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랜드 맨션'은 2013년에 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다. 이게 정말 얼마만에 만나보는 그의 작품인가? 1951년에 태어나 1988년에 '다섯 개의 밀실'로 데뷔한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 3부작과 '~자' 시리즈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래도 내게는 오리하라 이치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서술 트릭'이다. 분명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인 '도착의 론도'로 처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도착의 론도' 자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여기서 오리하라 이치는 자신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서술 트릭을 사용할 수 있는지 가득 보여준다. 서술트릭의 효과는 결말에서 뒤통수를 맞고 반드시 다시 읽게 된다는 것인데 '도착의 론도'가 꼭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 트릭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아니,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술 트릭을 다룬 작품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오리하라 이치는 거기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도착 3부작'은 마치 서술 트릭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나를 실험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짙게 풍기는데 그만한 재능이 바탕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그랜드 맨션'도 도착 3부작의 노선을 따른다.

 즉 서술 트릭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표지가 너무 멋지기에 아무래도 표지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보았을 때 역대급 표지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표지가 또 있을까 싶다. 작가의 이름이 뭐든 장르가 뭐든 상관없이 닥치고 펼쳐서 읽고 싶어진다. 원래 책을 위해 만들어진 표지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책 내용과 묘하게 상통한다. '그랜드 맨션'은 같은 공동 주택에 사는 서로 다른 7명을 하나의 단편마다 하나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작 소설처럼 되어 있는데 그 중 밀실 살인을 다룬 '시간의 구멍'이 바로 표지의 그림과 상관있다. '시간의 구멍'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설정을 따왔는데 거기서 라스꼴리니코프의 역할을 맡은 미스터리 소설 수집광 청년은 정말 구하고 싶은 책이 드디어 나왔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구할 수 없게 되자 평소 쌓아놓은 현금이 많다고 자랑하던 옆집 할머니의 돈을 훔쳐올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죄와 벌'에서의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국 드라마 '유토피아' 덕분이다. 끝까지 이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던 '엘리스'에게 경배를!)가 바로 그 할머니인 것이다. 그는 온갖 추리 소설의 트릭을 다 꿰고 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할머니를 밀실 살인하려 계획을 세우다 우연히 지진으로 인해 할머니와 자신의 방 사이에 있는 벽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훔치려 한다. 그러니까 표지의 그림은 바로 그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남자지만.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 '어째서 이 소설이 서술 트릭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아무래도 벽에 난 구멍을 이용한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일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서술 트릭이 사용되고 있다. '시간의 구멍'은 청년의 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누군가 취조 받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인물들을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누군가 던진 테니스 공이 뒤통수를 때리듯 알게 된다.


 '그랜드 맨션'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일곱 개나 모여있는 것이다. 저렇게 등장인물들이 혼동되기도 하고 공간이 뒤섞이기도 하며 시간도 뒤죽박죽이 된다. 서술 트릭은 내가 코스모스라 알고 있던 우주를 뒤늦게 카오스라고 알려 둔중한 충격을 주는데 그것을 통해 과연 내가 무엇을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즉 확실한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거나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 트릭은 가뜩이나 폐쇄된 사회라고 알려진 일본에게 그 외부로 사유의 문을 여는 좋은 통로가 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유독 일본에서 서술 트릭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서술 트릭의 매력을 잔뜩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랜드 맨션'이다. 사실 소설의 '그랜드 맨션'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거 공간에 사는 이라면 결코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공간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층간 소음', '스토킹', '살인', '절도', '사기', '학대' 그리고 '방화' 가 모조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7편의 이야기는 이것들을 하나씩 담고 있는데 읽다보면 절로 '뭐. 이런 곳이 다 있어!'하게 된다. 어쩌면 오리하라 이치는 이 '그랜드 맨션' 자체를 지금 일본 사회의 은유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날로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지만 일본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 주거 공간에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살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말은 내가 타인에게로 열려있어야 그만큼 나 역시 생활의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그랜드 맨션'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은 타인과 겨우 벽 하나를 두고 살 뿐인데도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관철시키려 한 것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사회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의 근본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이기적 존재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에 오리하라 이치는 슬쩍 서술 트릭을 가져온다. 믿었던 세계를 한 순간에 허물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넘어 외부의 타자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것이야 말로 오리하라 이치가 '그랜드 맨션'을 통해 주려는 메시지다.

 서술 트릭이라는 형식 자체가 주제인 것이다.


곁다리 : 사진의 배경은 로저 워터스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해, 그 붕괴의 현장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대표적인 앨범 'THE WALL'을 라이브로 공연했었는데 그 실황을 담은 LP의 커버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랬듯이 벽의 붕괴가 곧 구원이라는 '그랜드 맨션'의 근원적인 주제와 통하는 것 같아서 놓아보았다. 거기다 곧 아주 오랜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신작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환영의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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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8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몽환화, 그 뜻은?...


 "하지만 삼촌은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p. 220)


 그동안 온갖 장르를 섭렵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유일하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역사물에 드디어 도전한다며 2002년부터 역사잡지 '역사가도'에 2년간 연재되었지만 막상 한 권의 소설로 나오기까지는 10년이 걸렸던 소설, '몽환화'! 그 제목이 뜻하는 것은 이러했다. '몽환화', 그것은 바로 노란 나팔꽃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2013년에 나왔다. 거의 전면적인 개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계기가 있었다. 바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통칭하여 3. 11. 그것이 소설에 전면적인 영향을 주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전의 1988년 실제로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에 바탕을 두고 소년범 문제를 다룬 '방황하는 칼날'이나 역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일본 대학 입시를 비판한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보듯 원래 동시대의 사회 문제와 연동하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일본 역사상 미증유의 참사에서 영향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징후는 이미 2012년에 나온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소설이 3.11의 반향이라는 것은 소설이 취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바로 70년대에 일본에 닥쳐온 오일 쇼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엔 그것이 전후 일본 최대의 위기라는 걸 고려해보면 하필이면 이 시점을 택한 것이 똑같이 전후 역사상 최고의 위기라 불리고 있는 3. 11을 환기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히 말해 상실감에 대한 치유인데 이로써 이 소설에 드리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즉, '과거 전후 최대의 위기였던 오일 쇼크를 우리는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니 현재 전후 최대의 위기인 3.11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좌절하지 말고 그 때의 우리를 거울 삼아 서로의 아픔을 배려하고 도와나가자.'란 걸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유는 일본 원전 사태 이후에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일관되게 유포한 구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오노 미쓰야키는 3.11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던 일본의 풍경을 찢어놓았다고 했다. 1995년에 한신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동안 믿었던 일본이 깡그리 붕괴당한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도주론'의 아사다 아키라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들에 따르면 일본에는 지금까지 단일한 풍경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타자와 변화라는 게 깨끗이 배제된 고인 웅덩이와도 같은 공간. 그것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본에게 재난은 외재성의 침입이요 그 고정된 풍경의 틈새를 열어 그동안 일본이 얼마나 편협한 풍경에 사로잡혀 있었는 지를 보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재난은 변화에의 부름이며 그 부름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재난 앞에서의 성찰적 태도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가 하는 것은 그 풍경의 틈새를 다시 기워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전과 현재 일본 시스템의 반성과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일본 정부는 '과거의 아픔은 잊고 미래를 바라보자!", "지금이야말로 일본인 모두 하나가 되어 복구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고 외칠 뿐이다. 반성은 없다. 변화도 없다. 그저 어둔 과거가 빨리 잊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베 총리가 2020년 동경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 일본 전성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경 올림픽을 다시금 재현하여 일본의 영광은 여전히 변함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오일 쇼크를 다시금 가져온 것과 비슷한 재현 전략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한계가 있었다. 참 따스한 이야기인 건 사실이나 외연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조금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태도였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도 그것을 감지했을 지 모른다. 아니면 지금까지도 3. 11에 대해 아무런 반성은 커녕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오로지 잊을 것만 강요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 한계를 절감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몽환화'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몽환화'에 대한 경고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 뒤를 쫓으면 자신이 멸하게 되는 꽃. 이것은 바로 현재도 일본이 지속하고 있는 원전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2. 나팔꽃의 첫번째 꽃말은 '허무한 사랑'...


 그러고 보면 나팔꽃이 가진 꽃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나팔꽃의 꽃말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무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결속'이다. 여기서 '허무한 사랑'이 바로 원전에 대한 일본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원자력은 그야말로 기피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은 오히려 원자력에 대한 과한 사랑을 보여왔다. 일례로 우리는 그것을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캐릭터인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에게서 엿볼 수 있다. 캐릭터의 이름을 '원자'를 뜻하는 영어에서 그대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아톰을 가동시키는 에너지의 원천 또한 원자력이다. 거기다 아톰의 동생 이름도 우라늄을 뜻하는 '우란'이다. 즉 아톰의 활약과 거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바로 원자력의 긍정과 희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무엇보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많은 원전의 숫자로도 증명된다.(현재 일본의 원전 수는 48기로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23기로 5위다. 국토 면적에 비해 정말 얼마나 많은 원전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거기다 잦은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 고리 원자력 발전이 이미 설계 수명인 30년을 넘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 원전 사태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우리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 사랑의 결과가 바로 3.11이었다. 이만큼 허무한 사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대로 된 비유를 쓴 셈이다. 나팔꽃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에 대한 상징이니까 말이다. 과연 소설은 처음부터 허무하게 끝나버린 비극적 사랑으로서의 3. 11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2개나 붙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단란한 가정이 아침 출근 길에 느닷없이 참살당하고 한 중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이 갑작스럽게 깨어진다. 둘 모두가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죽음과 이별이라는 상실로 끝났다는 것도. 정확히 3. 11이 일본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과연 뒤이어 허무한 사랑에 맞닥뜨려 버린 인물들이 나온다.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사랑과 똑같이 하나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처음은 아키야마 리노. 그녀는 올림픽 출전까지 예정된 일본의 수영 기대주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영을 그만둔다. 수영을 좋아하고 좋은 수영 선수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한 길로 달려온 그녀이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수영 불능의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그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불안하기로는 그녀와 단짝이 되어 몽환화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가모 소타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는 현재 원자력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원자력은 촉망받는 학문이라 선택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는데 3. 11 이후로 원자력은 일본 사회에서 가장 기피하는 학문이 되었다. 어디가서 원자력을 전공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들 미래가 없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노 소타는 고민하고 있다. 이 둘 모두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몽환화'가 3.11에 직면하여 미래가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답장 편지' 같은 것이라는 걸 분명히 한다. 그렇다. 이 소설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내는 어떤 조언 같은 것이 있다.



 3. 나팔꽃의 두번째 꽃말은 '결속'...


 그것이 바로 '나팔꽃'이 가진 또 하나의 꽃말, '결속'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달라지고 분명 한 발 더 나아갔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정부의 외침과는 다르게 분명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의 모습은 작중 인물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선언된다.


 "세상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는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이어받아야 하잖아? (....)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감시를 계속해야만 해.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 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해. 도망칠 수 없지.(p. 409)


 여기서 '마성의 식물'이 바로 원전을 뜻한다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지 않는다'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의무'라는 말은 그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현재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날선(사람의 도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다. 그리고 일본 대중에 대해서는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키야마 리노와 가모 소타가 대표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물론 이 조언은 젊은 세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같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하야세가 대표하는 일본 기성세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충고이다. 생각해보면 하야세 역시 리노와 소타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는 한 때의 불장난 같은 바람으로 가정을 잃었다. 리노와 소타는 미래의 불안에 대해 아무런 자신의 잘못이 없었지만 하야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이런 하야세가 기성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핸드폰의 사진 전송 기술에 대해 놀라워하거나 노래방에서의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는 식의 자잘한 고백을 통해 그가 전형적인 기성 세대임을 독자들에게 부각시킨다. 그런 그가 오롯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본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가정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에겐 중학생 아들 유타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아들 유타가 받았을 커다란 상처를 걱정한다. 이 모든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3. 11에 직면하여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오늘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을 곧장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이라는 환영과 안전에 대한 맹신에 불륜이 그렇듯이 그만 무분별하게 도취된 나머지 스스로 자정할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바람에 유타와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하야세가 유타의 부탁으로 몽환화에 얽인 살인 미스터리를 개인적으로 추적한다. 바로 이 모습이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안이다. 역시나 도망치지 말라는 것. 부모로써 자녀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책임의 각성을 통한 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외치는 외양만인 결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바로 그런 진정한 결속, 또는 그래서 더욱 단단한 결속을 위한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그 점이 바로 참여의 촉구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는 왜 이렇게 모두에게 도망치지 말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오노 미쓰아키의 글에서 인용된 재일 한국인 학자 정영혜의 말을 다시금 인용해 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특권이라고 해도 뒤집어보면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이기도 합니다. '매저리티(majority)'의 경우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될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이기는 커녕 온통 문제 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생각하지 않게끔' 이빨을 빼버리는 거니까요. "당신들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투표일에는 잠이나 자주면 고맙겠다." 이런 말인 셈이잖아요. (...) 그들 자신이 깨닫기 위한 계기를 하나씩 하나씩 싹을 제거하듯 빼앗긴 것이고, 그게 '매저리티'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진 '특권'의 실태입니다.


 '매저리티'는 일본의 정치적 지형에서 일본 국민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즉 '말없는 다수'이다. 일본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유명하다. 투표율도 늘 낮았고 일본 정부가 무슨 정책을 펴든 가타부타 말없이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 저변에는 일본의 정치가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그걸 핑계로 그들은 일본 정치 현실에서 도망쳤다. 현재의 일본은 사실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말없는 다수', '행동하지 않는 다수'에게 더이상 도망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불안이요 비극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몽환화의 미스터리 추적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노와 소타는 경찰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반인이다. 중요한 것은 형사 하야세인데, 그조차 개인적으로 사건을 뒤쫓는다. 아예 소설에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로 뒤쫓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소타의 형 요스케도 마찬가지다. 경찰청의 관료이지만 홀로 뒤쫓는다. 추적하는 모두가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에서 철저하리만치 조직의 움직임을 깨끗이 배제하고 있다. 이 설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젊은 세대든, 기성 세대든 주고자 하는 조언의 구체적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더이상 매저리티, 즉 말없는 다수에 속하지 말 것. 그것을 핑계대고 도망치지 말 것. 그러기 보다는 '마이너리티(minority)가 될 것. 일본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가 바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더이상 일본이 잠자는 다수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몽환화'는 그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소설이다.


 이는 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으로 보았을 때 전혀 상관있을 것 같지 않은 비극이 바로 한 개인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설정과 무엇보다도 록밴드를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후자가 특히 의미심장한데, 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필이면 록밴드를 넣은 것일까? 이 역시 '매저리티'를 깨기 위한 개인적 저항의 촉발로써 집어넣은 것이라면 너무 앞으로 나가버린 해석인 걸까? 그런데 사실 3. 11 이후와 록 사이를 헤아려보면 꽤나 의미있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3. 11 한 달 후에 나온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의 '다 거짓말이었어'란 노래다. 3. 11로 일본이 말한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고 일본이 다 시궁창이었다는 게 들통났다고 외치는 이 노래는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이 국민들에게 자숙을 강요하며 오로지 인내와 화합의 노래만이 펼쳐지고 있을 때 그 순응의 분위기를 깨어버린 첫 외침이었다. 일본 국민에게 강요하는 순응 아래에서 들끓고 있었던 저항심을 표출하게 만든 이 노래는 곧 일본 전역의 시위 현장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일본 독자라면 소설의 록밴드에서 곧바로 이것을 환기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매저리티'를 뒤흔들던 노래를 말이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읽는 이를 뒤흔드는 소설. 그것이 바로 이 '몽환화'다. 최근까지 읽은 3.11 이후의 일본 대중 소설에서 가장 선명하고도 강력한 외침이 아닌가 한다. 전작 '나미야 잡화점에서의 기적'에서 느꼈던 한계를 이 작품은 후련하게 날려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의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 의식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몽환화'는 그나마도 넘치게 채워주었다. 여전히 가독성도 뛰어나고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지만 특히나 앞서 괄호 부분에서 말한 바와도 같이 일본의 오늘이 바로 우리의 내일이 될 수 있기에 추운 날 꽁꽁 언 몸을 녹이려 계속 곁불을 쬐듯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것은 이 책 자체는 '몽환화'가 가진 위험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각성의 소설이요 결기를 돋우는 소설이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든 말든, 미스터리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역시 더 이상 '잠자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그냥 참고로...


사진은 몽환화로 불린 실제 노란 나팔꽃의 모습. 이게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한 몽환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에도 시대에는 있었던 노란 나팔꽃이 어느 순간 멸종해버린 것에 착안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사실 이 노란 나팔꽃은 희귀종이 맞다. 유럽의 희귀 식물 종자를 거래하는 사이트에서 이 노란 나팔꽃의 씨앗을 팔고 있던 것을 봤다.


 미국 아마존에서도 이렇게 일본의 나팔꽃으로 희귀하다며 그 씨앗을 팔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니 호기심에 한 번 구입해볼까 하는 강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어보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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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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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건 영화 '비밀'을 보았을 때였다.




 그 영화는 1999년에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 엄마와 딸이 같이 버스 사고를 당해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가 버린 이야기였다. 딸의 영혼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해 그 영혼이 들어간 엄마는 깨어나지 못하고 엄마의 영혼이 들어간 딸만 깨어나는데 이를 두고 남편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즉 흔히 말하는 '영혼 교환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결국 그의 소설까지 읽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작품의 결말이었다. 그게 너무도 의외였던 것이다. 대체로 '영혼 교환물'이란 결국엔 자기 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영혼 교환을 통해 촉발된 세상 질서의 혼란은 끝에 가서는 다시 안정되는 게 원칙이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그것이 영혼 교환물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은 달랐다. 엄마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혼돈은 그대로 혼돈으로 남는다. 교환으로 일어난 소동을 한 때의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다시 안심하고 섞여 살 수 있는 코스모스적 세계는 도래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남편은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내 모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영혼 교환물은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이 쓰여졌다. 영혼 교환물에서 자주 남자와 여자가 바뀌고, 엄마와 딸이 바뀐 것은 그 때문이다. 평소엔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교환을 통해서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보다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세계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늘 있어왔던 익숙한 세계의 질서에 말이다. 우연히 초래된 혼돈은 사실 세계의 질서를 보다 항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었다. 변화가 열어젖힌 '틈'은 새로운 바람이 들어올 창구라기 보다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계가 두터운 시멘트를 바르기 위한 '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뀐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카오스는 그에게 두려워해야 할 흠이 아니었다. 보다 새로운 나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있어선 세상이 똑같이 찍어내는 '익명화'된 개체가 아니라 고유의 피와 살 그리고 생각으로써 존재하는 온전한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이었다. 생각해보라! 혼돈 앞에서 세계는 무력하다. 이전의 질서로 그것을 다스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아내의 영혼이 들어간 딸의 몸을 규정할 방법이 없다. 이 몸은 딸인가? 아내인가? 몸을 따라야 하는가? 영혼을 따라야 하는가? 그 물음 앞에서 세계는 답을 하지 못한다. 당황하며 갈팡질팡할 뿐이다. 거기서 단단하고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세계의 질서라는 게 의외로 허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세계란 그 자신이 규정한 질서가 조금이라도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내 위태롭게 될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것을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것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이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그 규정의 힘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게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그 실재의 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석한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 세계를 해석할 선택의 순간을 빼앗겼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내가 아니라 이미 남이 선택한 대로 그 세계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위축되고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와 대결해야 하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은 자주 결단을 통한 선택의 순간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그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건 네오에게 어떤 세계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의 촉구였다. 그리고 네오의 선택대로 세상은 형성되었다. 즉 네오의 손 끝에서 세계는 다시 태어났다. 그 네오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구세주다. 구세주란 세계를 근본부터 뒤엎는 존재다. 달리 말하면 매트릭스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는 '단독자(모나드)'다. 결단은 그런 주체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며, 이는 남의 눈이 아닌 오로지 자기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과도 같다. 이와 똑같은 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도 한다. 스스로 자기 몸을 규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엔 두 번의 중요한 결단의 순간들이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아내고 다른 하나는 남편이다. 특히 남편의 경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의미심장한 연출을 했다. 아내를 남의 아내로 보내기 직전, 아내의 고백을 통해 남편이 모든 비밀을 다 알도록 한 것이다. 그건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한 것과 똑같았다. 어떤 세계를 택할 것인지? 이전의 세계냐, 변화냐? 그 결단의 촉구였다. 그리고 남편의 결단에 의해 세계의 질서는 새롭게 수립되었다.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하는 세계에 있어 주체로 서는 방식이었다. 규정한 대로가 아닌 나만의 결단으로 새롭게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



 뻐꾸기는 자신의 알을 다른 새둥지에 놓는다고 한다. 다른 새가 자기 알로 알고 키우도록. 그것을 '탁란'이라고 한다. 히가시고 게이고의 2010년 작,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는 제목 그대로 바로 그것을 소재로 써진 것이다. 시작부터 어쩌면 이 작품과 전혀 상관없을 지도 모를 '비밀' 이야기를 한 것은 이유가 있다. 벌써 짐작하셨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바로 이 작품이 '비밀'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 교환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아버지가 있다. 예전에는 올림픽에 나갈 정도로 유명한 스키 선수였으나 딸의 출산과 동시에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이제는 스포츠 센터에서 일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딸을 낳은 아내는 그 뒤 사람이 좀 변한 것 같이 말수도 적어지고 이상해지더니 어느 순간 훌쩍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은 딸이다. 딸이 아버지처럼 스키에 재능이 있어 두각을 나타내었고 언젠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줄만큼 기대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딸의 스폰서를 맡고 있는 회사로부터 부탁이 하나 들어온다. 자신들이 스포츠에 자질을 나타내는 유전자형을 새롭게 발견했는데 이것이 과연 유전적인 것인지 자신과 딸의 유전자를 통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극구 거부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내의 죽음 뒤 우연히 발견한, 아내가 숨겨놓은 것이 분명한 신생아 유괴에 대한 신문 기사로 인해 가지게 된 의혹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딸 카자미가 실은 아내가 어디에선가 유괴해 온 남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이 의혹을 강하게 만든 사실이 있었다. 아내에게 출산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걸 평생 가슴 속에 지녀왔다. 카자미가 뻐꾸기 새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그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중견 기업가라는 그 사람은 어떤 여자의 부탁으로 그녀의 친족을 찾으려고 왔는데 하나의 혈흔을 보여주고는 그녀의 피라고 하면서 친족인지 아닌지 딸의 유전자와 검사해보고 싶다고 한다. '드디어 진짜 부모가 나타난 것인가?'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차에, 그를 만나러왔던 그 남자는 딸의 숙소에까지 찾아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다. 문제는 이게 보통의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 경찰은 원래 딸이 함께 타려던 버스였고 그 전에 딸에게로 날아온 협박장도 있고 해서 그 쪽으로 수사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갈등과 미스터리를 주축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이 정도의 소개만으로도 '비밀'의 설정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교환이 둥지의 교환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대부분의 서술이 '바꾼 주체'가 아니라 '바뀌어진 것을 확인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 소설의 핵심이 되는 아버지의 갈등은 사실 '비밀'에서의 남편의 갈등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 '비밀'의 단순한 재탕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조금의 변화,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를 차이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자리바꿈이다. 즉 '아내의 남편'이 아닌 '딸의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했다는 그것이다.


 이로써 이 소설에는 앞서 말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체화' 측면과 관련하여 결단과 더불어 하나가 더 들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책임'이다. 단순히 세상의 변화를 결단으로서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에 중심을 두고 이 소설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곁가지로 병행되는 카자미와 똑같이 연구 대상으로 발탁되어 본인의 꿈과는 상관없이 크로스컨트리 훈련을 받고 있는 고등학생 신고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는 바로 이 때문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아들 신고가 자신이 그토록 바라는 꿈을 접는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또 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주인공 아버지는 어떠한가? 그가 그토록 감춰왔던 비밀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결단들은 모두 책임과 결부되어 제시된다. 이것이 이 작품이 '비밀'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의 통감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길이라고 했던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말도 생각난다. '비밀'은 남의 결정이 아닌 자신의 결단으로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것 자체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나가이 고의 유명한 만화 '마징가Z'는 다음과 같은 첫구절로 시작된다. '너에게 세상을 멸망시킬만한 강대한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을 지옥으로 바꿀 것인가 아니면 평화롭게 지킬 것인가?'


 이 또한 결단의 촉구다. 아시다시피 히틀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 말살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그 때 세상은 지옥이 되어버렸다. 이런 건 곤란하지 않을까? 결단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는 누빔점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처럼 즉자적 욕망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집중하기 위한 누빔점. 바로 그 누빔점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임'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버지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미 그는 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해 책임을 이야기한 적이 있기도 하다. 바로 이보다 2년 전에 나온 '방황하는 칼날'이 그것이다.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였던 그 소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버지로서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바 있다. 바로 그 연장선 상에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는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의탁한 아버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듯, 소설은 자녀가 정말 바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멋대로 장래를 결정해도 좋으냐?' 하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그 자녀에게 재능이 있다고 해도 과연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꿈을 강요해도 되는 것인지까지 이 소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재능의 유전자라는 게 말이야. 그 뻐꾸기 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몸에 쓰윽 들어와 있으니 말이야. 신고가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건 내가 녀석의 피에 뻐꾸기 알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야. 그걸 본인이 고마워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P.395)


 요즘 한 방송에서 하고 있는 '부모와 학부모'란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로 자녀를 위한다면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 소설 역시도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 가지는 진정한 책임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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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1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비밀)에서는 아내가 말을 하는가요 책에서는 남편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딸이 아닌 아내일지도 모른다고... 그전에 딸로 돌아왔다는 말을 하거든요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비밀>은 드라마로도 만들었죠

자신이 가진 재능과는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지는 것도 괴로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어하는 일에 재능도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글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


희선
 
[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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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가 1981년에 발표한 '10만분의 1의 우연'은 한 아마추어 작가가 찍은 보도사진에 얽힌 미스터리이다. A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뽑혀 유명해진 '격돌'이란 제목의 그 작품은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6중 추돌 사고를 찍은 것으로 그 사고는 사망자만 무려 6명이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이 사진이 그 해의 최고 작품에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충돌하여 화염에 휩싸이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여 현장의 생동감과 처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왜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카메라 셔터부터 눌렀냐는 그것이다. 찍은 이가 프로 사진 기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더욱 불궈진 논쟁이었다. 보도의 사명도 없는 이가 그토록 현장 포착에만 집중한 것은 공명심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찍은 이를 잘아는 동호회의 한 고참 사진 작가는 실제로 그가 그런 공명심이 아주 많았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10만 분의 1의 우연'으로 포착한 행운'이라고 말했던 그 사진에 의혹을 품는 이가 나타난다. 그는 너무나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던 지라 과연 그것이 정말로 우연히 얻어 걸린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계산된 흑막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한다. 더구나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운전자가 증언한 충돌하기 직전에 언뜻 보았다는 빨간 불빛의 존재도 수상하다. 그는 모두가 우연으로 치부해버린 사건을 추적하고 아래에 드리워 있었던 어두운 흑막은 서서히 드러난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이런 이야기인데 읽어보면 얼른 두 작품이 떠오른다. 설정이 비슷해서 어쩌면 세이초가 영향을 받지도 않았을까 생각되는 작품들이다. 윌리엄 데안드리아의 호그 연속 살인(THE HOG MURDERS)와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RENDEZVOUS IN BLACK)가 바로 그 장본인들인데, 바로 호그 연속 살인은 1979년에 나왔고 상복의 랑데뷰는 1948년에 나왔으니 10만 분의 1의 우연이 나온 1981년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는 지라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 두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라도 먼저 두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말하는 게 낫겠다. '호그 연속 살인'의 시작은 도로로 구조물이 떨어져 지나가는 차가 사고를 당하여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다. 사고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뜻밗에 나타난 문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막는다. 누군가 그 현장에 'HOG'라는 서명을 남긴 것이다. 마치 이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임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그 때문에 이 사건을 살인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수사하게 된다. 하지만 도저히 범행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조사해도 이 사건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만 보인다. 누군가 친 장난이겠거니 여길 무렵 제2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역시도 아무리 보아도 사고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떡하니 또 HOG라는 서명이 있다. 뒤이어 또다시 HOG의 서명이 된 천재지변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이제 수사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속적으로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범행 수법을 도저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정말 HOG의 짓이라면 그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이것이 호그 연속 살인의 주된 줄거리다.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는 소형 경비행기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집요한 복수의 드라마다. 일부러 '집요한'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은 이 남자가 그 때 비행기에 탄 여섯 명중 누가 병을 떨어뜨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모두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여 아무리 경찰이 지키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복수하기 때문에 '집요한'이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읽다보면 복수의 대상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이나 그 대상을 살해하기 위하여 오래도록 철저하게 공을 들이는 것 때문에 제목 그대로 사신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정말로 코넬 울리치는 느와르판 '제7의 봉인'을 만들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상복의 랑데뷰'는 처절한 복수의 드라마인데 '10만 분의 1의 우연'은 '호그 연속 살인'과 이 '상복의 랑데뷰'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호그 연속 살인'처럼 우연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미스터리에다 '상복의 랑데뷰'처럼 뜻밗의 사고로 잃어버린 연인의 처절한 복수가 결합되어 있다. 세이초가 실제로 이 두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설정과 이야기의 얼개가 비슷하기 때문에(물론 호그 연속 살인은 '10만 분의 1의 우연'과 정반대의 진실로 치닫지만) 과연 순전히 세이초만의 독립적인 창조의 산물인지에 대한 의심은 좀 거두기가 어렵다.


  후기의 미야베 미유키에 따르면 이 작품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이처럼 이야기의 독창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실은 이 작품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약점이 있다. 바로 세이초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페이소스'가 여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점과 선'이든 '제로의 초점'이든 세이초의 전기 작품들은 비록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지만 애오라지 그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 보다는 해결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그 인간적 노력이나 밝혀지는 관련 인물들의 과거를 통해 삶의 어떤 어둠을 조명하는 것도 같이 녹여내려 주력했다. 하지만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상복의 랑데뷰'처럼 복수의 드라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복수자의 아픔은 몇 줄의 문장 정도로 간략하게 제시될 뿐이고 그가 어떤 심정으로 복수에 임하는 지 같은 건 잘 보여주지 않는다. 드러내는 것은 트릭의 풀이나 복수의 과정이 전부이다. 그래서 독자는 복수자에게 잘 공감하기가 어렵고 전혀 등장인물의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평면적이 되어 버린다. 소설과 신문 기사와 같은 저널이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눈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생생함은 성격이나 갈등, 분위기가 현실감 넘치는 묘사로 이루어질 때 느껴진다. 하지만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선 모든 게 밋밋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미리 깔아놓은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러니 트릭이 아무리 절묘하다한들 이야기가 심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 상당한 분량의 신문 기사 인용으로 시작한다. 후기의 세이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많이 경도되었는데(그건 후기에 주력했던 역사 소설 집필과도 관련 있는 것 같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그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자신, 너무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물든 나머지 문학조차 저널리즘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앞서도 소설과 저널을 비교했지만 사실 이 소설의 인물 묘사나 사건 진행이 소설 보다는 저널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일례로 사고에서 죽은 한 여인의 언니가 경찰서로 직접 찾아와 동생이 죽은 곳에 가서 참배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언니는 자신이 뒤늦게 비보를 들은 이유를 경찰에게 말해주는데 개인적으론 좀 많이 의아했다. 언니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작년 9월 하순부터 업무차 스위스 로잔에 있었습니다. 동생의 소식은 아버지가 국제전화로 알려주셨습니다. 업무라고 한 일은 영어 통역이에요. 평소에는 통역 일을 하지 않지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 기업 임원 가운데 한 분이 국제 경제 회의에 참석하시면서, 꼭 부탁한다고 해서 동행했죠. 때문에 동생 소식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P.34)


 하하, 원 이렇게나 시시콜콜하게 말하다니. 과연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스위스에 있어서 늦게 알았다고만 말하면 그 뿐 아닌가? 아마도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이유를 읊듯이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오고가는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차례로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죽 나열하듯이 이유를 단번에 말하는 건 주로 저널에서다. 그래서 세이초가 너무 저널적으로 소설을(어쩌면 저널 스타일에 너무 물들어버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쓴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계가 좀 보이는 작품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띄는 걸 두고 어찌할 수는 없다. 어쩌면 미야베 미유키도 그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소설이 가진 가치에 집중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왜 현대에도 이 소설이 계속 읽혀져야 하는지 그 의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실은 그것도 소설에서 주된 이야기는 아니다. 미유키가 천착하는 의의는 어디까지나 소설 속 가해자의 동기에만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복수자는 어떠한가? 그는 훨씬 더 많은 비중으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곁다리의 캐릭터일 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평면적인 캐릭터라고 하지만 세이초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해결을 위해서만 가져다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복수자의 것까지 고려해야 우리는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선으로 나타내면 수평과 수직이다.

 사고는 고속도로에서 일어난다. 수평의 흐름이다. 소설에서 가해자와 복수자를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욕망이다. 가해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복수자는 연인을 죽게 만든 이들을 응징하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그들의 눈에 오로지 한 곳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욕망 역시 수평의 흐름인 것이다. 소설의 주된 소재가 되는 카메라 역시 그렇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포착하는 것 역시도 수평의 흐름이다. 그렇게 이 소설엔 수평의 흐름이 지배한다.


 왜 이 소설은 이토록 수평의 제국일까?

 그건 이 소설이 나온 시대와 연관이 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일본은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이 경제적 풍요의 시대였다. 고민도 없이, 혼돈도 없이 일본은 그저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풍요의 열매를 섭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해외여행이 활발해졌고 일본인들은 세계 각지로 뻗어가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맹렬하게 달려나가는 스포츠카처럼 거센 수평적 확장의 시대였다. 풍유로움에 도취된 그들에게는 오로지 더한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보일 뿐 과연 이대로 옳은 것일까 하고 되돌아보는 눈은 없었다. 그들의 시야는, 움직임은 오로지 한 곳으로만 뻗어갔다. 이 소설의 가해자와 복수자처럼.


 그런 그들에게 세이초는 수직을 가져다 준다. 그건 추락의 선이다.

 오로지 하나의 욕망만 보고 달리던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추락을 경험한다. 가해자도 복수자도. 세이초는 오로지 단일한 수직적 추락의 운명만 허용한다. 사실은 이 수직이야말로 세이초의 주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두가 풍요에 취해 그들의 현상황을 모를 때 홀로 광야에서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선지자와 같다. 그는 경고한다. 일본이 오로지 욕망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뻗어나가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분명 파멸적 추락이 도래할 것이라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추락은 바로 그것을 위한 예언의 문장들이다.


 그는 왜 이런 경고를 하는가?

 그 이유는 앞부분의 인용된 기사들에서 나타난다. 보도사진 수상작들이 발표되고 대상을 받은 작품과 관련된 사고 기사가 나오며 대상 작품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모두 소개되는 그 곳에는 딱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사고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이다.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셔터 누르는 것에만 신경썼다고 비판하는 이들조차 그런 사진에게 대상 준것만을 나무랄 뿐 사고에서 죽은 이들에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무관심은 뒤늦게 언니가 경찰서로 찾아와 직접 그 현장으로 갈 때 담당 경찰관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사고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떠올리기는 커녕 언니와 같이 온 남자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그녀의 남편인지 아니면 연인인지. 머리에 떠올리는 건 그 뿐이다.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당한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실제 현장에서 통곡하는 남자를 볼 때조차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생각할 뿐이다. 희생당한 이들은 깨끗이 잊혀졌다. 분명 여섯 명의 무고한 죽음이 있었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마치 그 죽음이 아예 없었던 것인양 치부해 버린다. 세이초가 현재의 일본에게 파멸적 추락이라는 수직적 운명이 도래할 것이라 예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욕망의 한없는 충족이라는 수평적 정복에 골몰하느라 그 바람에 속절없이 희생된 이들을, 혹은 희생 가능한 이들을 돌아다 보거나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죽음을 돌이켜 봄의 소중함, 무한히 뻗는 욕망의 선 때문에 밀려나거나 버려질지도 모를 희생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의 소중함을 말하기 위해 세이초는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쓴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이 소설이 '소름이 돋을만큼 현대적'이라면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의 현대란 늘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하여 보다 약한 자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아예 없는 듯 무시해 버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약한 자들은 오로지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표적이 되고 밖으로, 저 어둠 속으로 밀려난다. 하나가 밀려나면 또 다음이 표적이 된다. 우리의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오로지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경마장의 말처럼 바라보는 한, 소설 속 사고의 희생자들처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늘어만 갈 것이다. 세이초는 그 하나, 하나의 죽음과 삶을 소중히 하라고 말한다. 복수자의 서러운 울음과 한 죽음의 책임을 묻기 위한 집요한 응징은 바로 그 때문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또한 그 어떤 삶과 죽음이든 소홀히 할 경우 반드시 심판이 떨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것은 직접 실행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방관한 이들까지 다 포함된다. 누구였더라? 시대가 행동을 요구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한 자들을 위하여 지옥은 가장 뜨거운 형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던 이는. 세이초도 그와 같다.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대사대로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록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품은 뜻만큼은 어느 소설보다도 더 뜨거운 소설. 그것이 바로 '10만 분의 1의 우연'이 아닐까 한다. 약하다는 이유로 쉽게 버려지고 무시되고 핍박이 가해지는 요즘같은 때엔 더욱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소름 돋게 다가올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부디 파멸적 추락의 수직적 운명이 피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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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고, 삶의 선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소재인데
무엇인가 약한가 보네요. 아쉽네요...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과 새해 되셔요.

ICE-9 2013-12-29 04:5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세이초가 그런 주제를 잘 살리려 했다면 범인이나 복수자의 내면을 좀 많이 묘사해주었어야 할 것 같아요. 지나치게 복수의 과정만 핵심 트릭을 숨긴 채 집중하다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갈등 부분이 다 휘발된 게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 아닐까 싶어져요. 작품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제가 좋아하는 세이초 특유의 인간 묘사가 나오지 않으니 다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마녀고양이님도 이제 정말로 얼마남지 않은 연말 깔끔하게 마무리 잘 하시고
올해 보다 더 복된 새해 맞으시길 바랄게요.^ ^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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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읽은 느낌부터 말할까?
 분명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에서 그 제목을 따왔을 이 소설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는 미싱 링크(missing link)다. 물론 여기엔 전제가 있다. 그동안 죽 국내에 출간된 미타이 기요시 시리즈를 '마신유희'까지 다 본 사람에 한해서다. 특히나 '마신유희'가 가장 심한데, 거기서는 명탐정 미타이 기요시가 무슨 '절대 천재'처럼 묘사되어 있다. 시리즈의 두번째인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까지만 해도 점성술사 말고는 변변한 직업조차 없었던 그가 이제는 공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뇌과학 전문 교수인 것이다. 그것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그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다. '마신유희'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 간극은 어떻게 된 거야?'하는 생각을 곧잘 했다. 해설의 글에서도 별다른 설명은 없이 미타라이 기요시를 이미 천재 중의 천재로 일컫고 있었기에 도대체 어찌된 연유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나처럼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안심하시라!
 드디어 우리는 해답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맨 위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뜻하는 '미싱 링크'를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이 책이 거기에 대한 해답이다. '초(超)천재' 미타라이 기요시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바로 여기서 마음껏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미타이 기요시의 인사'엔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는 미타이 기요시 시리즈의 첫 단편집으로 1987년에 나왔다. 맞다. 82년에 나온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로 부터 무려 5년이 지나서다. 81년에 나온 '점성술 살인사건'과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생각한다면 꽤나 오래 걸려서 첫단편집이 나온 셈이다. 이 같은 간극은 미타이 시리즈로선 아주 이례적으로 길다. 바로 뒤이어 나온 '이방의 기사'도 88년에 나왔고 그 뒤로 죽 훑어봐도 2년 이상의 간극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사이에 85년에 나온 '여름, 19세의 초상'말고는 별다른 작품 또한 없으므로(그의 또다른 시리즈, 요시키 다케시도 89년이 되어서야 두번째 장편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가 나왔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작품 정말 물건이다. 꼭 한 번 벗해보시길.) 여기 실려 있는 네 단편들을 1년에 한 편씩 썼다고 해도 왠지 믿겨질 정도다. 아무튼 시마다 소지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세월이 여기에 녹아있는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고 느낀 것인데 나는 이게 시마다 소지가 '미타이 기요시'란 캐릭터를 개인적으로 아꼈기 때문은 아닌가 싶어진다. 그렇게 여기게 된 이유는 여기에 실린 '숫자 자물쇠', '질주하는 사자', '시덴카이' 그리고 '그리스 개' 모두가 하나같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미타라이'라는 인간의 매력을 흠뻑 맛보게 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소설엔 그냥 명탐정만은 아닌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 한없이 오만하고 경찰이 두 손든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니면 잘 나서지도 않는, 정의감 보다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추리 오타쿠로서의 그의 모습 보다는 그도 불쌍한 이들에 대해서는 연민('그리스 개'에서 원래 의대에서 천재로 통했던 그가 의대를 그만두게 된 이유에서 나타나듯)과 공감을 가질 줄 아는(크리스마스에 불쌍한 한 아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미라타이의 모습은 뜻밗이었고 그래서 더욱 뭉클하기까지 했다.) '인간' 미타이 기요시의 모습이 더 많이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실린 네 단편들은 다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심이기도 하다. 한데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미스터리들마저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세공된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달리 말해, 이번엔 어떤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을 보여줄 것인지가 먼저 선택되고 그에 따라 미스터리의 설계가 이루어진 것 같다. 혹,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더딘 걸음이 되었던 것도 시마다 소지 자신이 이 미타라이란 캐릭터를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할 것인지 공들여 설정하느라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말미엔 '신(新) 미타라이 기요시의 의지'란 제목의 시마다 소지가 직접 쓴 '미타라이 캐릭터'에 대한 후기치고는 다소 긴 글이 있는데 어째 범상하지가 않다. 그는 타인을 대하는 미타라이 기요시의 태도가 자신이 생각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문제점에 대해 하나의 대안으로써 형성했다고까지 하고 있으니. 미타라이는 시마다 소지에게 그냥 훌쩍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부여한 의미가 너무도 커서 시마다 소지는 미타라이 기요시는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그 어떤 것이든지간에 각색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끼는 캐릭터이니, 그 매력의 세공을 위해 1년쯤 걸렸다해도 어째 무턱대로 '그럴리가' 할 수 만은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만큼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를 열대의 스콜 한 가운에 있는 것과도 같이 흠뻑 느끼게 하는 것은 달리 또 없으니 미타라이 기요시에게 개인적 매력이나 흥미를 느꼈다면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책으로 보인다.

 

 명색이 그래도 리뷰인데, 실려있는 네 개의 단편들에 대해서 그나마 대략적이더라도 설명은 해야할 것 같다.

 

 '숫자 자물쇠'는 알리바이 트릭에 관한 것이고, '질주하는 사자'는 태풍이 부는 날 밤, 그것도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주 짧은 시간에 11층의 꼭대기 방에서 한참 떨어진 열차 선로 위에 시체가 있을 수 있게 되었나 하는 범행 방법의 트릭을 다룬다.(엘러리 퀸 같은 본격 미스터리라, 과연 엘러리 퀸이 했었던 '독자에 대한 도전'까지 들어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만든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기인 '시덴카이'를 말하는 제목의 단편은 분명 셜록 홈즈의 '붉은 머리 연맹'을 오마쥬한 것으로 그와 똑같이 등장인물이 당한 기묘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힌다. '그리스 개'는 스미다가와 강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유괴에 관한 미스터리다. 여기엔 또 본격 미스터리라면 빠질 수 없는 암호 미스터리까지 나와서 감칠맛을 더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시덴카이'다. 캐릭터의 묘사가 좋았고 마지막에 당한 이의 독백도, 그것을 묘사한 시마다 소지의 연출도 좋았다.(진짜 매력적으로 연출되었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밝히지 못한다는 게 유감이다.) '숫자 자물쇠'는 시마다 소지에게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와 같은 면모가 엿보여서 더욱 소중한 단편이다. 그러고보면 '시덴카이'도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이 단편집이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에 치중하고 있는 걸 보면 시마다 소지 자신도 초기에는 매그레와 비슷하게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를 이끌어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 단편들은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의 베일들을 하나씩 벗기고 있다. '숫자 자물쇠'에서는 그 이름이 '화장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밝히고(이 때문에 '시덴카이'의 화자는 미타라이의 명함을 보고 분명 자신을 놀리기 위해 지은 가명 같은 것이라 여기기까지 한다.) '질주하는 사자'에서는 그동안 시리즈를 봐 온 나 역시 전혀 몰랐던 전세계에서마저 손꼽히는 기타 연주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태풍이 몰아치는 고층의 아파트에서 그는 불어닥치는 태풍 소리를 압도하고 현역 재즈 연주가들조차 덜덜 떨릴 정도의 빠른 속주와 현란한 테크닉을 보여준다. 그것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 집에서 치면서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미타라이 기요시의 넘사벽 천재 만들기는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던 것 같다. '시덴카이'에서는 해리 케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처럼 남은 7년동안이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기이한 경험을 멀리서 엿듣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해결해 준다. 마지막 '그리스의 개'에서는 그가 일본 제일의 의대에 다녔으며 거기서조차 넘사벽의 천재로 인정받았다는 걸 알려준다. 미타라이란 이름은 아무래도 '톱-랭크'와 같은 의미인가 보다. 그러던 미타라이가 왜 점성술이나 하면서 할 일없는 백수로 있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그 단편은 말해준다. 어딜가나 여성들이 꽃으로 날아드는 벌들처럼 달라붙는 미타라이이지만 왜 그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개랑 하겠어!"라고 대답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바로 거기서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미타라이란 인물에 크게는 매력, 아무리 적어도 호기심을 느끼지 않기란 힘들다. 읽었을 때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왜 그토록 미타라이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는데(같은 의문을 미타라이의 단짝 이시오카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만 삐딱한 것은 아니지 싶다.) 이유가 있긴 있었다. 난 그걸 최근에 나온 미타라이의 만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다른 곳으로는 절대 미타라이 시리즈를 각색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런 시마다 소지의 지조도 세월에 부대끼다 보니 물러진 것인지 미타라이 시리즈의 단편들이 만화가 되어 나오고 있다. 지금도 모닝이란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데 벌써 단행본으로 두 권이나 나왔다.

 

 

 

 

 위에서 아래로 각각 1권과 2권의 표지이다.

 그리고 2권의 커버에 그려진 저 남자가 바로 '미타라이'이다. 헐~

 

 

 

 보다 자세히는 이런 모습...

 시마다 소지가 만들어 놓은 것만 해도 넘사벽의 천재인데,

 만화가는 한 술 더 떠서 넘사벽의 꽃미남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과연, 이런 용모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인가...

 

 아무튼, 1권에 2편의 이야기가 들어가는 이 만화 '미타라이 탐정의 사건 기록' 2권에 바로 '숫자 자물쇠'가 실려있다. 미타라이의 진한 인간적 매력이 우러나온 이 단편이 만화로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지 궁금한데 언젠가 부디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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