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사이트에서는 2003년 최고의 영화를 뽑는 네티즌 투표가 진행 중이다. 1위는 올드보이의  최민식, 2위는 <살인의 추억> 송강호, 3위는 <실미도> 설경구, 4위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권상우, 다들 이해할 법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5위는...올란도 블룸이란다. 얼굴을 보니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로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난 단체 주인공 중 하나에 불과한 그가 <똥개>의 정우성이나 두편이나 개봉된 <매트릭스> 시리즈의 키애누 리브스를 제치고 5위에 오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잘생긴 얼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 훤칠한 미모를 지닌 레골라스는 아마도 여성팬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5위에 자리매김했을게다. 그가 1위가 안된 것은 우리 여성들 중에 양심있는 여성들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느냐면, 오늘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드디어 봤기 때문이다. 예고편만 봐도 어떤 수준인지 딱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 영화. 볼 걸 이미 다 봐서 더이상 볼 영화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그 영화는 내 수준에 딱 들어맞는 영화다. 난 원래 웃기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그렇다고 그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니, 주연으로 나왔던 정준호 얘기만 좀 하겠다. 레골라스 얘기랑도 일맥상통하니, 내가 왜 서두에 레골라스 얘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거다.

정준호는 이번이 벌써 다섯번째 맡는 주연이지만, 그의 상대역 공형진은 이번이 첫번째 주연이다. 것도 13년만의 첫 주연이란다. 자칫하면 시시한 영화로 끝날 수 있었던 이번 영화를 살린 것은 단연 림동해로 열연한 공형진 덕분, 본 사람들 모두 공형진의 연기가 일품이었다고 칭찬한다. 딴지일보의 영화평이다. [....공형진의 개그 타이밍을 맞추는 연기는 거의 송강호와 삐까맞다이 먹을 정도로 훌륭했는데..] 

박중훈이라는 배우는 충무로에서 데뷔할 때,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했단다. 감독에게 울며 통사정을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나리오를 다 외워가며 출연을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정준호는 어떻게 데뷔했을까? 그건 잘 모르지만, 박중훈처럼 눈물겨운 구애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잘생긴 애가 제발 좀 나오게 해달라고 비는 장면은 상상력이 제법 있는 나도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범수라는 연기자도 있다. 외모를 보면 '뭐야 나보다도 못생겨서 배우라고?'란 말이 절로 나오지만, 연기 하나만은 일품이다. 왜? 그거라도 없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거든. 반면에 장동건을 보자. 대학을 두번 실패해 좌절하긴 했겠지만, 일단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고 난 뒤 그 처지는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승승장구했는가. 연기를 잘할 필요가 뭐가 있담? 그저 초롱초롱한 눈빛만 보여주면 다들 괴성을 질러대는데. 차인표도 그랬다. 색소폰인가를 불어대는 장면이 하도 멋있어, 내가 게이가 아닌지 의심이 갔을 정도.

못생긴 애들이 하나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연예계에 입성한 반면, 얼굴만 잘생기면 거저 먹고 들어간다. 얼굴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 그들이 세상을 참으로 쉽게 사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세상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재벌2세인 이재용, 아니 그건 너무 거대하니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 아들을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조각처럼 잘생기던지, 돈많은 집에서 태어나든지 둘 중 하나를 갖췄다면 인생의 경쟁에서 굉장히 앞서나간 거다. 하지만 너무 좌절할 건 아니다. 잘생긴 애들이 얼굴만 믿고 나태할 때, 열심히 연기연습을 해서 역전할 수가 있으니까. 박중훈도 그렇고, 송강호나 이범수도 연기력 하나만 가지고 일가를 이룬 사람들 아닌가. 송강호라면 아마도 장동건이 부러울 게 없을 거다.

이렇듯 얼굴의 열세는 연기로 커버된다 치자. 그럼 돈 많은 건 어찌 만회할까? 어릴 적만 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만회될 줄만 알았다.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난 천하를 얻은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같이 다니던 애들이 내 밑에 있었다. 그런데 커보니 그게 아니다. 내 동창들은 지금 모두다 어디 호텔 사장이고, 극장주이고, 거대 투자회사 대표고...어쩌고....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하면 내가 가장 극빈자다. 호기를 부리느라 "오늘은 내가 쏠께!"를 외치기도 하지만, 다음날 후회한다. "이그, 돈도 없는 것이...."

얼굴과 달리 돈은 만회할 수 없는 것, 나중에 다시 태어날 때 선택이란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보다 더 못생겨도 좋으니-그게 가능한지는 의문이지만-돈많은 집에서 태어나는 게 더 좋을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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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청소년들처럼, 나 역시 '영화=악'이라는 세뇌를 오랫동안 당했다. 극장 앞에는 완장을 찬 선도부 선생이 진을 치고 있을 것 같아 극장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벌벌 떨었고. 그런 내가 왜 갑자기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고교를 졸업한 뒤부터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난 영화 이외에 여자랑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등산도 있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밀어를 속삭이는 것도 한 방법인데 말이다. 그저 난 아침 일찍 극장에 가서 길고 긴 줄을 기다려 가며 예매를 했고, 약속시간에 맞춰 영화를 봤을 뿐이다. 이여자, 저여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는 두번, 세번 보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런 세월을 겪으면서 난 '여자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단계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여자를 만난다'는 단계로 옮겨갔고, 정말 봐야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혼자 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화전사'로 거듭났다.

그런 와중에 많은 일이 있었다. <블루 시걸>인가를 보러 가자고 했다가 같이 간 세명에게 밥과 디저트를 사야 했고, <결혼이야기2>를 보고 난 뒤에는 여자친구에게 싹싹 빌었다. 반면 <옥보단>과 <트루 라이즈>를 보고난 뒤에는 서로 "내가 보자고 했잖아!"라며 공을 다퉜다. <백투더 퓨처>를 보고 나서는 보름이 넘도록 영화 속 장면들을 되씹어보기도 했다. 

<스패니쉬 아파트먼트>를 봤다. 알고 지내던 여자분이 적극적으로 추천을 해줘서였는데, 그녀는 참고로 <패스워드>와...그 뭐드라... 비행기 사고를 모면한 친구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영환데... 아무튼 그런 류의 재미있는 영화들을 내게 추천해 준, 한마디로 코드가 맞는 친구다.  그래서 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영화를 선택하면서도 별로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시네코어 8층은 의외로 관객들로 붐볐다. 표에 쓰인 좌석번호를 못찾겠어서 "몇번이냐"고 물어봤더니, 영화를 같이 본 파트너가 이런다. "여기 있잖아요. F에 8번"  짐작하다시피 그녀가 말했던 건 8F,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난 몸을 떨었다. 그럼..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좌석이냐?

영화는 프랑스 영화로, 스페인에 1년 유학을 간 프랑스 청년이 겪은 일들을 담담히 그린 거였다. 요란하게 웃음을 유발하는 헐리우드 영화와 달리, 이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예컨대 주인공이 집을 구하는 장면이다. 먼저 집을 같이 쓰던 여섯명이 식탁에 앉아서 질문을 한다.

그중 하나: 전공은?

주인공; 에라스무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그중 다른 하나: 5년 후 자신의 모습을 말해 보시오.(무슨 회사 취직하냐?)

그들은 애인을 데리고 와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우리 같으면 나머지가 집을 나가거나 그럴텐데 말이다. 그 중 매우 쿨한 척하는 여자애가 여자친구를 데려온다.

주인공: 뭐했어?

여자애: 응. 그녀와 잤어.

주인공: 잤어?

여자애: 응, 나 레즈비언이야.

놀라는 주인공에게 여자애는 덧붙인다.

"니 여자친구는 언제와?" (오면..뭐하려고?)

그 여자는 주인공에게 여자와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여기를 이렇게 만지고... 그 다음에 가슴을 두드려 주는거야"

그 방법을 터득한 주인공은 자기에게 잘해준 남자의 부인-거기 나온 인물 중 가장 괜찮았다-과 잔다.

주인공: 고마워. 여자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여자애: 남자애들은 삽입밖에 몰라. 하지만 여자는 그것보다 전희를 더 좋아한단다

삽입만을 지고지순한 진리로 알아온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하숙집에 사는 여덟명 중 같은 국적은 거의 없다.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대로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똘레랑스고, 여러 인종이 모여사는 프랑스에서 똘레랑스의 문화가 정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예컨대 이런 경우,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인: 너희 독일인은 시계처럼 정확하고 합리적이잖아? 그래서 히틀러가 나온 거 아니겠니?

삐져서 나가는 독일인에게 영국인은 따라가면서 말한다. "하이! 히틀러!"

단일민족의 신화에 사로잡혀 온 우리나라, 그래서인지 우리는 외국인을 친구로 대하지를 못하는 것 같다. 백인은 숭배하고 동남아나 흑인은 무시하는, 한마디로 숭배 혹은 경멸이다. 외국인과의 접촉이 더 빈번해지면 나아지겠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소감이다.

1) 아무리 믿어도, 자기 배우자를 맡기면 안된다.

2) 레즈비언은 여자 다루는 법을 잘 안다. 그 여자애가 주인공 가슴을 만지면서 "니가 여자애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다.

3) 소문안난 영화 중에도 보석이 있다. <낭만자객>처럼 선전 요란하게 하는 영화는 한번쯤 의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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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1-21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보다가 지루해서 그만 봤는데. **박스에서 받아서.
 

열심히 <천국의 계단>을 보고 있긴 하지만, 드라마의 구성이 부실하다는 느낌은 지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계속 보느냐면, 이왕 보기 시작한 거니까 그런 것도 있고, 최지우와 권상우가 행복하게 잘 살고 유리와 유리엄마가 몰락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 바램은 헛된 공상이 될 것 같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최지우가 안구암으로 죽는다니까. 어려서부터 주입된 권선징악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런 식의 결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지라 시청자들은 게시판에 몰려가 “최지우를 살려내라”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된, 그래서 하나의 압력단체가 되어버린 시청자들의 견해가 최지우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현 단계에서 난 신현준이 너무 짜증난다. 멋있는 권상우를 볼 때는 기분이 좋고, 악녀지만 귀여운 김태희도 너그러이 봐줄 수 있지만, 신현준이 나올 때는 채널을 돌려 버리고 싶다. 울적한 표정에 꾀죄죄한 옷차림,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하는 짓은 외모를 능가해 버린다.


일단 기억을 잃은 최지우를 5년간이나 데리고 있던 것은 참으로 나쁜 짓이다. 최지우가 그걸 쉽게 용서하는 것은 드라마니까 그런 것일테고, 실제였다면 반경 5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게다. 권상우와 마주치지도 못하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상우와 만나자 옥상에서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더니, 최지우가 기억을 되찾자 “다 말하려고 했다는 어줍잖은 변명을 해댄다. 물론 드라마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런 인간성이라면 말을 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모든 게 탄로난 뒤, 떠나겠다고 폼만 잡고 출발을 질질 끈 것도 참으로 짜증이 났다. 바로 떠나면 되지 자기 집에서 문을 잠궈놓고 하루를 보낸 건 또 뭔가.


좋다. 그런 잘못을 다 잊고, 자기를 따라나선 최지우를 권상우에게 돌려보낸 건 평가할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깨끗하게 사라져 준다면 모든 걸 용서해 줄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권상우와의 재회를 뒤에서 보고 있다가 최지우에게 전화를 건다.

“행복하니?”

아니 행복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지가 그린 벽화를 보고있다가 최지우에게 들키는 장면도 그렇지만, 약혼식장에 난입한 건 그가 최지우의 행복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상우가 최지우에게 반지를 주는 순간, 왜 거기 들어가 “한정서!”를 외친단 말인가? 최지우는 권상우의 반지를 포기한 채 신현준을 따라나서고, 경찰서까지 쫓아간다. 그때 신현준은 이렇게 말한다.
"나 이사람 몰라요!“

이 인간, 혹시 정신병 아닌가? 모른다고 할거면, 왜 약혼식장에 들어가 파토를 놓는가? 권상우가 유리와 약혼하는 것을 막기위해? 자기가 소란을 피우면 그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권상우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최지우가 한때 좋아했던 남자가 자꾸 나타나면 맘이 불편해지기 마련인데, 왜 자꾸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집에는 왜 안들어가?”라는 최지우의 말에 신현준은 이렇게 답한다.

“니가 찾아올까봐” 후후, 착각도 자유지만, 그렇게 최지우를 떼어놓으려는 사람이 허구한날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건 진짜 말이 안된다. 최지우 집앞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질 않나, 뻑하면 전화해서 행복하냐고 묻질 않나.


얼토당토않게 신현준은 권상우에게 찾아간다. 왜 다른 여자랑 약혼했냐고 윽박지르고, 최지우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을 한다. 아, 짜증나. 자기만 아니였다면 최지우는 필경 행복하게 살았을게다. 유리가 아무리 훼방을 놓는다해도. 그런데, 최지우가 겪는 모든 불행의 제공자가 권상우에게 찾아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건 말이 안된다. 이제 그의 역할도 끝난 것 같은데, 우중충한 그의 얼굴을 드라마에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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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꿈 2004-01-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ㅡ 안녕하세요?(인사부터;) 글을 읽다가 제 생각과 너무 맞아 떨어져서 놀랐습니다....뭐, 천국의 계단을 시청하는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할 테지만,, 제 친구중에는 천국의 계단을 보고 신현준 안티까지 발전한 애가 있어서,, 신현준을 보고 있자면 안쓰럽기까지 하죠(아주 잠깐이지만;) 이 글 제 서재에 퍼가도 되죠???

waho 2004-02-1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어쩜 전 주위에 천국의 계단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저만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번한 내용에 식상하고 질질짜는 것도 지겹고...뭣보다 신현준 초반 패션은 경악이었어요
 

강우석 감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다.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를 그대로

따라한 <투캅스>를 보면서 얼마나 부르르 떨었는지,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평소 잘 안하던

독자투고까지 했을 정도. "이 영화는 <마이..>의 표절입니다. 이런 감독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구요"

하지만 매우 희한하게도 강우석은 건재했고, 그는 한국영화를 주름잡는 실력자가 되어 버렸다.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나도 <공공의 적>을 본 뒤로는 그를 하느님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나란 놈은 권력에 참 약한 놈이다.

 

그가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는다기에 가슴이 뛰었지만, 그게 <실미도>라는 걸 알고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사형수들이 북한에 파견되기 위해 훈련을 하다가, 유야무야되면서 대우가

안좋아지자 폭동을 일으켰던 사건. 이런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그 어떤 새로움을 창조하겠다는

걸까? 돈도 장난이 아니게 쏟아부었는지라 이 영화의 흥행 성적이 못내 궁금했다. 하지만

얼마 전 이 영화를 본 내 심복은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말해줬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너무도 잘만든 영화,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졌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좌절감이 그대로 감정이입되었다.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이 영화가 8천원인데, <낭만자객>도

8천원이라고? 낭만자객이 2003년 최악의 영화로 뽑히지 않는다면 이틀 정도는 단식을 할

용의도 있는 나로서는 그 영화를 내 돈을 내고 본 게 너무도 분하다.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영화 가격 심사위원회라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들, 예컨대 멜러파, 액션파, 코미디파 등등이

섞인 위원회가 만들어져 영화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거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낭만자객>은

200원, <실미도>는 1만원 정도가 책정되지 않았을까.

 

박정희를 죽이면 조국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은 김일성이나, 사적인 복수가 조국통일의 초석이 될

것처럼 생각했던 박정희나, 여간 꼴통이 아니다. 김일성을 죽인다 한들 그보다 더한 놈이 집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담? 박정희가 총맞아 죽은 뒤에도 통일의 길은 멀기만 했다는 사실도

김일성의 생각이 오판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북한에 의해 죽었어 봐라. 전 국민적으로

북한을 타도하자는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나지 않았을까? 김일성의 테러 덕분에 공연히 향토예비군만

설립되었으니, 이래저래 고생하는 건 우리 민초들이다. 이놈의 비생산적인 적대관계는 언제쯤

끝이 날까?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다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병기들을 월남전에라도

보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뭔가. 3년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그들을

막으려던 애꿏은 군인들만 죽었지 않는가. 우리 국가는 하여간 국민에 대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비인간적인 부대의 진상이 드러나면 안된다며 "대한민국이 야만국가입니까?"라고

말하는 중정 간부의 모습, 난동을 일으킨 실미도 부대를 "무장간첩"으로 모는 행위, 이것이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던 국가의 참모습이다. 실미도 부대원 하나는 죽으면서

이런다. "무장공비는 너무한 거 아냐?"

 

연기파 설경구의 연기는 언제봐도 훌륭했지만, 허준호의 열연도 칭찬하고 싶다. <걸어서

하늘까지>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저렇게 못생긴 애도 탤런트를 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서 그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장난이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이 영화가 성공한

일등 공신은 단연 강우석이다. <낭만자객>을 만든 윤제균에게 동일한 시나리오를 맡겼어봐라.

돈은 더 쓰면서 한숨을 짓게 만드는 희대의 졸작을 만들지 않았을까? 강우석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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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4-01-0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공의 적에서 그의 진가가 이미 최대한 발현됐다고 보는데 암튼 보고 싶어지네요 흐흐..요즘 쩐이 없어서리 쩝.ㅋㅋ
 

내가 드라마를 보는 건 대개 우연한 계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는 사람의 권유나, 어쩌다 TV를

켰는데 조금 보니까 재밌더라, 이런 식으로. 저번엔 간만에 놀러온 매형과 시간을 보내려니 할말도

없고 해서 TV를 켰다가 <앞집여자> 1회를 덜컥 봐버렸고, 한번 시작한 것은 끝장을 보는 성격 탓에

종영할 때까지 그 드라마에 묻혀 살았다. 평소에는 무심한 척 하더니, 한번 빠져들면 제정신을

못차린다. "너무너무 재밌어요"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쓰기까지 한다.

 

초저녁부터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어제, 우연히 TV를 켰다가-사실 우연히도 아니다. 난 술만

취하면 늘 TV를 켜니깐-권상우가 폼을 잡고 특유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천국의 계단 참 재밌어. 그거 봐"

그 드라마는 이미 10회까지 진행된 상태지만, 인터넷이라는 현대 과학의 총아가 있지 않는가.

오늘 낮, 시간도 많은데 억지로 짬을 내가지고 1회를 봤다. 첫회부터 필이 온다. 선과 악의

대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도가 아닌가.

 

아버지가 탤런트와 재혼을 하면서 곱게 자라던 한정서는 졸라 어렵게 자라던 남매와 의붓남매가

되며, 한정서의 비극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천하게 살던 애들은 못되먹었다는 설정이나 여자는

남자만 잘 잡으면 인생 끝이다라는 매우 유치한 구성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난 이런 선악구도만

나오면 정신을 못차리고 열광하는데. 그간 무수히 많은 선악드라마를 봐 왔고, 이번 드라마

역시 기존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이토록 빠져드는 걸까? 나같은 애가 있으니 방송사에서도

늘 이런 식의 드라마만 방영하는 것이리라.

 

이런 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악은 언제나 강하고, 선은 무력하다.

잘못이 탄로나자 한정서에게 무조건 뒤집어 씌우는 유리, 하지만 정서는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어이없는 표정만 짓는다. 새동생이 거짓말을 하면 사실대로 고해바치던가 할 것이지

"아빠, 어떡해야 해?"라고 울먹이면 문제가 해결되나? 이런 식의 천사표는 참으로 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유리와 이휘향의 음모로 유학을 못가게 되자 "아빠, 안돼요"라고 심난한

표정만 짓지 말고, 왜 유학을 안가면 안되는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말을 해야지

않겠는가. 혼자 힘으로 안되면 자신을 늘 지켜주는 송주오빠도 있고, 정 혼자서 삭이려면

강해지기라도 할 것이지, 침대에 누워 울먹이는 게 고작인가. 그건 착함이 아니라 바보다.

이 세상에는 유리같은 절대악도 없지만, 정서같은 절대선-절대바보-도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서 괴물이 되는 거지, 괴물로 태어난 애는 없는 거다. 질투에 눈이 멀어 동창과 아이들을

죽여버린 그 여인도 살아온 인생 전체가 악으로 점철된 것은 결코 아닐게다. 하지만 온갖

인간적 갈등을 드라마에 투영하려면 재미가 떨어지고, 16부작으로 턱도 없으니, 이런 식의

단순한 구도를 설정한 것이겠지. 앞으로 수요일, 목요일은 되도록이면 일찍 올 생각이다.

그런데... 다음 주는 안되겠는걸.... 술약속이.....허 참....

 

사족: 언뜻 보기에도 왕자같은 송주가 자라서 권상우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한정서가 최지우가 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최지우가 청순가련형은

아니지 않는가? <진실>에서도 늘 당하기만 하는 착한 역으로 나오던데, 글쎄다.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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