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벌써 11월의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했군요.

 

 

 

 

   먼저 오랜 기다림이 실현된 신간들입니다.

 

 

    

 

    먼저 빅토르 위고의 '93년'입니다.

    이 책은 몇 년전에 영문판으로 읽었

    었는데 그 때 '레미제라블' 보다

    '93년'이 위고의 대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을 정도로

    정말 감명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도 한 번 벗해보고

    싶었는데 오래도록 번역판이 나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예고도 없이 문득

    건네진 선물 처럼 우리말로 된

    '93'년이 나왔습니다. 살만 루슈디의

    '수치'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에

     이은 열린 책들의 '써드 임펙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말로 읽는 '93'년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해 줄 지 기대됩니다.

 

 

 

 

 

  역시나 오래 기다렸던 후속작...

 

  댄 시몬즈의 히페리온을 읽었다면

  그 후속편을 보고 싶은 욕구가 마치 미드 '24시'의 다음 에피소드

  를 보고 싶듯 클 수 밖에 없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나왔습니다.

  댄 시몬즈의 '히페리온'을 아직 벗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번에 후속편이 나온 김에 꼭 벗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군요.

  긴 겨울밤을 여지 없이 짧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그리고 뜻밗의 신간들....

 

 

 

 

   아마도 여성의 몸으로 가장 역사적 현장을 많이 누볐던

   저널리스트가 아닐까 싶은 아그네스 스메들리...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이기도

   한 스메들리의 일생을 그녀 자신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자전적 소설인 '대지의 딸'이

   새로운 번역으로 나왔습니다.

 

   진정한 언론의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는 지금

   그 참모습이 어떠한가 발견하는 것은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더욱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포스트 모던적 작가로 그 중요성이 더해진 도널드 바셀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죽은 아버지'도 이번에 나왔습니다.

 모든 상징의 근원이자, 언어를 만드는 자 그리고 그렇게

 질서지우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접근해

 그 아버지를 해체하고 전복시키는, 프로이드가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었던 '살부(殺父)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단순히 내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언어 마저도 만들고 규정하는 존재이기에

 쓰는 언어들까지 중간에 끊거나 해체하는 등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 역시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와주었군요.

 

 

 

 

 

 

 

 

 

 

 

 

 

 

 

 

 

 

 

  거기다 오래전부터 번역되길 간절히 바래왔었던 솔 벨로우의 대표적인 작품 셋이

  한꺼번에 나란히 번역되었습니다. 솔 벨로우 역시 전작이 다 좋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허조그'를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솔 벨로우의 작품을 소개한 김에

  미국 문학의 이해에 도움을 줄 만한 신간 역시

  같이 소개해 두고 싶군요.

  일본인들이 유명한 거의 모든 미국 작가들에

  대해 쓴 책인데 빔 벤더스가 미국 대중 문화들을

  자신의 영화들에 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식된 자'의 시선으로 보는 미국 문학이

  어떨지 흥미롭습니다.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선으로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등등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더욱 그렇군요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신간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를 읽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놀랍게도 나왔습니다.

   이름만 들었고 작품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늘 한 번 벗해보기를 소원했었는데 드디어

   그 갈증을 해갈하게 되었군요.

   더구나 한국분과 터키분의 공역이라고 하니

   더 흥미롭습니다. 번역을 통한 아이텐티티의 공유는

   어떤 결과를 나타낼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가장 빨리 읽고 싶은 신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역시 기다렸던...

 

 

 

  

  

 

 

 

 

 

 

 

 

 

 

 

  미국 SF 작가협회에서 선정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네 권중

  후반의 3권과 4권이 역시나 나란히 발간되었습니다.

  장르물은 여름이 전성기인 줄 알았는데 11월의 신간들을 검색하다보니

  정말 전성기는 11월 혹은 겨울이로군요.

  1권과 2권이 주로 단편 위주로 선정되었다면

  3권과 4권은 중편 위주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SF 팬들에겐 잘 차려진 만찬의 식탁입니다.

  얼른 달려가 자리 잡고 앉아야죠...

 

 

  거기다 또 하나...

 

 

  

 

  더러 실망을 하면서도

  역시나 기대감을 갖고 늘 잡게 되는 작가

  우타노 쇼고도 이번에 새로운 작품이

  나왔더군요.

  '밀실 살인 게임 2.0'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믿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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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12-0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과 반혁명이 부딪히는 작품으로 <93년>만큼 재밌는 것도 없죠.저는 헌책방에서 정음사판을 구해 읽었습니다.프랑스혁명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토론재료로 써도 좋을 듯해요.

솔 벨로의 저 책들은 번역본이 꽤 오랜동안 절판되어 있었죠.우리나라에선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라서 그런 것 같아요.

ICE-9 2011-12-11 23:34   좋아요 0 | URL
저도 `93년`읽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을 읽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93년`도 솔 벨로우의 작품들도 이미 번역판이 나와 있었군요. `허조그`는 정말 개인적으로 굉장했는데 왜 이리도 주목을 받지 못한 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11-12-14 16:01   좋아요 0 | URL
뭐랄까...솔 벨로 작품이 지식인들의 권태를 그리는데, 그런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저는 `허조그`보다는 `희생자`가 더 잘 읽혔습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유태계 작가 중에선 오히려 버나드 맬러무드가 우리에겐 더 알려진 듯합니다.물론 맬러무드 역시 많이 읽히는 작가는 아닙니다만...
 

 

  

 

 

 

 

 

  

 

   '엠마'는 제인 오스틴의 네번째 소설이다.

  초기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등, 주로 작품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서(pathos)들을 제목으로 가져왔던 오스틴은 여기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 제목으로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세번째 작품이자 바로 전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맨스필드 파크'란 바로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에서 보듯이 오스틴은 제목을 신중히 고르는 작가다. 그녀에게 제목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안내(그러니까 '여기에 유념해서 보아주길 바란다'와 같은...)이자 그녀 스스로가 작품을 통해서 정말 드러내고 싶은 핵심이기도 하다(어쩌면 결국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핵심이니 일부러라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거겠지...). 그렇다면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제인 오스틴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맨스필드 파크'로 대변되는 거기서 더부살이 중인 가련한 패니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자체이며 '엠마'는 주인공인 '엠마'라는 존재 자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임을 말이다.

  

  

 

 



 

 

 

 이렇게 '엠마'가 여성이 쓴 여성 자체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맨스필드 파크' 이후로 여기엔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 파크'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로 대표되는 여성이란 존재를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관찰한 이야기라면 '엠마'는 그 모든 배경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그 여성 내부에서만 여성을 관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여기서 신중하게 엠마라는 캐릭터를 형성한다. 엠마는 오스틴의 그 많은 여성 주인공들 중 유일하게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전작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와 비교하면 이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따라서 결혼만이 현재 겪고있는 모든 사회적 곤궁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던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엠마는 결혼에 대해서도 그리 강박적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혼자 살겠다고 선언까지 하여 그녀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씨를 안심시킨다. 오스틴은 그러한 엠마의 경제적 독립(그녀는 어머니의 사후, 저택 살림을 주도적으로 도맡아 꾸려왔다.)과 결혼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을 엠마의 가정교사로 더할나위 능력과 매력이 있는 그녀이지만 별다른 재산과 가문의 후광이 없는 관계로 양자로 보낸 아들까지 있는 홀아비와 결혼해야 했던 미스 테일러와 매력은 있지만 가난해서 늘 실연의 위험을 무릎써야만 하는 해리엇을 통해 강조한다.

 사실 이 둘, '경제적 여력의 요구'와 '그것을 위한 결혼으로의 강요'는 미스 테일러와 해리엇에게서 보듯이 당시 여성들을 억죄고 있었던 두가지 주요한 사회적 굴레였다. 오스틴은 작품에서 이 두 가지를 내내 강조해왔으며 바로 전작인 '맨스필드 파크'는 그 흐름이 최고조에 다다른 작품이었다. 이 두가지 굴레는 영국사회에서 오스틴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주욱 이어져 2차대전 후나 50년대에 이르러서도  혼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을 - 결국은그래서 아무런 경제적 여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 '잉여여성'이라 경멸을 담아 부르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두 가지로부터 엠마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스틴이 '엠마'에 이르러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가하던 가장 주요한 요구들을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것이 그 바깥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 내부에만 천착해서 여성을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그 바깥에서 살펴봄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벗겨낸다면 과연 여성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또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우리가 이 다음 작품 '노생거 사원'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맨스필드 파크'에서 '엠마' 그리고 '노생거 사원'까지 죽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성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단순히 말하자면 일종의 시점(바라보는 것)의 변화라 할 수 있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이 있으니 이 시점의 변화가 바로 전작의 결론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맨스필드 파크'에서 여성의 구원(진정한 자유를 쟁취했다는 의미에서)에 있어 '경제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면 뒤에 이은 '엠마'는 그것을 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찰함으로써 과연 경제력만 있다면 여성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를 살펴보고 '엠마'에게 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나이틀리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남성의 역할 또한 중요한 것임을 말했다면 '노생거 사원'에서는 과연 그렇게 남성과 제대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면 여성은 진정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묻는 것이다. 

 

   물론 오스틴은 전작의 결론들을 모두 부정한다. 맨스필드 파크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경제력은 엠마에게 와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엠마에게 있어 자신을 교정해주고 적절한 충고와 사랑으로서 보다 완전해질 수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남성은 '노생거 사원'에 와서는 전적으로 신뢰만은 할 수 없는, 보다 깊은 남성의 내면으로 들어갈 경우 배척당해 버리는 그래서 남성이 여성에게 정말 바라는 것은 필요할 때 어루만질 수 있는 정도의 애완동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생거 사원'에 이르기까지 찰라에도 변하는 시간을 온전히 담기위해 수많은 덧칠을 했었던 세잔 처럼 전작 위에다 새로운 작품을 수없이 가필하면서 여성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틴은 전작의 주인공들 마저 새로운 작품에 다시 삽입하면서 까지 그 연속성을 강조한다. 즉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엠마'에 와서 '제인 페어펙스'로 다시금 등장하고 '엠마'의 해리엇은 '노생거 사원'에서 주인공 '캐서린'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이 모두 작품의 전형적인 피해자의 자리를 점유한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데,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오스틴의 작품들은 - 특히 이 세 작품에 있어서 -  전작의 전복적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렇게 그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계속해서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적 조건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스틴에게 여성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근본 조건은 단순히 말하면 여성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후대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3기니'에서 여성의 자유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라고 한 바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스틴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경제력은 필수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유를 위한 충분 조건은 아니다. 거기엔 뭔가 하나 더 필요하다. '엠마'는 그것에의 추구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도 그랬다. 그녀는 그래서 '자기만의 방'을 쓴다. 그것은 여성이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에세이였다. 그와 똑같은 것을 오스틴 역시 행한다. 말하자면 이 '엠마'는 - 후대의 작가 작품을 가지고 비유하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지만 - 오스틴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자면 오스틴의 소설적 결말이 이상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종국에는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 이어지는 해피엔딩이나지만 이러한 결말은 사실 그녀가 작품에서 천착해 온 것과 정반대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마치 오스틴의 결말들의 보여주는 모습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과정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느낌인데 오스틴은 왜 그러한 부정적이거나 혹은 한계지워진 결말들을 작품에다 허락했던 것일까? 이건 내게 아직도 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논의의 전개상 무리를 해서라도 말한다면 어쩌면 오스틴 그녀 자신에게 처음부터 세 작품을 일련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대로 세 작품에 하나의 연속성을 주기 위하여 다음 작품의 주제가 전개 될 수 있도록 정작 나아가야 할 그 순간 발길을 멈추고 그 내부에 머무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므로 다시 '엠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엠마를 통해 오스틴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니까 왜 엠마는 전작 맨스필드 파크의 여주인공 패니 프라이스가 그토록 절실했던 경제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실패를 경험하느냐에 대해서 오스틴은 엠마가 그녀 스스로를 늘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항상 스스로를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 타인에게서 발현되어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게 만드는 시선의 대표적 상징이 그 시선의 총합이며 그 시선들을 만들어내는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당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존재가 남성임을 감안한다면 그 엠마를 구속하는 시선들은 모두 남성으로 부터 오는 규율적 권력의 효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엠마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성으로 부터의 독립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외침이므로 만일 오스틴이 '엠마'에서 천착했던 주제에 충실하자면 결말의 해피엔딩은 과감히 지우고 꿋꿋하게 독신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엠마를 그렸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엠마는 소설 내내 자신을 검열케하고 교정시키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시선의 권력 주체인 나이틀리에게로 가는 것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결말은 오스틴이 작품 내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에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품이 가진 한계라기 보다는 작가 스스로 다음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시점을 이동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잠정적 결론이 아닐까 하는 게 지금 내 생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오스틴의 세 작품은 그대로 헤겔의 변증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엠마'에서 오스틴이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보다 더 궁극적인 것을 말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며 작품속에서는 흔히 '매너'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자크 르벨에 따르면 '매너'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의 기원은 1530년에 간행된 우리에겐 '우신예찬'으로도 유명한 에라스무스가 쓴 '어린이를 위한 예절서'라는 책이라고 한다. 그 책은 세가지 점에서 혁신적이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별없이 그 어떤 계층이든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며 세번째는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규범'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즉 자크 르벨이 이 책을 예절(혹은 매너)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이 예절이 특정 계층이나 어린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규범(예절에 대한 하나의 정형적 태도)을 정립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그대로 학교 교육에도 편입되어 이제 사회 성원들을 재사회화 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에라스무스가 추구했던 보편적 규범의 추구는 오로지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을 억누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므로 그래서 그는 그 규범을 정착시키는데 있어 '훈육'을 가장 중요한 수단중의 하나로 보게 되고 그를 수용한 학교 교육은 그래서 강제적이고 채벌이 수반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른바 예절이라는 것은 태초부터 개인 본연의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하나의 틀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절이 하나의 보편적 사회관계 형성의 태도로 자리잡음으로서 이제 예절이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있어 그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적인 잣대가 되어버렸다. 정확히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듯 오스틴의 '엠마'는 얼마나 이 매너, 예절이라는 것이 나와 남을 판단하고 스스로 인정받는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를 위해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나타내고 있다. 매너라는 것이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 것이  되었음은 엠마가 결정적으로 해리엇의 짝으로 마틴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매너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도 드러나며  엠마가 엘튼이나 나이틀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만날 때 그 모든 표정이나 몸짓을 눈여겨보고 있음에도 드러난다. 사실 오스틴이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쓰는 동사는 '보이다' '드러나다'와 같은 시각에 관련한 동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엠마는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생각한다. 한 장면에서는 엘튼이 더할 나위없이 무례하게 느껴졌어도 엠마는 '예절' 때문에 스스로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리 경제력을 가진 여성이더라도 아무리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타인의 시선의 매개물이라 할 만한 매너에 깊숙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로 부터 헤어날 가능성은 있는가? 엠마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그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녀는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오스틴은 거기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당시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예절의 형태들을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흔히 '엠마'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문학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의 사실주의적 면모는 바로 여기, 이러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달아날 수 없는 꽉 얽혀진 시선의 매트릭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문제는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오로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여성은 오로지 그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성은 그대로 그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교정당하는 대상일 뿐 스스로 평가하고 교정해주는 주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스틴의 '엠마'는 이것을 이렇게 보여준다.  그 시선의 매트릭스가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작품 속의 여성들은 그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데 남성은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주로 나이틀리의 형제에게서 나타난다. 특히나 엠마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형 나이틀리가 더욱 그러한데 그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타인과 사교해하는 의무를  무시하고 공공연히 혼자만의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동생 나이틀리도 기본적으로 관대하고 배려해야 하는 장인이자 엠마의 아버지 우드하우스에게 그러한 의무를 종종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엠마는 나이틀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녀는 늘 설득당하는 존재이며 그 앞에서 비평을 받는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나이틀리와 엠마의 일방적 관계에서 여성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에서 규정과 교정의 대상일 뿐이라는 게 드러난다. 더구나 엠마 스스로 관찰하고 평가해서 이리저리 맺어주려 했던 관계들이 모조리 파국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작품 내내 엠마는 그토록 열심히 보고 평가를 했는데도 자신은 잘못 보았으며 진실은 자신이 본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더구나 진짜 커다란 진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는 아예 보지도 못한다. 제대로 보는 것은 오로지 그 시선의 매트릭스로 부터 자유로운 나이틀리 뿐이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엠마가 나이틀리와 이어짐은 그 시선의 권력 주체에게 완전히 포섭되어짐을 의미한다. 작품 내내 그토록 독립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여성이었던 엠마는 그렇게 해서 그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남성에게 상납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오스틴 소설의 기묘한 측면, 즉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표현되어지는 내용의 상반성을 보게 된다. 오스틴 스스로 여성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이 여성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선 그리고 남들이 자신을 보는 그 상상의 시선 자체에 있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작품에 드러나는 내용 자체는 그러한 시선의 주체가 되려고 할 때마다 내내 실패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의 드러남과 이면의 진실의 반전된 모습은 어찌된 까닭일까? 

 

   다시 여기서 '엠마'라는 작품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그 무엇보다 '시각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다', '드러나다' 등등의 시각적 동사들이 가장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과 그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할수는 없을까? 엠마는 늘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녀는 싫지만 내색을 할 수 없고 정작 중요한 자기만의 진실된 감정들은 내부의 비밀의 영역에다 감추어야 한다. 이는 엠마만이 아니다. 엘튼도 나이틀리도 마찬가지다. 프랭크와 제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렇다. 프랭크와 제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코 엠마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미스터리였지만 궁극적으로 엠마의 세계 자체를 전복시킬수 있을만큼 핵심적인 것이었다. 가장 커다란 진실이자 가장 본질적 진실이었지만 엠마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프랭크와 제인의 표면은 그것의 기미조차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작품에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오스틴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시각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늘 타인을 보는 시선과 타인에게서 비롯되는 상상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면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진정한 관계조차 이루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엠마가 정확히 이랬다. 즉 오스틴은 작품 속 엠마의 상황 그래도 독자를 이끌고 가기 위해 '표면과 이면의 반전성'이라는 방법을 취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더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품 표면에 오스틴이 보여주는 상황 자체를 늘 의심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엠마가 그랬듯 그 표면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감춰진 진실을 영영 보지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표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나이틀리와 엠마의 결합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작품 속 진실을 찾고자 하면 본류 보다는 지류를 줄기 보다는 세부에 돋보기를 가져다 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왜 작품 '엠마'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의 하나이기도 한 '별로 명확한 줄거리도 없이 지리하게 그 세부를 모조리 복원했다.' 처럼 오스틴이 써내려 갔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앞서 말했던 그대로 이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 하나 손짓 하나 그 모조리 복원된 현실의 가장 작은 단면 조차 과연 그 안에 깃든 진실이 무엇일지 세세하게 헤아려야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소용없으며(그것은 오히려 말하고자 하던 진실을 오도하므로) 그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오스틴이 엠마를 통해 정작 하고자 했던 것 '여성이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와 연결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 것이다. 시선으로 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건 내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 되는 것 뿐이다. 엠마가 초기에 했던 그대로 내가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선을 통해 타인을 규정하려는 나이틀리의 권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거꾸로 나이틀리를 규정하는 시선적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오스틴 역시 초반에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작품 초반 나이틀리에게 엠마가 당당하게 대처할 때 나이틀리가 무기력해지고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이 '엠마'가 재현되는 과정 전체를 즐기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 전부가 내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시선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엠마'가 가진 구성적 모호성은 오스틴의 명백한 의도이며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독립적 시선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엠마'는 오스틴의 새로운 전략적 글쓰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이면과 세부에 진정한 진실들을 새겨넣어 볼 수 있는 자에겐 지금의 현실이 그 편파적인 욕망이 아로새겨진 인위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드러내는... 

   새삼 엠마를 주목함은 이 작품으로 인해 오스틴을 나 스스로 전혀 새롭게 해석해 볼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스틴은 늘 이야기의 매력으로 먼저 다가온 작가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이야기의 아래에서 오스틴이 진정 새겨넣으려 했었던 손길들이 보이는 듯 하다. 단적으로 말해 엠마는 오스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고전이란 언제 어느 때 다시 보아도 늘 새로운 생각을 주기 때문에 고전이다 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엠마야 말로 거기에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엠마로 인해 이제 전혀 새롭게 만나볼 오스틴의 작품들이 벌써부터 마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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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어느새 또 신간 추천의 시간이 돌아왔다. 저번엔 너무 늦게 올려서 이번엔 연락을 받자마자 올리기로 결심했다. 재빨리 10월의 소설 신간을 흝고 관심이 가는 작품들을 여기에 올려본다. 

 

 

  

  제프리 디버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다. 링컨 라임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이다. '소녀의 무덤' 같이 하나로 집약된 사건을 두고 선과 악을 대변하는 두 캐릭터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캐릭터 중심의 스릴러다.  위험에 처한 형사 가족을 두고 그들을 죽이려는 자와 그로부터 그들을 구하려는 자가 맞부딛힌다는 내용인데 소녀의 무덤에서 더이상 늘어날 곳이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켰던 그 디버이니 만큼 이번엔 또 어느정도로 우리의 신경을 마구잡이로 늘여줄지 정말 기대가 된다.

 

 

 

 

 

 4년만에 김훈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사소설인데 조선 후기 천주교를 믿어 흑산도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자산어보'를 썼었던 정약전과 그의 조카 사위 황사영이 주인공이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에 그와 전혀 다른 논리로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던 천주교를 배경으로 '너머를 보았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자'와 '그 너머에 머물고자 했었던 자'의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한다. 4년만에 다시 돌아온 그가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된다. 

 

 

 

 

 

  

 얼마전인가 동경에서 한국 가수들 공연에 환호하는 일본 관객을 보고 조금 의아했었다. 쓰나미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바로 지척에서 죽었는데 그들의 웃음과 흥분에는 그런 비애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쓰나미가 가져온 비극은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했었는데 마침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더구나 '사소설'로 개인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었다고 하니 더욱 접하고 싶어진다. 그 열차에 올라탄 내가 바라보게 될 풍경은 과연 어떤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까? 

 

 

 

 

 유명한 이탈리아의 감독인 난니 모레띠가 주연했다고 해서 보았던 영화인데 너무도 오래도록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이번에 나왔다. 상실을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조용한 울림이 문장으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정말 기대가 된다. 

 

 

 

 

 

 

 

 

 

  이번엔 좀 가볍게 코믹한 작품을 골라봤다. 미치오 슈스케는 '달과 게'에선 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변호 측 증인'의 해설을 보고 다시금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슈스케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니 만큼 나와 그도 이렇게 재도전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그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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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2011-11-02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고역열차는 저도 추천페이퍼에 올린 작품이네요. ^^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는 저는 참 즐겁게 읽었는데...아무래도 미치오 슈스케다운 내용은 아니었지요? ^^

ICE-9 2011-11-04 01:1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교고쿠도님^ ^
'고역열차'는 가장 가까이에서 내밀하게 감겨드는 타인의 내면, 그것도 고통을 응시한 자의 내면을 접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달과 게'는 미치오 슈스케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실망했던 것 같아요^ ^

마녀고양이 2011-11-0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분간 미치오 슈스케는 안 읽으려구요,
제프리 디버 신작은 단편이군요, 아흑,, 저는 캐서린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캐서린이 맞나요? 잠자는 인형의 주인공이, 여하간, 그 후속작을 원츄! 엉뚱한데서 조르고 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ICE-9 2011-11-04 01:21   좋아요 0 | URL
저도 캐서린 댄스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아직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워요(마녀고양이님께 저 역시 조르고 싶은 심정... 흑흑...)

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노다웃 2011-11-1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한 혼돈 읽어보고 싶네요. 달과 게는 저도 그닥..성장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역시나 그걸 깨주질 못하는구나 싶었달까.

ICE-9 2011-11-16 10:09   좋아요 0 | URL
'달과 게'는 문장은 잘 다듬어진 해변가 조약돌 처럼 매끄럽기만 한데 그 너머의 것이 느껴지지 않아서 저 역시 곤혹스럽더군요. 리뷰조차 쓰기 려울 정도로 말이죠 ㅠ ㅠ '조용한 혼돈' 저 역시 정말 읽고싶은데 과연 와줄지 모르겠어요^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감사하게도 9기에 이어 10기도 소설 부분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하게 된 신간을 살펴보는 일들은 평가단 활동 가운데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또 계속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럼 10기의 처음 시작으로서 제가 주목하는 신간들을 하나씩 올려보겠습니다.

 

       

 저로 하여금 다시금 10기 신간평가단에 도전하도록 그 동기를 가장 충동질 시켜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신간평가단 도서로 받아서 리뷰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다시 10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지요. SF계의 양대산맥이라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모두 휩쓴, SF 독서계에서 가장 핫 이슈 아이템으로 떠올랐던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을 읽기 위해서 말입니다. '와인드업 걸'은 일종의 바이오 펑크 장르입니다. 제목의 '와인드업 걸'이란 뭐랄까요 지금의 '섹스돌'의 미래형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러한 쾌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적 노예 휴머노이드 같은 것입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에는 생체공학을 바탕으로 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장르가 바이오 펑크이지요. 유전자 공학을 통해 생산되는 식량을 무기로 한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위협에 맞서 주권을 지켜가려는 미래의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방대한 이야기는 이미 장르소설로는 이례적으로 타임지에 의해 2009년 최고의 베스트 10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가을 꼭 벗해야 할 한 권으로 추천하고 싶군요. 

 

 

 

 존 하트의 데뷔작 '라이어'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굳이 2010년 에드거상 최우수 소설상 이라는 문구가 없어도 이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라이어'에서 존 하트가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란 존재와 그 아래에서 자녀가 성장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순문학적일 정도로 진지한 시선과 높은 성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종 존 하트를 스릴러 작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순문학적 작가라고 해야 할지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라이어'는 그가 내리는 현재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세번째 작품인 이 소설 역시 비슷한 주제를 천착하고 있는듯이 보여지는데 특히나 그 원인을 더 추적하는 작품인 것 같군요.  제게는 존 하트란 이름 만으로도 꼭 읽어야 할 소설이지만 여러분들에게도 신뢰할만한 작가의 이름중 하나로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파비치의 하자르 사전은 우리나라의 책을 좋아하는 참 많은 사람들을 애태워왔던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절판되었던 이 책을 찾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시 발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저 다시 간행해 준 열린책들에게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이제야 다시금 벗하며 독창적이면서 영감으로 번득이는 그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게 되었네요.

 이 소설에 대해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꼭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란 말 이외에... 

 

 

 

  

 역시나 다른 말 필요 없습니다. 

 미셀 우엘벡 입니다. 

 무조건 읽어야 합니다. 

 

 

 

 

 

  

 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을 선택한 건 순전히 제 취향이 아닌 전략적인 고려입니다. 말하자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올려주신 추천 페이퍼를 보았는데 '삼총사'와 '알레프'를 많이들 언급하셨더군요. 그런데 두 책 다 저에게 있는 것들 입니다. 있는 책을 또 다시 신간으로 받을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하나는 받지 않아 보려고 그 중 가장 많은 분들이 선택한 것을 골랐습니다. 추천 페이퍼에 이런 의도로 추천 신간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적용되는 다수결 원칙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그저 가급적 같은 책을 받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돈 윈슬로의 작품은 언제가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군요. 더구나 닐 캐리 시리즈의 시작이라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돈 윈슬로는 실제 사립탐정으로 일했던 작가이기에 그 리얼리티가 어느 사립탐정 소설 보다도 생생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립탐정물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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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 완료했습니다! 첫 미션 수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10기에도 잘 부탁드려요!!

ICE-9 2011-10-19 01:13   좋아요 0 | URL
넵^ ^
 

   바야흐로 올 가을은 아무래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의 가을이 될 것 같군요. 이미 뮤지컬이 그것도 신성우, 유준상, 엄기준 등 초호화캐스팅으로 공연중인데다가  좀 있으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로 유명한 폴. W. S 앤더슨이 감독한 '삼총사'도 3D 영화로 나오고 말이죠. 예고편을 보아하니 일종의 '스팀 펑크' 쪽이던데 주인공들 보다 오히려 악역 배우들이 화려해서 관심이 갑니다. 무엇보다 저의 초유의 관심은 팜므파탈의 대명사 '밀레디'를 누가 맡았느냐인데 '레지던트 이블'로 감독과 인연이 깊은 밀라 요요비치가 맡았더군요. 그래서 관심이 더욱 급증되었습니다. 

 

  오우! 드레스 입은 밀라 요요비치도 멋지군요. 팜므파탈로서의 매력이 정말 물씬나는 캐스팅 입니다.

                                                               

  그 외, 그녀를 유혹해서 스파이로 만드는 버킹검 공작 역엔 올랜도 블룸이 리슐리외 추기경엔 '거친녀석들'로 아주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크리스토퍼 왈츠가 맡았더군요. 거의 악역들의 포스가 삼총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악역 배우들의 연기가 어떤 앙상블을 만들어낼지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악역들이 화려해서 정작 주인공 역할을 누가 맡았는지는 관심 밖이 되네요. ㅡ ㅡ) 

 

   근데 왜 이렇게 갑자기 삼총사가 뮤지컬과 영화 양쪽으로 비슷한 시기에 상륙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총사의 공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원작인 뒤마의 '삼총사' 역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제게는 쥘 베른 선집의 번역가로 더 유명하지만...) 김석희님의 새로운 완역본으로 올가을에 나오게 되었으니까요. 

 

 

 

 

   유년시절 절 가장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소설 중의 하나가 바로 '삼총사' 였습니다. 소설 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가세해서 더욱 더 삼총사의 매력에 헤어나올 수 없었죠. 그래서 당연히 이렇게 각종 컨텐츠로 삼총사가 마구 나오는 것은 저에겐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일단 저는 삼총사에 대한 '팬심'이 있으니까요.  저는 이미 뒤마의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2002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삼총사의 새로운 완역본이라면, 그것도 쥘 베른 선집에서 신뢰감을 넣어준 김석희님의 번역이고 보면 소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책이 저에게 왔습니다. 이렇게... 

  두둥! 외관이 2002년에 나온 하얀색 양장본 보다 더욱 근사해졌습니다. 

  이번엔 각도를 달리하여 모아서 찍어봅니다. 흐음, 확실히 전시효과는 뛰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한번 봐 볼까요? 

 이게 2002년 뒤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민음사에서 나온 판본입니다. 번역자는 이규현님으로 미셀 세르의 '헤르메스'와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를 번역하신 분이죠. 불문학 전공자이시구요. 후기를 보면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공사 판은 프랑스 왕조의 문양을 사용한 반면, 민음사 판은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와 꽃을 들고 있는 총사'를 표지에 사용했습니다. 민음사 판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장본으로 세권으로 분권되어 나왔습니다.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은 두 권 입니다. 가격은 당시 민음사 본이 권당 만원이었고 이번 시공사 판은 16,000원이니 한 2천원 정도 민음사 판이 더 저렴합니다. 하지만 2002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시공사 판이 더 저렴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내친김에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같이 한 번 찍어 올려 봅니다. 

  

  이렇게 같이 죽 놓고보면 민음사 판도 전시효과가 상당합니다. 자아, 이제 외관을 확인했으니 정작 2002년의 민음사 판과 지금 나온 시공사 판이 어떻게 다른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LET'S FIGHT !! 

 

 

 먼저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번역일테니 두 판본의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되도록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그냥 가장 첫 시작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프랑스 판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아래는 같은 부분의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Il y a un an à peu près, qu'en faisant à la Bibliothèque royale des recherches pour mon histoire de Louis XIV, je tombai par hasard sur les Mémoires de M. d'Artagnan, imprimés — comme la plus grande partie des ouvrages de cette époque, où les auteurs tenaient à dire la vérité sans aller faire un tour plus ou moins long à la Bastille — à Amsterdam, chez Pierre Rouge. Le titre me séduisit: je les emportai chez moi, avec la permission de M. le conservateur; bien entendu, je les dévorai.

 

 

   1년쯤 전에 루이 14세의 전기를 쓰려고 왕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다가 <다르타냥 씨의 회고록>이란 책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서점에서 출간된 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진실을 말했다가는 감옥에 가는 때여서, 이런 불운을 피하고 싶은 저자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저서를 펴냈다. 제목에 마음이 끌린 나는 도서관 사서의 허락을 받고 그 책을 집으로 가져와 한달음에 읽었다.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일 년 쯤 전에 나는 왕립도서관에서 루이 14세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르타냥 씨의 회상'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피에르 루주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당시에는 대부분의 책들이 이런 곳에서 출판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진실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제목에 끌린 나는 집으로 책을 가져와 - 물론 도서관 사서의 허가를 받고 -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번역 스타일이 확연히 두드러지는 것 같군요. 대체적으로 김석희님이 가독성을 고려한 의역 스타일을 이규현님은 되도록 원문에 충실한 직역 스타일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독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단은 김석희님의 번역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하나 더 비교해 볼까요? 이번에는 가장 마지막 부분을 그러니까 어린 시절 절 가장 눈물짓게 만들었던 다르타냥과 삼총사가 헤어지는 부분을 비교해 보죠. 

 김석희님의 번역입니다. 

 아토스는 펜을 들고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적어서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나에게는 친구가 없겠군요.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다르타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아토스가 말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도 세월이 흐르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거야." 

 

 이번엔 같은 부분 이규현님의 번역입니다. 

 

그가 펜을 들었다. 사령장에 다르타냥의 이름을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이제 나에게는 친구가 없는 거로군요." 젊은이가 말했다. "아! 이제 남은 것은 씁쓸한 추억뿐..."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볼을 따라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네는 아직 젊어. 젊고말고." 아토스가 대답했다. "자네의 씁쓸한 추억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뀔 시간은 충분하네!"

 

 어릴 때의 감흥이 아직도 남은 것인지 지금 읽어도 왠지 저려오네요. 아무튼 여기서도 번역 스타일은 확연히 차이나죠? 여러분은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번역 스타일도 그렇지만 또 다른 점에서 시공사 판과 민음사 판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번 시공사 판에는 삽화가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민음사 판에는 삽화가 전혀 실려있지 않습니다. 대신 앞부분에 따로 인물 소개 형식으로 삽화가 조금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삽화가 없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삼총사를 보아온 저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삽화 역시도 저에게 엄연한 추억의 대상이기 때문이죠. 거기다 삽화라는 것이 단순히 내용에 첨부되는 것이 아닌 그 내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함께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런 고전 클래식에서 삽화가 없는 것은 정말 아쉽기만 합니다. 그럼 여기서 시공사 판에 실린 삽화 하나를 올려보겠습니다. 

 

 삽화의 퀄리티가 상당합니다. 모리스 르루아르의 작품으로 알고보니 당시에 꽤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더군요. 

 

                                               

 여기에 또 하나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각주'입니다. 삼총사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있고 아무래도 낯선 지명이나 인명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각주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민음사 판은 그걸 간단히 삽입한 반면 시공사 판은 책 말미에 따로 자세한 각주를 정리해 두었더군요. 이를테면, 민음사 판은 페이지 17에 나오는 도시 '라로셀'에 관하여 각주로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신교도가 세력을 떨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 옮긴이' 이렇게 처리한 반면 시공사 판은 맨 뒤에 따로이 이렇게 자세히 써 두었습니다. 

 

   저기 13 이 있는 각주가 바로 라로셀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13은 바로 그 것이 나와있는 페이지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다른 각주와는 달리 일일이 페이지 수를 명기해 놓았다는 점에서 출판사의 배려가 엿보이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말미에 나와있으면 일일이 찾기란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죠. 그런데 저렇게 페이지 수를 표기해 놓으면 그 수고는 많이 덜어질 것입니다. 각주의 내용이 분량상 길어서 맨 뒤로 따로이 정리할 수 밖에 없었던 형편상 그나마 독자의 수고를 줄여주려 배려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각주가 꽤 상세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역자 후기와도 같은 작품 해설에 있어서도 차이가 보이더군요. 김석희님은 뒤마의 소개를 문학적 스타일로 풀어간 반면 이규현님은 '헤르메스' 같은 인문서를 번역하신 분 답게 논문식으로 풀어가셨더군요. 뒤마의 일대기에서는 김석희님이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삼총사의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규현님의 해설이 좋았습니다.(무엇보다 왜 다르타냥이 있는데도 제목이 굳이 삼총사였을까는 저도 의문이었는데 이규현님 해설 덕분으로 조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마에 관해서라면 그래도 김석희님 보다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일단 뒤마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건드려 낳았다는 건 유명한 얘기입니다만 그런데 뒤마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인 후작의 이름을 쓰지 않았었죠. 그것에 대해서 이규현님은 단순히 아버지와의 불화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 반면 김석희님은 후작이 다시 다른 여자와 재혼을 결심하는 바람에 아들로서 부친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포기했다고 보다 상세히 함으로써 그 인간적 고뇌까지 전해지도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더군요. 

 

 이렇게 이번에 나온 시공사 판과 2002년에 나온 민음사 판을 비교해 보았는데요. 번역 스타일이나 삽화의 차용 그리고 각주의 처리 등에 있어서 두 판본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판본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아무튼 뒤마를 좋아하고 삼총사를 많이 즐겨온 저로서는 이렇게 삼총사로 풍성한 가을이 더욱 기대되지 않을 수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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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1-10-0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규현 님의 번역도 읽고 싶네요!
그래도 제 생애 최고의 삼총사 이야기는... 멍멍기사! :)

ICE-9 2011-10-02 00:14   좋아요 0 | URL
앗! 저랑 통하시는데요.
저도 그 애니를 정말 사랑합니다.^ ^

2011-10-0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2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0-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뭐 이쯤되면 헤르메스님 시공사 밀어주시는 게 역력한데요?ㅎ
표지 장정도 시공사가 훨씬 좋아 보입니다.
글치 않아도 문득 이 책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그렇다고 당장 읽겠다는 건
아니고.ㅋ) 이렇게 꼼꼼하게 비교를 해 주시니 감읍할 다름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ICE-9 2011-10-02 00:25   좋아요 0 | URL
아, 제 개인적인 취향이 너무 드러났나요? ^ ^;
아무래도 제가 두 판본을 다 가지고 있다보니 비교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늘 들어와보고 이 페이퍼가 이리도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도 있습니다.
뭔가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더 기쁘네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adf657 2011-10-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공사에서 삼총사 속편 20년후와 브라즈론 자작(철가면)도 내주면 좋겠습니다.
김석희 선생님이 나마지 속편도 변역해주실지^^
저는 초등학생일부터 삼총사 1부만 지겹도록 읽어왔습니다. 이제 삼총사 속편도 완역본으로 정말 보고 싶습니다.

ICE-9 2011-10-02 00:2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읽어보니 거기에도 삼총사 속편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더군요. 그것도 구구절절. 삼총사가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도 페렉이 써 놓았던데 그것을 읽으며 속편을 아직도 읽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발 이번에 삼총사가 제대로 성공해서 꼭 속편도 완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염원!

노이에자이트 2011-10-0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 부자는 둘 다 유명한 소설가죠.제게 뒤마 페르 전기가 있어요.뒤마 피스가 사생아여서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네요.

ICE-9 2011-10-02 00:31   좋아요 0 | URL
아, 뒤마의 아버지 역시 소설가였군요. 김석희님의 해설에는 아주 능력있는 군인으로만 나와있어서 몰랐던 사실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0-02 21:26   좋아요 0 | URL
하하하...3대를 파악하려니 꼬였네요.소설가 뒤마 부자란 <삼총사>와<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뒤마와 <춘희>를 쓴 그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뒤마 페르, 후자를 뒤마 피스라고 합니다.이름이 똑같거든요.

헤르메스 님이 말하는 능력있는 군인은 뒤마 페르의 아버지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뒤마 페르가 아주 어렸을 때 사망합니다.작가는 아니었어요.뒤마 페르는 이야기솜씨가 좋은 어머니 영향으로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네요.

정리하면 뒤마 페르의 아버지는 군인이고 아들은 작가입니다.이 뒤마 페르의 아들이 사생아라는 것이죠.

저는 김석희 씨 번역본은 없는데 그 책의 해설은 <춘희>의 작가 뒤마 피스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해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CE-9 2011-10-02 23:38   좋아요 0 | URL
아, 그게 뒤마와 그 아들 얘기였군요. 저는 뒤마의 아버지 얘기로 오해를^ ^;
김석희님의 해설에도 '춘희'의 뒤마 피스가 바로 뒤마의 사생아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뒤마는 원래 배우자, 여배우인 이다 페리에 외에도 다른 여인들과 교제하여 네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하는데 양재사였던 마리-로르-카트린 라베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춘희를 쓴 뒤마 피스라고 하는군요. 이름은 아버지를 따랐고 때문에 같은 소설가와 극작가의 길을 걸은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아버지)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아들)로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만 나와있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10-03 17:37   좋아요 0 | URL
뒤마 피스에 대해선 그 정도 서술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제가 읽은 뒤마 전기는 이 부자 간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해요.뒤마 페르와 빅토르 위고,오노레 드 발자크 간의 일화도 재밌는 게 많네요.하지만 45년 전 것이고 그 뒤로는 안 나오는 책이라 시중에서 구할 순 없죠.

노다웃 2011-10-06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의 비교 잘 읽었습니다~
시공사 삼총사 보자마자 확 들어왔는데 꼼꼼한 비교까지!
양장본이 너무 예뻐서 조만간 데려오려고요. 저도 어렸을 적 달타냥~무지 좋아했었거든요.
참 영화도 기대됩니다. 밀라 요요비치가 나오니깐요 후후훗


ICE-9 2011-10-07 22:4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달타냥을 좋아하신다면 이번의 삼총사로 또 한번 즐거운 추억에 빠져드실 수 있으실듯 합니다.
저 역시 밀라 요요비치 때문에 영화를 무척 기다리고 있답니다.^ ^

뽀로롱 2011-10-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알찬 정보 감사드려요 ^^
삼총사가 이번에 물량공세를 하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콕콕 찝어주셔서 정말 도움이 됐어요.
저는 읽기 좋고 표지도 이쁜녀석이 끌리네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ICE-9 2011-10-10 23:56   좋아요 0 | URL
삼총사의 팬으로서 당연한거죠.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

콜록콜록 2011-10-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민음사 판 삼총사가 반값할인을 하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구매하려다 헤르메스님이 포스트하신 걸 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전 시공사 판 번역이 마음에 드네요. 그래서 비싸지만 시공사에서 나온 삼총사로 질렀습니다. ^^
민음사에서도 얼마전 완역본이 새로 나왔는데 번역하신 분이 같으니 아마도 번역의 느낌은 비슷하겠지요...게다가 표지가 안습이에요...--;;
아무튼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m(__)m

ICE-9 2011-10-19 01:1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오히려 기쁘네요.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