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권 시대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
심형석.황성규 지음 / 원앤원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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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은 정치행위이고, 부동산 시장을 예측하는 건 정부의 욕망을 읽는 작업이다." 

어느 정권이 어떤 정책을 펴는지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부동산이다. 일반적으로 부동산 책은 정부의 규제가 부동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분석한다. 즉, 수동적이고 선제적 대응이 어렵다. <진보정권 시대 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는 반대로 앞으로 10년은 진보정권이 유지될 것으로 보고 부동산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측하고 있어서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먼저 문재인 정부는 참여 정부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정책을 쓰고 있다고 진단한다. 다른 점은 문재인 정부가 추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참여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순차적이었으나 문재인 정부는 종합적이라고 설명한다. 더불어, 세금과 대출 규제만으로는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없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으로 크게 나눈다. 군부독재 이후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이 10년씩 집권을 했다. 그리고 다시 진보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먼저 이 흐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싶어 해서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집값이 오르면 보수정권이 유리하다. 저자가 잘 지적하듯이 문제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우 높은 반면,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투표장에 잘 가지 않는다. 이는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은 새겨 들어야 하는 말이다. 놀랍게도 신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 투표 성향도 바뀐다. '성북구 을'이 대표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진보정권이 10년 이상 집권할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단순히 이 정권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보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조언한다. 선별적 투자 및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서울 도심의 재건축 이슈가 있거나 최근 입주한 소형 아파트는 보유하라고 조언한다.  

전 세계적으로 증여 증가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도 그 건수가 올라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증여가 늘면 매물이 줄어들어 집값이 오를 수 있다. 더불어, 증여가 늘어난다는 것은 미래 부동산 시장을 좋게 본다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앞으로 상승한다고 보면 조정이 왔을 때 증여를 하는 것이 이득이다. 

정부의 규제로 오히려 집값이 더 상승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바로, 동결효과로 인해서이다. 사람들은 매물을 거두어들이고 보유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요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 꼴이 된 것이다. 더불어 공급이 줄어들어 가격은 상승했다. 그렇다고 정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만큼 부동산 가격을 잡는 것은 어렵다. 

저자는 60대 이상 연령층의 매매 거래량 비중 상승을 지적한다. 베이비붐 세대가 여전히 주택 매입 수요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매매에 가담할 경제적 여력이 된다는 반증이다. 현재 30-40대인 에코봄 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도 조금씩 아파트 매매에 가담하고 있어 안정적 수요가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미국 모기지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집값의 1%만 내면 나머지 99%를 빌려주는 상품도 있다고 한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한지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이 일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부모가 주택 구매 선납금을 내고 나머지는 스스로 마련하는 비중이 전체의 41.1%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월세를 투자수익률이 아닌 주거비용으로 이해하라는 대목도 눈에 들어온다. 중간소득가구의 경우 월 80만 원 넘어가면 부담이 된다. 

현재 추세를 보면, 미혼, 이혼, 졸혼의 증가로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솔직하게 이러한 추이는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지만 임대 사업자에게는 유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오피스텔 사업자라면 중장년층 1인 가구를 타깃으로 하는 방 1~2개 있는 적정 규모의 소형 주거 시설을 기획하라고 조언한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해답은 서울 아파트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신규로 분양하는 아파트가 가장 안전한 부동산 상품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특히 서울의 미분양이 장기적으로 알짜 부동산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컬처 300으로부터 제품을 무상으로 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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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데이지 크리스토둘루 지음, 김승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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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교사들이 교육에 대해 배운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틀린 것이며, 또한 효과적이지 않은 교수 방법을 배운다는 점이다."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책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우수 수업 사례'로 평가받은 자료에서 비판 대상을 찾아 근거를 제시하는데,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저자가 말하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은 다음과 같다.  

1. 지식보다 역량이 더 중요하다. 
2.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다. 
3.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4.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5.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 
6.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다. 
7.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주입식 교육과 암기 학습이 문제가 많다고 하여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탐구 학습방법이 미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 학습방법은 효과가 낮고 생각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활동에 더 관심을 두게 만든다.  

지금 교육은 객관적 사실과 지식을 의도적으로 경시한다고 지적한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연대기를 외우는 등 사실적 지식을 암기하는 학습이 더 이상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교육은 지식 전수를 축소하고 학습경험과 활동을 강조한다.  

그런데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게 되면서 이러한 방법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다. 문제를 풀 때 작업기억에 정보를 두게 되는데 작업기억은 대단히 제한된 공간이다. 따라서, 용량이 큰 장기기억에서 정보를 불러와야 한다. 결국, 장기기억에 지식을 저장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려면 장기기억에 많은 정보가 들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장기기억에 특정 주제에 대한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으면 그 주제의 새로운 지식을 접할 때 훨씬 쉽게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속독의 비결이 다독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사실적 지식들을 장기기억에 저장해 놓을 때 그것들이 실제적인 사고 장치의 일부가 되어 우리 인간 인지의 가장 큰 한계 중의 하나인 작업기억의 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 하나를 기억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 150개를 배우고 기억한다면 그 지식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학생들이 개념을 잘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사실적 지식을 더 많이 습득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창의성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지식들이 연결되고 결합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적 지식은 창의성, 문제 해결력 및 분석력, 또는 의미 이해력에 대척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적 지식은 이러한 중요한 역량들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이러한 역량들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은 하위 역량으로 분류하고 분석과 평가는 상위 역량으로 분류하는데 이것이 오류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역량과 지식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며 더군다나 지식이 덜 중요하지 않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역량은 향상된다. 문제는 현대 교육은 지식 축적을 개념 이해력 증진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것으로 여기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야 사실적 지식을 가르치는 방법의 가치에 대해서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교육은 교수 주도로 사실적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은 학생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비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결국, 교사는 최소한 개입하고 학생 주도의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사가 말을 적게 하고 학생들이 토론을 더 많이 하면 학습 향상 효과도 떨어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니 약간은 난감하다. 교사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이 과연 맞는 방향일까?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고 지시하지 말고 학생들이 토론하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수업이 장려된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반대로 자기주도적 학습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과학적 사실을 배울 때도 교사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은 현상에서 그 원리를 뽑아낼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먼저 사실적 지식의 배움이 필요하다. 물론 저자도 무의미한 암기학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언급한다. 

"뉴턴이 "내가 많은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성취를 이용하여 발전한다." 

"전문가는 초보자와 달리 장기기억 속에 엄청난 배경지식과 업무 수행 절차들을 저장하고 있으며, 저장된 지식과 절차를 실천한 경험이 많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전문가들이 소유한 지식과 경험은 약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그들의 사고방식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현재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한 나머지 교사의 역할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교사가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되면 배경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결국 이해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에게 복잡한 문제를 제시하고 그들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것은 사실적 지식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학생들이 즐거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직접교수법을 통한 지식 전달을 통하여 배우는 학생들은 지겨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즐겁게 학습하면 가장 좋겠지만 즐겁기만 하고 배우는 것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면 조금 지겹고 힘들더라도 수업을 듣고 암기하는 과정을 통하여 지식을 쌓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지식이 쌓이면 그때는 자지 주도 학습이 가능해진다. 

직접교수법이 학생들 지식 습득에 더 적합하다면 어떻게 더 잘 지식을 전달할지 교수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책도 약간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되듯이 직접교수법도 학생들의 이해 수준을 파악하여 그보다 약간 어려운 내용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다음으로 19세기 지식과 21세기 역량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지식과 역량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분하여 지식을 소홀히 여기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 만으로 지식을 기억하는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다. 더불어 빠르게 변하는 시대라 새로운 지식이 금방 가치가 없어지다는 인식도 이러한 분위기 형성에 한몫한다. 이에 따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지식이 아닌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문제 해결력과 대인관계 역량을 높이 사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지식 습득의 부담을 주지 말고 역량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립예술협회는 21세기 필요한 핵심 역량으로 시민성, 학습, 정보 관리, 인간관계, 상황 관리를 설정했다. 

이 역량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저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역량이 갑자기 중요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문제 해결 능력을 함양하고 협력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역량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량에 따라 새로운 학습 방법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지식을 제하게 되면 21세기 역량을 기를 수 없다. 지식이 역량이고 역량이 지식이다. 역량만을 가르치는 방법은 없다. 

이제 유식한 사람은 모든 것을 외우고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찾아야 되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지식을 가르치거나 암기시킬 필요가 없고 탐구 역량을 가르치고 정보를 탐구하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 교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보에 접근하고 정보를 평가하고 분류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구글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찾고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여전히 상당 수준의 지식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인터넷으로 정보에 접근하더라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문제를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찾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문제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해 효과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히 중요한 역량이다. 그러나 그 역량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교수법 관련해서 저자는 학생들이 생각하면서 배운 것을 장기기억에 쉽게 저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설명한다. 생각을 통하여 암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활동을 강조하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적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이 실제 실천하는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서 밝혔다. 교육을 통해 당당하고, 창의적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비판적 사고력을 지닌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현재의 교육 방법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주된 원인이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시대에 뒤처지고 과학적 근거도 없다는 편견 때문이다. 지식의 중요성을 밝혀 주는 증거는 명확하다... 인간의 뇌가 학습하는 방법을 과학적 증거를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 교육체제의 운영 방법을 보게 된다면 그는 교육체제가 교육을 애써 퇴보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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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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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마이클 비어드는 노벨상 수상자다. 대머리에 키가 작고 뚱뚱하지만 머리가 좋은 그래서 일부 여자들이 구제가 필요한 천재라고 여긴다. 신기하게도 그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고 그 다섯 번째 결혼마저 무너지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비어드가 외도를 해서 관계가 깨졌는데 이번엔 아내가 타핀과 외도를 했다. 

이러한 주인공 설정은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환상을 시원하게 깨뜨린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라고 하면 하얀 가운을 입고 칠판에 현란한 수식을 동원하여 문제를 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노벨상 수상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사생활이 있고 복잡한 부부 관계가 놓여 있었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후광 효과는 엄청났다. 비어드는 특별히 따로 연구를 하지 않고 이름만 여기저기 빌려주고 명예직을 맡으며 때때로 강의를 하거나 모임에 참석하여 발언을 하면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이루었을 때보다 그 꿈을 향해 달려갈 때 더 행복할 수 있다.  

비어드는 연구소에서 올더스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이 청년은 태양에너지에 대한 자신이 연구를 검토해달라고 비어드에게 전달한다. 비어드는 이 청년을 우연한 기회에 아내에게 소개하게 되는데 어느 날 자기 집에서 아내와 바람이 난 이 청년을 발견하게 된다. 올더스는 당황하여 사과하러 가다가 미끄러져 즉사하게 되며 이야기는 복잡하게 흘러간다. 비어드는 그냥 신고하면 되는데, 아내와 바람을 피운 타핀이 살해한 것으로 조작한다. 결국 타핀은 유죄 판정을 받게 된다. 

비어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극히 일부 수정하여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저자는 이를 통하여 현실을 비판하는 것 같다. 연구만을 놓고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처럼 정치가 개입하여 수상자를 선정하는, 대중과는 동떨어진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 명의 유력 후보를 놓고 위원회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바람에 네 번째 후보가 낙점되었다는 소문이 맞는지도 몰랐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유명해지면 잡음이 생기고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만들어 내려고 혈안이 된다. 비어드의 전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노벨 바람둥이' 등으로 기사가 나온다.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에 대한 기사는 언제나 흥행을 이룬다. 검색어 순위에 오른 유명 인사들을 검색하면 사생활에 대한 기사가 많다. 결혼은 물론이고 이혼, 재테크 심지어 그들의 가족에 대한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기후 변화와 태양 에너지에 대한 내용은 관심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비어드가 책에서 강연하듯이 석유는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중에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는 여전히 매우 높고 대체 에너지에 대한 개발은 더딘 상황이다. 더불어,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구 대재앙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 어떤 에너지보다도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태양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비단 <솔라>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필요하며 연구를 통하여 실질적 열매를 맺어야 하는 상황이다. 

비어드는 나아가, 국가 차원이 아닌 지구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태양 에너지와 같은 청정에너지에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비어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인 것 같다.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동안 지구에 비치는 태양광만으로도 일 년간 전 세계의 에너지 수요를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비어드의 아이디어의 원천이 바로 올더스의 연구자료라는 점이었다. 비어드는 올더스가 죽었으니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비밀은 없었고 더불어 누군가가 태양 전지판을 박살 낸다. 공들였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흔히들 말하는 제2의 인생, 새로운 출발이라는 개념은 없다. 비어드는 복잡한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으나 결국은 과거의 복잡한 삶과 연결들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새롭게 출발하려고 하나 여전히 과거의 인연과 경험, 생각은 현재의 나를 사로잡고 괴롭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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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 Why God?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문 필립 얀시 시리즈
필립 얀시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지진,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총기난사사건, 폭발사건, 테러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저자처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는가?"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첫돌이 되기 전에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돌아가신다. 당시, 저자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준비 중이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이런 잔인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인가?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러한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이나 사탄의 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특별히 당신을 선택하셔서 사랑의 마음으로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은 당신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 대규모 재앙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때부터 "선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참사를 허락하셨는가"라고 말하며 유신론자가 된다. 저자는 회의론자들이 그들의 신념 체계에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본 적이 없다고 일단 이야기한다. 

"당신들은 이런 대규모 비극에 왜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까? 어차피 의미도 목적도 없는 무신적 우주에서 이런 재앙은 당연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회의론자들이 갑자기 유신론자가 되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참사를 허락하실 수 있나라고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론'이 이미 성경에 나온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들은 기드온(삿6:13), 욥(욥19:7), 시편(시44:23), 전도자(전1:2), 이사야(사45:15), 예레미야(렘14:8,9), 심지어 예수님(마27:46)까지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부르짖는다. 나아가, 이런 부르짖음에 성경은 대부분 침묵한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부르짖음에 시원시원한 대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대표적으로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아주 긴 말씀을 해주시지만 거기에 왜 고난이 발생한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 다만, 욥에게 '너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나 하는 거냐?'라고 물으신다. 

저자는 이어서 성경의 기록자들은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세상은 사탄이 점령하여 다스리는 곳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인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원수를 멸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낙관주의와 기독교의 소망이 다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거라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소망은 피조 세계가 변화될 거라고 약속한다. 그 변화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건이나 자연재해 때마다 개입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런 사건이나 재난이 아무리 슬프다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가 많고 적대적인 세상에 개입하라고 사명을 주셨다." 

결국,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근원적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이 땅의 고통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불신앙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믿음은 미래로 가서 되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 

저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이 대답을 회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통의 원인을 안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그 고통을 초래한 상황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막상 고통당하는 사람은 거의 도움을 못 받게 된다." 

즉,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신약의 거의 모든 기록은 '고통의 원인'에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점을 옮긴다"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의미를 찾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을 인용하며 불가항력의 고통에 반응하는 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주요 방법이라고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여기서 드러난다. 바로 크고 작은 고통과 비극을 당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건강한 교회에 대해 말하며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오히려 극단적인 말들로 교회가 고통을 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난이 더 큰 선을 이룬다는 말도 자신의 비극을 슬퍼하며 어떻게 삶을 다시 시작할까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로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보다 더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결국, 저자는 '왜 고통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도 있어서이다. '왜'라고 질문하는 대신에, 고통받은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나아가 세상에 고통과 악, 원수가 여전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비극적 상황이 오더라도 의지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아들이 25살에 죽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때를 생각하며 쓴 책 <Lament for a Son>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것은 우리의 슬픔 중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다. 그는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분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발견했다." 

필립 얀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통에 반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 악과 고난이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한 사람 안에 담는 것이었다'라고 덧붙인다. 

예수님이 바로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 직접 내려오시어 우리의 이웃이 되셨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동정하신 것이 아니다. 죄 많은 세상 가운데 몸소 내려오시어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 편에 서신다. 내려오시어 신학적 교훈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자비와 치유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방법을 택하시지 않고, 대신 악이 넘치는 곳에 사는 우리를 찾아와 악의 희생자 중 하나가 되는 방법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셨고, 대신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놓는다!'라고 말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보내시는'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통 그 자체를 선하게 사용하신다. 더불어 고통이 속량되어도 상처는 남는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저 멀리에 있는 분, 이 땅의 고통에 무감각한 분으로 보지 않고, 이 땅의 고통을 몸소 겪길 원하시는 분으로 보게 된다. 인간과 이토록 깊이 자비 가운데 연합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종교는 없다." 

"고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난 중에 일어나는 속량적 변화 때문에 가치가 있다." 

저자는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을 인용한다.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로이시며 그들의 고통이신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 선한 하나님을 믿을 때만 비로소 세상의 악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에 대한 항의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하여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눈물을 닦아 주신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과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계21:4,5) 하나님은 고통의 속량으로 선한 것을 만들어내신다. 둘째로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나'라는 질문은 '고통의 시간에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교회에 속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미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새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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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2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13-2018 골든아워 2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10년 넘게 외상외과 의사로 일하며 많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 수가 100명이 넘어서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수를 세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2013년에서 2018년 사이의 이야기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인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국종 교수와 그의 팀도 세월호가 침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헬리콥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상황실과 관제탑에서 계속 경고가 들어와 강하하지 못한다. 

"사고 해역 상공 관할은 해양경찰이 맡았고, 다른 헬리콥터들의 진입은 충돌 사고 위험을 높인다며 밖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 위에는 우리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헬리콥터는 관제센터의 안내에 따라 팽목항으로 가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소방방재청, 경찰청, 보건복지부, 산림청의 헬리콥터들이 전부 다 행하지 않고 거기에 착륙해 있었다는 점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는 한 대도 없고 왜 전부 다 항구 옆 나대지에 모여 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이다. 저자는 거기서 김승룡 해남소방서장과 이야기를 하게 된다. 김승룡 서장은 각 정부 부처마다 정보 공유가 전혀 안 되고 있다고 한숨을 쉬며 답답해한다.  

"나는 그들과 만나 누가 사고 해역 영공의 비행을 금지시켰는지, 수난구조복장을 한 구조대원들이 왜 육상에 있는지, 모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저자는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사고 해역 영공으로 진입한다. 항공유가 바닥이 나서 인근의 해양경찰 기지나 공항에서 급유하려고 하나 '공식적 절차'가 미리 통보되지 않아서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결국 저 멀리까지 가서 기름을 얻게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었다. 

"배가 가라앉고 사람들의 생사 또한 알 수 없는 판국임에도 복잡한 행정 절차만은 견고하게 잘 유지됐다." 

"세월호 침몰을 두고 '드물게' 발생한 국가적 재난이라며 모두가 흥분했다. 나는 그것이 진정 드물게 발생한 재난인지, 드물게 발생한 일이라 국가의 대응이 이따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든 국가든 진정한 내공은 위기 때 발휘되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은 갈 길이 멀어 보였고, 당분간은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세월호 희생자들만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희생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 후 석 달 뒤에는 수색 작업을 마치고 복귀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해 5명의 대원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한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대원들이 '자원'해서 수색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다. 

"자원이라.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의 출처가 궁금했다. 그 단어를 곱씹으며 조직 구성원으로서 '자원'의 의미를 더듬었다. 윗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위험한 업무 투입 명령은 조직 안에서 때로 '자원'의 탈을 썼고,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조차 강요하는 것이었다." 

병원 전산에도 해커가 침입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그로 인해 NAS에 수년간 쌓인 파일들이 날아간다. 거기에는 권역외상센터 건립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 파일들이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백업을 구축하려고 병원에 장비를 요구했으나 반려된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는 적절한 선에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중도에 포기하는 용기가 없었고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보통은 이와 반대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현실과 적절히 타협해서 여러 문제가 터지고 만다. 다수가 이러니 저자와 같은 사람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헬리콥터의 민원은 상상을 초월한다. 협박 전화까지 걸려 온다. 광교 신도시까지 개발되며 유명 브랜드의 아파트들이 밀려오며 입주민들이 외상센터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상욕을 쏟아내는 일이 잦아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중증외상센터는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중증외상센터 의사들은 병원 내에 숙식이 가능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형평성을 이유로 이런 공간은 마련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도와주는 것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더불어 여전히 이국종 교수를 음해하는 말이 떠돈다. 그것도 그가 속한 의사 집단 안에서 나왔다. 

"나에 대한 뒷말과 욕설은 새롭지 않았다. 대부분이 주류 의과대학 사람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들에게 나는 의사가 아니고 동료도 아니며 때로는 사람조차도 아닌 듯했다." 

저자는 의료비가 적절히 투입되면 가장 극적인 효과를 보는 것이 중증외상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세계 의료계의 정설인데 한국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심지어 헬리콥터에서 병원과 소통하기 위한 무전기도 정부 지원이 없어 개인적으로 마련한다. 2011년부터 소방방재청에 요청했으나 6년째 방치되고 있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북한군 병사로 이국종 교수는 다시 한 번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더불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일어난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은 중증외상센터 사업의 난맥상도 고발한다. 그러나 2011년 석 선장 때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뿐이었으며 "한국에서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은 침몰하고 있다"라고  저자는 씁쓸하게 이야기한다. 

"중증외상센터는 고도의 단계적 뒷받침이 요구되는 사업이다. 한국 사회의 투명성 정도로는 의료계나 정부 모두 이런 사업을 감당할 수 없다. 15년간 나는 그 사실만을 확인한 것 같았다." 

"내 동료들을 깎아가며 여기까지 밀어붙여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간신히 구축해온 선진국 표준의 중증외상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말없이 버티다 쓰러져나갔다. 결국 이 중증외상센터 바닥은 내 동료들의 피로 물들었다."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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