 즉각 포착하는 그 뛰어난 순발력. 그런 능력이 있기에 장기불황을 이겨나가는 게 아닐까.

그녀와 나는 자기 앞의 맥주잔들을 잡아 한 번 가볍게 부딪치고 마셨다. 퐁퐁 자국처럼 맥주거품이 입술 가에 남겨지자 그녀는 보지도 않고 손등으로 정확히 그 부분을 훔쳐낸다. , 여자들은 남자가 흉내도 못 낼 능력들이 있다. 내가 취했나? 별 것도 아닌데 감탄하다니.

댁의 그런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그걸 모성애라고 하지요. 여자 분들한테만 있는 본능이지요.”

물론 모성애도 작용했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거든요. 걔의 처지가 딱해 보이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걔가 너무 좋아서 같이 살고 싶은 거여요. 여생을 그런 애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내 마음을, 내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데 어떻게 선생님이 이해하시겠어요? 물론 제가 미친년이지요. 착한 남편과 안정된 집을 두고서 그런 허허벌판에 선 사람한테 달려가려하다니 말입니다.”

허허벌판에 선 사람이라니, ‘낡은 청바지 차림으로 바람에 장발을 날리며 쓸쓸하게 서 있는, 노후의 한 남자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하게, 멋있는 사내일 듯싶다. 그녀가 주방에 있는 마담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쟤는 펄쩍 뛰면서 저를 말리지요. ‘네가 젊은 나이에 이혼하려 한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새 출발할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이기에 이해해 줄 수가 없구나. 더구나 생활도 안정돼 보이지 않는, 어린 자식도 둘이나 딸린 남자의 노후를 뒤치다꺼리하면서 살겠다니 그건 정신 나간 년의 짓이다. 만일 네 생각대로 이혼해서 그 남자랑 산다면…… 너는 네 아들한테도 버림받는 어미가 되는 거다. 늙어서 그런 불행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제 아들은요, 아직 장가가지 않은 외아들인데 저한테 이런 말을 한다니까요. ‘나는 엄마의 선택을 존중해. , 엄마가 이혼한다 해도 나는 엄마를 탓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입니다.”

뜻밖이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아들이 아버지 편을 들어 모자란 엄마!’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글쎄,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녀의 남편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소홀한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빨 새에 노가리 잔가시 하나가 낀 탓에 다소 신경질적이 됐다.

남편 분이 아들한테 못해준 게 있습니까?”

아니에요, 아들애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아빠에요. 아들애도 제 아빠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들애 입장으로는 숨 막힐 것 같은 집안 분위기를 어서 빨리 정리하고 싶은가 봐요.”

그러니까 댁이 남편 분과 수시로 다투면서 지내는가 보지요?”

아니에요, 각방을 쓰니까 다툴 일도 없지요. 제가 일단 이혼해 달라는 말을 꺼낸 뒤로는 한 이불에서 잠자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날부터 각방을 쓰지요. 남편은 착한 사람이라 그 날부터 알아서 자기 식사도 챙기면서 시청을 다닌답니다. 그러니까 언뜻 봐서는 별 일 없이 조용한 집안인데 아들애는 그게 숨 막힐 것 같으니까 어서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정리하고 살자는 생각인가 봐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입안의 혀로써 간신히 이빨 틈새 잔가시를 빼고는 이번에는 다소 수준 낮은 질문을 했다.

남편 분은 댁이 같이 살고자 하는 그 남자를 알고 있나요?”

그녀는 내가 노가리 잔가시를 힘들게 빼내 테이블 밑으로 버리는 것을 본 것 같다. 대답 대신 작고 뽀얀 손가락들로 노가리 하나를 잡아 자잘한 가시들을 발라낸 뒤 살점만 남은 것을 접시 위에 놓았다.

남편한테 그 남자 얘기는 안 했지요. 그러면 복잡해지거든요.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나는 단지 당신과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라고만 말했지요. 정말 저는 남편과 같이 사는 것이 지겨워졌어요. 밥 먹고 빨래하고 TV 드라마 보다가 잠자고…… 이런 생활이 지겨워졌어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 남자를 알게 되면서…… 고생 좀 하더라도 그 남자 뒷바라지하면서 한 번 사는 것처럼살고 싶은 거여요. 이해하시겠어요, 선생님?”

젠장, 이상하게 내 마음까지 흔들렸다. 사실, 안정된 생활이란 따분한 생활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잔잔한 바다 위 돛단배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달리 보면 따분한 풍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돛단배는 항상 거센 파도와 비바람을 찾아서 항행해야 한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나는 흔들린 내 마음부터 급히 다잡았다.

제가 솔직한 말씀을 드릴까요? 그건 속된 말로 배가 불러서그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안정된 생활을 부러워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까? 댁은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어서 팔자가 늘어지니까 엉뚱한 짓이나 하려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선생님도 여기 친구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뭐라 말씀하셔도 좋아요, 저는 그 사람과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려면 현재의 남편과 갈라서야 하잖아요? ……저는 남편한테 이런 말도 했어요. ‘당신과 이혼하게 되면 나는 아무 것도 갖지 않고 빈손으로 나가겠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제가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까지 보태어 장만한 거거든요. 2억 이상은 쳐줄 거에요. 저는 그런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할 테니 이혼합의서에 도장만 찍어달라는 거지요. 남편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며 응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아요. 저는 그저 그 사람과 하루 빨리 같이 살고 싶을 뿐인데…….”

그녀는 목이 또 타는지 맥주를 들이켰다. 나의 어설픈 인생 상담은 성공하지 못한 듯싶다. 괜히 그 남자가 원망스러워졌다.

그 남자는 뭐라 합니까? 이혼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는 상관하지 않겠답니다. 이혼하고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는 식이지요. 그 남자와 저는 가끔씩 만나거든요. 만나서 차도 마시고 술도 조금 마시고 그러다가 헤어지지요.”

그 남자와 잠도 잤어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참으로 딱한 건 그녀의 남편이다. 아내가 느닷없이 이혼해 달라고 했을 때에는 우선 그 원인부터 제대로 캐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못하고 각방을 쓰는 것으로 대처해 나가는 아둔함이라니…….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니, 직장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정신적 여유는 없을 듯도 싶다. 직장생활이란 게 언뜻 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직장 바깥의 일은 눈여겨볼 겨를조차 없이 만드는, 던져주는 모이에만 길들여져 살도록 만드는 새장 안 생활이니 말이다. 나는 그 새장을 나온 지 4년이 돼간다.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그녀는 다시 두 번째, 세 번째 노가리의 잔가시들을 발라내며 침묵했다. 나 역시 달리 떠오르는 말도 없어서 반 넘게 남은 맥주를 다 마셔버리고 갑자기 싱거운 사람이 된 꼴로 앉아 있는데 마담이 어묵 한 그릇을 끓여갖고 왔다.

친한 친구한테 좋은 말씀 해주시는데 제가 그냥 있을 수 있나요?”

나는 파가 송송 떠 있는 어묵국물을 세 숟가락이나 연거푸 떠 마셨다. 그녀 옆 자리에 앉으니 마치 언니처럼 키 커 보이는 마담이, 그녀한테 물었다.

어때, 우리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녀는 말없이 노가리들을 다듬는다. 마담은 눈치 빠르게 내게 말문을 돌렸다.

선생님, 맥주 한 잔 더 갖다 드릴까요?”

마담도 한 잔 하슈.”

그녀의 잔이 다 비워지지 않은 걸 보고 마담이 두 잔을 만들어 갖고 와 내 앞과 자기 앞에 놓았다. 그녀가 부스스 일어나면서 말했다.

말씀 고마웠어요.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아니, 더 들고 가시지?”

그녀가 소리 없이 웃으면서 일어나니 마담도 따라 일어나 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제 친구, 고집이 대단하지요?’하면서 마담이 자기 술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치고는 단숨에 반 넘게 들이켰다.

선생님이 꽤 속 타셨나 보네. 미안해요.”

미안하긴…….”

잔을 내려놓으며 테이블 위를 봤다. 맥주잔들, 어묵그릇, 숟가락 젓가락들, 노가리 남은 접시, 발라낸 가시들, 고추장 담긴 작은 종지 등으로 어지럽다. 정작 상담의 결과는 아무 것도 없는데…….

친구 분이 학창시절에는 어땠어요?”

쟤나 나나 평범했어요. 공부도 보통이고 말썽도 피운 적이 없이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니까요. 그래서 나는 쟤가 저러는 걸 보고 정말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을 실감해요. 쟤가 저럴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쟤와 내가 공통점이 있다면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결혼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쟤가 이번의 남자가 자기 첫사랑이라는 거지요. 나 참, 이해할 수 없어요. 부부로서 오래 살비비고 살았으면 그게 사랑 아닌가요? ……나는 쟤한테 네가 팔자가 늘어져서 그러는 거라고 욕을 많이 해주었지요. 남편이 꼬박꼬박 봉급 타다 주겠다, 넓고 좋은 아파트에서 살겠다, 무슨 걱정이어요? 나처럼 남편이 산재병원에 누워 있는 바람에 셋방 살면서 벌이에 나선 년도 있는데 말이에요.”

마담은 울화가 치미는지 단숨에 맥주잔을 다 비워 버렸다. ‘남편이 중도 퇴직하며 받았던 퇴직금 모두를 주식으로 날린 사연( 내가 벌써 여러 번 들은 사연이다.)’까지 꺼내려다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네에.’ 대답함과 동시에 건너편 테이블 손님 쪽으로 간다.

마담은 그 테이블의 손님한테서 추가로 안주 주문을 받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이라고 해야, 취사용 가스기기와 냉장고가 놓여 있는 간단한 공간이다. 그 공간과 홀은 나지막한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다.

찌개를 끓이는지 가스 불 위의 냄비에 몰두하는 마담.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빨간 앞치마를 걸친 모습이, 특히 조리에 몰두하는 옆모습이 예쁘다. 손님들 쪽에서 나는 기척을 즉각 포착하는 능력도 그렇지만 저 예쁜 옆모습이 더 좋은 자산이 아닐는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대로 다가갔다. 내가 말을 건네기도 전에 마담은 돌아서서 두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문질러 닦더니 말했다.

선생님. 오늘 계산은 이만이천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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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맥주잔의 손잡이가 이렇게 어우러지기란 불가능하다. 논리적으로는 가능치 않은 상을 구현해낸 사진작가의 기술이 예술의 경지다. 하기는, 기술이나 예술은 영어로는  ART라고 포괄된다. 소설 '깊은 밤'의 남녀 어른이 보여주는 비논리적인 사랑의 모습이 이 생맥주잔들의 손잡이 어우러짐 모습과 어쩜 이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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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는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한 번도 같은 반에 있어 본 적이 없이 3년을 보내고 강원대학을 갔다.

강원대학에서는 과가 달랐다. 친구와 내가 학창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한 것은 춘천중학교 시절밖에 없는 것이다. 강원대학을 다닐 때 나는 학업에 관심이 없었다. 문학회 회원들과 문학 얘기로 소일하기 일쑤였다. 정작 글 쓰는 일보다 문학 얘기로 세월을 보낸 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저렴한 막걸리 집이 문학회 모임의 주된 장소였다.

전 날 마신 술이 덜 깬 채 캠퍼스를 다닐 때가 잦았다. 나는 그랬지만 친구는 도서관에서 지내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사범대로 이름이 바뀌는데 교육학부를 다니는 나와 다르게 친구는 법경학부였다. 70년대 초반의 강원대학 캠퍼스는 열악하기 그지없어서 하나뿐인 도서관이라는 게 몇 십 평밖에 안 될 단층 건물이 고작이었다. 그곳에서 늘 공부에 매진하는 학우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친구였다.

캠퍼스가 넓지 않아 친구와 나는 더러 마주치곤 했다.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하는지 친구의 두 눈은 충혈돼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소리 없이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며칠 만에 본 내게 친구와 친구 아버지를 거론하며 말했다.

얼마나 생활력이 좋은 부자(父子)인지, 글쎄, 속초에서 생선을 여러 상자 떼다가 중앙시장에서 팔고 있지 않더냐! 창피하게 생각지도 않고 시장 한복판에서 그러다니 정말 대단한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네 아버지는 먹고사는 일에는 관심 없고 체면만 차리니……내가 속이 탄다 타!”

 

이 얘기를 어제 친구한테 하자, 친구가 반쯤은 오해하셨다면서 해명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와 친한 분이 속초에 살고 계셔서 선물로 생선을 여러 상자 보내주신 거야. 요즈음은 동해바다 생선들이 씨가 말랐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 식구가 그 많은 생선들을 다 먹을 수 없으니,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아버지를 따라 중앙시장에 가서 팔아버리려 했던 거지. 결과를 말한다면, 한 상자도 못 팔았단다. 하하하.”

그 즈음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간사로 일했고, 우리 아버지는 예총 도지부장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봉급을 받았으나 우리 아버지는 사실상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자리라 오히려 집안의 재산을 축내고야 말았다. 예를 들어 1968년인가, 할아버지한테서 상속받은 작은 야산을 헐하게 팔아버린 게 그 한 예다. 그 때 마련한 돈으로 아버지가 이룬 예총 사업이 의암호 가에 있는 펜촉 모양의 김유정 문인비 건립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렀다. 내가 친구와 재회한 것은 1979107일이다. 장소는 공지천 가에 선 어느 2층 건물의 1층에 있는 카페였다. 나는 그 즈음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총각 교사였는데 휴일을 맞아 어떤 처녀 선생을 만나려고 춘천으로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그녀와 나는 그 해 여름방학 때 강원대학교에서 강습을 한 달 간 같이 받으며 알게 됐고강습이 끝난 뒤 한 번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처녀 총각이 만나는 일만큼 기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아들 녀석이 스물아홉 살 나이가 되자, 바쁜 시간을 내어 같은 직장 처녀를 만나고 하더니 마침내 올 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아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비처럼 딱 스물아홉 나이에 부리나케 배필을 찾아나서는 데 아비는 놀랐다. 처녀 총각이 때가 되어 자기 짝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면서,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대단한 장거가 아닐까. 지난 6·70년대에 산아제한 같은 모자란 정책을 편 탓에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심각한 인구절벽 사태에 직면할 거라는 뉴스가 나오는 요즈음이다.>

 

그녀는 서울의 모 중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107일 낮 12시 공지천 가의 카페약속 만남을 위해 서울 청량리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전화 통화가 전 날 되었다.

12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은 남았다. 그래도 초조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창밖의 공지천을 보다가, 출입문을 보다가 하는데 그 때 새 양복 차림의 친구가 출입문에 등장하는 게 아닌가. 친구는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와 아주 고마워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사태를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그 날 같은 건물의 2(무슨 회관의 식장이었다.)에서 결혼식을 치르기 직전에 1층 카페에 잠시 내려왔다가 나와 조우한 것이다. 친구는 청첩도 못했는데 결혼식에 내가 알아서 와 준 거라 판단하고는 내 두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빚기도 한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어제 친구한테 ‘1979107, 공지천 가의 카페에서 벌어진 오해37년만에 해명하였다. 그리고는 함께 허허허 웃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어이없는 오해 사건마저 이제는 그리워진 게 아닐까?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 그 날은, 춘천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피천득씨 수필인연의 마지막 대목대로였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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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독이 될 수 있다. 실상 은 우리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을 유효적절하게 잘 다뤄 이롭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약을 잘못 쓰거나 남용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국정농단의 한 주역으로 드러나기 전 최순실이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찍은 사진이 태블릿 피씨에 있다. 요즘도 TV에서 그녀를 다룰 때는 항상 같이 뜨는 그 사진이다. 혈기 좋아 보이는, 여유 있게 미소마저 짓고 있는 그녀다.

그런데 그 사진이 선풍기 아줌마를 닮았다고들 한다. 그럴 만하다. 다 들통 났지만 그녀는 별의별 이상야릇한 주사를 밥 먹듯 달고 살았기에 얼굴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의학적으로 검증이 안 된 주사도 있다니, 이건 약도 못 되고 오히려 독을 대놓고 주입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구속돼 있는 요즈음 그녀의 모습을 보면, 비록 핼쑥해졌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주 건강해진 모습 같다. 이상야릇한 주사 중독으로 선풍기 아줌마 같던 얼굴이 정상 가까이 되었고 비만 끼가 있어 보이던 몸매도 확실히 가라앉았다. 그럴 만하다. 구속돼 있으면서 그 이상야릇한 주사들을 맞을 수가 없는 데다가, 하루 세 끼 또한 절제되게 섭취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국정 농단 사건으로 드러나기 전에 과식하는 취향이 있었다는 것은 매스컴에서 누누이 드러난 바 있다.

자기 돈으로 샀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여하튼 수의를 입고 있다. 무늬도 없고 색도 담백하다. 입은 옷마저 수수해 보여서 그런 것일까. 요즈음 그녀는 순수한 의미의 새마음 운동에 앞장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건강해 보이는 그녀. 내가 착시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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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중학교 1학년 때의 특수반 담임은 수학을 가르쳤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와 자리 잡은 분이라 했다. 그분에게는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벌어졌는데 그분이, 학생들의 응원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는 스스로 나서서 응원 지도를 한 것이다. 키도 작고 짧게 이발하고 다니며, 게다가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갑자기 무용선생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현란한 응원동작을 보이다니…… 학생들은 놀라며 환호했다.

그 즈음, 단체로 그 먼 석사동의 교대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무슨 경기를 응원하러 간 듯싶은데 정작 경기의 내용보다 내 명찰을 풀밭에 잃어버린 기억만 생생하다. 강원도 내 제일 가는 중학교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명찰 하나도 평범치 않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직사각형 명찰이었다. 학년 전체가 줄을 맞추느라 움직이는 중에 내 상의 가슴에 단 그 명찰이 풀밭에 떨어졌는데 색이 녹색이어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나는 교대 캠퍼스만 보면 1964년 어느 날 그 풀밭에서 잃은 명찰을 떠올린다. 헝겊이 아닌 플라스틱이어서 분명 그 풀밭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하는 환상을 어쩌지 못한다. 만일 기적적으로 그 명찰을 몇 십 년 만에 되찾는다면 소설 한 편이 창작될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나는 각기 다른 반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일 년 뒤 다시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 반이 ‘3학년 2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여선생이 담임이었다.

친구가 어제 말했다.

지금도 3학년 2반 때 담임선생님을 가끔씩 뵈어.”

? 여태 살아계시단 말이야?”

그럼. 그런데 아주 많이 늙으셨어. 우리 아버님이 1·4 후퇴 때 피난 오셨는데 그 고향 분들의 모임이 있거든.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그 모임을 나가는데 거기서 담임선생님을 뵙지. 내외가 함께 나오시는데 두 분 다 6·25 때 피난 온 분들인 거야. 나를 보면 아직도 기억하고 반가와 하신다니까.”

그것도 참!”

내가 감탄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게다.‘이 좁은 춘천에 625동란 때 피난 와 사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중학교 3학년 2반 담임선생이 여태 제자(친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이제는 많이 늙어 할머니가 되었다니!’하는 인생 무상함에 대한 탄식도 섞였을 게다.

1966년도 춘천중학교 3학년 2반은, 당시 그 수()가 극히 드문 여선생이 담임한 반이자, 특수반이었다.

 

<1학년 때에 이어 3학년 때도 특수반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니까 이 수필을 읽는 이들한테 어떤 저항감을 줄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친구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상대를 잊지 않고 어떤 유대감을 유지해온 상황을 설명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수필을 읽는 분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특수반이라 해도 학생들을 일학년 때처럼 성적 순으로 앉힌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학급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다만 여선생이라 그랬을까, 학생들이 괜히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 해 봄 소풍날이었다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한 그 날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친구가 스마트폰에 담아온 것이다. 썩기 시작하는 고목 위에 셋이 서서 제 각기 포즈를 취했는데 친구만 단정한 교복 차림일 뿐 나와 또 다른 한 친구는 교복 상의 단추들을 풀어 제친 차림이다.

20171, 풍물시장의 어느 식당에 앉아서 60년 전 어느 봄날의 앳된 우리 모습을 목격하다니, 순간 갖가지 감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진 속의 나는 태평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광풍노도로 비유되는 격한 사춘기를 맞은 데다가, 하루하루가 어려운 가정환경 탓이었다. 아버지의 실직이 장기화되면서 집안의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었다. 그렇다. 내가 이 무렵부터 학교 공부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잡념이 많아졌는데 가정환경까지 열악하니, 자연히 공부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거다.

그런 심적 상황을 내재했으면서도 사진기 앞에서는 봄 소풍을 온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

결국 이 사진을 소재로 글 쓰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수필을 쓰게 된 까닭이다.

 

문득 그 소풍 날 있었던, 어떤 일이 선하게 떠올랐다J라는 친구가 벌인 사건이다. 요즈음과 달리 그 때는 사진기가 아주 귀했다. J가 사진기를 갖고 와 학급 사진을 찍겠다고 담임선생한테 말했다. 담임선생을 가운데 앉히고 반 학생들이 어렵게 기념사진포즈를 잡았다. 50명 되는 인원이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딴 데 가 있는 반 아이를 찾아오고 앞의 키 큰 놈은 좀 앉아 있어!’ 소리치고, 여 담임은 옷맵시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그렇게 공을 들인 후 J가 마침내 사진을 찍었다.

J는 나와 아주 친했다. 나중에 J가 나한테만 비밀을 털어놓았다.

필름도 없이 사진 찍었어. 장난 한 번 친 거지.”

J의 무모한 장난 또한 담임이 여선생이라 그랬을 것이다. 당시 3학년 2반 학생들 중에는 괜히 여 담임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골탕을 먹였으면 하는 애들이 있었다. 사춘기가 그 원인이라 나는 판단한다.

그 시절 내가 J와 어울리면서, 수업이 끝난 뒤 둘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벌인 못된 짓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작품으로 써 남길 것이다.

J하고는 친하게 어울렸으면서 정작 친구와는 소풍 날 함께 사진 한 장 찍은 것 이외에는 어울린 기억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환갑 넘어서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하고 시간을 내어 풍물시장 한 식당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니 어찌된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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