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강 건너 등불’이란 노래를 처음 들었다.

라디오로 듣던 그 순간 나는 반했다.‘그렇게도 다정하던 그 때 그 사람----’이라며 시작되던 정훈희의 촉촉한 목소리. 강 건너에 있는 어떤 사람을 그리며 노래 부르는 소녀의 애절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 즈음 정훈희는 톱 가수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마다 힛트되었다. 이 노래도 물론 힛트되었는데 웬일인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훈희의 다른 노래가 뜨면서 이 노래가 가라앉았는지, 아니면 다른 가수의 노래가 뜨면서 이 노래가 가라앉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유행가의 속성은 묘해서 어떤 노래가 '뜨면' 다른 노래들은 일제히 가라앉는다. 동시에 두 노래가 '떠서' 유지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노래의 제목부터 나는 좋아하는데 특히 그 절묘한 운율의 짜임에 놀랄 뿐이다. 

'강 건너 등불'이란 다섯 글자가 빚는 운율의 조화부터 살펴본다. 운율은 같거나 비슷한 소리의 반복에서 생겨난다는 상식에서 살폈다. ‘강 건-’에서 ㄱ 소리가 반복되는 것에서 운율이 시작된다. ‘건너’에서는 ㄴ 소리가 반복된다. 곧 ㄱ 과 ㄴ이 반복되며 이어진다. 이런 배치는 사실 우리 입에 배어 있다. ‘가나다라---’에서‘가나’로 이어지는 순서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싶다. 우리 입에 익숙한 운율로 시작되니 장단점을 낳는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이 장점이라면, 맥 빠지는 느낌의 상투성이 단점이다. 이 때 단점 되는 부분을 메워주는 게‘등불’이다. 등불은 된소리로 발음이 돼‘등뿔’이다. ㄷ에서 시작되어 ㅇ의 밀치는 힘에 의해서 'ㅂ'이 'ㅃ'이 되는 것이다. 결국 '강 건너’에서 상투성을 띄면서 맥빠질 수 있는 음의 기운을 ‘등뿔’에서 떠받쳐 올리면서 마감지었다. 이렇듯 절묘한 운율적 구조라서‘강 건너 등불’이라는 제목이 우리 입에 오르는 순간 물흐르듯 하는 게 아닐까.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분이 그렇듯 치밀한 계획 아래 제목을 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쉽게 제목을 정했을 거라 보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우선 ‘강 건너--’란 표현은 우리 입에 익은 표현이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란 명시의 한 구절에도 보인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에서 '강'과 '건너'가 '나루'란 디딤돔을 두고 편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입에 익은 '강 건너'에 이어 ‘등불’을 덧붙임으로써 노래 제목이 완성되었으리라. 

 

더 깊게 분석해 본다.‘강 건너 등불’에서 사용되는 글자의 끝소리들이 대부분 울림소리라는 사실이다. ‘강’에서 ㅇ, ‘건’에서 ㄴ, ‘등’에서 ㅇ, ‘불’에서 ㄹ . 이렇게 네 개의 끝소리가 울림소리여서 혀를 굴리는 매끄러운  소리로 일관된다. '-너'는 가운데소리로 끝나지만 'ㅓ'라는 모음은 기본 속성상 울림소리라는 것을 안다면 결국 '강 건너 등불'이란 제목은 울림소리로 끝을 일관하는 특징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입에 익은 노래의 후렴들이 그렇지 않은가? '룰룰루'라든가 '라라라' 등. 민요의 후렴도 그렇다. '아리랑’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이 그 예이다. 대표적인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후렴구 또한‘얄리얄리얄랑셩얄라리얄라 ’이 아닌가.  

 

제목에 사용되는 소재의 이미지 구성 또한 곱새겨 볼만하다. ‘강’이라는 흐름의 것과‘등불’이라는 고정된 것의 대비가 매우 좋다. 흐르는 것 너머에 있는, 빛을 내며 고정되어 있는 것의 대비이다. 상징적인 의미를 찾는다면 ‘흐르는 세월 속의 인간 삶’이라 할까. ‘강’이라는 큰 자연물과 작은 인공물 ‘등불’과의 규모적 대비를 맛봐도 좋다. 캄캄한 밤의 강물과 빛을 내는 등불이 함께 하는 명암적 대비도 그 맛이 만만치 않다. 

 

이런저런 대비적 관계들 속의 '등불'은, 결코 꿋꿋하게 자리잡고서 강물을 비쳐주는 느낌의 것이 아니다. 쉼 없이 흐르는 강 가에서 깜빡이는 약한 등불이다.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정처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

우연한 기회에 가수 정훈희씨를 라이브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마치 동네 미장원에서 보는 아주머니처럼 깔깔 대며 농담만 잘했다. 그러다 이 노래를 부르려할 때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렇게도 다정하던----' 하며 아득한 밤 강 건너 등불을 바라보는 애절한 소녀로 변신하던 것이다. 과연 명 가수였다.

   그녀는 노래를 마친 뒤 이런 얘기를 했다. "소녀 시절에 이 노래를 불렀을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불렀지만, 지금은 이 노래가 가진 가사의 뜻을 음미하며 깊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이 노래를 언제나 잊지 못해 앵콜하는 팬들이 많아서 놀라곤 합니다."하였다.  

  나도 그런 팬에 속할 듯싶다. 나는 요즈음의 가수들에 질려버렸다. 특히 '화장들 요란하게 하고 나와 기계체조인지 춤인지를 추며 노래 부르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 가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귀에도 안 들어오고 가슴에도 와닿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정훈희씨의 '강 건너 등불'을 감상한다. '그렇게도 다정했던' 하며 시작되는 순간 나는 어두운 밤 강 건너 흔들리는 등불 하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옆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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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12-19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훈희씨의 과거 모습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강건너 등불‘ 곡 해석 읽어보고 들으니 더 좋아요 ^^*
감사합니다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따로 있다. 서양 가수들은‘FOR THE GOOD TIMES'를 좋아한다. 원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노래였지만 엘비스플레스리부터 시작해서 알그린, 페리코모, 앤디윌리암스, 케니로저스 등도 불렀다. 각자 대표곡이 있지만 'FOR THE GOOD TIMES'가 워낙 좋은 노래라 실례를 무릅쓰고 마치 ‘FOR THE GOOD TIMES' 잘 부르기 경연대회라도 연 듯 했다. 그 중 특히 알그린이 소울 창법으로 부른 'FOR THE GOOD TIMES'가 일품이다. 어느 한 시절, 서울의 나이트크럽에서 조명을 어둡게 한 뒤 알그린의 이 노래를 틀어주면 처음 만난 남녀라도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게 되곤 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 첫 번째를 문밖에 있는 그대라고 생각한다. 원래 박강성 가수가 발표했는데 워낙 괜찮은 노래다보니 이런저런 가수들도 불렀다. 유명가수들보다 무명가수들이 더 많이 불렀다는 특이점이 있다.

노랫말은 이렇다.

 

그대 사랑 했던 건 오래전의 얘기지/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

그대 떠나가던 밤 모두 잊으라시며/ 마지막 눈길마저 외면하던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은 거기서 울지만

그렇게 버려둔 내 마음 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

한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엔 없어요/ 추억도 내겐 없어요

문밖에 있는 그대 눈물을 거둬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는 잊어요

이제 분석해 본다.

'그대 사랑했던 건 오래 전의 얘기지'라는 첫 부분부터 흡인력이 대단하다. 한 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결별한 사이라는 것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잘 나타낼 수가 없다. ​

노을처럼 피어나 가슴 태우던 사랑이란 부분은 '얘기'로 남은 그 사랑의 시작과 절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수줍던 사랑이 마침내는 뜨겁게 바뀌던 것을 회상케 한다.

그런데 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사그라든다. '그대 떠나가던 밤이란 구절이 그것이다. 황홀한 노을빛깔의 저녁에서 어두운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변화에 맞추어, 사랑의 시작과 종말을 시각적으로 잘 그렸다.

'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구절은 ‘결별한 두 연인의 현재 만남’장면을 상징화했다. 상징은 고도의 수사법이지만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 태극기를 대한민국의 상징이라고 할 때는 바람에 펄럭일 수 있는 실제 태극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장면은 대문이 집채와 일정 거리를 둔 단독주택에서나 벌어질 실제 상황이다. 그래야 '문밖에 있는 그대에게 화자(話者)가 거리를 두고 제대로 말할 수 있다. 만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제대로 대화 나누기도 어렵다. 아파트란 주택구조는 실내와 바깥이 얇은 문을 사이로 접하기 때문이다.한 번 떠난 사랑이 십여 센티 너비의 현관문 앞에 와서 울고 있다면 화자는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서울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주민들이 그 상황을 목격했다면 불안에 떤다. 결국불청객을 처리해 달라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다면 경찰에 연락해무단으로 남의 아파트에 쳐들어가려는 괴한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한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대가 그런 부담스런 상황을 야기하지 않도록, 일정한거리를 둔 단독주택에서의 대문 밖이어야 한다.

이런거리'닫힌 대문 밖에 서 있는 그대의 모습을 화자가 슬그머니 창문 틈으로 내다볼 수 있는 거리.

최소한 5미터는 돼야 한다. 물론 창문 틈으로 내다보아야 하는데 만일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거나, 대문까지 걸어가 열고서 마주본다면 그건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라 법률적 고소를 각오한 사건의 시작이다.

그렇다.‘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상황은 떠난 연인이 어느 날 대문 앞까지 찾아왔다가, 화자가 끝내 대문을 열어주지 않자 흐느끼면서 발걸음을 돌리는평화로운 거리를 상정한다.

그런 거리는 사실 정서적 거리이다.

가수 김종찬이 부르는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노래의 저만치’와 같은 거리다. 김소월이산유화란 시에서 노래한산에 산에 사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저만치보다는 아무래도 가깝다.

그런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야 한다. 초라한 꼴로 찾아온 그대가 혹 눈물을 흘리더라도 빗물인 것처럼 보여, 자칫 궁상맞은 꼴로 보일 참상을 방지해줄 테니까.

지난날의 사랑을 되찾고자 자존심 다 버리고 찾아온 그대는 물론 가슴 아픈 존재다. 그럼 화자는 행복할까? 화자 역시 그대만큼이나 가슴 아프다. 이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렇게 버려둔 내 마음 속에/ 어떻게 사랑이 남아요하는 절정 부분의 절규가 입증한다.

그대나 화자나 모두 울고 있는 것이다. 슬픈 사랑의 절정이다.

 

그렇게 함께 가슴 아프다면 화자가 문을 열고 나가 그대를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우문(愚問)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문을 열고 나가기에는, 그대와의 사랑을 되찾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낡은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찾아와 대문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사내. 그래도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아니, 열리지 못한다. 왜냐면…… 그 대문은 닫힌 마음의 문이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pblWJ22JZ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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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가 횡단보로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는 걸 나는 목격했다.

 

하기는, 근래 들어서 개가 찻길을 무단 횡단하다가 치여 죽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개의 꼴’은 십여 년 전 일이다. 대낮의 햇빛 아래 그 개는 찻길 한복판에 쓰러진 채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쯤 벌어진 주둥이에서 새나오던 고통의 신음. 마침 가까운 인도를 걷다가 목격한 나는 잠시 멈춰 섰으나 이내 빨리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그 개를 알아서 치울 거라, 마음 정리하고서 현장을 빨리 벗어난 것이다.

 '개 주검'에 불과하니까.

 

그런 개 주검을 보기는커녕, 엉뚱하게도 '횡단보도로 안전하게 찻길을 건너는 개들’을 목격한 것이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개줄에 딸려가는 개’가 아니다. 개 혼자서 자주적인 의사와 판단으로써 마치 인간처럼 횡단보도를 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룬 문화 중 하나가‘교통질서’다. 그런 교통질서에 개가 동참하다니!

 분명하게, 횡단보도의 선이 페인트로 그어진 범주 내로 찻길을 건너는 개. 문제는 그 개뿐만 아니라 다른 개들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자네 눈에만 그런 개들 광경이 자주 눈에 뜨인 모양이네.”

 하고, 누가 핀잔을 준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내 눈앞에서 개들이 자기 의사로써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었으니까. 십여 년 전, 찻길을 아무렇게나 건너다가 횡사한 개들의 말로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데.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장면은 조지조웰의 '동물농장'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사회 생활하는 허구 속 장면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써 우리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슬그머니 사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아득한 옛날, 원시인들 주변을 맴도는 늑대였는데 먹이에 길들여진 끝에 애완의 자리를 차지한 '개'. 그 때 인간들 손에 길들여지기를 끝내 거부한 늑대는 갖가지 박해를 받다가, 이제는 동물원우리에 갇혀 '멸종 위기' 속에 하루하루 연명한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개가 오늘날 대단한 번성을 이룬 것의 핵심은 환경적응이었다. 그렇다, 찻길에서 치이던 개들이 어느 때부터 인간이 만든 교통질서 환경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사용하고 있다. 개들의 유전자 속에 이런 정보가 축적된 게 아닐까?

‘찻길을 아무 데로 건너다가는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으니까,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로 건너야만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는.

 아니면,

‘찻길 아무 데로 건너다가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은 개들은 저절로 단종되면서’ 그렇지 않은 개들만 살아남으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결과? 이런 현상을 '적자생존'이라 했다.

 

인간들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환경에 적응' 된 후손들만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게 아닌가. 

처음 철로가 놓였을 때 발생했다는 인간의 시행착오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철로를 베개 삼아 베고 자다가 횡사한 경우, 멀리서 쏜 살같이 달려오는 기차를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며 철길을 건너다가 치여서 죽은 경우 등등……. 이러한 사건들이 초기에 빈번하면서 적응 안 된 인간들은 배제되고 적응된 인간들만 살아 남아 오늘날 편하게 기차나 전철을 타며 현대사회를 사는 거다. 

 

 변화에 적응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인간이건 ‘개’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시 어느 곳에서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다.

사진출처 : blog.choj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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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청년은 지팡이를, 둘째 청년은 검은 선그라스를, 셋째 청년은 짧은 턱수염을 컨셉으로 한 차림으로 몸을 흔들거리면서 노래 불렀다. ‘우우우하며 시작되는 이상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나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모 TV의 음악프로그램에서솔리드란 이름의 낯선 청년 셋이 노래 부르던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노래가이 밤의 끝을 잡고였다.‘솔리드는 재미동포 2세들로써 구성됐으며 우리나라에 R&B(알앤비)를 최초로 대중화시켰다고 어느 음악평론가가 평했다.

 

한 편, R&B(알앤비)란 낯선 용어를 위키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R&B(Rhythm and Blues; 'R&B')는 흑인의 생활양식에 맞도록 녹음 된 블루스 보컬이나 밴드 연주의 대중음악을 총칭한다. 나른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가성을 많이 섞어 부르기도 한다. 1940년대 말 ~ 1950년 대 초, 블루스가 스윙 같은 댄스풍 재즈와 섞여 태어난 흑인음악이다. 블루스보다 댄스비트가 강하고 리듬멜로디도 대중적이다. 가사도 고단한 삶을 노래하던 블루스와 달리 쾌락적으로 흘렀다.”

 

우우우 하면서 시작되는 이 밤의 끝을 잡고노랫말은 이렇다.

 

- - 다신 널 볼 수 없겠지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마지막 입맞춤이 아쉬움에 떨려도

빈손으로 온 내게 세상이 준 선물은

너란 걸 알기에 참아야겠지

 

내 맘 아프지 않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모든 걸 잊고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 나의 사랑이

더 이상 초라하지 않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난 괜찮아

 

<후략>

 

 

연인들이 타인들로 바뀌는 마지막 밤을 노래한 대중가요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노래 또한 그런 내용의 노랫말이다. 그 중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이란 부분이 고혹적이다.

우선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란 부분이다. 마지막 밤을 보내는, 새벽을 맞는 연인들이 나체로 깨어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연인의 하얀 어깨가 드러나 있는데 그 어깨를 화자가 입술로 애무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20대나 30대 초반의 한창 젊은이들의 사랑 장면으로 봐야 옳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알몸으로 (노랫말의 분위기로 보아 연인들은 지금 이불도 덮지 않고 있다.)그러다가는 감기 몸살에 걸리기 십상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헤어지는 마지막 밤이라도 이불도 안 덮고 그러는 무리를 저지르지 않는다. 왜냐고?‘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건강은 챙겨야 한다는 삶의 지혜가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란 부분이 나는 이 노래에서 절구(絶句)라고 여긴다. 마지막 밤이 새며 훤하게 동터가는 시간대임을 잘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아서라도 그대와 더 있고 싶다는 고도의 수사법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고도의 수사법은 조선 중종 때 송도 명기 황진이의 시조에서도 쓰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여기서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란 구절이 그것이다. ‘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여 님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좋은 표현은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다.

1990년대 솔리드와 조선 중종 때의 황진이는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나 절대 만날 수 없다. 하지만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는 마음의 공감대에서 양쪽은 완전히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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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他人)이란 이란 뜻의 한자어다. 그럼 타인의 반대말은 뭘까? 사전을 찾아봤더니 의외로 자신이라고 돼 있었다. 내가 의외라 느낀 까닭은 타인의 반대말을 지인, 구체적으로는 연인일 거라 짐작한 때문이다.

사전적 풀이와 다르게 최소한 대중가요에서의 타인은 연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랫말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연인이 어느 날 내 곁을 떠나간다. 그 순간부터 연인은 모르는 낯선 사람이다. 골목길에서 맞닥뜨려도 모른 체 지나가야 한다. ‘낯선 사람이니까. 약속은 그리 했어도 얼마나 가슴 아플까. 시간을 소급해서 타인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보자. 대중가요에서는 이 마지막 순간을 대개 아침이나 새벽녘으로 설정한다. 함께 하룻밤을 지낸 뒤 이별하려는 순간인 것이다.

   

이런 내용을 노래한 서양 노래로 다이아나로스의 ‘Touch me in the morning’ 이 있다. 이 노래의 앞부분을 본다.‘Touch me in the morning. Then just walk away. We don't have tomorrow. But we had yesterday.’우리에겐 이제 미래도 없고 함께 보낸 과거만 있을 뿐이니 오직 이 순간 껴안아주는 일밖에 할 일이 뭐가 있냐며 애원한다.

수많은 서양 가수들이 부른 명곡‘For the good times' 또한 같은 상황이다. 연인들이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소리를 들으며 타인이 되어야 하는 어느 아침이 배경이다.

이런 이별 노래로서 우리나라에는 영턱스의 타인이 있다. 노랫말이 다소 길다.

   

한 번만 안아 주세요 마지막 밤이잖아요

이렇게 헝클어놓은 내 맘을 달래주세요

한 번만 안아 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이렇게 그대 그냥 가버리시면 다신 볼 수 없잖아요

   

촛불은 켜지 말아요 이대로 그냥 있어요

그대의 슬픈 눈빛은 볼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상처가 될 테니까요

혹시나 그대 음성 떨리신다면 보내드릴 수 없으니

   

새벽이 오려나 봐요 커튼을 열지 말아요

눈부신 빛이 싫어요 두려워질 테니까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행복한 사랑 하세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나하나 잊는다는 건

   

한번만 안아 주세요 또 다른 아침이에요

이렇게 헝클어놓은 내 맘을 달래주세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행복한 사랑하세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나 하나 잊는다는 건

   

노랫말 중헝클어놓은 내 맘을 달래주세요란 부분이 압권이다. ‘헝클어놓다헝클어뜨리다에서 파생된 말인데 사전에서 사람이 실이나 줄을 한데 마구 뒤얽어 풀기 어렵게 덩이를 만들어 놓다라고 풀이했다.

헝클어놓은 내 맘이란 표현은 이별을 앞두고 암담한 심경을 사물화한 것이다. 추상적 관념의 구체적 사물화이다. 흐트러진, 마지막 잠자리의 이불들 모양이 연상되는 건 왜일까?

노랫말의 내용이 의외로 착하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행복한 사랑 하세요라고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원까지 하는 것이다. 격렬한 청춘들의 사랑 이별치고는 아주 온순하며 그렇기에 얘기 듣는 국외자들(대중들)을 가슴 아픈 감동의 장으로 이끈다.

   

이 노래는 독특한 데가 있다.

첫째, 이 노래는 화자를 남성가수가 맡음으로써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버림받고 헤어진다는 일반적인 이별 방식을 벗어났다. 의도적인 역할 바꿈인데 이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전혀 새롭게 느끼도록 하는낯설게 하기 방법에 속한다.

둘째, 이 노래는 화자가 마지막으로 껴안아 달라고 하소연하는 중에 나머지 다른 멤버들이 작은 목소리로 독특한 반주를 넣는다는 사실이다. 귀 기울여야 들리는 잣치기 잣치기 잣차포라든가 오하치치 원, 오하치치 투가 그것이다. 노래의 박자를 잃지 않고자 넣는 이 반주는, 예전에 동네 개구쟁이들이 골목에서 뛰놀 때 즐겨 입에 담던 내용들이다. 콧노래를 닮아서 허밍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맛이 있다.

   

여성이 버림받는 내용이 분명함에도 남성 가수가 그 여성인 듯 애절하게 노래 부른다든가, 반주로 넣는 구절들이 동네 개구쟁이들이 즐겨 입에 담던 내용들이라든가, 하는 것들만 봐도 영턱스의 타인은 장난기가 넘쳐났다. 하긴 영턱스라는 명칭부터 장난심한 개구쟁이란 뜻이다.

 

영어사전에서 영턱스(young turks)’는 개구쟁이들을 뜻한다. 그런데 ‘turk'의 원뜻은 터키. 서양사에서 동양권에 속하는 터키 사람들의 잦은 침입은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을까. 그런 귀찮고 성가시다는 의미가개구쟁이란 뜻으로까지 발전했다.

   

영턱스의 타인은 독특한 대중가요다. 연인이 타인으로 바뀌는 비극을 개구쟁이들처럼 노래 부름으로써 독특한 애상미를 맛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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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이병욱님 께서는 어쩜 이리 섬세하세요?
우와~~곡을 해석하시는게 마치 직접 작사라도 하신양 디테일 합니다!^^
우울한 곡 추가 해주셔서 감사합니당~~ㅋ
노래 선물 기분 짱 좋네용~~^^
전 요즘 Sam Smith의 노래들이 자꾸 귓가에 매달려 있습니다.특히 I `m not the only one이요^^

무심 2017-11-2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호가 나타내듯 무심한 성격이라 이제 ‘매너나린‘님의 댓글을 봤습니다. 제 글을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잘 모르는 크래식 음악보다는 대중가요를 돟아합니다. 특히 가사가 뛰어난 대중가요는 난해한 현대시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