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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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는 올 해 나를 세번 놀래켰다. 처음은 물론 기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날'과 '물의 잠 재의 꿈'이 나란히 출간된 일. 두 작품은 연속으로 읽어야 그 주제가 완전히 살아날 수 있기에 더욱 그랬고 두 번째는 '은하영웅전설'로 유명한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지금까지 내내 그저 이름만 알려지고 있었던 걸작, '일곱도시 이야기'가 예고없이 불현듯 출간되었던 일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로 유명한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 이전의 히트 시리즈인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역시나 예고도 없이 이렇게 소개된 일이다. 설마 아리마사의 가장 대표적 시리즈라 할 수 있는 '신주쿠 상어' 시리즈도 이제 겨우 한 편이 소개되었을 뿐인데 그 이전의 작품이 이렇게 국내에 발간될 수 있으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출간되는 데 있어 그 격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신주쿠 상어'가 90년대의 아리마사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아르바이트 탐정'시리즈는 그야말로 80년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시리즈이니까 말이다.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이렇게 모두 6권까지 발간되었다. 이 중 마지막에 있는 '돌아온 아르바이트 탐정'은 2004년에, 그러니까 다섯번째 작품으로 부터 수십년이 흐른 뒤에 아리마사가 그 시리즈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의 팬들을 위해 로버트태권V를 다시 상영했던 것 처럼 다시금 오랜만에 그 시리즈로 돌아가 쓴 작품으로 그 간만의 귀환이 바로 2005년, 위성방송 WOW에 의해 바로 드라마로 제작 방영(감독이 무려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막스의 산'의 최양일이다. 거기다 아버지 '사에키' 역엔 시이나 깃페이가 맡았다.) 될 만큼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일본 내에서 인기를 구가했던 작품이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그 시리즈 중 세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이키 료. 그는 고등학생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데 이 아버지가 그런데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현재 직업은 백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이름 없는 사립탐정인데 전력이 예사롭지 않다. 일단 료 자신이 소개하는 아버지의 전력은 이렇다. 

  무역상사 직원부터 시작해서, 오일 비즈니스 맨, 르포 라이터, 에이전트를 거쳐 결국에는 비밀 첩보원에 이르렀다.(p.11) 

  그렇다. 그는 예전에 007과도 같은 스파이였고 현재도 명색은 사립탐정이지만 국가가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일들을 맡아서 하고 있다. 류는 가끔 아르바이트 삼아 그런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류는 마치 배트맨을 돕는 '로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료도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만은 아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어릴 때 부터 스파이로서 주입식 영재교육이라도 받았는지 총기를 다루는 솜씨나 추적하고 잠입하며 적들과 대치 상황에서의 현장 운영 능력이나 그 밖의 모든 면에 있어서 전직이자 현직 스파이인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류도 이제는 고3. 아무리 평범하지 않는 고등학생이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슬슬 대입 수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아... 일상이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스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영영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하지만 그는 정작 한 번에 대학에 붙기를 바라는 '합격염원소원파'와 어차피 이번에는 안될 거 내년을 바라고 그냥 놀자는 '재수학원준비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는 그냥 막연한 걱정만 안고 있는 주변인으로 지낸다. 이런 류의 모습이 당당한 경찰 엘리트 관료이지만 경찰과 범죄자 집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혼자 '독고다이'로  움직였던 '신주쿠 상어'의 사에지마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보인다. 어쩌면 사에지마 캐릭터 자체가 바로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로 부터 형성되었을 지 모르겠다. 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료의 아버지 사이키 료스케가 마치 사에지마가 훗날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된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신주쿠 상어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주인공 사에지마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다는 재미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러다 류는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 낸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삼아 국가적 사무를 비밀리에 처리하고 있는 자신이니만큼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시마즈에게 그간의 정을 빌미로 그의 힘으로 뒷구멍으로 동경대에 입학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마즈라면 그게 전혀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기회를 엿보는데 마침 그 기회가 온다. 시마즈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미묘한 관계 때문에 섣불리 국가가 나서서 경호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 어디쯤에 있다는 가상의 국가 라일의 왕위 계승이 가장 유력시 되어 현재 암살 위험이 다분한 왕녀 '미오'의 비밀스러운 경호를 의뢰해 온 것이다. 류는 동경대 뒷구멍 입학을 위해 아버지를 부추겨 흔쾌히 수락한다. 물론 그 댓가는 시마즈에게 비밀로 하고... 

 

  드디어 왕녀 미오가 일본에 오고 류는 아이돌 저리가라는 미모에 첫사랑에 빠져든 소년 같은 심정을 느낀다. 하지만 현격한 신분 차이 그리고 동경대 입학을 위해 경호에 전념해야 하는 그로서는 그 마음을 내내 억누르지만 감정이란 늘 그렇듯이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이어서 어느새 도도한 감정의 물결은 류를 사랑의 파라다이스로 데려가버린다. 그 와중에도 독침, 총격, 폭탄 등 방법도 다양하게 헐리우드 액션 영화 저리가라는 무지막지한 암살 시도는 계속되고 미오는 점점 위기에 몰리게 된다.  

  공주와의 사랑,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기사, 스파이 그리고 바이크... 이렇게 소설에서 주욱 드러나는 내용과 소재들은 가만히 보면 마치 소년의 로망을 그대로 리스트화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소년의 로망을 극한까지 담은 소설이다. 어쩌면 신주쿠 상어가 경찰 오타쿠로서의 아리마사를 그대로 드러냈듯이 이 작품은 소년 시절의 아리마사가 바라마지 않았던 꿈을 그대로 담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게 꼭 아리마사만의 꿈일까?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 보았던 꿈이 아닐까?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잡게되면 끝까지 내리 읽게 되는 것이. 그것이 꼭 전개가 빨라서도, 스케일이 커서도 그리고 내내 쉴새 없이 액션 장면들이 쏟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년시절에 누구나 꿈꾸었을 그런 모습을 비록 대리만족이나마 실컷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 탐정의 세계는 신주쿠 상어의 세계와는 너무 대조적인지라 흥미를 끈다. 어쩌다 아리마사는 80년대의 아르바이트 탐정이 보여주는 소년의 낭만 가득한 세계에서 90년대의 신주쿠 상어가 보여주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비정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것일까? 그의 작품을 관심있게 보아왔었다면 당연히 이러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놀라운 속도로 경제적 성장과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의 80년대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으나 그 거품이 서서히 꺼져들기 시작하던 90년대는 지옥의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한 시대에 감겨드는 대기의 변화가 작품 세계마저도 극단적인 변화를 낳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리마사가 늘 그랬듯이 오락적인 면에선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과장된 설정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류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에지마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아버지도 꽤 흥미롭다. 킬러들과의 대결도 흥미진진하고 역시나 총기 매니아 아리마사 답게 리얼한 총기들의 묘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소년 시절의 꿈을 그대로 형상화해 놓은 듯한 연속되는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피어가는 류와 미오의 사랑 얘기 역시 머리속으로는 뻔한 결말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계속 읽게 만든다.(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 드라마일 수록 우리의 관심사가 오로지 언제 소망이 충족되는 것인지, 그 시점의 도래에만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설정이 아무리 진부하더라도 소망의 대리만족 욕망이 너무나 강렬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진부하면 진부할수록 더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익숙한 설정은 그에 대해 생각할 필요없이 오로지 소망 충족 과정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어쩌면 드라마 뿐만 아니라 소설의 속도 역시 그것과 관계있을지 모른다.)  다시 한 번 분명코 말하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그냥 끝까지 달려가게 된다. 그러니 가급적 시간적 여유가 좀 있으실 때 읽으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아무튼 아리마사다운 작품이다. 팬이시라면 필독!  

 뱀다리 - 그런데 료는 과연 소원대로 동경대의 뒷구멍으로 갈 수 있었을까?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서 우리는 그 결말을 알 수 있다. 동경대는 커녕 오히려 유급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역시나 일상은 만만치 않다. 그것이 아무리 한 나라의 비밀경찰마저 갖고 노는 뛰어난 스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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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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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의 호기심은 이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왜 말을 더듬는 것인가? 

 

  그는 흥분하면 자주 말을 더듬는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하도 자주 말을 더듬는 바람에 형사마저 어느새 거기에 전염되게 만들어 버린다. 말을 더듬는 버릇은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과 함께 긴다이치 코스케를 형성하는 두 가지 커다란 특징중 하나이다.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고 말을 더듬는 것은 사람들로 부터 업신여김을 야기하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다. 모두 천재적 명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적 행위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엘리트다. 마치 그러한 행위들은 그 자신의 현재 신분과 과거의 경력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몸짓으로도 보인다.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러한 버릇들을 코스케에게 부여한 것인가? 어쩌면 그 까닭이 간단할 수도 있다. 그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허무는 작용을 하니까. 명탐정이라는 아우라 때문에 혹시나 거리감을 가지게 될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까지 포함하여 그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러한 버릇들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단순해 보인다. 어쩐지 그 행위들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푼크툼'으로 보인다. 그저 심상하지만은 않은 뭔가 내밀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비밀스런 움직임으로 보인다. 분명 거기에 뭔가 있다. 내 머리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자,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을 더듬게 만들었는가? 

  (그런데 나는 김전일 처럼 명예를 걸만 할 명탐정 할아버지가 없어서 곤란하구나...) 

 

   프로이드에 따르면 말더듬은 무의식이 바라는 것과 이성의 통제 사이에 일어난 긴장의 외상적 증후이다. 즉 그것은 내부의 불일치가 빚어내는 밖으로의 드러남이다. 프로이드의 말대로라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그러한 말더듬을 낳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무의식으로 바라는 것과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과의 차이가 그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범죄의 해결이 될 것이다. 그의 명석한 추리는 분명 이성의 영역에서 행해질 것이 틀림 없으니. 그렇다면 그것과 정반대의 것을 무의식이 원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은 그러한 범죄의 해결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여기서 또 하나 환기되는 것은 이제는 유명해진, 범죄를 막는데 있어 그가 보여주었던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는 명탐정 역사상 범죄 예방에 있어서는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기도 하다. 어떤 땐 일부러 범죄를 방치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될 정도의 이 무기력은 또 어찌 된 연유란 말인가? 아, 우리는 물어야 할 질문이 많다. 그러나 그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모이게 된다. 그의 말더듬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저함이다. 이성은 곧바로 해결을 원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무의식은 계속 해결을 지연시키려 한다. 때문에 범죄를 막는데 있어서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이 범죄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근본적 원인 때문이라는 것으로... 

 

 

 

  다시금 '혼진 살인사건'이 돌아왔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일본 최고의 명탐정으로 손꼽히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전설적 데뷔작으로 웬만큼 유명해졌다. 70년대적 번역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동서판과는 달리 지금 현재의 어법으로 쓰여진 번역이라 이제 좀 더 소설속의 내용이 확실히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혼진'이라는, 에도 시대의 지방 영주들이 반란 예방 차원으로해 인질이 되기 위해 막부로 가는 도중 들르는 여관이 사건의 주무대이기에 그 일본 전통 가옥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묘사가 없으면 독자 스스로 사건을 인식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해서 더욱 정확한 번역이 요구되던 차에 이렇게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돌아와 주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엔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두 개의 단편 또한 부가되어 있다. 하나는 '옥문도'와 '팔묘촌'등 그의 초기 걸작들과 비슷한 시기 발표된 '흑묘장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발표는 그와 비슷한 시기였으나 개작은 55년에 이루어진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이다. 누가 선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세 작품이 이렇게 묶이게 된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 편이야 말로 왜 요코미조 세이시가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더듬는 버릇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할 만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말더듬을 주었는가? 이제 이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명탐정 코난 식으로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만한 자신감이 내게는 없다.) 

  거기서 우선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시기다. 긴다이치 시리즈가 무엇보다 2차대전 종전 후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패배는 많은 변화를 몰고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제 그들을 지배할 미국에 의해 그들은 급속도로 서양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될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또한 그 누구보다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나라다. 특히 그렇게 급속도로 재편되는 와중에도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관습들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요 도시들을 제외한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서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과 늘 고수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들이 서로 칼날이 부딪히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바로 그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생각이 정말 어떠했는지는 내가 가진 정보 인지의 한계상 알 수 없으나 요코미조 세이시가 서양의 모던적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껴안았던 동시대의 작가 에도가와 란포와는 달리 일본 전통 사회를 작품의 주요한 배경으로 삼은 것을 보면 아마도 바로 그 변화의 현장을 작품에다 담는 것이 그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가 주로 일본 지방의 촌락인지도 잘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서의 범죄란 바로 그 변화와 전통의 고수라는 두 개의 거대한 바람이 맞부딪혀서 태어난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죄의 성격은 특히나 '옥문도'에서 잘 드러난다. 에도 시대 범죄자들의 유형지였던 '옥문도'는 그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전통적인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린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전쟁이 초래한 변화의 바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결국 그 지배 가문의 대를 이를 장자가 전쟁에서 죽고 만다.  때문에 옥문도의 전통 체제 질서는 큰위기에 봉착한다.  바로 이렇게 '옥문도'는 전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는 일본 전통 사회의 모습이라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천착하는 전형적 공간이었다. 결국 범죄는 그 위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데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옥문도로 갔던 까닭도 무엇보다 전우이기도 했던 그 장자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여동생이 살해당할 것이라며 그녀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옥문도의 내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옥문도가 그러한 상황의 관찰자 역할로 내보내진 긴다이치 코스케가 어째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해 가장 확실한 대답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긴다이치 코스케를 그리로 보내는 것은 사실 범죄를 미연에 막고자 해서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코스케가 원래 이루고자 했었던 목적이 모조리 다 실패하고 마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면 세이시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혼진 살인사건'에 프롤로그 처럼 붙여진 부분에서도 보여지듯이 - 거기 '혼진'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쓰고 있는 작가가 예전 그 사건이 일어난 혼진으로 걸어가 다시금 돌이켜 보는 것 처럼 - 그 변화가 진행중인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세이시가 이렇게 관찰에 더 중점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 모던의 여파에 너무 크게 반응했던 사가구치 안고 같은 작가는 스스로 '무뢰파'가 되어 모든 일본 전통의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기도 했고 란포 역시 적극적으로 서양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지만 세이시는 아무래도 안고 처럼 극한으로 치닫거나 란포 처럼 서양의 가치관을 주저없이 껴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러니까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섣불리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일까? 

 

  바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가 이 '혼진 살인사건'에 모여진 작품집에 들어있다. 여기에 수록된 세 단편이 기술하고 있는 사건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간통'이다. 초기 작품들에서 요코미조 세이시가 이렇게 '간통'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들어있다고 나는 보여진다. 일본에서 간통죄는 1947년 폐지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간통죄로 처벌되고 있었다. 한 편,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모두 군대에 간 터라 그 공백으로 인해 전후 많은 여성들이 간통으로 인한 처벌의 위험을 안게 되었다. 그렇게 간통죄의 문제가 전후 일본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47년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그러한 상황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세이시가 무엇을 우려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간통의 범람과도 같은 성적 문란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가 본 것은 일본 사회가 전통적으로 고수하고 있던 가치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정확히 그 상황의 목격이 세이시에게 주저를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라는 오명의 뒤집어쓰면서까지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범죄의 해결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어설픈 상황에서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미 바라보았던 탓에 가지게 된 당연한 숙고의 자세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숙고의 자세' 때문에 그는 변화 - 어쩌면 그 궁극에 가서는 비극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협의 존재로서 - '여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혼진 살인사건'의 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왜 작품이 발표된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지의 의미이며(이 역할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안타깝지만 생략하기로 하겠다.) 왜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소녀들을 구하러 옥문도로 갔으면서도 정작 그녀들을 모두 죽음으로 방치해 두는 것인지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서 간략하게나마 긴다이키 코스케가 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고 믿는다. 뭐, 나만의 억측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시 결론지어 말한다면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러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된 것은 요코미조 세이시가 당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 되도록 신중한 숙고의 자세를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이시가 긴다이치가 정말 해주길 원했던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가급적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까지 보다 확실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관찰이었다. 바로 그러한 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세이시의 바람이 '말더듬'이라는 신체적 행위로 표현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더듬 자체가 바로 코스케가 해결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닮아 있지 아니한가? 말더듬이야 말로 보다 확실한 언어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거기까지 이르기의 과정인 것을.  

  

 

  지금까지 발간된 긴다이치 코스케를 한데 모아 찍어본 사진. 발간된 권수는 정확하나 그러나 잘 보면 중복된 것이 있다. 당시 세글자의 제목을 가진 긴다이치 코스케의 시리즈가 연달아 나왔었는데 실수로 착각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사 버렸기 때문이다. 

 (혹시 삼수탑을 저처럼 실수로 구입해서 두 권 가지신 분은 없을까요?  그러면 서로 교환해서 윈-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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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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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클라인의 항아리'는 1989년에 나온 오카지마 후타리(도쿠야마 준이치와 이노우에 이즈미 콤비의 공동필명)의 작품이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일반적으로 '클라인의 병(The Klein Bottle)'으로 알려져 있다. 왜 항아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일본에서는 그렇게 불려진 게 아닐까 도 싶다. 혹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면 이 '클라인의 병'을 보았을 것이다. 거기 그림까지도 나와 있으니까.  그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그래도 혹시 클라인의 병이 무엇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하여 그 모습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의 병'이다. '클라인의 병'은 독일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1882년 만든 토폴로지로 쉽게 말하자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 입체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클라인의 병'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중앙의 구멍으로 따라 들어가면 '안'이었다가 점차 바깥으로 나오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의 병'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적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둘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는 어떻게든 윗면과 아랫면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클라인의 병'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은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펠릭스 클라인은 이 '클라인의 병'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 '클라인의 항아리'는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눈치빠른 분들이라면 바로 이 소설이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장르에 있어서 경계의 상실은 대개의 경우 '가상과 실제의 경계의 상실'인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로 '클라인의 항아리'는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 이러면 어떤 분들은 "뭐야? 매트릭스도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인데 너무 식상한 소재아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맨 위에서 나는 이 책이 출간 연도를 일부로 밝혔다. 그렇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 당시는 가상현실을 다룬 작품이 아마도 '사이버공간(혹은 '전뇌공간'으로 번역된)'이라는 말을 최초로 생성시킨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와 루디 러커의 '소프트웨어(1982)'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가상현실'과 소설을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지 그것이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은 시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처럼 '미스터리'와는 어떻게 '싱크'시켜야 하는지는 더더욱 전인미답의 처녀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 일본 작가들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역시나 가상현실을 다루었던, 지금은 사이버펑크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크래시'가 나오기 3년 전에(이 소설의 평가를 보려면 스티븐 킹의 '셀' 2권을 보면 된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상현실'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유감스럽게도 문학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그러니까 두뇌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전기적 신호(아시다시피 우리의 감각이란 두뇌에 전달되는 일종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므로)를 보내어 마치 그 두뇌가 현실인양 느끼게 한다는) 가상현실의 아이디어 자체는 미국의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의 '이성, 진리, 역사'에 먼저 나왔다. 그러니까 1981년에 나온 그 저서의 서장에서 'A BRAIN IN A BRAT(통속의 두뇌)'라는 사고실험 케이스로 나왔던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면 '가상현실의 최초 아이디어'라는 이 말이 쉽게 수긍이 가리라 생각한다. 

   

 

    바로 이와 같다. 저기 통안에 담긴 두뇌에 컴퓨터의 전선을 연결하고 컴퓨터는 두뇌에게 투손의 햇살 아래 산책하고 있다는 전기적 신호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는 자신이 통안에 든 두뇌 밖에는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리와 온전한 신체가 있으며 햇살이 내리쬐는 투손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두뇌는 그것을 실제와 조금도 다름없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상이 그 이후로 가상현실을 다루는 작품의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두뇌가 온전한 신체가 되고 두뇌가 담긴 통은 신체가 들어가는 캡슐이 되었을 뿐,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포함하여 저 기본적 구성은 조금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 '클라인의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온 몸의 신경부위에 컴퓨터와 전선으로 연결되어 투명한 캡슐 속으로 들어가 가득한 점액질의 액체 속에서 컴퓨터가 인공적으로 생성해내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 할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프리터 생활을 하던 주인공, 우에스키 아키히코는 어느 날, 그가 쓴 어드벤쳐 게임북(심리 테스트 처럼 독자가 고른 YES 혹은 NO에 따라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게임북)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화해 온 쪽은 원래 응모했던 게임북 회사가 아니라 진짜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다. '입실론'이란 그 회사는 자신들이 게임의 역사를 바꿔버릴 아주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의 시나리오가 거기에 적격이니 계약하고 싶다고 한다. 응모기준이 정했던 분량을 초과한 관계로 낙선했던 주인공은 당연히 흔쾌히 거기에 응한다.(소설의 맨 앞부분에 바로 그 계약서가 나와있다.) 그러던중 회사로 부터 시나리오 작가로서 게임 테스트에 응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임은 놀랍게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전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아키히코는 그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이 썼던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정신개조용 약품에 얽힌 스파이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테스트 참가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키히코가 보자마자 반해버렸던 미소녀 리사. 돈도 벌고 혁신적 게임에 최초의 플레이어가 되고 거기다 미소녀와 연애까지. 대박이 넝쿨채 굴러왔다고 생각한 순간 일상의 궤도가 뭔가 점점 어긋나는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게임 도중 들렸던 목소리. '제어할 수 있을 때 게임을 그만두라'는 목소리.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은 그 정체를 모른다. 그런 건 전혀 프로그래밍되어있지 않다는 거다. 일종의 버그인데 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 점점 게임이 주는 폭력에 중독되어가던 리사가 돌연 사라진다. 처음엔 단순히 테스트를 그만두었나보다 했는데 리사의 친구라는 마카베가 연락을 취해 와 사라졌음을 알린다. 리사의 실종과 더불어 '입실론' 회사 자체의 의혹도 불거지면서 이제 아키히코는 '클라인-2'라는 가상현실 기계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플롯이 너무 전형적인가? 하지만 전형적인 것 만큼 속도를 또한 부채질하는 것도 없다. 사실 직접 손에 들고 읽게 되면 전형적인지 아닌지 따질 여유도 없이 단숨에 독파하게 된다. 전성기의 마라도나가 골문을 공략하듯 재빠르고 거침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복잡한 시스템적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저 위에 썼던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는 그냥 내 얘기지 소설의 얘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가상현실 자체에 대해선 흥미가 없다. 그것을 둘러싼 음모도 아니다. 진짜 흥미가 있는 건 가상현실이 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면?'하는 상황이다. 당신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맞닥뜨릴 것도 그것이다.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가 진짜 현실이고 가상현실인지 내내 자문하면서 당신은 재차 앞 페이지들을 다시금 훑어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구별해낼 수 있을까? 주인공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가상현실인지 실제의 현실인지? 아니 당신은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현실 머신 속에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속에 있는지? 장자의 '호접지몽'과도 같이 당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원래 나비인 당신이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정확히 위에서 언급한 가상현실의 원초적 아이디어라고 제시한 '통 속의 두뇌'라는 사고 실험을 구상했던 힐러피 퍼트남도 그것을 묻고 있다. 퍼트남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을 위해서 '통속의 두뇌'라는 것을 착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 '통속의 두되'는 지금 완전히 자신이 화창한 투손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진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인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들도 '통속의 두뇌' 꼴이 아닐까? 과연 아니라고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그 영화도 3부에 이르면 '클라인의 항아리' 처럼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인지 구별해 낼 수가 없다. 1부에서 명확히 구분되던 두 현실들은 2부 어디선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다시 조합되어 정말 '클라인의 병'처럼 경계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감각은 두뇌에 보내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파장만 복제하면 얼마든지 현실감각을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감각과 경험으로 실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생각은 비단 퍼트남의 생각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장자를 비롯 무수히 많은 철학자가 그것을 물어왔다. 그 대표적 철학자로 데카르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감각이 주는 한계를 잘 알았다. 주체는 아무래도 현실과 가짜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고 감각하고 있는 이 현실은 어쩌면 악마가 나에게 보이는 환영일 수 있다고. 퍼트남은 이런 걸 두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제와 가짜를 인간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은 참된 실재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하며 퍼트남은 이 실재론이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감각과 경험만으로 도저히 진짜와 거짓을 구분해 낼 수 없는 인간이 어떡하면 참된 실재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할까? 퍼트남은 말한다. 그건 인간의 절대적 한계이므로, 그렇게 완전히 능력 밖의 일이므로 인간 보다 더 나은 존재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에게 참된 실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건 '신' 같은 초월적 존재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 물론 내가 지금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악마가 내게 보여주는 환영일 수 있지만 우리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그런 환영을 허락할리 없을테니 내가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참된 실재라고 말이다. 웃기게 생각되어도 진짜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퍼트남도 진지하게 동의한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진짜'를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인간 자신만으로는 지금 당신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가짜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하겠는가? 당신이 만일 자살을 했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화면에 보이는 게 'GAME OVER'이고 유리창 밖에서 또다른 당신의 친구들이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되지 않을거라고. '클라인의 항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다. 안됐지만 당신에게는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당신은 살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터내려 생각한다. 까뮈가 내내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 어째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까뮈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은 산다. 자살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이 삶을 '진짜 삶'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함의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퍼트남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당신은 그 때 그 때의 선택(혹은 결단)에 따라 당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왔다는 그것이다. 

 

  까뮈는 당신의 삶을 '천상에서 유배된 삶'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당신의 삶이 문득 지상으로 내던져진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족쇄를 씌워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걸 '운명이라 부르며 체념한다. 그렇게 당신은 과연 당신의 삶에서 단순한 객체였을까? 그렇게 당신은 이미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그냥 지내왔던 것일까? 천만에! 그 현실 자체가 이미 당신이 선택한 것인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원래 아키히코가 만들려고 했던 '어드벤쳐 게임북'이 그렇듯이 매일 주어지는 선택적 상황에서 YES 혹은 NO로써 당신은 현실을 그때 그때의 결단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현실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결단의 총합에 다름아닌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가 은밀히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다. '진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뭔 상관이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얼마든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클라인의 항아리'는 내내 그 말의 단서를 보여준다. 앞 서 말한 '어드벤쳐 게임북'도 그 단서이지만, 왜 시나리오 작가인 아키히코가 그 게임의 테스트에 참여해야 되는지에 관해 설명할 때 회사직원은 이런 말을 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게임이 제시해도 플레이어는 혹시 그 이정표가 걸린 나무를 올라갈지도 모르거든요. 저희는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고 싶은 겁니다."  이 말은 '삶이 아무리 주어졌대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러면 현실은 그에 맞게 또 수정되어 변해간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직면하게 되는 것도 그와 같지 않나? '아키텍쳐'가 "자,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 정말 현실이라는 숟가락이 구부러진 것인가 아니면 구부러진 건 우리 마음인가? 깃발(현실)이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그러는 것인가? 선문답 같은 이런 질문이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하는 말은 단 하나다. '당신이 바로 삶의 주인이고 현실은 바로 당신의 손 끝에서 생성된다.'라는 이 단순하고도 어이없는 진실 말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의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 처럼, 그렇게 삶엔 다른 자들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무수한 이념들이 있고, 현혹을 위해 달려드는 프레임들이 있다. 누군가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떠도는 소문들이 있고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으며 전방위적으로 작동되는 음모와 꼼수들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을 그저 하나의 객체, 단순히 가공된 자극을 받아들일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라 착각하는 '통 속의 두뇌'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은 그 때 그 때의 결단에 따라 형성된 당신만의 현실이다.'라는 말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당신 스스로 결단해야함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어느 것이 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최대한 그 참에 가깝도록 선택할 능력은 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아님 훗설이 그랬듯이 객관적 실체가 어느정도 드러날 때 까지 모든 것을 판단중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들 역시도 보다 참된 실재의 삶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인 만큼 그들의 방법 또한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당신의 삶이 이미 그들에게 경작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지로 오로지 당신에게만 열려있음을 말한다. 맞다. 그것을 경작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다. 왜 함부로 남에게 맡기나? 그들이라고 당신과 별다를바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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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학 숙제로 인해 주제를 잡기 너무 난감했는데 참고하고 주제로 정해버렸습니다.

책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ICE-9 2011-09-15 19:43   좋아요 0 | URL
뭔가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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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많은 요괴들을 낳았고 또한 애니미즘적 성향이 강한 일본 특성상 한 번 생성된 요괴들은 쉬이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 산천이나 계곡 혹은 논밭이나 마을 어귀 그 어디에서나 그 오랜 지난했던 전쟁의 역사 동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졌을 것이며 희생자의 피와 눈물 그리고 원념으로 요괴들은 태어나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요괴란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이 죽은자의 목소리가 되어 산자들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어가자 이제 그 호소의 배경이 되었던 비극의 이야기는 잊혀지고 남은 건 다만 눈에 보이는 그 괴이하고 흉물스런 몰골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히려 사회가 안정될 수록 요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어느새 사람의 탈을 벗고 괴물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불안했던 그 시대 그러니까 항상적인 죽음과 기근 그리고 병마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그 시대에서 요괴가 태어난 이야기는 곧 듣는 자, 그렇게 산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산자들의 운명과 요괴가 되어버린 자들이 운명이 그리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괴는 측은과 동정의 대상이었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공동운명체였기에.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자 이제 죽은자들의 이야기는 점점 산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래도 현재의 안정과 풍요는 과거의 불안정과 빈곤을 두려워하게 되는 법. 가까이 하게 되면 다시금 옛날로 그렇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과거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인 것이다. 현대가 왜 위생과 청소의 신화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바로 더러움과 쓰레기들이 그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자꾸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용의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자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래된 것, 낡은 것은 재빨리 제거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약하고 초라한 자신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 그렇게 자부하는 그들에게 과거의 모습은 약점이 된다. 불리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매일 몸을 씻고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다. 전염의 공포는 건강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획득한 이 새로운 정체성을 과거의 유령들로 부터 온전히 보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마저도 그렇다. 개인이 스스로 약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라고 최면을 걸듯 사회도 그렇게 성원들에게 최면을 건다. 폭력적으로 통일을 이루거나 권력을 잡아 태어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권력의 기반이 그리 강고하지 못한 탓에 그 사회는 안정을 보다 희구하면 할 수록 과거의 잔재를 더욱 더 일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기반이 약할 수록 권력은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제 막 태어났다는 그 '새로움'을 더욱 더 강조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정당성은 과거의 비난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 사회에 있어 과거는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다.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그 몸에 간직하고 있는 요괴들 역시 기피와 혐오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오로지 배척하기 위하여 배척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그 태평성대 에도 시대에 요괴들은 그렇게 눈과 입을 빼앗기고 설 자리를 잃었다. 해서 요괴의 이야기를 채록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몸에 각인된 과거의 잔여를 모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 안정과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다른 자'로 낙인 찍힌 그들의 신음과 눈물 그리고 호소를 모으는 것이다.  

  '항설백물어'의 요괴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요괴의 배제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렇게 개인들에 의해서 배제되어 버려진 요괴이야기들이 주로 모여있는 게 저번에 나온 '항설백물어'라고 한다면 이번에 나온 속편 항설백물어는 사회적 차원에서 배제되고 활용되는 요괴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괴들은 이제 모든 이야기를 잃고 단순히 흉물스런 그 껍데기만 남았다. 물론 그건 요괴 탓이 아니다. 요괴 스스로 그 가면을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것으로 낙인 찍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막아버린 산자들이, 풍요와 편리에 취해 타인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기로 결심하고 눈감아버린 산자들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들에게 씌워준 가면인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무서운 가면을 써야 내 마음놓고 너희들을 싫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죄책감 없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들의 '가면 씌우기'는 사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온갖 색깔론, 지역주의,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신분 지위 성별에 따른 모든 차별들에 다는 이유들. 그것들 역시도 우리가 눈앞에 현존하는 타인의 고통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시하기 위하여 씌워주는 요괴의 가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피, 혐오 그리고 공포 같은 것들은 사실 외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괴물은, 요괴는 그 자체로는 공포스럽지 않다. 우리가 상처입지 않고 무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혐오나 공포의 가면을 씌워주기 전 까지는. 

  그렇게 요괴는 껍데기만 남는다. 어렵게 얘기해서 '두려움'의 기표만 남는다. 실체는 없다. 길가에 떨어진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남은 건 이름뿐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걸 좋아한다. 주워다가 내치고 싶은 사람, 몰아내고 싶은 무리가 생기면 달아만 주면 되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요괴다!" 사람들이 돌아본다. 사회가 그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 너 요즘 아프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거 얘네들 때문이야." 하면서 이름표를 붙인 무리를 가리킨다.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또 하나를 불러서 "얘. 너  요즘 일이 잘 안되지?" "응. 힘들어 죽겠어." "그것도 얘네들 때문이다~" "뭐!" 사람들 코가 벌렁인다. 이번엔 모두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 요즘 너무 가난해졌죠?" "그래, 그래!" "그것도 애네들 때문이에요!" "정말? 네 이녀석들을!!"  사람들의 입이 일그러지며 이제 이름표를 단 무리에게로 몰려간다. 그 때 사회는 뒤로 냉큼 물러나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요걸로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는 그 안정을 위해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요괴는 바로 이것을 위한 가장 1차적 희생양의 기표인 것이다.

  '항설백물어' 속편은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노뎃포'로 부터 에필로그와도 같은 '로진노리'까지 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회에서의 요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 요괴가 어떻게 사회에서 생산되고 이용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긴밀하게 엮이어져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쩐지 독자를 계몽하려는 듯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서 마냥 지루할 것 같지만 하하!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 작가가 누군가?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를 썼던 바로 그 교고쿠 나쓰히코다. 요괴이야기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 사회학 미학 이론을 마구 버무려 끊임없이 풀어내는 수다로 독자의 오감과 정신을 휘몰아쳐대던 필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 마디로 괜한 걱정이라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광골의 꿈'에서 실망한 나머지 조금은 반쯤 접어두고 보는 작가였는데 이번의 작품으로 완전히 다시금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와 더불어 이 작품을 나만의 개인적인 나쓰히코 베스트 3로 꼽아본다. '노뎃포'의 작은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뼈대를 세우고 살을 채워 점점 그 스케일을 불려가는 솜씨가 만만찮다. 스케일이 방대해지는데도 아귀마저 딱딱 떨어지니 절묘하다. 한 마디로 당신이 나쓰히코의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상투적이라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속편도 이리 대단하거늘 이 다음 '후편'은 일본 최고의 대중소설에게 준다는 나오키 상마저 수상했다고 한다.(세상에 어느 정도로 괴물스런 작품인거야?) 정말 기대가 된다. 빨리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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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마츠모토 세이조로 대표되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거의 장악되다시피 하던 일본 미스터리계에 다시금 본격(일본에서는 정통 미스터리를 '본격'이라 이른다.)의 부흥을 가져와 '신본격의 기수'라 이름 받은 아야츠지 유키토는 그의 신본격의 신호탄이자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의 서두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최신의 과학 수사기술이 명탐정들의 활약을 다 가져가 버렸다고. 맞는 말이다. CSI를 보라. 아무리 홈즈 같은 명탐정이 있더라도 거기 어디에 콧배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밀 여지가 있는가 . 바로 곁에 있더라도 CSI 대원들 그 누구도 명탐정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심문이니 대질 조차도 필요없다. CSI의 모토는 그거다. '제대로 된 과학적 수사 기술만 있다면 증인도 자백도 필요없다.'라는 것. 그들이 종종 용의자를 부르는 것도 사실은 DNA를 얻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현대에서 명탐정이 설 자리는 그렇게 좁아졌다. 때문에 명탐정을 등장시키고 싶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클로즈드 서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폭풍 속에 고립된 섬, 폭설 속에 고립된 산장 아니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 처럼 화산폭발로 인해 고립된 캠프 이렇게 말이다.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렇게 해서 과학이라는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두뇌의 지적인 능력으로만 주어진 미스터리를 풀 수 있도록 말이다. 명탐정의 존재는 미스터리의 재미가 바로 지적 유희에 있음을 의미한다. '십각관의 살인' 첫 머리에서 유키토 했던 말 그대로 '자극적인 논리 게임'인 것이다. 

  이 게임을 위해서 미스터리 작가와 독자들은 그동안 '톰과 제리'식의 게임을 해왔다. '제리'인 미스터리 작가들은 계속 독자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참신한 트릭들을 개발해왔고 독자들은 거기에 속지않기위해 점점 교활한 '톰'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뉴튼식 물리법칙에 지배를 받는 세상. 그 세상의 한계 때문에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트릭들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때로는 가스통 루르의 '노랑방의 비밀'이나 존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처럼 심리적 트릭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무한히 개발될 수는 없는 법. 결국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시작이 되었고 아야츠지 유키토 자신 역시 데뷔작에서 써야 했던 '서술 트릭'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키토의 작품 뿐 아니라(십각관의 살인, 미로관의 살인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두번째 작품 시계관의 살인은 물리적 트릭을 쓴다.)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그 맛을 보았고 더하여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에 이르러서는 서술 트릭의 극한을 체험한 바가 있다. 

 '섬을 삼킨 돌고래' '최후의 끽연자'를 통해서는 그 풍자적인 재능을 '시간을 달리는 소녀' '파프리카'를 통해서는 그 SF적 역량을 여실히 느끼게 해줬던 IQ 178의 진짜 천재 쓰쓰이 야스타카의 그 수많은 작품중 단 세 개 밖에는 없다는 미스터리 작품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쓰쓰이 야스타카가 미스터리도 썼구나 하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봉인판은 세 번 만났는데 그 첫번째가 앞서 말했던 '살육에 이르는 병'으로 그건 띠지로 전체가 다 봉인된 형태였고 다른 하나가 북스피어에서 나온 빌 밸린져의 '이와 손톱'인데 그것은 결말 부분이 봉인된 상태였다. 지금 얘기하는 소설 '로트레크 살인사건' 역시도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는 형태다. '봉인'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기막힌 트릭이길래 이렇게 일부러 봉인까지 시켜놓았을까 하는 기대감. 과연 그 기대감으로 한껏 고양되어 눈에 힘을 주고 쓰쓰이 야스타카가 펼쳐 보이는 미스터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목 '로트레크(아마도 로트렉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 처럼 이 소설의 화자는 여덟살 때 사촌의 우연한 실수로 크게 다쳐 그만 하반신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남자다.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예전엔 자기 집 소유였으나 부친의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팔아버린 한 독일인 사업가가 지은 커다란 별장으로 초대된다. 거기에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옥문도' 처럼 아리따운 세 처자와 그녀들의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제1 제2 제3의 흉악한 살인이 일어난다. 독자의 임무는 '나'가 보여주는 사건의 정경을 잘 따라가면서 그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사건의 얼개를 밝혀준다. 잠재적 용의자들의 관계, 건물의 구조, 흉기의 존재까지. 일부러 숨기거나 미스디렉션을 유도하는 부분은 별로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공정하다. 동기도 파악 가능하고 모두 권총 살인인지라 깔끔하다.  즉 야스타카는 가장 주가 되는'트릭'만 빼고는 공정한 지적 스포츠가 되기 위하여 녹스의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트릭이 가져다 준 반전의 효과가 꽤나 커서 어쩌면 '이게 뭐야! 반칙 아냐!'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범인을 맞히긴 했지만 이런 기발한 트릭은 정말 처음이다. 새삼 쓰쓰이 야스타카의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자면 야스타카는 절대 반칙을 쓰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토대로 추리를 했고 결국 두 번을 다시 꼼꼼이 읽고서야 봉인을 뜯기 전에 어느정도 트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건 지적 논리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게임인 것이다. 어떤가? 로트레크의 포스터들이 가득한 이 저택으로 한 번  초대되어 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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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2011-08-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 미스터리 소설은 트릭의 종류를 모르고 읽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의 트릭을 비롯하여 서평 자체에 몇몇 작품의 트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네요. 저는 위에 나온 책을 다 읽었으니 상관없지만 모르시는 분이 이 서평을 읽고 나면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평에서 지적하신 책들을 읽으신 분이 이 책을 읽으면 미리 대비를 하겠죠. 깜짝 놀랄 진상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이니, 제목과 내용에 수정을 해 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ICE-9 2011-08-18 13:11   좋아요 0 | URL
리뷰 쓸 때는 트릭의 종류 정도는 밝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사실 트릭의 종류를 알면 더욱 더 미스터리 풀기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 유발이 될 수 있으니까요.)만 말씀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수정 했습니다. 무엇보다 리뷰가 읽는 이의 기쁨을 빼앗아서는 안되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