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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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저명 작가는 여행기를 어떻게 쓸까? 하는 궁금증에 주저없이 이 책을 골랐다. 세계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가 이 책의 제목이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의 제목을 고른 것은 아니겠지만 독자의 호기심과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제목 선택인 것 같다.

 

책 표지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진이 이채로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녹이 슨 고철덩어리가 된 전차(혹은 장갑차?) 위에 호기롭게 올라 서 있는 그가 입은 청바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의 푸른 빛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나이는 들었으되, 아직 여전히 청춘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하긴, 이 책에 담긴 글들이 대부분 1990년대 초, 중반에 쓰여진 것들이니 젊은 시절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 시절 그의 감성을 되짚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책에는 이스프햄프턴, 무인도 까마귀섬의 비밀, 멕시코 대여행, 우동 맛기행, 노몬한의 녹슨 쇳덩어리 묘지,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여로, 걸어서 고베까지 등 모두 일곱 곳을 여행한 기록들이 사진작가 마쓰무라 에이조의 사진과 함께 담겨져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름난 유명 관광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곳들이다.

 

물론 지금이야 세계의 오지를 과거보다 손쉽게 다녀올 수 있을만큼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보다 교통 수단도 열악하고, 필요한 물자들도 부족한 상황에서 멕시코나 몽골의 오지를 직접 다녀온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여행기 곳곳에 그 때의 고단함이 생생히 담겨있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여행기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선망의 여행지들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그런 여행지들을 멋진 사진과 함께 담아낸 훌륭한 여행기들도 책이나 블로그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여행기의 홍수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철 지난 여행기가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미 지나간 세월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람과 풍경이 그 속에 고스란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이 나를 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행을 하며 여행기를 쓰는 것은 매우 귀중한 글쓰기 수업이 되었다며, 문학에 뜻을 둔 이는 자주 여행을 하며 여행기를 쓰는 것이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고 있다. 비록 문학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읽을만한 여행기를 쓰고 싶은 욕심이 있는 내게도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되어 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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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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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이라는 용어는 지금 세대에게는 무척 생소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1972년 10월 무렵의 어느 날(정확히는 10월 17일)에 우리나라의 눈부신 산업화를 이끌었다고 칭송받는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10.17 특별조치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0월 유신'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10월 유신 즈음에 태어난 '유신 키즈'지만, 유신의 맛을 제대로 느껴볼 수는 없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해 겨우 사회생활의 맛을 보고 있었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고 만 것이다. 어린 기억에도 엄청나게 넓은 실내 공간에 단체로 가서 묵념을 했던 일이 생생히 남아 있다. 무수히 많았던 국화 다발과 향 내음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뚜렷하다.

 

영남지역의 농촌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큰 인물이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화는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명문가 집안의 자손이 아닌,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대통령을 처음 가져 본 시골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박정희 대통령은 위상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무려 18년 동안의 집권기간 동안의 공과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조국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의 뒤에는 4.19 이후 자생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 역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희생, 월남 파병 군인들의 피와 땀 위에 이루어졌다는 지적에 마땅히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신의 시대가 종식된 지도 40여년이 가까워지는 이 시점에 다시 '유신'을 이야기 하는 이유가 무얼까.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의 지은이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 되살아났다"고 단언한다. 단순히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그 옛날 유신의 향기가 진하게 뿜어져 나옴을 지적하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어두움을 다시 끄집어 낸다. 이념적으로 정반대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의 간격만큼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유신시대의 사회상은 절망과 암울함으로 관철되어 있다.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선생의 죽음, YH 사건에 이르기까지 책에 담겨진 수많은 사건들은 유신의 치부 그 자체들이다.

 

다시 그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은 역사란 것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또 무언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달라진 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비극이 두 번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새 세대의 몫이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의 상처를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최근 KBS에서 '징비록'이라는 드라마로 방송되고 있기도 한 임진왜란이 그러하고, 씻을 수 없는 삼전도의 치욕을 남긴 병자호란이 그렇다. 가까이로는 식민지 시대가 그렇고, 6.25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단절되지 못하고 있는 비리와 부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둠의 과거와 말끔히 단절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불편한 역사의 민낯을 여러 번 다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난 과오를 꼼꼼히 살펴 다시는 그러한 치욕과 아픔과 서러움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바로 그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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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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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래 전에도 중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강원도에서 군생활하던 1993년쯤이었을 것이다. 마침 5분 대기조라서 짬짬이 책을 볼 시간이 있었던 덕분에 눈에 띄는 책들은 가리지 않고 섭렵했었다. 덕분에 동양의 고전이자, 쉽게 읽기 힘든 중용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다시 중용을 만났다. 이번에는 도올 김용옥의 해석으로 중용 전편을 원문과 함께 읽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책을 펴고, 또 덮고를 반복한 것이 1, 2년은 족히 지난 느낌이다. EBS에서 방송되었던 <중용, 인간의 맛>을 차근차근 보았더라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런데, 난 <중용>을 어렵사리 읽었지만 한편 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정자(程子)가 논어의 독서법을 이야기 하면서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 사람, 이 책을 읽은 후에도 그 사람이면, 그 사람은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도올 김용옥 선생도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중용을 읽었으되, 결코 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도올 김용옥의 자세한 설명 덕분에 <중용>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쏙쏙 머리에 잘 들어오고 이해가 되었지만, 정작 나의 현실적 삶은 <중용>을 읽기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좋은 책을 읽었으되 시간만 헛되이 보낸 셈이다.

 

지은이 김용옥은 이 책의 서문에서 미국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종속을 한결같이 비판하고 있다. 당연한 지적이다. 막강한 군사력의 우위와 첨단산업과 높은 학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최소한 3, 40년 동안은 미국이 세계 패권주의의 리더십을 확고하게 장악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하지만, 김용옥의 관점에서 미국은 세계 3등국가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미국 문명의 도덕성 상실 탓이다. 이제는 지는 해인 미국 대신, 그는 중국에 새로운 기대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한국의 지성인들은 지금껏 보여준 미국사랑의 10분의 1만큼만

중국사랑'을 가지고 있어도 그 10배 이상의 세계사적 공능을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중국의 고전을 연구하며 그 속에 담겨진 높은 경지를 접한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조선시대 노론 세도가들의 '소중화'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김용옥 선생의 이야기가 마땅찮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 우리에게 도움될만한 것들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중국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품는 것은, 새로운 종속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드는 대목이다.

 

중용은 중용 그 자체로 연구되고, 또 실생활에서 스스로를 가다듬는 가르침 정도로 이해되었음 좋겠다. 그 속에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빼어난 사상적 성취가 담겨있다고 해도, 중용을 중국의 것으로만 편협하게 바라보고, 또한 그것이 중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로 받아들여지닌 것은 중용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뜻을 오히려 거스르는 것이 아닐 지 경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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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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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느낌을 남기려 한다. 4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의 분량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은 성찰과 사색의 우주가 이 책에 담겨 있기에, 감히 나의 부족한 지식과 지혜로 풀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담론> 이라는 제목 만큼이나 무겁고 중요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신영복 교수가 성공회대학에서 진행했던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의 1부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이라는 2부로 나뉘어져 있다. 앞 부분은 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동양의 고전들을 총망라하고 있고, 뒷 부분은 20여년의 옥살이를 통해 깨닫게 된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 가고 있다.

 

신영복 교수는 교도소 생활을 '나의 대학시절'이라 표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인 그가 징역살이를 두고 대학시절이라 일컫는 이유는 무얼까.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담론> 이라는 책 속에 있다. 어렵게 느껴지는 동양의 고전들에 대한 통찰은 아무리 그가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지 20년 20일만인 1988년 8월 15일에 출소했다. 형언할 수 없는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무기징역형의 중압감과 기약없는 출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는 재소자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 역시도 수시로 고민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나 하는 질문에 그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고 한다. 그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절정이었다는 그의 이야기에 절로 가슴 한켠이 먹먹해짐을 느끼게 된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은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이 책을 펴낸 뜻을 넌지시 짐작해 보게 된다.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인내하기 힘들었던 무수한 시간을 인문학 공부와 인간에 대한 성찰로 버텨낸 것 자체도 훌륭한 일이지만, 어지러운 시대를 치유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방도를 '사람'에서 찾은 것 또한 그다운 해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어렵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담론에 귀 기울여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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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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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같다. 이병률이라는 사람을 안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의 글과 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시인이자 방송작가로 알려져 있는 이병률의 산문집 두 권을 읽었을 뿐,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은 데 말이다.

 

그의 책에는 여전히 서문도 없고, 에필로그도 없다. 그 흔한 차례도 없고, 페이지도 매겨지 있지 않다. 한편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마음데 드는 구절을 만나면 친구에게 "몇 페이지 몇번째 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해 줄 수도 있어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고, 오랜 작업 뒤에는 어떤 마음이었는 지 독자들에게 그 속내를 털어놓을 법도 한 데, 그는 한결같이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상관 없다. 혹여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작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한 구절을 여러 번 읽어도 도무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일처럼 느껴진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난 그저 어렴풋하게나마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곳을 여행하고,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지를 한발짝쯤 떨어져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하므로 이병률이 얼마나 대중적 인기가 있는 작가인 지도 내겐 별로 중요치 않다.

 

누군가 날 두고 이병률과 닮았다길래 한참을 생각해 봤다. 까칠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까칠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이병률 작가 역시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람한테 다정하면서 사람한테 까칠하다" 표현했다. 절묘하다. 아흔 아홉가지가 나와 다르다 해도 이 한가지 닮은 것만으로 나는 이병률과 닮은 사람이란 게 확실해졌다. 그래서 기분이 참 달달해 졌다. 세상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서, 그리고 그가 꽤나 유명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라서.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그리고 새로 나온 <내 옆에 있는 사람> 셋 중에서는 처음이 제일 나았다. <끌림>을 읽으면서는 정말이지 뭔가에 확 끌리는 느낌이 분명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곧이 곧대로,읽히는대로 이해되지는 않는다는 안타까움이 생겼다. 그의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의 세번째 여행산문집 출간을 앞두고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예약구매란 것도 해 봤다. 국내여행의 경험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냈다는 이야기에, 그가 어떻게 여행지의 풍광을 풀어낼 것인지도 궁금했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사람과 사연과 사색으로 채워진 여행지들은 지명만 내어주고 있을 뿐, 각각의 도시가 갖고 있는 선명한 이미지는 생략되어 있었다.

 

그곳은 문경일 수도 있고, 제주일 수도 있고, 서울 한복판일 수도 있고, 그의 고향 제천일 수도 있다. 그것이 비단 그곳에서만 존재해야 할 필연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이병률의 여행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나올 지도 모를 그의 다음 여행산문집에는 그만의 필체로 그려낸 여행지의 풍경이 좋은 내음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음 좋겠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과 사진은 여전히 효용가치가 있다. 이 따위 투정마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만큼 공감할 수 있어서 좋고, 때로는 그와 함께 어느 허름한 포장마차에 앉아, 혹은 파도 치는 한적한 시골 바닷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떠들어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무방비 상태에서 폐부 깊숙히를 찔린 것처럼 찰라의 날카로운 울림을 안겨주는 그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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