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단평은 그 시기에 드물게도 자신의 오페라 무대를 가지고 자신이 만든 노래로 자신의 공연을 했다. 삭막하고 차가운 중국 땅에 뜨거운 오페라를 알리고 싶었던 단평.


오페라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고 외로움을 안아 줄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 오페라였다.


단평은 무대에서 그런 오페라를 불렀다. 온 마음을 다해 저 사람에게 나의 마음이 전달할 수 있게 노래를 불렀다.


단평을 좋아하던 운언은 단평의 공연을 늘 보러 왔다. 단평도 운언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웠고 태양보다 뜨거웠다. 단평은 사랑하는 운언을 위해 ‘야반가성’을 작곡하려 하지만 완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꼭 ‘야반가성’을 완성해서 당신 앞에서 불러 주겠소. 단평은 운언에게 약속한다.


단평과 운언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신분을 넘은 사랑을 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위험했고, 너무 험난했지만 너무 사랑했다. 사랑이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을 아름답게 위태위태하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나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운언은 집에서 점찍어 놓은 곳으로 혼인을 가게 되었다. 운언은 그게 싫어 도망가려다가 붙잡히고 만다.


그날 밤, 한 무리들에 의해 단평의 극장은 불에 타고 단평은 죽는다.


팔려가다시피 시집간 운언은 그 집에서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다. 때리고 또 때리다가 운언을 쫓아내고 만다. 운언은 불타버린 극장에 매일 와서 단평을 기다리다 미쳐간다.


그렇게,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10년 후 1936년이 되어 다 쓰러져가는 극장에 새롭게 나타난 극단이 공연을 하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이 엉망이었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에서 주인공 역의 위청은 노래 실력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위청에게 의문의 남자가 암막 뒤에 나타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릴 것이다.


그 의문의 남자는 죽은 줄 알았던 단평이었다. 단평은 10년 전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운언과 단평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극장에 불을 냈던 것이다. 단평은 염산 때문에 얼굴의 반이 흘러내렸지만 죽지 않고 극장에 숨어 ‘야반가성’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위청은 대면하지 않았던 단평의 말대로 로미와 줄리엣을 공연하면서 고음이 되지 않는 부분은 단평이 무대 뒤에서 대신 불러주었다. 단평이 노래를 부를 땐 운언을 생각하며 슬픔을 가득 채워 설움과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단평은 눈물을 흘린다. 얼굴의 반이 없는 단평은 매일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극장에 나타나는 운언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반이 흘러내린 얼굴로 앞에 나설 수 없어서 죽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운언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단평은 얼굴의 반이 날아가 버렸고 운언은 정신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위청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운언은 위청을 죽은 단평으로 착각한다.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쳐갔지만 운언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단평은 위청을 통해 운언에게 야반가성을 들려 주려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못마땅하게 여겼던,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조 씨가 운언에게 총을 쏜다. 총을 맞고 쓰러진 운언을 보고 그들 앞에서 단평은 절규한다. 마침내 운언 앞에 나타난 단평은 반이 없는 얼굴로 10년 동안 운언을 위해 만든 ‘야반가성’을 불러준다.



밤이 깊어서야 나와 당신은 비로소

영혼을 활짝 열고 꾸밈없는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한밤중에

음악이 되어 당신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별님에게 간청합니다

달님이 증인이 되어 주세요

일생을 다해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제 소망이 이루어져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찾아 날아갈 것입니다


반만 살아있는 얼굴의 단평과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운언은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다 짊어지고 행복한 길을 떠난다.


사랑은 그런 거라고 알려 주었던 단평과 운언의 사랑이야기 ‘야반가성’이었다.


https://youtu.be/SaVIEThrg_M

유튜브 목소리큰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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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같지 않은 잡채도 잡채다. 잡채는 뜨거울 때 먹으면 맛있다. 중국집에서 잡채밥이 맛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잡채밥이 짜장밥이나 짬뽕밥보다 맛이 덜 할 것 같은데 더 맛있다. 그러면 식으면 맛이 없냐면 또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식은 잡채를 더 좋아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저 뜨거운 모든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빨리 먹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식은 음식은 될 대로 돼라,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식은 잡채에 고추냉이를 뿌려 킁 하며 먹는 맛이 있다.


잡채라는 이름이 재미있어서 찾아보면 잡채의 한자는 갖가지 ‘잡(雜)’과 야채의 ‘채(菜)’다. 그래서 원래 잡채는 갖은 나물과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에 무쳐 볶은 음식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니까 요즘에 먹는 잡채처럼 당면은 소거되어 있던 음식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당면을 넣어서 볶은 이 음식을 잡채라고 했을까.라고 찾아보니 시대를 건너 올라가야 한다.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길다. 궁금한 사람도 없겠지만 궁금하면 검색해보기 바람요.


잡채를 먹다 보니 얼마 전에 본 일드 ‘나를 위한 한 끼 ~포상밥~’의 11화가 생각난다. 거기에 잡채가 나온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지방에서 도쿄로 올라와서 혼자서 우당탕탕 적응해가는 이야기를 서술한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처럼 맛있는 한 끼와 함께 그것을 잘 버무렸다.


11화에 한국 음식에 대해서 나온다. 막걸리도 팔고 부침개도 파는 일본 내 한국 주점에서 한국음식을 먹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면서 동료가 주인공을 위해 한국 음식을 잔뜩 시켜준다. 밑반찬이 우르르 나올 때 주인공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온다며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자 동료는 다이죠부요 라면서 원래 한국 식당에서는 밑반찬을 이렇게 준다고 한다. 이 부분은 고로 상도 한국으로 몇 번 왔을 때 자주 경험한 일화들이다.


주인공의 동료는 막걸리, 동태전, 잡채, 보쌈, 순두부찌개를 주문한다.

동료가 순두부는 알지? 이태원 때문에 유행했잖아,라고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진매료


그러면서 주인공은 맵찔인데 매운 음식에 도전을 하면서 한국의 순두부가 너무 맛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먹어보지 못한 자신을 나무란다. 그리고 이렇게 매운 한국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자신의 일에도 도전을 하면 알게 되는 게 있다면서 공모전에 도전하는 내용이 11화이다. 포상밥 11화에서는 한국 음식과 한국 드라마를 한꺼번에 라이킷했다.


이런 모습은 와카코와 사케에서도 주인공 무라사키 와카코가 일본 내 코리아 타운의 순자네 식당에서 부침개를 먹고 맛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어째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꽤나 어려울 것 같지만 문화는 사실 이렇게 늘 교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예능에서도 비대면이지만 이미 박진영이 나와서 혹독한 일본 예능계 방송인들을 놀라게 했고, 며칠 전에는 이정재가 나와서 일본 예능계 연예인들을 또 놀라게 했다.


박진영이 출연했을 때는 일본 연예계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고 여장남자로 유명한 마츠코 디럭스와 대화를 했다. 마츠코 디럭스는 혐한 연예인으로 아주 유명했다. 한국 연예계를 깔아뭉개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해왔다. 한국의 아이돌은 일본의 모습을 베낀 것이 아닌가, 라며 한국을 쏘아 부쳤다. 그러던 그? 그녀? 가 언젠가부터 일본 아이돌은 왜 블랙핑크처럼 될 수 없는가? 라며 일본 연예계에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왜 일본 아이돌은 아저씨들 앞에서 악수회나 하며 돈을 벌고 있어야 하나, 라며 일본을 꼬집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박진영과의 비대면으로 박진영의 연예계에 대한 철학을 듣게 된다. 박진영의 이야기를 듣는 마츠코 디럭스는 그만 귀엽기까지 해 버린다. 박진영의 똑 부러지는 말도, 철저한 생활방식도 듣는 마츠코 디럭스의 눈이 하트가 된다. 또 마츠코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일본에서는 전혀 없었던 맛으로 일본에 상륙한 교촌치킨을 맛보는 그런 프로그램인데 한 조각을 먹고 방송을 이어가야 하는데 맛있다며 그 자리에서 테이블에 올라온 조각들을 다 먹어 치우느라 방송이 매끄럽지 못하기도 했다.


https://youtu.be/B1Gv0n2Im5A

오키나와 생존기록(류큐남자)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침 방송의 파워가 대단한지, 방탄이들의 소식도 나올 때마다 대대적으로 소개를 한다. 그저 소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탄이들에 대해서 패널들 전부 감격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특히 일본은 방탄에 대해서 연일 보도를 하며 방탄의 행보에 일각을 세우며 초를 다투며 방탄의 소식을 전하는 느낌이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일본과 문화교류가 활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문화 개방이 오래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라디오에서 자드의 노래를 들을 수는 없다. 한일 양국의 정치인들이나 혐한 우익 일본인들과 사이가 안 좋을 뿐이지 문화적으로는 너무나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한국에서 거의 최고이며 가장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일본의 가장 잘 나가는 녀석 스다 마사키도 양익준과 함께 영화도 찍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같이 영화를 찍은 건 많다. 우리는 개방이라고 말은 하지만 전혀 개방이 되었다고 와닿지 않는다.


공부도 못하고 전공을 살리지도 못했지만 건축 디자인에는 관심이 아직도 많다. 좋아하는 건축가가 안도 다다오인데 일본에 가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보며 돌아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안도 다다오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의 책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다.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다. 안도 다다오는 쌍둥이로 권투를 하다 도쿄의 좁은 땅 위에 좁은 집이지만 그 안에서는 넓게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지어야지 하며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안도 다다오는 정식 코스 같은 것을 밟지 않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다. 그런 일대기는 너무 재미있다. 또 안도 다다오의 수업을 들으러 한국인들도 많이 간다. 꼭 학생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런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의 특징이라면 이게 분명 사람이 지은 건축물인데 그 안에 있으면 자연 속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늑하다는 것이다. 기이하고 또 기이한 건축가다. 그런 건축물이 제주도에 있다. 섭지코지의 글라하우스와 유민 미술관, 본태 박물관이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했다. 오래전에 한국에 대유행이었던 노출 콘크리트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디자인과 그림을 좋아한다면 제주도에 갈 때 바글바글 거리는 곳에 가서 줄 서서 문어나 사 먹지 말고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구경하라고 한다. 가보면 좋으니까. 그리고 예전의 지드레곤의 카페였던 몽상 드 애월에 가서 거기서 트레이시 애민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트레이시 애민이 지디에게 선물해준 자신의 작품이 거기에 떡 허니 걸려 있다. 트레이시 애민의 작품은 실제로 잘 볼 수 없기에 가서 보는 것만으로도 땡큐다.


아무튼 이렇게 문화적으로는 열심히 교류를 하고 있다. 근데 유독 우리나라 방송가만큼은 이상하게도 고립적이라는 기분이 든다. 하루키를 초대해도 될 법하지만 이제 코로나에, 하루키도 나이가 많아서 그럴 가망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고작 노래 정도도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다. 그저 노래일 뿐인데도 ‘안 돼!’라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라디오에서 러시아 노래나 북유럽 여러 나라의 노래도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기껏 가요와 팝송, 프랑스 노래 몇 곡이 나올 정도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나의 나라를 사랑하는 건 좋다. 하지만 국뽕에 취해서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시디를 넣는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거나 중국인들은 똥으로 뭔가를 해서 먹는다,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이상하다.


사실적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감정에 기대어 감성적으로 말하지 말고 제대로 알고 말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포상밥에서 보쌈 수육이 저렇게 나오다니. 여기 보쌈집에서 제대로 먹여주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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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1-0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잡채처럼 여러 주제들이 잘 버무려졌네요.

교관 2022-01-07 11:32   좋아요 0 | URL
의식의 흐름대로 가버렸네요 ㅋㅋㅋ
 


코로나 확진자로 극장에도 마음껏 갈 수 없는 요즘, 현재 나오는 영화에도 지칠 때는 예전의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다시 봐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 그중에 한 편을 봤다. 리플리다.


영화에서 주드 로의 미모는 가히 천만 불 짜리다. 영화에는 가장 예쁠 때의 케이트 블란쳇과 귀넷 펠트로우가 나오지만 주드 로가 다 이겨버릴 정도다.

 

영화는 리플리(맷 데이먼)가 디키(주드로)를 죽이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치닫는다. 리플리는 야망을 위해 점점 거짓을 확대시키고 또 확대시킨다. 상대방 앞에서 디키인 척 행동하는 리플리와 혼자 있을 때 괴로워하는 리플리의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또 몰입하고 만다.


피아노 조율사로 호텔 보이로 미래가 캄캄한 리플리는 이 지옥 같은 뉴욕을 떠나고 싶다. 별 볼일 없는 리플리가 선박 재벌의 제안을 받으며 달콤한 유혹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을 죽였지만 거짓을 늘어놓을수록 아름다운 여인과 자유와 쾌락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돈이 달콤한 인생을 살게끔 한다.

 

이 영화에서 이미 고인이 된 디키의 친구로 나오는 프레디 역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압권이다. 리플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눈빛, 멸시하는 말투, 가난한 자와 선을 듯는 행동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프레디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리플리에게 조각상의 머리로 프레디 머리는 작살이 나고 만다.

1999년 맷 데이먼의 리플리는 60년대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거기서 알랭 드롱의 역 이름이 ‘톰 리플레이’다. 이 리플리 이야기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실제 리플리 증후군에 걸려 마치 자신이 실제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해버려 자신이 아닌 삶을 산 한국의 리플리도 있다. 이 사람의 일화는 너무 유명하고 충격적이라 뉴스에도 대대적으로 났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이 리플리 때문에 사기죄로 복역을 한다. 여러 기사와 매체 중에 썬킴의 버전이다.

 

1956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은 중학교 중퇴까지가 이 사람의 학력 전부다. 초등학교 졸업이 끝이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의 부모도 중학교를 중퇴했는지 몰랐다. 계속 고등학교를 다닌 줄 알았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음에,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다른 곳으로 갔던 것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학력고사도 본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합격한다. 물론 다 거짓이다. 이 사람의 학력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초등학교 졸업이 공식적으로 끝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사기죄 이후 이 사람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의 이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었다.

 

가짜로 들어간 서울대 입학식에 떡 허니 부모님까지 초대한다. 부모님과 함께 서울대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사진까지 찍는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까지 한다. 법대 수업은 다 들어간다. 거기에 학생회장까지 한다. 서울법대 학생회장을 실제로 하게 된다. 대단하다.

 

어째서 하게 되었냐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운동권의 시대였기 때문에 학생회 서류 행정 업무 같은 걸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하겠습니다! 라며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완전 오케이인 것이다. 그래, 너 이름이 뭐야? 저는 김찬경이라고 합니다. 법대생인가? 네, 법대생입니다.

 

그렇다. 희대의 사기꾼. 한국의 리플리. 미래저축 회장 김찬경이 바로 그 인물이다.

 

법대 학생회장과 동아리 활동을 버젓이 하다가 군대를 간다. 군대를 갔는데 하필 자기 밑의 졸따구, 부사수가 실제 서울대 법대생이었다. 그러냐? 나도 서울대 법대야. 그러면서 군생활을 하면서 서울대 법대에 관한 모든 정보를 후임에게 다 듣는다. 이런 수업은 들어야 하고, 저런 수업을 들어야 하고, 이런 활동을 해야 하고. 오케이 알았다며, 제대한 다음에 더 적극적으로 서울대 법대 활동을 한다.

 

그런 다음에 과외까지 한다. 초등학생의 과외를 하는데, 아이의 부모 입장에서는 서울대 법대생에 학생회장이 와서 과외를 해주니까 아이고, 아이고 하게 되었다. 근데 집이 으리으리하니까, 저기 어머니 이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아서 사업을 하면 아주 좋은 게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받은 담보를 챙긴다.

 

당시 서울대 법대생이라고 하면 마담뚜들의 입질이 심할 때였다. 당시의 모 여대를 다니던 여학생과 –아버지는 당시 병원장이고- 맞선을 보게 된다. 머리와 재력이 만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주례를 또 웃기게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봐준다. 이 교수의 재미있는 사연은 나중에 리플리가 들통이 나고 나서 다시는 주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을 했는데 이 김찬경이라는 사람이 들통이 난 게 와이프 때문이었다. 당시에 아내는 대학교를 나왔는데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니 이게 뭔가 이상하고 어색한 것이다.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으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서인지 부부 사이의 많은 말을 하는 와중에 어색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가 서울대 학적부에 연락을 해본다. 서울대 법대에 감찬경이라는 학생이 등록이 되어 있냐고? 그런 사람 없는데요. 뭐야 그럼 나는 누구랑 결혼을 한 거지?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신기한 건 이혼을 하지 않는다.


이왕 결혼까지 한 거, 머리는 좋아 보이고(이 정도까지 왔으니 머리가 얼마나 비상해야 할까), 장인어른이 비밀을 알았지만 사위로 그냥 받아들인다. 지금과 다르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7. 80년대에는 학력위조 정도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사기를 친 것이 아니기에 처벌이 없었다. 그런데 김찬경은 모두에게 비밀이 들통이 났는데도 서울대 법대 동문회에도 버젓이 나갔다. 정말 대단하다.

 

다른 동문이 봤을 때 이상한 것이다. 김찬경은 아마 그때부터 자신은 리플리가 되지 않았을까. 자신은 자신에게 서울대 법대, 서울대 법대, 나는 서울대 법대, 법대생이라고 각인을 하다 보니 실제로 자신이 그만 서울대 법대생으로 둔갑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비밀이 만 천하에 탄로가 났음에도 동문회에 나갈 수 있을까.


동창생들은 김찬경을 이상하게 봤지만 동문회 측에서는 쟤 장인어른이 돈이 많다고 하니까 이런 동문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하게 되면서 인정을 해버린다. 이러다가 점점 사기를 치며 돈을 불려 나가다가 결정적으로 본사가 제주도에 있는 저축은행이라는 은행을 인수하게 된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사실은 본인은 서울대 법대생을 사칭했지만 자신 밑의 직원들은 전부 서울대 법대생으로 뽑았다.


결과적으로 회사 돈 200억을 횡령해서 중국으로 튀려는데 항구에서 잡혀서 복역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올해인가 출소하게 된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리플리의 초고봉 중에 하나다. 그런데 더한 최고봉이 있다. 김찬경보다 더 한 리플리의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다면 다음 기회에.



https://youtu.be/zcGLEdijA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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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여럿 중에 호쿠사이가 있다. 호쿠사이는 또 드뷔시와도 접점이 있다. 이 이야기로 접어들려면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잠깐 해야지 하며 시작했는데 그만 8개월인가, 9개월인가를 해버렸다. 야간에 일을 했는데 친구 몇이 와서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 덕분에 월급을 못 받는 달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주인에게 친구들은 밤새도록 무료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주인은 오케이 했다. 피시방은 대학교 앞이라 방학이면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밤새도록 피시방에서 일을 하니 피곤해서 새벽에 골방에서 잠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나에게는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늦게 피아노 공부에 뛰어들어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새벽에 냄새나는 골방에서 어렵게 잠이 들면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으 하는 좀비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귀에 올려놓으면, 오늘 피아노를 치다가 손톱이 빠졌다느니, 독일 아줌마는 어쩌니, 레슨을 마치고 접시를 닦는데 힘들다느니, 같은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였지만 이쪽에서는 몽롱한 새벽에 어렵게 잠이 들다 깨니 어쩔 수 없이 좀비처럼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닌 쾰른 음대는 학비가 없다. 대신 입학은 바늘구멍 통과하기고 졸업은 더 혹독하다. 넉넉한 친구들은 그저 피아노만 열심히 치면 되지만 그녀는 어려운 유학생이라 생활비에 집세까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는 절박했고 필사적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어서 새벽에 잠결에 전화를 받아도 잠 오니 끊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과 졸음의 경계에서 가물가물했다. 그녀는 베토벤에 심취해있었다. 베토벤을 다 독파하려고 연습에 또 연습이었다. 그녀는 베토벤, 베를리오즈, 슈베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잘했지만 음악가들의 이야기는 아직 잘 모를 때였다. 나는 그녀에게 음악가들의 생활고? 같은 이야기를 주렁주렁해주었다.


바흐는 말이야 닥치는 대로 음악을 만들어야 했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곡이 있었지만 교회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고. 성가대도 가르쳐야 했고, 예배 악곡도 작곡해야 했지. 그러다 보니 궁정 예배당의 관현악단의 악장이 되었고 거기에 맞는 음악도 작곡해야 했지. 지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바흐의 자식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 자그마치 스무 명이나 되었어. 스무 명을 먹여 살리려니까 나 좋아라, 하며 원하는 음악만 작곡해서는 살 수가 없었던 거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해야 그 많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고. 그러다 보니 그 유명한 칸타타도 만들어냈고 말이야. 그러니 너무 힘들어도 어떻게든 견뎌 봐. 독일에 가기 전에도 이런 말을 해주면 그녀는 밀사의 눈초리로 꽤나 집중해서 듣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듣기엔 새벽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다고. 베토벤이 말이야 한 번은 비가 오고 난 후 일층의 천장으로 물이 계속 떨어져서 일층에 살고 있는 주인이 화가 난 거야.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 보니 피아노를 치다가 손가락에 통증이 오면 통에 떨어진 빗물에 손을 넣어 통증을 식혀가면서 노력을 하고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녀에게 한 번은 드뷔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겨울이었다. 날이 너무 추워서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싫은 날, 골방에서 잠이 들어 있는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준 조각 케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프랑스 사조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는데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는데, 너 호쿠사이라고 알아?라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드뷔시는 몹시 오래전 사람 같지만 1910년대까지 살다 죽었다.


호쿠사이의 그림 중에 파도라는 그림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다. 호쿠사이의 파도는 각종 굿즈와 게임 캐릭터로도 사용이 된다.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그림을 드뷔시가 보게 되었다. 드뷔시는 살아생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20분이 넘는 ‘라메르’라는 곡을 만든다.

https://youtu.be/SgSNgzA37To 


라메르를 들어보면 정말 바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클라이맥스에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연주가 들린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건 클래식으로 연주를 하는데 마치 일. 본.이라는 풍의 기저가 깔린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이게 정말 신기하다. 그런 것을 보면 드뷔시는 정말 천재가 아닐까. 드뷔시는 여성 편력이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만난 여자 중에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는다며 총을 들고 자살을 하려고 한 여성도 있다. 드뷔시의 곡 중에는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판, 블란서어로 포느가 나오는 봄날의 나른한 곡도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장난기 가득한 곡 ‘골리워크의 케잌워크’도 있다.


호쿠사이는 춘화를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도만큼 유명한 그림이 문어가 여성의 몸에 밀착해있는 그림이다. 문어의 촉수가 여성을 건드리는 이 그림 이후 일본은 수많은 아류작들이 탄생했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촉수가 육체를 탐하는 이 형태는 세계로 뻗아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춘화가 있고 한국에도 춘화가 있다. 비교해서 보면 특징이 뚜렷해서 재미가 있다. 탐미에 있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우리나라에도 춘화가 성행을 했다. 풍속화를 제대로 그렸던 신윤복의 춘화가 유명하다. 신윤복의 춘화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좀 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신윤복의 ‘사시장춘’이라는 그림이 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그 사시장춘이 춘화로 분류되고 있다. 누군가는 어딜 봐서 이게 춘화야? 도대체 어디가 야한거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신윤복의 사시장춘은 몹시 은유적이다. 사시장춘은 그림 한 장으로 여러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윤복은 사시장춘을 통해서 봄날의 춘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일본이나 중국처럼 직설적인 것은 없으나 천천히 그림을 보면 또 직설이게 보이는 은유가 가득하다. 그걸 찾아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분도 과연 찾아내셨습니까.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던 그녀는 두 딸과 함께 지금은 부산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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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말이에요.라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한다. 추운 겨울 아침에, 싫구나,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커피 향기와, 햄에그를 굽는 지글거리는 냄새와 토스터 작동이 멈추며 내는 탁 소리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침대를 박차고 나오는 일이에요.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보면 이렇게 초반에 시작을 한다. 맛있는 냄새에 더 자길 포기하고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그 전경이 눈앞에 홀로그램이 되어 나타나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침에, 겨울의 아침에 눈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바로 맛있는 떡국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봉 감독의 영화 ‘괴물’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현서를 잃은 대신 세주를 얻은 강두는 하얗게 눈 덮인 한강변의 아침에 밥상을 차리고 세주를 깨운다. 세주는 쿨쿨 자다가 그대로 일어나서 맛있게 밥을 먹는다. 세주가 하수구 같은 곳을 돌며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이 장면은 세대를 관통해서 보는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각인시킨다.


겨울의 일요일, 잠은 더 자고 싶은데, 일어나기는 싫은데 맛있는 떡국의 냄새가 잠의 세계로 파고든다. 엄마가 밥 먹어라고 말하며 아빠가 나의 등을 슬슬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바로 일어나서 뜨거운 떡국을 퍼 먹었던 기억. 단칸방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은 겨울이 되면 주기적으로 오는 손님처럼 똑똑 노크를 하며 찾아온다. 마치 세주가 되어서 눈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 밥을 먹었던 기억.


아마 봉 감독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 장면을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걸어 다니며 간판 디자인을 보는 것 때문에 일행에게 핀잔을 들은 경우도 있고, 책 표지 디자인도 꽤나 유심히 보는 편이다. 올리는 소설의 표지도 마우스로 다 디자인을 한 것이다. 책 표지 하면 칩 키드의 디자인을 좋아한다. 칩 키드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간결하면서 눈을 확 사로잡는 디자인을 해 버린다. 미래의 세상은 디자인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사진: 펜톤미술학원 본원 공식 블로그 발췌


간판이나 과자의 글씨체도 전부 디자인인데 특히 좋아하는 글씨체가 ‘코카 콜라’다. 병에 딱 한글로 ‘코, 카, 콜, 라’라고 박힌 그 까만 글씨체의 디자인이 아주 좋다. 요즘에야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에겐 친숙한 코카콜라 이 글씨체 디자인은 68년에 등록이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이 디자인의 코카콜라로 쓰이고 있다.

이 글씨체 디자인을 만든 디자이너가 2017년에 작고하신 봉상균 화가다. 바로 봉 감독의 아버지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봉상균. 검색을 하면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봉 감독의 외할아버지도 시대의 이름을 남긴 소설가였다. 그는 김해경(이상), 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아카데미에서도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봉 감독은 아마도 아버지 봉상균 화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맛있게 겨울의 아침을 후루룩 같이 먹었던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추억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내 기억의 저편에 붙어서 겨울이 오면 손님처럼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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