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aire > '발리에서 생긴 일'과 그람시

'발리에서 생긴 일'....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는, 나의 주말 드라마다. 처음에는 네 사람의 심리게임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서 보다가, 요즘에는 '어, 이거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인걸'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감탄하게 하는 대목의 시작은, 일전에 스밀라 님도 메모한 적이 있는 그 대사로부터 출발한다. "니들, 이뻐, 너무 이뻐..." 하는 강인욱(소지섭)의 대사.

강인욱이 이쁘다고 말한 것은, 그 아이들(노래방 도우미 하는 조연 여자애와, 이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분하고 있는 하지원)의 외모가 아닐 것이다. 그 아이들의 처절한 삶의 투쟁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것은 강인욱에게, 어쩌면 현실감 있는 계급투쟁으로서의 진실한 무게감을 던졌을 터이다.

이후 드라마는 단순한 '사랑의 삼각관계' 드라마라는 트렌디 성격을 넘어서서, 이 사회에서 아직도 건장한, 영원히 건장할 '계급'의 문제로 육박해가는 듯하다. 네 명의 인물군은, 각 계급을 상징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한 두 남녀, 중간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남자, 하위계급의 두 여자... 이 중 가장 복잡한 심리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강인욱이다. 그는 아래와 위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는 자답게 들끓는 욕망의 기제 속에 내던져진 지식인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다. 그래선지 사랑 앞에서도, 권력 앞에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지키며, 재는 것도 많다. 그리고 극중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예진이 연기하고 있는 재벌그룹가 딸의 심리상태도 단순히 '이기적'이라고만 매도하기에는 복잡한 데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정재민과 이수정으로 분하고 있는 조인성과 하지원의 캐릭터는 단순 명료하다. 그들은 자기 현실만을 느끼고,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순수하다.

드라마는 이렇게 다른 계급의 남녀들의 사랑이 얽히는 구도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지만, 아직 사랑에는 '계급'이라는 무서운 장벽이 남아 있음을, 서늘하게 가르쳐주는 의미심장한 드라마, 그런 드라마답게 이 드라마는 과감하게 이런 대사를 표면에 내민다.

"그람시라고 알아?" 그람시... '헤게모니'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 막시즘을 잘 해석한 정치사상가라고 하는 그... 위의 대사를 하면서 드라마는 그람시의 '옥중수고1(정치편)'를 버젓이 클로즈업하고 있다. 극중의 이수정은 이 책을 강인욱에게 빌려받고, 그 책을 읽은 덕분인지 나중에는 정재민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당신의 헤게모니가 내게 주제파악을 하게 해주었어요..." (정확한 대사는 아님)

찌르르... 전기가 통해왔다. 하지원이 어떤 계급을 선택할지, 혹은 하지원이 이재민과 강인욱이라는 두 계급 모두의 위선을 시원하게 벗겨내줄지... 자못 기대된다. 그리고, 나도 여태 이름만 들어본 그람시의 책을 숙독해야겠다, 많이 늦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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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2-03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인용하는 거 어색하던데..--; 저도 두어번 봤는데 별반 재미없던데요. 마태우스님의 드라마 사랑은 정말 깊군요...^^; 늘 감탄하고 있답니다...ㅋ.ㅋ.ㅋ

쎈연필 2004-02-04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의 헤게모니가 어쮜나 막강한지. 저는 티브이를 밥 먹을 때만 봐서, 가끔 그 드라마를 보기도 한 것 같군요. 그 드라마 덕분에라도 그람시 책을 사람들이 읽게 되면 참 환영할 일이군요^^.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신영복 선생의 엽서와 흡사하죠.
 

 

 

 

 

 

이 레인메이커가 아닌디....

존 그리샴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는데, 그 중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레인 메이커>다. 법정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그리샴을 그리도 좋아하면 영화로도 한두번쯤 봤을 법도 한데, 작품들 대부분이 영화화되었지만 극장에서 그의 작품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언젠가 한번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펠리칸 브리프>를 케이블로 봤었는데, 별반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왜 난 그의 작품들이 영화화되는 걸 싫어하는 걸까?소설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추억을 영화가 망칠까봐? 그런 마음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그리샴의 작품은 책이 더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과 영화로 모두 나와있는 거라면 뭘 봐야 할지, 어느 것을 먼저 봐야 할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대개는 먼저 나와있는 쟝르가 더 우월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책으로 먼저 나온 작품이라면 영화가 책을 따라갈 수가 없을테고, 영화가 나온 뒤 급조된 책은 영화의 감동을 재현할 수 없다. 모방이 진품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더해 또다른 요소가 있다. 스펙터클의 유무다. 그리샴의 작품은 대개 법정 스릴러인지라 보여줄 게 별로 없다. 하지만 <페이첵>이나 <해리포터>를 소설로 본다면, 물론 상상을 하는 재미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영화에 비해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쥬라기 공원>은 책을 먼저 읽었지만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었고-1편만 그렇다는 얘기다-그 다음에 쓴 <타임라인>은 영화가 아직 개봉되지 않았지만 책보다는 영화가 훨씬 나을 것이다. 왜? 난 <타임라인>을 진작에 읽었는데, 읽고나서 '이렇게 재미없는 책은 처음 본다'고 생각을 했었으니까.

 

1) 변호사

미국은 변호사의 천국이다. 변호사 숫자를 규제하는 우리나라에선 사람들 대부분이 변호사를 친구나 친척으로 만난 경험이 고작이겠지만, 변호사 숫자를 제한하지 않는 미국은 인구당으로 따져 변호사가 몇배는 더 많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휠체어를 탄 환자가 불평을 한다. "이 병원은 왜 의사보다 변호사가 훨씬 많은거야?" 그렇다고 변호사들이 못사는 것도 아니다. 물론 못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송을 내면 받는 돈이 워낙 많아서 1억불은 벌어야 변호사 소득 10걸에 들어간다 (그리샴의 최근작인 <불법의 제왕>에 의하면 그렇다. 아니면 말고). "10명이 불에 타죽은 사건 알지? 저기 보이는 자가용 비행기 말야, 그때 마련했어" 대충 이런 식이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소송은 미국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변호사에 대한 농담치고 좋은 게 없다.

문: 변호사가 거짓말을 할 때는?

답: 하는 말마다.

문: 변호사와 창녀의 차이점은?

답: 창녀는 그래도 죽은 사람은 안건드린다.

욕을 하건 말건, 변호사들은 꿋꿋하게 살아간다. 이런 마음이겠지. "욕먹어도 좋다. 돈만 많이 번다면..."

 

2) 맷 데이먼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굿 윌 헌팅>에서 그를 처음 보고 "멋진 놈인걸?"이란 생각을 했는데, 변호사로도 아주 잘 어울린다. <오션스 일레븐>에서는 그다지 멋있게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같이 나왔던 브래드 피트 때문이겠지?

 

결론: 파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그리샴이지만, 영화에서는 별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족족 영화화가 되는 건, 헐리우드의 고질적인 소재 부족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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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03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그리샴 원작의 영화 중 <타임 투 킬> 보셨습니까? 몇 년 전 영화인데, 보면서 재미와 더불어 적절한 무게를 잃지 않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책만큼 재미있구나...'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책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사라졌지만요.^^;;
......그런데 요즘, 저, 마태우스님 전담 코멘트맨 같지 않습니까? ^^

2004-02-03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2-0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그리샴의 첫 작품이죠, 아마? 출판사에서 여러번 거절맞고 그랬던 책이라고 들었는데, 전 너무도 재미가 없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엔 유명해지고 나서 나왔던 것 같은데, 그냥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작가라는 것 정도는 알겠더군요.
 

 

 

 

<페이첵>을 봤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원작이 필립K딕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도 재미있게 봤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사람. 물론 원작이 훌륭하다고 영화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배창호 감독이다. 어릴 적 TV에서 하명중이 만든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가 감탄을 했었는데, 몇년 전 김성종이 쓴 동명의 책을 영화화한 <흑수선>을 보고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감독에 따라 형편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거다. 난 그 영화를 대학 친구들과 봤는데, 그 영화가 보고 싶었던 난 이렇게 친구들을 꼬셨다. "원작이 워낙 훌륭해서, 누가 만들어도-하다못해 내가-재미있을 수밖에 없거든? 그거 보자"

영화가 끝난 후 난 너무도 미안해서 친구들에게 밥을 샀고, 그러고도 미진한 것같아 술까지 샀다. 꼭 <흑수선>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날 이후 영화모임은 한번도 성사된 적이 없다.

스필버그가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정말 훌륭했다. 비디오로 봤는데도 끝날 때까지 숨이 막힐 지경-우리집 공기가 좀 탁하긴 하다-이었으니까, 극장에서 봤다면 까무라쳤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오우삼은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내게 묻는다면 '그런대로 훌륭했다'는 답을 할 것 같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더 재미있었지만, 그건 원작이 더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페이첵>의 원작 역시 매우 훌륭했다. 9천만불을 포기하고 받은 잡동사니들이 그토록 멋진 역할들을 해내는 장면이나, 자신이 왜 암살당할 지경에 놓이는지가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 마지막까지 쓰임새가 없던 시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등이 손에 땀을 쥐게 했는데, 이 정도 원작이라면 내가 감독을 해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또다시 든다. 필립 K딕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원작의 무게는 사라지고 주인공의 동분서주만 남은 영화"라는 혹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깊었던 점을 몇가지만 써본다.

1) 벤 애플릭: 처음 보는 배우로, 매력이 물씬 넘친다. 앞으로 크게 될 것 같다 (이미 컸나?) 그래도... 공학박사라는데 뭐 그렇게 싸움을 잘한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좀 지나쳤다. 평소 오토바이가 취미였다면 모를까.

2) 우마 서먼: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처음 보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몽땅 안봤다. 주연을 맡기에는, 특히나 벤 애플릭같이 멋있는 남자의 파트너가 되기에는 많이 안이쁘던데,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싸움을 잘해서일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킬빌>에서 현란한 액션을 보였다고 하던데, 이 영화에서도 생물학 박사라는 직업이 의심스럽게 잘 싸웠다. 헬멧을 던져 차 한대를 격파하는 장면이 압권.

3) 기억: 벤 애플릭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을 몽땅 삭제당하는 사람이다. 3년간의 기억을 삭제당한 뒤, 우마 서먼이 울면서 묻는다. "나 기억 안나요?" 벤 애플릭은 물론 모르겠다고 한다. 왜? 안이쁘니까! 예컨대 내가 기억을 삭제당했는데 이미연이 자길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기억난다고 대답하겠지. 반대로 안이쁜 여자가 그런 질문을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면, 설사 기억이 난다해도 "글쎄 기억이 안나는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 이건 재, 재미있으라고 쓴 거지, 내, 내가 시, 실제로 그런다는 건 아니다.

4) 비둘기: 오우삼 작품에서 비둘기는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다 (이번엔 잉꼬도 나왔지만). 우리가 보통 보는 비둘기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토사물을 쪼아먹고, 먹을 것에 환장하고, 몸도 드럽고, 그래서 '평화의 상징'이라는, 어릴 적 가졌던 좋은 기억을 날라가게 만드는 존재들인데, 오우삼의 비둘기들은 새하얗고, 날개도 아주 크고, 기러기처럼 날라간다. 정말로 평화의 상징처럼. 어디서 그런 멋진 비둘기를 구했을까?

필립 K딕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원작으로 했다면 일단 보는 걸 원칙으로 해야겠다. <낭만자객>의 윤제균이 감독을 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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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1-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 소설 번역되어 나왔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죠.

진/우맘 2004-01-2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첨 필립 K 딕을 읽게 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로 꼽았기 때문이었답니다. 단편집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후 아직 다른 작품은 읽어보질 못 했지만, 여하간 그 책 한 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먹었지요.
님의 책과 영화평, 멋지네요. 특히 왜? 안이쁘니까! ㅋㅋㅋ 페이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진/우맘 2004-01-3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책, 알라딘에 주문했답니다.^^

진/우맘 2004-02-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는 시계가 마지막 물건인가봐요? 책에서는 물품 보관증인데...

sooninara 2004-02-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ㅐ?안이쁘니까...에서 넘어갔습니다...너무 웃겨셔요
 

 

 

 

 

빙산과 충돌해 침몰해버린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 제임스 카메론은 그 소재를 차용해 전혀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 버렸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영화의 주 테마는 배의 침몰이 아니라 드카프리오(이하 잭)가 칼로부터 애인(로즈)을 빼앗는 것이었다.

칼은 영화 내내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다. 비열하고 따분하며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나쁜 놈. 반면 잭은 재능있고 재미있으며, 매우 신뢰성 있는 인물인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잭이 이미 약혼자가 있는 로즈를 빼앗는 게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과연 그런가? 내가 칼이라고 가정하고, 항변을 해본다.

난 로즈에게 정말 잘해줬다.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도 줬고, 일시적인 탈선도 다 눈감아 줬다. 잭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꽤 잘생긴 편이고, 돈많고 지체높은 집안 출신이다. 이만하면 괜찮은 신랑감이 아닌가? 그런데 태생도 미천한 잭이라는 놈이 자꾸 내 약혼녀에게 집적거린다. 여기서 열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리라. 잭을 미워하고 로즈를 붙잡으려고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로즈가 잘생긴 잭을 만나 일시적으로 마음이 흔들린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니,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난 잭을 팔에다 수갑을 채워 선실 아래쪽에 묶어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이 로즈를 포기하지 않자 총을 쏘며 쫓아간 거다. 주머니에 총이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총을 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돈을 주고 구명보트에 한자리를 예약했음에도, 난 그 자리를 포기한 채 로즈를 찾아나섰다. 어떻게 해서든지 로즈의 마음을 다시 돌려보려고. 그런 내가 나쁜놈인가?

로즈 넌 나를 따분해했고, 귀족 부인들과의 대화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 하지만 우리 가진 자들의 삶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잭과 선실 밑에서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춘 게 낭만적으로 느껴진 것은 니가 처음 겪어보는 일이어서 그런 거지, 너처럼 곱게 자란 애가 평생을 그러고 살 수 있겠어? 낭만, 그건 밥을 먹여주지 않아. 잭은 필경 로즈 당신을 고생시킬 거야. 날 보라고. 선원을 매수해 보트에 당신 자리까지 두개를 예약했고, 나중에는 우는 아이를 내 아이인 양 속여서 결국 보트를 탔어. 남들한테는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게 바로 생활력이야. 반면 잭은 뭘 했나? 로즈 너만 보트에 태웠어. 자기는 그냥 죽겠다고 하는 거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당신은 결국 보트에서 내렸고, 결국은 둘다 죽을 뻔했지.

배가 침몰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 잭은 당신과 함께 난간에 매달릴 게 아니라 몸을 띄울 널빤지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어. 잭은 죽었지만 당신은 겨우 살아난 게, 장롱 문짝에 몸을 의탁했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낭만은 밥을 먹여주지 않아. 잭과 결혼했다면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이나 해? 주머니에 다이아가 있었으니 몇 년은 살 수 있었겠지만.

혹자는 그러더군. 여자는 소유물이 아니라 인격을 갖춘 존재이며, 그녀의 결정 역시 존중해야 한다고. 버스는 이미 떠났는데 계속 기다려봤자 소용 없다고. 그런 식이라면, 로즈가 잭이랑 결혼해 잘 살다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드카프리오같은 남자를 만나서 헥까닥 했고, "아 이게 바로 사랑이야!"라고 느꼈다면, 그것도 숭고한 결정이니 곱게 보내줘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권상우가 <천국의 계단>에서 떠난 버스를 열나게 쫓아가 올라탄 것처럼,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야. 약혼이란 게 뭐야?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잖아? 그렇게 싫으면 아예 약혼을 하지 말던가 할 것이지, 우리같이 지체높은 집안에서 어떻게 파혼을 할 수가 있겠어?

로즈 넌 그러더군. 잭이 "내 영혼을 구해준 존재"라고. 나와 헤어진 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바 없지만, 그래, 나랑 결혼해서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미국사회가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을 정도로 척박했다는 것도 잊지는 말게. 넌 그랬지. 내가 대공황 때 주식이 폭락해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그거 순 거짓말이야. 이야기를 만들려고 카메론이 지어낸 거라구. 나같이 약삭빠르고 생활력 강한 얘가 주식이 폭락할 때까지 넋놓고 기다렸겠어? 절대 아니야. 로즈, 인생 그렇게 살지 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할게. 그 다이아는 왜 바다속에 던지고 그래? 그럴 거면 날 주지...
(이상 저승에서 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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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꿈 2004-01-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 이상 저승에서 칼이었나요? 독백이 웃겨요^-^;
하지만 맞는 이야기에요- 칼의 입장에서보면 아주 나쁜사람은 잭이죠-;

추천왕 2012-04-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제야 보고 강력추천.
 

 

 

 

클래식을 보고 감상문을 쓰면서, "준하(원래 이름은 조승우인데, 안유명하니 그냥 준하라고 함)"라고 한 적이 있지요. 그나마도 '조승우'를 '조순우'로 잘못 썼구요.

그랬더니 밑에 이런 답글이 달리더군요. "조승우가 얼마나 유명한데요!"
그래요. 저만 빼고는 모두 조승우를 알고 있더군요.

전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본답니다. 주변에 저처럼 많이 보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요.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것 치고는, 영화에 대해 너무도 무지합니다. 예를 들어 '수잔 서랜든' 하면 주위에서는 "아, 그사람 이러이러한 영화에 나왔었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영화를 봤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잘 알 수가 있을까요?

전 <스파이더맨>에 MJ로 나오는 여자를 보고 "저런 얘가 어떻게 주연이냐"고 한탄한 적이 있었어요. 처음 보는 배우고, 별로 이쁘지도 않아서 한 소리에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 여자가 제가 일전에 봤던 <브링 잇 온>에 나온 여자더군요. 나중에 케이블에서 그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진짜 나왔구나' 하고 중얼거려야 했지요. 남들은 안본 영화의 배우도 다 기억하는데, 저는 왜 봤던 영화의 배우도 모를까요?

대충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왜 이리 무식한지. 다음과 같은 답이 나오더군요.
첫째, 원래 머리가 나쁘다.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 여친도 제가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자 제가 바보라는 걸 알아채더군요.

둘째, 공부를 안한다. 영화만 본다고 다는 아니죠. 저처럼 영화만 달랑 보고 일어나면 백날 봐도 안되요. 정말 영화에 대해 잘 알려면 <시네 21>같은 영화 잡지도 보고, TV의 영화 프로그램도 봐야하며, 다른 이들이 쓴 영화 감상문도 열심히 읽어야겠죠.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나면 엔딩 크레딧도 안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지요.

세째,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친구 어머니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면 저는 일단 인사를 한 뒤에 "혹시 누구 어머니세요?"라고 묻곤 하지요. 저희 회사 동료들의 얼굴-이름도 아직 외우지 못했답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말에요. <러브 액츄얼리>를 볼 때도 바람 피는 아저씨랑 동급생을 좋아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를 동일인으로 알았지 뭡니까.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들-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지만-의 얼굴은 물론 구별하지 못하지요.

해답이 나왔으니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첫번째와 세번째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두번째는 노력하면 나아지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습니다. 제가 뭐 영화로 일가를 이룰 것도 아니고, 영화에 투자할 여력도 별로 없답니다. 그냥 영화에 대해 문맹인 채로, 시덥지않은 감상문이나 쓰면서 살아가려구요. 체념의 지혜를 발휘하면 인생이 훨씬 편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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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4-01-2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증상인 것 같습니다. ^^ 단, 저는 씨네21나 영화평론도 꽤 읽는 편인데도, 영화배우의 이름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사실은 학교 다닐때 후배들 이름, 입사해서는 직원들 이름 외우는데 애를 먹곤 합니다. 어제도 고향에서 친구들과 뭘 먹고 있는데 후배들 한떼를 우연히 만났는데.. 녀석들 하는 말, "선배~ 우리 이름 한번 말해봐요~" - - ; "어어... 어.. 야.. 날 시험하지마.. 다 알어.. "
아무래도 이름을 기억하는 뇌의 무언가가 기능이 안 좋은게 아닐까 싶어요.. ^^ 마태우스님은 다른 이름들은 잘 기억하시는 편이세요?

마태우스 2004-01-2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저와 증상이 같다니 위안이 되네요. 이름 외우기도 마찬가지죠. 자주 보는 친구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친척 아이들 이름도 잘 못외워,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답니다. 희한하게도 야구선수같이 스포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줄줄 외우거든요. 이게 관심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요.

진/우맘 2004-01-28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름 외우기, 사람 구별하기엔 젬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나쁘다고 매도 당하기에는 조금 안타까운 상태인걸요~

ceylontea 2004-01-2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책의 주인공 및 기타 인간들의 이름도 형태로만 읽는가 봅니다.. 책 읽을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읽고나면 이름들이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ㅠ.ㅜ

마태우스 2004-01-28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님들의 말씀에 큰 위로가 됩니다. 뭐, 기억 안나면 안나는대로 살면 되게지요^^

노바리 2004-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독과 배우들 이름을 너무 잘 기억해요. 사실은 안본 영화여도 그게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 한번 보면 저절로 외워져요. 스스로도 가끔 놀라지요. 그런데 대신, 숫자엔 젬병이더군요. 아무리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숫자들. 그래서 저는 가끔 제 나이도 헷갈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