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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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이 절간처럼 조용했다. 방방마다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바깥마당에 나가봤다. 차가 없었다. 한 대도 없었다. 눈 앞이 핑 돌았다. 어지럼증이 나서 방으로 들어오는데 눈앞에 까만 별이 날아다녔다. 갑자기 햇빛을 봐서가 아니었다. 맹세코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전화기 옆에 메모지 한 장, 그것도 달력을 찢어 만든 성의 없는 메모지가 있었다. '무순아, 잠시만 할머니 잘 부탁한다' - '여름, 슬프거나 말거나 턱이 빠지도록 호박쌈 한입' 중에서

 

 

보물지도에 담긴 비밀은?

 

첩첩산중 두왕리, 일명 아홉모랑이 마을에 사는 여든세 살의 강두용 옹은 막장 드라마를 보던 중 뒷목을 잡고 쓰러져 죽고 만다. 구급차가 아무리 총알처럼 출발해도 산사람의 숨이 넘어갈 때쯤 돼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첩첩산중의 마을이다. 이곳은 충청남도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 88올림픽 때도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 한반도의 오지다.

 
강씨네는 장례를 치르게 되고, 효심 가득한 아들딸들은 시골집에 홀로 남을 팔십 노모가 걱정이다. 남편을 산에 묻고 돌아온 날 호박쌈을 한입 가득 욱여넣는 씩씩한 홍간난 여사지만 말이다. 아들딸들이 고민한 끝에 결정된 사항은, 손녀이자 대입 삼수생으로 최강 백수 강무순을 시골집에 낙오시키는 것이다. 말이 낙오이지 유배인 셈이다. 다음 날 날이 밝고 스무 명 넘게 북적대던 시골집의 아침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고, 그 고요함에 화들짝 놀란 강무순이 마당으로 뛰쳐나오지만 그녀를 반기는 건 마당 앞 부추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홍간난 여사의 등짝이었다.

 

"이제 일어났구먼"

 

이 소설의 작가 박연선2003년,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데뷔. 드라마 <연애시대>로 시청자들의 가슴에 수많은 명대사를 새겼으며, <얼렁뚱땅 흥신소>로 수많은 '폐인'을 만들었다. 이후 <화이트 크리스마스>, <난폭한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진정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과시하던 어느 날 스토커 같은 편집자에게 잘못 걸려 소설 작가의 삶도 살게 되었다. 그녀는 이 장편소설로 마침내 소설가로 데뷔했다.

 

 

 

 

 

 

"해가 똥꾸녕을 쳐들겄다"

 

 

 

이렇게 억지로 시작된 유배 생활 하루 만에 무순은 너무너무 심심해서 마당에 묶여 있는 강아지 '공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저 집에 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년이 산다'는 말을 듣는 동네에서 대체 뭘 하며 지낼 수 있을까? 집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하는 수없이 집 안에서 놀거리를 찾다가, 할아버지의 책장에서 15년 전 자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지도를 발견한다.

 

경산 유씨 종택은 17세기 말에 지어졌다가 1910년에 재건축되었는데, 대표적인 양반 가옥으로 'ㅁ'자 구조였다. 무순은 지도에 그려진 대로 종택을 찾아가 보물상자를 파내었다. 따각! 호미 끝에 뭔가 걸렸다.  호미를 버리고 손으로 흙을 긁어냈다. 마침내 보물상자와 마주한 순간, 무순을 좀도둑으로 오해한 종갓집 외동아들 '꽃돌이'와 맞닥뜨린다. 보물상자를 본 꽃돌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의 누나이자, 15년 전 실종된 경산 유씨 종갓집의 귀한 외동딸 유선희의 물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고생을 했으면 보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 상자는 다임개술이었다. 글자가 지워진 오각형의 뱃지 하나, 젖니 하나, 목각 인형 하나엿다.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들며 하늘이 우중충하다. 선풍기를 켜놓고 그 앞에 벌렁 누웠다. 낮잠은 안 잔다고 했지만 졸음이 쏟아진다.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내리친다. 

 

"아무리 게을러터졌어도 그렇지, 비가 오는데 그냥 자빠져 있는 년이 어딨다니?"

 

 

 

 

 


젖은 마당을 보니 우산 안 가져다 줬다고 화났나? 싶었다. 홍간난 여사가 맨손으로 뭔가를 쓸어 담는다. 빗물에 쓸려 뭔가 떠내려가는데, 깨알만큼 작은 저것은 진짜 깨다. 분부대로 쓰레받기를 대령했다. 홍간난 여사는 쓰레받기에 들깨를 쓸어 담았다. 그냥 서 있기 뭐해서 깨를 한 알 한 알 줍고 있는데, 홍간난 여사가 쓰레받기를 패대기쳤다. 쓰레받기가 깨지면서 플라스틱 조각이 눈앞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식겁했다.


"염장을 질러라, 이년아. 그걸 하나하나 줍고 있게"

"비 쏟아질 땐 처자빠져 있다가 이제 와서 깨를 줍고 자빠졌네. 게을러 터진 년"
"들깨 한 말 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네까짓 게 알기나 아냐? 이 썩을 년아"
"저리 비켜, 이년아"
"빌어먹을 것들. 왜 저런 건 떼놓고 가서 내 속을 썩이는지, 원"
"누군 뭐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어?"
"있기 싫으면 가. 누가 말려?"
"알았어. 갈게. 가면 될 거 아냐!"

 

 

15년 전, 당시 최장수 노인의 백수 잔치에 온 마을 사람들이 버스까지 대절해 온천으로 관광을 떠난다. 어른들끼리 목욕도 하고 술도 마시는 자리에 어린 것들을 데려가기 '뭐해서' 온 동네 아이들을 마을에 남겨 놓고 떠났다. 흔히 말하는 '옆집 수저가 몇 쌍인지도 아는' 가족 같은 시골 마을이었기에 별 걱정 없었다.

 

그날 밤 온천욕 관광을 마치고 귀가한 마을 어른들. 마을이 텅 빈 사이, 네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다. 당시 사라진 사람은 유선희(16), 삼거리 '허리 병신'네 둘째 딸 황부영(16), 발랑 까지긴 했어도 평범한 집안 딸이었던 유미숙(18), 목사님 막내딸 조예은(7) 등 모두 네 명이었다. 나이도, 학교도, 출신 성분도 다른 소녀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할머니 홍간난 여사의 증언으로는 경찰은 물론 무당까지 나서서 찾아봤지만 이렇다할 단서조차 못 잡았단다.

"벌써 15년이나 지났구먼. 세월이 참……. 그것들이 살었을라나? 살었다고는 못헐 겨"
"살어 있으면 걔들이 지금 몇 살이라니……"

 

 

 

 

 

 

 

 

경찰, 과학수사대, 심지어 무당도 포기한 전대미문의 '네 소녀 실종 사건!', 이는 경찰의 추측대로 단순 가출일까? 아니면 납치범이 대체 누굴까? 4차원의 최강 백수 강무순, 팔십 노인 홍간난 여사, '꽃돌이' 유창희, 이 얼렁뚱땅 탐정 트리오가 벌이는 황당무계한 탐정 놀이가 펼쳐진다.

 
셋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물음표가 그려지는 조합이지만, 이 탐정 트리오의 활약이 꽤나 그럴싸하다. 강무순의 4차원적인 추리, 꽃돌이의 날카로운 시선, 유일하게 15년 전 사건을 알고 있는 홍간난 여사의 저돌적인 수사까지, 이들의 수사 방향은 우리들의 배꼽을 빠지게 한다. 소설의 결말은 반전과 함께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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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여름휴가
안녕달 글.그림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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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놀러온 손자가 바닷소리가 들리는 소라를 선물한다. 할머니는 소라를 통해 뜻밖의 여름휴가를 떠나게 된다. 이 책은 작가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휴가와 여행의 즐거움을 기분 좋게 그려 낸다. 비취빛 바다와 고운 모래톱 장면은 아이나 어른 모두 청량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아울러 독거 노인의 정서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소외된 이들에게 시원한 여름휴가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할머니, 소라 속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다

 

작가 안녕달은 <수박 수영장>으로 많은 어른과 아이들에게 이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창작 그림책으로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이 돋보이는데, 어느 여름날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손자가 놀러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할머니가 사는 공간은 윙윙거리는 고장 난 선풍기와 텔레비전, 가족사진, 1인용 소파, 소반, 아기자기한 화분 등으로 세심하게 그려졌다.

 

책은 설명하는 글이 별로 없지만 그림만으로도 분위기와 정서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손자가 할머니에게 바닷소리가 들리는 소라를 선물하고 떠난 뒤, 텔레비전을 보던 할머니는 갑자기 강아지 메리와 함께 소라 속으로 들어가서 여름휴가를 즐기게 된다. 할머니의 집을 작은 소품들로 오밀조밀하게 표현했다면 바다는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그려냈다. 할머니의 모습을 일상 속에서 말수가 적고 조용한 분위기로, 반면 바다에서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표현했다.

 

 

할머니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바닷가 풍경은 특히 작가가 정성을 들여 그린 아름다운 장면들로 채워졌다. 탁 트인 구도와 맑은 색감으로 표현된 비취빛 바다와 고운 모래톱 장면은 무더위를 잊게 하는 청량감을 전하며, 할머니에게 휴식과 위로를 선사한다. 바닷가 풍경은 아이들에게 바다를 향한 설렘과 두근거림을, 어른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법하다. 할머니가 갈매기와 수박을 나눠 먹고, 모래 위에서 바다표범과 뒹굴며 햇볕에 선텐을 하는 장면은 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작은 소품들의 배치도 흥미롭다. 소라게는 작품 곳곳에 등장하여 전체 이야기를 이끌며 현실과 환상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즉 소라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북인 셈이다. 작가가 공들여 만든 기념품 가게도 인상적이다. 빨간 머리 소녀가 있는 이 가게에서는 바다 냄새 방향제, 바다 여행 소라, 바닷바람 스위치 등을 팔고, 문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물고기들이 바다의 노래를 부른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산뜻한 아이디어와 재미 요소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우리들의 상상을 부추긴다. 

 

 

 

 

할머니는 여름휴가를 다녀와서 바닷바람 스위치를 고장 난 선풍기에 끼운다. 강풍 버튼이 고장 났던 선풍기는 다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윙윙윙윙윙 작동한다. 상상력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서적 만족감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긴다. 할머니의 고장 난 선풍기를 고치고 싶은 마음, 몸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휴가를 보내드리고 싶은 아이의 마음에서 출발한 이 근사한 상상력은 실은 우리 주변에서 홀로 지내는 모든 이들을 떠올려 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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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지 않다 -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들을 위한 심리처방전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강희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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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폭식증 등 각종 섭식장애의 기저에는 자존감 부족과 대인관계 장애라는 두 가지 특성이 깔려 있었다. 우선 섭식장애, 그중에서도 특히 폭식증을 앓는 여성들의 반수 이상에서 여성적 나르시시즘이 관찰되었다. 해당 환자들은 자기회의와 깊은 열등감에 빠져 있었고, 그런 문제를 완벽한 몸매나 예쁜 얼굴 등 겉치장으로 상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오히려 더 당당한 척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강인함 뒤에는 한없는 외로움과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파트너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등 대인관계에서 다양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작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면 이 여성들은 오히려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곤 한다. 상대에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여자들의 내면은 알다가도 모를 일 투성이다

 

저자 배르벨 바르데츠키 1952년생으로, 심리학 디플롬(학 석사 통합과정 학위) 취득 뒤 9년간 바트 그뢰넨바흐에 있는 심인성 질환 전문병원에서 근무했다. 전문 담당분야는 섭식장애와 중독증이다. 현재는 뮌헨에서 심리치료사이자 수련 슈퍼바이저로, 또한 치료사 전문 과정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주요 연구 분야인 나르시시즘 문제 중에서도 여성들만의 독특한 나르시시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침으로써 학계와 출판계에서 '여성적 나르시시즘'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수용하고 긍정적 자기 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조언한다. 또한 여성적 나르시시즘 환자들이 자신의 몸을 '완벽한 외모와 우월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얼마든지 조종 가능한 도구'로써 평가절하하거나 학대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들도 조언한다. 

 

즉 그녀는 독일 그뢰넨바흐 심인성질환 전문 병원에서 10여 년간 각종 심리장애와 중독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임상사례 수천 건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여성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심리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여자의 심리학>(2006년, 북폴리오 초판 출간)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개정판이다.

 

중독 증세가 있든 없든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 모르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그런 것쯤은 없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고, 어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저 꾹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했으며, 자기 일을 뒤로 미룬 채 남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12쪽에서)

 

 

 

 


진정한 자아의 상실


대부분의 아이는 부모의 애정에 크게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나아가 주변 환경에 필사적으로 적응하며 모든 이의 마음에 들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이의 본모습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아이의 겉모습이 곧 '거짓' 자아, 탈, 혹은 가면이 된다. '거짓' 자아는 유년기 시절 아이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가면을 쓰기 시작하면 아이는 나머지 자아, 즉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점차적으로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전달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전달할 용기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1923~2010년)는 '거짓' 자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치 인양-인격'이라 칭했다.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성들은 자기 몸에 대해 무지하거나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기 몸을 오로지 '거짓' 자아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이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과다한 운동과 트레이닝, 다이어트, 무조건 굶기, 구토 등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목표는 날씬해지는 것, 혹은 원하는 수준으로 비쩍 마르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몸을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혹사시킨다.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뭐든지 되는 대로 집어삼키고 전혀 꾸미지 않으면서 자기 몸을 완전히 방치하거나,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몸에 대해 자연스러운 시각을 지닐 기회를 오래전에 상실했고, 자기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몸이 제안하는 조건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기들이 몸에 이런저런 조건들을 붙인다.

 

 

성녀인가, 창녀인가

 

그림형제의 동화 <성모 마리아의 아이>에는 경직된 도덕관념을 갖고 살아가는 소위 '마리아의 아이들'의 운명이 잘 나타난다. 이런 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극과 극을 오간다는 사실이다. 성에 대한 관심도 욕구도 전혀 없는 성녀가 되거나, 창녀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존재한다. 여기서의 창녀는 직업적으로 성을 매매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욕으로 똘똘 뭉친 사람, 성욕을 마음껏 발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동화 속에서 마리아의 아이가 흘리는 눈물은 회한과 반성의 상징이고, 마리아는 이런 노력의 대가로 자식들을 품에 안겨주었다. 왕자와 공주는 그녀 내면의 아이, 즉 진정한 감정과 욕구, 삶의 의미와 충동을 상징한다. 이 내면의 아이는 지금까지 엄격한 도덕적 기준과 초자아의 지배에 억눌려왔지만, 진실을 고백한 후로는 자유의 몸이 되고 그녀 삶의 진정한 일부가 된다.바로 여기에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치유하는 길이 숨어 있다. 즉, 진정한 삶을 방해하는 지나친 완벽주의와 도덕심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진정한 욕구에 충실한 것이 치유의 길이다. 

 

 

나르시시즘의 분리모델  

자존감이 약한 여성들은 완벽주의, 거짓 독립심, 성공, 강인함, 감정의 조작, 지나친 적응, 자만심, 쉴 새 없는 활동 등을 통해 열등감을 상쇄하려 든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 이들은 적당한 수준의 성공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걸출한 성과를 올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외모도 '완벽해야' 한다. 흠 잡을 데가 없는 외모,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외모에 가가워야 만족한다. 일에 있어서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절대적 완벽을 기하면서 자신을 지치게 만든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을 발휘할 여지도 갖지 않는다.

 

이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이상적 자아상을 설정한 뒤, 이를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판단한다. 자신의 행동이나 외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너무 높은 기준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늘 자기 자신에 대해, 주변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실망만 한다.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은 생각 않고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남들이 칠칠치 못하다고 불평한다. 이에 절망과 열등감에 빠지며,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자존감이 약한 여성들은 남들에게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먼저 자기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남들이 자기를 좋아해주기만 바라면서 남들이 원하는 모습에 자기를 맞춘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길 

자아의 각종 단면을 통합하는 것은 강점이라는 한 극과 약점이라는 다른 극을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강점과 약점이라는 두 개의 극을 이으려면 '내 감정에 충실하더라도 내 강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 이로써 두 개의 극 사이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이 공간으로 인해 삶은 한결 더 가벼워진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치료 과정의 하나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불쾌한 감정이나 자존감 상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나아가 양극으로 분리된 심리가 결국 방어기제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극단적 감정을 포기하고 한층 더 건설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게 된다. 동화 속 결혼식은 양극의 통합과 더불어 진정한 대인관계를 상징한다.

 

"왕자가 마음에 들었던 백설공주는 왕자와 함께 궁전으로 갔습니다"

 

 

자립심과 긍정적 자기수용

 

견해 차이를 인정하는 것,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는 것도 자립심에 속한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능력,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하는 능력, 그것을 성취하는 능력도 자립심의 일부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처음 해보면 당연히 두려움이 느껴진다. 공격이나 비판을 받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고수해도 나쁜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체험할 수 있다. 혹은 상대방이 설득될 때도 있다. 이런 체험은 치유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문제는 내면의 무언가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제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인지하고 인식하기만 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나는 내 감정을 느낄 권리가 있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권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존감이 낮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부인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권리를 인식하기만 하면 열린 마음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고, 자기 의견을 고수할 힘도 얻게 된다. 이때 '지금 내 모습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말은 지금까지 해온 자기비하와는 대조된다. 이런 다짐을 통해, 자기를 포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깰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장은 생각의 일부가 되어 긍정적 방향으로 자존감을 형성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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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김시천 지음 / 더퀘스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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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어>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옛날 옷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옛날에 입었던 옷이 오늘날 다르게 변한 내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논어>가 현재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옷을 다시 입으려면 수선을 해야 합니다. <논어> 읽기에서도 바로 그 수선의 과정이 필요한데, 그 출발점이 전통사회에서 갖는 <논어>의 지위나 의미가 현대사회에서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공자의 12제자, 각자도생에 나서다

 

책의 저자 김시천 숭실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주로 도가철학과 한의철학, 동아시아 고전의 현대적 해석에 관심을 두고 강의하고, 연구하며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철학에서 이야기로>(2004),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2011),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2013) 등이, 역서로 <펑유란 자서전>(공역, 2011)이 있다.

 

<논어>는 공자가 죽은 후,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모이고 한참 뒤에 편집된 문헌이다. 따라서 기록자의 취지와 편집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1천 2백 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이루어진 <논어>의 편찬은, 우리가 오늘날 읽는 책과는 무척이나 다른 공정을 거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비용과 여러 가지 조건을 토대로 일어난 '획기적 사건'이었다. 책을 만들고 그 책에 내용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얼굴의 <논어>를 만나왔다. 동양 고전으로서, 유교의 경전으로서, 나아가 처세의 지혜를 알려주는 자기계발서의 원형으로서. 이는 누구의 시선으로 읽어 전달되느냐에 따라 빛깔이 오묘하게 달라진다. 동양철학을 인간의 생동하는 삶과 연결해 해석하는 데 오랜 시간을 바쳐온 저자는 <논어>를 공자의 12 '제자들'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옛날 논어가 최초로 편집되던 시기의 관점을 복구해 보고, 나아가 '사람'이라는 존재를 읽는 텍스트로서 재조명하려 한다.

 

공자의 숭고한 어록이라는 관점으로만 <논어>를 읽는 것은 고전의 수많은 틈새를 똑같은 재료로 메워버리는 것과 같다. 이에 저자는 <논어> 속 문장들의 약 55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채로운 등장인물 중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열두 제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당대 '공자학단'을 형성한 '개인'들의 철학을 재발견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전을 현실에 맞게 읽는 적절한 독법 가운데 하나다.

 

 

 

 

<논어> 속의 사람들을 읽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큰 틀에서 <논어>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러가지 통계를 인용하면서 우리들이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읽기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한다.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발견과 각자도생하는 공자의 제자들을 살펴본다.

 

현대 중국과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논어>가 증삼과 그의 문하생들이 편찬했다는 걸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증삼은 이 책에 몇 번 출현했을까? <학이>편에 2번, <이인>편에 1번, <태백>편에 5번, <선진先進>편에 1번, <헌문>편에 1번, <자장>편에 4번으로, 총 6편밖에 출현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증삼이 5번이나 출현하는 <태백>편의 경우에 다른 제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증삼과 그의 제자들이 편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논어> 전체가 아니라, <태백>편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에 접근하다 보니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선진>편에는 독특하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29명 가운데 2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선진>편은 '공자의 제자 열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진>편만 읽어도 공자의 여러 제자 이야기를 한꺼번에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2부("운명이여, 안녕")에서는 공자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무인武人 '자로'와 수제자로 알려진 '안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이상으론 공자와 별 차이가 나지 않았던 자로는 공자의 제자가 되어 새 삶을 살지만, 그의 개성과 소신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안회는 아주 어린 나이에 제자가 되어 공자의 가르침을 철저히 읽히지만 비천한 출신 때문에 벼슬을 포기하고 새 삶을 개척하는데, <논어>에선 홀대받고 <장자>에선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우린 소개된 이야기들을 통해 몇 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우선 자로가 공자학단 내에서 이른바 재야在野와 연결하는 모종의 고리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자로가 야인 출신인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와 함께 공자학단은 야인의 삶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반면 공자학단에 속했지만 야인의 세계로 넘어가려고 했던 인물이 있었다. 학단 내부에서 다양한 요인으로 따돌림을 당했던 안회가 바로 그 사람이다.

 

 

3부(메멘토 모리, 죽은 자를 기억하라")에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자공'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자공은 공자학단이 실제로 유지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지원한다. 만약에 그 시절 이런 인물이 없었다면 아마도 역사적인 인물 공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특징은 자공의 역할을 중심축에 두고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4부("어디에나 길은 있다")에서는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즉 '재아', '염구', '증삼'이 바로 그들이다. 재아는 유가 전통에서 배반자로 취급받았지만, 그는 합리적 사유를 내세우는 새로운 사조의 개척자인 셈이다. 염구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로 공자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찾는다. 증삼은 <효경>의 저자로 알려졌으며, 이후 그의 제자 문하에서 맹자가 배출된다.

 

재아가 가장 재아답게 드러나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재아가 물었다. "3년상은 1년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약 공직을 맡고 있는] 군자가 3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는 분명히 망가질 것입니다. [또 군자가] 3년 동안 음악樂을 하지 않으면 음악은 분명히 사라질 것입니다. 옛 곡식이 없어지고 햇곡식이 올라오는 것과 [계절마다 바꾸어 사용하는] 불씨 얻을 나무를 바꾸는 데도 1년으로 충분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이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어도 너는 편안하냐?"
[선생님의 반응이 예상외로 공격적인 말로 돌아오자 재아는 결심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편안합니다"

[물러설 줄 알았던 재아가 다시 도발적으로 대답하자 선생님도 계속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군자는 [부모의] 거상 중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운 줄 모르고, 집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너는 편하다고 하니 그렇게 하도록 해라"


재아가 나가자 선생님이 [주위의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했다. "재여(재아는 재여의 자이다)는 어질지 못하구나不仁. 자식이 태어나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떠난다. 3년상은 천하에 통용되는 상례다. 재여는 자기 부모에게 3년 동안 사랑을 받기는 했을까?"

 
여기서 재아는 "생명은 1년을 주기로 순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켜야 할 '상'이라는 예의 기간도 자연법칙에 따라 1년으로 하는 것이 순리 아니겠습니까?"라고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너는 부모가 돌아갔는데도 맛있는 게 입에 들어가느냐?"며 쏘아붙이며, 한마디로 공자가 반칙을 한 거다. 거기다 재아의 뒷담화까지 한다. 만약 공자가 재아의 질문에 바로 "사람이 태어나고 부모 품을 벗어나는 데 3년이 걸린다면, 부모와 헤어지는 것도 3년이 걸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했다면, 둘 사이의 이야기는 합리적인 토론이 됐을 것이다.

 

 

5부("나는 나의 길을 간다")에서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학단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여러 나라로 흩어져 유학을 퍼뜨리는 역할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상적 경향도 각각 달랐으며, 대표적으로 자하의 '경학經學'과 자장의 '유술儒術'이 이와 같은 유가의 분화와 개성을 잘 대변한다.

 

 

 

 

십인십색 <논어> 이야기

 

<논어>는 공자가 어떤 완벽한 가르침을 남겼는데, 그보다 떨어지는 인간들이 덜 완벽하게 이해하고 행동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니다. 제자들 각각이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가르침을 각자의 삶 속에 적용하거나 때때로 거부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색깔을 만들어나갔다. 이런 다양성을 어떻게 공유하고 만들어나가는지가 새로운 <논어> 읽기의 출발이자 완성이 될 것이다.

 

그래서 <논어>에서 찾아야 하는 진면목은 공자라는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네가 되고 내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우리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기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고, 삶의 이야기는 늘 다른 사람과 포개어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는 나의 삶, 우리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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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미국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김봉중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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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친미와 반미라는 이분법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최고의 우방으로서 우리의 안보와 경제에 대들보 역할을 하는 미국과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우리의 주권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 둘 중에 어떤 게 미국의 얼굴일까요? 어쩌면 이러한 이분법에서 벗어날 때 진짜 미국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머리말' 중에서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가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알고 지내온 터라 이 책을 완독한 후 갑자기 이 노래가 떠올랐다. '친미'와 '반미'라는 이분법이 공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미국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이 출간된 셈이다. 책의 저자 김봉중 교수는 <오늘의 미국을 만든 미국사>, <무엇이 대통령을 만드는가> 등의 인문, 교양서를 집필했으며, 다양한 포럼과 강연 등을 통해 역사학의 대중화에 많은 열정을 쏟아 왔다.

 

이 책은 그런 그의 노력에 따른 결정체라 할 만큼 미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역사, 지리,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문화와  생활, 한미 관계 등 5부로 구성되어 '움직이는 미국'을 다각도로 살피고,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움직이는 한국'을 돌아보게끔 한다.

 

방대하고 복잡한 미국의 역사와 사회상을 '개인주의', '명백한 운명', '프런티어 신화', '자유와 평등' 등 미국적 신념 및 가치관과 연결 지어 서술하고 있다. 편하게 읽히는 문장과 쉽고 친근한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미국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미국인의 정체성과 미국 사회를 이루는 뿌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제1부(역사)는 방대한 미국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미국이 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는지, 13개의 주로 출발한 신생 국가가 어떻게 50개 주와 워싱턴 D.C.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라가 되었는지 등을 알아본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발전은 전쟁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정설이다.

 

이에 저자는 미국의 독립 전쟁과 미국을 최강 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미서 전쟁, 전 세계에 미국의 힘을 확인시킨 1, 2차 세계 대전, 미국 사회의 분열을 초래한 베트남 전쟁과 냉전 등을 시대순으로 설명한다. 또한 한미 관계의 출발점이었던 한국 전쟁을 포함해 9, 11 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도 충실히 소개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전쟁을 둘러싸고 국제 질서 속에서 미국에 요청되었던 책임이나 미국 내의 다양한 여론, 첨예한 갈등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우리들의 이해를 돕는다. 예를 들어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 소동과 트루먼 행정부의 위기가 어떻게 한국 전쟁 개입과 연결되는지를 읽게 되면 역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힐 수 있다.

 

 

 

제2부(지리)에선 미국의 프런티어 신화를 설명한다. 미국이 현재와 같은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중요한 계기는 바로 서부 개척이다. 인디언의 아픈 역사에서 시작해 서부 개척 이야기 등을 살피며 미국인들이 믿은 '명백한 운명''프런티어 신화'에 관해 알아본다.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식민지 시대부터 자신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대륙에서 지상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국 영토의 확장을 '명백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국경은 정해져있는 정체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동적이므로 경계 너머로 확장하는 출발선으로 여겼기에 모험심과 진취성을 '프런티어 정신'이라 부른다. 저자는 이러한 믿음이 바로 미국 성장의 원동력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움직이는 미국'을 가능케 했다고 설명한다.

 

 

 

제3부(정치, 경제, 사회)제4부(문화, 생활)에서는 한국의 사회상과 대비되는 다양한 미국적 특징들을 소개한다. 즉 미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이루는 뿌리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면서 그 해답을 미국인의 역사적 인식과 기억에서 찾는다. 예컨대 정부의 개입이나 지원 없이 이주자들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땅을 일궈야 했던 초기 정착기나 서부 개척기의 기억이 개인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던 문제들, 작게는 아메리칸 풋볼의 인기에서부터 크게는 미국의 취약한 복지 제도며 총기 소유 문제도 '노력하는 만큼 성공한다'는 아메리칸드림이나 '자유와 안전은 스스로 지킨다'는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훨씬 선명해진다.

 
비록 역사가 짧지만, 민주주의만 놓고 보면 미국은 가장 연속적인 역사를 지녔다. 세계 최초로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니라 임기가 정해져 있는 직위로서 국가 원수를 탄생시켰으며, 남북 전쟁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등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선거를 시행했다. 경제가 부흥할수록 민주주의가 안정되고, 민주주의가 안정될수록 경제도 성장하는 선순환은 미국인들이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자기와 다른 문화를 접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네strange'보다 '흥미롭군interesting'이라고 표현한다. 인종집합소라고 불리는 미국은 편견 없는 시선과 열린 태도로 인해 다인종, 다문화 사회의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으며, 개인주의적 풍토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기부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백인 우월주의, 이민자 배척 등의 역사 또한 엄연히 존재했으며, 현재의 미국 사회는 여전히 인종 차별과 빈부 격차라는 깊은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이처럼 미국 사회의 밝고 건강한 모습뿐 아니라 어두운 면면들도 다루기에 미국 사회를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5부(한미 관계)에서는 긴장 속에서 발전해 온 양국 관계를 다룬다. 1866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제너럴셔먼호가 다가오면서 어설프게 첫 대면을 시작한 이후 한국 전쟁, 미국의 경제 원조, 반미 운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미 관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친미와 반미라는 이중주 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성장해 온 만큼, 이제는 세계 속 한국의 위상과 이익을 생각하며 미국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더욱 균형 잡힌 지식인이 되라

 

이 책은 새롭게 미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 어학연수나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 휴가철 미국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들에게 미국에 관해 충실한 길라잡이를 자처하고 있다. 저자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더욱 균형 잡힌 지식인이 되라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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