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이라는 의미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숲으로 미즈마루의 밤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미즈마루 씨의 화려한 밤의 세계를 하루키가 이렇게 에둘러 표현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에세이에는 미즈마루 씨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나는 이 에세이를 잃어버렸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잃어버릴 리가 없는데 책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저 잃어버렸군, 다리도 없는데 도망을 가버리다니 하며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일상을 기록을 하기 때문에 책 제목을 검색을 했더니 몇 해 전에 후배에게 빌려 주었다.


책을 절대 빌려주지 않는데 하루키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는 후배에게 튕기다가 어쩔 수 없이 빌려줬는데 나에게 돌려주지 않고 그냥저냥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연락을 해서 야 이 녀석아! 하며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라니 후배 놈이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러게 빌려주지 않으려 했는데.

  

녀석은 며칠 전에 이 책을 구입해서 나에게 미안하다며 주었다. 어떻든 이 에세이도 이전의 하루키 에세이에서 소개되었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다시 리메이크한 버전이다. 오늘 이전에는 하루키 에세이의 강점인 큭큭 웃으며 읽었지만 오늘 다시 보니 지금의 사회상과 맞물려 조금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요즘은 교권이 무너져 학교가 엉망진창이 된 곳이 많다. 학부모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갑질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선생님들이 많아졌고, 신상이 알려졌음에도 변명과 억울하다는 생각 없는 가해자들의 입장에 연일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다.


그에 비해 에세이에 소개된 체벌에 대하여는 그 반대로 선생님에게 부당하게 맞은 하루키의 이야기다. 뭔가 잘못으로 인해 맞았다기보다는 그날그날 선생님의 기분에 따라 맞았다거나 매 맞는 분위기에 휩쓸려 중학생 시절에 하루키는 많이 맞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거나 뭔가를 머리를 때리거나 했다고 한다.


선생님한테 매를 맞는 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도 아이들은 선생님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맞았다. 맞아도 아이처럼 시간이 지나면 헤헤하며 잊곤 했다. 사실 몽둥이로 열심히 맞는 건 아이들이 잘 참고 뭐 그럴 수 있지 같은 분위기였는데 신문지를 돌돌 말아서 뺨을 때린다거나, 우산이나 드럼채로 머리를 때리면 기분이 몹시 나빴다.


시간이 흘렀다. 요즘은 몇 대 때리고 맞고 하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만약 내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껴지면 형사고발이 들어간다. 생계가 위협받고 생존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 한쪽이 법정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슬픈 현실이 되어 버렸다. 행복한 공간에 점점 불행한 장소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건 어떻게 봐도 슬프고 또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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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평론가들 중 몇몇은 하루키는 단편소설 작가라고 했다. 그 말은 장편소설은 호흡이 너무 길고 이야기가 어쩌고저쩌고 해서 별로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하루키의 중단편 소설이 영화가 많이 된 것만큼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처럼 단편소설가에 적합한지도 모르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읽는 재미가 있다.


그중 가장 긴 이야기에 속하는 일큐팔사 역시 재미있었다. 하루키 장편의 장점이라면 두 세계가 쪼개진다. 신작과 일각수의 꿈도 현실과 세계의 끝으로 나뉘고, 어둠의 저편에서도 현실과 알파빌로 나뉜다. 상실의 시대는 나오코의 세계와 미도리의 세계, 댄스 댄스 댄스와 양. 쫓. 모는 현실과 돌고래 호텔의 세계로 나뉜다.


일큐팔사 역시 두 세계로 나뉜다. 1984년과 1q84년. 두 개의 달이 뜬 세계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나기 전 각각 두 개의 달을 보는 장면은 인상 깊었다.


일큐팔시에는 여러 세계가 나온다. 고양이 마을이 나오고, 후카에리가 살았던 산속의 마을이 나오고, 시청료를 받으러 다녔던 덴고의 어린 시절, 종교에 접합한 부모를 따라 포교활동을 하던 아오마메의 어린 시절, 그리고 공기번데기 등 상상력을 끌어올려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세계들이 있었다.


일그러진 세계에서 두 사람이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사랑이었다.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주인공이 16살의 소녀를 만났을 때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고, 대낮에 깊은 꿈을 꾸는 것 같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런 순수한 심정을 품은 것 같았다’라고 했다.


덴고와 아오마메 역시 그 어릴 때 딱 한 번 손을 잡았을 때 그 순수한 심정으로 사랑을 느끼고 그 감정을 손을 오므리고 내내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일그러진 세계, 두 개의 달이 뜬 세계에서야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었다.


아오마메가 수도 고속도로의 계단을 오르는 순간부터, 후카에리, 공기번데기와 두 개의 달을 바라보는 덴고와 아오마까지 사람들은 일큐팔사의 세계를 잘 표현했다. 다른 장편 소설에 비해 일큐팔사의 일러스트가 압도적으로 많은 걸 보면 이 이야기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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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고야스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고야스 일가의 무덤은 매우 심플한 묘미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놀리스처럼 매끈하고 평평한 돌에(상당히 값나가는 석재) 세 사람의 이름이 반듯한 서체로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본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영화 역시 아주 심플하다. 지루하지만 그 속을 잘 파헤치면 마음의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특히 테마곡이 흐를 때면 그동안 지금껏 봐왔던 영화의 역사가 찰나로 지나가면서 그 중심에 인간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니체를 관통하고 하루키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에세이에서 여러 번 언급을 했다.


주인공이 고야스의, 고야스 가족의 묘비 앞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린 건 하루키 자신이 하루키 자신의 묘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달리기 에세이에서 자신의 묘비도 아주 간단하게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인가? 그 정도의 짤막한 글귀로 묘비에 새기고 싶다고 했다.


하루키가 거장이고 우리보다 앞서 나간 생각과 사고를 하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을 때 고야스 묘비 앞에 선 주인공과 같은 마음이 되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니까. 육체는 육체고 정신은 정신이고. 죽고 나면 죽음 그 이후는 영혼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Zilch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이 결코 행복하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육체를 잃은 영혼은 끝내 사라지고 만다. 아무것도 없고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만다.


아들을 잃고 아내마저 잃은 고야스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는 어쩌면 현실적 무의 상태로 도서관을 운영하며 삶을 견뎌왔을지 모른다. 고야스의 죽음은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고야스 가족의 묘비를 보는 주인공에게 하루키 자신이 이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개입을 해 버렸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느낌까지 들었다. 하루키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버린 느낌. 그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 살아있으니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루키도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면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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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일러스트 2 - 소설 속 세계를 그리다


이번에는 하루키의 방대한 소설을 전 세계의 팬들이 일러스트로 표현한 그림들입니다. 그저 보고 있으면 내용이, 스토리가 한눈에 확 들어옵니다. 정말 재치 있고 어? 이야, 할 정도로 그림 한 장에 이야기를 표현을 했습니다.

이건 영화 포스터 일러스트 같습니다. 필름 바이 트란 안 홍이라고 표기되어 있네요. 저는 트란 안 홍의 영화를 비교적 여러 번 봤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기 숲 속에서 와타나베가 손을 잡은 여인은 나오코일까요? 미도리일까요?


양. 쫓. 모 같은 초현실 이야기를 일러스트 한 장으로 다 표현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구에서 딱 한 마리뿐인 기이한 양과 양 박사가 있었던 곳과 양이 사는 지대, 그리고 머릿속으로 들어간 양이 새겨진 라이터까지. 양사나이가 뭔가 자경단 같은 모습이지만 여하튼 상하로 나뉘는 방대한 이야기의 세계관을 하나의 그림으로  아주 잘 나타냈습니다.


해변의 카프카 일러스트 역시 아주 좋습니다. 이 색감과 선의 경계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 세계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조밀하게 잘 넣은 것 같아요. 고양이 고마 녀석과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전갱이와 입구의 돌과 호시노 청년의 마스코트까지. 깨알같이 표현을 했네요. 멋집니다.


일큐팔사 역시 두 개의 달이 뜬 이 세계. 아마 전 세계인들이 하루키의 장편소설 중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일큐팔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장편 소설의 일러스트는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일큐팔사의 일러스트는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나중에 일큐팔사 일러스트 만으로 또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큐팔사 역시 두 개의 달이 뜬 세계를 말합니다. 일그러진 세계. 그런데 저 남자 두 사람은 무엇일까. 덴고와 하루키일까? 아니면 고마쓰? 아니면 주인공과 그림을 그린 사람? 아무리 봐도 아오마메는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단편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의 일러스트가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멋집니다. 이 단편은 고베 지진을 주제로 쓴 단편 집에 수록된 단편소설입니다. 다 아시죠. 정말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이 개구리 군과 함께 도쿄를 지진에서 구하는 내용이죠. 유치한 듯하지만 그 속을 바늘처럼 파고드는 서늘함이 있어서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저 이 소설을 오마주한 소설을 문예지에 싣기도 했을 정도였거든요.


역시 노르웨이 숲 일러스트입니다. 뒷 배경은 나오코가 요양을 했던 요양소 근처 숲 같지요. 콜라주 기법으로 노르웨이 숲의 이야기를 잘 나타냈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는 아무래도 스미레가 주인공이니 그녀를 모티브로 일러스트를 그린 그림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이 역시 스미레를 그린 거겠죠.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는 신비한 여인 뮤가 나옵니다.  뮤는 아주 신비로운 사람으로 놀이기구에서 저 먼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남자와 함께 있는. 그 뒤로 뮤는 머리가 하얗게 변했습니다. 젠이츠가 번개 맞고 머리가 노랗게 변한 것처럼. 뮤는 뭐랄까, 먼 곳에서의 소리가 기분 나쁠 정도로 깨끗하게 들리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뮤의 버전이 있는 일러스트도 한 번 보고 싶네요.


또 다른 일큐팔사 일러스트 속 여성이 아오마메일까요. 여하튼 하루키의 세계를 그린 일러스트를 보는 것 또한 굉장한 재미입니다.


이건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의 프랑스 버전입니다. 아마 책 표지로 보이는데 이 단편 소설은 단편 집 '반딧불이' 속에 수록된 단편 소설입니다. 이 프랑스 버전은 작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따로 해보겠습니다. 다른 일러스트도 찾아보시면 오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그림들이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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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키 일러스트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현재 하루키의 소설 덕분에 출판업계나 소설 덕후 내지는 하루키스트들은 고무되어 있는 상황,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분위기가 예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가 출간 될 때에도 붐이 일었습니다. 각 신문사마다 하루키에 대한 논평을 내기도 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일명 하루키빠 작가들이 하루키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해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소설가 한 사람이, 그것도 타국의 소설가 한 사람이 이토록 사랑을 받는 경우가 또 있었을까 싶은데요. 전 세계 하루키 팬들이 하루키 일러스트를 작업했는데요, 보고 있으면 하루키와 그의 세계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일러스트들이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일러스트를 보면 표층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봐도 하루키 팬들은 그림 속, 세계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알 수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일러스트를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 역시 하루키의 세계를, 하루키의 소설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한 장에 그의 소설 속 세계를 몽땅 집어넣었거든요.


한때 러시아 다음으로 한국의 독자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하루키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키를 모르는 사람들은 할아버지 소설가에게 웬 호들갑이야, 하루키라는 사람이 도대체 뭔데 이 난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하루키 팬들은 2, 30년이 넘게 하루키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고 글을 통해 이어져 왔기에 이 난리가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런 유대를 느끼는 건 몹시 고무되는 일입니다. 코로나 전에 독서모임 할 때 하루키 팬들이 모여 하루키 세계에 대해서, 하루키 소설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며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신작을 야금야금 앞니로 톡톡 단무지 끊어서 아껴먹듯 읽고 싶은데 벌써 삼분의 이를 읽어 버려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 일러스트 속에는 진정 하루키의 소설이 거의 들어있는 느낌입니다. 하늘에서 해변의 카프카에서 떨어지는 전갱이, 까마귀, 고마로 보이는 고양이. 그리고 양을 쫓는 모험 속에 등장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직공지구 같은 세계의 끝에 있는 건물까지.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하루키를 너무 잘 표현한 것 같아요.



이 일러스트는 하루키인지 애매하지만 재미있는 하루키의 모습이라고 합시다. 고양이를 타고 있는 하루키 씨, 손에 뭘 드신 겁니까.


역시 하루키 하면 고양이죠. 작가들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김영하도, 프랑스와즈 사강도 하루키도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하루키에 대한 고양이 사랑과 이야기는 아주 많죠. 아버지에 대한 에세이 ‘고양이를 잃어버리다’에서 최초 고양이와의 인연이 등장합니다.


하루키의 자취 지도인가요? 하루키가 자취를 남긴 카페, 서점, 술집 같은 곳들을 표시해 놓은 지도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이 일러스트도 하루키를 잘 표현했네요. 하루키 라면 마라톤 대회를 몇 번이나 나가고 트라이애슬론 대회도 출전했을 만큼 좋아하는 달리기, 두 개의 달, 바로 일큐팔사를 말하죠. 그리고 역시 고양이와 좋아하는 맥주.



이 일러스트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이번 신작의 원작 격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속 세계의 끝을 그렸네요. 하루키의 머릿속에는 이런 세계가 가득하겠지요. 그림자를 잃고 더불어 마음까지 잃지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를 하루키의 머릿속에서 잘 그렸지 싶습니다.



하루키 하면 또 혼자서 술렁술렁 만들어 먹는 요리가 있지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요리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직접 만들었던 간단한 요리가 주로 등장합니다. 신선한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가 눈에 딱 들어오네요,


이 일러스트는 하루키의 이런 모습의 사진이 있는데 그걸 그린 것 같습니다. 그 사진 속 하루키도 다른 사진에 비해서 뭔가 멍 하는 듯한 표정인데.


이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은 정말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정말 샤방샤방 한 얼굴에, 하루키를 보는 우리를 또렷하게 보고 있네요. 정말 하루키를 좋아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역시 하루키 하면 고양이죠. 하루키의 반은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데 그걸 표현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하루키 소설 속 세계를 일러스트로 표현한 그림들을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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