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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첵>을 봤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원작이 필립K딕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도 재미있게 봤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사람. 물론 원작이 훌륭하다고 영화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배창호 감독이다. 어릴 적 TV에서 하명중이 만든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가 감탄을 했었는데, 몇년 전 김성종이 쓴 동명의 책을 영화화한 <흑수선>을 보고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감독에 따라 형편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거다. 난 그 영화를 대학 친구들과 봤는데, 그 영화가 보고 싶었던 난 이렇게 친구들을 꼬셨다. "원작이 워낙 훌륭해서, 누가 만들어도-하다못해 내가-재미있을 수밖에 없거든? 그거 보자"
영화가 끝난 후 난 너무도 미안해서 친구들에게 밥을 샀고, 그러고도 미진한 것같아 술까지 샀다. 꼭 <흑수선>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날 이후 영화모임은 한번도 성사된 적이 없다.
스필버그가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정말 훌륭했다. 비디오로 봤는데도 끝날 때까지 숨이 막힐 지경-우리집 공기가 좀 탁하긴 하다-이었으니까, 극장에서 봤다면 까무라쳤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오우삼은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내게 묻는다면 '그런대로 훌륭했다'는 답을 할 것 같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더 재미있었지만, 그건 원작이 더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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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하더라도 <페이첵>의 원작 역시 매우 훌륭했다. 9천만불을 포기하고 받은 잡동사니들이 그토록 멋진 역할들을 해내는 장면이나, 자신이 왜 암살당할 지경에 놓이는지가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 마지막까지 쓰임새가 없던 시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등이 손에 땀을 쥐게 했는데, 이 정도 원작이라면 내가 감독을 해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또다시 든다. 필립 K딕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원작의 무게는 사라지고 주인공의 동분서주만 남은 영화"라는 혹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깊었던 점을 몇가지만 써본다.
1) 벤 애플릭: 처음 보는 배우로, 매력이 물씬 넘친다. 앞으로 크게 될 것 같다 (이미 컸나?) 그래도... 공학박사라는데 뭐 그렇게 싸움을 잘한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좀 지나쳤다. 평소 오토바이가 취미였다면 모를까.
2) 우마 서먼: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처음 보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몽땅 안봤다. 주연을 맡기에는, 특히나 벤 애플릭같이 멋있는 남자의 파트너가 되기에는 많이 안이쁘던데,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싸움을 잘해서일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킬빌>에서 현란한 액션을 보였다고 하던데, 이 영화에서도 생물학 박사라는 직업이 의심스럽게 잘 싸웠다. 헬멧을 던져 차 한대를 격파하는 장면이 압권.
3) 기억: 벤 애플릭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을 몽땅 삭제당하는 사람이다. 3년간의 기억을 삭제당한 뒤, 우마 서먼이 울면서 묻는다. "나 기억 안나요?" 벤 애플릭은 물론 모르겠다고 한다. 왜? 안이쁘니까! 예컨대 내가 기억을 삭제당했는데 이미연이 자길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기억난다고 대답하겠지. 반대로 안이쁜 여자가 그런 질문을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면, 설사 기억이 난다해도 "글쎄 기억이 안나는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 이건 재, 재미있으라고 쓴 거지, 내, 내가 시, 실제로 그런다는 건 아니다.
4) 비둘기: 오우삼 작품에서 비둘기는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다 (이번엔 잉꼬도 나왔지만). 우리가 보통 보는 비둘기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토사물을 쪼아먹고, 먹을 것에 환장하고, 몸도 드럽고, 그래서 '평화의 상징'이라는, 어릴 적 가졌던 좋은 기억을 날라가게 만드는 존재들인데, 오우삼의 비둘기들은 새하얗고, 날개도 아주 크고, 기러기처럼 날라간다. 정말로 평화의 상징처럼. 어디서 그런 멋진 비둘기를 구했을까?
필립 K딕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원작으로 했다면 일단 보는 걸 원칙으로 해야겠다. <낭만자객>의 윤제균이 감독을 하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