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단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가 내 앞에 선다. “선생님, 타세요!”
우리 조교와 그와 친한 다른 조교다. 탔다. 영화 보러 간단다.
나: 무슨 영화?
조교: 바람의 파이터요. 선생님 오늘 술 안마시면 같이 봐요!
갑자기 혹한 나: 그건 보기 싫고, 나 <스리 몬스터> 볼테니 영화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죠.
하지만 <스리 몬스터>는 시간이 안맞았기에 우린 할수없이 <바람의 파이터>를, 그것도 맨 앞에서 봐야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꽤 재미있게 봤다. 싸움질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그린 영화였다. 영상도 괜찮았고 양동근의 혼신연기도 그런대로. 내 타입의 여자도 나왔으니 만족할 수밖에.
2. 최배달
<바람의 파이터>는 최배달의 삶을 그린 영화다. 지금 젊은이들은 최배달을 모르겠지만, 우리 또래라면 다 알거다. 어릴적 난 방학기가 그린 만화를 보면서 우린 한국인 중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넘버 3>에서도 최배달 얘기가 나온다. 송강호가 “너희들 최영의라고 아냐”라고 했을 때 그 최영의가 바로 최배달이다. 하여간 방학기 만화를 하도 어릴 적에 읽어서 뿔 뽑는 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몇 장면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내용은 전부 내게 새로웠다. 물론 스토리는 다른 영웅담과 다르지 않다. 싸우다 얻어터지고, 가랑이를 지나가는 모욕을 받고,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빌고, 결국 고수가 되어 세상에 복수를 하니까. 하지만 난 그가 왜 싸워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취권>의 성룡처럼 아버지를 잃은 것도 아니고, <킬빌>처럼 남편과 아이를 잃은 것도 아니다. 주먹은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최배달은 왜 그토록 생명을 건 싸움을 계속해야 했을까? 최배달의 라이벌이 말한 것처럼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게 그의 업’이라서? 상대가 없어지자 물소의 뿔을 뽑기까지 하던데, 왜 그래야 했을까.
3. 양동근
내가 양동근을 처음 본 건 <태양은 가득히>라는, 유준상과 박상민, 김지수가 나오는 복수 드라마였다. 거기서 양동근은 최재원과 함께 양아치로 나오는데, 난 나보다 안생긴 사람도 탤런트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지만 연기도 잘 하고 시트콤과 영화에 워낙 자주 나오다보니 그 얼굴이 친숙해져 버렸고, 이제 사람들은 내가 “양동근이 나보다 못생겼어”라고 말하면 화를 낸다. 좋다. 양동근보단 내가 못생겼다. 하지만 축구선수 박지성보단 내가 낫지 않을까? 하여간 잘생기면 싸움꾼이 되기 힘들다. 얼굴에 기스 날까봐 두려워서 어떻게 싸움을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난 싸움꾼이 될 조건 하나는 갖추고 있다.
4. 여자
분명 우리나라 영화지만 촬영지가 주로 일본이라 그런지 영화는 시종 일본말로 진행되고, 한글자막이 나온다는 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다. 영화 속에서 양동근은 일본 게이샤와 사랑에 빠지는데, 싸움꾼의 여자는 원래 슬픈 법이다. 양동근이 “사실은 싸움이 두렵다”고 했을 때 여자가 한 말.
“네가 다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래?”
여자는 양동근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고, 양동근은 고민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산속에 들어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연마한 무예가 너무 아깝잖는가? 최배달이 사랑을 택했다면 그의 화려한 신화는 없었겠지만 그는 결국 본전을 찾는 쪽을 선택하고, 나중에 미국에 가서 물소의 뿔도 뽑으며 전설로 남는다. 사랑과 싸움질은 같이 가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난 싸움꾼의 두 번째 조건도 갖추고 있다.
5. 무예
양동근이 산에서 수련하는 과정은 <실미도> 못지않다. 꽁꽁 언 고구마를 먹고, 빙벽을 타며, 돌을 손으로 깬다. 이런 노력이 있어야 싸움의 고수가 될 수 있지만, 난 이런 노력 없이 그냥 고수가 되기를 바란다. 산에 가면 인터넷도 없고 날도 춥고 삼겹살도 구워먹지 못하잖아? 앞의 두가지 조건을 갖춘 내가 싸움꾼이 못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나쁜놈은 많아 “손좀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6. 결론
맥스무비 사이트의 별점순위가 8.09고, 예매순위도 1위인 걸로 보아 나만 재미있게 본 건 아닌가보다. 물론 쓸데없이 무게를 잡는 부분도 있다.
무술고수: 죽으면 시신은 어디에?
최배달: 이 하늘 아래면 어디든.
이 대사가 진지하게 영화를 보던 날 웃겼다. 나같으면 “양지바른 곳에!”라고 대답할텐데. 어찌되었건 우연히 만난 조교선생 덕분에 재미있는 영화를 본 것 같다. 참고로 내가 보려던 <스리 몬스터>의 별점은 6.48이다.
* 영화보고 나서 소주 한병에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열시쯤 와서 서재질을 했지요. 양궁을 한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갑자기 생각나 틀었더니 임 뭐시기라는 애가 활을 쏘고 있더군요. 세발이 남았던 시점이라 제 기를 불어넣은 것도 별 도움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제 탓입니다. 진작부터 기를 넣었어야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