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고난에 고개 숙이지 마라 - 백만장자 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
마크 피셔 지음, 배영란 옮김 / 진성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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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새가 곧 체체로 山에서 첫 비상을 시작할 것이다.

온 세상을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우고,

온갖 신문 지면을 그에 관한 명성으로 가득 채우며,

이 위대한 새는 자신이 본디 태어났던 둥지에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새들의 비행에 관하여>중에서

 

이 책의 주인공 샤를은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후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이 별로 없음을 알고서 심히 불쾌해한다. 백만장자 아버지는 그의 형과 누나에게만 그 많던 재산을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신비로운 힘을 가진 거지 한 명을 만나는데, 이 사람의 도움으로 죽은 아버지와 사흘간 재회하는 야릇한 경험을 갖게 된다. 이 재회는 샤를에게 엄청난 선물이 된다. 이들 부자의 희한한 여행길을 따라 가보자.

 

부자 아버지의 가르침

 

비록 과거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거래는 무엇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신의 이미지와 가치를

새로 만들어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어느 날 아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영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삶의 실의에 빠질 때가 있다. 실의에 빠진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포근하게 감싸주는 멘토링일 것이다.

 

<게으른 백만장자>란 책으로 우리들에게 백만장자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마크 피셔가 이번에는 백만장자 아버지의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매우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인생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용기와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있다.

 

훤칠한 키에 군살 없는 몸매를 가진 샤를 레니에는 푸른 눈에 금발이며, 헤어스타일도 깔끔했다. 그는 36살의 독신으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러나, 지금껏 3년간 34살의 매력적인 치과 여의사 클라라 램플링과 동거중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독신은 아니었다. 최근 클라라가 결혼을 거부하자 샤를은 멘붕 상태였다.

 

누나 지젤의 전화다. 그녀는 한참을 울더니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나이는 고작 63살이었다. 무척이나 정정해서 겉보기엔 충분히 오래 사실 분이었다. 장례식 전에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충격이었다.

 

"내 아들 샤를에게는 내가 맨 처음 백만 달러를 벌었을 때 입고 있던 과,

그때 차고 있던 시계와, 그때 신고 있던 구두 한 켤레를 남긴다"

 

공증인의 말로는 최근에 처음의 유언장을 수정했으며, 당초엔 샤를의 몫이 아버지 재산의 1/3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리 된 연유는 최근 아버지와 서로 욕을 하며 격렬하게 다투었던 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의 심한 말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고, 지금은 이를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례식장 빈소 입구에 거지 한명이 서서 조문객들에게 적선을 구걸하고 있었다. 거지의 손치곤 깨끗하고 예쁜 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샤를은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며 거지 곁을 지나갔다. 빈소 입구로 향하던 그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거지에게 주었다.

 

"옜소. 이제 난 정말로 빈털터리요"

 

빈소에는 정말 많이 사람들이 찾아왔다. 갑작스런 고인의 죽음을 전정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인사를 받아도 또 받아도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조문객들은 평소에 샤를의 아버지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어떻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를 얘기했다. 그는 이런 아버지가 왜 자신에게만 그랬는지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관리인은 밤 10시면 빈소를 닫는다고 말했다. 약간의 시간을 더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뒤에서 또 인기척이 나서 화가 나 뒤돌아보니 빈소 입구의 그 거지가 서있었다. 거지는 고맙다는 의미로 뭔가 해드릴 만한 것이 없는지 그에게 물어왔다.

 

"제가 원하는 건 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는 거예요"

"제가 선생님의 청을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거지는 주머니 안에서 사과 한 알 크기의 작고 검은 유리 구슬 하나를 꺼냈다. 거지는 몇 초간 구슬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구슬에서 무슨 조화가 생기더니 연기가 생겼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하나의 형체가 나타났다.

 

"아버지!"

 

세상에! 기적이 일어났다. 샤를의 지금 나이와 같은 36살의 아버지가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머리숱도 많고, 사자의 웃음을 띈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사업할 때 늘 끼고 다녔던 두꺼운 뿔테 안경도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다.

 

샤를은 기쁨과 불신의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에게는 유산이 없는 이유를 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 자식 중 그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이며, 한 달 전 심장발작으로 잠시 이승을 떠나 저승에서 만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 뒤 결정한 사항이라는 답변이었다.

 

짧은 만남을 통해 그는 아버지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선지자적 글귀와 함께 오래 전에 이 세상의 토양을 다져놓은 위인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해보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어떤 일에 착수하면 악착같이 한 우물을 파고, 일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저 즐기면서 놀이하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성공이란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나무에는 수천 개의 이파리들이 있고, 네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성공의 나무에서 새롭게 이파리가 하나 돋아나는 것과 비슷하단다.

 

 

 

또한, 매일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자신을 개선하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노인과 바다>의 첫 페이지를 50번도 넘게 퇴고한 것처럼 힘들어도 끈기를 잃지말고, 칠전팔기 정신으로 지속하며, 자기 분야에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장애나 단점을 훌륭한 친구로 삼아 이를 뛰어넘으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 그는 아버지로부터 예기치도 못한 오천만불 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네받았다. 아버지는 이를 소아환자를 도와주는 몬트리올 생트 쥐스틴 병원에 기부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자, 그는 심리적으로 심한 갈등을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공하려면 일단 굶주려야 한다면서 스스로 돈을 버는 진정한 기쁨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다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아버지는 시골집을 방문해 과거로의 회상에 잠기면서 집안 구석구석에서 아내의 흔적을 느꼈다. 매일 저녁 연주하던 그랜드 피아노에선 마치 베토벤의 곡들이 들리는 듯했다. 한편, 샤를은 정원을 거닐 때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자 아버지가 왜 자신을 이리로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샤를은 용기있는 행동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준 수표를 들고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접수대에서 갈등을 느끼고 그냥 뒤돌아 나왔다. 귀가하여 아버지를 찾았으나 한 시간 전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며 떠났다는 운전기사의 말이었다. 그는 상심하여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없을 때면 어린 시절 자주 들어와 놀았던 서재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아버지와 다시 이별하고, 서재에서 발견한 비밀을 파헤치고, 수표를 기부하고, 클라라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환생한 아이를 낳고, 소설가로서 성공하여 부富를 이루기 시작하는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즐기며 일을 해서 돈을 벌어라

한없이 파고들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라

 

 

저자 마크 피셔는 이 책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기술이나 비법 같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유대인처럼 '돈을 버는 지혜'를 알려줄 뿐이다. 거금의 유산으로 이룩한 부富보다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백만금을 일구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아이의 마음으로 어른의 세계를 살아가라.

그러면 백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가치와 함께 할 것이며,

백만금의 돈이 저절로 수중에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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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100년 - 오연호가 묻고 법륜 스님이 답하다
법륜.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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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출마하려는 안철수 교수의 정치적 멘토가 기존 정치인이 아닌 스님이어서 제일 먼저 놀랐다. 법륜 스님이 불교 TV의 방송 프로그램 <즉문즉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재차 놀랐다. 그가 이번에는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어서 또 다시 놀랐다.

 

법륜 스님은 출가 전 고교 1년생 때 스승으로부터 '앞으로 100년 앞을 내다보고 살아라'란 말씀을 듣고, 이 말을 실천하려고 불가에 귀의하고 어쩌면 이를 평생의 화두로 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새로운 100년'을 깊이 고민하면서 실천을 해온 인물이다. 정토회평화재단을 만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20여 년간 해오고 있다.

 

전후 한국의 경제가 성장 제일주의를 표방했지만, 이젠 고속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한국이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행복지수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한다는 사실도 이미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이 땅은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시인하는 꼴이다. 

 

법륜 스님은 우리 모두 함께 '새로운 100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가장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일은 바로 분단이라는 바윗덩이라며 이를 들어내고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시대와 역사를 제대로 읽자면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남한만 보지 말고 한반도 전체를, 한반도에 머무르지 말고 미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를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세계정세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굴다가 치욕을 당한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일제의 침탈, 한국동란, 남북분단 등이다. 그래서, '새로운 100년을 만들자'는 제안은 세계 속의 우리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자는 뜻이기도 하다.

 

통일한국이 탄생한다면 동북아 지역공동체를 주도할 수 있을까?

주한미군 문제와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세력교체기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중국도 미국도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통일의 방법은 무엇인가?

통일의 적기는 언제일까?

 

오연호 <오마이뉴스>대표는 법륜 스님과 약 3개월간 새로운 100년을 만들기 위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초동 평화재단에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대담은 진행되었었는데, 그 대담을 쉽게 풀어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제 두 사람의 대담을 따라가보자.

 

 

 

 

오연호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분 중 하나가 법륜 스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화재단과 정토회 일도 하셔야 하고, 연속 100회 강연도 하셔야 하고, 게다가 안철수 교수의 멘토까지 하시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습니다. (웃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시면서 바쁜 가운데 저와 대담을 나누게 되었네요.

 

법륜     네, 먼저 오연호 대표님과 대담을 하게 되어 기븝니다. 지나온 10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설계하는 심정으로 통일이야기를 나눠보죠.

 

 

법륜 스님은 경상북도 울산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인 1969년 12월 절에 들어갔다. 경주 분황사 주지셨던 불심도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과 활동을 시작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던 그가 고교 1학년 때 경주불교 중고등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분황사에서 법회를 가지면서 불심도문 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불심도문 스님은 당시 법륜이 최씨 임을 알고, 동학의 최제우 선생 이야기를 하며 최제우 선생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동학을 만들었으니 1000년을 내다보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이차돈의 순교정신, 원효대사의 통불교사상,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 거부 등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아무튼 그의 출가는 반은 꾀임 때문이고 반은 자발적인 의지 때문이었다.

 

"잠을 못 자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죠.

제일 시급한 일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주는 것을 어떻게든 막는 거예요.

두 번째는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인데,

결국 근본적으로는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순과 갈등도 대부분 분단 때문에 생긴 문제예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의 3대째 제자인 그는 최씨 문중이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다는 설명이다. 용성 스님도 그렇지만 그의 스승인 불심도문 스님의 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다. 양가는 독립운동으로 막역한 사이였던 셈이다. 불심도문 스님의 증조할아버지가 용성 스님의 절대적 후원자였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독립은 통일이 돼야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1998년부터 준비하여 2004년에 공식적으로 평화재단을 출범시켰다. 이 단체가 하려는 일이 바로 '통일의병' 모으기이다. 의병이란 옳은 마음으로 그 일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정토회와 평화재단의 신입회원을 모을 때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내가 뭔가 한자리 하겠다고 왔다면 집에 가라.

둘째, 대중이 하라는데 안 하겠다면 집에 가라.

 

평화재단을 세우기 전 그는 1998년부터 정토회만 이끌었다.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이 바로 정토회가 추구하는 3대 가치이다. 마치 불교계의 의병처럼, 정토회는 일과 수행이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 사회의 변화와 개인 수행이 상호 연결되어 하나로 통일돼야 한다는 거다. 정토회는 사찰이 아니라 재단법인이다. 다만 정토회 내 정토법당은 조계종 포교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크게 100년을 내다보고 지구를 생각하면 제일 큰 이슈가 환경문제였다. 그는 잠시 감옥에 갇혔는데, 이 때 제러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었다. 현대는 소비주의 문명이라 대량생산으로 인해 자원이 고갈되면서 서로 자원 쟁탈전을 벌이게 되므로 세계가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또한, 대량소비는 쓰레기와 폐기물을 양산하므로 환경오염으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된다. 그는 개발정책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운동 대신 나부터 변하자는 의식혁명을 주도했다. 나부터 실천을 중시했다. 불교환경교육원을 통해 환경교육과 이의 실천을 추진했다.

 

또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돕는 일도 시작해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위해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것이 오늘날의 JTS 구호활동의 시초이다. 셋째로 통일운동을 시작했고, 마지막 과제로 행복을 찾는 일이었다. 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의 자살률이 높은가에 의문을 가진 결과 자기 행복을 위해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 필요했다. 정토회가 출발한 이유다. 이 과제 중 제일 어려운 것이 통일이었다.

 

통일이 좀 쉬워지려면 남북의 체제나 종교에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통점이 없다. 그래서, 그가 고민한 결과는 통일의 원동력인 '역사의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분단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독립운동가가 아사 직전인 북한 아이를 보았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거다. 그가 15년 넘게 북한 동포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인권을 개선하는 일을 수행해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그가 느낀 한계점이 있다. 북한의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근원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에 평화재단을 설립, 평화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항구적인 평화는 결국 통일에서 오는 것임을 확신했다.

 

미래와 관련하여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본 목표는 두 가지다. 우리의 미래가 안전해야 하고, 지금보다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이 안되면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 미래의 안전을 살펴본다면, 가장 큰 변화가 중국의 급부상이다. 이제는 미국과 중국의 양강체제로 경쟁하는 분위기이다.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원에서 명으로, 명에서 청으로, 청에서 일본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조선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변화에 대비하지 못하면 굴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지전 성격이었지만 향후 중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전쟁이 발발하면 한반도의 희생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항상 주시해야 한다.

 

통일이 밥 먹여주는냐는 말이 있다. 앞으로 밥을 제대로 먹으려면 통일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남한은 1만 달러까지 고속성장을 해왔다. 이후 겨우 2만 달러를 달성했지만,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웃인 일본도 지금 장기정체 국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통일이 안되면 잘 먹고사는 문제에서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

 

통일을 하면 영토와 인구가 늘어나므로 국가위상이 최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도는 된다. 이리되면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에 들어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가 북한 개발이라는 특별한 수요는 남북통합 경제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 경제성장의 정체 국면을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가 꿈꿔볼 만하지 않은가? 법륜 스님의 가슴 뛰게 하는 통일 이야기는 이어진다.

 

 

서초동 평화재단에서 진행된 대담의 마지막 주제는 "누가 언제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낼 것인가"였다.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운 100년을 제대로 설계하여 실천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서길 희망한다. 아울러 이 책이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에게 읽혀지길 바란다. 해답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스님, 왜 통일을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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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 - 뮤지컬 신화 박명성, 열정과 도전의 공연기획 노트
박명성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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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판에 뛰어든 지 벌써 30년의 인생, 뮤지컬 <맘마미아>의 흥행 돌풍을 몰고온 박명성은 소위 '쟁이'다. 그에게는 '최고의 뮤지컬 프로듀서', '뚝심의 연극제작자' 등 수식어를 달고 다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공연예술쟁이'다.

 

1982년 그는 배우로 연극계에 입문했지만 배우로서 재주가 없었다. 이후 극단 신시의 멤버가 되어 연출가로 나섰지만 이 또한 '젬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골로 잠시 낙향했다가 다시 오기를 갖고 상경하여 기획자가 되어 줄곧 극단의 궂은 일을 도맡았다.

 

 1999년 그는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대표를 맡아 진정한 프로듀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더 라이프>,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등 초대형 뮤지컬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의 작품은 많은 관객을 몰고 오면서 공연계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듀서는 단순히 공연만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다. 재원 조성, 사람 관리, 극장운영, 캐스팅, 홍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지는 '한 작품의 총 사령관' 또는 '총체적 디자이너'인 셈이다. 한 작품을 올리기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이 뒤따른다. 

 

 

 

 

 

그는 프로듀서가 가장 유념해야 할 사항이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기획이고, 기획이 사람인 것이다. 모든 작품이나 콘텐츠는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끝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프로듀서는 바로 '사람을 경영하는 자'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공연에 얽힌 비화와 숨은 이면을 살짝 들춰보기로 하자.

 

 

엄마를 부탁해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첫 문장을 읽으면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메세지는 마치 중세 종교시대에 '지구가 돈다'는 말에 버금갈 정도이다. 관객들은 공연 내내 울고 공연이 종료된 후에도 울먹거렸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본디 극단 스태프들이었다. 이들이 둘러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연극으로 각색해보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백이 많고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없다는 문제점 때문에 무대로 옮기기엔 매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해보고는 싶은데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우선 출판사에 연락하여 라이선스 취득이 가능한지 점검부터 했다. 이 소설은 이미 장기간 베스트셀러였기에 이미 열 군데가 넘는 회사에서 영화, 방송, 뮤지컬, 연극 등을 제작코자 저작권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를테면 그의 회사는 막차를 탄 셈이었다. 운좋게 신경숙 작가가 출판사에 그를 포함시켜 심사하라는 요청 덕분에 저작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이젠 극본을 쓸 작가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극단 미추에 협조를 구하여 고연옥 작가를 섭외했다. 신경숙 원작자는 이제 소설을 떠나 연극으로 가는 거니까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하며 특별한 간섭이나 조건이 없었다. 단지 둘째 딸이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엄마가 준 감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넣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것 뿐이었다. '반드시'가 아니라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대작가다웠다.

 

이후 방송 일을 오래하신 고석만 선생이 연출을 맡고, 출연 배우도 그 선생과의 인연으로 결정되었다. 백성희 선생, 박웅 선생, 심양홍 선생 등이 출연을 결정해 주셨다. 결국 출연하지 않은 배우 정보석이 캐스팅에서 가장 애를 먹였다. 제일 먼저 엄마 역에 캐스팅된 정혜선 선생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달을 혼자서 연기해서 감동적이었다.

 

공연은 유례 없는 대성공이었다. 두 달에 600석이 넘는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의 좌석이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약 11억원의 티켓 세일을 했는데, 연극에선 전례가 거의 없었다. 매진 사례를 이어가는 중에 관객들과 공연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공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장면이 많고 정리가 덜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작품이든 완벽할 수는 없다.

 

서울에서의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지방의 기획사, 극장관계자 등 10여 곳에서 공연요청이 쇄도했다. 지방공연의 성공이 충분히 가능성 있었지만 배우들의 스케줄이 문제였다. 오히려 재공연을 준비했다. 역시 엄마 역할의 캐스팅이 관건이었다. 손숙 선생에게 부탁하자 쾌히 응했다. 큰 딸 역은 김여진과 허수경이 맡았다. 당초 김여진에게 부탁했지만 답이 없어 난감해하자 손숙 선생이 허수경을 섭외했다. 이후 김여진이 자기가 반드시 큰딸 역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더블 캐스팅이 되었다. 

 

재공연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용극장에서 2010년 10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계획을 잡았다. 용극장은 800석 규모의 대극장이었다. 11월엔 객석의 반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홍보를 강화했다. 꾸준히 관객이 늘더니 12월엔 빈자리가 없었다. 초연보다 더 많은 공연수익을 거두었다.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음악이다. 뮤지컬에 열정적인 김형석과 박칼린을 만나, 뮤지컬로 무대로 올려보자고 상의했다. 김형석은 작곡을 맡고, 안무는 김성일, 엄마는 김성녀 선생이 배역으로 결정되었다. 뮤지컬은 성공적이었다. '미안하다'고 노래할 때는 객석이 눈물바다였다. 그는 외국 스태프들과 함께 뮤지컬을 만들어 '새로운 엄마'를 탄생해보고자 한다.

 

 

맘마미아!

뮤지컬 역사를 다시 쓰다

 

2004년 초연된 <맘마미아!>는 지방인 대구로 공연차 내려갔다. 지방공연 사상 최장기공연에, 객석 점유율 90퍼센트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구의 장기공연에서 성공한 것은 공연계의 화제였다. <맘마미아!>는 무대장치에만 2주가 걸리고 철거시에도 며칠이 걸린다. 소도시는 관객인프라가 적어서 주말 4회 정도 공연이 고작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공연계에도 불똥이 튀었다. 효율성을 제고해야 할 즈음에 런던의 오리지날 공연팀이 투어장치를 개발하여 유럽 맘마미아 공연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장 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투어장치를 구입했다. 서울에선 오리지날 장치를 사용하고 지방공연 때엔 투어장치를 쓸 생각이었다. 준비를 끝내고 전국에 홍보했다.

 

"<맘마미아!>가 1년 동안 지방투어를 한다!"

 

이에 지방의 방송사, 언론사, 그리고 공연기획사에서 서로 자기네 쪽에 와달라고 요청했다. 2010년 5월 대징정의 막이 올랐다. 경기도 이천 도자기 축제 기간을 겨냥했다. 900석 극장에서의 일주일 공연 내내 미어터졌다. 이후 창원, 대구, 광주, 부산, 울산, 의정부, 인천, 수원, 일산, 과천, 안양, 목포, 안동, 청주, 대전, 구미, 제주 등 전국 23개 도시를 돌았다. 모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국민 뮤지컬로 자리매김 했다.

 

2011년 4월 제주를 끝으로 1년간의 지방투어가 끝나고, <맘마미아!> 팀은 신도림 다큐브아트센터에서 6개월간 208회의 공연으로 2011년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신도림은 지역적으로 문화의 불모지, 문화의 소외지역으로 평가받는 곳이라 더욱 의의가 크다. 신도림을 '신 드림'으로 만들자는 포부가 고희경 극장장과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 극장은 과거 연탄공장의 자리였다. 2011년 12월 10일, 1,000회 공연을 돌파했다.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프로듀서로서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면서 제작시스템의 확립과 공연의 예술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한 그의 도전 정신은 한마디로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이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2001)', '올해의 프로듀서상(2007)',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2010)' 등 많은 수상을 기록했다. 앞으로도 창조예술산업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그의 향후 행보가 매우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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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숨은 골목 - 어쩌면 만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이동미 글 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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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골목길 접어들때에 내 가슴은 두근거렸지. 대학 시절 내 여자 친구의 집은 골목길에 있었다. 높은 가로등이 내려 비치는 그녀의 2층 집은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겠다고 먼 길을 찾아온 나는 발걸음을 돌리기가 일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그녀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골목길 접어들때에
내가슴은 뛰고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열고 볼것만 같아
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만나면 아무말 못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 가면서 후회를 하네

 

김현식의 <골목길> 중에서

 

어릴 적 내가 살던 골목은 많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골목길 양편으로 좁은 시궁창이 흘렀는데 늘 악취가 풍기는 동네였다. 동네 골목은 어린아이들 차지였다. 딱지 치기, 비석 치기, 잣 치기, 술레잡기, 말뚝박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등이 주된 놀이였다. 주먹과 발이 날라 다니는 싸움도 잦은 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골목은 삶의 터전이요, 동심이 자라나는 고향이다.

 

한때 나라의 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경제력과 군사력이었다면 이제는 문화가 그 판단 기준이 된다고 한다. 문화란 그 민족만의 독특함이며 살아온 방식이며 힘의 근간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로마의 거리가 인상적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파스텔톤의 예쁜 집들이 늘어선 프라하의 황금소로가 멋지다고 한다.

 

K-POP이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생성된 한류열풍 때문에 한글을 배우고 온돌을 궁금해 하며 한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한다는 외국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우리가 외국 관광 때 그런 것처럼, 그들도 한국을 방문하면 분명 서울의 골목길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울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골목을 직접 발로 뛰며 사진을 찍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별로 추천할 만한 명소 골목을 에세이 형식으로 예쁘게 꾸민 책이다. 온통 샛노란 꽃의 향연을 펼치는 봄의 금호동 골목에서부터 비오면 파전에 동동주가 생각나는 피맛골과 6백년 전 서울로의 여행인 가회동 골목을 거쳐 서울 속의 강원도인 부암동 골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른 곳의 골목을 소개하고 있다. 

 

 

봄을 부르는

미친 개나리의 향연

금호동

 

봄이 되면 응봉산에 개나리가 핀다. 20만 그루의 개나리가 예고도 없이 어느 날 확 핀다. 그래서 '미친 개나리'라 불린다. 노란 물감으로 온통 응봉산을 물들이면 드디어 서울은 봄울 맞는다. 응봉산 서족에 위치한 금호동 골목은 오르막이다. 헉헉 거리며 걷는 이방인에게 담벼락에 그린 '똥'그림은 웃음을 선사한다. 하늘을 수놓은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까지, 골목의 풍경은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 같다.

 

오트바이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 아저씨들은 꼬불꼬불 골목길을 잘도 찾아 간다. 그런데, 중간 중간 눈에 띄는 높은 계단길은 어떻게 올라갈까? 높은 계단길은 지치게 한다. 이럴 땐 한 박자 쉼이 최고의 보약이다.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금호동 골목길을 오르면 등에 땀이 맺힌다. 내려갈까 하고 잠시 멈춰 뒤돌아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강과 용비교 그리고 금호동 주택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유럽의 지중해가 부럽지 않다.

 

찾아가기 지하철 3호선 금호역 2번 출구로 나가면 금남시장 방향이다. 금남시장 삼거리에 닿기 전 왼쪽으로 쉬엄길 골목이 있다. 금남시장을 지나 대로가 이어지고 응봉파출소 지나면 암벽공원길과 응봉산 개나리길이 나온다. 응봉산과 개나리만 보고 싶다면 중앙선 응봉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딱딱이를 치던 종묘 옆 작은 길

종로 순라길

 

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통에 무성한 숲이 있다. 바로 종묘다. 종묘 담벼락을 따라 작은 골목길이 나 있다.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딱딱이를 치며 순라를 돌던 길이다. 종로통 네거리의 종루에서 종이 울린다. 28번의 종이 울리면 인정人定(밤 10시경)으로 사대문이 닫힌다는 뜻이다. 통행이 금지된다. 파루罷漏(새벽 4시경)가 되어 33번의 종이 울릴 때까지.

 

궁궐을 호위하던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한밤중에 도적을 막고 화재가 날까 염려해 순라를 돌았다. 조선시대 궁중과 도성 안팎을 돌며 도둑과 화재를 경계했던 순라군이 지나다녔던 곳이라 '순라길'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지명이 남아 있는 지역은 이 골목이 유일하다.

 

순라길은 종묘 정문을 기준으로 좌측이 서순라길, 우측이 동순라길, 뒷 편이 안국 로터리에서 원남 로터리로 가는 율곡로다. 가운데 쯤에 종묘와 창경궁을 오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이어져 있다. 순라길을 걸으면 보석 세공을 하는 오래된 가정집들을 만난다. 서순라길 옆의 대각사, 이 절은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용성스님이 세운 사찰이다.

 

 

비 오면 생각나는 곳

피맛골

 

비가 내리면 특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막걸리와 빈대떡 또는 파전이다. 이 환상의 콤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피맛골'이다. 마음이 딱 맞는 친한 친구 또는 애인과 함께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는 해질녘의 기쁨이자, 삶의 여유요 낙樂이다.

 

"쉬이~ 물렀거라! 영의정 대감 행차시다!" 

 

종로 거리는 항상 지체 높은 사람들의 교자나 가마가 지나가던 곳이라 길 가던 아낙네부터 무거운 짐을 잚어진 남정네까지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러나 보니 종로통이 아무리 넓다해도 높으신 양반이 몇 번만 지나가도 길을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피맛골'이다. 좁은 골목으로 말을 피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조선시대의 민초들이 돌아다닌 골목이었던 셈이다.      

 

 

6백년 전 서울로의 여행

가회동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5개의 궁궐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 차례로 지어졌다. 이 중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동네가 바로 가회동을 포함한 북촌 한옥마을이다. 궁궐에 드나드는 왕족과 왕실의 일가친척, 고관대작들이 사는 곳이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가 계동길을 따라간다. 우측으로 게스트 하우스, 중앙탕을 지나 중앙고등학교와 한류 기념품점이 있다. 가회새싹길에는 한상수 자수박물관, 가회박물관, 동림매듭공방 등이 이어진다. 큰 길을 건너도 모두 북촌 한옥마을이다.

 

 

배용준을 '욘사마'로 만든 드라마 <겨울연가>의 학창시절은 중앙고등학교에서 촬영되었다. 이 학교는 1908년에 설립된 고딕양식의 건물로 마치 유럽식 사립 고등학교처럼 고풍스럽다. 학교 앞 문구점이 학교를 찾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로 바뀐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 속 강원도

부암동

 

행정구역은 서울인데 강원도 시골길 같은 곳이 있다. 백사실 계곡을 끼고 있는 부암동. 개구리, 맹꽁이, 도마뱀이 사는 이곳은 한가로움과 여유가 풍긴다. 눈이 가득한 텃밭 옆으로 우체부 아저씨가 지나간다. 연하장 배달인가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가 버스를 타고 창의문에서 내린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왼쪽 길로 가면 무계정사, 현진건 집터가 있고 오른족 길로 오르면 백사실 계곡과 삼각산 현통사 방향이다. 현통사로 내려가면 세검정이 나온다.

 

서울이지만 공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원래의 성곽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자하문 아래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라본다. 시구가 입가에 맴돈다. 학창시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읊조려 보지 않은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언덕길 한 걸음이 시 한 구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부암동은 오래된 집에 인테리어를 가미해 카페를 만든 곳들이 잇다. 낡은 벽을 통유리로 바꾸고 선반에는 장난감을 얹어 소품화했다. 오랜 시간에 세련됨을 입혀 고급스러움을 창출했다. 부암동 골목에선 콧대 높지 않은 예술을 만날 수 있기에, 이곳 사람들은 은근히 자기 동네를 자랑한다. 교통이 불편하다고 퉁퉁거리면서도 부암동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저자는 책을 제작하는 동안에 사라진 골목이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지는 골목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나. 대단위의 동네 하나를 모두 밀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내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요즈음이다. 멸종이란 단어가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골목도 이미 없어졌다.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코자 찾았더니 낯선 공간에 내가 서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의 골목은 멸종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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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보내는 상자 - 믿고, 사랑하고, 내려놓을 줄 알았던 엄마의 이야기
메리 로우 퀸란 지음, 정향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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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음력 단오, 아버지가 별세하셨다. 그 해 설날 허리가 몹씨 아파 불편하다는 말씀에 종합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척추뼈 한 곳이 함몰되었다는 진단이었다. 병원에선 간단한 수술이라 일주일 정도의 입원을 예상했다. 하지만 수술후 허리가 계속 아파 퇴원이 늦어졌다.

 

담당의사의 긴급면담 요청을 받고 불길한 마음에 서울에서 대구로 급히 내려갔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암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평소에 통증이 심해 힘들어한 적이 없냐고 물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경우 다발성 암으로 온 몸에 이미 전이된 상태라 손 쓸 방법이 전혀 없다는 의학적 판단을 내렸다. 결국 입원한지 약 3개월만에 돌아가셨다. 의사가 예상한 것보단 더 오래 살았다.

 

이 에세이의 저자는 최근 엄마를 여의었다. 이후 엄마가 남긴 '갓 박스'를 발견했고, 이 상자에 담긴 작은 메모들에 대한 그녀의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갓 박스'란 하느님께 보낸 쪽지들을 보관한 비밀 상자였다. 즉 그녀의 엄마는 메모지, 영수증, 포스트잇 등에 하느님께 기도문을 손수 적어 이를 보관해왔던 것이다.

 

 

 

"사랑한다. 넌 항상 내 갓 박스 안에 있을 거야" 

 

 

2006년 5월 29일 그녀의 엄마는 뇌졸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엄마의 이름은 메리다. 그녀는 엄마와 이름이 같다. 둘 다 섹시한 구두와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또한 둘 다 광고 분야에서 일했고, 허풍쟁이를 싫어했다. 여러 모로 많이 닮았지만 빨간 곱슬머리는 남동생 잭이 물려받았다. 오랫동안 둘은 비밀 번호를 공유했다. '손을 대고'였다. 이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엄마는 치료가 불가능한 희귀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골수섬유증', 이 병은 적혈구와 백혈구의 생성이 원활하지 못해 몸이 허약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각종 수혈과 약물 치료를 견뎌내며 의사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래 생존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이를 기도로 승화시켰다. 가족들의 문제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고민도 상담했다.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녀의 엄마는 기도문을 종이에 적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이를 상자 안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자의 위치는 절대 비밀이었다.

 

장례식 전날 밤, 그녀는 그녀의 엄마 방에서 일곱 개의 상자를 발견했다. 이 속에 무려 20년 전부터 작성된 쪽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 번째 쪽지는 1986년 8월 7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의 모든 쪽지들이 볼펜으로 휘갈겨 쓴 것이지만, 첫 번째 것은 타자기로 깔끔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하느님.

부디 제 건강과 저의 눈, 우리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을

보호해 주십시오.

 

잭이 회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보살펴 주세요.

메리 로우와 조를 직장에서 보호해 주시고, 특히 그들이

뉴 호프에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우리 가족에게 내려주신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을 담아서, 메리가 .....

 

"엄마가 남긴 것은 우리 가족의 일대기이자,

우리 가족에게 보내는 소중한 연애편지와도 같았다" 

 

"엄마는 마치 펜팔 친구에게 쓴 것처럼 하느님께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엄마의 솔직하고 다정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갓 박스를 찾는 것은 마치 엄마의 마음을 읽으려는 것과도 같았다. 상자를 통해 엄마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알아가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쪽지들을 읽어보면 하느님에 대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생히 느껴졌다. 오랜 세월 동안 엄마의 딸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저자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의 쪽지를 읽을 때마다, 그녀는 엄마가 처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던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느님, 부디 엄마와 아빠, 잭과 저를 보살펴주시고...."로 시작하던 기도문은 마지막에 쾌활하게 "아멘!"을 외치고 침대로 기어 올라가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는 남동생 잭이 샌디와 결혼한 후, 잭이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쪽지를 많이 남겼다. 샌디는 '일반인'이었다. 이 말은 카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그녀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은어인 셈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며느리 샌디를 몹시 아꼈지만 한 번도 카톨릭을 전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녀들에겐 약식으로 세례를 베푼 듯하다.

 

그녀의 엄마는 하느님에게 정말 헌신적이었고,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소원들까지도 모두 적어 상자에 넣어 두었다. 엄마는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고민을 상담하려고 전화를 걸어오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갓 박스에 넣어 줄게" 

 

2010년 3월 초, 새벽이 동 트기 전 그녀의 아빠가 쓰러졌다. 신장암으로 시작된 종양이 아빠의 뇌까지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빠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절망감을 느끼며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저녁식사 후 베란다에서 아빠는 솔직한 답을 원했다.

 

"얼마나 남았대?"

"6주요" 

 

아빠는 나날이 야위어갔지만 유머감각만은 잃지 않았다. 힘들었던 만큼 아빠와 함께 한 신성한 시간은 남동생 잭과 그녀에겐 너무나 소중했다. 그녀는 엄마가 했던 것처럼 쪽지에 기도문을 적어 엄마의 예전 갓 박스에 이를 집어 넣었다. 모르핀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지던 4월의 어느 오후 그녀의 아빠는 평온한 영면을 취했다.

 

"이런 부탁을 드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부디 아빠를 천국의 당신 품으로 데려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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