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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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은 이번이 4번째인데, 잘나가다 '이게 뭐야?' 소리가 나오게 했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책은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시작부터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오스터의 흡인력도 여전히 탁월했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책은 '미남 주변에는 이쁜 여자가 꼬인다. 하지만 이쁜 여자를 너무 밝히면 망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다. 잘생긴 영화배우 헥터는 소문난 바람둥이다.
[헥터는 몇명인지도 모를 예쁘장한 여배우들과 계속 놀아났다....함께 침대로 가고 하기를 즐기면서]

그런 그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가 오후 세시에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데, 다섯시경이 되자 그들은...바닥에서 알몸으로 뒤엉킨 채 이리저리 구르며...' 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길래?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2, 3일에 한번씩은 그녀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헥터는 다른 영화를 찍다가 엄청난 미인을 만난다. '그녀에겐 야성적인 기질...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도발적인 매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헥터는 한달간 67통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녀를 사로잡는다. 잘생기기만 해서 되는 건 아니고, 가끔은 이런 노력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그전 여인에게 '바쁘다고 둘러'대며, 야성녀와 결혼하기로 맘먹는다. 하지만 일이 잘 안되어 두 여인이 싸우는 바람에 헥터는 도망가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는 그전 여인의 고향으로 가 그녀 아버지가 하는 가게에 취직하는데-성격도 이상해!-거기서 그전 여인의 동생을 만난다. 동생의 미모는 어땠을까. '얼굴 전체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서 언니보다 한두 급수는 예뻐 보였다' 사람이 잘생겼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라,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 역시 그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결혼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황급히 거기서 도망친다. 양심상 그러기도 했고, 또다른 문제도 있어서.

낯선 도시에 온 헥터는 우연히 은행에 갔는데, 거기서 또 미인을 만난다. '그녀는 감탄스러울 정도의 미모에...자부심 강한 눈빛...' 그때 하필 은행강도가 그녀를 인질로 잡고, 헥터는 그녀를 구하려다 총을 맞는다. 그녀가 보기엔 생명의 은인인 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는 헥터와 결혼을 한다. 이건 헥터가 잘생긴 탓도 있는 것이, 내가 그랬다면 고맙다고 사례나 좀 하고 말았을 거라는 거다. 그 후 헥터는 제법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을 따져보면 사는 것같지 못하게 살았는데, 그러니까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여자를 울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폴 오스터가 이 서평을 못보는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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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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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대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곤 한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일파는 나쁘다고 욕하기만 할 뿐,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노자는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배경을 밝힘으로써 그들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렇다면, 보수언론이나 이문열, 복거일 씨처럼 박노자 역시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변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글이나 말로는 친일파에게 엄격한 필주를 가하곤 하는 우리지만, 친일파와 결부된 현실에 대해선 놀라울 만큼 너그럽다. 물론 역사 인물들의 훼절을 엄정하게 밝히는 작업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사성적 광기가 '어떤 구조적인 이유에 의해 형성됐는가' 그리고 '현재까지 어떻게 계승되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지 않나 싶다. 친일파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대중적 의식이 있어야 '전 국민적 공동체의 미덕'을 기리는 어용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75쪽)]

'국기에 대한 맹세'로 대표되는 소름끼치는 우리의 국가주의가 군사독재 정권 때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박노자는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적 세계관이 근대 초기의 지식인들에게서 배태된 것이라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우리의 민족주의가 피지배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이해하지만, 팽창적 민족주의가 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다. 그는 ''파업이 국민경제를 좀먹는다'는 보수 신문의 말을 '글쎄, 그런가보다'고 그대로 믿'는, 순치되버린 우리의 의식을 질타하며, 개인주의를 빙자하여 현실과 타협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꾸짖는다.

[현대인들이 직장에서 상사에게 무조건 고분고분하고, 집에서는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권위주의 질서의 보루인 족벌신문들을 읽으며, 소비 생활에서 자신의 취향을 내세우는 것만으로 개인주의를 자처할 수 있을까?]

물론 그는 '아니'라고 한다. 개인주의자는 자기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아니란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라면 '사립학교 재단이 자기가 낸 등록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 왜 시간강사들이 유독 많은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박노자의 말이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자유가 침탈당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사람이니까. 요즘 대학의 일부 신세대들처럼 정치적 무관심을 빙자해 권위주의적 극우와도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개인주의는 개인주의가 아닌 거다. 그는 말한다. '그들에게 개인주의의 참뜻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은 진보 진영의 급선무다'

그의 책은 늘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무런 의식없이 '대-한민국'을 외치고, 혼자만의 안일에 젖어 소수자들을 외면하는 나의 행태를 반성해 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런 반성을 하는 건 책을 읽는 그 순간 뿐이고, 책을 덮고나면 난 다시금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박노자가 책을 많이 써서 나로 하여금 늘 그의 책을 들고 있게 하는 것, 그것만이 날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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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 젊은 작가 6인의 독신 테마소설
김현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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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을 읽을까 책꽂이를 뒤적이다, <독신>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여성작가 여섯명의 단편소설을 모은 건데, 전부다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언제 이런 책을 주문했을까 싶어서 앞페이지를 펴니 '증정분'이란 글씨가 눈에 띈다. 책 뒷면에 써있는 '문학동네 창립 10주년 사은증정도서'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다른 책을 살 때 보너스로 얻은 책이라는 걸 알았다. 서비스로 얻은 책이라는 걸 알자 갑자기 읽기가 싫어졌지만, 요즘 '독신'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라 첫 페이지를 폈고, 사흘을 낑낑대다 겨우 다 읽었다.

신세대 작가들이 쓴 글답게 '쿨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감동적이거나 무릎을 치게 만들거나 하는 대목은 없었던 것 같다. 예컨대 이런 대목을 보자. [요즘 춘향이에게는 변사또가 없다. 요즘 변사또는 여자들에게 너무 인기가 좋기 때문이다...춘향이가 몽룡을 기다리다 포기하는 것인, 몽룡이 춘향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몽룡에게 어사 마패가 없어서다 (106쪽)]
그런대로 멋지게 들리는 말이긴 해도, 솔직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한번 하고자 하는 변사또가 왜 인기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 없지는 않다. 나이가 제법 든 여성이 맞선을 보러 갔다. H라는 남자인데, 무슨 직장인지 몰라도 오후 네시면 퇴근한단다. 그럼 심심하지 않냐는 여자의 물음에 H는 '가끔 적적할 때는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심심한 건 '정말로 아무 할 일이 없는 상태'라나. 그럼 뭘 하느냐고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밥 잘 해먹습니다. 반찬도 간단한 것은 제가 만들고...'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에게 남자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 남자, 결혼하는 걸 무슨 밥순이를 들이는 것으로 아는 걸까? 언젠가 이혼이 급증하는 이유에 대한 토론프로를 본 적이 있다. 패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대가 변화했는데 남성들의 의식은 그대로인 것'이 이혼이 늘어나는 이유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독신으로 사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헤어지면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물론 밥 좋아해요. 특히 맛있는 거 먹는 걸 정말 좋아해요. 그래요, 누군가 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행복하게 잘 먹어보이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하지만요, 그걸...제가 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216쪽)'
가슴이 시원해지는 멋진 말이다.

좌우지간 독신은 만사가 편하다 (특히 명절 때). 주위의 곱지않은 시선만 아니라면 혼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편한 일인가. 하지만 거기에는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먹고 살 수 있는 경제력과,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몰두할 수 있는 취미, 이 정도는 있어야지 않을까 싶다. 몇개를 더 추가한다면, 혼자서 밥을 차려먹을 수 있는 기본적인 요리 솜씨가 있어야 하며, 매혹적인 이성을 만났을 때도 흔들리지 않을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할 것이다. 남은 여생을 혼자서 살고자 하는 나는 이 중 과연 몇가지나 갖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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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공간의 환상 다빈치 art 5
안토니 가우디 지음, 이종석 옮김 / 다빈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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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에 관한 책이다. 건축에 관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책을 읽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원래 취미라는 게 자기 하는 일과 다른 분야를 파고드는 것 아닌가.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가우디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사진에 나온, 그가 지은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것들, 물론 돈도 엄청나게 들었다. '값싸고 실용적인' 것만을 좋은 건축으로 치는 나에게 가우디의 건물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그의 장인정신에 동화되어, 기차에 치어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의 건물들이 있는 스페인에 꼭 한번 가고 싶어진 것도 이 책이 남겨준 숙제다.

가우디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사람이니 그렇게 훌륭한 건물들을 지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아래사람들은 죽어난다. 그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매우 피곤하게 했다(49쪽)] 그가 지은 건축물들이 지금도 튼튼하게 서 있는 건, 그 완벽주의 때문이리라. 성수대교나 삼풍이 무너진 걸 보면 우리나라에는 완벽주의자가 너무 없는 것 같은데, 다른 분야는 몰라도 건축만은 완벽주의자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가우디도 늘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가우디는 '많은 시험과 과제물 제출에서 한번에 합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제출한 도면들은 여러 교수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다(104쪽)' 학교 교육이 한 천재의 창의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가우디는..8년만에 전 학과를 마칠 수 있었지만, 졸업시험 성적은 최하위였다...가우디의 독창성과 대담함은 심사위원회를 불쾌하게 했고 그의 설계안은 가장 낮은 점수로 통과했다' 그 교수들이 나중에라도 후회를 했는지 모르겠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온갖 찬사를 받고 있는 지금은 그런 교육풍토가 조금은 바뀌었을까? 우리나라의 가우디들은 지금도 학교에서 죽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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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슬라보이 지젝 엮음, 김소연 옮김 / 새물결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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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오는 라캉,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치고 만만한 책이 있던가. 이 책을 가지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과 세미나를 했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상 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세미나를 중단했고, 남은 부분은 혼자 읽어야 했다. 세미나를 할 때는 내가 맡은 부분은 두번, 세번씩 읽고, 정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런 식으로 하니 어렵게만 보이던 이 책도 제법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남은 부분-80페이지 정도?-을 혼자 읽어 나가려니, 책에다 줄만 뻑뻑 긋게 되고 머리에 들어오는 건 별로 없다. 이런 어려운 책은 역시나 여럿이서 같이 읽어야 한다. 세미나라는 게 사람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자신이 이해못한 부분을 남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제목에서도 나왔듯이 이 책은 히치콕의 영화들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책을 읽다보니 안되겠다 싶어 그의 영화들을 몇편 봤는데, 그의 영화 세계는 정말이지 경탄스러웠다. 요즘이야 영화 한편당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이고, 컴퓨터 그래픽이 있어 별의별 장면이 다 가능하지만, 히치콕은 돈 몇푼 안들이고-그당시로서는 많았을 수도 있지만-순전히 뛰어난 아이디어만 가지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물론 지금 보면 시시한 영화도 있지만, '사이코'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등의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재미를 선사하고, '다이얼 M을 돌려라'는 지금도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렇게 뛰어난 감독이니 그에 관한 영화들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책도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어떤 이의 작품세계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그의 사후에 이루어지는 게 좋다. 예컨대 내가 곽경택 감독을 주제로 '이 장면은 이러이러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했는데, 곽경택이 전화를 해서 '그거 아닌데?'라고 해봐라. 내가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뭐든지 그 사람의 사후에 하는 게 가장 안전한 것, 지젝이 히치콕의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설을 풀어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어려운 책을 읽고나니 머리가 영 무겁고 멀미가 나려 하지만, 다 읽은 기쁨 또한 지대하다. 머리에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지만, 현대 영화의 전범 격인 히치콕의 영화들을 분석한 책을 읽으니 앞으로 영화를 볼 때 '권상우가 멋있어요!'라는 차원이 아닌, 한단계 성숙한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게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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