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인데, 검색을 해보니 영화 범주 자체가 사라졌군요. 아마도 영화 리뷰는 못 올리는 듯 하여 페이퍼로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교실 하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던 아주 소란스럽고 통제불가능한 교실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 장학사가 시찰 나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찰 나온 장학사마저 니꼴라가 있는 교실 아이들에 엄청 시달린 나머지 결국은 담임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이란 직업이 이렇게
                         성스러운 것인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에야 그걸 알았습니다.
                         용기를 갖고 계속 열심히 가르쳐보세요. 힘내세요!"

                                                                                   ( 꼬마니콜라 p.56 )

  프랑스에서 교실이 선생님과 아이들의 전쟁터가 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처럼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겐 생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역시 엄한 규율 속에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우리들은 같은 프랑스 교실을 다루고 있는 로랑 캉테의 이 영화 '클래스'에서도 어쩐지 선생님 마랭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선생님의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없이 소란스럽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공격까지 감행하는 학생들이 당장 매를 들어서라도 질서와 예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말썽꾼들로만 보입니다.


 
 영화는 마치 그런 관객의 기분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마랭의 아주 힘든 수업시간을 보여주고 그 뒤엔 아예 동료교사 하나가 마치 마랭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학생들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동료교사의 모습이 정말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꼬마니콜라'에서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장학사처럼...
 

  마랭이 속한 선생님들의 세계에선 학생들에게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고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공감합니다. 뭔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로 부터 이러한 항변을 듣게 됩니다.

  "왜 자기들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프레임으로만 가두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마랭이 학생들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과 똑같이 아이들도 마랭으로 부터, 마랭이 속한 선생님의 세계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랭은 자기의 입장만 중요합니다.  그들은 마랭으로 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 방향은 절대로 거꾸로 될 수 없다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다고...
  그건 이미 마랭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그렇게 동료교사가 폭발했듯이 결국 터져버리고 맙니다. '슐란'처럼 말이죠. 

  감독의 의도였는지, 이렇게 선생님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각각에서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에서 터져나온 '폭발'이 한 번씩 일어납니다. 영화는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날 것'의 현실을 아무런 형식없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처럼 묘하게도 댓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쪽 세계의 구성원들이 한 번씩 분노로 인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하여, 영화의 앞부분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끝부분에는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이랄까요? 아무튼 이러한 구성은 언뜻보면 교육의 방향이 절대로 비가역적일 수 없다는 마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려했던 것과 아이들이 얻게 된 것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던 개성들이 그저 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례로 마랭을 가장 속썩였던 그래서 마랭으로 부터  창녀라는 모욕을 들었던 한 소녀는 교과 과정에는 전혀 없었던 '플라톤의 국가'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마랭에게 그녀는 "왜 그러세요? 창녀라고 했던 제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서 놀랬나요?"라며 카운터블로우를 날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마랭이 주장하던 '교육 방향의 비가역성'을 비틉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단절에 가깝다.' 이렇게 말이죠.


 

  결국 이러한 의도된 영화의 구성은 우리에게 그 단절,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앙 쪽으로 갈라져있는 세계이며 교실은 바로 그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는 하나의 전장 처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캉테가 이렇게 단절과 대치로 교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선생님과 학생간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흔히 끼고 보는 '수직적 권력 관계'라는 선입관 때문이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마랭의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선입관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바로 캉테는 그러한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질서 보다는 혼란을, 평온 보다는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캉테는 그것을 교실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묘사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특히나 카메라가 어떤 높이에서 인물들을 담는가를 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단 영화에서 카메라가 '선생님들만의 세계' 혹은 '아이들만의 세계'(수업 시간 외에는 사실상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를 찍을 때는 그대로 눈높이에서 담습니다. 카메라가 찍는 높이는 바로 그 찍히는 대상을 향한 시선의 높이에서 관객이 받는 느낌 때문에 종종 어떤 권력의 역학관계를 암시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로랑 캉테는 카메라가 위로도 아래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그저 서 있는 혹은 앉아 있는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선생님들만의 세계 나 아이들만의 세계를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는 지극히 평등하며 안정적이고 단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듯이 말이죠.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마랭과 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클로즈업된 마랭과 똑같이 수평적 위치에서 잡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렇게 그들의 주고받음은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했던 민주적 광장의 상징으로 일컫는 '아고라'를 연상시킵니다. 거기엔 어떤 지배도 훈육도 없고 오로지 '동등한 참여'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종종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잡아내는 장면 때문에 이 교실은 '아고라'와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로 홀로 서 있는 마랭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자주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저 머리와 뒷 모습만 보이는 아이들 위로 홀로 우뚝 서서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며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어쩐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중과 대치중인 고독한 군인과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반론을 전개할 때 그가 보여주는 활발한 손놀림과 몸놀림은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장면의 반복으로 교실을 하나의 '전장'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언젠가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파리 꼬뮌'의 기억이 끼어들면서 '아고라'의 개인적인 대치 관계가 '파리 꼬뮌'의 집단적인 대치 관계로 이행됩니다. 주의깊게 보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장면들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캉테는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다 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 동등한 소통을 집약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교실의 모습은 역시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생님들 세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선생님들의 세계는 교실과 전혀 다릅니다. 거기선 대화도 차분하고 조용하며 설사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지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다. 분로로 폭발하는 교사가 있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마랭의 교실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기습적 공격이 있고 연속적인 발포와 응사가 있습니다. 더러 수류탄 투척과도 같은 난데없는 인신공격까지 감행되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의 모습이란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캉테는 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두 세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통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완전한 소통과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소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두 세계가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는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고 교실은 두 세계가 서로 대치중인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선생님들만의 세계는 그려지는데 어인일인지 아이들만의 세계는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이들이라는 주체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미일까요? 만일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굳이 교실의 풍경을 화면에 그렇게 담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다른 의도가 분명 개입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엔 '바라보기'의 주체가 있습니다. 운동장을 담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주체, 단일한 세계에서 대치중인 건너편의 집단을 바라보는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보여도 선생님으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잘 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 세계가 보여주는 소통의 서로 다른 모습 또한 그 중 어떤 세계의 소통이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어쩌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관계를 보다 넓혀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로 보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교육에 있어서 구조적인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엔 사실 구조적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들은 시민권자와 이민자들을 나누고 잘 사는 계급과 못 사는 계급을 나누고 그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실인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되어진 그러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마랭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점들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얘기를 이어왔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구조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세심한 연출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출들이 진정 의도하는 바가 눈에 뜨인 순간 우리는 이제 영화를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랭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입니다. 영화 처음 우리 눈에 마랭은 정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선생님 권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훈계할 때 조차 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결국 어쩔 수 없이 폭발한 슐란을 교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선 한없이 나약해진 그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려는데, 이렇게 민주적으로 대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이해하지 않고 따라와 주지도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원망하면서 때로 의자를 걷어차거나 홀로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연민마저 느껴지면서 격려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마랭은 희생양으로 보입니다. 그저 소통하려 들지 않고 다혈질이기만 한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시선은 옳았던 것일까요? 영화가 보여준 구조적인 측면들이 눈에 띈 순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착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왜 착각이었는지를 이제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번역하자면 '벽들 사이에서' 입니다.
제목만 봐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벽들을 가로지르는 '소통'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목 대로 영화는 그렇게 구조적으로 단절된, 그렇게 벽으로 가로막힌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인들 중심의 선생님들 세계와 다인종으로 혼합된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서열화가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우월한 세계와 열악한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였습니다. 교실에서 마랭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우열로 나뉘지 않는 공간임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학생들과 아예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학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지워진 학생들을 통해 거꾸로 벽이 없다고 말하는 교실에 분명한 벽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나가거나 지워진 이유들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그 벽들'의 정체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첫째는 언어입니다.

  이제 '꼬마 니콜라'의 교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랭의 교실은 거의 반수 가까이가 이민자의 자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어 하나로 완전히 통하던 시대는 이제 가버린 것이죠. 교실엔 아직 프랑스어에 익숙치 못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모국어와 혼용해서 쓰는 아이들까지 존재합니다. 마랭은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문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화는 중국이민자 "예예"와 결국은 퇴학을 당하는 "슐만"을 통해서 이 언어의 장벽을 드러냅니다. 중국인 "예예"는 말이 서툽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이들과 제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는 거의 내내 홀로 있습니다. "슐만"은 결국 그릇된 학습태도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그가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슐만의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역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결정적으로 교장단 앞에서 프랑스어를 못해서 아들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슐만은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슐만은 퇴학을 당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예 역시 그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강제송환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슐만과 예예는 결국 똑같은 이유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그 사회에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교실에 있는 저 많은 다문화의 아이들은 사실 언어로 인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난처한 질문과 야유로 마랭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언제 어느 때 사회로 부터 몰림을 당해 떨어져나갈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듯 영화에 나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초반 그러니까 새학기가 시작될 때 분명 교실에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예예의 짝궁으로 같은 중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듯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내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언어를 못하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무서울 수 밖에 없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교실에 있는 그 어느 아이도 이것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특히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신이 배운것이 뭔지 말하고 나서 교실을 나간 뒤 앉아있는 마랭에게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그 소녀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 마랭이 가장 먼저 말하게 했던 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업학교엔 정말 가기 싫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학생의 말을 듣는 마랭의 모습을 이제 카메라가 보여줍니다. 묻는 여학생의 눈이 분명 보고 있을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내려다보는 각도, 즉 권력의 시선이었습니다. 그토록 주의깊게 시선이 가지는 권력 효과를 지워왔던 캉테가 유독 여기에서만은 권력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물음에 마랭이 아무런 대답을 못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캉테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미래가 교육으로 얼마나 나을 수 있는가를 말해왔지만 사실 당신이 해왔던 것은 그들의 미래를 거짓으로 꾸며 그들로 하여금 이 현재에 더욱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가르쳤던 그 부르조아들만이 쓰는 프랑스 문법 처럼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팔아 현재의 비참함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었나?"하고 말입니다.
 

  캉테의 이 무언의 질문에서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벽을 선명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란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자녀들에게 직업학교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곳이고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미래라고 말입니다. 결국 부르디외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현재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결국 안전하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급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부르디외의 이 결론과 캉테가 묻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 얘기들이 시작되었던 애초의 질문, 그러니까 왜 마랭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착각이었나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꼬마 니콜라'의 그 어린이들은 이제는 자라나서 프랑스의 주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가 묘사하는 선생님들의 세계가 바로 그 니콜라의 세계처럼 단일한 백인들의 세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캉테가 영화 내내 묘사해왔던 대로 단일해서 안정되고 안전한 세계였습니다. 마랭은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어쨌든 '예예'나 '슐람' 그리고 그 여학생 보다는 배제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게 피해자로만 보이던 마랭은 사실 갑각류 처럼 세계로 부터 아주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가해자들로만 보였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언제 어느때 지워지고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듯이 우리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캉테가 이렇게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은 보다 깊은 윤리적 목적이 있습니다. 앞서 영화가 두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바라보기'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캉테가 교실이 은폐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캉테는 그 '바라보는' 윗 세계의 주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사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포용해주어야 할까요?"
 

   대답은 굳이 여기서 적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캉테는 눈높이 선생님 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배려마저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배려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메라가 점점 내려오면서 휴식시간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운동장을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카메라는 차츰 내려오다 결국엔 아예 아이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하강은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마랭이 처음엔 서 있다가 갈등을 거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신체적 동작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하강과 마랭의 신체적 동작의 일치마저 보아버린다면 앞서 캉테의 질문 '우리는 누가 포용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바로 마랭이 포용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영화 초반 아이들 머리 위로 홀로 우뚝 서 있던 마랭이 그렇게 아이들과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선생과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면서 부터는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게되는 것과도 같이 마랭이 먼저 내려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마랭이 속한 저 위의 세계가 포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은 '안전한 자들'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랭와 아이들은 언제 싸웠는가 싶게 서로 하나로 어울려 즐겁게 축구를 합니다. 늘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그렇게 아래에 있는 자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입니다. 캉테가 영화를 통해 내내 말을 걸고 싶었던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 뒤이어 영화는 흐트러져있는 의자와 책상들로 가득한 텅 비어버린 교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속에 텅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맥락없이 툭 튀어나왔던 풍경들이 연상됩니다. 아마도 캉테가 보여주는 이 마지막 풍경도 그 감독들이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주었던 그 풍경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듣는 관객을 상정하며 영화를 이끌어왔던 캉테로선 정말 어울리는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니까 관객 자신의 사유를 위하여 빈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 말이죠.
 

  저는 그 '여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악이란 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사유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캉테의 '클래스'는 비단 교육 문제에만 그치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마랭에게 있어 포용이란 그렇게 학생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름아니니까요. 예전 신문을 통해 마트의 냉동창고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스에 질식해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의 얘기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찍 군대에 갔고 전역해서도 내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높은 등록금 때문에 쉴 새 없이 일만하다 결국엔 그렇게 사고로 숨져야 했던 한 젊은 영혼을 보면서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젊은 영혼 처럼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문득 캉테의 이 영화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캉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이렇게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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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21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글 올라왔네 하고서는 피곤하다, 자야지~ 하고서는 또 이렇게 들어와서 댓글남깁니다 ㅋㅋ
영화 서비스가 종료된게 참 아쉬워요. <부러진 화살>도 쓰고싶었고, 또 다른 영화들도 한 번쯤은 남겨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저는 영화를 써본적이 없이 종료되었기에 더 아쉽죠. 그런데 이달의 당선작에 영화리뷰가 올라와있더라니까요 ㅋㅋ 아! 그럼 이제 다음달부터는 영화당선작이 사라지니ㅣ 이달의 당선작 뽑는 양을 좀 더 늘릴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피곤한 밤이에요. 굳밤~:)

ICE-9 2012-02-24 02:09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소이진님의 '부러진 화살' 리뷰를 못보게 되다니 안타까운데요. 뭔가 알라딘도 사정이 있겠지만 영화 리뷰란이 없어진 건 정말 아쉽기 그지 없네요. 그동안 영화에 대해 좀 많이 써 둘걸 하는 후회도 들고... 아무튼 이렇게 페이퍼라도 소이진님의 영화 리뷰 좀 보여주세요^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레온 드 빈터의 '호프만의 허기'

  그러니까, 이 책은

  찾고 다녔던 절판된 책 중의 하나였다.

 

  폭식증에 관한 소설...

 

  폭식증, 거기에 대해

  개인적인 사연도 있어

  궁금했었고 마침 그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여

  찾았던 소설...

 

  쉽사리 내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는 구나...

  이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 때의 '만약'을 생각하며 읽고 싶다.

 

                                                      하지만 리뷰를 쓴다해도 거기에 대한 얘기는

                                                      쓰지 않을 생각... 상처는 때로 가만 놔두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으니까...

 

                                           

 

 

 

 

 

 

 

 

 

 

 

 

   매그레도 나오고 엘러리 퀸도 돌아왔으니

   어쩌면 당신도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역시 결국은 도착하고야 마는 편지 처럼 다시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전집이라니...

 

   당신의 시대를 사랑한다.

   대공황과 금주법으로 이름 높은 그 시대를...

   담배연기 자욱한 BAR, 그 연기처럼 흐르는 재즈의 선율...

   미묘한 눈짓과 어설픈 손동작으로 하룻밤을 기약하는 남녀들...

   중절모로 고뇌의 눈빛을 가리고 빈틈없는 정장으로 깃든 상처를 가린 수컷들...

   그 시대를 사랑하게 된 건 전적으로 대쉴 해밑 당신 덕분이다.

   기쁘게 다시 한 번 당신의 시대로 건너가고 싶다.

 

 

 

  히무라 아리스 콤비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두번째 장편

 

  제목의 '달리'는 살바도르 달리를 말한다.

  살바도르 달리를 신봉하는 피해자가

  프로트 캡슐이라는 명상 장치 안에서

  알몸으로 죽은 채 발견된다.

  '고치'란 바로 그 캡슐을 말한다. 

  

  피해자가 적어서 오히려

  풀이의 논리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독특한 매력이

  발산된 초기작...

 '주홍색 연구'를 읽은지 얼마 안 된지라

  더욱 읽고 싶은 작품이다.

 

 

 

 

  펭귄클래식에 이어

  문학동네에서  페렉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인생사용법'은 이미 책세상에서 나온 걸

  가지고 있으니 되었고 그외 다른 작품들은

  보지 못한 것들이라 큰 관심이 생긴다.

 

  사실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사물들'을 읽어보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많이

  연상시킨다. 소개글을 읽어보니

  재현과 복재, 재현의 재현을 다룬다고 하는데

  기실 그 느낌이 옳았던 것 같다.

  읽지도 않고 이런 말 하는 건 그렇지만

  '사물들'을 읽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잘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민음사에서 밀란쿤데라 전집이 나오고 있다.

 이미 대부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장정으로

 나오는 전집이고 보니 소장 욕구가 마구 생긴다.

 거기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탓에

 내용들이 가물거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뒤죽박죽 되어 있기도 하고...

 

 다시한번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느림'은 쿤데라 작품들 중에서 그리 만족을

 못 느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한 번 읽으면 평가를 달리하게 될까?

 아무튼 쿤데라다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문득 사유의 균열을 일으킬 줄 아는...

 

 

 

 

 

 

 

  요즘 베스트셀러의 성공 여부는

  밀레니엄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에서 보듯

  독립적이고 개성 강한 여성캐릭터를

  얼마나 잘 빚어내느냐에 있다.

 

  그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 '카루'가

  나온다고 한다.

 

  캐릭터 공부 삼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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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0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번 신간페이퍼는 눈이 정말 즐겁습니다.
마지막 책은 전혀 책같지가 않고 영화 포스터 같은걸요 +-+

ICE-9 2012-02-05 20:47   좋아요 0 | URL
요즘 책들의 표지가 잘 나와서 그냥 상품 넣기하고
확대만 했는데도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
소설도 표지만큼 잘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2-0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정말 전집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한권보다 전집으로 나오면, 더욱 혹한단 말이죠.
저는 엘러리퀸 전집을 갖추고 싶어서 안달인데, 저희 집에 쌓인 책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요.

ICE-9 2012-02-05 20:49   좋아요 0 | URL
이번에 나온 엘러리 퀸 전집은 저도 프랑스랑 네델란드 가지고 있는데 와 일부러 연출한 빈티지스러움이 정말 감탄스럽던데요. 제대로 기획을 해서 나온 것 같아요. 저도 곧 이사를 할 예정인데 책 짐이 정말 정말 문제에요. 견적내려 오신 분이 책을 보더니 한숨 부터 내쉬더라구요 ㅠ ㅠ
 

 

  유하 감독의 새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

  '쌍화점' 이후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 근데 제목이 '하울링'이다.

  설마, 이번 영화가 리메이크인 것일까?

  생각했었다.

 

  왜냐면 제목의 '하울링'  은

  '그렘린'으로 한 때 이름 꽤나 날렸던, 하지만

  영화를 가지고 마음껏 장난치는 악동절 기질로

  악명이 더 높았던 감독,

  조 단테 의 데뷔작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단테의 데뷔작은

 '인간 늑대의 음모'라는 참으로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온 적 있다.(비디오 수집 시절 이 오리지널

  판을 찾기 위하여 꽤나 애먹었던 기억도 새록하다.)

  그러니까 조 단테의 '하울링'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 말해주듯 늑대 인간이 나오는 영화였다.

 (늑대로 변하는 특수효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럼, 유하가 한국한 늑대인간 영화를 만드려는 것일까?

  주연이 단 한번도 유하와 인연이 없었던 송강호인 이유도

  늑대인간과 드랴큘라가 상극이라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테니까

  일부러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드라큘라가 되었던 송강호를 데려와

  키치적 변주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였더 것일까?

 

  이렇게 멋대로 상상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모든게 한낱 오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으니...

  사실 제목만 '하울링'일 뿐, 조단테 데뷔작의 리메이크는 아니며

  아예 원작조차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늑대인간의 얘기도 아니라고...

 

 

 

 

  그 원작이, 바로...

 

  일본 작가 노나미 아사  의

 '얼어붙은 송곳니' 라고 한다.

  15회 나오키 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읽지 못했다.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어차피 영화 예고편에 다 나오므로 하는 말이지만

  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쇄살인을 다루는 작품

  이란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의 제목 '하울링'은

  개에 의한 연쇄살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붙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데,

  '뭐, 개에 의해 연쇄살인?...'

  하자 이와 비슷한

  영화가 예전에도 하나 있었음이 생각났다.

 

 

 

 

   그 영화가 바로...

 

  B급 영화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사무엘 풀러  의 'WHITE DOG'이었다.

  80년대의 미국은 늑대 혹은 개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

  던 것일까? 앞서 소개한 조 단테의 '하울링'이 1981년에

  나왔는데,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1982년에 나왔다.

  (현재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틴 울프'

   도 1985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레이거노믹스가 절정에 달할

   무렵 이토록 야성성을 강조하는 영화가 왜 득세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마견'이란 역시나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왔었다. 정말 휘귀했던 비디오로 보고

  싶었던 많은 이들을 애태웠는데 제목이 저렇게

  '마견'이 된 것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개에게

  'WHITE'란 제목이 붙여짐으로 혹시 이 영화를 보고

  반미주의적 의식이 움트면 어쩌나 하는 윗분들의 우려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충격의 복도, 언더월드 USA로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주었던 B급 영화의 대부, 사무엘 풀러가 70세가 넘어서 만든 이 작품은 '얼어붙은 송곳니'와 마찬가지로 개에 의해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다룬다. 뭐, 제목만 보고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잠깐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면,

   한 소녀가 자동차에 치인 개를 구하는데 그 개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다. 흑인만 보면 이유도 없이 으르릉 거리며 날뛰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개는 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흑인만을 노려 살해하도록 훈련시킨 개였다. 한 흑인 개 조련사가 그 사실을 알고 그 개를 고치려고 나선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영화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반골로 살아온 사무엘 풀러 답게 그저 그런 개가 나오는 공포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오로지 사무엘 풀러만의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유하의 '하울링'이 그랬듯이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작을 말한다면 아마도 원작자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 가리' 이기 때문이다.

 

 

 

 

 

 

 

 

 

 

 

 

 

 

 

 

 그 로맹 가리가 1970년 10월 9일자 라이프지에 발표한

 단편 'WHITE DOG'이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오른쪽의 표지가 'WHITE DOG'이 표제작으로

 실린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편집의 초판 표지이다.

 (아래는 영문판의 표지) 

 

 

 

 

 

 

 

 

 

 

 

 

 

 

 

 

 

 

 

   아직 국내엔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 로맹 가리의 작품을 접해왔던 분들이라면 '세상에 사람을 물어 뜯어 죽이는 살인마 개의 이야기라니, 그런 걸 정말 로맹 가리가 썼단 말이야?'하고 정말 의아해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그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을 생각하면 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교육'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었던 로맹 가리 자신의 자전적 체험이

  깊숙이 투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쟁 얘기를 그대로 담아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광기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와

  절망을 얘기한다. 미처 제대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교육'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모습

  을 절절하지만 빼어난 문장으로 한차례 걸러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

  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이 주는 모든 경험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가지게 되어 그로부터 의식과 판단이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과 그렇게 규정되었지만 한 편으론 그 규정된 의식과 판단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영혼이 그 내부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한 어린 영혼의 모습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과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한데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혼의 전장이다. 거기서 로맹 가리는 말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 어쩌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길들여짐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을 획득하는게 아니겠느냐고...

 

  바로 이러한 생각, 자유에로의 몸부림이 또한 단편 'WHITE DOG'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맹가리의 근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초적 체험이란 늘 남으로 부터 규정당한 것. 그렇게 길들여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길들여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확신할 수 없다. 그건 영원한 숙제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사무엘 풀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풀러 역시 'WHITE DOG'을 통해 이것을 묻는다.

  애초에 한 인종주의자로 부터 조련된 개를 내세우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로맹 가리 처럼 한 쪽으로 사고하도록 길들여진,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 체험이 되어버린 존재를 다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의 신체 내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의식으로 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로서 풀러는 인종주의의 근저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 현상되는 인종주의는 어쩌면 그 길들여진 개 처럼 우리 자신 역시 그렇게 사고가 길들여져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개를 다시금 조련시키려 하는 흑인 조련사는 사실 지금 영화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종주의 자체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려는 사무엘 풀러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또한 조련 자체로 상징되듯이 80년대 등장했던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을 '계몽'이라는 수단으로 개선시키려 했었던 주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그 시대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를 그 모든 논의되는 대안들과 더불어 정면으로 음미해 보려는 노장의 당당한 '참여'였던 것이다.

 

  과연 길들여짐이 또 다른 재교육으로서 조정 가능한지 사무엘 풀러가 내놓은 답안은 혹시나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하여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 또한 이 페이퍼는 어디까지나 유하의 신작에 대한 것이지 사무엘 풀러와 로맹가리의 것은 아니므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가 사회철학과 또한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정도로만 그칠까 한다.  

 

 

  아무튼, 바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유하가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를 '쌍화점' 차기작으로 선택했는지...

 

 

 

 

 

 

 

 

 

 

 

 

 

 

 

 

 

 

 

  '쌍화점'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하울링'이 유하 작품 세계에서 가지게 될 연속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쌍화점'은 무엇을 말하는 영화였나? 단순히 말하자면 '왕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길들여져왔던 '조인성'이 그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왕비와의 '연정'으로 처음으로 이성애에 눈을 뜬 조인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어릴 때 부터 왕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들여진 '동성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즉 '쌍화점' 은 궁극적으로 '길들여짐과 그것에 대한 거부'의 얘기였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 과 마찬가지로 외부로 부터 강요된 길들여진 정체성과 그것에 저항하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서로 칼날을 겨누고 뒤엉키는  얘기인 것이다. 이것은 유하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내내 천착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그리고 '쌍화점' 이 일련의 영화들은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즉 박정희 이후 우리의 내면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그렇게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어질 대로 길들여진 우리 정체성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여기에 대해선 물론 세세한 근거를 댈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유하가 그 길들이는 권력 주체의 자리에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가고 있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정도만 언급해 둔다.)

 

 

   그러니 '길들여진 존재'가 길들여진 그대로 충실히 살인을 수행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사실 그야말로 유하가 내내 천착해온 테마인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유하는 이 작품을 자신의 차기작으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유하는 같은 주제를 내내 다루면서도 그 접근 방법은 다 달랐다.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 만큼이나 이번 '쌍화점'과 '하울링' 역시도 그 접근 방법이 파격적으로 달라졌는데, 이 색다른 변주를 통해 독재에 의한 길들여짐을 집요한 정밀함으로 보여주었던 '쌍화점' 처럼 또 어떤 길들여짐에 대한 변주를 송곳니로 물어뜯어가며 연주해 줄 지 정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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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시당 ><
저는 유화감독은 모르지만, 쌍화점을 알고. 하울링은 모르지만 얼어붙은 송곳니는 알아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안그래도 곧 영화를 보러갈건데 참 감사합니다, 생각햇는데 담달 개봉이군요... 씁쓸합니다 ㅠ

ICE-9 2012-01-24 23:15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소이진님은 다음달에 바쁘신 모양이로군요.
그런데 저도 그래요. 흐엉 ㅠ ㅠ...
너무나 기다렸던 유하의 신작이지만
밀린 일이 많아서 2월달 안으론 못 볼 것 같아요...
ㅠ ㅠ...

맥거핀 2012-01-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울링'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사무엘 풀러와 로맹 가리를 거쳐, 다시 유하감독이 하울링을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돌아오는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무릇 소개글이란 이렇게 써야하는 건데...덕분에 유하 감독의 신작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관심이 부쩍 생기네요.

ICE-9 2012-01-24 23:28   좋아요 0 | URL
박정희가 주입한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남겨진 '근대화적 정체성'에 각각 다른 변주로서 내내 천착한다는 점에서 유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작가입니다. '쌍화점'은 동성애를 가지고 독재와 개인의 저항을 절묘하게 풀어간 그 절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데 그래서 그 이후의 작품이 어떤 것을 보여줄지 더욱 궁금했는데 이번엔 아예 내내 은유적으로 담아왔던 '길들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군요. 여기서 문득 맥거핀님이 신작을 기다리는 누굴까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또 기대작이 하나 늘었어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세상에 이 영화가 개봉된다는군요. 극장에서 만나는 타르의 영화는 처음이라서 마구 두근거려집니다. 2월은 정말 바쁜데 이 영화만은 어떻게든 만사제치고 볼 생각이에요. 타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고...

맥거핀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아..벨라 타르 영화가 개봉을 하는군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주 평이 좋았다고 하던데, 저도 챙겨서 봐야겠습니다.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자, 드디어 2012년의 첫 신간 추천의 시간이 다가왔군요.

   이 첫 시작을 함께 할 작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계속 모으고 있는 대산세계문학총서...

   저번달엔 카늑의 '이스탄불을 듣는다'로 절 놀래키더니

   이번에는 정말 놀랍게도 맬컴 라우리의 초 걸작

   '화산 아래서'가 나왔습니다.

 

   커헉!

   신간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제게서 바로

   터져 나온 비명입니다. 세상에 이 책이 나올 줄이야...

   오매불망 기다렸던 작품 중의 하나를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새해 첫 신간 추천의 그 가장 처음 시작에

   마땅히 자리잡을만 합니다.

 

 

   맬컴 라우리는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작가였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바이런 처럼 맬컴 라우리 역시도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단번에 얻게되었습니다. 멕시코에 있는 영국 영사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공 제프리 피먼의 마지막 날, 단 하루만(하필 그 날을 '죽은자들의 날'로 설정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 강조하고 있죠.)을 소설은 그리고 있는데, 특히나 전쟁 중에 씌여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문체와 환상과 현실의 오가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가 주목을 끄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문명의 파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개인을 담아내는 이 작품은 그래서 전쟁 중에 겪었던 작가의 고통 그리고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의식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전적입니다. 라우리 자신 또한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죠.

 

 

 

   여기에서 보듯 그는 애초에 이 작품을 신곡 처럼 3부작중 1부로 구상했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그만 사망하는 바람에 뒷 편은 나오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라우리의 백조의 노래 입니다. 백조는 죽을 때 단 한 번 우는데 그 노래소리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하죠. 정말 그대로입니다. 더구나 이제는 말도 안되는 재판으로 양심수라는 지위까지 가지게 된 정봉주님이나 SNS 사용자들에 대한 검찰의 무자비한 고소 남발에서 보듯이 거대 시스템 아래에서 억압받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개인들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러한 피먼의 거대 문명에 맞선 개인의 (비록 초현실주의적이지만) 투쟁은 분명 동시대성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긴 겨울밤을 숙독의 뿌듯함으로 채워줄 이 소설을 정말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1984년 존 휴스턴에 의해 영화화 된 바도 있습니다. 영화도 원작의 주제를 잘 살린 훌륭한 작품인데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로는 들어왔지만 DVD로는 발매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표지는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으로 나온 DVD의 표지입니다. (영화를 혹시 보실 분들에게는 가장 추천드리는 판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움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더군요.

   또 하나의 놀라운 책의 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스터리의 진정한 대명사, 엘러리 퀸이 돌아온 것이죠.

   그것도 빈티지 스타일에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말이죠.

 

 

 

 

 

 

 

 

 

 

 

 

 

 

 

 

 

   이제 더이상 그 옛날 시그마 북스를 찾으러 다닐 필요는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를 읽어보지 못해서 일단 거기부터 시작했는데 다시 읽어보는 엘러리 퀸 정말 좋더군요. 벌써 세 권까지 나왔습니다. 발간에 정말 속도를 내고 있는 듯 해요. 이 상태로라면 개인적으로 퀸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도 금방 나올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아직 퀸을 접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해드립니다. 무엇보다 퀸의 시작은 그의 '국명 시리즈로 부터'라는 말도 있으니, 읽어보시면 왜 퀸, 퀸 하는가 이해할 수 있으실 듯 해요.

 

 

 

    거기에 제가 또 좋아하는 작가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미쓰다 신조의 정말 읽어보고 싶었던 '도조 겐야' 이전의 데뷔작 역시 나왔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미쓰다 신조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듯이 '도조 겐야' 시리즈와 '작가' 시리즈가 있는 모양입니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바로 그 작가 시리즈의 첫 작품이고 그의 가장 처음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서 실명으로 등장했듯 그 역시 여기에서 미쓰다 신조로 등장하며 그것도 도조 겐야를 집필중인 모습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소개글을 보니 도조 겐야 시리즈의 매력에 푹 빠진 저로서는 정말 읽고 싶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으니 정말 걱정이로군요. 아무튼 조만간 꼭 벗해볼 생각입니다. 아예 신간평가단 작품으로 선정되면 더 좋겠구요. 

 

 

 

 

 

 

   발간만 되면 늘 추천하는 해리 보슈 시리즈. 이번에 그 일곱번째 작품이 나왔습니다. 특히나 이 작품이 주목을 끄는 것은 여기엔 해리 보슈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왜 예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블러드 워크'란 영화에서 연기하기도 했었던 테리 매케일럽도 나오고 또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까지 다 나온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마이클 코넬리의 올스타전 같은 작품이라 하겠네요. 좋아하는 캐릭터를 한 작품에서 모두 만난다는 것은 팬으로썬 지극히 반가운 일이죠. 이들이 어떤 앙상블을 보여줄 지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책은 한 번도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된 적이 없으니... 결국은 또 시간이 허락할 때 벗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늘 레이먼드 챈들러와 로스 맥도널드 사이에서 부유하는 저로서는 하드보일드 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팬인데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같습니다. 연구서인데 어째서 소설 파트에 들어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검색이 되길래 과감하게 추천 신간으로 꼽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로버트 크레이스의 '데몰리션 엔젤' 리뷰할때 미국의 하드보일드 역사를 얘기할 때 그 중심에 '가족'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각 대표작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가 썼습니다만 그에 대해 아주 전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이제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하드보일드에 대한 제 개인적인 느낌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정리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또 한명의 새로운 하드보일드 탐정을 만납니다.

 스스키노 탐정이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벌써 12편이나 되는

 작품이 나왔다고 하는군요. '탐정은 바에 있다'는 그 중

 두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배경이 삿포로인데다

 그것도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밤의 '바'라니...

 분위기만으로도 정말 매혹적입니다.

 

  뜨근한 전골 국물에 정종을 기울여 가며

 호젓하게 벗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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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헤르메스님소설 신간평가단이셨군요.
역시 그 정도 리뷰로 당선되지 않았다면 저는 알라딘을 미워했을 거에요 ㅋㅋ
미쓰다신조의 신작은 정말 구미가 당겨요.
아, 요즘 돈도 없는데 살 수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있죠..
이번달에는 추리와, 하드보일드로 구성된 페이퍼인걸요.
그건 그렇고, 첫번째 책을 그렇게나 추천하시니 어찌 안 읽어볼 수 있겠습니까!

ICE-9 2012-01-10 00:53   좋아요 0 | URL
추천 페이퍼가 하드보일드와 추리로 집중되는 것은
제가 일부러 이 서재의 특성을 그 쪽으로 하려는 의도도 있어서 그래요.
장르 소설들은 그저 재미만 추구하는 통속소설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이 아니라 순문학 처럼 작가의 주제와 깊이
역시 담겨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서재를
꾸려나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하하^ ^
'화산 아래서'는 지금 소이진님이라면 정말 잘 맞을 것 같네요.
남들이 정해놓은 길이 아닌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려는 그런...
난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벗하면 남는 것이 많은 작품이에요^ ^

마녀고양이 2012-01-1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마쓰다 신조와 해리 보슈는 패스랍니다... ㅋㅋ
아아, 전 <잘린 머리~> 맘에 안 들었어요. 그리고 해리 보슈의 고독한 (개)폼이 맘에 안 들어요.... (이 댓글을 양철나무꾼님이 보지 말아야할텐데... 호호.)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는 거의 미친듯이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X,Y,Z 시리즈도요(주인공은 다르지만요..). 라이츠빌 시리즈를 못 읽어서 거기 도전해볼까 하는데, 국명 시리즈가 저렇게 제대로 나온다면, 다시 혹할 밖에요.

그리고...... 헤르메스님께서 극찬하신 맬컴 라우리의 작품은 당근
장바구니행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ICE-9 2012-01-13 02:08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진정한 미스터리 팬으로서의 시작은 엘러리 퀸이었습니다. 지금도 해문의 팬더추리걸작 시리즈중의 하나로 보았던 '이집트 십자가 살인사건'의 기억이 선명하네요. 그게 엘러리 퀸과의 처음 만남이었죠. 그리고 그 때 제 주위의 홈즈 운운하는 아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했었죠. 진정한 추리를 엘러리 퀸이야 라고 하면서^ ^... '화산 아래서'는 예전에 번역을 기다리다 지쳐서 영문으로 접했는데 그 때도 감동이었습니다. 마고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미야베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을 느꼈던 것은 작년에 나온 '영웅의 서'를 읽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 '영웅의 서'는 그녀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를 다시금 더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분명히 연속성이 느껴지지만('영웅의 서'라는 제목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브레이브'가 '영웅'으로 '스토리'가 '서(書)'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인물의 설정이나 왜 환상의 세계로 뛰어드느냐 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유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이고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영웅의 서'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는 그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단순히 묘사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영웅의 서'에선 왜 환상의 세계(보다 정확한 용어로 말하자면 '환상성')이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환상성'을 담는 중요한 틀이 되는 '이야기' 자체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미야베 미유키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매개로 '환상성'이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현실 세계마저도 '환상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현실이라는 것이 그대로 닫혀진 폐쇄적 절대 세계가 아니라 '환상성'에 의해 열려진 하나의 잠재적 과정의 세계라는 것을 밝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세계로만 인식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세계로 인한 상실과 아픔을 그렇게 그 세계 역시 단순히 하나의 가능적 세계임을 밝혀 그 담장 너머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새로운 판타지 '영웅의 서'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영웅의 서'가 '브레이브 스토리'와 갈라지게 된 것은 미유키가 그 소설에서 하나의 상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환상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개인의 아픔 때문이었지만 '영웅의 서'에선 실종되어 버린 자신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그렇게 타인을 위해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개인의 아픔'에서 '상실된 타인의 구원'으로의 테마 자체의 진화로 인해 '영웅의 서'는 결정적으로 '브레이브 스토리'와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야베 미유키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여기서였다. 그 때까지 작품에서 내가 느꼈던 미유키는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서'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그 다음 작품 '고구레 사진관'이 나왔다.

 

   고구레 사진관을 읽고나서 '영웅의 서'에서 받았던 느낌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에서는 일종의 대략적 스케치 정도로 남아있었던 타인의 아픔에 대한 치유라는 테마가 정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와 더불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는 미유키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고구레 사진관'은 그 걸음에 대한 미유키 자신의 하나의 선언으로 보였다.

 

   내게 그것은 특히나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 자체에서 느껴졌다.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다른 어떤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 작품은 바로 마츠모토 세이초의 초기작이자 1952년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 이었다. '고구레', '고쿠라' 어떻게 좀 비슷하지 않은가? 미유키가 일부러 '고쿠라'와 비슷한 제목을 쓴 건 아닐까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그녀 자신 직접 만들다시피한 '마츠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에서 그 첫 작품으로 그녀 스스로 선택했던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유키의 별명중 하나가 '세이초의 장녀'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미유키는 세이초를 존경한다. 그녀 스스로 그의 작품을 본받아 작품을 써왔다고 밝힌바도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구레 사진관'이 마츠모토 세이초의 거의 첫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과 제목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고구레 사진관은 아주 낡은 사진관이다. 현대적으로 변해버린 시가지에 그 사진관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처럼 과거의 낡은 유물과도 같이 존재한다. 사람들마저 그것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정도다. 바로 거기에 주인공 에이이치의 가족이 이사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진사인 것도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데도 그 낡디 낡은 건물의 매력에 빠져 '사진관'을 살림집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하나의 상징 같은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거기에 나온다는 유령 처럼 사라진 것의 재림이자 상실했던 것의 귀환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이초의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소설에서 '고구레 사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편(傳便 : 간단히 개인적인 편지 같은 걸 전하는 사람으로 우체부는 아니다.)'이다. 소설의 주인공 고사쿠가 결정적으로 작가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어릴때 자기집 셋방에 살았던 할아버지의 직업이 '전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쿠는 그 '전편'인 할아버지가 일하러 갈 때 마다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에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렇게 존재하지 않게 된 '전편'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우연히 오가이의 '전편'에 대한 추억담을 읽게 되고 그 역시 자신처럼 그 사라져 버린 '전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있음에 동병상련을 느껴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아나서는데 전 생애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레 사진관'과 '전편'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듯이 두 작품은 모두 상실된 것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고구레 사진관'은 역시 사진이 주 소재다. 그것도 평범한 사진이 아니라 심령 사진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주인공 에이이치는 우연히 이상하게 찍혀진(가족이 한데 모여 웃고 있는 뒤로 그와 똑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사진의 비밀을 풀었다가 소문이 나서 본격적으로 의뢰가 밀려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심령사진 명탐정이 된다. 그렇게 그는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에서 그 각각의 심령 사진에 얽힌 사연을 찾아 그 묶여진 '한의 매듭'을 푸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에이이치의 일은 세이초의 고사쿠가 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사연을 알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 담겨진 타인의 아픔을 알게되고 그것을 들어줌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고구레가 세이초의 작품과 다르다면 여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탐문하고 상실된 것을 회복하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세이초의 그것이 미유키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 처럼 오로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에 그쳤다면 미유키의 '고구레'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작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차별을 둠으로써 오히려 미유키는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더욱 공고히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탐정역을 맡은 에이이치를 '영웅의 서'의 주인공 '유리코'와 똑같이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순수한 '청소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코도 에이이치도 그들이 청소년이라서 타인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유리코가 그렇게 된 것은 오빠의 실종 때문이었다. 즉 본래적으로 상실을 간직한 그녀였기 때문에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을 제 아픔 처럼 품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에이이치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메울 수 없는 상실을 간직하고 있다. 네 살때 인플루엔쟈로 죽어버린 여동생 '후코'가 그것이다. '고구레 사진관'도 어떻게 보면 '영웅의 서'와 비슷하게 후코로 인해 새겨져버린 상실을 치유해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레'는 '영웅의 서' 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유리코의 오빠는 돌아올 수 있는 존재지만 후코는 절대 돌아오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상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 상실은 언젠가는 그 누구에게라도 도래할 상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간문제일 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간직한 상실에만 골몰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도래할 상실의 예감으로 그저 불안에만 떨고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미유키는 대담하게 한 발을 더 뻗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래했거나 도래할 상실 앞에서 어쩌면 무모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일지도 모르지만 타인에게로 손을 뻗어 그들의 상실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 새겨진 상실과 도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이이치의 동생 '피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사실 이 '후코'란 이름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이러한 에이이치의 모습은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미유키의 전작 가운데 이미 한 번 나온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최고 걸작 '화차'와 '이유' 사이에 나왔던 일본 SF대상까지 받았던 1997년작 '가모우 저택사건'에서 말이다.

 

 

  '가모우 저택사건'은 '타임슬립' 장르물이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에 이끌려 과거 일본의 가모우 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마침 그 시기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1936년 2. 26 쿠데타 즈음이며 그 가모우 저택이란 그 쿠데타로 부터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일본이 끝내는 패망의 길을 걷고야 말 그 궁극의 분기점으로 인도된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고구레 사진관'에서 에피소드를 끌고 가는 심령사진에 담겨졌던 압축된 과거와도 같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그 사연이 일어난 시간을 가둬두고 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그 봉인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모우 저택사건' 역시 그러한 과거 여행인것이다. 그리고 에이이치가 그 사진 속에 담겨진 아픔의 매듭을 풀어 헤쳤듯이 '가모우 저택사건'의 주인공 다카시 역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카시 또한 에이이치 처럼 결국 하나의 존재를 상실로 안게 된다. 바로 그 존재의 이름이 후키였다. 가모우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먼 과거의 여자 후키. 다카시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로 돌아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하는 후키와는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에이이치에게 있어 후코 처럼 영원한 상실을 안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똑같은 의미로 자리잡은 '후코'와 '후키'... 이렇게 비슷한 그녀들의 이름 처럼  고구레 사진관의 주제 의식도 어쩌면 '가모우 저택사건' 때 부터 내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안게 된 다카시였지만 미유키는 그것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카시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차가운 손의 감촉,눈에 뒤덮인 가모우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쉬는 장소.(P.307)

 

  그러니까 고구레 사진관은 다카시의 가모우 저택과 같은 곳이다. 상실이 그저 상실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들이 기억 속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내내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머나먼 시간을 지나 이제 '고구레 사진관'에 와서 '가모우 저택사건'에서는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마저하는 것이다. 그녀가 '고구레 사진관'을 통해 다시 들려주는 남은 말들은 이렇다.

 

   우리가 상실을 가지는 것은 시간 관념을 너무 직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의 렌즈로 새겨놓은 변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함께했던 타인의 기억, 그를 사랑했던 기억,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들이.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참여자로서 함께했던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나의 기억이 있는 한 그 시간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가 뛰어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다. 그렇게 그것은 낡은 앨범속의 사진들과도 같다. 아주 오래전 일을 찍은 사진이더라도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마치 그 시간으로 그대로 걸어들어간 느낌을 가지게 되지 않은가? 사진이 그렇게 무한의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 처럼 변질되지 않는 현재를 건네주듯이 우리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물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너무 물질 위주로만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정신이, 거기에 간직된 기억이 현실 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존재보다 더 진짜의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보라 '고구레 사진관'의 사진들은 한 인간의 정념이 물리법칙을 뛰어넘어 원하는 현실을 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에 현실에 깊숙히 매몰된 의식으론 오로지 상실 밖에는 안을 수 없지만 기꺼이 기억의 힘을 믿고 모든 세상의 상식과 물질로 부터 자유로운 자는 그 상실의 껍질 안에 움트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그 빛이 열어보이는 현전되는 시간 속에서 그 타인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맞잡고 곁에 있음을...

 

 그렇게 미유키는 사진을 그것도 심령사진을 가져왔고 영원히 곁에서 머무르는 유령(그는 우리 기억의 부름에 대한 화답이다.)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 한, 그렇게 내어주는 손이 있고 맞잡는 손이 있으며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는 한, 영원의 상실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레 사진관'은 정말 달라져버린 미유키를 느끼게 한다. 생각해보면 '크로스 파이어'의 아오키 준코와 '고구레 사진관'의 에이이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무고한 개인마저도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렸던 아오키 준코의 그림자는 역시 같은, 지울 수 없는 상실을 가졌으나 늘 동생에게 자상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에이이치의 환한 미소에게선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아오키 준코는 현실과 물질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지나간 시간을 오로지 절대적 상실로만 바라보았던 인물의 대표적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미유키의 '고구레 사진관'까지의 여정은 그 아오키 준코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녀가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에도 연작'들이 그 계기가 되었을 듯 하지만 그 얘기는 너무 길어지니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고 이쯤에서 지금 나온 '고구레 사진관'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전혀 새로운 미유키의 걸음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 그녀가 선집했던 세이초의 작품과 그녀의 전작들을 통해 밝히는 글을 접을까 한다.

 

  오늘 슬픈 소식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때 같은 지역구에 살았고 더러 만나서 말씀도 많이 들었던 분인지라 다가오는 아픔이 더 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 개인을 위한 글이다. 우리에게 그 분의 기억이 있는 한 절대로 상실될 일이 없다는 것은, '고구레 사진관'으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믿음'이기도 하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미유키를 믿어보련다.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고 생생히 살아있는 한 그 분 역시 늘 내 곁에서 머무르고 계시다고. 그 분과 악수를 나누던 감각 그리고 그 분과 헤어질 때 바라보았던 그 가을 하늘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바래지 않는 사진으로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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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3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미미 여사의 책을 말씀하시는 지독한 상실과 사회적 불평등의 직시로 인해
접하기 매번 주저주저하면서 집에 쌓여간 가는 중인데, 역시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
브레이브 스트리는 얼마전 네권을 모두 구입하고도 아직 못 읽었네요. 그런데
이후 신간들에게 더 눈이 가는군요. 영웅의 서와 고구레 사진관. 이거 정말 읽고 싶은데요.

헤르메스님의 슬픈 소식이 제 슬픈 소식과 통하는거 같습니다.
좋은 관계란 믿음이고,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화하는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하두 울었더니.. ^^

헤르메스님, 올 한해 보여주신 좋은 리뷰들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내년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ICE-9 2012-01-02 22:12   좋아요 0 | URL
올해는 무엇보다 마녀고양이님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새해엔 하시는 일, 원하시는 일 모두 뜻대로 다 잘 되시고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바랄게요^ ^

이진 2011-12-3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너무 좋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추천을 몇백개를 찍고싶은데 ㅠㅠㅠ 어쩌지 이걸... ㅠㅠ

헤르메스님 그간 님의 리뷰를 읽어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ㅠㅠ
저도 닮고싶답니다 ^^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
내년에도 멋진 글 써주세요~

ICE-9 2012-01-02 22:11   좋아요 0 | URL
하하.. 소이진님 반갑고 너무 감사드려요^ ^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이진님도 올해 많은 복을 받으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랄게요.
그리고 더 좋은 리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이진 2012-01-12 22:06   좋아요 0 | URL
크크, 대단하신걸요.
두 작품 이달의 당선작 선정이라니요 ㅠㅠ
저도 이번에는 한번 기대해봤습니다만 역시 알라딘은 어린제게는 행복을 주지 않는군요. 지금 책도 안보내주고있어요. 흑흑 나쁜 알라딘ㅠㅠ

ICE-9 2012-01-13 02:10   좋아요 0 | URL
제가 소이진님의 페이퍼를 이미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제 생각에 다음 달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지 않을까 싶던데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