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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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초, 우리들에게도 '큐어'나 '회로' 혹은 '강령' 같은 영화들로 잘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작년, 그러니까 2011년 일본에게 닥쳐온 미증유의 비극인 3. 11 사태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이제 일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기요시는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에서 지금 일본의 시대 정신 같은 것을 본 것이죠. 쉽게 말해 그와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일본인들은 이제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다른 것으로 대신 갚는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속죄의 강조는 기요시에게 있어 이제 관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행동의 시대가 와야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속죄를 강조하고 있음은 드라마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이 드라마의 다섯 편은 일어난 하나의 비극(이 비극이 바로 3. 11을 상징한다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에 그 날 같이 있었으나 그 비극을 막지 못했던 초등학교 친구 네 명과 그 네명에게 속죄를 강요하지만 정작 가장 큰 원인의 제공자이기도 한 어머니가 돌아가면서 하는 속죄의 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기요시는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된다.(드라마에서 비극은 친구 네 명이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던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행동이 필요하다. 참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의 책임이다.(결국 이 드라마의 인물들의 행위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죠.)'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와 미나코 가나에의 만남은 필연적이라 생각합니다. 미나코 가나에야 말로 기요시가 말하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나코 가나에가 기요시와 닮은 입장에 선다는 것은 최근에 방영된 그녀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드라마 '고교입시'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교 입시가 치뤄지는 이틀 동안의 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의 진짜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그것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잘못에 대하여 속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잘못을 아는 자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알면 아는만큼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사회가 양산하고 있는 비극을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서 눈 감지 않고 그것을 끊기 위해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까지 감수하고서 말이죠. 이 드라마를 보면 가나에의 노선이 또 많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가나에에게 있어서 비극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왕복서간'까지 미나토 가나에에게 있어서 치유되어야 할 비극은 늘 과거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행위 역시 한계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속죄란 결국 관련된 당사자에게 남겨진 상처의 치유 외에는 남는 게 없는 게 아닐까요? '왕복서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야행관람차'를 기점으로 비로소 타자의 처지에 서서 그의 입장을 배려해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관념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왕복서간'이 결국은 서간체로 쓰여졌다는 것이 잘 보여줍니다. 어쨌거나 거기엔 마음 속의 헤아림만 있을 뿐 행위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왕복서간'까지는 그러한 관념 상의 자리바꿈 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릅니다. 아시나요? '왕복서간'은 2010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2011년을 기점으로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오고 원전이 녹아내리는, 그야말로 한 치 앞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는 광막한 어둠이 닥쳐왔으니까요.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더구나 그 어둠이 여전히 현재진행형 중이라면 더더욱 남게 되는 것은 초조함 뿐입니다. 지금도 바로 곁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마음으로 차분히 음미할 시간적 여유 따위가 없는 겁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바로 그걸 보여줍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하는 속죄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죠. 그녀들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로 곁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잘못을 바로 잡는 것으로 속죄를 합니다. 숙고의 시간도 없고, 주저의 시간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은 행동을 부르는 결단 뿐입니다.

 

  그래서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기요시가 암묵적으로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뭔가 변화를 위해 지금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초조함이 속죄의 형식을 요청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속죄는 당위이니까요. 자신이 지은 죄를 갚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엔 어떠한 변명이나 회피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행위로 갚을 뿐입니다. 칸트가 말한 절대적 명령, 그것이 바로 속죄의 근본입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랬습니다. 살해당한 소녀의 어머니가 네 명의 친구들에게 속죄하라고 말했을 때 그 네 명 중 누구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작 시청자들의 눈엔 그러한 어머니의 주장이 한 없이 부당하게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기요시는 속죄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행동과 참여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경우'도 그렇습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앞에서 말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와 모든 것에서 일치합니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 하루미와 요코는 서로 같은 고아라서 더없이 가까워지게 된 사이입니다. 어느 날 하루미가 간직한 파란 리본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 요코는 지방 의원 선거로 인해 집에 혼자 있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해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늘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사랑이 간직된 파란 리본을 통해 들려주었던 하루미의 얘기를 한 권의 동화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게 우연찮게 출판되게 되고 큰 상까지 받아 요코는 유명해집니다. 요코는 하루미의 얘기를 허락받지도 않고 썼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하루미는 상관할 것 없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다 요코에게 그만 커다란 불행이 닥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되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유괴범이 요구해 오는 것이 돈이 아닙니다. 그건 속죄입니다. 유괴범은 요코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찾게 하고 그것을 만인 앞에 고백하라고 명령합니다. '경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그 것처럼 역시나 속죄가 나오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유괴된 고로 사건은 바로 속죄의 주체 요코의 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며 그렇게 급박하게 사건이 돌아가는지라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주저할 여유도 없게 됩니다. 유괴라는 것 역시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속죄와 같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드라마에서 속죄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따랐던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요코 역시도 팩스로 보내오는 유괴범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아마도 가나에가 '경우'에 '유괴'를 가져온 것도 바로 그러한 명령의 당위성, 숙명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경우'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바라보는 '속죄'와 똑같습니다. 스테판 에셀의 베스트셀러 제목을 살짝 표절하자면 '행위하라!'라는 칸트식 정언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설 '경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입니다. 관념의 영역 내에 머물러 있던 '왕복서간'에서 한 발 더 나갔으니까요. 물론 '고백'에서의 복수도 행위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윤리적 의미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점에서 '경우'의 행위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윤리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관계를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고백'의 행위는 타자의 입장에 서 있지도 않았고 그들의 처지를 배려하지도 않은, 오로지 자신만의 이기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경우'의 행위는 무엇보다 타자의 입장에 서 보았던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경유한 끝에 나온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인 것이죠. 이제 미나토 가나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바꾸려고 실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경우'는 그것을 보여줍니다. '행위와 참여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속죄가 원래 목표로 하는 진정한 치유 역시도 오로지 그것이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뒤이어 나온 드라마 '고교 입시'에서 여전히 그녀가 그 항로를 따라 비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자면 이번에 나온 미나코 가나에의 '경우'는 자신이 가까이서 직접 보고 겪었던 3. 11 에 대한 작가로서의 응답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가 거기에 대한 응답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런 그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관망이 아닌 실천적 참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가 되도록 '속죄'라는 형식까지 요청해가면서 말이죠. 비록 하나의 작품이 설득은 될 수 있어도 해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게 결국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제안이며 우리 사유의 끝이 아니라 촉발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는 그들 모두가 바로 가까이서 그 비극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이들의 제안을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불에 데어 본 자만이 그 아픔을 알며 그 아픔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더 귀 기울여 볼 생각입니다. 새롭게 이륙한 미나토 가나에의 비행기가 어떤 항로를 그리며 나아가는지 계속 지켜볼 작정입니다. 이들의 아픔이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우리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고 우리의 아픔이 될 수 있을 것임을 또한 알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제 자신만의 대답을 찾기 위해 대화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녀의 손짓에 기꺼이 화답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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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미나토 가나에가 걸어온 여정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2-08 14:12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
 
 
ICE-9 2013-02-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글을 참조해 주세요.

희선 2013-02-12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헤르메스 님이기에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써 온 소설이 어떻게 바뀌어 온 것인지 잡아내는 눈(마음)
작가는 자신이 쓴 것을 바로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기뻐할 겁니다

속죄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요


희선

ICE-9 2013-02-12 16:24   좋아요 0 | URL
와! 희선님 감사합니다.
제가 좀 미나토 가나에 빠라서 하나의 작품보다는 이렇게 흐름 속에서 읽고싶어지네요.(그리고 그래야만 가나에의 매력이 더욱 드러난다는 근거없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 쉽지 않기에 기요시든 가나에든 조건없이 해야하는 정언명령 식의 당위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그 정도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는 것이 중요한 그들의 진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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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1년에 나온 우타노 쇼고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지금까지 보여준 우타노 쇼고 월드에 있어서는 다소 UFO와도 같은 작품이다. 라고 말하면 의미가 오리무중해질테니 더욱 알송달송하기 짝이 없는 우타노 쇼고 월드라는 말에 대해서 먼저 밝혀보자. 개인적으로 우타노 쇼고 작품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내 관심의 더듬이가 향하는 쪽은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 중에서도 꽤나 호불호가 갈리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나 '여왕님과 나' 같은 작품들. 물론 여기엔 그에게 또 한 번에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안겨 준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도 포함된다.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작품들이야말로 여타의 다른 일본 미스터리 작가들과 구별되는 우타노 쇼고만의 독보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우타노 쇼고의 독특성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을 바라보는 일종의 필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단적으로 현재 우타노 쇼고가 밀어붙이고 있는 작품들에 내재된 세계관이 그야말로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잘 보여준 일본 특유의 포스트 모던적 특성을 마치 복제라도 하듯 충실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밀실살인게임' 은 그러한 경향이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밀실살인게임'과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을 같이 놓고 보면 우타노 쇼고가 현재 구축하고 있는 '월드'의 '코어'가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즈마 히로키의 그 책은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오타쿠적 소비 방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히로키는 그 방식에 현재 일본의 포스트모던한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다. 정보의 생산 보다는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에 얼마나 많이 저장할 수 있는가가 더 의미있는 시대. 현실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 보다 오히려 가상 세계의 규칙과 가치가 더 우월한 시대(이를테면 미소녀 게임에 등장하는 히로인과 얼마든지 실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리하여 더이상 전통 근대의 사유 방식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소비를 히로키는 과감히 '포스트 모던'이라 불렀고 그것은 또한 일본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에도 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여기에 대해서는 미야베 미유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앞으로 일본은 날로 보수화되어 갈 것이라 전망했다. 그리고 그 전망대로 우리는 일본 보수의 끝판왕을 현재 보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말한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은 히로키가 말한 특성들을 마치 아주 푹 고아놓은 사골 국물처럼 잘 우려내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일본 포스트모던에 있어 총론이라면 우타노 쇼고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응용한 각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우타노 쇼고 앞에 흔히 잘 붙는 수식어는 '반전'이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벗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가 보여준 막강한 반전 때문에 '유주얼 서스펙트' 이후에 브라이언 싱어가 그랬듯이, '식스 센스' 이후에 나이트 샤말란이 그랬듯이 '반전'이란 말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독자의 지갑을 열게 하는데 더욱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장르 소설가이다 보니 스스로도 자신에게 붙어버린 라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듯이 아예 그 반전을 스스로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다.

 

  그러한 유희로서의 반전을 보여준 첫 작품이 내 생각엔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 아닐까 싶다.(일본 원전을 읽을 수 없는 관계로 번역판만 기준으로 한 생각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한 페이지가 멀다 하고 반전을 선사한다. 혼자만의 상상인가 싶으면 현실이고 현실인가 싶으면 상상인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리얼한 것'으로 부터 점점 멀어져 오로지 유희만이 존재하는 게임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목인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은 그야말로 적합해 보인다.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세상의 끝'이자 현실의 원칙 따위 우습게 무시하는 '게임'으로서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은 일본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1988년에서 1989년까지 모두 네 명의 여자 아이들을 살해한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건 을 바탕으로 쓴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범죄 때문에 이것이 히로키가 말하는 오타쿠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적 구현의 첫 시작이라는 점이 더욱 확증된다. 바로 그 미야자키 쓰토무는 무려 5천장이 넘는 호러 비디오를 소장한 이른바 호러 오타쿠로 그 호러 비디오 때문에 그런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거센 여론이 일어나 오타쿠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타노 쇼고는 반전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 혹은 집착이 게임적 유희와 같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또한 오타쿠적 문화 소비와 연결된다고 보아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시작이었던 듯, 그는 그것을 더욱 밀어붙인다. '세상의 끝'이 던져버린 것은 오로지 현실과 가상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규칙이었으나 '여왕님과 나'에서 던져버린 것은 아예 누구나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 세계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물론 일본 사회에서 실제 일어난 충격적인 범죄가 영향을 미쳤다. 바로 2004년에 일어난 나가사키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소녀가 같은 반 친구인 여학생을 커터칼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범인이 초등학생 여자아이라는 점과 범죄 장소가 초등학교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로 어른들이 지금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인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으로 움직이는 낯선 존재.  그렇게 우타노 쇼고는 그 사건 역시 그 전 사건과 일련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세대라는 점까지 반영하기 위하여 '여왕님과 나'를 더욱 극한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밀실살인게임'은 이런 경향 속에서 이해해야만 왜 우타노 쇼고가 그렇게 썼는지, 그게 단지 팔릴만한 작품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게 이해된다.

 

 아무튼 쇼고는 그렇게 달려왔다. 그런 식으로 스타워즈에서 제국군이 '데쓰 스타'를 만들듯이 자신만의 월드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2011년. 이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이 나왔다.

 

 그런데 다르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보여 준 우타노 쇼고 월드와 노선을 같이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유희가 없다. 작품은 '벗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의 편집자와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쓴 것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그것이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은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의 자기장 안에 있다. 무모하게 말한다면 그 작품을 일종의 리메이크라고도 할 만 하다. 주인공의 상황, 성격 그리고 전개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마치 그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 주었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 새로이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래, 이왕에 호기를 부려 본 거 나도 '여왕님과 나'를 쓸 때의 우타노 쇼고처럼 끝까지 가 보자. 그래서 단정지어 말하자. 이것은 결별이라고. 뒤이어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지금까지 보여준 우타노 쇼고 월드로 부터의 명백한 이탈이라고 말이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 무수한 반전들로 채워졌듯이 이 작품 또한 무수한 반전들로 채워진다. 후반에 커다란 반전들이 나온다고 해서 이 작품이 오로지 그것을 위해 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일종의 크레셴도에 불과할 뿐 반전들은 작품 전반에 걸쳐 내내 등장한다. 그건 또 하나의 주요 배역이라 할만한 스에나가 마스미의 용모(주인공 히라타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중년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20대였다.)에도 있고 동료직원들이 그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히라타가 마스미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원조교제 같은 것이 아니냐고 놀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 히라타가 여고생과 데이트를 하면서 이것저것 원하는 대로 사주는 장면이 나와 '뭐야 히라타 그런 사람이었어' 하는 순간 알고보니 아내의 여동생 딸로 밝혀지는 순간에도 있다. 이런 식의 보이는 것과 드러나는 반전의 진실들이 봄날 대나무 밭에 이리저리 돋아나는 죽순들처럼 곳곳에 산개해 있는데 이로써 느끼게 되는 건 여기의 반전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희로써의 반전이 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매개하는 것으로써의 반전. 다시 말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명한 첫 문장처럼 삶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고 깊은 속내를 감춰두고 있다는 것을 우타노 쇼고는 반전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서 우타노 쇼고는 유희에 천착하느라 방기해 버렸던 삶을 다시금 껴안으려 하고 있었다. 환상이 아닌 현실, 도피가 아닌 책임. 그것이 다시금 그 옛날의 터닝 포인트로 돌아간 우타노 쇼고가 다시금 보여주려는 핵심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타노 쇼고는 작품에서 받게 되는 인상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현실과 연동하는 작가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도 역시 현실로 부터 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이 책의 발간 연도를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일본 국민들이 과연 그 해를 잊을 수 있을까? 미국인들이 9.11 때문에 절대로 2001년을 잊을 수 없듯이 일본 국민 역시 2011년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 해 일본 역시도 9.11에 맞먹는 비극을 겪었으니까 말이다. 미국에게 9. 11이 있다면 일본에는 3. 11이 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이 일으킨 비극의 날이. 똑같이 11일에 일어났다는 것이 왠지 모골마저 송연해지는 이 비극 앞에서 향후 미국 문학이 위안과 연대로 나아갔듯이 똑같은 아픔을 가져버린 일본 문학도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타노 쇼고 역시도 그 3.11 때문에 이같은 변화가 생겨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3. 11 이후의 일본 문학이 9. 11 이후의 미국 문학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가고 있음은 이전에도 여러 징후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나토 가나에의 변화가 그랬고 국내에 발간된 비교적 최근의 일본 문학들에서도 그런 특성은 현저하게 드러났었다. 무엇보다 2012년에 방영된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한 구로자와 기요시 감독의 동명 5부작 드라마는 3. 11 이후의 일본 문학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자성에 대한 촉구였고 삶이 타자와 결부되어 있음에 더욱 눈과 귀를 기울이려는 흐름이었다. 거기에 지극히 현실과 동떨어진, 오히려 현실 보다 더 우위의 가상 게임에 천착하던 우타노 쇼고 역시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웠다. 이것이 과연 '여왕님과 나' 그리고 '밀실살인게임'으로 이어졌듯이 또 하나의 연속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을지 아니면 그냥 한 번 던져본 변화구에 불과할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현재의 일본 문학이 보여주는 자성의 기운이 갑자기 뒤덮게 된 우익의 장막 아래서 어떻게 그 생명을 이어갈지 궁금한 것과 똑같이 우타노 쇼고가 보여 줄 다음의 행보 역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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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

 

  '청춘의 증명'은 1976년에 나온 '인간의 증명'으로 시작된 이른바 '증명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다. 

 

 

 

 흔히들 마쓰모토 세이초와 이 작품의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양대 산맥으로 부르곤 하는데 그렇게 같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묶이지만 사실 이 둘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전제하고 하는 말이지만,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하여 되도록 거리를 두고 끝끝내 불편부당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그 대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자신의 견해마저 피력하는 등 작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참여자로서 행세하려 한다. 그렇게 관찰과 참여, 바로 이것이 세이초와 세이이치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세이초의 주인공들은 관찰하고 듣고 해석하는 행위가 주를 이루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주인공들은 생각 보다는 먼저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에 있어서는 명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비중이 크지만 모리무라 세이이치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도 범인을 찾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표면상 그런 역할을 맡는 형사 보다 그 범죄를 둘러싸고 얽혀있는 인간들의 애증 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리무라 세이이치에게 있어서 범죄란 수면 아래 잠자고 있었던 들끓는 인간들의 애증관계를 밖으로 노출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범죄란 거짓과 탐욕 그리고 비겁함을 숨기고 있었던 개인들의 내면과 그것들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던 사회의 숨겨진 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들은 일종의 '재판장'과도 같다. 나타난 범죄가 고발하는 피의자들이 서로 자신의 혐의 없음을 증명하고 변호하느라 들끓고 있는 재판장인 것이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제목에 '증명'이라고 쓴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범죄가 '당신이 과연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고발하면 피의자는 거기에 대해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한다. 이것이 '인간의 증명'이다. 이번엔 범죄가 '당신에게 과연 청춘은 있었는가?' 고발한다. 거기에 대해 피의자가  청춘에 대해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의 '청춘의 증명'인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증명3부작은 그렇게 범죄가 부정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증명에도 어디까지나 조건은 있다. 진정한 증명이 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전작 '인간의 증명'에서 제목의 이 말은 딱 한 부분에만 등장하는데 그 때가 바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행동으로 증명했던 부분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세이초의 소설들이 다소 건조하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뜨겁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자리 선점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다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더 나아가서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마저도 영향을 미치는데,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어디까지나 객관적 관찰자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마츠모토 세이초는 사회가 만들어버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작품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왠지 동시대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남의 일처럼 내버려둘 수 없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행동가적인 면모를 간직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먼저 사회 이곳저곳에 양산된 여러 개인들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그 아픔과 비극의 태피스트리를 통하여 거꾸로 사회의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사회를 비판하는 형식에 있어 마츠모토 세이초가 연역적이라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귀납적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마도 이런 차이,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 참여자로서 그 고통과 대안의 형성마저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의지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에 대한 마쓰모토 세이초와 구별되는 이러한 차별적 접근이 같은 사회파이지만 선배인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와는 또 다른 산맥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게 아닐까 싶다.

 

 

 

 

 

 2.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네 개의 청춘...

 

 

 이러한 모리우라 세이이치의 독특성이 가장 잘 드러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1977년에 나온 '청춘의 증명'이다. 파노라마식으로 인물을 배열하는 것도 더욱 확장되었고 2차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 같은 국민들마저 파멸로 이끌어 갔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 역시 더욱 통렬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그 어떤 작품보다 전면적으로 드러난 이 작품에서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하필이면 '청춘'이란 주제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청춘'이 상징하는 미래 역시 어떻게 물들여 버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볼 때 여기엔 모두 네 개의 청춘이 나온다.

 

 

 

 전범국가로써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란 측면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먼저 일본의 패망이 더욱 짙어지는 시기에 청춘을 보낸 '야부키 데이스케'. 다음으로,  군부가 이기적 욕망으로 일으킨 전쟁에 그저 가해질 위해가 두려워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편승해 버렸고 내내 자신 또한 그 가담자 라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사오카 미치타로' 그리고 전범 국가의 기억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사오카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면서 더욱 커다란 이기적 욕망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망각으로 더 많은 과오를 쌓아가는 청춘을 대변하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의 아들, '가사오카 도키야'. 마지막으로 패전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태의 악습과 부조리를 답습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 대해 냉소하지만 결국 행동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냉소를 표현할 뿐인 청춘을 대변하는 야부키 데이스케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 이렇게 넷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굳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청춘을 이렇게 병렬적으로 놓고 보여주는 것은 전쟁에 뛰어들었던 유일한 청춘인 '야부키 데이스케'가 묘사했던 일본과 그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그는 소설에서 유일한 '십대'이기도 하다.)가 살고 있는 일본이 과연 다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는 소설에서 오로지 이 부자(父子)간의 대화만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입증되는데 자꾸만 일탈로 엇나가는 야부키 에이지에게 아버지 야부키 데이스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전쟁에 끌려 갔었다. 전쟁에 끌려가면 살아 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고작 이십년 밖에 되지 않는 인생이었어. 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았어. 죽음만을 짊어진 청춘이었다."(p.231)

 

 그 전에 야부키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만큼 고민이 많겠지. 우리 세대는 그런 고민은 전혀 없었잖. 오래 살아봐야 스무 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스무 살이 되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했지. 그런 사고가 머리에 박혀 있었으니 고민할 틈도 방황할 여유도 없었지.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생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분명했어. 제 인생인데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지."(p.223)

 

 이제 막 피어나려는 청춘에게 죽음만을 짊어주었던 전범국가로서의 일본. 하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청춘들이 믿었던 대로 거창한 이념에 있지 않았다. 결국엔 오로지 군부 자신들만의 권력욕과 탐욕에 있었음이 야부키의 전우(戰友)였던 아키토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몸 바칠 수 있어. 하지만 요즘 특공대(이 특공대가 바로 가미가제 특공대다. 야부키도 바로 이 특공대 소속이었다.)는 군부의 위안거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우리는 인간으로 죽는 게 아니라 일개 병기로서 던져져 죽는거야(p.258)"라고 곧잘 말했던 아키토가 자살 공격에 나섰지만 내내 기체 결함을 이유로 돌아오자 이를 의심했던 군부는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그리했던 것임을 밝혀내고 아키토의 약혼자 스미에를 조사랍시고 불러내어 자신들이 보는데서 비인격적으로 발가벗겨서 결국 그 성적 수치심으로 자살하게 만든다. 그리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키토가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로 복수를 위해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해 오자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저격 명령을 내려 버린다. 이렇게 스미에에 대한 군부의 저열한 인면수심적 태도와 아키토의 저격 명령에서 나타난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고 보자는 치졸한 모습을 통해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성격을 단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어리석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목적을 위해 갓 스물의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본을 또한 규탄하는 것이다.

 

 

 3. 통렬한 속죄의 요구...

 

 하지만 모리우라 세이이치에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건 과거에 그토록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통렬한 자기 비판과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전쟁이 아로새긴 아픔을 그토록 절절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그저 한국 전쟁이라는 경제적 특수가 가져다 준 과실에만 취한 나머지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고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소설의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그러한 무비판적 편승이 어떤 미래가 가져왔는가? 그것을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특히 야부키 에이지의 눈으로 드러낸다.

 

 일류의 덧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동안 계속될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낙오된 것이다. 에이지는 부모님의 기부금으로 도내의 이류 사립 고등학교에 2차 모집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뒤쳐진 것을 만회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친구들은 낙제생으로 '어차피 우리는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어딜 가도 성적순으로 처음부터 선을 그어놓으니 열등감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교사들도 낙제생들을 격려해 새 출발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열정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학원이나 과외 아르바이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p.236 ~ 137)

 

  반성없는 과거가 가져온 것은 이런 것이었다.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던 그 때의 선은 여전히 남아 이제는 학력이란 이름으로 청춘들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 때의 청춘들이 신체적으로 죽었다면 지금의 청춘들은 낙제생이란 라벨이 붙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있었다. 그 때 비국민 스미에를 바라보았던 시선 그대로 낙제생으로 라벨 붙여진 오늘의 청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국민이 아닌 자들이 그대로 사물이었듯이 오늘의 청춘들 또한 한 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오늘의 일본에서 그대로 겹쳐지는 황당한 이상에 집착해 파멸로 향해가던 그 때의 일본을 본다. 그리고 그 오만한 독선과 잘못된 망상 아래 점점 주검이 되어가는 청춘들을 양산했던 그 때와 지금의 일본이 같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과거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속죄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바로 이러한 속죄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이 '청춘의 증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한 때의 잘못을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오카 미치타로에 대한 '비겁하다'는 그의 연인 아사코의 통렬한 비판은 사실 제대로 된 속죄없이 전범국가임을 오로지 망각하려고만 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아사코조차 나중에 보여주는 모습처럼 정작 비겁하다고 비판하면서도 말로만 그리할 뿐 아무런 실제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과거의 과오를 반복할 뿐이다. 참다운 속죄는 어디까지나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에게 바로 그런 속죄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사오카에게 평생 속죄의 죄책을 짊어지도록 만드는 원흉인 구리야마는 결국 일본이 그런 정도의 속죄를 하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구리야마는 야부키의 전우였던 아키토의 스미에를 자살로 몰고간 장본인기도 하다. 야부키에게 비극을 주었던 구리야마가 다시금 가사오카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이 구리야마는 전범이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같은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일깨우는 존재가 되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구걸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또 다른 한 청춘의 삶마저 일그러지게 만든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병원균과도 같다. 곳곳마다 출몰하여 타인의 인생에 짙은 어둠의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비극은 내내 반복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그렇게 구리야마는 왜 속죄가 일본 스스로에게도 구원이 되는지 거꾸로 잘 보여주는 존재다. 그런 존재는 구리야마뿐만이 아니다. 가사오카의 처 도키코나 아사야마 유미코의 남편 기다 준이치도 과거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와 망각에의 강요가 결국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될 지 잘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사실 소설 '청춘의 증명'에서 인물들이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오직 단 한 가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 그것이다. 

 

 

 이렇게 실천에 기반한 진실된 속죄를 그토록 요구하는 '청춘의 증명은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새로이 출범하는 아베 정권은 전범국가의 반성 속에서 규정되어진 자위대는 오로지 자국이 침범받았을 경우에만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전쟁 포기 조항인 일본 헌법 9조와 전범들의 위폐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부터 들고 나왔다. 이는 다시금 저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던 시대로 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단 한 번도 진정한 속죄가 없었던 일본이 그대로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음은 결국 행동이 수반된 속죄가 없이는 과거의 악업을 반복할 뿐이다라는 '청춘의 증명'이 보여준 그대로가 아닌가 말이다. 어두운 과거가 교훈을 배울만한 역사로 남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속죄가 이루어졌을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 일본이나 또 우리나라에서 보듯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이 현재에 다시금 생생히 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어둔 과거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 반복을 원하는 자들은 구리야마처럼 오로지 그 어둔 과거 속에서 이권을 얻을 수 있었던 자들 뿐이다. 그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청춘의 증명'을 통해 성찰적 무장(武裝)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덧붙여,

 

 '청춘의 증명'은 이번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때문에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여기 적어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중에 '비트'가 있다. 청춘만화의 대표작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인데 처음 읽었을 때 인상이 강하게 남아 아직도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남주인공이 여 주인공에게 경매 노예로 팔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아르바이트 비를 받아가며 해 주는 것인데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고 그 결과와 거기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억해 오는 것이었다. 남주인공이 그렇게 보고 온 것을 여주인공에게 들려주면 그녀는 마치 자기가 그걸 진짜 가서 본 것인양 자기의 입시 경쟁자들에게 말하여 별로 노력을 안한다는 인상을 주어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는데 별다른 표현 없이도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느끼게 해 주어 참 대단한 에피소드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춘의 증명'을 보니 그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소설 속 유일한 십대인 야뷰키 에이지가 같은 반의 수재를 위해 그와 똑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것이 77년이니 90년대에 나온 '비트'가 이를 표절한 것은 분명하다. 나름 아주 인상깊었던 장면이 이렇게 표절의 산물이라니 씁쓸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은 표절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더욱 그 뒷맛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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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무라의 증명 3부작의 인간과 야성은 사두었는데 읽지 못했어요. 어쩌면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안 읽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재밌을 것 같은데 한국 소설 읽기도 벅차요.
어, 그러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년엔 행복하고 힘찬 일만 가득하길. 헤르메스님 만나고 서로 글 읽고 댓글 달고 인사 나누고 교감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도 쭉... 들를게요~ 항상 반가이 맞이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ㅎㅎ

ICE-9 2013-01-05 23: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라면 정말 한국 소설 읽기만도 벅찰 것 같아요. 아참 나도 이번에 소이진님이 추천한 한강 읽고 있어요. 리뷰대회 도서이기도 해서 덥썩 들게 되더라구요^ ^
소이진님도 2013년 정말 뜻깊은 한 해가 되길 빌게요. 추구하는 문학에서도 원하는만큼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라겠습니다. 저의 VIP이신 소이진님. 저 역시도 올해 더 많은 교감을 위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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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가면(MASK)' 한번쯤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현대란 어찌보면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상사에게 야단 맞을 때는 아무리 억울해도 수긍한다는 가면을 써야 하고 시시하기만 한 상사의 농담에도 아주 웃겨 죽겠다는 가면을 써야 합니다. 이런 저런 가면을 하도 많이 쓰다 보니 어느 때는 진짜 내 얼굴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조직사회에서 버티려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납득시키지만 점점 진짜 나를 잃어간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씁쓸함은 달랠길이 없죠. 그리고 보니 프로이트도 여기에 대해 말했던 것 같군요. 사회는 개인의 솔직한 욕망들을 인정하지 않는데 ( 그렇게 되면 너무도 다양하고 한계가 없는 개인의 욕망 때문에 사회의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인들이 그 사회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욕망을 감추고 사회가 원하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 때 개인들이 쓰게되는 가면을 프로이트는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실은 사람의 자아라는 것 자체가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만큼 가면이란 우리에게 필수이며 스스로 다른 것으로 꾸미는 위장은 삶과 불가분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이렇게 보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그대로 우리 삶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호텔 이름이 사실은 '코르테시아도'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가면무도회를 뜻하는 '매스커레이드'라 이름 붙인 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아마도 제목 자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말하려는지 직접 드러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코르테시아도 호텔의 프런트 담당 나오미는 손님이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만은 최상의 만족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열혈 호텔리어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루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떨어지는데요, 그것은 최근 도쿄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하여 경찰들이 호텔 직원으로 위장 취업하게 되었다는 그것입니다. 형사로서의 자질은 어떨지 몰라도 호텔리어로서는 초심자라 어설프기 짝이 없어 손님들의 기분을 망치고 호텔의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 분명한 그들이 나오미로서는 여간 달갑지가 않은데요. 그래서 나오미는 결심합니다. '연쇄살인 수사야 어쨌든 아무리 형사라고 해도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은 호텔리어가 우선이야! 어엿한 호텔리어가 될 수 있도록 내가 가르치겠어!'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각오로!

 

  이 각오에 희생양이 된 사람이 바로 경시청의 닛타입니다. 사실은 그 역시 이 호텔 직원 위장 수사가 그리 달갑지가 않았어요. 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단서인 암호를 뛰어난 추리로 해독해낸 그이니만큼 호텔에서 언제올지 모르는 범인을 기다리기 보다는 바깥에서 단서들을 찾아내어 추리를 통해 숨어있는 범인을 추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죠. 하지만 명령은 명령. 본심을 숨기고 순종하는 가면을 쓸 수 밖에요. 그것만으로도 실은 괴로워 죽을 지경인데 이 나오미란 여자는 수사를 위해 임시로 쓴 것에 불과한 호텔리어라는 가면을 자신의 진짜 얼굴이라는 듯이 시종일관 가르치고 야단치고 성가시게 굴고 있으니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습니다. '제길! 나는 형사라구!' 몇 번이나 그렇게 어필해 보지만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 나오미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뿐!

 

 

  여기까지 이르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은 제목 자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대로 가면과 위장이 핵심이라는 것이 말이죠.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 바로 그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그것에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람들이 가면을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륜의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호텔을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가져온 까닭입니다. 만일 당신이 호텔의 프런트 직원이라면 불륜이라는 자신의 진짜 욕망은 숨기고 그저 잠만 자러온 것 처럼 가면을 쓰고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겠죠. 거짓말엔 개인차가 존재하니 능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투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그 가면을 쓴 자들 앞에서 당신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바로 그 질문을 위하여 호텔이라는 배경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예 소설에는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호텔에서 사용하는 교묘한 속임수마저 등장하기까지 하지요. 이것까지 고려하면 바로 이 질문이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문 자체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바탕해서 보자면 사람들이 타인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 가면 아래 깃들어 있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쓰고 있는 가면을 그게 진짜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각시탈에서 어떻게든 각시탈을 벗겨서 그 정체를 알고자 했던 일본 형사 슌지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각시탈의 정체가 누구이건간에 그 활약만으로 환영했던 조선 백성들은 후자라 할 수 있겠네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에서 이 두 가지 반응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하겠는데요. 그것은 정확히 그 두 반응이 소설 속에서 각각 하나의 인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오미와 닛타 입니다.

 

 소설 속에서 형사 닛타는 프런트에서 내보인 손님의 가면에 만족하지 않고 의심하고 의심해 어떻게든 그들이 쓴 가면을 벗기고 맨 얼굴을 드러내보이고자 합니다. 반면에 나오미는 설령 그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맨얼굴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썼다면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가면을 가면 그대로 존중해 줍니다. 그렇게 둘은 상반되면서 가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각각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닛타와 나오미 커플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들 입니다.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두 반응들을 모두 아우르면서 그 진정한 해답을 추구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닛타와 나오미는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탐정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게이고의 뛰어난 점은 주제에 천착하느라 미스터리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를 끝까지 몰입시키는 필력은 여전할지 몰라도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많이 퇴색되었다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만 이 '매스커레이드 호텔'만은 거기에 대해 제대로 된 카운터 펀치를 먹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쇄 살인 사건마다 남겨진 수수께끼의 숫자 암호를 푸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범행 수법의 교묘함이나 범인의 의외성이 가져다 주는 반전의 맛 또한 기가 막히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만으로써도 25주년이라는 기념작에 충분히 값할만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닛타와 나오미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추리의 특색 입니다. 거기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하필이면 커플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그 이유가 더욱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 못지 않게 그 반응들이 또 어떻게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울러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들 각자의 추리 스타일인 것이죠. 탐정으로 활약하는 닛타와 나오미는 가면에 대한 반응만큼이나 추리 스타일도 상극인데요. 비유하자면 닛타가 C S I 같다면 나오미는 브라운 신부와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닛타는 C S I 가 드러난 물리적 증거만을 추적하듯이 철저히 사건의 보여지는 부분에 천착합니다. 그에겐 행위의 결과만이 중요할 뿐 행위자가 처했던 상황이나 그 마음의 과정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죠. 반면 나오미는 닛타가 무시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큰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왜 하필이면 그가 그때 그렇게 해야 했을까가 나오미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닛타가 그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라면 나오미는 그 안에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이 가면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가면 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맨 얼굴을 보려고 했던 닛타는 그 반응대로라면 나오미처럼 행동했어야 했었습니다. 가면 그 자체를 본 모습만큼이나 존중했던 나오미는 그 반응대로라면 닛타처럼 행동했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그들은 완전히 거꾸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겠죠.

 

 '히가시노 게이고는 왜 이렇게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했을까?'

 

 바로 여기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녹아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해답은 그 반전된 태도에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 마디로 이것은 '가면에 대한 진실과 존중의 문제'입니다. 닛타는 진실을 나오미는 존중을 상징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는 진실을 최우선적 가치로 고려합니다. 존중도 진실을 기반으로 했을 때 정당하다 여깁니다. 그래서 흔히들 가면을 쓴다는 것에 가식적이라 경멸을 보내고  자신이 그것을 써야만 할 때는 씁쓸함을 느끼는 것이겠죠.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닛타를 통해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게 꼭 진실을 따져보는게 좋은 것인가?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저 존중만 해주면 안되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 반문을 위한 존재가 바로 나오미 입니다. 반문은 보통 해답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경우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도 마찬가지죠. 그의 해답은 다름아닌 나오미에게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닛타의 추리가 가로막혔을 때 마다 활로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나오미라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아니, 나오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죠. 닛타와 파트너로 나오는 나이 든 형사. 타인을 대하는 태도나 생각에서 여러모로 나오미와 유사한 그 형사 역시 닛타가 올바른 해결을 향해 가도록 때때로 출구를 열어줍니다. 보다 더 결정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짜 원인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답을 더욱 명확하게 말해줍니다.(이것은 중대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빼겠습니다. 아마도 읽으시면 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곧 알게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면에 대해 진실 보다는 존중에 우위를 두는 나오미를 그려 봤습니다.^ ^

 

 결정적으로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나오미를 통해 내어놓는 대안은 진실 보다는 먼저 존중에 더 우위를 두자는 것이죠. 그래서 나오미라는 캐릭터를 손님이라는 타인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열혈 호텔리어로 만든 것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무리할 것이 뻔한 타자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 응대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죠. 오히려 그러한 나오미의 모습이 너무나 바보같아서 독자인 우리들 속이 다 답답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결코 거기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형사로서의 신념이라면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않는 닛타 역시 굴복시킬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신념이 가장 강하게 맞부딪히는 장면이 있었죠. 바로 경찰들이 범죄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일어날 걸 알면서도 호텔 측에 숨긴 것을 나오미가 알게 될 때였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한다는 나오미의 신념과 드러난 진실만을 쫓는다는 닛타의 신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독자는 그 때 닛타의 편에 서서 나오미의 결단을 답답하게 여겼을지 몰라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지한 것은 결국 그녀의 그런 우직한 결단이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옳았기 때문이었죠. 닛타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호텔측의 상황 따위 상관하지 않았지만 나오미는 범인 체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던 그들의 심정을 먼저 헤아렸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태도를 양보 했습니다. 닛타는 보다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면 지금의 작은 희생 따위 치뤄도 좋다고 여겼지만 나오미는 아무리 작은 희생이라해도 그것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겼죠. 바로 이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닛타가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나치즘을 낳고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불러왔으며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종교를 이유로 한 테러리즘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극을 낳았던 '근대성(modernity)'이 지녔던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 시학'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츠베탕 토도로프는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그것을 두고 '정치적 메시아주의'라 불렀습니다. 그는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을 단적으로 '나 아니면 안된다' '보다 더 나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은 얼마든지 치뤄도 좋다'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닛타가 보여주는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토도로프는 그 책에서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얼마나 많은 비극을 가져왔는지 낱낱이 열거하고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오미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면 바로 나오미의 우선은 존중 부터 하고 진실은 그 다음에 추구하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코르테시아도 호텔에서 한바탕 치뤄진 가면무도회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던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미스터리적으로도 좋았지만 현대가 만들어내는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할만한 대안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밖에 없는 '가면'이라는 것을 통해서 제대로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더욱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 더구나 미스터리와 주제의 깊이를 동시에 추구할 경우 대부분 하나를 소홀히 하게 되거나 따로 놀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러지 않고 미스터리 자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 유기적으로 잘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를 보다 명확히 하고 깊이있게 만드는데 확실히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상에서 가면을 쓴다는 것에서 느꼈던 씁쓸함을 조금쯤은 지울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 별로 만족을 못 느꼈던 분들에게는 오랜만에 다시금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 외칠 수 있도록 할만한 작품인 것 같네요. 팬이 아니시더라도 미스터리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 어떻게 엮이어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니만큼 보다 깊이 있는 미스터리를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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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헤르메스님 그림 자주 그리시는 군요 ㅎㅎ
타블렛이라도 하나 장만하셨습니까? ㅎㅎㅎ

ICE-9 2012-09-09 22:25   좋아요 0 | URL
뭔가 새로운 변화를 줘 보려는 시도로 이해해줘요.^ ^
그런데 자꾸 그리다보니까 이거 꽤 재미가 붙는 걸요.^ ^

이진 2012-09-10 00:09   좋아요 0 | URL
그림에 소질(?)이 있으신걸요 ㅋㅋㅋㅋ
 
시귀 세트 - 전5권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레밍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실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만...

 

 

 

 노르웨이에 사는 들쥐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이 레밍에게는 기이한 습성이 하나있는데요 간혹 떼를 지어 절벽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자살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바로 이 레밍을 보고 지어진 얘기가 아니냐하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동물들이 왜 그렇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레밍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집단 자살을 보면서 숙명이 있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삼스레 노르웨이의 조그맣고 앙증맞은 동물 이야기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숙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간된(여기다 방점을 꼭 찍어두고 싶습니다. 이전에 판에 생략되었던 내용들이 모조리 복원된 것이 이번 판본의 가장 큰 의의이기 때문이죠.) 오노 후유미의 '시귀'는 바로 이 숙명이 중심 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로 빽빽히 둘러싸인 '소토바 마을'.

 그 폐쇄성 만큼이나 오래도록 이 마을은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요. 어느 날. 기이한 가족 하나가 이사를 오면서 마을은 차츰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일단 죽은 사람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이었죠. 그것도 비슷한 증세로. 그래서 마을의 유일한 의사. 토시오는 전염병이 아닐까 여겨 소꼽친구 절의 주지 세이신과  조사에 나섭니다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는 자는 나날이 급증. 이윽고 둘은 평범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세이신은 자주 가는 옛 교회의 터에서 스나코라는 정체 불명의 여자 아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던 중 결국 죽어서 이미 매장된 자들이 다시 돌아와 산자들을 습격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이 급속하게 불어난 죽음의 원인이 바로 그런 자들 때문임을 알게되고 토시오는 그들을 '시귀'라 이름 짓습니다. 시귀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제 이야기의 비중은 시귀에게도 할애되어 본격적으로 시귀대 인간의 구도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시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인간의 습격 없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을 위해 그들은 소토바 전체를 자기들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여왔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드러나 토시오를 리더를 하는 인간과 이제는 전면전으로 나아갑니다.

 

  네, 시귀는 흡혈귀 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를 스티븐 킹의 '살렘즈 롯'에 대한 오마쥬라고도 말했는데 이 말대로 시귀는 흡혈귀의 특징을 그대로 가집니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생존할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면 타버리기 때문에 밤에만 활동할 수 있으며 한 번 피를 빨린 인간에게 암시를 걸어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렘즈 롯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지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일단 그것 말고는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살아 생전에 할 수 있었던 것 만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약합니다. 약해서 두려움도 큽니다. 낮에는 그저 무방비하게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때문에 그들이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클지는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공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빨고 마셔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먹지 않으면 그냥 죽습니다. 더구나 시귀에게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은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격합니다. 그래서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타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시귀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중간 지점이 없습니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남의 피를 빨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뿐입니다.  레밍 처럼 이유 없이 따를 수 밖에 절대적 명령.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죠. 바로 여기에 시귀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서운 건 잘 못 그려서^ ^; 한 번 이렇게 간략하게 표현해보았습니다만... 

 

 

 보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비극은 그들 스스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피에 기생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죽은 자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더구나 그 수단 역시 하나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더욱 생존이 절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오로지 남의 생명에 빌붙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오로지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군집을 이루고 사는 생물들은 대단히 사회 공학적입니다. 이는 개미를 보면 확실해지지요. 생존을 위해서는 뭉쳐야 하기  때문에 동료애가 강하고 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의 전체주의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죠. 시귀들의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나츠오는 자신을 물라는 명령에 따라 시귀가 되어 돌아온 토오루에게 죽어서까지 그런 녀석들의 명령이나 받고 다니나며 비난하지요. 오노 후유미가 3권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시귀 사회의 모습은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먹고 자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 더구나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벌을 받는 삶. 거기다 살아 생전 친했던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죄책감까지. 나초노 처럼 이렇게 살려고 다시 살아났냐고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시귀가 된 자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빨지 않으면 죽으니까 이 절대적 숙명 앞에서 모든 걸 묵인하고 살아갑니다. 토오루에서 보듯 아무리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해도 그저 울부짖고 말 뿐입니다.

 

 이 거대한 숙명 앞에서 죽음은 영원한 끝이라는 세상의 근본 섭리를 뛰어넘은 자들 조차 무기력할 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오래도록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 온 소토바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이죠. 물론 그 채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운 색깔일테지만 말이죠. 토시오느 시귀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며 마을이 내년 봄까지 과연 남아있을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정확히 그가 생각했던 마을은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소토바 이겠죠. 그렇게 토시오도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시귀들이 시귀의 숙명에 순응하듯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숙명에 순응하는 자입니다. 시귀가 인간을 먹이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듯이 그 역시 시귀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 이상의 존재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시귀가 되어버리면 승리를 위한 정보를 얻는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포로에 불과합니다. 사실 토시오의 교코 연구 장면은 그대로 포로 심문 과정이라고 보아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엔 전면전 밖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도 원래 있던 존재도 사실은 다들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변화란 서로 공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둘 다 변화를 거부하니 남은 건 모조리 절멸될 때까지 배척하는 것 밖에는 없는 셈이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숙명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숙명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그에 맞는 형벌을 결국 받은 셈입니다.

 

 타인의 삶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연명했던 시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소토바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항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토시오는 결국 소토바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벌을 받은 셈입니다.

 이는 곧 후유미의 대안이 여기에 있지 않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 이질적인 두 사회가 서로 섞이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의 문제를 그저 변화의 수용과 거부의 관점으로만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더 깊이 내려가 그 근본에 무엇이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귀'에서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점입니다. 자아, 당신의 확대경이 정말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신 자신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변화를 수용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여부가 바로 자신의 숙명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한 그 객관화를 통해 어느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정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인종적으로, 국적으로, 게층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한 번 그렇게 결정되면 우리는 왠만해서는  거기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국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외국에 나가면 태극기만 봐도 뭉클해지고 아무리 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인종 따라 달리 감정을 가지게 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숙명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위화감이 들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진 조건들은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하게 만듭니다. 시귀나 토시오나 다를 바 없죠. 덜 극한적이라는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웃기는 것은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조건(숙명이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조건으로 달리 부르겠습니다.)들이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확률의 결과일 뿐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와 같은 것이죠. 주사위가 이유를 따져서 스스로 눈을 나타내지 않듯이 우리를 이루는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이 조건들이 한 번 결정되어 버리자 마치 진짜 이유가 있는 양, 거기엔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가 있는 양 존재하게 됩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탑일 뿐인데 스스로 단단한 반석 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꼴입니다. 오노 후유미는 시귀에게 내려진 숙명 역시 우연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시귀들에게 같이 피를 빨려 죽더라도 다시 깨어나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누가 다시 살아나고 영영 죽을지는 시귀들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확률의 결과입니다.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 시귀가 되면 숙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노 후유미가 이렇게 숙명이 우연의 소산임을 밝혀서 드러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어이없는 모순입니다.

 

 알고보니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숙명이라는 쇠사슬이 아주 형편없이 녹슬어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어차피 우연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어서 달리 마음 한 번 먹는 것 만으로도 그냥 똑 하고 부서질 만큼 연약한 것임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조건을 찬찬히 살피면 드러나는 것은 그런 모순이요 조건들의 허약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숙명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숙명의 힘을 그토록 강하게 생각했던 건 시귀가 피를 빨린 인간에게 거는 암시와 똑같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걸어 놓은 암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조종당하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시귀와 인간이 만나는 순간이 암시로 인한 조종 밖에는 안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건 암시로 숙명에게 조종당하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것 역시 암시로 타인을 자기 뜻대로 종속시키는 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거짓의 공존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만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노 후유미가 보여주는 진정한 공존의 모습은 바로 대화입니다. 서로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토시오와 세이신의 대화도 그렇지만 이미 시귀가 되어버린 토오루와 아직은 인간인 나츠노의 대화와 세이신과 스나코의 대화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관심가져야 할 것은 오노 후유미가 그 진정한 대화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그 효과란 다름아니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내어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츠노의 경우(여기엔 어쩐지 반론도 충분히 제기가능할 것 같군요.) 그는 토오루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줍니다. 세이신 역시도 자신이 맺지 못했던 소설의 이야기를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허물고 내어줌으로써 차츰 찾아가죠. 그러다 궁극에 가서는 전적으로 아예 내줘 버립니다.다시 말하면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나츠노든 세이신이든 그럴 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결 같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회의하는 것이죠. 나츠노는 자신이 문득 그렇게까지 시귀를 없애려 하는 것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세이신은 스나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이렇게 둘은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목에 걸린 숙명의 쇠사슬이 녹슬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에 다름아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길고도 지루하게 썼습니다만 즉 돋보기를 자신에게 들이대라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타인이 출현하여 우리가 가진 숙명(거창하다면 조건)을 각성시켜 본능적으로 배쳑하려 할 때 먼저 내가 가진 그 숙명이 타인을 배척할 만큼 절대적인 것인지 제대로 한번 객관화시켜 살펴보라는 것이죠. 여기서 객관화란 다른게 아니라 스스로 거기에 대해 대화해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노 후유미가 나츠노와 세이신을 통해 보여준 그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것에 대해 이것이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옿은 것이지 스스로 자문해보고 해답을 구해보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먼저 선행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귀와 토시오가 걸었던 비극으로 부터 해방될 있다고 오노 후유미는 특히 세이신과 스나코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던 나츠노를 기리며... 

(남자입니다. 왜 이렇게 여성스럽게 그려졌는지는 저도 잘 ㅡ ㅡ;)

 

 

 결국 오노 후유미가 '시귀'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심판의 화살은 타인의 가슴이 아닌 우리 마음에게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귀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리츠코에서 보듯이 먼저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했었고

 토시오 또한 세이신이 했던 것 처럼 먼저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세이신은 늘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자주 산책다녔고 그것은 끊임없이 지금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곳을 벗어나 변화해보려는 마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스나코와 대화할 수 있었고 스나코가 가진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또 반복될 거대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이신이 글을 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글이란 어떤 것입니까?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쓰면서 쓰는 한편 어딘가에서 또 그것을 읽고 다시금 음미해보는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 대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쓰는 자아와 읽는 자아 사이의 대화 말이죠. 그렇게 나의 나 됨을 허물고 다른 생각으로 새로운 나로 변화해가는 작업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 아닐까요. 세이신의 소설이 계속 결말이 열려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늘 새로운 자신으로 변모하기에 그 결말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오노 후유미는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보다 중요한 암시를 또한 해 두었습니다. 실로 아주 집요한 설계자라고 밖에는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시귀를 그 마을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세이신의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자신을 새롭게 변모하게 만들었던 그 글이 이제 소토바 마을 전체를 변화게끔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결국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정작 오노 후유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세이신에게 깃들어 있다고 암시해 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귀는 이런 소설이었습니다.

 

 완역본으로 이제 빠진 것 하나 없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귀의 여정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타인과 함께 공존하려면 어디를 먼저 살펴봐야 하는지 그 가장 중요한 하나를 위해 그려진 세밀화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밀화는 왠만한 예술가적 자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하겠기에 그 하나를 위해 이토록 많은 수고와 견고한 세계를 다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노 후유미에게 감명 받게 됩니다. 사족입니다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 상황을 보면 이제 타인과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 요청에 언젠가는 응답해야 할 자신을 위해서도 한 번쯤 이 '시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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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9-0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보고 한 번 반갑고, <시귀> 보고 엄청나게 두 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오신 것도 좋은데 무려 저의 여자라고 칭하고 싶은 오노 신의 <시귀>라니!
이 리뷰는 꼭 정독하겠습니다... 지금은 막 학원 갔다와서 피곤해요.
그래요, 저도 이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영어 학원이요. 흑.
헤르메스님 ㅠㅠㅠㅠㅠㅠ 엉엉

그래도 <시귀>라니 반가워서 피로가 달아나는 거 같네요. 헤헤.

ICE-9 2012-09-05 01:55   좋아요 0 | URL
후후... 이제 우리는 라이벌이네요.
이번의 시귀로 오노는 이제 저의 여자가 되었으니^ ^
참 이번에 오노의 새로운 소설 한 편이 나올 예정이라더군요.
'흑사의 섬'이라는 책인데 고립된 섬에서 배척받았던 자의 이야기로
역시나 마성의 아이, 시귀와 동일한 문제의식에 있는 작품 같아요.
그건 그렇고 소이진도 이 시귀를 읽었을텐데
어찌 읽었는지 궁금하니 빨리 올려줘요^ ^




이진 2012-09-06 23: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흑사의 섬'이 번역되어 나온단 말입니까?!
... 왜 갑자기 오노 신에 관심이 이리 많아졌답니까.
엉엉 싫어요 안되요 오노 신은 나만 아는 여자란 말이어요 ㅠㅠㅠㅠ
5권짜리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은 못 읽었어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핑계지만요.
3권짜리로도 충분히 저를 사로잡았는데 빠진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어요. 배신감도 느꼈고. 한국 출판사... 네 이놈들! 외쳤죠. 얼른 읽어보고 싶은데. 세상에 흑사의 섬이라... 요즘에 고스트헌트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어서 살맛납니다. 행복해요 정말. 고스트 헌트 제가 오노신 좋아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일본에서도 30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고 악명 높은 소설이었꺼든요.. 헤
십이국기 완결이나 얼른 내 주시지.

재는재로 2012-10-3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사의 섬이라 처음듣는데 간만에 서재에 들어와서 이런정보도 얻게되네요 오노 후유미의 신작 빨리 읽어보고싶네요

ICE-9 2012-10-31 19:11   좋아요 0 | URL
북홀릭에서 곧 나온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무척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

희선 2013-01-25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흡혈귀가 나온 우리나라 소설을 읽었다는 글을 봤을 때,
이 책 《시귀》가 떠올랐거든요
혹시 읽으셨으려나 했는데, 역시 읽으셨군요
그리고 이 글도 아주 좋네요
빨간 바탕에 그린 그림은 귀엽습니다(실제로는 귀엽지 않을 텐데...)

저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전에는 그랬을 텐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간 생각을 하셨군요
함께 살아갈 방법 찾기...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요
흡혈귀와 사람은 어려울 것도 같아서...

이런 흡혈귀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요괴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군요
요괴 또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고...

오노 후유미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모르지 않았습니다
<십이국기>는 읽었거든요 열한권이나 읽었는데,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책만 읽고 그것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잊어버릴 수밖에 없죠
<마성의 아이>는 <십이국기> 안에 있는 것인 듯하네요
아주 똑같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 책 다 끝난 거 맞는지 모르겠네요, 끝난 것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어쩌면 오노 후유미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네요

<십이국기>에서 참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라크슌입니다
커다란 쥐 모습인데, 사람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는데 라크슌이 생각하는 방식이 좋았어요
라크슌 때문에 마음을 다시 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은 요코였군요


희선

ICE-9 2013-01-26 01:30   좋아요 0 | URL
오! 저도 라크슌 좋아해요^ ^ 저 개인적으로 오노 후유미는 타자와의 공존을 작품 중심에 두고 써 나가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그녀의 작품들이 다 그렇게 다가왔어요. '시귀'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 역시도 민족성이 배타적이죠. 그런 일본에게 있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자와 공존의 가능성을 이다지도 집요하게 살펴보는 작가는 특히나 장르 문학에 있어 오노 후유미 만큼 독보적인 작가는 또 없는 것 같아요. 이러한 오노 후유미의 성향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아야츠지 유키토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지죠.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가 '시귀'에 대한 응답이 아닐까도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서 타자에 대한 태도가 사실은 부부이지만 그들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죠(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부부로 살고 있는지 또한 저는 궁금하답니다^ ^.) 아무튼 호러물을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시귀는 정말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희선 2013-01-30 00:28   좋아요 0 | URL
그것도 벌써 읽은 건 아닐까 했는데 정말 그랬군요
오노 후유미에 대해 쓰여 있는 곳에 아야츠지 유키토 이름이 있는 것까지 봤는데, 두 사람이 부부였군요
얼마전에는 오리하라 이치 부인인 작가에 대해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는 책이 나오지 않았더군요 (니이츠 키요미) 올해는 나올까요
나와도 바로 볼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어나더>는 읽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군요 뭐라고 썼을지 알고 싶군요
저는 잠시 <어나더> 볼 때 <시귀>를 떠올렸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다른 소설이더군요
일본에는 이렇게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듯해요
(우리나라에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화 <쓰르라미 울 적에>도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로 어떻게 하면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찾고 있죠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은 이제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만화 보고 사람 죽이는 것을 따라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지난해 일본에서 9년 만에 오노 후유미 새 소설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시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 마음을 글에 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길이 있겠지만, 이렇게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할 수도 있잖아요
(<어나더>에 나온 것은 별로였지만, 그리고 그 책 보면서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니 <어나더>가 꼭 아야츠지 유키토가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글에 나타낸 것이 달라도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야츠지 유키토 소설 별로 읽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이 책(시귀) 언젠가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때 이 글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