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행복하다. () 내비게이션으로 tv 뉴스를 보기 때문이다.

 

물론 차에서 쓰던 내비였다. 그런데 지난 봄, 업그레이드 시키려고 판매점에 갔다가이 내비는 구형이라 업그레이드가 안 된다는 속상한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였다. 업그레이드 못한 채 그냥 차에 달고 다니거나, 새것을 사서 차에 달거나.

전자를 선택한다면 돈은 절약되겠지만 곳곳에 신설된 도로들을 안내받지 못하고 다녀야 되는 곤란이 문제였다. 머지않아 차를 몰고 동해안을 한 번 돌 계획인데 그 긴 거리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걱정됐다. 하는 수 없었다. 돈이 들더라도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새 내비를 차에 달자 이전 내비가 폐품이 돼버렸다. 그냥 내버리려다가농막 용 tv로 활용하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언젠가, ()씨가 컨테이너에서 지내면서 폐 내비를 tv로 활용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그의 손재주가 부러웠을 뿐만 아니라 비좁은 거처마저 묘하게 재미있어 보였던 거다.

우리(나와 아내)가 컨테이너 농막을 밭 가장자리에 갖다 놓고 농사지은 지 벌써 6년째. 농사 일 하다가 잠시 쉬는 5평 넓이 컨테이너라서 침낭과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조리 도구정도만 갖췄는데 우리도 이 기회에 모씨처럼 tv도 볼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었다.

나는 우선은, 비닐봉지에 폐 내비를 담아 우리 집 서재 선반 위에 갖다 놓았다. 적당한 기회에 모씨의 자문을 받아 농막에 tv로 설치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실행 못하고 봄이 지나갔다. 농사 일이 워낙 바쁜 철이었기 때문이다. 밭 갈고 비닐 멀칭하고 파종하고, 어디 그뿐인가 올해부터는 산짐승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물망까지 사서 담처럼 둘렀다.

여름이 되자 농사 일이 한가해졌다. 본격적으로폐 내비 농막 설치에 나섰는데 어럽쇼, 정작 폐 내비를 넣은 비닐봉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봄에 우리 집 서재 선반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했다. 서재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집 층계 밑의 창고, 나중에는 혹시나 싶어 농막 안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폐 내비를 서재의 선반에 둔 건 확실하나?’

내 기억력을 의심까지 하게 됐다. 어디다 물건을 두고 찾지 못하는 상황이 치매의 전조라는 기사를 본 듯도 싶었다. 그놈의 폐 내비 때문에 내 자신까지 의심받고 있었다. 정처모를 울화가 치밀었다. ‘망할 놈의 내비 같으니라고!’ 결국 폐 내비 찾기를 단념했다.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집 층계 밑의 작은 창고에 들어가 뭘 찾다가 웬 작고 반듯한 사각 종이 백에 눈길이 갔다. 그 백을 열었더니 세상에, 그 폐 내비가 얌전히 들어 있지 않은가. 비로소 짐작이 갔다. 아내가 서재에 들어갔다가 서재에 어울리지 않은 그것을 발견하고는 창고로 옮겼으리라는 것을. 깔끔한 성격이라 그것이 허접한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반듯한 종이 백으로 옮겨 담기까지 했으리라는 것을.

그 동안 내가 층계 밑 창고를 숱하게 들락거리면서 이 종이 백을 여러 번 봤을 텐데 왜 한 번도 열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저 비닐봉지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듯싶다.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한다는 시이불견(視而不見)이 이런 경우다. 사실, 내가 한 번만이라도 아내한테 여보, 혹시 비닐봉지에 내비게이션이 들어 있는 것, 못 봤나?’하고 물어봤더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은 아내한테서 핀잔맞을까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서재에 무슨 고물까지 갖다 놔요?’하는. 혹은 폐 내비 하나 갖고 너무 요란을 떠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 침묵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폐 내비를 찾자 어서 우리 농막에 설치하자는 의욕에 불타올랐는데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농막에서 쓰는 전기도 집처럼 220볼트인데 폐 내비는 5볼트용 기계였다. 그렇다면 전압을 변환시키는 무슨 장치가 있어야지, 만일 그냥 연결했다가는 폐 내비가 터진다든가 하는 사고가 날 게 뻔했다. 천생 손재주 많은 모씨의 자문이 필요했다. 그런데 모씨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영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전형적인 인문계 성격으로 기계공학적인 분야는 꽝인 내가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컴퓨터를 켜 인터넷 검색이다. ‘내비게이션을 집에서 tv로 보려면?’이란 다소 긴 문장을 넣어 검색했다. 마땅한 답이 뜨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비는 기본적으로 차에 부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옆 동네에서 전업사 간판을 언뜻 본 기억을 떠올렸다. 부리나케 전업사를 찾아갔더니출장중이란 안내문이 문에 붙어 있었다. 다시 밤에 찾아가자 다행히 전업사 사장이 있었다. 내가 폐 내비를 보이며 말했다.

이걸, 집에서 보는 tv로 활용하려고 하거든요. 그냥 집의 전기를 이어서는 안 될 것 같고 무슨 연결 장치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그가 씽긋이 웃더니 답했다.

어댑터라는 걸 찾으시는 건데요, 어댑터는 이런 전업사가 아니라 전파사에 가야 합니다.”

비로소 내가 그 동안 찾은 게 어댑터라는 사실과, 전업사와 전파사가 다른 업종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 어디 좋은 전파사 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요즈음은 전파사가 대부분 사라져서 말입니다.”

맞는 말이다. 어느 때부턴가 그 많던 가전제품 판매점들이 사라져갔고 그와 함께 전파사들도 문을 닫았다. 세상이 변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전파사를 찾았다. 춘천에 남아있는 전파사 서너 곳이 화면에 떴다. 그 중 한 곳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았다. 두 번이나 전화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새 폐업한 걸까? 다른 전파사에 전화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내 용건을 들은 사장이 허허허 웃더니 답했다.

어댑터가 있기는 한데요, 말씀하신 어댑터는 내비를 파는 곳에 가야 있습니다. 거기 가면 해결될 겁니다.”

결국 나는 돌고 돌아 새 내비를 산 폐 내비가 생기게 된 업체로 가게 된 거다. 지난봄에 새 내비를 사간 내 얼굴이 기억난 걸까? 사장은 혹시 자기가 판매한 내비가 잘못 됐나 잠시 긴장하는 기색 같았다. 하지만 내 용건을 얘기 듣고는 미소 지었다. 전업사 사장이나 전파사 사장이나 내비 사장이나 약속이라도 한 듯폐 내비를 집에서 보는 tv로 바꾸려는 내 의도에 웃음으로 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른이 하는 짓치고는 아동스러워 보였던 때문이 아닐까? 하긴 나 역시 모씨가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폐 내비를 이용해 tv를 보는 모습을 본 순간 묘하게 재미있었다.

우리 어른들은 아동스러운 짓을 목격했을 때 오래 전 떠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 미소 짓게 되는 게 아닐까.

마침내, 내비 사장이 부품들이 잡다한 상자에서 어댑터를 하나 꺼내더니 줄을 덧붙이는 작업을 하고서 220볼트 전기와 내 폐 내비를 이었다. 그러자 tv 화면이 떴다. 2만원 들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폐 내비 구하기가 막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밭으로 가 농막에 설치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흘 전 올해 밭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농막도 폐쇄했기 때문이다. 한 해 밭일의 마무리는 늦가을에 지하수 관정의 모터 속 물을 모조리 뺌으로써 이뤄진다. 모터 속 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추운 겨울에 모터가 얼어터진다.

내년 3월 중순쯤 모터에 다시 물을 부어 작동시키면서 밭농사가 시작된다. 그 때 유여곡절 끝에 마련된 이 작은 tv를 농막 안에 설치할 거다. 적막한 컨테이너 농막 생활에 분명 활력을 줄 테다. 내가 서재 책상 가에 이 작은 tv를 놓고 뉴스를 보는데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한테 자랑했다.

여보. 이 내비가 원래는 버리는 건데 이렇게 tv로 바꾼 거야. 내년 3월에 농사를 시작할 때 농막에 갖다 놓고서 뉴스도 보고 그럴 거라고.”

당신도 참. 농사가 시작되면 그거 볼 틈이나 있겠수?”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년 봄 우리 농막에서 이 작은 tv를 볼 생각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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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어느 겨울에 생맥주 잔을 비우면서 늘어놓던 결혼얘기가 선하게 살아나더군. 그 얘기의 골목 풍경이 눈앞에 생생한 거야. 여자가 내가 골목을 가다가도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면 이이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멈춰서 바라보는 거 있죠?’ 할 때의 골목이지.

 

 

내가 예전에 시골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골목 풍경은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거든. 봄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들이 화사하게 피어서 꽃길을 이루는 골목이지. 좁아도 햇살들이 넘쳐나고 벌 나비들이 가득한 그 골목길을 천진난만한 여학생이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네. 그러자 멀리 골목 끝에 숫기 없는 남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거야. 여학생이 혼잣말로 그러지. ‘왜 날 따라오지? 정말 이상하네. 나는 하나도 안 이쁜데……

그렇게 둘이 꽃길 골목의 양끝에 서 있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꽃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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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장자리에 컨테이너 농막을 두고 있다. 더운 여름은 무리고 요즈음처럼 쌀쌀한 늦가을은 농막에서 지낼 만하다. 그런데 웬, 작은 전갈 닮은 벌레가 농막 안에서 눈에 띄는 건 웬 일일까?  농사가 6년째 접어들면서 철제 농막이 여기저기 쇠한  때문인 듯싶다. 하긴 세월이란 대자연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그런 벌레 한 놈이 농막 문앞 섬돌에 있는 걸 사진 찍었다. 놈은 괜히 긴장하여 꼼짝도 않고 촬영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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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자라고 있는 수련 새싹( 2017-11-11) , 분홍빛 엘라투스가 옆에서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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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이다. 추운 날 서재로 모셔져 하룻밤을 난 수련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따듯해서 좋네!" 외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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