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협영화를 보면 무술의 고수는 한결같이 허연 수염의 노인들이다. 백발노인들이 펄펄 날며 젊은 협객들을 상대한다.

결코 현실에서는 가당치 않다. 현실에서의 노인들은 무릎이나 손목의 관절이 안 좋아 모든 동작을 조심스레, 느릿느릿 해야 한다. 무협영화에서처럼 땅 위를 펄펄 뛰었다가는 그 날로 정형외과에 입원해 장기 치료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노인들이 펄펄 뛸 수 있는 분야가 있긴 하다. 몸으로 뛰는 분야가 아닌 머리를 쓰는 학문의 분야다. 여기에 전제가 있다. 기억력의 쇠퇴나 감퇴가 없어야 한다.

 

중국 무협영화 속에서 펄펄 나는 백발노인들의 모습은…… 경로사상의 구현일까, 노화라는 숙명을 부정하고 싶은 욕심일까, 과장을 즐기는 중국 사람들의 습관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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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01-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조금 긴 글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짧을 수가... 너무 하세요 ㅠ ㅠ ‘바람의 파이터‘(방학기)에 보면 최배달이 중국 무예 고수와 겨루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고수는 노인입니다. 그런데 결코 최배달에 밀리지 않아요. ‘바람의 파이터‘ 내용이 최배달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만화이기에 결투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여요. 저의 결론: 중국 무협의 백발 노인 고수는 실제다! ^ ^

무심이병욱 2017-01-18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최배달이 노후에, 온몸의 관절이란 관절이 다 병들어서 극심한 고통 속에 삶을 마쳤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정형외과 의사인데 그런 사실을 어느 잡지에 기고했지요. 절대, 중국 무협영화 속의 ‘백발노인 고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바람의 파이터‘라는 건 실화에 픽션이 가미된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링을 주름잡던 레슬러들이 이제는 노후를 맞아, 동네를 조심조심 걸어다니십니다. 일반 노인네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저 유명한 박치기 왕 ‘김일‘이란 분이 말년에 병든 몸으로 고생 많았던 사실 또한,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백발노인 고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아니겠습니까? 복싱 챔피언 ‘모하마드 알리‘ 역시 복싱경기 때 머리에 받은 충격 탓에 노후를 폐인으로 보낸 거지요. 이 정도만 예를 들겠습니다.

찔레꽃 2017-01-1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걸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래도 굳이 한마디 더 보태면 무심님이 든 분들은 무림의 고수가 아니라 모두 격투기 선수들입니다. 이분들과 무림의 고수를 동격으로 놓아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아이고, 이건 그냥 떠오른 생각을 적은 거니, 답변 하지 마셔요. ^ ^ 그나저나 왜 무림의 고수 얘기를 하셨는지, 사실은 이게 더 궁금해요. ^^

무심 이병욱 2017-01-19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무림‘이란 이야기꾼 사이에서 나돌던 언어입니다. 허구적 단어란 말이지요. 인터넷으로 ˝ namu.wiki/w/무림 ˝이라 치면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김 용이란 소설가가 무협소설을 쓰면서 ‘무림‘이란 단어를 많이 등장시키는 바람에 마치 그런 세계의 사람들이 중국 땅에 실재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논쟁은 사양합니다. ^^^^^
이런 기회에 ‘찔레꽃‘님을 알게 되었고, 짧은 글에도 관심을 보여주는 데에 감사할 뿐입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는 성질이다. 정체성은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위키백과

 

자동차가 어떤 구조물에 부딪쳐 낸 사고 중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진입로의 윗부분 충돌 사고가 흔하다. 충분히 상상이 된다. 운전자가 차체(車體) 높이를 순간적으로 망각한 탓에 차체의 윗부분이 진입로 상부 구조물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차체가 높거나, 차체는 높지 않은데 차 위에 무슨 물건을 얹었거나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사고다.

그렇기에 운전자는 시동을 건 순간 그 차의 정체성부터 인식해야 한다. ‘나는 지금 차체가 높은 산타페를 운전할 참이다.’ 혹은 나는 차체가 긴 버스를 운전하려 한다. ’ 혹은 이 차는 본래 차체가 낮지만 위에 물건을 얹었다하는 등등의 인식이다.

이런 경우를 자동차의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일 만하지 않을까?

 

달리 말하여 주제 파악이다. 자전거 길을 자동차가 가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약한 교량 위를 탱크가 가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좁은 골목에 버스가 가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국정에 자격 미달의 여인이 임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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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것만 해도 감회가 남다른데, 그 친구가 건넨 ‘50년 전인, 중학교 3학년 2반 봄 소풍 때 찍은 사진한 장은 정말 특별한 감회에 젖게 했다.

친구와 헤어진 뒤 집으로 걸어오면서 이런 특별한 감회를 한 번, 부담 없이 편하게 수필로 써 보자고 생각했다. 마냥 길게 쓸 수 있을 것 같아 수필로는 매우 드문 연재 형식까지 구상을 마쳤다. 문제는 실존하는 친구라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 이러이러한 수필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려는데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하였다. 친구가 쑥스럽지만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마음 편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생각 외의 일들과 잇달아 맞닥뜨렸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마다 자기 얘기를 제대로 써 주기를 바라던 것이다. 돌아가신 지 25년이 돼 가는 아버지부터 당신의 한 많은 사연을 남김없이 써 주기 바랐다. 돌아가신 지 13년이 돼 가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남편 잘못 만나 고생 많았던 삶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대변해 주기 바랐다. 문제의 봄 소풍 날 사진 또한 그냥 있지 않았다. ‘교복 상의의 단추들을 풀어 제치고 교모는 약간 삐딱하게 쓴 자네 모습이 언뜻 불량기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민이 많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라고 난리쳤다. J라는 친구 또한 자네와 학창시절 때 가장 친했고 그래서 둘만의 사연이 간단치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냐?’고 항변했다.

마음 편하게 붓 가는 대로 한 번 길게 써 보자는 초심과 다르게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사연들에그 사연들을 제대로 들어줄 수 없음에 무척 힘들어졌다. 연재를 10회까지 생각했지만, 주마간산처럼 5회로 마무리 지은 게 그 때문이다.

이번의 시도가 뜻대로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우선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확연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수필이라 해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마음 편하게 쓰기 어려웠다. 이 점은 신변잡기 류()의 수필이 필연적으로 직면할 문제였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기회가 되면 이 수필의 얘기를 소설로 바꿔 써 보려한다. 소설로 완성한 뒤 수필과 비교해 보는 것 또한 아주 좋고 귀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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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는데 친구는 법률구조공단에 취직한 뒤 결혼한 것이다.

나는 그 날 만난 서울 여자와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헤어졌고, 4년 뒤 고향 춘천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내게 배필 인연은 먼 데 있지 않았다. 나고 자란 고향에 있었다. 친구보다 결혼이 4년 늦었기에 내 첫 아이가 친구 첫 아이보다 네 살 어리게 되었다.

친구를 다시 만난 건 1992년이다. 내가 택지 분양권을 샀는데, 뒤늦게 분쟁의 소지가 많은 문서라는 사실을 알고는 법적 조언을 들으려 친구를 만난 것이다. 친구가 조언하는 대로 그 분양권을 판 노인을 다시 만나 계약서를 보완하고서야 가까스로 안심이 되었다.

분양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웃돈 받고 팔려 했지만 이미 부동산 경기가 식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게 됐는데 그 때 아내가 말했다.

고민할 게 뭐 있어요? 이참에 우리도 집 지읍시다.”

맞는 말이었다. 택지 분양권을 샀으니 그 택지에 집을 지으면 될 일이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게 된 연유는 그러했다. 1996818일 내 명패가 달린 단독주택에 입주했으니, 돌이켜보면 감격스러운 일이었는데 직장 일이 너무 고된 즈음이라 감격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다.

친구 역시 그 즈음에 이웃한 동네의 택지에 집을 지었다. 이웃해 살게 되면서 가끔씩 만날 만도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각자의 직장이 달랐던 탓도 있을 게고, 내성적인 성격들이라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 않았을까.

 

어제 아침 불현 듯이러다가는 친구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풍물시장의 한 식당에서 오후 5시 반에 만나 저녁 겸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이 됐다.

겨울이라 오후 5시를 넘자 금세 어둑해졌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식당 부근에 서서 친구를 기다렸다. 혼자 식당에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이 궁상맞아 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30분이 되자 어둠 속에서 친구가 나타났다. 마치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나타나듯 말이다.

그 새 머리도 세어 있는 친구.

풍물시장은 공지천 가에 조성돼 있다. 1961년경 하꼬방 많던 공지천 가에서 아버지 곁에서 조우했던 어린애들이…… 주위에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이제는 그 옛날의 공지천 풍경을 찾아보기 힘든 풍물시장의 한 식당에 머리들이 허옇게 센 모습들로 마주앉았다. 술잔을 권하며 밀린 사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나 나나,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세상을 떴다.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문득 자기 스마트 폰의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춘천중학교 3학년 2반 봄 소풍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간단치 않은 감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내 모습이지만 실상은 심적 갈등이 많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소설 쓰기를 전공으로 하지만 이 사진에 관한 얘기만은 마음 편하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필로 쓰고 싶어졌다.

오늘 새벽, 컴퓨터를 켜 한글 화면을 띄운 뒤 글을 시작했다.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왜 오랜이란 수식이 필요한지 이유부터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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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이 지났다.

홀 안의 그녀를, 나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지켜보았다. 웬일로 손님들이 홀에 가득 차, 문 열고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주 맵시 있게, 손님들 사이로 안주와 술잔을 나르고 있었다. 마담은 주방에서 안주들을 데우고 굽느라 홀 써빙을 할 겨를이 없어보였다.

단체 손님들인지, 왁자지껄하다가도 일시에 조용해지고 그러다가 갑자기 뭐가 찢어지듯 와악!’ 웃는다. 그런 웃음소리들이 출입문 틈새로 양()을 대폭 줄여서 들려오는 골목의 어둠 속에 나는 서 있었다. 결국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이 집을 찾아오는 이유가, 지난 70년대의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생맥주의 시원한 맛을 음미하거나 마담과 말동무가 되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낙에 있는데…… 저렇게 시장판 같다면 팝송은커녕 마담 얼굴도 보기 힘들 것 같다.

하긴 내 몸의 건강으로 봐서도 발길을 돌리는 게 좋다. 얼마 전 병원의 젊은 의사는 재차 경고했다. ‘음주는 선생님 통풍에 안 좋습니다.’

귀가하면서, 그녀가 홀 안에서 써빙하던 모습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홀이 어둑해 보이도록 꽉 들어찬 손님들 틈에서 그녀는 한 마리 작은 나비처럼 잘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두 손으로 안주접시와 생맥주 잔을 나누어 들고 흔들림 없이 잘 다닐 수 있을까. 손님들 틈을 누비던 하얀 원피스의 그녀는 맵시 있는 데다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건 바삐 사는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녀 문제는 어려울 것 없이 간단했다. 50세 즈음의 폐경 여성들이 겪는다는 갱년기 증상, 바로 그것이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 수시로 변하는 몸의 체온, 살아온 날들이 잘못 된 것처럼 여겨지는 우울증……. 바로 내 아내가 몇 년 전에 겪은 일이다. 아내는 한동안 힘들어하다가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았다. 부동산 일에 몰두하면서, 아내는 갱년기 증상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벗어났다.

작은 흰 나비처럼 어둑한 홀 안을 누비던 그녀의 몸동작으로 봐서 이미 갱년기 증상의 터널을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다. 그런 여자를 앉혀놓고 그 남자와의 사이를 남편이 알고 있습니까?’ ‘남편이 아버지로서 아들한테 제 역할을 합니까?’ 따위를 캐물었으니 도대체가 인생 상담이 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 다른 엉뚱한 골목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독백했던 거나 다름없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흘 후다.

초저녁부터 생맥주 집에 들렀다. 내가 첫 손님이었다. 마담을 잠깐 오라하여 맞은편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 있는 어조로 물었다.

친구 분이 요즈음은 잘 지내지?”

아니에요, 어제도 여기서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내가 애먹었다니까요. 손님이 없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가 다른 친구를 불러다가 그 애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니까요. 가게에서 울고불고 그러면 들어오려던 손님들이 다른 데로 가거든요. 걔는 정말 큰일이야…….”

나는 한바탕 늘어놓으려 했던 갱년기 증세론을 집어치웠다. 손님도 없는 초저녁이라 그럴까, 마담은 기척을 포착하는 특유의 능력도 접어둔 편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걔 아들이 얼마 전에 군대 갔대요. 35평 아파트에 각방 쓰는 남편과 자기만 댕그라니 남아 있는 꼴이라서…… 이젠 집이 아니라 버스대합실에 낯선 사람끼리 남은 꼴 같다나 뭐라나. 그래도 아들이 있을 때에는 집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젠 그런 느낌마저 사라져서…… 썰렁한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어찌 살 수 있냐며 대성통곡 하더라니까요.”

오직 이혼합의서에 도장 찍는 문제 하나로 남아 있는 낯선부부의 아파트가 눈앞에 선하다. 아마도 넓은 거실 불도 꺼놓고 각자가 쓰는 방에만 불이 켜져 있겠지. 각방 두 개만 제각기 알아서 불이 켜지거나 꺼지거나 하면서 운영되는 낯선아파트.

참 선생님, 뭘 드시겠어요? 생맥주 500하고 무슨 안주?”

마담도 한 잔 해요. 안주는 은행 갖고 와요.”

은행은 불에 조리할 필요가 없이 금세 내오는 안주다. 마담이 생맥주 500 두 잔을 먼저 테이블에 갖다 놓은 뒤 은행도 한 접시 가져왔다. 아이 웬투 유어 웨딩(I went to your wedding)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마담이 보다 속 깊은 얘기를 꺼냈다.

선생님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걔가 좋아한다는 남자애가…… 우리 생맥주 집을 들락거리던 홀아비에요. 소주 한 병, 어묵 한 그릇을 시켜놓고 앉아서…… 어디 후릴 과부나 바람난 여자 하나 없나, 두리번거리는 거 있지요? 내가 딱 보면 안다니까요. 그 홀아비 자식이 내가 남편을 병원에 두고 지낸다는 것을 알고는 집적거렸다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선생님 정도만 되어도 뭐가 이루어졌을지 몰라, (웃음) 하지만 그 자식은 영 내 스타일이 아닌걸요. 그래서 쌀쌀하게 대하면서 말도 붙이지 못하게 했더니…… 그러다가 내 친구와 합석한 거여요. 알고 보니 둘이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사이라나 뭐라나, 그 날 밤늦게까지 그 자식이 내 친구를 앞에 앉혀놓고 눈물을 질질 짜면서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그러는가 보더니…… 그년이 그렇게 뿅 가서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게 아닙니까? 내가 여기 일이 바쁠 때 전화로 부르면 아무 때고 달려와서 일손을 도와주는 착한 친구가, 그년이거든요. 그러니 내가 요즈음 얼마나 속이 불편하겠어요? 혹시나 해서 지난번에 선생님한테 상담 의뢰까지 하게 된 거지요.”

마담은 젊어 보인다. 남편이 몸을 다치는 바람에 고생하며 산다는 데도 어쩜 이렇게 주름살 하나 없을까. 천벌 받을 말이지만 남편이 없다면 이 집은 더 많은 남자손님들로 바글바글 할 게다. 아니다. 벌써 재혼해서 이 장사를 하지 않겠지.

열흘 전에 걔 남편분이 여기로 나를 찾아 왔었어요. 술 한 잔 못 한다는 그분이 왜 찾아 왔겠어요? 너무 힘드니까 생각다 못해 와이프 친구라는 나를 찾아 의견을 구하려는 거지요. 그분이 그러더라구요. ‘아내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나도 너무 힘들다. 자식이고 뭐고 그냥 이혼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줄까 한다.’. 그래서 내가 펄쩍 뛰며 말렸어요. ‘아니, 다 늙어서 그게 무슨 모자란 짓이냐? 그건 두 사람 다 여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선택이니,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걸 알고 계셔야 한다, 폐경기 여자들은 한 번씩 우울증에 걸린다는 걸. 걔도 지금 우울증에 걸린 게 틀림없으니까…… 당신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분명히 제 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장담한다. 절대 그릇된 생각을 갖지 말고 꾹 참고 기다려 보시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그 착한 남편분이 눈물을 닦고는 잘 알겠다며 갔거든요.”

"홀아비 동창 자식 얘기는 안 해 줬수?”

선생님도 참! 어떻게 그 얘기를 해 줘요? 일만 복잡해지지. 그러잖아도 우리 친구들이 함께, 그 자식을 불원간 만나기로 계획을 짰어요. 모두 그 자식한테 분개해서 단단히들 벼르고 있거든요. 그 자식이 년한테 집적거리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입니다.”

나이 쉰 살 된 아주머니들이 장발에 청바지 차림이라는 홀아비 녀석을 둘러싸고는 암탉들이 모이 쪼듯 에워싸서공격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 같이 그 자식을 만나면 뭐라 말하려고 그래요?”

“‘네가 알아서 그 애를 멀리 해 달라고 말하려 하지요. 그 자식이 인테리어로 먹고 사는 놈이잖아요? 이 도시가 좁은 바닥이기 때문에 우리 친구들 경고를 듣지 않다가는 큰 코 다칠 거거든요. 친구들 중에는 건축회사 사장을 남편으로 둔 애도 있고 해서 마음만 먹으면 그 자식 밥줄을 콱 막아 버릴 수 있어요.”

그 홀아비가 이혼하고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했다는데 그런 경고가 먹힐까?”

그 때 출입문 쪽에서 기척이 났다. 마담은 즉시 일어나 그 쪽으로 가며 손님들을 맞았다. 잇달아 들어서는 손님들로 홀의 테이블은 금세 세 개나 찼다. 마담은 주문 받기, 기본안주 내놓기(강냉이나 중국산 땅콩들을 작은 바구니에 담아 내놓는다), 가스기기의 불을 켜 석쇠부터 달구기, 냉장고에서 냉동된 구이안주들을 석쇠 위에 올려놓기, 찌개거리를 칼로 썰어 냄비에 담기, 잔에 생맥주를 담아서 갖다 놓기, 냉장시설에서 소주병을 꺼내기…… 등의 다양한 일들을 쉼 없이 수행한다. 그러는 중에 걸려오는 휴대폰도 받고 앰프의 음악소리도 조금 낮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아 있어 봤자 소란한 가운데 팝송도 들리지 않을 테고…… 마담과의 말동무는 언감생심이겠다. 찌개냄비 밑의 가스 불을 조절하던 마담이 내가 다가서자 어느 새 두 손을 앞치마에 비벼서 물기를 닦았다.

만 삼천 원입니다.”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다. 왕복4차선 차도로 차량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달리느라 정신없었다. 그 때 횡단보도 건너편의 그녀를 보았다. 막 퇴근한 듯 보이는 청년들 틈에 그녀가 서 있었다. 어둠이 묻은 흰 원피스에 작은 키의 그녀. 딴 데 정신이 팔렸는지, 횡단보도의 파란불에 청년들이 건너가는데도 모르고 서 있다가 뒤늦게 움직인다. 그 새 횡단보도 불이 붉게 바뀌면서 그녀는 도로 중간에 낙오됐다. 차량들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자, 그녀는 중앙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량들의 거센 물결 속에 그녀는 마치 길 잃은 어린애처럼 서 있었다. 작은 몸에 차량의 전조등불빛들이 벌떼처럼 묻었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했다. 얼마 후 다시 파란 불로 바뀌면서 그녀는 가까스로 횡단보도를 다 건너왔다. 그리고는 서 있는 나도 몰라보고 황황히 그 골목 쪽으로 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이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엄지발가락들이 온통 쑤셔 한 걸음 내디디기도 힘들었다. 통풍이 재발했다. 종일 누워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자정이 가까운 밤에 생맥주 집을 찾아갔다. ‘점포임대를 써 붙이고 문 닫은 가게들에다가, 늦게 올 손님은 없다는 판단으로 일찍 문 닫은 가게들까지 보태져서 골목의 어둠은 한층 무거웠다. 홀의 불그레한 불빛이 바깥까지 기어 나와 골목 어둠을 두어 평 잠식하는 풍경으로, 생맥주 집은 별 일 없어 보였다.

아니, 별 일이 있어 보였다. 마담이 구석진 테이블 자리에 혼자 앉아 비싼 복분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홀에는 젊은 남녀 한 쌍만이 있었다. 소주 회사의 심벌이 그려져 있는 빨간 앞치마의 한 쪽 어깨 끈이 풀어진 채 앉아 있는 마담. 내가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수?”

마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복분자 술을 갖다 마시는 것도 그렇고, 내가 들어서는 기척에도 아무런 포착 행동이 없었으니 무슨 일이 있는 듯싶다.

무슨 일 있수?”

죄송해요. 속상한 일이 있어서. , 주문을 받아야지.”

“500마담이 먹고 싶은 안주로 해.”

마담이 생맥주와, 과일 통조림을 갖고 왔는데 오늘은 생맥주 거품이 잔을 넘쳤다. 내 옆에 다시 앉은 마담. 나는 맥주잔을 들어 마담의 작은 복분자 술잔과 가볍게 부딪쳤다. 부딪히는 강도를 제대로 못 맞추었는지 복분자 잔의 술잔이 흔들리며 술 대부분이 쏟아져버렸다.

다른 날 같았으면 벌써 기척을 포착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못해, 젊은 남녀가 주방 부근 카운터 앞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마담이 뒤늦게 발견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쪽으로 가며 마담이 외쳤다.

죄송합니다아!”

계산을 치르고 젊은 남녀가 나갔다. 문밖까지 나가 배웅한 뒤 다시 내 옆의 자리로 돌아온 마담. 오는 도중에 한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기까지 했다.

뭔 일이 있어?”

마담이 내 어깨에 상체를 기대며 말했다.

걔한테…… 절교 당했다니까.”

친한 친구끼리 왜 그랬어?”

그러게 말이에요. 그년이 나한테 네 까짓 년과 친구였다는 게 수치다. 다시는 너 같은 년을 만나지 않겠다면서…… 절교를 선언했다니까요. 내가 다 제 년을 위해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며칠 전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다 못 건너고 차량들에 휩쓸릴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담한테 절교를 선언하기 직전의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그 새끼를 불러내서 다시는 걔를 만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그 새끼가 알았다고 하더니…… 그년을 피했던 모양이야. 그 새끼는 그년 아니더라도 아무 년이나 있으면 되니까…… 그년을 욕 먹어가면서까지 만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랬더니 그 미친년이 눈이 뒤집혀서……

친한 친구를 잃은 것도 그렇지만 일손이 달릴 때 거저 도움을 얻을 일도 사라지고…… 이런 장사에 아가씨 하나 거저 두는 간접적인 효과도 사라져버려 이래저래 속상한 마담 같다. 나는 근심에 젖어 있는 마담한테 한 팔을 뻗어 이 깊은 불황을 견뎌 내는, 가냘프고 여린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향긋한 샴푸 냄새나는 머리카락들이 내 뺨에 닿았다.

, 오늘 선생님 따라가면 안 되나?”

눈물로 눈 화장이 조금 지워졌지만 여전히 예쁘고 둥근 눈이다.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그 눈에 빠져서 이 밤 나는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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