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에 보관된 랜턴 슬라이드 몇십장을 복사를 위해 빌렸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슬라이드는 필수였다. 강의 때도 필요하지만, 학회 때는 그 중요성이 더더욱 커진다. 학회라는 게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 알리는 거니까.


내가 조교 때는 학사DP라는 곳에다 슬라이드를 맡겼다. 저녁 때 맡기면 다음날 오후 정도는 슬라이드를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학교에서 300미터가 좀 넘는 정도니 나같이 날렵한 놈이 맘만 독하게 먹는다면 1분 안에 끊을 수 있는 거리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당시 나처럼 날렵한 건 아니어서, 거길 가는 일조차 마음을 크게 먹어야 했다. 우리 과에서는 사무실 아가씨가 거길 다녀오는 걸 전담했는데, 게으르고 일을 못한다는 평을 듣던 그 아가씨는 거기 심부름을 시키면 한시간이 보통이었다. 하긴, 우리 모두 싫은데, 그 아가씨라고 해서 그 먼 길을 가는 게 좋았을까.


그러다 그 아가씨에게 축복이 될만한 일이 생겼다. 동인포토라는 곳이 학교 근처에 문을 연 것. 거리가 가까워져서 좋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는 출장서비스라는 획기적인 서비스를 실시했는데,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오전과 오후에 우리 학교를 들렀다. 아침에 슬라이드를 맡기면 오후에 갖다주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과 딱 맞아 떨어지는 서비스를 펼친 동인포토는 당연하게도 우리 학교와 병원을 평정해 버렸다. 우리교실 아가씨는 학사DP에 가는 대신, 동인에 전화를 해서 언제까지 와달라고 얘기만 하면 됐다.


다시금 시대가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실용화된 빔 프로젝터 덕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슬라이드를 만들지 않는다. 컴퓨터상으로 자신이 직접 슬라이드를 만들 수 있기에, 발표 직전까지만 슬라이드를 완성하면 된다는 것도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면 그동안 슬라이드를 만들어 오던 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아침, 슬라이드 복사를 위해 동인포토에 들렸다. 6년, 혹은 7년만의 방문이지만, 동인포토는 망하지 않았고, 그들은 아직도 날 기억했다. 요즘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빔 프로젝터로 옮겨가, 학회 때 일반 슬라이드를 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강의 때도 사람들은 빔을 쓴다. 하지만 나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은 아직도 핸드아웃을 나눠주고, 칠판에다 뭔가를 쓰며, 학생에게 슬라이드를 돌리게 하면서 강의를 한다. 동인포토가 먹고사는 비결은, 나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직도 만만치않게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지난학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나처럼 칠판을 쓰는 사람이 또 있냐고. 다행히도 학생들은 있다고 대답한다. 그들에게 말했다. “혹시 다 없어지면 꼭 말좀 해줘요. 꼴등은 하지 말아야 하니까” 정보화라는 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나같은 사람에게는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난, 정보화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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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천국의 계단>을 보고 있긴 하지만, 드라마의 구성이 부실하다는 느낌은 지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계속 보느냐면, 이왕 보기 시작한 거니까 그런 것도 있고, 최지우와 권상우가 행복하게 잘 살고 유리와 유리엄마가 몰락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 바램은 헛된 공상이 될 것 같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최지우가 안구암으로 죽는다니까. 어려서부터 주입된 권선징악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런 식의 결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지라 시청자들은 게시판에 몰려가 “최지우를 살려내라”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된, 그래서 하나의 압력단체가 되어버린 시청자들의 견해가 최지우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현 단계에서 난 신현준이 너무 짜증난다. 멋있는 권상우를 볼 때는 기분이 좋고, 악녀지만 귀여운 김태희도 너그러이 봐줄 수 있지만, 신현준이 나올 때는 채널을 돌려 버리고 싶다. 울적한 표정에 꾀죄죄한 옷차림,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하는 짓은 외모를 능가해 버린다.


일단 기억을 잃은 최지우를 5년간이나 데리고 있던 것은 참으로 나쁜 짓이다. 최지우가 그걸 쉽게 용서하는 것은 드라마니까 그런 것일테고, 실제였다면 반경 5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게다. 권상우와 마주치지도 못하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상우와 만나자 옥상에서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더니, 최지우가 기억을 되찾자 “다 말하려고 했다는 어줍잖은 변명을 해댄다. 물론 드라마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런 인간성이라면 말을 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모든 게 탄로난 뒤, 떠나겠다고 폼만 잡고 출발을 질질 끈 것도 참으로 짜증이 났다. 바로 떠나면 되지 자기 집에서 문을 잠궈놓고 하루를 보낸 건 또 뭔가.


좋다. 그런 잘못을 다 잊고, 자기를 따라나선 최지우를 권상우에게 돌려보낸 건 평가할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깨끗하게 사라져 준다면 모든 걸 용서해 줄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권상우와의 재회를 뒤에서 보고 있다가 최지우에게 전화를 건다.

“행복하니?”

아니 행복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지가 그린 벽화를 보고있다가 최지우에게 들키는 장면도 그렇지만, 약혼식장에 난입한 건 그가 최지우의 행복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상우가 최지우에게 반지를 주는 순간, 왜 거기 들어가 “한정서!”를 외친단 말인가? 최지우는 권상우의 반지를 포기한 채 신현준을 따라나서고, 경찰서까지 쫓아간다. 그때 신현준은 이렇게 말한다.
"나 이사람 몰라요!“

이 인간, 혹시 정신병 아닌가? 모른다고 할거면, 왜 약혼식장에 들어가 파토를 놓는가? 권상우가 유리와 약혼하는 것을 막기위해? 자기가 소란을 피우면 그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권상우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최지우가 한때 좋아했던 남자가 자꾸 나타나면 맘이 불편해지기 마련인데, 왜 자꾸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집에는 왜 안들어가?”라는 최지우의 말에 신현준은 이렇게 답한다.

“니가 찾아올까봐” 후후, 착각도 자유지만, 그렇게 최지우를 떼어놓으려는 사람이 허구한날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건 진짜 말이 안된다. 최지우 집앞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질 않나, 뻑하면 전화해서 행복하냐고 묻질 않나.


얼토당토않게 신현준은 권상우에게 찾아간다. 왜 다른 여자랑 약혼했냐고 윽박지르고, 최지우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을 한다. 아, 짜증나. 자기만 아니였다면 최지우는 필경 행복하게 살았을게다. 유리가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해도. 그런데, 최지우가 겪는 모든 불행의 제공자가 권상우에게 찾아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건 말이 안된다. 이제 그의 역할도 끝난 것 같은데, 우중충한 그의 얼굴을 드라마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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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꿈 2004-01-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ㅡ 안녕하세요?(인사부터;) 글을 읽다가 제 생각과 너무 맞아 떨어져서 놀랐습니다....뭐, 천국의 계단을 시청하는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 테지만,, 제 친구중에는 천국의 계단을 보고 신현준 안티까지 발전한 애가 있어서,, 신현준을 보고 있자면 안쓰럽기까지 하죠(아주 잠깐이지만;) 이 글 제 서재에 퍼가도 되죠???

waho 2004-02-1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어쩜 전 주위에 천국의 계단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만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번한 내용에 식상하고 질질짜는 것도 지겹고...뭣보다 신현준 초반 패션은 경악이었어요
 

어제 하루종일 아팠다. 오죽했으면 내가 몇년만에 처음으로 병원에를 다 갔을까. 주사를 두대나 맞고 집에 왔지만, 난 계속 아팠고, 열에 들떠 신음했다. 문병을 온 친구 덕분인지 밤 8시쯤, 극적으로 열이 내렸다. 난 몰랐다.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운 곳임을.

오늘 아침, 문자메시지가 왔다. "오늘 약속, 기억하시지요? 혹시 까먹었을까봐"  그제서야 난 오늘 약속을 생각해 냈다. 그래, 오늘 약속이 있었지... 이들과 만나면 언제나 즐겁지만, 즐거운 이상으로 많은 술을 마시는데...

아픈 게 다 낫지 않은데다, 어젠 하루종일 굶었고 오늘 점심도 쥐꼬리만큼 먹은 상태에서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어머님이 날 가만 두려하지 않을게다. 어머니가 때리려 하면, 이렇게 말해야지. "나 환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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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1-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기운으로 사흘째 버티던 어제, 내가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술약속이 있음을 알았다.
빠질 수 없는 이유는 그저께, 그그저께의 술자리는 시커먼 남자들과의 약속이지만,
어젠 미녀 둘과 마시는 자리인데 어찌 내가 빠질 수가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 특히
어머님은 기가 찬 듯 "맘대로 하라"며 냉정하게 전화를 끊으셨지만, 보통의 남자라면
나보다 더 아픈 상황에서도 나처럼 행동했으리라고 믿는다.

물론 술자리는 즐거웠지만, 하루 반을 꼬박 굶은 나의 위는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술은 열심히 마셨어도 평소에 미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소주 한병과 맥주 2-3천 정도?
부끄러운 기록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언제나 난 맛이 가도록 술을 마셨는데.
한시쯤 집에 들어간 뒤 4시까지 끙끙 앓았다. 아침에도 거의 맛이 간 상태였지만,
전날 술을 마신 게 후회되진 않았다. 그리고 억지로 출근을 했더니 이젠 좀 괜찮은 것 같다.
밥은 여전히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점심에도 라면을 시켜 몇가닥 먹다가 내려놓고 말았다.
가만, 이러다보면 살 빠지겠는걸? 입맛이 며칠만 더 없다면, 간만에 체중계에 올라가 봐야겠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것이겠지^^.
 

아침에 몸이 안좋다는 생각을 했다. 약국에 가서 몸살약을 사먹고 약기운으로 하루를 버티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일찍 집에 왔다. 술약속에 맞춰 가려면 6시에는 나가야 하기에, 알람을 틀어놓고 디비져 잤다.

그런데,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전부터 만들어진 약속이고, 오랫만에 보는 친구들인지라 꼭 가야 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살아야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디비 잤다. 조금 살아난 것 같더니, 약기운이 떨어지니 다시 아프다. 문자메시지가 왔다. 김여정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를 소개하기 위해 내가 얼마전 쓴 글을 퍼온다.

[제목: 이 여인을 보라!

지금 세계경제는 완연한 회복세다. 작년에 세계 각국은 다들 플러스 성장을 했고, 올해는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거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겨울이다. 개업을 하는 친구들은 다들 장사가 안된다고 난리다. 왜 그럴까. 우리 경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출은 작년 11월 이미 100억불의 경상흑자를 기록했고, 매달 수출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데 말이다.

이유는 내수의 부진이다. 경제침체로 인해 얼어붙은 소비감소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사오정, 오륙도에 이어 삼팔선까지 등장, 언제 잘릴 지 모르는 터에 맘놓고 소비를 할 수가 없는 노릇이고, 외환위기 탈출에 한몫을 했던 신용카드가 지금은 소비를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는 판국이다. 맨날 경제가 안좋다고 아우성을 치는 우리 언론들도 소비 감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걸핏하면 "IMF 때보다 안좋다"는 식당 주인들의 인터뷰를 내보내는데, 누가 돈을 쓰겠는가.

이런 와중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 여인이 있다. 이름은 김여정. 나이는 이제 막 삼십대에 진입했다. 직업은 작가인데, 매우 능력있는 작가라는 것을 분위기로 느낄 수가 있다. 그 작가일을 해서 버는 돈의 대부분을 그녀는 술마시는 데 투자한다. 그녀가 뭔가를 잊기 위해, 혹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마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술을 마실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를 살려야 해!" 술을 마시는 와중에 이따금씩,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한다.

"지금 경제 살리고 있어요!"

12월 31일날도 그녀는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값도 터무니없이 비싼 것 같구요. 그래도 경제를 살릴래요!"  그녀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뭉클하지 않는다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리라. 난 그녀로부터 2004년 경제의 희망을 본다. 혼자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고, 어찌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같이 모모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를 뚫듯이,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어진다면 한국 경제는 2004년에 웅대한 도약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게 된다.

늦은 밤, 어디선가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여정님이 또 경제를 살리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난 지금 마신다. 너는?" 그래서 답을 했다. "아파 죽겠어요. 오늘 하루 쉴래요"

그러자 그녀의 언성이 높아진다. "아니 지난번에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는 한몸을 희생하면서 경제를 살리라고 하더니, 내가 하면 불륜이고 니가 하면 로맨스냐?" 논리정연한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니가 쉬면 농땡이고, 내가 쉬면 더 나은 도약을 위한 청량제다"라고.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아프고 나면 정말 건강만큼 소중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야 며칠 지나면 다시금 원기를 회복할테고, 그때가 되면 예전처럼 술을 마시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어깨가 무겁다. 그들 몫까지 내가 대신 마셔줘야 하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에 좀더 유념해야겠다. 오늘 밤에도 둥근 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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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이가 들고나서 나에게 정착된 두가지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굉장히 힘들어졌기에, 기존에 있던 친구들을 유지, 보수, 관리하며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나서 불편한 사람을 억지로 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불편한 자리에 나가 억지로 만든티가 역력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이제 그런 짓을 하기가 귀챦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하지만, 앞으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겠다는 얘기다. 두번째 원칙에 너무 충실해져서인지 최근 들어서 친구를 만나면 단점만 보이고, 그래서 안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건 내가 "재는 원래 그런 애야"라면서 친구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걸 기꺼이 감내해 왔던 데 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조금 올라가자 내 인내력이 많이 감소했고, 그래서 그 단점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리라.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 편한 인간이 아닐 것이며, 내 친구들 중에는 나의 그런 점을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참은 애들이 많을 것이다. 30세가 넘어서 "너 이런 게 나쁘니 고쳐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린 안맞아. 그러니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깐.

편하기 짝이없는 친구 관계지만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이렇듯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단점을 빌미로 하나씩 하나씩 맘 속에서 지워 나간다면 내 주위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겠지. 친구의 단점을 보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력을 키워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글과 실제는 많이 다른가보다. 어제 술자리에서 한 친구를 지웠다. 분명 내 친구로 알고 지내온 녀석이지만, 그는 내게 커다란 배신감만 던져줬고, 그걸 지적하는 나를 "편집적"이라며 비난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다신 날 볼 수 없을거야'라고.

난 그동안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가 많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뿌듯하게 여기기까지 했지만, 그게 그럴 일은 아닌 것 같다. 외환위기 전의 한국 경제가 그랬듯, 내가 친구라고 믿었던 애들 중에는 많은 거품이 섞여 있었던 거니까. 주변에 있다고 언제나 친구는 아니며, 중년이란 나이는 그 거품을 골라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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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1-23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와닿는 글이네요...제서재로 퍼갈께요~^^ 저 중략된 원문이 궁금해서 끝까지 둘러봤는데 여기엔 없나봐요??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