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작. 쿤데라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의미. 영원회귀하지 않는 우리의 일생은 '가볍다'. 그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


The idea of eternal return is a mysterious one, and Nietzsche has often perplexed other philosophers with it; to think that everything recurs as we once experienced it, and that the recurrence itself recurs ad infinitum! What does this mad myth signify? 

  Putting it negatively, the myth of eternal return states that a life which dissappears once and for all, which does not return, is like a shadow, without weight, dead in advance, and whether it was horrible, beautiful, or sublime, its horror, sublimity, and beauty mean nothing. We need to take no more note of it than of a war between two African kingdoms in the fourteenth century, a war that altered nothing in the destiny of the world, even if a hundred thousand blacks perished in excruciating torment. 

...

  If the French Revolution were to recur eternally, French historians would be less proud of Robespierre. But because they deal with something that will not return, the bloody years of the Revolution have turned into mere words, theories, and discussions, have become lighter than feathers, frightening no one. There is an infinite difference between a Robespierre who occurs only once in history and a Robespierre who eternally returns, chopping off French heads. 

  Let us therefore agree that the idea of eternal return implies a perspective from which things appear other than as we know them: they appear without the mitigating circumstance of their transitory nature. This mitigating circumstance prevents us from coming to a verdict. For how can we condemn something that is ephemeral, in transit? In the sunset of dissolution, everything is illuminated by the aura of nostalgia, even the guillotine. (pp. 3-4)


"영원회귀라는 생각은 신비롭다. 니체는 이 생각으로 다른 철학자들을 종종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한 번 경험한 그대로 반복되며 이 반복이 무한 번 계속된다니! 이 말도 안되는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반대로 생각하면, 영원회귀의 신화란 한 번 사라지면 끝이며 다시 반복되지 않는 일생이 무게도 없으며 처음부터 죽어있는 그림자와 같음을 말해준다. 일생이 끔찍하거나 아름답거나 숭고할지라도, 이 끔찍함, 아름다움, 숭고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4세기 두 아프리카 왕국 간의 전쟁, 수십 만이 잔혹한 고통 속에서 죽었음에도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이 전쟁을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만약 프랑스대혁명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프랑스 역사가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덜 자랑스워할 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대혁명의 피로 물든 세월이 단지 말과 이론과 논의로 바뀌어 깃털보다 가벼워지고 누구에게도 공포를 선사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에 단 한 번 나타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반복해서 나타나 프랑스인들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라는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게 사물이 보이게 하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해두자. 덧없음이라는 정상참작 없이 사물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덧없음이란 정상참작으로 인해 우리는 선고를 유예하게 된다. 금새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을 우리가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사라짐의 황혼 속에서는 모든 것이 향수鄕愁란 빛에 휩싸이게 되는 법이다. 단두대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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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는 흥미롭고 좋은 책이다. 많이 알려진 양자역학의 역사를 당시의 시대상과 대비하며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풀어내고 있다. 양자역학은 기존의 뉴턴역학과는 좀 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했는데, '과연 이 이론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이냐'였다.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이가 닐스 보어였다. 닐스 보어는 당시의 여러 젊은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는데 이후 양자역학의 본격적 발전에 후견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책에는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처음 만나서 산책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하이젠베르크의 회상록인 <부분과 전체>에도 나와 있다. 


  두 물리학자는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론스Rhons'라는 카페에서 잠시 쉬며 기운을 차린다. 하이젠베르크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자를 올바르게 이해할 전망은 전혀 없습니까?"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배우게 될 것입니다." (131~132 페이지)


이때는 1922년 6월로, 하이젠베르크가 헬골란트 섬에서 행렬역학을 착상하기 3년 전이다. 로벨리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Helgoland>에서 헬골란트 섬에 간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낸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불가해성을 라바투트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소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양자역학이라는 불가해한 도구를 손에 쥐고 라바투트가 묘사한 것처럼 이 세상의 이해를 포기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앞서 나온 보어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묘한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의 '이해'는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서를 말한다. 비록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미시세계가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활용해서 반도체 메모리를 비롯한 여러 장치를 만들어 쓰고 있다. 우리가 미시세계를 정녕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종종 언급되는 리처드 파인먼의 말이 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나는 확실히 얘기할 수 있다. I think I can safely say that nobody understands quantum mechanics." 이 말은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파인먼은 양자역학의 도사master이다. 그가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의 '이해'는 거시세계에 기반한 우리 상식에 비춘 이해이다. 예컨대 전자는 입자라고 하지만 우리가 친숙히 알고 있는 입자인 당구공이나 구슬과는 다르다. 전자를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전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자는 기묘한 성질을 갖는 '전자'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전자를 이해하고 있다. 보어가 말했듯이 양자역학은 우리가 지닌 언어 자체까지도 되새겨 보며 그 한계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더불어 과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요즘 들어 보어가 더욱 위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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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로 고리양자중력 이론을 연구한다. 그가 쓴 책들이 근래 많이 번역되어 모아 둔다. 국내에 출간된 순서로 나열한다.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만 빼고 <모든 순간의 물리학>부터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장 최근 출간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까지 모두 쌤앤파커스에서 출간됐다. 쌤앤파커스는 눈길 끄는 제목을 정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책의 제목에 대해 예전에 얘기한 바와 같이, 바뀐 제목은 종종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제목도 그렇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이런 제목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로벨리는 이 책에서 사실 특별한 관찰자가 없는 양자역학 해석을 제시하므로 내가 볼 때 이 제목은 저자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를 구글 번역기에 돌려보면 이렇다: "The world you see is not real".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A world that doesn't exist without me". 우리말로 볼 때는 시적이고 뭔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결코 물리학자가 쓸 제목은 아니다. 혹시 편집자가 불교 신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위의 책들 중 로벨리의 핵심 저작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로벨리가 연구하는 고리양자중력이론에 대한 책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현대물리학 주류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의 의미에 대한 책이다. 로벨리의 이름을 크게 알린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그가 바라보는 현대물리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양자역학과 그 해석에 대한 책이다. 단 한 권만 고르라면, 내용이 조금 어렵긴 하지만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를 고르겠다. 


위 책의 영역본들을 다음에 모아 둔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의 영역본은 없다. 불어로 나온 책(<Et si le temps n'existait pas ?>)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검색하다가 로벨리의 최신 책 하나를 찾았다: <White Holes>. 이런, 재미있을 것 같다! 이제 그가 더 쓸 것이 남았을까 했는데...^^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그의 에세이집이다: <There Are Places in the World Where Rules Are Less Important than Kindness: And Other Thoughts on Physics, Philosophy a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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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3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연휴 주말이네요 블루욘더님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

blueyonder 2023-12-23 13:4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곡 님도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따뜻한 연휴 주말 보내세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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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리는 그동안 여러 권의 대중과학서를 냈는데, <Helgoland>가 원제인 이 책에서는 하이젠베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이 생각하는 양자역학의 의미와 특히 '관계론적' 해석에 대해 논의한다. 그가 주장하는 관계론적 해석에 따르면 세상은 상호작용을 할 때 그 속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그 속성이 전혀 결정되지 않으며, 이는 극단적 반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운 주장임에는 틀림없지만, 곱씹고 생각해봐야 한다. 


책은 '-습니다'체로 번역이 됐는데, 비교적 잘 읽힌다. 양자역학과 로벨리의 생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책 속 멋진 문구를 하나 옮겨 놓는다.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164페이지)


영역본은 위의 문장을 다음처럼 적고 있다.


Science is not a Depository of Truth, it is based on the awareness that there are no Depositories of Truth. (p. 137)


'담지자'라는 말은 depository를 좀 더 의인화했다. depository는 원래 '저장고'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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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마흐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과학철학자이다. 물리학자로도 충격파 연구에 기여하여 물체의 속력을 음속에 대비한 마하 수(Mach number)라는 것이 쓰인다[1]. 그는 특히 과학철학자로 큰 영향을 남겼는데, 물리학이란 경험만을 기술해야 하며 그 이면의 실재에 대한 가정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원자는 당시 이미 화학자들이 활용하여 화학반응을 설명하는 매우 유용한 개념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은 원자의 운동으로 열역학의 법칙들을 설명했는데, 마흐는 볼츠만의 방법론에 대해 볼츠만과 큰 논쟁을 벌였다. 압력, 온도, 부피 등의 거시지표를 이용한 열역학 법칙은 그 자체로 충분하며 여기에 원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법칙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마흐의 입장이었다. 경험으로 관찰가능하지 않은 개념—원자—를 물리학에 도입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00년대 초까지 이어져 볼츠만은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1906년에 자살을 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경험비판론(Empirio-criticism)’은 철학과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철학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와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영향을 끼쳤고, 물리학에서는 20세기 초의 젊은 물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탄생에 기여했다. 로벨리는 마흐가 물리학에 끼친 과학철학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마흐가 논쟁의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은 18세기 기계론이었습니다. 즉, 모든 현상은 공간 속을 이동하는 물질 입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이죠. 마흐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질’이라는 개념이 정당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가정이라는 사실이 밝여졌다고 주장합니다. 기계론적 물질관은 한동안 유효한 모델이었지만, 그것이 형이상학적 선입견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흐는 과학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은 오로지 ‘관찰 가능한 것’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

  마흐는 감각 너머에 있는 가상의 실재를 추론하거나 추측하는 것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감각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려는 시도야말로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흐가 보기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세계는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각의 ‘배후’에 있는 것에 관한 그 어떤 가정도 모두 ‘형이상학’으로 의심받습니다. (148~149 페이지)


로벨리는 마흐와 마흐의 뒤를 이어 경험비판론을 제기하는 러시아의 보그다노프,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레닌의 얘기까지 풀어놓으며 마흐의 철학에 대해 논의한다. 위의 인용에 나온 대로, “모든 현상은 공간 속을 이동하는 물질 입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18세기 기계론”의 타파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흐는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과 <특성 없는 남자>를 로벨리는 언급한다. 무질은 마흐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은 책 리스트에 무질을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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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초음속 비행기의 속력을 얘기할 때 마하 1.5와 같이 쓰인다. 비행기의 속력이 음속(약 340 m/s)의 1.5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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