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가 독백했다.

내가 폐인이 됐구나!”

정말 오랜만에 자신도 모르게 불쑥 입에서 되살아난 단어 폐인이다. 햇수를 꼽아보았다. 장장 17년만이었다.

 

17년 전인 2000, 교직사회에 명퇴 바람이 휘몰아쳤을 때다. 어언 50 나이가 됐는데 교감으로 승진할 꿈 없이 그냥 늙은 평교사들로 한 학교에서 만난 K와 친구 J.

사범대학 시절 친하게 보낸 사이였으므로 해후의 감회가 만만치 않을 듯싶었지만 실제로는 무기력에 빠져명퇴할까, 말까를 저울질하는 늙은 평교사들일 뿐이었다. 휘몰아치는 명퇴 바람 속에서 승진 점수를 잘 관리해 온 동기들이 부지런히 교감자리로 승진해 가는 분위기라 그럴까, K와 친구 J의 무기력감과 명퇴신청 여부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그 때 둘은 교무실이나 복도에서 만나기만 하면 폐인소리를 하였다.

우리 폐인 다 됐어!”

그러게 말이야. 허허.”

퇴근길에 폐인들끼리 한 잔 할까?”

그럴까? 허허.”

그럴 때 교정의 늦가을 풍경. 노란 색이 돼 떨어지는 은행잎들조차 아름답기보다 처량 감을 더했다. 퇴근 후 K와 친구 J는 단골 생맥주 집으로 가, 밤늦도록 어느덧 교직 폐인이 된 자신들의 처지를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았다.

 

2000년에서 17년이 지난 올봄 어느 날 K술을 한 잔이라도 마셔서는 안 되는처지가 된 것이다. 병원에서 젊은 의사가 냉정하게 경고했다.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긴다면 병이 만성이 되면서 걷잡기 힘들게 됩니다.”

노환(老患)K는 아픈 주사를 맞고서, 처방받은 대로 약국에 들러 내복약 한 달 치를 사 들고 귀가했다. 해가 졌다. K는 늘 하던 대로 밤거리 산책에 나섰다. 거리의 식당마다 술집마다 흥겹게 술잔들을 기울이며 하루의 피로를 씻는 주객들 모습.

K는 순간 깨달았다. 17년 전 친구 J와 만나기만 하면 폐인소리를 입에 올리곤 했는데 그 때만 해도 낭만이고 행복이었음을. 최소한 술잔은 기울이며 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술 한 잔도 안 되는 지금이야말로 진짜 폐인인 것을. 아아 그리운 17년 전, 친구 J와의 그 시절. 그런데 참, 친구 J는 지금 이 시간 뭐할까? 오랜만에 전화해 볼까. 지금도 만나면 허허웃겠지. ……그런데 전화 걸면 뭐하나. 술 한 잔도 마실 수 없는데 말이야.

폐인 K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밤거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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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한테는 고명딸이 하나 있다.  

그 딸이 다섯 살 때 K는 하루 시간을 내 동물원에 데려갔다. 동화책의 동물들 중 곰을 제일 좋아하는 딸한테 실제로 보여주고 싶은 아비 마음에서다. 과연, 동물원에 입장하자마자 두리번거리며 곰부터 찾는 딸애. 마침내, 곰을 발견하더니 좋아라 소리치며 달려갔다.

곰은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철장 안에 갇혀있었다. 철장 가까이 다가가 곰을 보던 딸애가 돌연 코를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아, 똥냄새!

철장 안의 곰은 자기가 싸 놓은 배설물에 방치돼 있어서 온통 악취 덩어리 같았다. 게다가 똥파리들까지 성가시게 주위를 날아다녔다.

 

세월이 많이 흘러 고명딸은 어느덧 처녀로 자라났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수시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하는 딸애를 보며, 아비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괴리는 네가 다섯 살 때 곰을 직접 봤을 때부터 시작되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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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부는, 이랑을 낸 밭에 비닐을 다 깔았다. 이 과정을 생략했다가는 벌떼같이 자라나는 잡초들 탓에 옥수수가 싹을 틔우기도 어려워진다. 800평 밭에 멀칭 작업을 하다가 날이 금세 어둑해졌다. 부부는 밭 한 쪽에 놓은, 5평 되는 컨테이너 농막에서 옷들을 서둘러 갈아입고 차를 타고 밭을 떠났다. 밭에서 차도(車道)까지는 자갈 많은 하천 길을 십 분쯤 나와야 한다. 차도에 다 와서 아내가 말했다.

휴대폰을 농막에 두고 나왔어. 이걸 어째!”

남편의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푸짐하게 퍼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퇴직한 늙은 남편이 그런 만용을 저지를 수는 없다.

, 다시 농막으로 돌아가면 되지.”

하고는 좁은 하천 길에서 차를 간신히 돌렸다. 다시 농막에 갔을 때만 해도, 멀리 산 아래 동네 풍경이 그런 대로 보였다. 그런데 아내가 농막 안에 들어가 제 때 휴대폰을 못 찾으면서 동네 풍경이 하나도 안 보이는 밤이 금세 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찾아.”

조금만 기다려요. 조금만.”

도시 근교에 있는 산속 밭이 순식간에 깜깜한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만 해도 멧돼지가 출몰했다니…… 깜깜한 숲 어디서 그 멧돼지가 불시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겁이 나서 자기도 농막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남자 체면이 있지 않은가.

한 십 분 걸려, 아내가 휴대폰을 찾아들고 농막에서 나왔다.

글쎄, 한복바지 주머니에 있더라고요.”

한복바지란, 부부가 농사지을 때 편히 입으려고 산 개량한복바지를 말한다.

그런데 멀리 산 아래 동네의 불빛은 보이지만 부부가 있는 산속에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었다. 부부는 칠흑 같은 밤에 낙오돼 있었다. 남편이 차의 시동을 켜고 전조등을 밝히자 그제야 깜깜한 어둠 속에 불빛뭉치가 한 가닥 등장했다. 그래도, 도대체 차를 몰고 나갈 농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만했다. 하찮은 농로이지만 날이 훤할 때나 보이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대가 깜깜한 어둠에 휩싸이자 그 농로는, 밭은 물론 근처 숲과도 구분되지 않았다. 아내가 뇌까렸다.

이거 어떡해?”

이럴 때일수록 남자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뭘 어떡해? 내가 아주 천천히 차를 몰고 갈 거니까, 당신이 앞에서 농로를 안내하면 되지 않겠어?”

아내가 차에서 내려 남편의 말대로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농로가 바르게 된 길이 아니라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다. 결국 차의 앞바퀴가 농로에서 벗어나 숲에 빠졌다. 남편이 후진 기어를 넣고 애를 써도 차는 꿈쩍도 않았다.

어떡하지?”

“119를 불러. 그런데 여기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하천 길로 들어오는 거라서 그 사람들이 찾아올지 걱정이네.”

여보. 휴대폰 밧데리가 다 나갔나 봐.”

남편이 본색을 드러냈다.

에이 ㅅㅍ. 칠칠맞지 못하긴.”

어떡해야 해?”

부부는 깜깜한 어둠속에 망연하게 서 있다가, 자칫했다가는 조난사(遭難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체면불구하고 산 아래 동네 쪽을 향해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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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주는 것 하나 없이 얄미운 사내를 만난 곳은 차 타이어를 파는 가게 사무실이다. 추운 겨울이 시작됐는데 어째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스노우 타이어를 장착하려고 들른 것이다.

 K만 그런 염려를 하는 게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하려고 온 손님들로 좁은 가게 사무실이 꽉 찼다. 온 순서대로 기다려야 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만일 그 때 손님들이 많지 않아 사무실이 붐비지 않았더라면, K는 주는 것 하나 없이 얄미운 사내를 못 만났을 게다. 원래 사람들이 붐비는 답답한 공간을 몹시 싫어하는 K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나면서 그 사내가 '설정'됐던 거다.

따라서 그 사내는 죄가 없었다. 하지만 K는 사내가 얄미워 보여서 주먹으로 한 대 줘 박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몹시 힘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사내는 K가 싫어하는 면모를 다 갖추고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작은 머리에, 불그레한 빛이 도는 색안경에, 간간이 짓는 뜻 모를 미소에 ……그러면서 그 좁은 사무실에서 괜히 달랑거리며 오가고 있었다.

  K는 머리가 큰 편이다. 그래서일까 대체로 머리 큰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색안경을 써도 검거나 푸른빛이 도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좁은 공간에 있게 되면 점잖게,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를 지키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그 사내를 K가 아주 싫어할 만했다. K의 마음 같아서는 나중에 어떻게 되든 그 사내의 면상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폭행죄로 경찰서에 끌려가면서 대() 망신살이가 시작되지 않을까? 잠시만 참기로 했다. 그런데 대기 손님들이 별나게 많아서 잠시참기가 어려울 듯싶다. 더욱, 주는 것 하나 없이 얄미운 그 사내에 대해 K는 분노가 쌓여갔다.

점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사내한테 날아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아주 힘들었다. 그 때다. 사내가 K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함께, 좁은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기다리면서 유대감 내지 친근감을 느낀 것일까?

아무리 얄미워도 코앞에서 웃는데 어쩌랴. K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사내는 착한 사람 같았다. K는 혼자 머쓱해져내 성격이, 확실히 이상한 데가 있구나반성했다. 어쩌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한테 주는 것 하나 없이 얄미운 사람으로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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