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사흘간, 소방교육을 받는다. 갑자기 웬 소방교육이냐고 놀란다면, 그는 내가 재벌2세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A4 다섯장 정도 분량을 짧게 줄여서 설명하자면, 건물마다 방화관리자가 하나씩 있어야 하는 의무규정이 있는데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사흘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 난 아담한 저택에 산다. 23층이니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쑥스러운 수준이지만, 그 건물이야말로 날 재벌2세로 부르게 만드는 원천이 아닌가. 방화관리자가 되면 매년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등 귀찮은 일이 많은데, 지금까지는 나이드신 어머님이 그 일을 하셨다. 어머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어떻게 시험을 통과하셨냐고. 엄마의 대답이다. "돈주고 했지, 내가 어떻게 그걸 따!" 뭐든 돈으로 해결하는 버릇을 난 엄마한테 배웠나보다. 하여간 어머니도 올해 교육을 다녀오시더니 아무래도 힘드셨는지, "이제 니가 따서 관리해라"고 하셨고, 난 5월에 신청을 해 오늘부터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무려 200명이다. 이번주에 교육받는 사람만 총 600명에 달한다니, 우리나라에 건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만하다. 학교 일이 너무 바빠서 빠지는 게 말이 안됐지만, 신청할 때 4만원 낸 것도 아깝고, 나중이라고 시간이 많을 것 같지 않아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러 간다"고 사기를 쳤다. 좌우지간 9시부터 6시까지 꼬박 여덟시간을 앉아 있는 건 영 고역이다. '이 나이에 하루종일 강의를 듣다니' 하는 맘으로 교육장에 가보니, 웬걸, 내가 거의 최연소다. 다들 나처럼 소유주는 아니고, 건물 관리인이 대부분이다. 큰 빌딩이거나 강남에 위치했다면, 그것도 여러 채를 가졌다면 관리인을 둘 수밖에. 여자 옆이면 좋은데, 했지만 여자 자체가 몇 명 없기도 했지만, 아무튼 내 옆에는 머리가 흰 할아버지다. 그 연배에 강의를 듣는다고 앉아 계시려니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소방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라 마음가짐이 달랐다.
강사: 대표가 한명 있어야 하는데, 누가 할사람 없어요?
일동: ...........
강사: 고급 소화기를 하나 드립니다!
일동: 저요! 저요! 저요!
쉬는 시간에 대표에게 물어봤다. "혹시 마지막 날 시험 보나요?"
대표: 이건 안봐! 우린 2급이고, 1급만 보지. 자넨 젊으니까 1급을 따게. 1급만 따면 취직은 확실히 보장되지. 한번 해 보라고.
나: &^*())))&^
그렇군. 시험을 안보는군. 그렇다면 만판이다, 싶었다. 그래서 난 불이 나면 얼마나 손해가 많은가를 알려주는 유익한 동영상을 외면한 채, 책만 읽었다. 2교시 때도 그랬는데, 강사가 갑자기 이런다.
"이거 중요해요. 시험에 꼭 나와요"
일동: 경악----
대표: 시험도 봅니까?
강사: 마지막 날 평가시험 보죠. 60점 넘어야 자격증 줘요.
대표: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강사: 재시험 봐야죠. 붙을 때까지.
내 옆의 할아버지가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시험 때 나좀 보여줘야 해. 내가 시험에 약해서 말야..."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졸지에 다른 사람의 운명까지 좌우하게 된 나, 책임감 때문에 잠도 안자고 나머지 시간을 열심히 들었다. 그나저나 내일 술약속이 있는데 어찌해야 할까...
* 평소 전화가 잘 안오는데, 오늘 따라 전화가 겁나게 많이 왔다.
1) 기생충 환자가 나왔는데, 혈청검사를 좀 해달라는 전화
2) 친구들이 여름휴가 계획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전화
3) 어머니가 VIPS 할인카드가 안된다고, 좀 해결해 달라신다
4) 내일 예정이던 학장과의 상견례가 다음주로 미뤄졌다고..
5) 방송국에서 다음주 아이템을 같이 짜보자고...
6) 평소 친하던 여자애가 혹시 삐졌냐고 전화를 하고...
아, 난 왜 바쁠 때만 전화가 많이 오는 걸까. 이놈의 인기는 하여간...
* 저희 건물이 진짜 23층이라고 믿는 분은 안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