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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평점 :
역시 유시민은 유시민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이다. 물론, 유시민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닌데, 명성에 걸맞은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두꺼운 역사책을 풀어내는 저자의 실력은 대단하다. 나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잠깐잠깐 들기는 했지만 아직 시도는 못하고 있다.
먼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로 시작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다. 키케로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최초의 역사서로 본다. 반면, 폰 랑케는 투키디데스를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 지목한다. 이렇게 관점이 다른 이유는 키케로는 이야기를 중시했고 랑케는 사실의 기록을 중요하게 여겨서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른 마라톤 평원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을 이야기한다. 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서술했다. 그는 아테네에 번진 전염병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내전의 원인과 경과를 연대순으로 꼼꼼하게 기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들을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논쟁이 발생한다. 과연 사실 그대로만 쓴 것을 역사라고 불러야 하는가? 혹은, 사실 그대로 썼다고 해서 역사가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서술할지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 아닌가? 상상을 가미하여 좀 더 재밌게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썼다고 해서 역사라고 할 수 없는가? 등 질문이 생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공통점도 있다. 바로 서술 대상을 공정히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공정히 대하고 아테네 시민 투키디데스는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공정히 다룬다.
헤로도토스는 신화, 전설 등을 그대로 이야기로 옮겼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보다 정보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려고 훨씬 더 노력했다. 특히 투키디데스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대 역사가의 눈으로 본다면 두 명 다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긴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역사는 역사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술된다는 점이다. 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저자는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오래 널리 읽힌 이유를 설명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서사의 힘'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야기를 할 때 목적, 대상이 명확해야 하고 사실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는 그 이후에도 반복된다. 한 지역의 뛰어난 기술은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는 기회인 동시에 세력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내전과 전쟁이 발발한다. 지금도 여전히 기술은 발달하고 있고 그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할지는 인간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다음으로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책이 이렇게 방대한 책인 줄 몰랐다. <사기>는 엄청나게 많은 역사의 사실을 매우 정확히 기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마천은 국가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공무원'이라서 이것이 가능했다. 그는 역사 기록뿐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사기>에 담았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는 일에 엄청난 열정을 쏟았지만 그것을 역사 서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으며 인간 본성의 빛과 그늘, 삶의 의미, 군주의 덕성, 권력의 광휘와 비루함, 반복되는 사건의 패턴을 포착해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사마천은 단순히 제도 변경 사실만 기록한 게 아니라 제도에 적응하고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의 행동을 함께 살피면서 제도사와 문화사를 썼다."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을 통해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 사회 특징, 아랍 지식인들의 생각을 기록했다. 특히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뜻을 가진 칼리프의 기원을 밝힌다. 수니파는 무함마드 이후 4명의 칼리프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시아파는 4대 칼리프 알리부터 인정한다. 상인이었던 무함마드는 정교일치를 추구했다. 무함마드가 일찍 죽자, 추종자들은 무함마드 알라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경전 <하디스>를 만든다. 또한 무함마드가 만든 새로운 사회적 규범은 <순나>가 된다. 세월이 흘러 이슬람 세계 권력자들은 <코란>과 <하디스>에서 유추해 낸 <키야스>를 만든다. 덧붙여 저자는 할둔이 탁월한 역사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라고 평한다.
레오폴트 랑케는 공감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없었다. 문장도 복잡하고 배경지식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단어도 많이 썼다. 그는 전문 역사학자이자 역사가였다. 온 평생을 사료 연구와 강의 저술에 매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대중이 아닌 전문가를 대상으로 책을 썼다. 그래서 일반인이 보기엔 어렵다. 랑케는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 보관소 출입이 가능했다. 덕분에 풍성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 왕조와 교회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랑케는 치명적인 인식의 오류가 있었다. 바로, 과학 기술과 물질의 힘은 진보하지만 인간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역사철학이다. 도덕과 정신의 진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그는 공화제가 아닌 군주제가 지속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러나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에 공화국이 들어서고 군주제는 지구에서 거의 사라진다.
"그는 역사학자였지만 신학에 눈이 가렸다. 역사학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신학은 그렇지 않다."
랑케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 아무리 뛰어난 역사가라도 모든 역사를 기록할 수 없고 그중 중요한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사실을 기록했다고 해도 독자가 그 의도대로 읽으란 법도 없다. 또한 그가 의지한 문헌사료는 권력자들이 남기고 싶은 사실만 담고 있을 위험이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랑케의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가들이 정치적 위험을 피하는 도피처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이다. <공산당 선언> 첫 단락에서 그는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역으로 소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노동자 계급을 조명한 역사가나 사상가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위대함이며 전 세계에서 열광하는 추종자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마르크스는 또한 인간 생활의 기본은 물질을 생산하는 활동이고 물질적 이해관계가 사람의 생각행동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잘 알 듯이 자본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생산력을 높이고 부를 쌓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공황을 만들었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한다. 나아가 다가올 공황에서 노동자 계급인 프롤레탈리아트가 힘을 이루고 자본가와의 충돌을 통해 혁명을 일으키고 승리할 것으로 예측한다. 물론, 이 모든 예측이 거의 비껴갔다고 유시민 작가는 말한다.
저자는 유물사관의 약점은 그 자체가 내포한 논리적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사회 변화의 동력이 계급 사이의 투쟁인데, 프롤레탈리아트가 승리하면 계급의 대리가 없어지고 결국 동력이 사라진 사회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이 민족주의 역사학의 세 갈래를 대표하는 역사가라고 이야기한다. 박은식은 개명 유학자로 민족주의자였고 당대의 역사적 사실 기록에 초점을 두고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다. 그는 '한국'이라는 국호를 일관되게 사용한다. 신채호는 당대가 아닌 고대사를 자주적 민족의식에 입각해 <조선상고사>를 쓴다. 신채호도 투키디데스와 같이 상충하는 문헌 기록을 비교 검토해서 개연성 높은 것을 채택했다. 그의 글에 나오는 연개소문, 김춘추, 김유신에 대한 글을 보면 역사가에 따라 평가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백남운은 유물사관 공식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역사를 <조선사회경제사>를 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역사를 다루지만 조선 시대는 일제 경찰 탄압으로 쓰지 못한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 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역사 이론서인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매우 유명하다. 저자는 열 번 넘게 읽었지만 내용을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읽을 때마다 좋았다고 덧붙인다. 카는 다음과 같이 역사에 대해 말한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연구하려면 먼저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 전에 그 역사가가 살았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살펴보라."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은 외부 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라고 응전에 성공하면 성장하고 실패하면 쇠퇴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연역적 추론이 아닌, 경험을 통한 귀납적 결론이다. 또한 창조적 소수자는 창조성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전략한다고 이야기한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의 충돌을 막으려면 다문명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즉, 보편주의를 강요할 수도 없고 상대주의로 모든 것을 용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문명 발전 속도의 차이의 근본 원인은 오직 환경이라고 주장한다. 즉, 유럽이 권력과 부를 장악한 것은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유리한 환경 덕분이라는 점이다. 그 환경은 바로, 야생 동식물의 분포, 고립도의 차이, 대륙의 면적과 인구 수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역사에 방향이 있는지, 역사는 정의를 실현하는지, 역사의 발전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등에 대해 답한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 혁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이 더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 농업혁명은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으며,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도 더 질이 나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의 최대 사기였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역사를 읽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바로 재미와 현재 이해, 그리고 미래 전망이다. 쓰는 사람은 유한성을 넘고 싶어서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사실과 사건을 알리고 싶고 그 안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다. 저자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야이기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책을 쓰며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를 계획한다. 그 중심에 '내'가 있고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반성하고 발전한다. 이것이 역사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