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서 몇몇이 모여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꾸 보채자 친구는 이렇게 협박을

한다. "너 자꾸 이러면 '니모' 안틀어 줄꺼야!" 그러자 애는 잘못했다면서, 빨리 니모를 틀어달라고

조른다. 친구가 DVD를 넣어주자 100인치는 되어 보이는 대형 TV에서 니모의 한국말 버젼이

나오기 시작했고, 친구의 아들은 TV 앞에 앉아서 넋을 잃고 영화를 본다.

내가 물었다. "얘 그 영화 안봤어?"

친구의 대답이다. "열번도 더봤을 걸"

"그런데 왜 또봐?"

내가 애들을 키우지 않아서 몰랐을 뿐, 모든 애들은 본걸 또보고 또본단다. 하루에 두세번 보는

일도 있다나. 그 이유를 친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얘들은 영화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되어서 영화를 보니까"

진짜로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DVD 판을 사는 게 별로 아까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가 지루한 듯해서 친구가 다른 채널을 틀자마자 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몸을 흔들며 때를 쓰기 시작한다. 하여간 애들이란....

 

 

 

 

한때 만화랑 인연을 끊은 듯했던 디즈니가 새로운 형태의 애니메이션을 들고나온 것은

<인어공주>가 그 시초였을게다. 만화는 애들만 보는 것으로 알았던 나에게 내 또래의 사람들이

그 영화에 열광하는 현상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라이온 킹>을 봤지만, 애들이나

좋아할 유치한 영화였다는 게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친척 집에서 DVD로 본 <미녀와 야수>

역시 지극히 단조로운 스토리를 가진 애들만의 영화였다. 비록 내 또래의 여자애들 중에는

너무 감동을 받아 두번이나 봤다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니모를 찾아서>는 그런 류의 만화와는 확연히 틀린, 한마디로 말해 차원이 다른

영화였다. TV가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영화를 지배하는 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재미가 있건 없건간에 TV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고, 보는 내내 내게 시원함을 선사했다.

주인공 격인 니모를 지느러미 하나가 짧은 장애인으로 설정한 것도 웬만한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발상이다. 그런 영화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니모>를 봤다면, <오아시스>를

보다가 마음이 불편해서 꺼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다른 캐릭터들도 살아 숨쉬는 듯, 영화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건망증으로 시달리던 파란 물고기는

어찌나 우습던지, 중년의 체면을 반납하고 킬킬거려야 했다.

니모아빠: 혹시 배를 보지 못했나요?

파란고기: 하얀 배 말이지. 봤어. 날 따라와.

파란고기는 헤엄쳐 가고, 니모아빠는 열심히 그 뒤를 쫓는다. 한참 그러다가 갑자기,

파란고기: 바다는 넓은데 왜 내 뒤만 따라와?

니모아빠: 방금 하얀 배를 봤다고 했잖아요. 장난해?

파란고기: 아, 하얀 배. 방금 봤어. 날 따라와.

두번 더 그러자 니모아빠가 화를 낸다. "지금 누굴 놀려?" 파란 고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실은, 내가 건망증이 있어"

 

재미있지 않은가? 상어들이 나오는 장면도 재미있다.

상어1: 상어는 더이상 나쁜놈이 아니다. 물고기들의 친구다! 지난 주 어찌 지냈는지 발표해 봐라.

상어2: 난 지난 사흘간 채식만 했어.

상어1, 3: 와, 대단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파란고기가 지느러미를 다쳐 피가 난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1,

"내일부터 착한 상어 되고, 지금은 물고기를 먹을거야!" 하면서 니모와 파란고기를 쫓는다.

 

친구들이 포커를 치자고 해 보다 말았는데, 사실 난 포커보다 니모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다행히 패가 잘 뜨는 바람에 9만원 정도를 따서 아쉬움이 조금은 줄어들었지만, 기회가 닿으면

비디오로 나머지 부분을 볼 생각이다. 커다랗고 선명한 TV로 보다가 내방 TV로 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긴 해도 말이다. 하여간 그 영화를 보면서 헐리우드의 무서움을 다시금 느낀다.

저렇게 재미있게 만드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 포커를 한번 잡은 적이 있다. 다른 친구는 9 풀하우스였는데, 내가 막판에 만원을 치자 그녀석이

2만원을 친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2만원 받고 3만원 더 쳤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2만원만 받고 패를 보여줬다. 그 친구는 그 이후부터 줄곧 잃기만 하더니 나중에 십만원 넘게

잃었다고 개평을 달란다. 역시 포커는 한방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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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랜트가 나오는 영화는 뻔하지 않을까? 별점순위에서 <올드보이>와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강추를 해대는 이 영화를 안본 이유는 그런 거였다. <노팅힐>은 봐줄 수 있어도,

아류작은 보기 싫다! 아무리 달콤한 사탕이라도 자꾸 먹으면 질린다!

내가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어느 분의 적극적인 설득 때문이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꼭 보세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전하는 입소문은 많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달려가게 한다.

자신이 받은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고픈 마음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을텐데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의하면 이렇게 입소문을 내주는 소비자를 알파 소비자라고

한단다. 흥행 전망이 어두웠던 영화 <타이타닉>이 성공한 게 10대 소녀들의 바람몰이 때문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재난영화가 아닌 러브스토리로 만든

것도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러브 액츄얼리>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영화였다. <반지의 제왕 3>을

볼 때는 "언제 끝나나"는 심정으로 시계를 몇 번이나 봤지만-재미없어서는 결코 아니다-이 영화를

보는 도중 거푸 시계를 본 건 "우 씨, 벌써 이렇게 지났어?"라며 안타까워하기 위해서였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얽힌 십여명의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사랑을 시작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해결을 하는 과정이 너무도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그려져, 시종일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느끼하게 생각했던 휴 그랜트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특히나 그가 수상 관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만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다 보니 그 해결이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용의가 있다. 영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빈곤하기 짝이 없는 내 철학이니까.

 

어제가 천안 멀티플렉스에서 <러브 액츄얼리>가 상영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극장에서 영화의 간판을 내렸을 테니, 못본 분들은 비디오가 출시되기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나 역시 약간의 이타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가 본 재미있는 장면들을 몇 개만 적어본다. 못본

분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1) 수상인 휴 그랜트가 눈독을 들이는 여자가 있다.
휴: 남자친구는 있어?
여자: 헤어졌어요. 내 허벅지가 굵다고 했어요 (내가 봐도 굵은 건 맞다).
휴: 나쁜 놈 같으니... 내 권력 이용해서 놈을 암살해줄까? 전화만 하면 공수부대가 떠.

 

2) 마약으로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한 원로가수가 희한한 노래로 뜬다. 그 사람이 나올 때마다 난

배꼽을 잡았는데, 그 중 가장 재미있던 장면이다.
생방송에 나온 그 가수: 어린이 여러분들! 마약하지 마세요!(처음으로 바른말 하네 싶었다)
팝스타되면 공짜로 얻을 수 있거든요!
방송MC: (당황하며) 광고듣죠!

 

3) 시종 무례한 요구만 하던 미국 대통령이 휴 그랜트가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린다. 열이 받은

그랜트 왈,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익스피어, 처칠...어쩌고....그리고 베컴의 나라....

위협만 하는 자는 친구가 아닙니다!"
이 말과 동시에 휴 그랜트는 영웅으로 떠오른다. 어떤 가수는 "나의 영웅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라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랜트가 춤을 추는 건 바로 이장면이다. 블레어 총리가 시종일관

부시의 푸들 노릇만 하는 게 영국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할테니, 영화 속에서나마 이런 한풀이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된서리를 맞더라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살아생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노무현 자식.... 그런데 우리나라의

위대성은 어떻게 설명할까? "광개토대왕, 안중근.유관순, 서태지의 나라" 이렇게?

우리야 다 알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위대하다는 게 공감을 얻으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4) 목걸이
목걸이 판매상으로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안 왓킨슨이 깜짝출연한다. 얼굴만 봐도 어찌나

웃긴지. 하여간 영화 속의 사장은 젊고 아름다운 부하직원으로부터 구애를 받는데, 그녀를 위해

잠깐 짬을 내서 비싼 목걸이를 산다. 남편의 주머니에서 그 목걸이를 본 아내, "올해도 스카프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야?"라며 감동한다. "여보, 앞으로 툴툴거리지 않을게요"라는 카드도

쓰고. 하지만 그녀가 받은 선물은 고작 CD 한 장. 인간은 그럴 때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법이다.

여인은 혼자 방으로 올라가 오열하는데, 그때 의기양양하게 그 목걸이를 건 젊은 여직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오죽하면 보는 내가 그 여인이 불쌍할까. 남자들이여, 바람을 피우려면 들키지나

마라. 들키는 건 아내를 두 번 죽이는 결과다.

 

5)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왔던 멋진 남자-사실 휴 그랜트의 반도 안되는-는 포루투칼 여자를

좋아한다. 그녀를 위해 포루투칼어를 열심히 배우고,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가서 청혼을 한다.

물론 포루투칼어로. 그러자 여자는 유창한 영어로 대답을-예스!라고-하는데, 그 남자가 묻는다.
남자: 영어 배웠어?
여자: 혹시 몰라서요.

 

아이, 응큼해요 둘다!

 

6) 샘이라는 애도 가끔 사람을 웃기는데, 드럼을 치는 그는 보컬을 맡은 여자애를 좋아한다.

여자가 노래한다. "사랑해요, 그대!" 그러면서 여자는 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때 샘의

표정은 의기양양 그 자체. 하지만 노래 가사에는 '그대(and you!)'가 무지 여러번 나온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바꿔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보컬 여자. 그때 배신감에 젖은 샘의 표정은

휴 그랜트의 춤과 더불어 <러브액츄얼리>의 3대 유머 안에 들만하다. 깜찍한 녀석...

 

7) 마지막 교훈. 남녀가 잘 때는 휴대폰을 끄자! 무슨 소리인지는 보면 안다.
8) 의문점. 휴 그랜트에 관해 쓰다가 느낀 건데, 걔는 누가 옆에서 "휴-" 하고 한숨쉬면

"나 불렀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9) 의문점 2. 샘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아내를 잃은 걸로 나온다. 샘이 왜 재혼하지 않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클라우디아 쉬퍼가 아니면 재혼 안할거야" 그런데, 아버지는

학예회에서 다른 학부형의 어머니를 만나는데, 첫눈에 전기가 통한다. 샘이 말한다.

"어서 고백하세요!" 그 여자, 클라우디아 쉬퍼를 닮았던데, 맞는지 모르겠다. 유명한 사람이 워낙

많이 나오긴 했지만, 쉬퍼도 나온 걸까?  나중에 알아보니 쉬퍼 맞단다. 카퍼필드의 애인인 그 쉬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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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생물학 기법이 개발된 1995년, 사람들 중에는 영구동토에 묻힌 시체에서 스페인독감의 바이러스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두그룹 있었다. 한팀은 던컨이라는 엄청난 미녀였고, 또하나는 아까 언급한 의사와 1951년 알래스카에 갔었던 훌틴이었다. 두 팀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먼저 미녀팀. 이 팀은 최고의 선수들로 연구팀을 꾸렸다. 지리학자, 바이러스학자, 국립 의학연구소장... 무덤 발굴 전문회사 (이런 회사도 있나?), 지반 조사 레이더팀....
"계획을 짜고 허가를 구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팀을 구성하는 일로 몇달이고 몇년이고 시간을 보냈다]
연구비도 많이 받았다. 국립보건원에서만 15만 달러를 받았다나. 모든 과정은 언론에 공개되었고, 미녀는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일을 진행했다. 계획을 세우는 데만 6만달러가 넘게 들었을 정도.

다음으로 훌틴팀. 의사는 훌틴에게 물었다. 언제쯤 떠날 수 있느냐고. 72세의 훌틴은 이렇게 대답해 의사를 놀라게 했다.
"이번주는 곤란하고, 다음주엔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훌틴은 결국 삽 한자루를 가지고 동토로 떠나고, 비만이라 지방이 많아 단열 효과를 냈던 여인의 허파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조직에서 의사는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헴아글루티닌의 염기서열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룩한다. 훌틴이 쓴 돈은 단돈 3천달러에 불과했다.

염기서열이 밝혀지고 난 뒤 한참 후, 던컨 팀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땅을 파본 던컨은 깜짝 놀랐다. 그 땅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해서 시체가 다 부패해 있었던 것. 우주복을 입고, 안전에 대비한 장비들을 잔뜩 갖춰서 갔는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그 프로젝트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삽 한자루만 가지고 가는 무모한 면이 있지만, 힐튼은 치밀해야 할 부분에는 굉장히 치밀했다.
[...배송 중에 유실되면 복구할 수 없으니...표본을 나누어 4개의 소포로 보냈다...페더럴 익스프레스를 이용해서 하나를 보내고, 유나이티드 어쩌고를 통해 또 하나를...세째날엔 우체국의 속달 서비스를 이용해 또 하나...네째 날에는 다시 페더럴 익스프레스...]
4개 모두 의사의 연구실에 잘 도착했음은 물론이다.

나를 굳이 분류한다면 던컨 스타일에 가깝다. 뭘 하라고 하면 일단 공부를 한다고 몇달, 그다음에 뭘 주문한다고 다시 몇달...일은 결국 안되고, 다른 사람이 나선다. "그냥 내가 할께" 이럴 땐 삽 한자루만 달랑 가지고 현지로 간 훌틴의 무모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갑자기 훌틴이 된다. 세번 원심분리를 하라면 두번쯤 하고 말고, 잘 섞으라면 대충 섞는다. 그러니 맨날 결과 나오는 게 엉망이지! 이럴 때는 던컨의 세심함을 배워야 하는데, 난 반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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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틴이라는 병리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1918년 독감으로 죽은 사람들로부터 바이러스를 부활시킬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영구동토, 그러니까 북극에 가까워서 언제나 땅이 얼어 있는 지역-예를 들면 알래스카-에는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며, 바이러스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물론 자기 생각은 아니고 어떤 나이든 교수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실천으로 연결한 사람은 훌틴이 유일했다.

1951년, 훌틴은 계획서를 써서 연구비 신청을 했다. 2달이 지나도 답이 안온다. 아는 사람의 백을 동원해 알아봤다. 백으로 동원된 하원의원의 대답이다.
[육군에서 훌틴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훌틴이 하겠다고 제안한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 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나쁜 놈들이 다 있나. 학문하는 사람이 이러면 되겠나. 열이 받은 훌틴은 다른 루트로 돈을 구해 알래스카로 떠나고, 그보다 먼저 시체의 허파 조직을 채취한다. 사필귀정이라 할만하지만, 유감스럽게 바이러스를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또다른 얘기.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을 때, 한 무명 의사가 포르말린에 담궈져 보관되고 있던 1918년 독감의 희생자 샘플로부터 바이러스의 일부를 얻는 데 성공하고, PCR로 증폭한 뒤 염기서열을 알아낸다. 대단히 획기적인 결과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연구팀은 <<네이쳐>>에 논문을 보내기로 했다 (다 알다시피 네이쳐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잡지로, 나도 초창기엔 여기다 논문을 실을 생각을 했었다). 런던 편집실에서 전화가 왔다. "정말 대단합니다. 당장 논문을 보내세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네이쳐>>는 논문을 다시 돌려보냈다. 심지어 전문가들에게 검토조차 의뢰하지 않고 거절한 거다...그들이 보낸 논문이 검토를 요청할 만큼 흥미롭지 않다고 되어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 의사는 라이벌 잡지인 <<사이언스>>에다 논문을 보냈다. 역시 게재불가. 이유가 뭘까? 논문을 검토한 과학자들에게 그 의사가 너무 생소했던 거였다. "독감의 비전문가들이 이런 걸 한 게 충격이었을 거다"라고 그 의사는 말했다. 결국 몇몇 중견 과학자들이 그를 대신해 중재를 한 끝에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그러자 난리가 났다. 대단한 업적이니 뭐니 하면서.

그 의사의 회상이다.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해내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앞을 다투어 출판해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결론이다. "그들은 평범하고 고리타분한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혁명적인 논문을 거절한다"

2년 쯤 전,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네이쳐'에 논문을 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는데, 나중에 그가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네이쳐에 보냈는데, 출판이 자꾸 미뤄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심사를 맡은 놈이 그 논문을 붙잡고 있으면서 독일의 연구팀에게 연락해서 그 일을 빨리 해버리라고 했다는 거다. 술을 못하던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안하던 소주를 마셨다는데, 그는 그 사건을 '약소국의 비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강대국인 미국에서도 이런 일은 있다. 그러니 약소국의 비애라기보다는 못가진 자들의 비애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논문을 싣는 것도 이렇듯 정치역학이 중요하다.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원 회원이 되는 것도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정치, 그놈의 정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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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독감이 지나가고 난 뒤 이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 제일 중요한 게, 원인균이 무엇이냐 하는 거다. 당시만 해도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으니, 독감 환자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Hemophilus influenza가 독감의 원인균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균을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켜보니 독감에 안걸리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당시 어떤 실험을 했느냐면...

1918년 11월, 62명의 죄수를 불러다가 사면을 해줄 테니 실험에 응하라고 했다. 아무리 죄수지만 사형수도 아니고, 사형수라고 해도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실험에 응하라고 하는 건 좀 너무했다. 방법도 무진장 원시적이었다.

[...독감으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코와 목에서 진득진득한 점액을 채취했다...이것을 죄수의 코와 목구멍에 뿌렸고, 다른 집단에는 눈에 떨어뜨렸다. ...독감 환자의 코에서 콧물을 빼내 지원자의 콧속에 넣기도 했다...세균은 통과하지 못하고 바이러스만 통과하는 여과기에 채취한 점액을 통과시키고, 그걸 지원자들에게 뿌렸다..]
좀 심하지 않는가? 남의 콧물을 자기 코에 넣다니, 생각만 해도 넘어오려고 한다. 심지어...

[지원자들을 ...죽어가는 독감 환자들에게 데려갔다. ...각 지원자들은 병상에서 환자와 얼굴을 가깝게 맞대고 환자의 악취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피실험자는 환자가 내뿜는 숨을 허파 속까지 깊이 들이마셨다...독감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환자의 기침을 5회 이상 받았다]

정말 너무하지 않는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는 있다고 해도, 어찌 이런 비윤리적인 실험을 할 수가? 다행히도 독감에 걸린 지원자가 한명도 없어서 그렇지, 몇명이라도 죽었다면 나중에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곳에서는 건강한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독감에 기꺼이 실험대상으로 나선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감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실미도>라는 영화는 사형수들을 인간병기로 만들어 북에 파견하기로 계획했던 실제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윤리적이긴 해도 감옥에 있다보면 이런저런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법,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지금도 어느 감옥에서는 죄수들에게 조류독감을 감염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워낙 흉흉한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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