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이상한 일도 겪는다. 81년 그즈음 외수형이 이런 말을 내게 했다.

내가 뱀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는데 정말 뱀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루에서 발견되지 않았겠니? 하긴장수하늘소를 쓸 때에는 난데없이 우리 집으로 장수하늘소도 날아 들어왔지.”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뱀이야 윗샘밭처럼 산이 가까운 마을에서는 인가에 출몰할 수 있겠지만 장수하늘소는 달랐다. 워낙 개체가 드물고 귀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존재인데 그리도 쉽게 인가에 나타난다고? 글쎄.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말을 믿는다. 우선 내가 재작년에 낸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에 뱀이 말하는 것을 듣는 어느 실직자 얘기가 한 편 있다.‘가섭별전이 그것이다. 외수형은 얼마 전 낸 장편소설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에서 사람이 초목들과 대화 나누는 채널링을 다루고 있다. 형의 채널링은 그 출발이 81년 즈음이 아니었을까?

염원은 이종(異種) 간의 경계를 넘는다. 하물며 사람 간의 염원이야.

내가 윗샘밭 외수형 집을 다녀간 81년 초 겨울 어느 날에서 한 달쯤 지났을 때, 난데없이 고 3때 담임선생님이 내게 전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도록 안부인사 한 번 한 적 없는 무심한 제자를 어떻게 잊지 않고 수소문해서 양양고등학교 교무실로 전화한 것이다. 수화기를 들고 어안이 벙벙한 내게 선생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선생, 춘천 올래? 마침 이선생이 필요한 자리가 났는데.”

네에?”

내가 연구과장으로 있는 학교가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지정됐는데작문을 과제로 함께 연구할 교사가 한 명 필요하게 됐어. 아무래도 자네가 적임자일 듯싶거든.”

네에 가겠습니다!”

고향 춘천이 그리워 그 험한 한계령 너머 춘천을윗샘밭 외수형 집을 다녀온 게 한 달 전인데 이런 연락이 오다니.

기적처럼 812월 말에, 나는 윗샘밭 외수형네 집에서 2km 남짓한 춘성고등학교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 2년 간 근무한 뒤 모교로춘고 60년사를 집필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19833월이었다. 누구나 교사가 되면 한번쯤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게 꿈이라던데 그 꿈을 이룬 것이다.

2년 뒤인 85년에 전태원이도 춘고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69년 예비고사 치른 겨울날 밤 친구 자취방에서 만나 소주를 밤새 마셨던 우리가 16년만에 모교의 국어교사와 미술교사로 재회한 것이다.     

이외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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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전태원 화백을 만났을 때‘81년 초 겨울에 윗샘밭에 살던 외수 형네 집을 방문했다가 본 기괴한 인물화얘기를 꺼내며 물어봤다.

외수형이, 그 그림을 자네한테서 선사받았다는데 어찌된 거야?”

태원이가 껄껄 웃고 나서 말했다.

내가 그 무렵에 시내 후평동에 화실이 있었지. 그 인물화가 화실에 있었는데 외수형이 보고서 단번에 반했던 모양이야. 술자리에서 형이 내게 이러더라고. ‘저 그림을 나한테 주면 안 되겠니?’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수형이 그러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나. ‘형 마음에 들면 갖고 가세요.’그래버렸지. 그랬더니 형이 그 그림을 자기 등에 대고 끈으로 동여맸다는 게 아니겠니? 그림을 손에 들고 귀가하다가는 술 취한 탓에 자기도 모르게 길바닥에 흘려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염려에서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괴한 인물화 한 점을 마치애기 업듯하고는 비틀비틀 귀가하는 외수형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인물화나 그 인물화를 등에 맨 사람이나, 기이하기가 막상막하 아닐까.

말이 나온 김에 태원이한테 한 가지 더 물어봤다.

누구를 모델로 그린 거야?”

굳이 답한다면 당시 시대상을 의인화한 인물화라고나 할까? 생각해 봐라. 그 시대가 얼마나 암울하고 삭막한 시대였니?”

아아 1980년대 초. 7910월 어느 날 밤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느닷없는 총성이 터진 게 그 암울한 시대의 정점이었다. 그 궁정동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험상궂은 사내가 실세로 부각됐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전두환. 그는 궁정동 사건을 처리한 뒤 들불처럼 일어나는 민주화 열기에 이런 말을 쏘아붙였다.

항간의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가 말한항간의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란 바로 자신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역사는 결국 순리를 따른다.

 

춘천의 외곽인 샘밭은 윗샘밭과 아래샘밭으로 나뉜다. 아래샘밭은 우체국 농협 같은 기관들에 상가까지 형성돼 있어서 외곽 마을치고는 한적한 느낌이 덜했다. 하지만 윗샘밭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이야 높은 아파트들까지 들어찬 풍경으로 바뀌었지만 80년대 초만 해도 한적하다 못해 쓸쓸한 마을이었다. 게다가 그 겨울의 찬바람이란.

어디 그뿐인가. 근처 소양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꽁꽁 얼어붙어, 그러잖아도 추운 마을에 냉기를 더했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시내버스의 삭막한 엔진음까지. 그런 삭막함의 한가운데 있었던 외수 형의 길가 윗샘밭 집. 햇빛들마저 추위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오전에나 마루로 간신히 찾아드는 겨울 햇빛들인데 그 햇빛들을 가장자리로 받으며 그 인물화가 마루 벽에 걸려 있었다. 결코 따듯한 색은 전혀 없는 차디찬 색감으로.

전태원 화백의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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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나는 양양고등학교 교사였다. 동해안으로만 도는 교사생활이 답답해서일까, 모처럼 겨울방학 기간에 춘천으로 버스 타고 온 것이다. 요즈음은 고속도로로 한 시간 남짓해 닿는 동해안이지만 1981년경은 그렇지 못했다. 세 시간 가까이 버스 타고 가야 되는데다가 특히 겨울의 한계령 고갯길은 저승 가는 길처럼 험하고 가팔랐다. 그런 고갯길에 얼음까지 얼었으니.

어쨌든 그런 저승길을 이겨내고 춘천으로 와 찾아간 데가 윗샘밭 동네의 도로변 외수형 집이었다. 외수형과는 대학시절인 1972년 여름부터 인연을 맺은 사이. 형은 내가 그 겨울에 찾아갈 당시 장편소설꿈꾸는 식물로써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집에서 두 어린 아들까지 키우느라 형수가 고생 많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모처럼 찾아간 그 집 마루 위 벽에 웬 기괴한 인물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사람을 그렸다기보다 괴물을 그린 것 같았다.

, 이 그림 아주 기괴한데?”

내가 그 그림을 가리키며 한 말에 형이 말했다.

태원이한테 선물 받은 거야.”

태원이라면 전태원이?”

그럼 너하고 춘고 동기이지. 태원이한테 네 얘기도 들었어. 태원이 아주 착한 애야.”

그 기괴한 인물화를 선물해서 착하다는 뜻인지, 원래 착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1979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이상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궁정동 사건으로 급작스레 막을 내리고, 뒤이어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항간의 일부 몰지각한이라는 말을 즐기며 TV에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 초였다.

전태원 화백의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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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춘천 시내 명동 풍경은 요즈음과 많이 달랐다. 우선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많았다. 인파(人波)라는 단어가 실감났다. 게다가 허름한 길바닥이라니. 아스팔트를 깔았지만 기술이 부족했던지 여기저기 파이고 가장자리는 흙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요즈음 춘천 명동 풍경은 어떤가. 행인들부터 대폭 줄어들었다. 90년대에 지하상가를 만들어 놓으면서 적지 않은 행인들이 그리로 유입된 탓이다. 이제 인파라는 단어는 최소한 춘천 명동에서는 사용되기 어렵다. 길바닥은 예전의 아스팔트가 아닌 최신건설재료로 빈틈없이 포장돼 있어 흙 한 줌 발견할 수 없다. 글쎄, 그런 바뀐 풍경에 나는 숨이 콱 막힌다. 몇 년째, 웬만해서는 명동 거리에 나가지 않는 까닭이다.

종렬이 태원이와 함께 그 인간미가 넘치는 71년 여름의 어느 날 춘천 명동 거리에 나갔다. 넘쳐나는 인파 속을 헤쳐 나가다가 장난기 많은 종렬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잠시 후에 내가 태원이랑 법원 마당에서 한바탕 싸울 테니까 지켜봐.”

당시에는 법원이 명동에 있었다. 나는 종렬이가 한 귓속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둘은 법원 마당으로 앞서 갔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마주보고 서서 주먹 싸움을 대판 벌이는 게 아닌가! 처음에 나는 기겁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 영화의 스턴트맨들처럼 가짜로 싸우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주먹들을 날리는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그런 흉내를 낼 뿐이라는 것을.

불구경과 사람들 싸우는 구경만큼 재미난 구경도 없다는 속설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명동 거리에 접한 법원 마당에서 주먹 싸움을 벌이는 두 청년. 이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섣불리 말릴 엄두를 못 내는 것은,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빗나간 주먹에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고 솔직히 모처럼 좋은 구경을 중단시키고 싶지 않는 대중심리도 있었을 듯싶다.

5분 남짓 종렬이와 태원이는 거짓 결투를 연출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아마, 달려온 법원 수위한테 잡혀가지 않았을까? 둘은 구경꾼들이 에워쌀 정도로 모이자 돌연 결투를 중단하고 인파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나도 어이없는 둘의 잠적에 기겁하여 찾아서 따라가기 바빴다. 간신히 따라잡은 종렬이한테 물었다.

왜들 그랬니?”

그냥.”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미술반 친구들은 그 여름, 한창 젊은 혈기들을 주체 못했던 게 아닐까? 푸른 화실의 작은 공간만으로는 그들의 해방 구역이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한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3년 뒤 두 친구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불쑥 여행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삼척중학교 교사로 있는 나를 만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태원이보다는 종렬이와 더 친했다. 그런데 7년 뒤 외수형 집에 갔다가 목격한 특이한 인물화 때문에 태원이를 각별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19811월 어느 날이다 

전태원 화백의 ‘The Wave 시작도 끝도 없는‘ (2018.09.04. ~09.16.)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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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경험을 했다. 뒤늦게 과거의 어떤 기억이오래된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나타나듯선하게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연재 수필 2>에서 전태원과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가 1974년 여름에 삼척에서 만난 것처럼 기술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971년 구() KBS 사옥 부근의푸른 화실에서 만났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푸른 화실은 전태원 이종렬 친구와 2년 선배 최치현의 아지트였다. 형식은 화실이지만 실상은 춘고 재학시절 과학관 건물 1층에 있었던 미술실의 재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종렬이를 따라 푸른 화실에 처음 가 봤는데 실내에는 그리다 만 그림들과, 특주라는 이름의 막걸리 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요즘처럼 제 모양을 갖춘 막걸리 병이 아니다. 간장 병을 재활용한 것이다. 물론 흡연은 기본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숨어 있는 해방 구역에서 벗어나마음껏 해방 구역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최치현 선배는 이종렬 전태원보다 내가 더 먼저 알았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가 아닌, 특별하게도 교대 부속국민학교로 갔는데 그 때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에서 만난 이가 최치현 선배였다. (내가 2016년에 펴낸 소설집숨죽이는 갈대밭그분을 생각한다작품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다.) 내가 1학년 때부터 4학년 1학기까지 3년 반이나 최선배와 함께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이었음에도 최선배는 나를 기억 못했다. 그저 문학 하는 춘고 후배로만 알고 있었다. 훗날 안타깝게도 세상을 일찍 뜨고 만 최치현 선배. 다른 곳은 몰라도 춘천 지역에서 미술 하는 후배들은 그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 선배가 그리도 세상을 일찍 하직할 줄 알았더라면 생전에선배님. 제가 교대부국미술반이었습니다. 선배님과 3년반이나 같은 공간에서 지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까?’ 하며 한바탕 웃고서 막걸리를 대접했을 텐데안타깝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마음껏 해방 구역인 예의푸른 화실’.

종렬이 태원이를 거기서 만나 시내로 나갔다가 황당한 일을 나는 목격했다. 정말 배꼽 잡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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