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지금도 인터넷 신문기사를 보면, 올해의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거라는 견해와 그렇지 않고 내리막길로 들어설 거라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문제는 이런 견해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밝히는 견해라는 데 있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큰 관건인 부동산 가격조차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것들이 다 그렇다. 항상 오를 것이라는 견해와 내리막길로 갈 것이라는 견해가 맞선다. 매년 그렇다. 솔직히 그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그러듯 항상 예측이 갈린다면 차라리, "부동산이나 주식이나 펀드나 모두 예측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심지어는 날씨조차, 온난화가 계속된다더니 느닷없는 한파와 폭설에 '작은 빙하기의 시초'라는 전문가의 견해까지 나온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현실 속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역력하다. 하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삶이 될까? 유럽의 복지제도가 잘 된, 살기 좋은 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는 게 그런 반증이다. 너무 근심걱정이 없다 보니 ------- 따분하고 지루한 삶이라 여겨져 어느 순간 권총의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그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을 매듭짓는다는 것이다. 

역시 적당한 근심걱정을 갖고 사는 게 나쁘지 않겠지. 아니, 적당한 근심걱정을 갖고 살아야 되겠지.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얘기를 하고 말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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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용이네 집안은 남해 바닷가 사기장이 마을에서 살았다. 사기장이 마을은, 도자기를 구워 나라에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기장들의 공동체다. 용이의 아버님은 마을에서 가장 지체 높은 지유(指諭)’자리를 맡았다. 도자기도 굽지만 다른 사기장들도 통솔하는 자리다. 물론 나라로부터 받는 녹봉도 마을에서 가장 많았다. 용이 아버님은 도자기 만드는 일을 마치면 언제나 물 빠진 갯벌에 나가 굴도 따고 낙지도 잡았다. 미천한 집 가장이 바랄 게 뭐가 있던가. 그저 식솔들 입에 거미줄 칠 일 없이 사는 것 하나 바랄 뿐이다. 행복한 용이네 집에 불행이 닥친 것은 어느 여름 날 배 타고 와 습격한 왜구들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웃옷만 걸친 기괴한 차림으로 긴 칼을 휘두르며 사기장 마을을 도륙 냈다.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도자기들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 버렸다. 반항하는 양민은 그 자리에서 칼로 베 죽였는데 그 때 용이의 아버님도 참변을 당했다. 그 후로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마음 편히 도자기를 구울 수 있고 토질도 적합한, 다른 좋은 땅을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데가 바로 방산이다. 방산 땅에는 도자기 재료로 쓰는 흙 중 가장 좋은 백토가 곳곳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렸던 탓에 도자기 일도 제대로 배우진 못한 용이었지만 아버님의 유업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용이는 마음씨 고운 옆집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아버님처럼 지유도 되었다. 하지만 지유가 된들 뭐하나. 녹봉도 끊기다시피 돼, 먹고 살 길이 아득한데…….

 

용이는 사내와 그쯤에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헤어지고 말고도 없었다. 그냥 용이가 먼저 지게를 다시 지고 내금강 쪽으로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되었다. 그러면 사내는 반대방향인 두타연 쪽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고갯마루에 남아 있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한테 음식동냥을 하든지 할 게다.

막상, 지게 지고 일어나 고개 아래쪽으로 발길을 내디디려던 용이가 생각을 바꿨다.

어이, 나 좀 보시게.”

사내는 소리를 못 듣는 탓인지 어리둥절한 낯이다. 하는 수 없이 용이는 등에 진 지게를 다시 땅에 내려놓은 뒤 강아지한테 하듯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사내가 다리를 절면서 다가왔다. 용이는 손짓발짓으로뒤에서 이 지게가지를 붙잡으며 고개 아래까지 따라와 달라. 그러면 전대에 든 볶은 콩을 다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가 다시 지게를 지고 비탈진 고갯길을 내려가는데 과연 사내가 뒤에서 지게가지를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사달이 났을 것 같다. 작은 지게에 사기그릇 오십 점이라니 욕심이 과했던 걸까. 비탈길 아래쪽으로 쏠리려는 그릇들 무게 중심 탓에 용이의 지겟작대기가 연실 후들거렸다. 고개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용이는 고개의 사분지 일쯤 내려오다가 결국 다시 지게를 세웠다. 물건들이 높이 얹힌 지게를 비탈길에 세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뒤의 사내가 두 팔 벌려 지게가지에 얹힌 그릇들을 안아주었기에 가능했다.

목덜미고 겨드랑이고 용이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용이는 소매자루로 땀을 닦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도 따라 앉으며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하긴, 애당초 벙어리인 사내와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적막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눈앞으로 그림같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가을 햇빛을 받아 하얀 백옥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솟아 있는 검푸른 소나무 잣나무 숲은, 마치 백옥 보석들을 떠받쳐주는 검푸른 색 비단 같다. 저 일만 이천 봉에 허연 운무라도 피어나면 신선들이 바둑 두며 천 년을 보낸다는 선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 고개의 전설이 용이한테 떠올랐다.

신라왕조 말기 때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천 년 사직을 왕건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했다. 이를 반대했던 마의태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측근들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이 고개에 이르러 일만 이천 봉의 황홀한 풍경을 보게 되자, 마의태자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마음이 덧없어졌다.‘신선세계에 들어왔으니 다시는 속세에 나가지 않겠다며 당신의 머리칼들을 다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이 고개를 단발령(斷髮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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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장은 나라에서 명하는 대로 도자기들만 잘 구워내 바치면 농사 지어먹을 만큼의 녹봉도 나오는 안정된 업이었다. 하지만 근년 들어 왜구들의 침략이 잇따르고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이라는 큰 사건까지 나자, 나라가 몹시 어지러워지면서 사기장의 생계마저 흔들려버렸다. 관청의 명대로 도자기들을 구워 바쳐도 녹봉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용이와 아들이 사기그릇 백 점을 반씩 나누어 지게들에 지고 아비는 풍악산 정도사로, 아들은 개경으로 각기 집을 떠난 건 그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는 길이 비교적 편한 개경은 용이가 가고, 높은 단발령 고개를 넘어야 하는 정도사에는 아들이 가는 것으로 계획했었다. 하지만 집 앞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길을 바꿨다. 정도사 주지 스님을 만나 뵙고 사기그릇들을 사 달라는 부탁을 하려면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안면도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더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부처님께 공양드릴 때 쓰이는 그릇들이야 귀한 놋그릇이지만 스님들이 먹고 마시는 데 쓰이는 그릇들은 목기가 고작일 터. 이번에 갖고 가는 사기그릇들이야말로 그런 스님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주는 물건이 될 게다. 용이는 무거운 사기그릇들을 지게에 지고 이 높은 단발령 고갯마루를 향해 겨우겨우 올라오면서 그런 희망적인 생각들로 몸의 고통을 참았던 것이다.

 

사내가 볶은 콩 두 홉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자세를 가다듬고서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 한다. 비렁뱅이치고는 인사성이 발랐다. 고갯마루에서 받는 늦가을 햇살이 따갑다. 용이는 지게가 드리운 그늘에 혼자만 앉아 쉬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게가지 위에 높이 얹은 그릇들 덕에 긴 그 그늘이 최소한 두 사람은 수용할 듯싶다. 용이는 땡볕을 받고 있는 사내한테 말했다.

이 그늘로 들어오시게.”

사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용이를 볼 뿐이다. ‘, 이 사내가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탓에 벙어리가 된 거겠지.’뒤늦은 생각에 용이는 사내의 한 손을 잡아 지게 그늘 안으로 끌어들였다. 비로소 알았는데 사내는 왼쪽다리마저 절고 있었다. 까치집 같은 산발에 넝마 같은 차림에 다리마저 절다니, 어쩌다가 이런 딱한 꼴이 됐을까.

한동안, 왜구들에다가 홍건적들까지 쉴 새 없이 쳐들어와 약탈과 살상을 일삼다가 격퇴됐었다. 사내가 그 때 식구들을 모두 잃고 몸마저 상한 채 유랑민이 된 걸까? 용이는 자신보다 더 딱해 보이는 사내를 보며 왠지 서글퍼져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문재 굴 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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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이 사람, 뭐하자는 거야?”

용이는 본능적으로 지게 등태에 숨겨두었던 칼을 찾아 빼들었다. 세상이 흉흉한 탓에 먼 길을 다닐 때에는 이런 칼 하나는 비치해야 했다. 사내는 서슬 퍼런 칼에 놀라 무릎 꿇고 앉더니, 두 손을 비비며 다시어버버소리를 냈다. 그제야 용이는 상황을 알아챘다. 사내는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용이는 칼을 다시 지게 등태 속에 넣었다. 그러자 사내 표정이 밝아지더니 이번에는 웬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바친다. 용이가 그 보따리를 받아 풀어보았다. 머루 다래만 가득했다. ‘숲에 들어가면 지천인 게 머루 다래일 텐데, 이걸 바친다고?’하는 어이없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되돌려주려 하자 사내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용이 지게가지 끝에 붙들어 매단 전대를 가리켰다. 전대에는, 용이가 오늘 새벽 방산에서 길을 나설 때 아내가 볶아준 콩 열두 홉이 들어 있다. 사내 행동이 짐작 갔다. 보따리의 머루 다래를 드릴 테니 그 전대에 들었을 식량 좀 받아먹고 싶다는 뜻이다. ‘바꿔먹자는 것 같지만 사실 구걸하는 거나 다름없다. 사내는 그 동안 산에서 머루 다래 같은 산열매나 따 먹으며 연명하느라 지친 것일까.

이 단발령 고개를 내려가면 내금강이다. 내금강에는 절이 많다. 더러, 전란 중에 불타버린 절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절이 무사하며 특히 정도사(正道寺)가 예전처럼 불사를 정상적으로 유지한다기에 용이는 쌀을 얻어올 희망을 가졌다. 십 년 전, 어머님의 천도재를 정도사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마음 푸근한 주지 스님이 용이가 지게에 지고 가는 사기그릇 오십 점 정도는 흔쾌히 받으시며, 그 값으로 공양미로 쓰이는 쌀 한 가마니를 성큼 내주실 게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 용이는 애절히 구걸하는 사내한테 인심 한 번 쓰기로 했다. 전대를 풀어 볶은 콩 두 홉쯤 꺼내 건넨 것이다. 사내는 얼른 땅바닥에서 일어나면서 두 손으로 볶은 콩들을 받더니 이내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볶은 콩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애절했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용이는 어이없어 하다가 보따리에서 머루 서너 알을 꺼냈다. 하지만 쉰내에 먹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전대에서 볶은 콩을 한 홉쯤 꺼내 입안에 털어 넣고 사내처럼 으직으직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전대에 볶은 콩이 아홉 홉쯤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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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방산(方山) 용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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