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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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 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고 해도 좋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드디어 나왔다. 워낙에 거센 바람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명세 덕분인지 그래도 조금은 빨리 만나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일단 읽어 본 소감을 말하자면 한 마디로 후덜덜한 걸작이라는 할 수 있다.

 워낙에 요코야마 히데오 자체가 경찰 소설에 능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 소설에 나와있는 경찰 조직 내부의 알력 묘사는 거의 야마사키 도요코의 '하얀 거탑에 맞먹는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매력은 이 책이 가진 매력의 1/3 밖에 안된다. 듣기에 요코야마 히데오가 이 책에 공을 들인 게 10년이 넘었고 원래는 3년 전에 출간되어야 했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금 그 3년을 보다 완벽한 소설이 되도록 개정에 힘을 쏟았다고 하는데 과연 빈 말이 아님을 알겠다. 사실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함량은 그만한 공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고 보여지니까 말이다.

 

  이 소설에 대한 상찬은 10포인트 글자로 A4 2장 분량으로 떠들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건 사실 쓸데없는 말에 불과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이 책을 읽기만 해도 얼마든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가진 장점을 말하기 보다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왜 '64'를 이렇게 만들었나를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리뷰란 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렇게 여러 리뷰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필드에 노출되고 보면 저마다 그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 견해를 나누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아직 접하지 못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할 수 밖에 없는 독자들로서는 여러 다양한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상대방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해석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렇게 리뷰로 가득한 필드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뭐, 변명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내가 본 '64'를 여기에 풀어 놓으려 한다.

 

  먼저, 가장 먼저 들게 될 의문인 왜 하필이면 '64'인가 이야기 해 보자.

  소설에서 '64'는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날, 쇼와 64년(1989년) 1월 5일

세뱃돈을 받으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점심께 집을 나선 아마미야 쇼코는 근처 친척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두 시간 뒤, 아마미야의 집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P. 65)

 

  이렇게 '64'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아마미야 쇼코가 유괴된 해를 말한다. 하지만 64의 의미는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납치된 아마미야 쇼코가 주검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 총력을 기울여 수사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때의 범인은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경찰 조직 내부에서는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통칭 '64'로 부른다. 이건 그들의 치욕이며 아픔. 한 마디로 트라우마였다. 이것의 트라우마성은 그 사건으로 완전히 파탄나버린 쇼코 가정의 아버지 아마미야의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결부되어 더욱 강화된다. 소설 '64'는 트라우마가 그 배후에서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본다. 왜 요코야마 히데오는 하나의 연도를 가리키는 '64'를 하필이면 제목으로 했던 것인가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재 일본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독자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그것은 물론 2011년에 일어난 쓰나미와 일본 원전 사태 즉 '3. 11' 이다.

 

  3. 11 은 일본 내에서 그 때의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미국에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날을 통칭 9. 11으로 부르듯이 말이다. 3. 11은 그렇게 통칭 되고 있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소설에서 D 현경의 경찰들이 '64'라 통칭해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의 부름에 난 요코야마 히데오가 64 와 3. 11 사이에 연결 고리를 놓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은 3. 11 이전에 완성되었지만 개작 중에 그 일이 일어났으므로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는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일본 전역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날만큼 떠들어대었으므로 작가로서 아무래도 그냥은 지나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건 그냥 공상만은 아니다. 소설에 그 흔적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설의 주인공 미카미가 잃어버린 딸, '아유미'의 존재다.

 

  소설은 사라진 아유미를 찾으러 온 미카미와 그의 아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장소가 하필이면 영안실이다. 수배된 아유미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자살한 소녀가 있어 그 지방의 경찰서장이 미카미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소녀는 아유미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장면 연출은 3. 11을 거친 일본인들이게 강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쓰나미와 원전 사태로 인해 폐허가 된 그 곳에서 희생자들을 찾으로 간 것과 너무도 흡사해 보이니까 말이다. 그 장면을 TV 보도로 숱하게 보았던 일본인들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이러한 장면 연출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연출을 요코야마 히데오이 명백한 의도로 본다. 물론 3. 11 을 연상시키기 위한. 왜냐하면 결국 아유미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이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아유미가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는 소설의 주된 내용과는 그리 많이 상관은 없기도 하고 사실 이 소설이 3. 11의 영원한 트라우마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끝까지 아유미가 돌아오지 않아서 그녀 역시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것을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밝혀놓는다. 그러니 혹시 스포일러가 되었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미카미는 현재 D 현경 경찰의 홍보담당관이다. 원래는 형사부에 있다가 원하지 않았지만 인사이동을 당했다. 더구나 그는 20년전, 아마미야 쇼코의 사건을 담당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 새롭게 시작되는 트라우마 모두에게 겹쳐있는 상태다. 쉽게 말하면 그는 두 트라우마의 일종의 교집합과 같은 존재다. 그렇게 미카미는 둘의 경계 사이에 끼어 있다.

 

  이러한 미카미의 존재는 소설 '64'가 그렇게 안아버린 3. 11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나가야 하는가를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여기게 한다. 왜냐하면 이 미카미의 신체가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그것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엔 놀랍게도 미카미의 신체를 사이에 두고 짓이기려 드는 대립각을 세운 수 많은 고래들이 있다. 그렇게 여러 대립전선들이 미카미의 신체를 관통하는데 트라우마를 제외한다면 대락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일단 소설에서 나타나는 순서대로 말해보자.

 

  먼저 경찰 대 기자의 대립 전선이다. 홍보담당관으로써 경찰을 대표해 기자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미카미는 그야말로 그 사이에 끼인,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이다. 미카미는 미카미대로 비록 그 자신의 천직은 형사라고 생각하기에 홍보라는 일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홍보부가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바깥 창문이 하나도 없어 소통하지 못하는 경찰조직의 그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 바로 홍보부라는 생각으로 경찰과 언론이 유기적으로 잘 상생할 수 있도록 진정한 다리가 되어주려 한다. 하지만 경찰과 기자 그 누구도 이런 미카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경찰은 경찰대로 그저 미카미가 위압적으로 굴어서 기자들을 자신들이 뜻대로 할 수 있게 잘 길들여주길 바라고 기자는 기자대로 경찰의 상황따위는 알 바 없다며 자신들의 요구를 안 들어주는 것에만 아우성이다. 경찰과 기자 모두가 맹수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으려 하는 와중에 미카미는 이쪽에는 무능하다고 저쪽에는 권위적이다라고 물어뜯긴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과연 개인의 신념을 무사히 지켜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도 그 신념을 테스트 하는 2교시 그리고 3교시의 시험이 남아았다.

 

  2교시의 시험은 경찰 내부 조직 간 알력이다.

  기자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갑작스런 경찰청장의 아마미야 방문으로 미카미가 소속된 경무부와 형사부 간에 별안간 격렬한 대립전선이 생겨버린 것이다. 형사부는 경찰청장의 방문이 경무부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찰하러 오는 청장이 처음으로 들르는 곳이 바로 형사부의 최대 약점이라 할만한 아마미야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를 미카미는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쇼코가 유괴되었을 당시 담당했었던 고다라는 형사가 남긴 메모가 있는데, 그 메모에는 20년 전 형사부가 했었던 수사에 존재했던 치명적인 오점이 적혀있으리라 추정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을 경무부가 쥐고 이번 경찰청장 시찰 건을 주도했다고 형사부가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카미는 늘 입버릇처럼 형사부가 자신의 고향이고 경무부는 잠깐 머물다 가는 곳으로 말할만큼 형사부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기에 이러한 형사부의 미카미에 대한 철저한 함구령을 통한 냉대는 난감하기만 하다. 형사부에서 정보를 주지 않으면 홍보부는 더욱 제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형사부는 형사부대로 경무부 소속인 미카미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경무부는 경무부대로 당신은 형사부를 더욱 좋아하니까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이렇게 그 어느 쪽에서도 환대 받지 못하는 사이에 끼인 새우의 삶을 그는 또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등에 짊어져야 할 근심의 돌덩어리가 남아있다.

 

  마지막 3교시 시험은 더욱 그 범위가 넓어진다. 시험칠 때 범위가 넓은만큼 힘든 것도 없는데 과연 신은 미카미의 편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미카미는 이 격렬한(그냥 쓰는 형용사가 아니고 정말 문자 그대로 이들의 대립은 격렬하다.) 대립의 와중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형사부와 경무부 대립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일종의 흑막을 말이다. 그건 바로...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걸 밝히는 것이 이 작품을 읽고 알게 될 즐거움을 뺏는 게 아닐까 싶어서. 아무래도 이 작품이 '하얀 거탑'의 뺨을 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스파링하듯 두들길 정도로 조직 내부의 치열한 암투를 잘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스터리 부분도 꽤나 주가 된다고 보기에 이쯤에서 함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니 좀 두리뭉실하게 말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결정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대립 전선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대립이다.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의, 좋게 말하면 통합이고 그 본질을 나타내자면 장악인, 음모에 맞서 지방 정부가 그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려 하는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미카미는 그 사이에도 끼어있다. 물론 여기서도 어느 한 쪽을 성급하게 손 들어 줄 수 없는 처지이다.

 

  이렇게 보면 미카미가 끼어 있는 이 모든 대립 전선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한 마디로 난처함 달리 말하면 안절부절이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자가 그렇듯이, 경계에 서 있는자는 그럴 수 밖에 없듯이 그는 늘 불안하기만 하다. 그 어느 조직도 그를 환대해주지 않으므로 무려 총경이라는 계급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와도 같이 오로지 혼자, '독고다이'로 진실을 찾아 나선다. 20년 전의 유괴 사건과 현재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대립까지도. 물론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가 이 모든 난관 속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정작 자신에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딸 '아유미' 때문이었는데, 가출하고 소식이 없는 딸 '아유미'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고 싶은 마음에 규정을 어기고 경무부 수장의 힘을 빌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된 난관이었던 것이다. 그 수장은 '딸의 수사'를 볼모로 잡고 그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했고 그 바람에 그는 그 명령이 자신의 천성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따를 수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모든 대립 전선들이 뒤끓는 도가니 속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바로 이러한 미카미의 상태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3. 11 을 겪은 현재의 일본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아유미는 바로 3. 11 이 남긴 현재적 트라우마라고 말했다. 소설에서 아유미의 실종은 미카미에게 늘 현재 진행형적 고통이듯이 말이다. 그는 그 트라우마를 규정을 위반해서라도 서둘러 치유하려 했다. 하지만 그 섣부른 선택이 결국은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일본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발언이다. 왜냐하면 3. 11을 겪은 일본이 자신들이 안은 상처 혹은 비극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성찰하지도 않고 서둘러 파묻어버리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채 3개월도 안되어 3. 11은 공식 채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잊혀져 갔다. 당시에 그랬던 이유를 들어보면 해묵은 과거의 고통을 자꾸 되돌아보는 건 새로이 출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전만 해도 그 문제점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았고 피해도 축소하기에 바빴다. 소설 '64'에서 미카미와 기자들이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은 한 노인이 어떤 임산부의 음주운전으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경찰이 그 임산부의 이름을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즉 경찰의 독단적인 정보 통제 때문이었다. 이는 그대로 원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독단적인 정보 통제와 너무도 닮아 있다. 이는 현재 일본 정부의 정보 통제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비판으로 보여지며 이렇게 볼 때 결국 미카미가 처한 상황은 더욱 3. 11 이후의 일본 국민이 처한 상황과 같다. 지금의 일본 국민은 모두가 저마다 아유미를 잃어버린 미카미인 것이며 또한 쇼코를 잃어버린 아마미야인 것이다.

 

  이런 존재의 은유 또는 상황의 닮음을 이해해야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던지고 있는 지금 일본인들에 대한 대안적 속삭임도 들려오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건 단적으로 말해 개인의 독립적인 고유한 개인성의 쟁취 이다. 이것이 바로 요코야마 히데오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대립 전선을 가져 온 진정한 이유다. 그리고 왜 미카미가 자주 형사부를 자신의 고향으로 부르는지 또한 왜 그렇게 히데오는 미카미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이 달리 노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다. 소설 후반에 이 '고향'이라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된다. 이를테면 후반 경찰 청장이 시찰하러 오는 날 갑자기 20년전 쇼코의 사건을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사건이 전국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D현경에 온갖 중앙 기관지의 기자들이 몰려와 대대적인 기자회견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걸 볼 수 있다.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압도적 다수의 '손님'들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떤 성격이며 어떤 입장에 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나 발언을 했는지도 모르는 외부인들을 상대로 유괴사건의 기자회견을 진행해야 한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P. 566)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64'가 이런 이야기로 쓰여졌는지 단적으로 짚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밝히지 못하겠지만 왜 미카미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아마미야 역시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앞서 말했던 이 소설이 대안이라고 말했던 독립적인 고유한 개인성의 쟁취란 단순한 기호화의 거부인 것이다. 위에 말했던 세가지 대립도 알고보면 그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찰 대 기자들도, 경무부 대 형사부도, 중앙 정부 대 지방 정부도 모두 각각의 상대방을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기호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카미가 대표적이다. 기자들은 미카미를 고유한 미카미가 아니라 그저 홍보담당관이란 기호로 보았고 그건 경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형사부는 어떠한가? 한 때 같은 솥의 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미를 그저 자신들과 척을 진 경무부의 기호로만 본다. 경무부 역시 미카미를 그저 형사부를 잊지 못하는 기호로 볼 뿐이다. 아무도, 그들 중 그 누구도 기호가 아닌 인간 미카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단 한 명만이 그를 이해한다. 같이 딸을 잃은 아마미야 만이.

 

  이제 우리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3. 11 을 트라우마로 겪고 있는 일본에게 진정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소설에서 쇼코의 사건을 그저 '64'라고 불렀듯이 지금 일본이 껴안아버린 비극인 3. 11 을 그저 기호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후 일본 정부가 했듯 서둘러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모든 걸 섣불리 파묻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진정으로 비극을 치유하려 한다면 미카미가 그랬듯이 아마미야가 그랬듯이 그들 모두의 어려움을 저마다 유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그들 모두가 어떤 아픔,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64'에 담겨진 눈물이다. 소설의 장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3. 11을 예상하고 요코야마 히데오가 10년의 세월을 공들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꼭 나와야 할 때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저 위의 누군가가 잠시 운명을 튜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히데오의 진심은 사실 지금 일본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3. 11 은 여전히 획책되는 은폐와 발굴하려는 아픔의 틈바구니 속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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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4와 3.11??
    from 책과 고양이와 이대호 2013-07-02 09:17 
    리뷰 잘 읽었습니다. 궁금한게요, 요코야마 히데오가 <64>를 통해 3.11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는 건 건 과대해석이지 않을까요? 다시 쓰긴 했지만, 3년전에 연재가 마무리 된 작품이구요. 아유미의 실종과 아유미가 가지고 있는 외모에 대한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해 미카미와 미나코를 힘들게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곰곰 생각해보고 싶긴 합니다. ..... 내용 스포입니다.... 아유미로 인한 고통도 크게 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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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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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고독이다.

 

 

  특별히 감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리움을 느낀 것도 아니다. 만나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맞이하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건 오랫동안 질리도록 반복했다. 아무 데나 좋아, 모임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눈의 아이' p. 9)

 

 '눈의 아이'의 화자, 마에다 유카리는 너무도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는 미야베 미유키가 다음과 같은 탁월한 묘사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읽으면서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고 생각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방은 추웠다. 벽시계에 달린 온도계는 섭씨 사 도를 가리킨다. 잔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더니 자동응답기 램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고 보일러도 틀지 않은 채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의 금요일이다. (p. 10)

 

 그렇게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마에다 유카리는 몸을 녹이기도 전에 자동재생기 부터 재생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으면 그토록 서둘러 확인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은 마지막 문장인 한겨울의 금요일에 이르면 더욱 강해져 버린다. 그녀가 추위에 떨면서 잔업까지 마치고 온 날은 남들에게는 '불타는 금요일'이었고 그런 때 조차 그녀는 언 몸을 녹이기 보다 언 마음을 먼저 녹여야 할 정도로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움에 깊이 빠져있는가를 미야베 미유키는 이렇게 몇 개의 문장만으로 별다른 설명없이 절절히 느끼게 한다. 읽으면서 '이러니까 미야베 미유키인거야...'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히 일어나는 궁금증. 그녀, 마에다 유키는 왜 그렇게 고독하게 된 걸까?

 시작은 초등학교 동창생의 간만에 만나자는 연락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매일 사이좋게 어울려 놀았던 친구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먹서먹해져 그 후로 20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란 바로 같이 놀던 여자친구 하나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로 부터의 호출이었다. 눈이 오는 날에 살해되어 눈의 아이가 되어 영원히 열 두살로 남아있는 '유키'를 다시금 기억하기 위한...

 

 이번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들어간 단편집니다. 거기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눈의 아이'는 이 단편집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어째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 같은 걸 말해주는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무관심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유키가 죽었을 때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가 그녀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바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해, 모두 유키코의 가족이 사라지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런 안도감을 표현했다.

 

 - 장보러 가다가 유키코 엄마와 마주치면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 줘야 좋을지 몰라서 괴로웠어. 오죽하면 길모퉁이로 피해다녔다니까. 이제 그런 데까지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p. 12)

 

 유키코를 죽인 범인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 대한 불안 보다도 딸을 잃어버린 이웃의 비탄에 젖은 얼굴을 더 가까이서 봐야한다는 사실이 더 꺼림칙하다. 제삼자의 본심이란 그런 것임을 엄마로 부터 배웠다. (p. 13)

 

 어쩐지 이 말에서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했던 말, 그러니까 '타인의 얼굴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가 생각난다. 우리가 비탄에 젖은 얼굴들을 피하게 되는 건 바로 그 책임을 은연중에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하고 그것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 '눈의 아이'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다섯 편의 작품에 걸쳐 누누이 말하고자 하는 건 지금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개인의 모습은 다음 편인 '장난감'에서 보다 사회적 차원의 모습이 되어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은 더욱 직설적이 된다. 그 작품의 주인공 친척 할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아내의 죽음으로 오래도록 경영해 온 완구점을 팔아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가게를 그대로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 이웃이었던 같은 상가 사람들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가게를 팔게하려고 자식들을 부추기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흘린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하면,

 

 "문제는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평생 처마를 잇대고 살아온 분들이라 누구 한 사람 멋대로 가게를 닫고 '그럼 잘들 있게' 하고 떠나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동네에 돌아올 생각도 없는 자식들에게 완구점이 상속돼 땅이 팔리면 다른 가게 주인들도 이때다 싶어 상가를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이건가요? (P. 48)

 

 이런 이유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이러한 상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 동기가 '눈의 아이'에서 유키를 살해했던 이의 살인 동기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에 그 개인적 모습이 집단으로 확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 챙기고 보는 모습을 미야베 미유키는 두 편에 걸쳐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판을 미유키가 보다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서 하는 것처럼 이는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이기도 하다. 띠지에 나와있는 말에 의하면 이 단편집은 일본에서도 느닷없이 나왔다고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표작가로 늘 동시대의 일본이 가진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이 역시 그녀가 보고 느낀 일본 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느닷없이' 나왔다는 점에서 거기에 대한 발언이 그녀에게 절실했었음을 아울러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절실함은 단편집이 나아갈수록 그녀가 지금 일본 사회에 바라는 모습, 그러니까 대안이 더욱 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것에서 더욱 확증된다.

 

  그녀가 느끼는 문제점은 이미 앞의 두 편에서 나왔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유키와 그 할아버지처럼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그 이유를 환기시키는 자들이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유령이 되어 다시 돌아와 존재 자체로서 이기심과 무관심을 비난하는 일을 맡는다. 그 역할을 모두 '저편의 존재'가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011년 일본에서 가장 많은 '저편의 존재'를 만들고 말았던 3월 11일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이 정말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추리가 어느정도 가능하다. 바로 소설 속 유카리의 엄마나 상가사람들처럼 빠르게 3월 11일의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가고 있는 당시 일본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단편집 '눈의 아이'는 2011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미증유의 비극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때는 일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3. 11에 관한 것을 보기가 어려워져 있었다. 반응의 추이만 놓고보자면 일본 사회는 정말로 빠르게 그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갔던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발언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일본의 상황이다. 그녀는 그 무관심이 분명 의도적이라 보았고 그렇게 되는 이유를 하나는 책임을 짊어짐의 거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한 이기심이라 보고 바로 두 편의 작품에다 그것을 우려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 작품집을 내어놓은 것은 '돌이켜 봄'이다.

  그건 그 비극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이며 그 과거가 바로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에 궁극엔 그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떠맡음이다. 정확히 뒤이은 세 편의 단편들은 거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요코'는 '기억'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며 '돌베개' 그리고 마지막 '성흔'은 결국 사회의 궁극적인 치유는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해 뭔가 책임을 나누어 짊어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특히 '성흔'에 이르러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내어놓는 대안이 왠지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했다.

 

 넓게 보자면 우리는 이재민입니다. 그러나 집을 잃은 도호쿠의 이재민이 보기에 우리는 이재민이 아니겠죠. 말하자면 '후방 지원'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도호쿠의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그녀들 그들의 경험을 'THE ONLY ONE' 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이 'ONE OF THEM' 으로써 많은 참화 가운데 하나이며 여러 사람이 안고 있는 쓰라림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냉정한 시선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 이재민의 'THE-ONLY-ONE-NESS'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성흔'은 정확히 'ONE OF THEM' 의 작업에 속한다. 그러고보면 첫 단편 마에다 유카리의 경우는 완전히 'THE ONLY ONE' 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고독만을 생각했고 그렇게 늘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픔만 생각해왔던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ONE OF THEM'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완구점'에서 할아버지의 유령을 바라보는 것이나 '지요코'에서의 기억은 모두 'ONE OF THEM'하는 것을 뜻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러한 'ONE OF THEM'을 뒤이은 '돌베게'에서는 리포트 쓰는 것으로 마지막 '성흔'에서는 직접 대화와 참여로 더욱 확장해 나간다. 결국 이 단편집 전체는 'THE ONLY ONE'에서 'ONE OF THEM'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마지막 '성흔'에서 다시금 처음 '눈의 아이'에 나왔던 눈을 삽입함으로써 이 여정을 완결시킨다.

 

 정말 미야베 미유키가 뛰어난 것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눈을 다루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아이'에서 눈은 지극히 주관적 심상의 대상이다. 화자인 마에다 유카리를 비롯하여 거기에 등장하는 유키를 추억하는 모두는 오로지 눈을 유키와 관련해서만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극히  'THE ONLY ONE'적 입장으로 눈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더욱 강조된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만이 어두운 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빛을 내며 팔랑팔랑 내렸다.(P. 28) 

 

  그런데 마지막 '성흔'에서 첫머리 부터 등장하는 눈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전혀 다르다. 눈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눈의 아이'에서 나왔던 눈을 둘러싼 대화의 반복이라는 것은 그 때 눈에 대해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네 명이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증명된다.(알고보면 미야베 미유키는 정말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가벼움 속의 진중함이란 이 단편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반복된 대화에서 사람들은 눈에 대해 이제 이렇게 말한다.

 

쉰 살이 족히 되었을 관리인은 삼월에 도쿄에서 내리는 눈은 의외로 폭설이 되곤 하는 법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 청년은 대걸레를 한 손에 쥐고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에 대해 자기만의 이론을 한 자락 늘어놓았다. 수예 교실의 노부인은 추워서 목에 감은 내 머플러를 칭찬해 주었다. 부인의 애용품인 지팡이의 미끄럼 방지 고무캡에는 얼어붙은 눈이 덩어리져 달라붙어 있었다. (P. 127)

 

 여기서 눈은 첫 머리부터 더 이상 'THE ONLY ONE' 이 아니다.

 어미 '-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때만 되면 반복 가능한 'ONE OF THEM' 인 것이다. 더우기 그것은 청년의 말에 이르러 더이상 '눈의 아이' 때처럼 주관적 심상이 투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한낱 이론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마지막 노부인에 이르면 유일한 생명의 빛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있어 그 누구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덩어리째 얼어붙은 눈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ONE OF THEM' 이 지극히 확장된 것과도 같이...

 그러므로 '성흔'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로 인해 더욱 명확해진다. 보다 진정한 타인의 책임을 떠맡기 위한 'ONE OF THEM' 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그것인 것이다. 때문에 '성흔'은 희생자에게 가장 깊숙이 개입한다. 다섯 편 중 오로지 '성흔'만이 희생자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대안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 역시도.

 

 '눈의 아이'는 외관에 속기 쉽다. 그러니까 두께가 얇아서 가벼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소설인 것이다. 개인적으론 앞에서 주욱 써 온 바대로 지금 일본 현실에 대한 비판과 거기에 걸맞게 대안 역시도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 중 하나로 선뜻 꼽고 싶다. 녹록치 않은 깊이를 얼마 되지도 않는 부피의 이야기로 우려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미야베 미유키의 내공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과연, 미야베 미유키!'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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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27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의 아이, 라는 제목은 예쁜 느낌도 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군요
눈에 대해 그렇게 쓴 것을 알아챈 헤르메스 님도 대단하십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쓸 때는 그 말을 쓰지 않고 나타내는 게 좋다고 하던데, 그런 것도 잘 나타나 있군요, 본래 잘 쓰는 분이지만...
그런 것을 잘 봐야겠습니다, 저는 그냥 넘어갈 때가 많은 듯해요

사실 어떤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쉽게 잊기도 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는 그만 잊고 살아가라고 하죠 잊을 수 없는 일인데...


희선

ICE-9 2013-04-27 23:17   좋아요 0 | URL
아뇨, 저는 그저 강백호가 하듯이 살짝 거든 것일 뿐, 그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미유키가 대단한 겁니다^ ^
아픔을 지켜보는 자는 그들의 아픔을 유일한 아픔으로 존중해주어야 하고 아픔을 겪는자는 스스로 그것을 자기 혼자만 겪는 유일한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세는 정말 배워볼만 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아픔은 얼마든지 객관화하면서도 스스로의 아픔은 오로지 주관화만 시키고 있지요. 제대로 된 객관화와 주관화가 정말 필요할 것 같아요. 이번의 '눈의 아이'를 통해 다시금 이것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945년. 그러니까 일본이 패전하여 전쟁이 끝났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으로 이제는 명실공히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는 더없이 싱글벙글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야 자신이 꿈꾸던 미스터리 소설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대로 칩거하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 나갔고 그 결실로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두 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혼진 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나비부인 살인사건' 이다. 특별히 이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번에 나온,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걸 끝으로 그 길었던 명탐정의 여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즉 그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사실은 바로 그 첫 작품 중 하나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을 일종의 리메이크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이 가지는 연관성은 이 작품을 읽게 되시면 유사한 사건이 나타나므로 바로 아시게 될 것이지만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를 도와주는 도도로키 경부가 그렇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이 도도로키는 '여왕벌'에 이르러서야 등장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출연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작품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도도로키 경부는 경시청에서 일하면서 탐정역인 유리 작가를 돕는 역할로 나온다.(물론 그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를 돕는 것과 동일한 역할인 것이다. 또한 전개 방식도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하다. 일단 첫 살해된 시체의 등장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점이 비슷하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은 공연 준비가 한창중인 극장이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예전엔 유명한 호겐 가문의 저택이었으나 전쟁으로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린 집이다. 그렇다면 완전 다르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아니다. 시체가 드러날 때 거기엔 그 시체와 관련있는 사람들과 누군가로 부터 촬영 의뢰를 받고 들어간 세 명의 사진기사들까지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세 명의 사진기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이기도 한 '풍령'처럼 머리만 매달려 있는데도 놀라거나 달아나지 않고 의뢰한 대로 사진을 찍기까지 한다. 아마도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의 연출이 란포의 작품에도 있었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 작품이 바로 '석류' 란 작품이다. '석류'에서도 한 경관이 순찰 도중 버려진 집에서 살해된 시체를 발견하는데 거기엔 시체만 있지 않다. 공교롭게도 한 화가가 시체를 앞에 두고 잔뜩 귀기어린 얼굴로 열심히 그 시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인데 연출되는 방식이 유사하므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어쩌면 이 '석류'에서 아이디어를 빌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러고 보니 이 소설 역시도 '트렌트의 마지막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공공연히 나오는데 그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도 그러하다(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작품은 밝히지 않는다).)

 

  아무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한데 그건 사건의 중심에 음악과 관련된 하나의 단체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제목을 딴 것에서도 감지되듯이 '오페라' 공연단이 나오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앵그리 파이러츠('분노한 해적들')'라는 재즈밴드가 나온다. 머리만 남아 매달려 있는 이는 원래 그 재즈밴드의 리더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 살해당한 나비 부인 역시 그 오페라 공연단의 리더이다. 이 역시 비슷하다. 더구나, 이것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오페라와 재즈 모두 서양으로부터 들어왔을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야 비로소 일본에 널리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페라와 재즈 둘 다 변해버린 일본을 나타내는 단적인 상징이다. 그런 존재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 둘이 내적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에 중요한 캐릭터가 가지는 유사성도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사건의 의뢰자이자 중요한 목격자이며 결국엔 살해당하고 마는 혼조 나오키치와 '나비부인 살인사건'에서 중요한 화자인 나비 부인의 매니저 '쓰찌야 교조'는성격이나 분위기에 있어 그야말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스포일러상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이 둘이 사건과 얽혀있는 관계의 궁극적인 모습마저 참으로 유사하다.

 이 정도로의 열거로 이 둘의 유사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리메이크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려두어야겠다. 그는 이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를 개작하여 '이누가미 일족'으로 만든 바도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리메이크라면 의문이 하나 든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이다.(물론 요코미조 세이시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이후에 긴다이치 코스케가 나오는 '악령도'라는 걸출한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 악령도의 사건을 맡는 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사건을 해결하기 전으로 한다. 즉 악령도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긴 했지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마지막으로 맡은 사건임에는 변함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 마지막에 가장 처음에 나온 '나비 부인 살인사건'을 다시금 새롭게 쓴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쓰여진 시점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바로 전쟁 직후라는 것. 그러니까 전쟁이 몰고 온 거센 시대적 변화의 한 가운데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역시도 시작부터 그 변화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상 위에는 도쿄의 구역 지도(...)가 두 장 놓여있다. 오래된 쪽은 쇼와 28년(1953년)에 발행된 것이고, 최근 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쇼와 48년(1973년)판이다. 두 지도를 놓고 비교해보니 전쟁 전부터 전쟁 후, 그리고 전쟁 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쿄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해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p.7)

 

 한데,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유리 선생은 전에 고지마찌에 살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이내 고지마찌의 집을 남에게 맡긴 다음 자신은 구니다찌로 옮겨간 것이다. 그 때 나는 선생의 너무도 세심한 처사를 비웃기까지 했으나 그후 거듭되는 공습에 비웃었던 나는 오히려 세 번씩이나 피해를 입은 반면 세심했던 유리 선생의 고지마찌 저택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세상은 참으로 심술궂은 모양이다. 세 번씩이나 공습을 당한 탓에 알거지가 되어버리자 전에 비웃었던 일도 있고해서 유리 선생을 만나는 것이 쑥스러웠다.

 

 이렇게 둘의 시작이 비슷하다. 모두 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를 먼저 제시 혹은 암시하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변화'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있어 변화란 그것도 전쟁으로 인한 변화란, 무엇보다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첫 작품' 혼진 살인사건' 때 부터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야기한 변화의 정체를 밝혀내고 거기에 대해 정작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누누히 탐색해 왔다. 다시 말해, 좀 거친 일반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나비부인 살인사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옥문도'에서처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이전까지의 일본을 통째로 뒤바꿔 버리는 변화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그 결단을 위한 사유의 여정들인 셈이었다. 시리즈 대부분 드러난 범죄들은 결단을 강요하는 변화의 현시였으며 그것은 대부분 시리즈의 주요 희생자가 되었던 여성의 신체로 상징되어 나타났다. 이리 되었던 것은 여성이야말로 전쟁으로 인해 가장 급격한 지위의 변화가 일어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듣기에 전후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던 것이 여성들의 간통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많은 남자들이 죽은 탓인데 아무튼 여성들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아 나갔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였고 또한 쟁취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여성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성취 행동은 이제까지 전통적 일본 여성상에 여성들을 가두어 두고 있었던(요코미조 세이시에 나오는 희생자가 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모두 남성 중심 사회 안에서 가두어져 있거나 고립된 존재이다) 일본 남성들을 충격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젖도록 했는데 '혼진 살인사건'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것을 자기 작품의 또 다른 주 동력원으로 삼았다.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 주요 범죄자들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토록 많은 작품에 걸쳐 이루어졌던 여성 살해를 일종의 처형처럼 묘사한다. 즉 전쟁이 야기시킨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익숙한 일본 전통적 질서를 존속시키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처형인 것이다. 그건 '혼진 살인사건'에서 부터 이미 나타났으며 뒤이은 '옥문도'는 그걸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여기엔 정체성의 혼돈이 있었다. 여성들은 이제 달라진 일본의 정체성을 뜻했고, 남성들은 너무나 달라져서 자신이 알던 일본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과거에 버려졌다 현재에 쓸쩍 '끼어든 존재'와 같았고 작품에서 자주 나타났던 사생아의 존재란 다름아닌 여성의 또 다른 변형인 셈이었다. 이러한 사생아들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대부분 기존 질서에 안착한 사람들에게 '그 존재 때문에 우리 가문이 망하면 어쩌나' 식으로 불안과 의혹의 존재가 되는데 이는 정확히 남성들의 불안이 굴절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불안을 애써 '치욕'으로 은폐하는데 그것은 그 사생아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로지 제거하고픈 그들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만적 술책과도 같았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의 도가니에 있었다.

 

 문제는 긴다이치 코스케 역시 일종의 사생아, 그렇게 이식된 존재라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마치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78년에 이른 오늘까지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가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뿐만아니다. 참으로 박정하게도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영원히 거주할 자기 집 한 칸 조차 선물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여전히 얹혀살고 있다. 그렇게 내내 '나는 이식된 존재로소이다'를 그가 머리를 벅벅 긁을 때마다 떨어지는 비듬만큼이나 확실하게 드러내며 평생을 혼자서 군주를 잃은 사무라이처럼 유랑하듯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게 살면 절로 불안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이식된 존재들은 언제 잘려나갈지 모르는 가지가 되어버린 듯이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대항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바 있지만 스스로가 안고 있는 불안이 기껏 찾은 해결책은 또 다시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늘 변화무상한 정체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좋을지 각각 서로 반대편에 두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드러낸다.

 

 나는 나대로 그(긴다이치 코스케)의 공명담을 기록으로 남길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의 뇌세포 속에서 사건이 해결에 가까워졌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는 구제할 길 없는 고독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라고. 분명 그는 사건 그 자체를 해결해도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뿐 아니라 거기에서 또 새로운 드라마, 그가 해결한 사건보다 한층 무서운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p. 12~ 13)

 

 이렇게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시리즈 내내 그 궁극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내려진 모든 해답 뒤엔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의혹이 붙었다. 말하자면 그 의혹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그는 시리즈를 거듭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가지는 의미는 명확해 진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건이라면 결국 여기서의 해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탐색의 최종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요코미조 미스터리의 집대성'이라는 증명 시리즈로 유명한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가 찾아낸 최후의 해답, 그가 전하고픈 최후의 전언이 각인된 작품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 작품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그 사생아성 또는 '이식성(移植性)' 을 그야말로 한껏 드러낸다. 그건 시작에서 부터 나온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시작은 사건의 주 무대가 펼쳐지는 호겐 가문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거기서 우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인물들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게 되는데 그건 모두 '끼어든 존재'라는 것이다. 즉 주요한 등장인물들 중 '적자'가 없다. 양자건, 사생아건 모두 편입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이식(移植)의 존재들' 이다. 이러한 '이식성(移植性)'은 작품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재즈밴드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재즈 역시도 미국으로 부터 이식된 문화이기 때문이다.(또한 스포일러상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후반에 드러나는 중요한 비밀 역시도 이러한 '이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이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물음은 그 전까지와는 다르다. 이것은 이 작품만이 가지는 독특성 때문이다. 그 독특성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 간직된 그 세월의 길이가 다른 작품들하고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의 진정한 해결 하기까지에 걸리는 시간은 무려 '19년 8개월' 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해결에 소여된 누적된 세월의 길이가 이 작품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식된 존재들은 과연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가?' 이다. 그는 왜 이것을 묻는 것인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시작부터 '변화가 가져온 두려움을 어떻게 풀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즉 변화를 긍정시키는데 있어 '이식'이 향후 어떻게 되었나 그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큼 설득력이 있는 것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나 자체로서 변화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데 참조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나온 해가 1978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나왔고 그만큼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가져온 변화 뒤 일본이 걸어온 여정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 모든 관찰의 결과 내린 해답이었고 그건 무엇보다 '실재(real)'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관념 속에서 해답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확신 속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론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시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미련 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이식의 존재들은 '혼진 살인사건'의 세 손가락 사나이에서 부터 내내 있어왔다. 긴다이치 코스케 자신 역시도 '이식의 존재'였다. 대부분 그 이식의 존재들은 기존 사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같은 이식의 존재였던 긴다이치 코스케의 도플갱어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자기 분신의 행동들을 보면서 어떤 게 이식의 존재로서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인지 탐색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 근저에는 언제나 불안이 있고 나이 먹어 갈수록 안정에 대한 희구는 더욱 강력해진다. 머리로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일까 불안해서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 해 시리즈마다 거듭되는 사건들의 정황은 그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투영한 거울인 셈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일종의 사유 실험을 한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정황들이 설령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과거형'이었으므로 그것은 관념적 실험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글로 전해진 간접 증거일 뿐, 눈으로 직접 들여다 본 직접 증거가 아니었다. 그래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늘 의혹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데 이 작품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드디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직접 증거를 가지게 된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 오랜 세월동안 긴다이치가 그것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긴다이치 코스케가 지켜보았던 존재는 '이식된 존재의 완전체'와도 같았다. 그런 존재를 그는 더 이상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가장 커다란 독특성이며 바로 이와 같은 직접 증거로 인해 요코미조 세이시는 거리낌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를 일본에서 유랑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를 아예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더욱 광할한 대륙에서 유랑자로 살려고 내모는 것과도 같이. 과연 그대로 긴다이치 코스케의 절친 작가 Y는 미국에다 백방으로 코스케를 수소문 했으나 찾지 못한다. 그는 이제 포착할 수 없는 존재, 그렇게 내내 기존의 질서로 부터 탈주하는 존재, 즉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민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존재성. 긴다이치 코스케의 육체 자체에 각인되어버린 유목민적 존재성.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변화가 야기한 정체성의 혼돈에 천착한 요코미조 세이시가 그 여정을 집대성하면서 내린 최종 결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처음부터 이러한 이식된 존재성을 가지고 변화를 사유해왔던 것일까? 그건 그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세상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미스터리 소설을 쓰게 한 주요한 동기마저 되었다. 그 모습을 하나의 직접 증거로서 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계획적인 살인이 있었던 시대, 말하자면 선생님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던 시대는 좋은 시대일까요? 아님 나쁜 시대일까요?"

 "그야 좋은 시대지. 계획적인 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증거야. 뭔가 살인이란 것만해도 얼마든지 죽여도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애를 써가며 치밀하게 계획 따위를 세우겠냔 말일세. 사회가 진보됨에 따라 인명을 존중하게 여기는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지. 그리고 인명이 존중되면 될수록 살인에 대한 제재는 더욱 엄격해지고 말일세. 때문에 그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 범인들은 복잡하고도 교묘한 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교묘한 계획적 범죄가 발생할수록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겠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앞으로의 일본은 대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뜻대로 진보적인 시대가 올까요?"

 "그야 오겠지. 이렇게 언제까지나 인명이 값싸게 여겨지는 시대가 계속되었다가는 견딜 수 없을테니 말이야. 앞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시대가 올거야"

 

 바로 이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미스터리 소설을 쓰겠다고 달려간 이유이다. 그가 애초부터 바랐던 세상은 이것이었다. 전쟁을 야기한 거대한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존중받으며 마음껏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게 요코미조 세이시가 바랐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또한 그것은 정확히 모든 영토화로 부터 탈주하여 그 개인의 고유한 주체가 될 것임을 촉구했던 들뢰즈가 '유목민'에 새긴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자신이 염원하는 세상이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와 같은 유목민적 정체성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바로 거기서 자신이 내린 최종 결론이 정말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대한 내밀한 속내가 처음 나왔던 '나비부인 살인사건'을 새롭게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렇게 끝났지만 그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가 지향했던 세상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지금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쉽게 버려지거나 위기에 처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한다. 그의 염원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염원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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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지금까지 읽은 세이시 중에서 뭐가 젤 좋았어요? 아니다, 베스트 3를 말해주세요. 이 책 두 권이라 망설이고 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너무 재밌잖아요. 그걸 아니까 갑자기 헤르메스님은 많이 읽으셨을 것 같고 순위를 매겨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ICE-9 2013-03-24 23:32   좋아요 0 | URL
앗! 이렇게도 반가운 아이리시스님 댓글에 이제서야 답글을 달게되다니...
더구나 요코미조 세이시에 관한 것인데 빨리 보고 답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제가 요즘 바쁘고 또한 남는 시간은 프라하의 묘지 읽느라 완전 정신없네요 ㅠ ㅠ

아무튼 전 지금까지 나온 긴다이치 시리즈는 다 읽어보았는데요. 그 중에서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렇게 꼽겠습니다^ ^

그 첫번째는 '옥문도'
긴다이치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요코미조 세이시 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사회와 가치관의 변화를 그 특유의 괴기스러움과 잘 버무려 미스터리적으로 잘 형상화내었다고 생각해요.

두번째는 '이누가미 일족'
전형적인 '후더닛'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기도 하죠. 아이리시스님은 영화를 좋아하시니 이치가와 곤이 영화로 만든 작품도 덤으로 추천드리고 싶네요.

세번째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
범인의 의외성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트릭이기도 하구요. (어쩌면 저만 그럴 수 있겠지만^ ^;) 세이시 특유의 괴기스러움이 미스터리와 잘 융합되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요? 아이리시스님의 베스트 3는 과연 어떤 작품일 지 궁금하네요^ ^

아이리시스 2013-03-25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몇 개밖에 안 읽어서 잘 몰라요. 읽는동안 재미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다 읽었을 거라는 짐작은 맞았어요, 신기하게도 그럴 거란 감이 왔거든요. 꼽아주신 베스트3는 읽어보고 싶었던 것들인데 기회가 안닿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적어주신대로 우선순위에 놓고 읽어볼게요. 세 작품 중 1,2번은 제목도 여러 번 들어보고 유명하다는 것도 아는데 제가 읽어본 작품들이 하나도 없다니..헛읽었어..헛읽었어ㅠ.ㅠ

자주자주오세요. 제 댓글에 답글달러..

ICE-9 2013-03-27 00:11   좋아요 0 | URL
와! 초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리시스님 서재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거든요. 이렇게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제 마구 가서 흔적을 남기겠습니다^ ^

아이리시스님 이나가키 고로가 긴다이치 코스케로 분한 일본 드라마 시리즈가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제가 본 긴다이치 시리즈 드라마 중(뭐,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본 게 별로 없습니다만^ ^;) 가장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혹 보시지 못하셨다면 추천드리고 싶어서요. 거기 이누가미 일족부터 시작해서 악마의 공놀이 노래,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여왕벌 그리고 팔묘촌이 있는데 이것도 보시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옥문도가 없는 건 유감이지만 연출이 좋더군요.^ ^

아이리시스 2013-03-27 20:11   좋아요 0 | URL
긴다이치 시리즈는 종종 보긴 하는데 못본 게 훨씬 많을 거예요. 분기별로 몇 개씩 정해서 감상을 하긴한데 추천해주신 건 못봤어요. 꼭 챙겨볼게요. 책구입보다는 빠를 듯ㅎㅎ 헤르메스님 고마워요.

앗, 근데 저는 제가 댓글 많이 달테니 헤르메스님 잊지 말고 답글을 달아달라!! 시위한건데요..제가 어떻게..부끄럽게..제 서재 와서 댓글 달아요!!! 라고 말하겠어요. 지금 하고 있음..( '') 히히

헤르메스님 서재, 시간도둑이에요!

2013-03-27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정말 사랑스러운 표지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2012년에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으로 표지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왠지 읽으면서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누워서 고양이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간질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느꼈다. 손가락을 살살 간질거릴 때마다 고양이는 기분좋게 갸르릉 거려주고 살짝 꼬리를 흔드는 그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분수처럼 흩어지는 그런 느낌...

 

  소설은 일단 영화 '시월애'가 참 많이 생각났다. 이정재와 전지현이 나왔던 그 영화도 이 소설과 똑같이 같은 하나의 공간을 두고 서로 시간대를 달리하는 두 남녀가 편지를 주고 받던 그런 이야기였다. 어쩌면 정말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영화에 영향을 받아 쓴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영화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최근에 함께 나온 '패러독스 13'도 알고보면 당시 방영되었던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살짝 변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뭐, 아무튼 호기심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한 리뷰가 얼마나 되나 살펴보니 무려 133개나 된다. 정말 압도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우라나라에서의 히가시고 게이고 인기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인 것 같다. 정작 나로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만난 게 얼마되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우리나라 영화 말고 일본 영화) 때문에 들춰보았던 '용의자 X의 비밀'이 처음인 것 같은데 그 시기 즈음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도 순수 작품에 대한 관심 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원작으로서의 궁금증 때문에 보았다. 이를테면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면 그 원작을 찾아 읽고 '회랑정 살인 사건'을 보면 또 그 원작을 찾아 읽는 식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정말 많이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우리나라만 해도 '백야행'과 '용의자 X의 헌신' 두 작품이나 된다.) 그것만 해도 얼추 한 반 정도는 보았던 것 같다. 일단 그 정도의 경험으로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해서 말하자면 색다른 시도이긴 해도 완전한 전환은 아니고 행여 색다른 시도라 인정한다 해도 그게 한 때의 기분전환으로 쓴 일시적인 변주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준 정황상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종착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이다.(원래는 여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쓰다보니 꽤나 길어져서 과감히 생략했다. 훗날 제대로 밝히기로 하고 바로 패러독스13과의 비교로 넘어가려 한다. 널리 양해해주시기를...)

 

  기왕에 말이 나왔기 때문에 '패러독스 13'과 한 번 비교해 말해 본다. '패러독스 13'은 2009년에 나왔다. 나미야 잡화점이 나오기 정확히 3년 전이다. '패러독스 13'은 일단 SF 다. '패러독스 13'은 새로이 나타난 블랙홀의 영향으로 13초간 지구 전체의 시간대에 문제가 생긴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니까 13초란 순간이 모든 지구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왜냐햐면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까지나 그 시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수정되면 기억 또한 수정되어 바뀌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혹 이것이 이해 안되신다면 필립 K 딕의 '유빅'을 읽어보실 것을 추천드린다. 거기 나오는 능력자들 중 하나는 임의적으로 과거의 시간을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수정을 당해도 누구도 자신의 과거가 수정되었는지 모른다. 바로 몇 초전만 해도 전혀 다른 현재를 살고 있었는데도 완전히 달라진 현재를 진짜 자신의 현재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패러독스 13'의 13초 실종의 효과는 이런 것이다. 아무튼 결국 그 순간이 지구에 도래한다. 그런데 정작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 했던 과학자들의 말과는 달리 지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오직 몇 몇 만이 텅 빈 지구에 남아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그들조차 미래가 별로 순탄치 않다. 지구가 마치 격노하는 것처럼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지진, 쓰나미가 바통 터치를 하듯 그들에게로 밀려든다. 폐허와 절망만이 그들에게 남겨진 모든 것이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패러독스 13'은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는 하필이면 그들만 살아남게 된 진짜 이유도 꽤나 충격적이다. 읽어보시면 왜 굳이 이 작품을 인용해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말하려 하는지 아실 것이다. 그건 두 작품의 분위기가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패러독스 13'이 그림자라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두고 말한다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갈릴레이 교수라면 '패러독스 13'은 '용의자 X'다. 그런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일단은 여기서도 기본적으로 시간의 교묘한 뒤틀림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한 가지 작품이 더 존재한다. 그것은 2010년에 나온 '플래티너 데이터'다. 흥미로운 것은 앞의 두 작품이 모두 다크한 버전이라는 것이다. 밝고 희망찬 버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밖에는 없다. 불과 1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까닭은 무얼까? 133편이나 되느 리뷰들 중에서 그저 그런 한 편의 리뷰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일부러 이런 계보학적 질문을 해 본다.

 

 의문은 하나 더 있다. 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필이면 오일 쇼크가 일어났을 때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 나미야 잡화점은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하나는 숨어든 세 명의 청년이 살고 있는 현대의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우유 통에 상담용 편지를 넣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바로 그 시간이 지금으로 부터 30년 전, 오일쇼크로 한창 위기 담론이 떠돌던 일본인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80년대의 버블이 있기 바로 전 위기의 일본을 그린다. 왜 그럴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녹아있는 희망과 긍정의 메세지를 기억하면 여기의 답은 얼추 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그 때의 일본이 현재의 일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은 그 때만큼이나 위기다. 새삼 쓰나미와 지진 그리고 원전 사태로 정의내려지는 2011년의 3. 11을 거론할 것도 없다. 지금도 여전히 엔저를 고수해야 할만큼 일본은 그 자신있었던 경제에서조차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오일 쇼크 이후에 일본은 눈부신 80년대의 성장이 있었다. 모두들 그 때가 일본의 가장 전성기라고 이야기들 한다. 그러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통해서 무얼 주려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잘 견디면 오일 쇼크 후의 호황기처럼 다시금 좋은 시절이 찾아올 것이다'라는 메세지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장에 세 명의 청년들이 하필이면 호황기의 일본을 예언하는 편지를 쓰는 것도 바로 그 과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말해 그 때 히가시노 게이고가 등장인물의 손을 빌려 편지를 쓰면서 상정했던 수신인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일본인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오일 쇼크 때 모두들 먹거리를 사재기 할 정도로 이제 일본은 끝났다라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가장 눈부신 전성기가 온 것처럼 바로 그 때를 떠올리며 희망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가 전하고픈 진심은 마지막에 나오는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글 진심으로 기원합니다.(P. 447)

 

 문제는 정작 이 편지의 수신인이 30년 뒤의, 바로 오늘의 일본을 살고 있는 세 청년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30년 전의 목소리다. 오일 쇼크로 인해 위기에 빠져 있던 그 때의 일본으로 부터 온 목소리인 것이다. 똑같은 위기요 절망의 상황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의 목소리. 그래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같은 위기와 절망에 빠진 현재의 세대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전하고 있다. 이 이상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려 하는 것이 어떻게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까?

 

 이는 이러한 경향의 시작이 되는 '패러독스 13'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 때도 완전 폐허였고 생존이 절망적이 상황이었다. 그 때 생존자들은 어떻게 했던가? 나미야 잡화점 처럼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었던가? 아니었다. 생존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아내가 머리를 다쳐 살아날 가망이 없자 그의 남편은 기꺼이 안락사를 시킨다. 그러면서 억지로 도움을 줘서 일으키기 보다는 그냥 내버려 둬서 운명에 맡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한다. 비정함이 하나의 원칙이었던 게 '패러독스 13'이었다. 이는 '나미야 잡화점'이 간직한 우주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엔 아무래도 현실 사회의 영향이 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재미있는 건 요이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도 그렇고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그렇고 이상하게도 작가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소설에서 이렇게 작가가 주고자 하는 것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경우가 또 있었던가 싶다. 좀 더 살펴봐야 제대로 말 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이건 최근에 들어와서 생겨난 경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요런 부분이 좀 흥미롭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작품보다 더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이 부분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133편에 또 한 편의 리뷰를 더하며 이 글을 여기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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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4번째군요, 어느 정도나 썼는지 그런 것도 찾아보다니...
이 이야기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한테도 힘을 주지 않나 싶어요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오늘 들었던 라디오 방송에서 이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어요
패러독스 13에서도 마지막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것은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희선

ICE-9 2013-03-12 18:30   좋아요 0 | URL
하하,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느꼈나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리뷰를 찾아봤더니 그만큼이나 올라와 있어서 놀랐더랬습니다^ ^ 희선님도 패러독스 13 읽으셨군요. 근데 이 소설 사실 다른 컨덴츠로 옮기기가 좀 그랬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미 게임으로 나온 '절체절명도시'와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사실 그 게임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아무튼 나미야에 비해선 좀 모자람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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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제가 처음 만나보는 요이다 슈이치의 소설입니다. 예전 신간 추천할 때도 썼습니다만 전 이 소설을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간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소개글에 그렇게 나와 있었거든요. '현재 '약자'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거나 한 때 있었던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거대한 사회 권력, 기득권층에 맞선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뭔가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인 '추적자'와 비슷한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읽어보시면 분명히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의 사회 권력의 기득권층과 싸우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사실 초점이 좀 엇나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평성(헤이세이) 원숭이와 게의 교전도'입니다. 제 생각엔 제목에 이미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다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서 '평성'은 현재 일본에서 사용중인 연호를 말하고(예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중에 '평성 너구리 대작전'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의 '평성'이나 여기의 '평성'이나 의미는 같습니다.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죠.) 원숭이와 게의 싸움은 일본에 전래되는 유명한 동화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그 이야기는 해설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고 하는군요.

 

 어미 게를 속이고 죽인 교활한 원숭이에게 새끼 게들이 앙갚음 하는 내용의 전래동화다.(p. 548)

 

 아마도 여기서 원숭이 를 거대한 사회 권력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래동화만 놓고 봐도 그렇죠. 이건 마르크스로 치면 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니까요. 원숭이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요이다 슈이치는 원숭이를 그걸로 상정하고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 소설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힘있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떤 풍경들은 더러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 무작정 정거장에 내리게도 하지요. 그런 정도의 풍경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하나의 계기로 작용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의 소개글은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것이죠. 만일 이 이야기를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로 심심한 작품이 되어 버립니다. 사회 권력층이 나타나고 그 도구로써 야쿠자들이 움직이는데도 정작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이다 슈이치는 그 대목을 서술할 때 조차 평이할 뿐이고 등장 인물들 또한 이렇다 할 불안감이나 위기감을 보여주지 않아요. 자기 자신이 당사자인데도 마치 영상 속에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인양 초연함이 있습니다.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말이죠. 더구나 해결 장면에 가서는 더 가관입니다. 정말 흐지부지 모든 갈등들이 정리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구나 싶더군요. 만일 갈등 초반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감을 부여했다면 결말 부분이 정말 허탈했을테니까요. 소설에서 유일하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부분은 조용히 피어올랐다 조용히 사그라지는 모기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소개글 식으로 이 소설을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적 강자와의 한판 승부로 몰고가려 했다면 김어준 식으로 '실패!'라는 것이죠.

 

 해서, 원숭이는 분명 다른 것을 뜻할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쓰고 상도 여러 개 받은 요이다 슈이치 정도 되는 작가가 초보자가 봐도 한 눈에 문제가 드러나는 허술한 설정을 할 리는 만무하니까요. 아마도 그 원숭이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했느냐가 밝혀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요이다 슈이치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제목처럼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나옵니다. 소설의 시작은 정말 '새끼 게'처럼 작고 좁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도쿄의 가부키초 술집 계단과 간판 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에서 아기를 안고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마지마 미쓰키의 모습에서 시작하니까요. 그녀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 벌써 오래도록 연락이 끊긴 돈 벌러 고향을 떠난 남편을 찾아 도쿄로 상경한 참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더 이상 어디 갈 데도 없어서 거기 쭈그려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보여지듯이 그녀는 작디 작은 존재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런 문장을 첨언하여 그녀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지 강조해서 보여주지요.

 

 설마하니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모르는지 그럭저럭 그 자리에서 20분 가까이 쉬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미쓰키를 알아채지 못했다.(p. 7 ~ 8)

 

 그렇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너무도 작고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보여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요이다 슈이치가 바라보는 '새끼 게' 의 전형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했던 '새끼 게'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존재가 되는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마지마 미쓰키만 봐도 그렇습니다. 후에 도쿄에 정착하게 된 미쓰키는 자신이 상경한 사연이 알려져서 방송까지 타게되고 결국 유명인이 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모두의 시선 속에 당당히 드러나는 존재가 된 것이죠. 이는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던 미쓰키를 처음 발견한 준페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BAR'에서 가게에서 통용되는 한국말을 몰라서 사실은 거의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준페이는 후일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출마하여 일본 정치의 희망으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존재감이 한없이 엷었던 존재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한 마디로 성장 소설인 것이죠. 그러면 원숭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히 어떤 계층 이나 세력 같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여기의 원숭이는 등장인물 각자마자 마주하고 있었던 상황 혹은 한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고 낙담과 절망 속에 늘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그런 처지나 조건들 말이죠. 결국 원숭이란 등장인물 각자가 '나는 안 돼'라고 느끼게 만드는, 그 너머의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대한 벽과도 같은 한계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소설이 제목에서 뜻하듯 서로 싸우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현실에서 느껴지는 장벽을 너무 크게 보고 구차한 변명이나 해대며 포기하기 바쁜 자신과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아마도 그래서 전 요이다 슈이치는 굳이 '교전도'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 소설을 일종의 그림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 그림이란 예를 들자면 브뤼겔의 그림 같은 것이죠.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저마다 다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브뤼겔의 그림 말이죠. 그렇게 이 소설엔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동일한 비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해 나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말하자면 이 소설은 서로가 모두 다른 빛을 내는 이채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그림과 같습니다. '교전도'는 어쩌면 같은 '새끼 게'로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입을 침묵시키려는 요이다 슈이치의 의도입니다. 이토록이나 많은 사례들이 있다면 변명의 여지 또한 줄어들테니까요. 그러니 보다 분명하게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하려는 것이 드러나는 것 같네요. 이 소설은 정말로 뭔가 위안이 되려하고 힘이 되려 합니다. 그냥 사회를 스케치하듯 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려 하는 책입니다. 솔직히 읽다보면 여기에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연대가 좀 과잉되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 유행중인 '치유계'를 표방하고 있지도 않은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다 착하고 성실하게 나오니까요. 미쓰키의 무책임한 남편인 도모키까지 그렇습니다. 소설이 잔잔한 물처럼 긴장감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욕망을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꼭 이루겠다는 강렬함이 없습니다. 그 보다는 설사 협박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이득 보다 먼저 남의 상황을 헤아리고 배려합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니 심심하고 잔잔할 수 밖에요.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 이러하다 보니 과잉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과잉이 나타나는 건 작가가 무리를 해서 입니다. 꼭 하고 싶은 뭔가가 있기에 무리하는 것이죠. 저는 그게 주제 같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정신이죠. 새끼 게들이 서로 협력해서 원숭이에게 복수한다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무엇보다 같이 있는 이들에게 마음 문을 열라는 것을 촉구하는 소설입니다. 미쓰키와 준페이가 일하는 주점의 마담 마키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내 곁에 누가 있는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니까요. 주어진 처지와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도 준페이와 사노 요코의 관계처럼 다 그러한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입니다. 그렇게 이 소설은 나 아닌 타인의 소중함과 왜 그들을 관용하고 연대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주지시키려고 요이다 슈이치는 다소의 과잉마저 무릎 쓴 것이죠. 그래서 아마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학적 성취 보다는 요이다 슈이치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주려는 것이 너무 분명한 나머지 계몽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현실이 너무도 저를 무력하게 만드는지라 이 소설에서라도 위안을 받고 싶어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이다 슈이치의 전작도 궁금하더군요. 찾아보니 '요노스케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일단 그 소설부터 읽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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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디바 2013-02-2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혹평한 소설인데 이렇게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점에 놀랐어요. 헤르메스님의 혜안은, 작가의 다른 의도를 읽어내시는군요. 매우 흥미롭게 봤습니다. 원숭이와 게가 아예 따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묘파한 것이다라는 분석이 인상깊네요. 저도 사실 이 작가를 처음 접해서 호감을 갖기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의 따뜻한 시선을 저도 독서에 참고해보려고 합니다. : )

ICE-9 2013-03-12 18:24   좋아요 0 | URL
이런, 여의님 이제야 댓글을 달아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하네요. 처음으로, 거기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해 주셨는데 말이죠. 요즘은 너무 바빠서 책 읽고 글 쓰고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댓글 확인을 일일이 못하게 되네요. 따스한 마으으로 작품을 대한다고 해주신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해서 그 말씀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네요.^ ^

희선 2013-02-2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 소개글은 좀 지나치게 쓰지 않나 싶습니다
권력층과 싸우지 않더라도,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벽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가는 우리나라를 좋아하나 봅니다, 소설에 우리나라 사람 이름이 자주 나와요, 요노스케 이야기에도 나온답니다, 대학을 갓 들어간 요노스케가 자라가는 이야기거든요
이 작가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고, 그저 요노스케 이야기는 읽어서...^^


희선

ICE-9 2013-03-12 18:27   좋아요 0 | URL
과장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번 건 좀 핀트가 어긋나서 말이죠. 아마 소개글에 혹해서 읽었다면 좀 평가가 그리 좋지못했을 것 같아요. 아, 역시 그랬군요. 이 작가가 우리나라를 좋아하고 있었군요. 희선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욱 요노스케 이야기가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이미 요노스케를 읽어보신 희선님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