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사 수업 - 유대 문헌으로 보는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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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텍스트(text)라도 그 정황(context) 안에서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텍스트는 진공 상태에서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문맥과 배경이라는 큰 그림 안에 텍스트를 위치시켜야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오래된 문헌일수록 당시의 정황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경은 2천여 년 전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여러 명의 저자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떠한 필요와 목적에 의해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이기도 하지만, 66권의 각기 다른 관점의 책 모음집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그 배경 이해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제2성전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포로기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와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끝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제2성전기'의 이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배경을 '제2성전기' 역사와 당시의 문헌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용어들이 신약에서 사용될 때,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어떠한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용어와 문화가 형성되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문헌과 성경을 접목한 신구약 중간사 전문강사로 활동 중인 『중간사 수업』의 저자 박양규. 그는 이 책에서 이미 통용되는 '제2성전기'라는 용어 대신에 '신구약 중간사'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신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색하기에 더욱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신구약 중간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시작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는가?'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입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은 무엇인가?'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강대국들은 이스라엘을 정치적 · 군사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했던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며, 갖은 수치를 당합니다. 성전도 파괴됩니다. 그들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전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인 성전이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혹은 타국의 지도자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전'이 아닌 새로운 중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 결속력을 다집니다.


저자는 각 장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꼼꼼하게 살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예를 들어, 70인 역의 번역을 통해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을 묵상합니다. 고상하지 않은 코이네 그리스어로의 번역을 통해 많은 사람을 위한 성스러운 목적을 감당할 수 있었지요.


특히 신약의 배경이 되는 유다 마카비 혁명과 당대의 정치 상황을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더하여 당시 생겨난 유대 공동체의 분파인 에세네파, 사두개파, 바리새파는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들의 특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폭넓게 유대 역사를 훑어봅니다. 이를 통해 구약과 신약은 훨씬 더 풍성하게 경험됩니다. 그저 하나의 텍스트로 건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 가운데 깊게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과도 공명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만의 또 다른 역사를 써 내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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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주전 5세기에 제2성전이라는 틀이 형성되고, 율법이라는 내용이 유대인들의 삶에 결속력을 확립하면서 유대교가 만들어집니다. 또 이 시기에는 오랜 포로 생활로 히브리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게 되어서 율법을 보존하는 계급인 서기관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 사회는 포로기 이후에 독특한 구조를 형성했습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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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은 시간도 선물이었습니다
이효경 지음 / 마음시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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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아픔이 나를 잠식할 때, 그 고통이 분노가 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토록 혐오하던 탐욕과 교만, 이기적인 모습이 나에게조차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항상 긍정적일 수는 없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사실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내면에 깊이 관심을 갖기는 힘들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을 가열하게 내몰았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휩쓸고 간 고통의 시간들조차 우리를 모르는 척하기 일쑤입니다. 과거에게 집착하며 호되게 그를 나무란다 해도 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사라졌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의 생채기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붙들어야 할 것은 예전의 '나'가 아니었습니다. 흔쾌히 '안녕'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살아내야 하는 순간입니다. 이효경 작가의 『지우고 싶은 시간도 선물이었습니다』는 '지금'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기쁨의 조각들이 흩날립니다.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소소한 행복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격정적으로 우리를 몰아가지 않습니다. 거칠어져 오돌토돌했던 마음이 금세 몽글몽글해집니다. 글과 사진으로 전해주는 따스함은 고스란히 우리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옵니다.


저자는 사진작가가 되어 드넓고 푸르른 생기를 전해줍니다. 초라한 인생이라 쪼그라든 마음에 바다와 숲을 품어봅니다. 저자는 시인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온기를 더하여 줍니다. '너'에게로 향한 작가의 시선은 낮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함께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우리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작가는 일상의 고통을 모르는 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아픔을 보듬고 품어냅니다. 혼란스럽고 각박한 세상에서 홀로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하게 보이는 시간을 넘어 더욱 찬란하게 빛날 내일이 있음을 기대합니다.


작가의 현재와 미래는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너를 살리고 나를 살린 따스한 그 마음을 품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잇대어 있음을 알고, '너'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서툰 사랑일지라도 받은 그 사랑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삶입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삶의 이야기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가슴 벅찬 사랑의 고백이요 노래입니다. 너에게 건네는 용서와 감사, 사랑은 나에게 또 다른 충만함을 선물로 줍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의 위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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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왜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 비아 문고 13
제임스 던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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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인 '부활'은 신비의 영역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하나의 걸림돌입니다.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본 사람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빈약한 자료에 의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들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부활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구원의 능력에 대한 큰 이야기 한가운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영국의 세계적 신약학자인 제임스 D. G. 던(James D. G. Dunn)은 이 책 『부활: 왜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부활 사건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중심부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진정으로 예수의 부활은 믿을만한 사건인가요?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박해에 진심이었던 바울에게 먼저 초점을 맞춥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정을 쏟아 핍박하던 바울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는 설교자와 선교사가 됩니다. 바울이 삶을 뒤흔들며 그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입니다.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붙잡히던 밤에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몸과 마음으로 배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이 다시금 회복되고 죽음을 불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입니다.


저자는 성경의 세부적 진술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건 자체의 불확실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관성이 없다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 중요한 증언들을 억지로 짜 맞추는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더하여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핵심적 사실은 일치함에 주목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빈 무덤에 대한 반대 논증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에 대해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고안해 낸 논리들이죠. 하지만 그 무엇도 결정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논증이 진행될수록 빈 무덤은 더욱 확실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던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부활을 설명합니다. 저자는 결국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초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탁월한 저자의 논증으로 충분하지만, 비아 문고가 늘 그래왔듯 보다 더 풍성하게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옮긴이의 해설과 함께 함께 읽을 다양한 책을 소개합니다. '부활'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보다 더 친절하고 탁월한 안내자를 찾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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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접
크리스틴 폴 지음, 정옥배 옮김 / 복있는사람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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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인 듯 보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점점이 흩어져 저마다의 공간에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만의 안전한 요새를 구축한 채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살펴보면 그들은 서로를 원합니다. 관계를 갈구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합니다. 이동이 잦고, 자기중심적인 문화 가운데 외로움과 소외를 경험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수용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보다도 '너'를 원하는 시대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지만 안전하게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인 경험이 부족합니다. '너'를 향해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어떠한 표현도 진심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듯합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 '손대접'은 마음 다해 '너'를 받아들이는 행위였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크리스틴 폴(Christine D. Pohl)은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저술합니다. 저자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 기독교에서의 '손대접'이야말로 환대를 표현하는 적극적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손대접이 가진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손대접에는 반문화적인 것을 내포할 때도 있습니다. 이미 자연스럽게 습득된 세속화를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은 힘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손대접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배제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모든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특히 약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때로 추상적인 말로 존중을 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향한 진심 어린 인정은 구체적인 일상의 관계에서 실제 삶으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서는 손대접을 통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영접하는 것을 몸소 보여줍니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비인간성을 용인하는 사회에 저항합니다.


손대접은 나그네를 돌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그네였음을 기억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때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우리의 손대접은 행위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혹여나 모를 위험요소들 때문입니다. 오랜 역사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에 따르는 위험과 어려움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초기의 만남은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손대접해보기를 권면합니다.


나그네를 돌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타자'로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손대접은 우리의 차이점보다 동질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나그네의 차이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형제자매로 보아야 합니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손대접의 한계와 어려움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어떤 지점에서 경계선을 그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정직하게 토로합니다. 그럼에도 우선적으로는 언제나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주장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후의 모호한 상황들에 대해 더욱 잘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독려합니다.


손대접은 마지못해 하는 의무나 책임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반응입니다.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는 손대접은 우리를 지치게 하며, 상대방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영이며, 반응입니다.


결국 유익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이해관계로 인해 시작한 사역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손대접하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차고 넘치게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손대접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서 작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뛰어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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