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과 과정과 목적을 논증하다
리처드 스윈번 지음, 강영안.신주영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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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특히 최근에는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대니얼 대넷(Daniel Dennett, 1942~),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 1967~),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1949~2011)로 대표되는 '새로운 무신론' New Atheism으로 인해 종교가 비판받고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유되어지던 무신론이 최근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흐름에서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인 리처드 스윈번(Richard G.Swinburne, 1934~)은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논의하며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다. 그는 과거의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현대 과학과 철학의 발전들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이 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론임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 1274)의 지적 유산과 방법론의 상당 부분을 수용하면서도 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용어를 배제한 과학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1장에서 신의 기본적 능력으로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임을 주장한다. 이로부터 파생되어지는 신의 속성은  영원히(eternal) 신체가 없이(bodiless) 편재(omnipresent)하는 우주의 창조자이며, 보존자라는 것이다. 또한 완전히 선하며(perfectly good, 이 책에서는 '전선'이라고 표현한다), 도적적 의무의 기원이 됨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2장에서 스윈번은 물리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무생물의 인과성을 설명하는 무생물적 설명(inanimate explanat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도적인 인과성을 설명하는 인격적 설명(personal explanation)이다. 그는 어떤 법칙이 실제로 자연법칙이 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단순성의 원칙'임을 스윈번은 주장한다. 이 장에서는 행성의 관찰이나 다양한 과학 용어가 등장하기에 그러한 용어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은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물론 이후에도 저자는 과학철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특히 4,5장은 더 난해할 수 있다). 


3장에서 저자는 무생물적 인과성과 인격적 인과성은 상호작용함을 주장한다. 사건에 대한 충분한 설명(full explanation) 중에 일부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데 이를 저자는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이라 명명한다. 궁극적 설명에 대한 논의에 있어 저자는 세 가지 이론을 소개한다. 첫째로 모든 요인들의 존재와 활동이 완전한 무생물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유물론이다. 둘째는 유물론의 대안으로 소개되는 혼합이론으로 인간주의(humanism)을 간단히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설명이 인격적인 의미로 설명이 된다는 유신론(theism)이다. 저자는 2장에서 설명한 '단순성의 원칙'을 토대로 유신론과 유물론에 비해 유신론이 모든 현상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을 제공함을 강조한다.


4장에서 저자는 우주와 우주의 여러 질서가 어떻게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지를 논증한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이 과학이 설명하기에는 큰 주제들이며, 따라서 인격적 설명을 추구해야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과학은 자연계의 질서정연함을 설명하고 증명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며, 그러한 사실은 신의 존재를 상정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더욱 깊은 원인이 있음을 믿을 수밖에 없는 강력한 근거가 됨을 강조한다. 


5장에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영혼이 신체와 연결되는 방식을 통하여 유신론이 타당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뇌와 영혼의 결합은 물리적 과정이나 과학적 설명으로 불가능함을 논증한다. 신의 존재를 가정했을 때 인간과 고등동물은 영혼과 신체와 영혼의 결합은 충분하고 궁극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6장은 전통적으로 '신정론'의 문제라고 불리어지는 '악의 문제'다. 왜 전능하며 선하다고 하는 신은 악을 허용하는가? 먼저 저자는 악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자연적 악'으로 인간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닌 자연 발생적인 악이다. 둘째는 '도덕적 악'으로 인간이 고의적으로 야기한 악이다. 저자는 '자유의지 방어'의 개념으로 이러한 악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한다. 즉 우리의 자유의지는 자유로운 선택과 더불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이며 가능성이기 때문에 악의 발생 여부를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후에 스윈번은 더욱 엄밀하게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한다.


마지막으로 스윈번은 기적들과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신적 임재의 경험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적과 신적 임재에 대한 경험을 신이 존재하지 않을 확률보다 신이 존재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의 모든 논증들의 개연성을 고려한다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신의 존재 유무를 입증할 때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이미 형성된 세계관 즉 믿음을 내포한 시각이다. 즉 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에 대한 변증이라는 것이 너무 더딘 과정이며 불필요하고 소소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무신론자들에게는 유신론자들이 전제하거나 확언하는 부분들이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무신론자들이 과연 이 책을 읽고 신의 존재를 인정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최대한 객관적 언어로 표현하고 논증하는 연습을 한다면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또한 고통의 문제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입증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강유원(1962~)은 『책 읽기의 끝과 시작』(라티오, 2020)에서 책의 내용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책의 첫 독자인 역자의 글이 있다면 꼭 읽기를 권한다.  스윈번의 『신은 존재하는가』는 이 원리를 적용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기독교 철학자인 강영안(1952~)은 친절하게 책 서두에 '옮긴이의 글'을 통해 이 책의 논리적 흐름을 요약하여 정리한다. 그리하여 많은 독자들이 지도를 손에 들고 책을 탐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이 영원히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그가 영원히 신체가 없이 편재하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보존자이고, 전선하며, 도덕적 의무의 기원이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론은 신이라는 존재가 단지 이러한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자유로운 속성들을 영원히 가지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유신론은 신이 이러한 속성들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바, 이를 신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 P47

사건에 대한 완전한 설명 중 일부는 사건에 포함된 모든 요인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이전의 원인들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데, 나는 앞으로 이러한 설명을 사건에 대한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이라고 부를 것이다.
‘설명‘에 대한 인류의 탐구는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설명, 곧 다른 모든 대상이 자신의 존재와 속성을 의존하는 실체 혹은 실체들을 추구한다 - P81

유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이 한 실체, 곧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한 신에 의해 그 존재가 보존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신론은 모든 실체가 가지는 모든 속성들은 신이 발생시켰거나 신이 허용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설명‘의 특징은 바로 적은 수의 원인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직 하나의 원인을 가정하는 설명보다 더 단순한 설명은 없다 - P86

유물론적 가설에 의하면 물질적 대상들이 서로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유신론은 그 기준들을 잘 충족시키기 때문에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규칙적인 행동은 신의 존재를 주장함에 있어서 타당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 P104

오늘날 동물과 사람의 복잡한 신체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다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오래 전에 특정한 화학물질들이 지구상에 있었고, 주어진 진화의 법칙(예컨대, 약간의 변이를 동반한 재생산)에 따라 복잡한 유기체가 창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복잡한 유기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분명히 사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full explanation이지만,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은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 설명이 되기 위해서는 왜 다른 법칙이 아니라 진화의 법칙이 작용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화학물질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110

우리의 우주는 동물과 사람을 진화시키도록 이끄는 방식으로(또는 그러한 특징으로 묘사되는 영원성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히 과학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에서 과학은 멈추게 된다. 우주의 생성과 진화 현상은 과학의 틀 자체를 구성한다. 나는 과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설명도 멈춘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와 법칙의 적응성과 우주의 진화적 잠재력에 대한 인격적 설명personal explanation을 추구해야 하는데, 유신론은 바로 그러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 P122

이 세계의 존재와 질서와 미세조정과, 이 세계 안에 있는 의식적 존재인 인간과, 인간이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해 관계를 형성할 수 잇게 하는 섭리적 기회와, 인간의 필요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또한 특별히 기독교의 토대로써 주어지는 기적들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과,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견적 경험들과,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견적 경험들을 통틀어 볼 때, 이 모든 사실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 확률보다 신이 존재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입증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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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으로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칸앤메리.박명준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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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흥미로운 전개에 울고 웃다를 반복한다. 성경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하다니.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연구했는데. 이 책을 통해 미처 보지 못했던 성경 곳곳에 숨어 있던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된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의 통찰과 적실한 표현으로 성경 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Rachel Held Evans, 1981~2019)는 『교회를 찾아서』(비아, 2018)를 통해 처음 만났다. 자신의 서사 가운데서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서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그 책은 교회의 배타적 모습에 실망했던 그녀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과정을 그리는 그녀의 이야기다. 


『다시, 성경으로』는 성경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며, 본문의 행간에 담긴 미묘한 감정, 본문을 둘러싼 문화적 맥락 등을 다양한 시각으로 풍성하게 풀어내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가 가미되어 더욱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전히 신학적으로 논쟁 중인 까다로운 본문들이나 주제에도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이 해석의 작업에 동참하자고 손을 내민다. 


매 챕터는 거의 비슷한 구성이다. 시작은 성경 이야기의 재해석이다. 행간에 있는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말, 감정 등을 묘사한다. 이 부분만 따로 모아서 소책자를 내도 사서 읽고 싶을 정도다. 매우 흥미롭고, 새롭다. 놀라운 통찰 앞에 그저 감탄만 할 때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저자의 표현력과 상상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매 챕터의 성경 이야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각각의 주제를 논한다. 각 주제는 기원, 구원, 전쟁, 지혜, 저항, 복음, 기적, 교회 이야기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그 이야기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더불어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해석 작업과 실제적인 적용으로 우리를 이끈다. 산뜻하고 신선한 문체지만 내용은 단단하다. 그녀의 질문은 정직하고 날카롭다.  


책의 말미에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녀는 무엇보다 이 책이 자신의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읽히고 토론하고 창의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리딩 가이드'와 '토론을 위한 질문'은 우리가 이 책을 함께 읽도록 독려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에 피하지 말라 한다. 더불어 함께 상상해 보자 한다.  


국외 저자의 책을 읽을 때 간혹 경험하는 작은 뿌듯함은 국내 저자나 회사, 명칭 등을 발견하게 될 때다. 이 책에서도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딜런 루프가 현대 엘란트라를 탔다는 것인데, 사실 썩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이보다 더 자부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4장에 등장하는 라승찬 교수다. 꽤 비중 있게 그의 책을 인용한다. 


아, 이 책의 '들어가며'만 읽었는데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과 디자인 등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 읽은 뒤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앞으로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믿고 봐도 되겠구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 출판사를 인터넷 서점에 알림 등록해뒀다. 번역도 매끄럽다(역시 알림 등록^^). 저자와 역자, 내용과 편집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책이다. 심지어 책의 크기와 무게까지도.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 저자의 출간 알림은 듣기 어렵겠다. 그녀는 작년 이 맘 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불과 37세로. 그녀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데. 다양한 성경의 이야기들과 신학적 주제들을 그녀가 어떻게 풀어낼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실하게 적용할지 기대되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헛헛했다. 너무도 아쉽기에 더욱 소중한 이 책이다.

다양한 학자와 시인들, 성경을 바라보는 여러 전통과 관습을 통해 나의 성경은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유대인의 성경 해석법은 내게 성경 속 수수께끼와 모순에 맞서 싸우지 말고 대범하게 품으라고, 성경은 본질적으로 읽는 이가 씨름하며 의심하고 상상하며 토론하게 만드는 책임을 가르쳐 주었다. - P28

성경은 다양한 이야기의 모음집이기에 각각의 이야기는 그 쓰인 의도를 파악할 때 거기서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 P31

"예술가라면 마법보다 영감을 선호한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영감은 행운아나 인기 많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 영감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와 창조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작은 창조자가 동역하는 과정이며,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협업이다." - P33

"기원 이야기는 흑백 사진보다는 천연색 사진에 가깝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실과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향수와 경각심을 일으키는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 이야기 중 어떤 것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가려져 있다가 특정한 시점에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 P48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빌려 왔는지 밝히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한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들과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며 유사한 문학 장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 P50

"창세기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 폐허에서 건져 낸 고고학적 성과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이 모든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완고한 근본주의자나 공격적인 무신론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기원 이야기에 신화나 과장의 흔적 또는 문화적 영향이 보일 때 결코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문학 양식을 크게 오해한 결과다." - P63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을 해석하는 미드라시는 성경 해석이 꼭 제로섬 게임과 같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좋은 이야기가 그렇듯 성경도 무궁무진한 통찰을 제공하며 새로운 도전을 불러온다. 관계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성경을 주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곧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회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 P71

"어느 시대에나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이 선명한 정의의 끈을 붙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핍박당하는 사람을 놓아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그들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 P93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기득권자들에게는 도전이 되었다. 유월절 만찬상에 오른 음식과 흑인 영가의 가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진리를 말할 것이며, 모두의 해방을 추구할 때 그저 그런 이야기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 P99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저자가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바라보고 있다면, 역대기의 저자는 역사의 치유와 민족의 단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정 시대를 향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두 가지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 P140

"내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예언자들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용과 짐승이 어슬렁거린다.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승리는 결국 저항하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둠은 밝아 오는 빛을 막을 수 없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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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웃, 제국 -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동선 창조
월터 브루그만 지음, 윤상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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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해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에 비해 어려워서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탁월한 구약성경의 해석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1933~)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통찰력 넘치는 성경해석을 통해 구약성경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 가운데 놓여 있음을 기억하게 만든다. 더불어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하나님, 이웃, 제국』을 통해 성경 본문(text)의 상황(context)은 '제국'의 맥락 가운데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제국'은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며, 약자의 부를 강자에게 몰아주고, 상품화 정책을 추구하며, 이러한 제도를 위해 언제든 모든 수위의 폭력을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이러한 제국 한가운데서 '대항 텍스트'(countertext)로 존재함을 브루그만은 역설한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통제하지만, 대항 텍스트는 주류 텍스트를 전복하려 하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여기서 저자는 언어유희를 통해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하는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 대항 텍스트라고 표현한다.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 subversion 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19).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해방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님은 출애굽 내러티브, 광야 체류 내러티브, 시내산 언약 등을 통해 현실의 상황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개입하신다. 우리는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저자는 호세아 2:2-23, 출애굽기 34:6-7, 예레미야 애가 3:20-22, 시편 85:10-13을 통해 정의와 은혜, 율법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장엄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신실함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이웃을 향해 나아감을 촉구한다. 더불어 이러한 관계성은 창조 세계의 회복과 관련되며, 모든 만물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정의는 모든 사람을 살리며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편만할 때 참된 정의가 드러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위로부터의 정의'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대조한다. '위로부터의 정의'는 '왕의 정의'로 축재를 일삼으며, 통제하는 정의다. 이는 서민들의 삶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제물 삼는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행함이 연대하는 자리이며, 성경은 그러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우리에게 들려준다. 참된 정의는 고갈과 축재, 독점과 폭력과 대항하여 해방이 불러오는 풍요가 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만이 짧고 불행한 축재의 삶에 맞서는 대안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한계를 초월하신다. '공통 신학'으로 대변되는 통제와 체제 정당화의 신학은 조건적인 면모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제재와 심판을 가하는 식이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당대에 만연한 체제의 신념과 세계관을 뛰어넘는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셨다. 


율법에서 저자는 제국의 법과 야웨의 율법을 대조한다. 제국의 법은 절대적이다. 이 법은 고칠 수 없고 철회할 수 없다. 하지만 야웨의 토라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개방되어 있으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위해 열려있다. 물론 하나님의 법 가운데에서도 고대 근동의 '공통 신학'적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율법은 그 긴장 가운데 궁극적으로 긍휼과 환대라는 회복적 정의와 함께 타자(이웃)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들음으로 계속되는 제국주의(전체주의)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다. 지속된 경청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어로 돌아선다. 그리하여 '이웃'을 향한 긍휼과 환대를 베푼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함없이 생동하시며 여전히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자세히 귀를 기울인다.


브루그만은 구약의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제국적 측면을 폭로하며, 그것과 반대되는 우리 삶의 가장 적실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이끌어낸다. 그의 성경 해석은 통찰력 있고, 필체는 생동감 넘치며, 적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세계관이 해석 과정에서 녹아들어있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성경 본문으로 돌아간다. 구약의 내러티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도 꼼꼼하고 세세하게 본문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지금 현재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부차적이지만 책을 읽을 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편집과 번역의 질을 들 수 있다. 성서유니온의 책이야 믿고 읽을 수 있다. 편집의 질로 인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번역은 책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중요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번역의 질이 떨어지면 집중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 책의 번역은 매우 훌륭하다. 브루그만 특유의 문체와 느낌을 잘 살려낸 듯하다(며칠 전 읽었던 책은 매우 훌륭한 저자의 탁월한 내용이었는데, 읽는 내내 진도를 나가기 힘들 정도의 문체와 단어 선정이었다). 


더불어 옮긴이의 적절한 해설은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역주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해설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감춰진 사본'이나 '빈곤과의 전쟁', '자신을 방어할 권리', '뉴 짐 크로우 법'에 대한 개념을 관심 있는 독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설명한다.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성경 본문은 항상 상황 속에서 출현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본문이 나타난 순간이나 당대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정치와 경제는 항상 동일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와 관련된 본문의 거시 상황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 P17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 P19

출애굽의 해방 내러티브, 광야에서 증명된 풍요, 시내산 언약은 야웨의 단호하신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화를 보라. 그분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요, 제국의 우상들이 판이하게 다른 야웨이시다. 그런 분이 착취에 관심을 두실리 만무하다 - P21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 P23

야웨께서 약속하신 새 일은 이제 ‘이적/경이‘mavels, wonders와 관계된다. 이 약속은 갱신된 언약에 발맞추어 도래할 결과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며, 이는 참으로 웅장하고 독창적일 것이다 - P46

신실에 대한 가르침은 타자를 신실의 궤도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타자를 거부하는 입장은 성경에 안온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하나님, 이스라엘, 교회가 공히 드러내듯이 궁극적인 신실함이란 타자를 품고자 가까이 ‘나아감‘reach을 말한다. 이 나아감이 ‘나아갈 자‘reacher를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뛰어 넘어 창조 세계로 오시고,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나아가셔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선민이 된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 P82

그분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요, 이스라엘과 만민을 신명나게 하며 바다와 들과 나무를 춤추고 노래하고 포효하게 하는 통치다 - P9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 하나님은 ‘먼 곳으로부터‘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가사의하게 등장하신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변함없는 충실함hesed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P169

이분은 예사로운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한 분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은 천상이나 성전처럼 먼 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깨진 관계를 바라보시고 친히 돌보시며 능히 한계 너머로 나아가실 수 있다. 그분이 광야로 진입하신다. - P188

통속적인 공통 신학은 은혜가 보응의 한계 너머로 흘러 나갈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로의 처지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 이스라엘은 야웨, 곧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속량하시고 관을 씌우시고 만족케 하시는‘ 분의 연민 어린 뜻이 구체적인 정책에 담길 것이라고 상상한다(시 103:3-5). - P221

야웨의 토라는 한곳에 고정되거나 갇힐 수 없으며,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메대와 페르시아의 법과 달리, 야웨의 토라는 항상 미지의 터로 나아갈 수 있게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 - P265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토라를 말씀하고 주석하고 강조하신다. 그분은 이웃 사랑의 관점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변화시키신다. 은혜로이 품으시고 정의롭게 회복하시는 그분께서 온 세계를 새롭게 정돈하겠다고 변함없이 고집하신다 - P286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곧 대화다. 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 사람들과 나누시는 대화다.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묻기도 하는 상대가 되었음을 알고 벅찬 기쁨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화가 이끌어 내는 순종에는 청신함과 기쁨과자유가 충만하게 깃든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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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으로 성경 읽기 -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토마스 R. 슈라이너 지음, 임요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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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Crossway의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이다(Crossway의 시리즈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Crossway의 이 시리즈는 성경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조망함으로 보다 더 성경을 통일된 전체로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신약학에 관심이 있다면 토마스 R.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는 익히 알 것이다. 이미 그는 『바울과 율법』, 『바울신학』, 『신약신학』, 『성경신학』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로 '언약' 개념을 주장하며, 이 주제를 통해 성경 전체를 조망한다. 그는 언약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언약들은 성경 메시지의 조화와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주며 구속사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속을 베풀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한다(창 3:15). 언약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징표들은 특성상 언약적이며,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17).


언약은 관계적인 용어며, 선택된 관계를 통해 결속력이 있는 약속을 맺는다. 이러한 성경에서의 언약 개념으로 저자는 6가지의 언약을 살펴본다. 이는 창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이스라엘과의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이다. 앞의 다섯 가지 언약은 새 언약으로 귀결되며, 새 언약은 각 언약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성취된다.


저자는 각 언약의 세부적인 특징과 핵심적 논의를 성경 본문을 주 자료로 하여 각 장에서 밝힌다. 특히 각각의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되는지를 매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다. 이를 통해 성경 전체가 언약이라는 주제로 이어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분량이 적기에 간명하게 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학의 핵심적 논의를 다루고 있어서 결코 가볍지 않다. 독자들은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글을 통해 쉽고 흥미롭게 성경에서의 핵심적 주제인 언약을 빠르게 훑어볼 수 있다. 더불어 성경 전체에서 중심적인 뼈대를 세울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각주가 거의 없고,  참고문헌이나 더 깊은 연구를 위한 도서가 없다는 것이다(원서에 있는 For Further Reading과 Scripture Index가 왜 빠졌을까?). 이는 성경에서의 '언약'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더욱 발전된 형태로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안내가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성경의 전체 그림을 쉽게 스케치해주는 원래의 의도에 맞게 좀 더 쉽고 깔끔한 문장이나 문체였으면 좋을 것 같다(원서를 곁에 두고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언약들은 성경 메시지의 조화와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주며 구속사 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속을 베풀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한다(창 3:15).
언약들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징표들은 특성상 언약적이며,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 P17

"내가 "창조 언약"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 용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언약이 다른 언약들과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볼 수 있으며, 이 용어는 구속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로 역사를 개시했으며, 이와 같이 옛 창조는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고 그 새로운 창조를 향해 가리킨다 - P29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제사장-왕이어야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해야 했으며, 그들이 에덴동산에 살고 에덴동산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선함을 보여야 했다.
그들이 죄로 타락함으로 인류를 죽음과 죄가 통치하는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전체 성경 내러티브를 볼 때,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하는 마지막 아담임을 볼 수 있다(롬 5:12-19; 고전 15:21-22)
아담은 언약의 우두머리로서 불행과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신자들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가운데 통치할 것이다(롬 5:17). - P46

노아 언약은 인간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끝의 시간이 오기까지 지상에 생명의 존속을 의미하는 보존의 언약이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노아 언약이 창조 언약의 최초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을 봤다.
인간의 깊은 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인간을 계속 축복하신다. 홍수는 일종의 다가올 최종 심판이다(마 24:36-41; 벧후 2:5) - P61

처음부터 온 세상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관심이 있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일종의 새로운 에덴의 새로운 아담이었다면, 이 축복이 온 세상에 확대되는 것으로 보려는 소망이 있었다 - P71

명백히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다가올 세대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역할을 성취해야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의롭고 정당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했다 - P81

언약의 조건적 요소와 무조건적 요소 사이의 긴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해결된다. 순종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중개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이다 - P91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겼지만, 옛 언약, 곧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마지막이자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이다. - P114

다윗 언약에 오면,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 속에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소망하고 있다. 다윗 왕과 그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대변할 것이며, 나라는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들이 백성을 통치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의로운 통치는 여호와의 지배 아래 그 땅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 P117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할 때, 새 창조는 온전히 임한다. 땅의 약속, 새 언약은 이제 전 우주로 확대되는데, 전 우주는 하나님의 도성이자 성전이 될 것이다(계 21:1-22:5).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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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큰 그림 -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읽는 성경
본 로버츠 지음, 전의우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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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마다 늘 아쉽다. 


성경 전체를 큰 이야기(narrative)로,

'하나님 나라'의 큰 관점 안에서,

쉽게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책은 많다.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도서 정리를 정리해보았다. =>https://blog.naver.com/mojung01/220655213340


성경의 매우 핵심적인 주제임에도 

그 가치에 비해 관심은 적은 듯하다.


성경을 하나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 무리이지만,

그럼에도 그중에서 꼭 필요한 관점은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접근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의미를 통전적으로 다루며, 

성경의 전체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운동하며 변화하는지를 다루면 어떨까?


여유가 된다면 꼭 그런 책을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우연하게 만난 책이다. 


원서의 제목을 보니 "God's Big Picture"로

이미 규장에서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성경 꿰뚫기』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출간되었던 책이다.  


이 책 생각보다 좋다. 

아. 어느 정도 기대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라를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아들 예수를 통해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27)."


성경통독 전에 꼭 읽어봐야 하고.

교회 다니는 분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곳곳에 사소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 아쉬움도 '대략적인 설명', '신학적 깊이' 등과 같은 것인데 분량의 한계로 어쩔 수 없는듯하다.


아. 그래도 때로는 깜짝 놀랄만한 신학적 진술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영혼과 육체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의 큰 그림을 보면 성경은 우리를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어지는 여정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고, 마지막에는 만물을 속량 하실 것이다(35)."


이 정도의 개념만 알더라도 

구원의 개념과 영역이 완전히 달라질 텐데.


이런 대목들도 적용거리가 풍부하다.

"하나님의 최우선 동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하나의 최종 결과인 것은 분명하더라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신다. 우리가 듣기에는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그러나 전혀 이기적이지 않다. 자신의 세상이 자신을 찬양하길 원하실 때 하나님은 자아를 북돋우려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으로 만물을 회복하려 하신다(58)." 


아무튼,

이 책은 교회의 필독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입문서. 기본서. 


그래서 한 번은 꼭 읽어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읽고.

성경을 통독하며 함께 읽어도 좋을듯하다.

"하나님은 창조 일을 마치고 안식하신다. 어떤 일을 완벽하게 끝내면 더는 할 일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과 함께 일곱째 날을 살고 자신의 ‘안식‘을 공유하며 자신의 완전한 창조 세계를 누리길 원하신다 - P39

요한이 본 도시가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췄던 성전의 지성소처럼 완벽한 정육면체라는 것은 놀랍다. 지성소는 작은 공간이었고, 대제사장 한 사람만 그것도 매년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도시 전체가 지성소다. 도시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만 2천 스타디아인 정육면체다(21:16). 다시 말해, 약4천 제곱킬로미터로 요한 당시 알려진 세계 전체의 넓이다. 핵심은 분명하다. 새 창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집중되는 특별한 곳이 없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거룩한 건물이 없을 것이다. 전체가 성전이다. 이런 까닭에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거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완전하게 알 것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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