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계단>을 보고난 뒤 드라마에 흥미를 잃은 나, 공전의 인기를 모았던 <파리의 연인>를 포함해 어떤 드라마도 보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엊그제,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기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요지는 이거였다.
“너 드라마 너무 오래 쉬었지? 마침 오늘부터 재미있는 드라마를 한단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드라만데, 너 임수정 알지? 영화 <장화홍련>에 나왔던 이쁜 애 있잖아. 걔는 시나리오 괜찮은 거 아니면 안하는 애야”
<장화홍련>을 보면서도 임수정에 대해 별로 강렬한 느낌을 받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보면 안될까?”
그는 화를 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니가 그러면 섭하지. 조금 있다 하니까 꼭 봐야 해, 알았지?”
그래서...난 러닝머신을 하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봤다. 내가 본 드라마 중 첫회부터 본 드라마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게다. 드라마는 첫회를 몽땅 외국에서 찍은 듯했다. 어느 나란지 모르지만 간간히 보이는 풍경들은 아름다웠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걸로 보아 영국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찍은 장면을 초반에 배치해 관심을 높이는 수법은 <파리의 연인>의 여파이리라. 하지만 드라마는 사진전이 아니며, 아름다운 풍경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다. 시나리오가 그래도 말이 되는 것이었으면 좋을 텐데, 이건 해도 너무했다.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40분, 50분을 뛰건만, 오죽했으면 러닝머신을 달리다 말고 몇 번이나 멈춰 섰을까. 달리는 것보다 드라마가 지겹기는 오랜만이다.
유명가수의 코디인 임수정은 그 가수와 사랑하는 사이. 하지만 그 가수가 좋아하는 사람은 또다른 여자. 삐져버린 그녀는 가방을 싸가지고 서울로 간다고 나선다. 그런데...그냥 택시를 타면 될 일이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모는 자가용을 타는 걸까. 헬프 어쩌고 하더니 그 차를 탄 임수정, 결국 그 사람에게 가방을 뺏긴 채 차에서 버려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에게 소지섭이 나타나고,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임수정은 소지섭을 따라간다. 소지섭은 그녀에게 술을 먹인 뒤 그 술집에 팔아넘기는데,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그녀를 구한다. 대사관도 있고, 자기 촬영 팀이 있는 숙소로 돌아갈 수도 있건만 임수정은 그 후부터 소지섭을 따라다니는데, 미녀가 옆에 있음에도 내내 쿨한 소지섭의 태도는 분명 존경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워낙 비현실적이라 짜증만 불러 일으킨다. 한편 그 유명가수는 자기의 사랑이 거절당하자 갑자기 강물에 뛰어드는 돌출 행동을 벌이는데...
이게 첫회에 나오는 주요장면이다. 이걸 본 후 친구에게 문자를 날렸다. “미안하다 못보겠다” 친구는 다음날 아침, 이런 답을 했다.
“야, 어떻게 한번 보고 판단하냐? 최소한 두 번은 봐야지. 그리고, 요즘 드라마 말 되는 거 있어? <아일랜드>도 얼마나 말이 안됐다구. 그러지 말고 오늘 한번만 더 봐바”
그래서...난 그 끔찍한 드라마를 한번 더 봤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틀린 게 아니었고, 2회는 첫회보다 좀더 끔찍했다. 돈이 떨어졌는지 우르르 한국에 온 그들, 소지섭은 여전히 쿨한 척하고, 내눈에 별로 안이쁜 임수정은 끊임없이 소지섭과 마주친다. 유명가수는 노래 한곡도 안부르고.....
날 생각해 주는 친구가 고맙긴 하지만, 역시나 그 친구에게 “미치겠다 못보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나보고 보라고 해놓고 자기는 안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친구는 그래도 2회를 봤고, 드라마가 유치 뽕이라는 내 견해에 동의해 줬다. 그의 변명이다.
“좀 재미없긴 한데, 앞으로는 재미있어 질거야. 벌써 조짐이 보이지 않았니?”
<명랑소녀 성공기>는 시작부터 날 빨려들게 만들었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었던 <위풍당당 그녀>는 초반부에 날 지루하게 했었다. 그러니 친구 말대로 이 드라마가 나중에 갑자기 재미있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안되는 유치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초반부로 보건대,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리라. ‘조짐’이고 뭐고 난 더 이상 그 드라마와 더불어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다음주부터는 월요일, 화요일 술약속이 쫘악 잡혀있어 보지도 못할테니 재미없는 게 차라리 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