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 -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
양병무 지음, 정기문 감수 / 21세기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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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로마 역사를 리더십 전문가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창업과 승계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동시에 오늘날의 인사 관리, 조직 관리, 자기계발 등과 연계하여 조직의 경영과 관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

 

저자 양병무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노동경제연구원 부원장, 한국리더십학회 부회장, 대통령 자문 일자리위원회 위원, 숙명여대 초빙교수, 한국인간개발연구원 원장, 서울사이버대학교 부총장, 재능교육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라는 과정을 개발하여 10여 년 동안 강의를

 

로마 역사의 내용은 그 양量이 방대해서 독파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저자는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로마사를 정리하여 미처 독파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정치 체제의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로마사를 개관, 각각의 정치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경영의 원리와 자기계발의 지혜를 담았기에 경영학도나 기업체 임직원 및 경영자에게 유익한 도움을 준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처럼 강하면서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가 로마를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 즉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키워 '주식회사 로마'가 되어 반도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면서 인류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1200년간 로마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리를 찾는다면 기업이든 국가든 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로마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은 참으로 많다. 공화정에서는 로마의 성장 동력이 된 개방성과 시스템 구축, 인프라 정비, 매뉴얼 작성, 로마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매년 집정관 선거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한 사례를 통해서는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수 있다. 창업과 승계 측면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인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통해서는 개혁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또 21년간의 재위 기간 중 14년간 속주屬州를 순행하면서 현장에서 정책을 펼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통해서는 현장제일주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아울러 기독교의 탄생과 탄압,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 인정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강점은 배우고 약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로마 역사의 개관槪觀

 

로마를 흔히 천년제국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약 1,2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고, 서로마제국이 476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정확하게 계산하면 1,229년간 존속했다. <로마인의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도 서로마제국에 국한시키지만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 멸망했으니 이를 포함한다면 무려 2,200년의 역사가 된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국가는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칭기스칸의 몽골, 페르시아왕국, 청나라 등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나라는 많았지만 대체로 20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에 반해 로마는 오랫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로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천년제국 로마의 역사 개관' 중에서)

 

 

벤처기업으로서 출발한 로마 

스탠리 빙<로마처럼 경영하라>에서 로마의 출발을 벤처기업의 창업에 비유했다. 또 사비니족과 통합한 것을 최초의 인수합병으로,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는 것을 경영권 다툼으로 각각 해석했다. 벤처기업의 성공 이유는 대개 비전의 공유 때문으로 파악한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삼기에 결과적으로 창대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의 역사는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기업 집단으로 발전한 글로벌 대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나 국가도 로마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토록 장기간 동안 지속된 원리를 찾는다면 기업이든 국가든 유익한 성장 전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팽창의 기틀을 만들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세습제의 유혹을 물리치고 2대 왕은 사비니족인 누마를 세워 법의 체계를 충실히 다졌다. 3대 왕은 누마의 뒤를 이어 라틴계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선출되었다. 호전적인 툴루스는 유순해진 로마인을 전투적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전투 경험을 쌓게 했다. 그 첫 번째 공격 대상은 선조의 땅 알바롱가였다. 로마의 역사는 겨우 80년이었지만 알바롱가는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로마는 전쟁에 패한 민족에게는 두 가지 정책을 취했다. 첫째, 동화 정책을 계승하고 둘째, 약속을 어기거나 배신하는 해위엔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바롱가인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은 더욱 많아졌다. 인구의 증가는 바로 군사력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 왕정의 세 왕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감당했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2대 왕 누마는 종교와 법의 체계를 세웠으며, 3대 왕 툴루스는 로마가 외부로 확산되어나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마키아벨리<로마사 논고>에서 세 왕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로마 초기의 국가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에는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로마 공화정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는 리비우스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왕의 역할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 초대 집정관에는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가 당선됐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로마는 앞으로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함으로써 왕정 폐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창시자가 되었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다

 

귀족과 평민 간의 대립과 갈등은 켈트족의 침입을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로마군은 켈트족에 패배하여 7개월 동안 로마 시가지를 야만족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 한마디로 무법천지로 변해 폭행, 살인, 약탈 등이 자행되었다. 이후 견디다 못한 로마인은 켈트족에게 300kg의 금괴를 지급하고 물러나게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법을 제정했다. 바로 '리키니우스 법'이다. 평민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정치 제도의 개혁을 통해 보란 듯이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로마인의 저력이다. 이제 귀족과 평민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손을 잡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로마제국을 건설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합된 로마의 힘 앞에 대적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장군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설적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 역사도 세계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를 선언해야 한다. 이 평화는 로마가 더 이상 넓힐 영토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로마 공화정은 전쟁을 통해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갔으니, 전쟁은 로마의 성장 엔진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270년에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발길을 돌려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운명의 일전을 치루게 된다. 본디 로마와 카르타고는 평화협정을 맺은 관계였다. 하지만 로마는 반도를 벗어나 팽창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협정을 깨고 숙명의 라이벌전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차 포에니전쟁은 시칠리아의 영토와 제해권制海權을 수호하고자 시칠리아 섬에서 일어났는데 카르타고가 패함으로써 시칠리아를 로마에 빼앗기고 만다. 2차전은 한니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미 어릴 적부터 장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로마를 무너뜨리겠다고 포부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해서 로마인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했다. 코끼리를 이끌고 눈 덮힌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

 

로마의 개방성은 건국 초기부터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건을 계기로 사비니족과의 합병을 감행했고 이후 공동 통치에 나섰다. 또 전쟁에 패한 알바롱가의 모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똑같이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다. 즉 무력으로 흡수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해 동화同化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로마인은 기원전에 2중 국적을 허용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종교에도 다양성을 인정했다.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점령지의 문화라도 유용하다면 수용해서 로마화했다. 개방성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여기서 유연성, 포용성, 다양성이 비롯되었다. 

 

 

학습하고 벤치마킹을 하다

 

그리스인보다 지성적으로 열등하고, 체력적으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에트루리아인에게 밀리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에 딸린다고 인정할 만큼 열등감의 화신이었던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관해 시오노 나나미는 "부족한 지성을 벤치마킹으로 배웠고, 부족한 체력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보완했고, 기술력은 기술자를 포용하여 보완했고, 경제력은 시장 원리를 받아들여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와 맥을 같이 하는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을 세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공화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임 황제와 유력자들에게도 계승되어 로마 지도자의 훌륭한 덕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 솔선수범했고 유력자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사재를 내놓아 공공건물을 건설하여 희사한 리더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무엇이었을까? 건물 명칭에 가문의 이름을 새기거나 송덕비에 이름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지도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통해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었기에 로마 시민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기>, 지식경영의 모델

 

카이사르는 현재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첫해부터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기록, 매년 본국에 보냈다. 일종의 출장보고서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7권을 모아 한 번에 발간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정복 상황,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적었다. 이 책은 최고의 전쟁 회고록이고, 보고문학의 백미이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기록을 통해 암묵지를 명백지로 만든 지식경영의 모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태양력 달력을 만들다

 

기존에 사용했던 태음력은 1년이 355일로 달력상의 계절과 실제 계절 사이에 차이가 났다. 카이사르는 이런 불편을 극복하고자 정확한 달력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집트의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에게 이를 맡겼다. 로마에 온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해냈다.

 

이렇게 해서 365일은 1년이 되고, 1년은 열두 달로 나뉘었다. 1년마다 생기는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는 방식으로 윤년을 만들어 2월이 29일이 되도록 했다. 마침내 기원전 45년,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태양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렸다.

 

 

철저한 목표관리

 

기원전 29년 8월, 14년 간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사흘 동안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이 끝나자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1. 야만족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안전 보장의 문제

2. 50만 명의 군대를 적절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문제

3. 정치체제와 행정개혁을 단행하는 문제

 

옥타비아누스는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MBO(Management by objective), 즉 목표 관리였다. MBO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오늘날 경영에서 중시하는 MBO의 원조가 바로 옥타비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권한위임의 달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이라 불리는 아그리파와 외교 및 문화 홍보를 담당한 마이케나스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터는 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외교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했다. 오늘날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고 하는데,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왜 로마인의 후예인가?

 

오늘날의 서유럽은 로마를 바탕으로 각자 독립국을 건설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로, 미국의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미국의 정치체제를 구상했다. 미국은 국회의사당을 로마식으로 건설했다. 국회의사당을 U.S. Capital이라고 하는데 Capital은 바로 로마의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도 로마의 원로원을 뜻하는 Senatus에서 유래했다. 또한 달력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남아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는 "아무도 로마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우리는 왜 로마인의 후예인가?' 중에서)

 

 

카이사르처럼 창업하고, 아우구스투스처럼 승계하라

 

"창업과 승계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 로마제국의 창업자 카이사르와 승계자 아우구스투스의 관계를 말한다. 흔히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창업자가 이룩한 것을 승계자가 지키고 발전시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승계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 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진보와 보수, 외향성과 내향성, 창업과 승계의 조화를 통해 자신들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 책을 경영인보다는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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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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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주게 될지 알 수 있었지만 난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어. 내가 당신에게 운명을 걸기로 작정한 이상 내 머릿속에 자그마한 의구심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해서 함께 살기로 한 이상 당신에게도 내 의구심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지난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내가 그 짐을 나누어 갖고 싶었어. 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당신이 못이기는 척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을 거라 믿었지. - '그리고 그 여자는 내게서 도망쳤다' 중에서

 

 

왜 안나는 사라졌을까?

 

이야기꾼 기욤 뮈소가 이번에는 정통 스릴러물로 우리들을 찾아왔다.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게 이번이 13번째라니 한국에도 그의 팬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는 매년 신작을 발표하는 프랑스 출판계의 개근상 감이다. <구해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 여자>, <7년 후>, <내일>, <센트럴파크> 등 다작임에 틀림없다.

 

그의 소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등장인물의 실종, 이를 추적하는 스토리, 뉴욕이나 프랑스가 배경지로 등장하는 점 등이 그렇다. 실종 사건이 자발적으로 계획한 고의 실종인지, 타인에 의한 강제 실종인지를 알고 싶기에 독자들의 입장에선 그 스토리의 전개에 몰입하게 된다.  더구나 섬세한 필치로 배경지를 설명하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고픈 충동마저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구해줘>라는 작품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뮤지컬 배우가 꿈인 줄리에트와 아내의 자살로 홀아비가 된 의사 샘이 주인공이다. 둘은 마치 자석에 끌린 것처럼 급하게 사랑에 빠진다. 뭐 특별한 이유도 없는 섹스 신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줄리에트가 다시 프랑스로 귀국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재미없어지려는 순간 실종이라는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 갑자기 줄리에트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이 비행기는 추락, 승객들은 사망한다. 이후 줄리에트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하면서 이 소설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기욤 뮈소의 소설에 대해선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듯하다. 어떤 독자는 소설의 공통점 내지는 특징이 뻔하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그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몇 편의 작품을 더 읽은 후 한동안 읽지 않았다.

 

실로 오랫만에 기욤 뮈소의 작품을 손에 집어 들었다. 이는 최근에 개봉한 김윤석, 변요한 주연의 한국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07년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소설이 바로 기욤 뮈소의 작품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알약 10개를 획득한 사나이가 30년 전의 자기 자신을 만난다. 후회스러운 지난 날의 사건을 바꿔보려고 애쓰는 '수현(변요한)'이 바로 주인공이다. 

 

 

            

 

"당신은 지금 우리 사이를 망치려 하고 있어"

 

결혼식을 3주 앞 둔 소아과 여의사 안나 베커와 작가 라파엘 바르텔레미는 앙티브의 코트다쥐르 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둘은 조촐한 결혼식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결혼의 증인으로 라파엘의 친구 두 명과 아들 테오만 하객으로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며 우수 어린 눈빛에 매력을 느낀 그였지만 안나에게 지난 고과거의 비밀을 다 털어놓으라고 강요했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말이다.

 
서로 속마음을 모르면서 부부 사이가 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자그마한 의구심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그는 안나도 당연히 이를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녀가 지난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 짐을 나누어 갖자는 의도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대체로 남자들이란 여성들에게 과거를 고해 성사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했다가 신혼 초야에 이혼 도장을 찍는 일이 많다고 한다. 각설하고 두 사람의 대화가 급기야 말다툼으로 비약했다.

 

사실 안나는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매우 꺼려 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 지난 과거의 일을 얘기했을 때 이후에도 변함 없이 사랑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그렇다고 대답을 듣자 불에 탄 3구의 사체가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이 한 짓이라고 고백한다.

 

충격적인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것도 가져온 가방까지 집어들고 말이다. 이후 곰곰히 생각한 끝에 이는 자신이 시작했던 일의 결과임을 깨닫고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저를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라파엘은 이웃 사촌이자 전작 형사인 마르크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안나에 관해 더 이상 감추지 말고 있는 내용 그대로 모두를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범죄자를 취조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에 안나가 제시한 사진에서 본 불에 탄 사체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수사에 착수할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마르크는 식기세척기에서 안나가 사용하는 머그잔에서 그녀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채취했다. 이를 조회한 결과 그녀의 신분이 위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마르크는 현직 형사로부터 안나에 관한 신상 정보를 도움받는다. 안나가 2010년 초에 살았던 주소지와 일치하는 치과의사 필리프를 만나 그녀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당시 파리-데카르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으로 오직 집과 공부밖에 몰랐다는 내용이엇다. 한편, 라파엘은 생트 세실 고등학교를 찾아가 클로틸드 블롱델 교장을 만나 안나에 대해 물었으나 두 사람의 애정사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마르크는 치과의사의 제안대로 과거의 매제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마누엘 스폰티니를 만나 안나의 위조신분증을 보여주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 듣는다. 당시 석달치 집세를 지불하고 12평짜리 방을 얻어 지냈는데, 마국인으로 프랑스대학에 공부하러 왔다고 자신을 밝혔고 가끔 귀티나는 금발머리 여자가 다녀가곤 했다는 거다. 자신이 알기론 그저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탐문조사를 하는 가운데 안나는 10여 년 전에 있었던 미제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이코패스 하인츠 키퍼가 소녀들을 감금, 성폭행을 일삼다가 은신처에 불을 질러 집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불에 타 죽은 엽기적인 사건인 소위 '하인츠 키퍼 사건' 말이다. 이후 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할수록 놀라운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브루클린의 소녀

 

정부의 관련 부서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화재현장 분석만으로도 꼬박 이틀이 소요되었다. 화재현장의 배관파이프와 하인츠 키퍼가 타고 다니던 픽업에서 소녀들의 머리카락과 두 개의 지문이 발견되었다. 열흘 간에 걸친 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 결과 하인츠 키퍼와 세 소녀의 지문은 아니었다. 두 개 중 하나의 지문은 끝내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고, 나머지 하나는 클레어 칼라일의 지문으로 밝혀졌다.

 


하인츠 키퍼가 클레어 칼라일을 납치 감금할 무렵 리부른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도르도뉴 지방 리베락에 사는 모친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화재현장을 중심으로 제법 넓은 지역에서 다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주택의 연못 바닥을 준설하기 위해 굴착기들이 동원되었고, 숲을 수색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동원되었다. 경찰은 클레어 칼라일의 시체를 찾기 위해 자원봉사자들까지 동원해가며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다.

 
경찰의 수색 결과 끝내 클레어 칼라일의 사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츠 키퍼가 집단자살을 시도하기 전 클레어 칼라일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인츠 키퍼 사건 수사는 결국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경찰은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해 한동안 수사를 종결짓지 못하고 차일치일 시간만 흘려보냈다. 사건담당 검사는 2009년 말에 이르러서야 결국 클레어 칼라일의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고 공식적으로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그 후 아무도 브루클린의 소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왜 안나는 지난 날을 버리고 전혀 다른 누군가가 되고자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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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위한 롤모델 유일한 이야기 -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은 유일한의 도전하는 삶과 아름다운 나눔 꿈결 롤모델 시리즈 3
정혁준 지음 / 꿈결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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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유일한에게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습니다. 기업가 정신으로 불리는 '앙트레프레너십'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시도하다' 또는 '모험하다'는 뜻입니다. 기업가 정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창업정신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 정혁준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한 기업가

 

저자 정혁준은 <한겨레>기자로 디지털콘텐츠 팀장을 맡고 있다. <한겨레21>경제팀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미국 조지아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미국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신생 기업이었을 당시의 시장 진입 전략과 포지셔닝 전략을 분석했다. 이들이 찾은 셀링 포인트와 잠재 수요를 폭발시킨 마케팅 전략 역시 탐구했다.

 

 

 

그는 소설처럼 재미있고 술술 읽히는 경제경영 관련 책을

 

 

 

 

 

 

 

 

 

 

 

 

 

 

 

 

 

 

 

 

 

 

 

 


1925년, 유일한은 21년 만에 가족을 찾았다. 아버지가 환갑을 맞는 해였다. 그의 가족은 여전히 북간도에 살고 있었다. 현재 교제 중인 호미리와의 결혼을 승락받고 싶었다. 일본 나카사키에서 경성으로 오는 배를 탈 때부터 주위를 맴돌던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계 형사에게 반강제로 이끌려 취조까지 당하기도 했다.

 

20여 년 동안 영어를 사용해 온 유일한 더듬거리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콩나물 장사를 한다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이라고 설명을 해도 그게 그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긴 시간이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각의 차이까지 크게 만들었다. 나이 서른의 아들에게 어머니가 결혼 얘기를 떠나자 이때다 싶어 호미리의 사진을 부모님 앞에 내밀었다.

 

"호미리라는 여자입니다.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아과 의사가 될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동양인 여성이라는 말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서른, 호미리는 스물아홉이었다. 유일한은 사업을 정리해 조극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아내에게 전했고 처음엔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녀도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교육보다 국민 건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민족만이 나라를 되찾고 번영시킬 수 있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이 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의약품을 공급해야 한다'

 

 

 

'기업은 사회의 것'이다

 

"진통 효과를 내려면 어느 정도 마약 성분이 들어가야 하는데, 다른 회사에 비해 우리 제품은 너무 약한 편입니다. 우리 회사도 진통 효과를 높일 마약 성분을 넣는 게......."

 

"마약 장사를 하자고? 고작 한다는 말이 마약 장사라니 실망스럽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회사를 시작했나? 병으로 고생하는 동포를 돕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닌가. 창업 정신을 저버리는 직원이라면 더는 같이 일할 수 없네. 사표를 쓰게"

 

그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지 10여 년 만에 77 명의 사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시켜 만주, 중국, 일본 지역으로 판매망을 넓히고 대만과 베트남까지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만주 출장에서 돌아온 전항섭 전무가 이렇게 만주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서 그의 철저한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즉 '기업은 사회의 것' 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것이다.

 

 

대한상의 초대 회장을 맡다

 

맹호군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이 전선에 참여하기 위해 설립한 비정규 군사 조직이었다. 1942년 8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들은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시청으로 행진햇다. 유일한은 열병식에서 임정 요인이 보내온 축사를 낭독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 후 한국 정치 상황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기에 그는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1946년 7월이었다. 사장직에 복귀하며 유한양행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미국 유학파라서 미군정 간부들과도 가까워 곧 정치에 나설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는 결코흔들림 없이 기업 경영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한창 사업에 박차를 가할 무렵, 그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대한상의에서 회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상공업 발전에 기여하고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경영을 해 론 인물은 대부분 친일 이력이 있어서 국민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가 없으므로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거절했지만  끈질긴 부탁에 그는 결국 이를 수락했다.

 

그러자 누가 유한양행의 새로운 사장이 되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가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동생 유명한이 회사를 이끌었으므로 가장 유력하다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유일한과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동기인 구영숙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소아과 의사였다. 

 

당시로서는 창업자와 친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사장직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구영숙은 미국 에모리대학을 졸업한 의학박사로 경영 이력이 없었다. 유일한이 구영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역량과 민족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미 유일한은 오래전부터 구영숙을 지켜본 결과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패기와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 

유일한의 유품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이 전부였다. 유일한이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1971년 4월 8일, 그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됐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교육과 사회를 위해 써 달라. 딸 유재라에게는 묘지 주변 땅 5천 평을 주어 유한동산을 꾸미되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우리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죽어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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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불화 명작강의 - 우리가 꼭 한 번 봐야 할 국보급 베스트 10
강소연 지음 / 불광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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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불교미술이라는 용어보다는 '불교장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불교에서는 사원이나 법당을 꾸미는 것을 '장엄'이라고 합니다. 보통 유리가 흔히 쓰는 '장식'한다는 말과 유사합니다만, 장엄이라는 용어에는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유형과 무형의 덕행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고운 마음으로 향이나 촛불을 하나 피워도 그것은 세상을 장엄한 것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참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물질의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이면의 마음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 '서문' 중에서

 

 

국내 최고의 불교미술을 소개하다

 

저자 강소연은 유년시절을 천년고도 경주에서, 청년기를 미국 보스톤 캠브리지에서 보냈으며,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영국 런던대학(SOAS) Art & Archeology Dept., 서울대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등을 거치며 미술사를 공부했다. 그녀는 교실 안에서 만나는 현학적인 문자의 세계보다 순수한 작품의 세계 속에서 그 예술혼과 마음으로 만나야 그것이 글이 되고, 힘이 되고, 또 삶이 된다고 여긴다.

 

원로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의 여식인 그녀는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만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장학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및 홍익대학교 겸

 

 

 

 

무위사 <아미타삼존도>(1476년, 토벽에 채색, 270x210㎝, 국보 제313호)

 
조선초기에 완성된 탱화로, 온전한 형태로 국내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고려 화풍'의 명작이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거기에다 새로운 조선적 창조가 가미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 의미가 크다. 즉 존상의 배치와 광배의 표현, 배경 처리 등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조선적 표현이 보이는 반면, 세부적 묘사에 있어서는 극세필의 유려함과 화려한 장식적 특징이 살아 있어 고려불화의 귀족적 화풍을 엿볼 수 있다.

 

형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화면 가운데의 아미타 부처님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서기(瑞氣: 상서로운 기운)가 포착된다. 서기는 먼저 다채로운 문양의 광배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지극히 화려한 층층의 광배로도 모자라서, 급기야 화면의 바탕을 가득 채우며 뭉게뭉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에 반해, 고려불화의 광배 표현은 투명하다. 불성에서 퍼져 나오는 오묘한 적멸의 빛을 금선의 테두리만으로 표현했다. 불성은 인격화된 모습의 부처님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 원형적인 모습에 충실하여 여의주如意珠 또는 보주寶珠의 상징체로 표현하기도 한다.

 

162여 점의 고려불화는 대부분 국외로 유출된 상황이라 국내에서 고려불화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 현실에서 이 불화는 이 땅의 유일한 후불벽화後佛壁畵이자 고려불화의 비법을 간직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명장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참고로 후불벽화란 법당 안의 불단에 봉안한 부처와 보살의 조각상 뒷벽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이다.

 

 

 

해인사 <영산회상도>(석가모니후불탱, 1729년, 비단에 채색, 240x229.5㎝, 보물 제1273호)

 
해인사의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에 봉안된 대작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을 영산회상도라고 하는데, 여타 영산회상도가 평면적인 화면 구도를 보이는데 반해 이 작품은 원근법을 이용해 독특한 공간감을 연출함으로써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중에서 가히 압권이다. 부처님 몸 전체에서 섬광처럼 뿜어져 나오는 '광명光明(지혜와 자비의 빛)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불화에서 주의해 보아야 할 가장 핵심적 표현은 '광명'이다. 이는 무명과 번뇌를 비추는 지혜와 자비의 빛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빛은 중생을 일깨우는 불성佛性이다. 불성을 의인화한 부처님과 보살님의 몸에서는 항상 청정한 광명이 발산된다. 이 광명을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광배로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는 광명의 표현이 유난히 상서롭다. 둥근 광배뿐만 아니라, 섬광과 같은 빛줄기의 방사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줄기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지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장을 영산회상이라고 한다. 당시 설법이 열린 장소는 왕사성 기사굴산인데, 왕사성은 고대 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였으며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지점에 기사굴산이 있었다. 이 산의 봉우리는 신령스러운 독수리 머리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영취산靈鷲山이 된다. 부처님의 대표적 설법 장소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법화경>의 법화칠유法華七喩

 

화택火宅유~ 불이 난 집의 아이를 구출하려고 장난감이 밖에 있다고 유인한다

궁자窮子유~ 가출한 자식이 정신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아버지가 기다려준다

약초藥草유~ 평등한 비가 다양한 약초를 성장시키듯 수행자는 깨달음을 통해 성장한다

화성化城유~ 먼 길을 향해 떠나는 부하들에게 중도에 가상의 성으로 피곤함을 달랜다

의주衣珠유~ 만취한 사람은 친한 친구가 준 보주를 모르고 평생 곤궁하게 떠돈다

계주髻珠유~ 전륜성왕은 뛰어난 공을 세운 이에게 상투 속의 보주를 넘겨준다

의자醫子유~ 독을 마신 아들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해독약을 마신다

 

 

 

동화사 <극락구품도>(1841년, 비단에 채색, 170.5x163㎝,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8호)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에 극락세계 풍경을 기술한 <관무량수경>을 근거로 다수의 극락 그림(관경변상도 또는 관경16변상도)이 제작되었다. 이후 억불정책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동안 맥이 끊겼던 것이 조선후기에 새로운 형식으로 재탄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동화사 <극락구품도>이다. 그림 상단의 아미타삼존, 중단의 왕생 연못, 하단의 거대한 일원상과 벽련대 배치가 다른 시대의 극락 그림과 구별되는 큰 특징이다.

 

경전에선 부처님의 몸을 묘사할 때 흔히 자마금색, 자마황금, 염부단금 등으로 표현한다. 자금, 자마금 또는 자마황금은 상서로운 자색紫色이 감도는 최고 품질의 황금이라고 한다. 지구상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빛깔이다. 황금의 품질은 총 9급으로 나뉘는데 그중 최상급이 자마금이다. 주로 인도의 염부나무 숲속에 흐르는 강바닥에서 채취되는 사금이 자마금에 해당하여 이를 염부단금閻浮檀金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최고 최상의 빛깔에 아미타 부처님을 비유하고 있다.

 

 

용문사 <화장찰해도>(조선후기, 마본에 채색, 230×297㎝)

 
현존하는 수많은 불화와 달리 이례적인 도상을 보이는 작품으로, 추상적인 진리의 세계를 직관적이고 대담하게 표현했다. 거대한 원형 공간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선보인다. 이는 우주의 만물이 시공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며, 그 속에서 생성과 변화와 소멸을 거듭한다는 <화엄경>속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본 불화에서는 가장 외곽의 무지개색 원은 10개의 세부 층으로 구성되었다. 빨강, 파랑, 녹색, 황색 등으로 보이는 원의 레이어를 들여다보면, 각 레이어마다 다시 다채로운 색의 스팩트럼이 펼쳐진다. 비슷한 톤의 조금씩 다른 색깔들을 순차적으로 사용하여 강렬한 에너지가 확장되는 듯한 효과를 창출했다.

 

 

 

쌍계사 <노사나불도>(1799년, 마본에 채색, 1302×594㎝, 보물 제1695호)

 
높이 13미터가 넘는 거대한 괘불이다. 매년 한 차례 쌍계사에서 열리는 보살계 수계 대법회 때 대중에게 공개되는데, 장대함 속에 화려함과 섬려한 맛이 살아 있다. 양쪽 손목에서 아래로 길게 늘어진 천의 자락에 꽃과 잎사귀, 열매와 보주 등이 피어나는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전체적으로 색조가 밝고 투명해 화사한 느낌을 준다.

 

기존의 괘불 관련 논문이나 책자를 보면, 이같이 많은 장식을 한 존상을 보살님이라고 잘못 칭하는 경우가 많다.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보살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다. 물론 <노사나불도>의 존상은 보관을 쓰고 긴 보발을 늘어뜨리고 천의를 걸치고 영락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는 틀림없는 보살의 형식적 요소들이다. 반면 부처님은 법의法衣 하나만 정갈하게 걸치고 나발에 육계를 갖춘다. 부처임은 보관이라든지 장신구 등은 일체 하지 않음을 기본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존상은 어째서 부처님일까?

 

이처럼 부처이지만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잇는 특별한 존상을 노사나불(또는 노사나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여타 보살과 구분하는 요령은 수인手印을 보는 것이다. 노사나불은 설법을 하고 있다. 다시 본 작품을 보자. 양손 손가락의 엄지와 장지를 동그랗게 말아 살짝 맞대고 있는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노사나불은 '보살의 모습으로 설법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법주사 <팔상도>(도솔래의상 부분, 1897년, 비단에 채색, 191×95.5㎝)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을 여덟 장면으로 추려 그린 것을 팔상도라고 한다. 팔상도는 주로 대웅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되는데, 특이하게도 법주사에는 '팔상전'이라는 팔상도 전용 목탑 건축물이 존재한다. 법주사의 팔상도와 팔상전은, 그 자체로 불화 전통에 있어 팔상도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다양한 장면들이 한 화폭에 어우러져 있지만, 시선은 마야부인과 코끼리 탄 보살님의 두 장면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다. 마야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코끼리 탄 보살님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꿈이겠지만, 코끼리 탄 보살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야부인이 있는 속세가 꿈이다. 법계의 장면과 속계의 장면이 연결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태하는 생생한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연출된다.

 

팔상도의 감상 포인트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

룸비니 동산에서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

네 개의 정문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

성벽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상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는 상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상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

 

 

운흥사 <관세음보살도>(1730년, 마본에 채색, 292×206㎝, 보물 제1694호)

 
조선시대 불화의 특징인 녹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조선후기 관세음보살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18세기 전반 '붓의 신선'이라 불리며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불화를 담당했던 의겸 스님 작품으로 스님의 높은 정신적, 예술적 경지를 엿볼 수 있다. 동시대 다른 작품들이 다채로운 채색을 활용한 반면, 이 작품은 채색의 강약을 과감히 조절하고 산수화 같은 배경 처리로 현실적 공간감을 부여했다.

 

대웅전 완공 불사와 더불어 거행될 대규모의 영산재에 대비하여 이때를 기려 제작된 일련의 불화들은 법당 장엄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전란 때 희생된 승병들의 영가추모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에서도 고아한 품격을 자랑하는 <관세음보살도>를 소개한다.

 

이 불화는 조선후기에 그려진 수많은 관세음보살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보통 조선후기 작품들은 색채가 진하여 심지어 탁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경향이 그러한데, 주로 녹색과 붉은색이 점점 진해져서 그림 전체가 농후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선 조선시대의 특징인 녹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보인다.

 

 

갑사 <삼신불도>(1650년, 마본에 채색, 1086×841m, 국보 제298호)


임진왜란이 끝난 뒤 희생된 뭇 영혼들을 달래주기 위한 대규모 공동 천도재 때 사용할 목적으로 16세기 전반부터 초대형 괘불이 제작되었다. 갑사의 삼신불도 역시 그중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회통적 세계관을 구현한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0여 년 전 개산대제開山大齋와 함께 거행된 영규대사 추모재 때 펼친 이후 현재는 보수 중이며, 언제 다시 펼칠지 기약이 없다고 한다.

 

높이 12.47미터, 너비는 9.49미터로 장정 30명 이상 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이 초대형 괘불은 전란 때 사망한 전사자들을 비롯해 바다와 육지에서 희생된 뭇 영혼들을 위한 대규모 공동 천도재 때 사용된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천 수백 명의 영가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불단이 필요했다.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끊임없이 사찰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에 법당은 역부족이었다. 이에 야외에 불단이 차려지고 십 리 밖 멀리에서도 볼 수 있는 초대형 크기의 괘불이 허공에 걸리게 되었다. 이처럼 법당이 좁아 대중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때, 야외에 단을 차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야단법석이라고 한다.

 

 

 

직지사 <삼불회도>(약사불도,석가모니불도,아미타불도,1744년,마본에 채색,보물 제670호)

대웅전 불존 조각상 뒤의 후불탱으로 세 작품이 하나의 세트로 제작된 것이다. 전체 구도는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영산회상이 있고, 동쪽으로 약사불의 동방유리광정토와 서쪽으로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도가 위치해 있다. 이 세 부처(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현실에서 민중들의 가장 큰 신앙 대상이었는데, 이러한 현실적 요구가 조형으로 구현된 것이다.

 

보통 법당에 걸리는 후불탱은 앞의 조각상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의 불상과 겹쳐져서 후불탱의 부처님이 상반신만 조금 보이거나 아예 안보이기도 한다. 또 공간이 비좁아서 후불탱과 조각상이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 불단의 옆이나 조각상의 뒷면을 기웃거려야 겨우 후불탱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직지사 대웅전의 경우에는 후불탱과 조각상 불존들의 전모가 십분 드러나게끔 배치하였다.

 

 

안양암 <지장시왕도>(1930년, 비단에 채색, 407×238cm, 서울특별시문화재자료 제16호)


괘불의 주제는 노사나불이거나 석가모니불인 경우가 많고, 그 구성도 간단한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부처가 아닌 지장보살을 주제로 삼고, 한 화면에 여러 시왕들과 지옥의 풍경 등장시킨 매우 독특하고 보기 드문 구성의 작품이다. 도상의 본연적인 의미를 십분 살리면서도, 흥미로운 회화성과 과감한 표현력을 내뿜는 창의적 작품이다.

 

무간지옥에서 무간無間은 '사이가 없다'라는 뜻인데, 고통이 쉬지 않고 계속되어 간극이 없다는 의미이다. 산스크리트 아비치(Avici)의 어원을 갖고 있는데 이를 음역하여 아비지옥이라고도 칭한다. 규환지옥叫喚地獄은 고통스러워서 울부짖는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옥을 말한다.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합쳐놓은 것 같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상을 일컬어 아비규환이라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큰 무쇠솥에는 쇳물이 펄펄 끓고 있고, 야차는 차례로 대기하고 있는 중생들을 한 명씩 집어 들어 거꾸로 처넣고 있다. 여기에 떨어지면 뜨거운 쇳물에 삶기는 고통을 받게 된다. 부처님의 계율을 깨뜨리거나, 불을 질러 많은 생명을 죽이거나, 불에 태워 살생을 하거나 그 고기를 먹은 자가 가는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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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 - 여성의 삶을 말하다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유향 지음, 김지선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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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列女傳)>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여성 전기집으로 총 104조목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유향은 경학가로서 오경五經에 통달했는데,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좌전左傳>,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사기史記> 등 여러 서적을 두루 참조해, 여성과 관련한 사적을 기록한 <열녀전>을 편찬했다. <열녀전>은 제목 그대로 여러 여성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절개를 지킨 열녀烈女의 행적을 선양하기 위해 쓴 <열녀전烈女傳>과는 다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옛날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향은 여성의 유형을 일곱 가지로 나누었다. 자식을 잘 키운 여셩, 현명한 여성, 인자하고 지혜로운 여성, 지조가 곧고 순종적인 여성, 절개와 도리를 지키는 여성,  언변이 뛰어나고 사리에 통당한 여성, 나라를 망하게 한 여성 등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해 이를 <모의전母儀傳>, <현명전賢明傳>, <인지전仁智前>, <정순전貞順傳>, <절의전節義傳>, <변통전辯通傳>, <얼폐전孼嬖傳> 순으로 담아냈다.

 

책 안에 수록된 여성의 신분도 다양하다. 즉 신화적 인물이나 왕후, 재상, 장군, 학자의 어머니 혹은 아내는 물론, 평민, 유모, 시녀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의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을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최초로 여성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얼굴도 모른 채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몹쓸 병에 걸려 있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가 과부가 되기도 하며, 전쟁에서 나라가 패하자 어쩔 수 없이 적국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모시던 공자를 살리기 위해 친자식을 희생시킨 어머니, 죽음을 무릅쓰고 충정을 지킨 아내의 시녀, 남편이 자신을 떠났음에도 의리를 지키며 시어머니를 봉양한 며느리 등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단지 규방 안에만 머무르지 않은 여성들도 있다. 소위 '어려서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삼종三從의 예禮를 무너뜨리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내보이기도 했다. 비록 상대가 왕이라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처사를 당하면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고, 부당한 판결에 조목조목 따지며 문제를 해결했다. 또 신랄한 비판으로 오만방자했던 남편을 변하게 만들거나,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행동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낸 현명한 아내도 있었다.

 

이 책은 남성 학자의 시각에 입각하여 편찬된 여성 전기이므로 당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자연스레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 책이 때로는 지배계급이 여성의 행동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왕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자신의 코를 베어버린 과부나, 규방의 예를 따라야 한다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인 이야기는 다소 불편할 정도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꾸미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이 들어 있다.

 

 

 

 

며느리를 재가再嫁시키다

 

위衛나라 정공定公의 부인 정강定姜은 아들이 장가들어 자식도 없이 죽자 그 며느리를 재가기켰다. 그녀는 며느리가 3년 상을 치르고 나자, 재가를 보내며 직접 교외까지 나가서 전송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아끼는 정과 서러운 마음을 담아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어 읊었다.

 

제비들은 날아올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누이 시집가는데 멀리 교외에서 전송하고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눈물이 비 오듯 흐르네.

 

<열녀전>의 시작은 <모의전母儀傳>이다. 즉 어머니로서의 모범을 보인 여인을 다루고 있다. 여성의 역할 중 가장 주요하게 본 부분이 바로 '어머니'였다. 삼종三從의 예를 깨뜨리고 적극적으로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인 어머니를 소개하고 있다. 정강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자 며느리에게 수절을 강요하지 않고 재가를 시켰다. 이는 진정으로 여성을 이해하고 너그러운 심성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결단력이었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다

 

"현명한 자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많다. 특별히 스승이나 벗만 서로 갈고닦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배필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 유향

 

제강齊姜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딸이자,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부인이다. 문공의 아버지 헌공獻公은 여희驪姬를 빈으로 맞아들였다. 권력을 잡은 여희는 유능한 태자 신생을 모함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중이 공자(문공)는 숙부 호언와 함께 북방 오랑캐 땅으로 도망쳤다. 망명길로 가던 중 제나라에 이르자  제나라 환공이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고 극진한 대접을 하며 이곳에 머무르게 했다. 

 

한편, 헌공이 죽자 진나라의 내부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동안 권력을 누렸던 여희는 백성들로부터 증오를 받고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든 이극 등이 여희 세력을 축출하고 중이에게 귀국해서 나라의 적통을 이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중이는 편안한 제나라에 눌러 앉고 싶어 했다. 이를 간파한 숙부는 진나라로 데려가려고 수행원들과 모의를 했다.

 

때마침 누에를 치는 아낙이 그 모의를 엿듣고 제강에게 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강은 그 아낙의 입을 막고자 살해한 다음 공자에게 수행원들을 따라가서 진나라의 보전에 힘쓰리고 재촉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그녀는 숙부와 모의해서 중이를 술에 취하게 만든 후 몰래 수레에 태워 보냈다. 결국 길을 떠난 중이는 여러 나라를 거쳐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 목공穆公은 군대를 호위해 중이가 무사히 진나라로 입국하도록 도왔다. 이후 중이는 왕으로 옹립되자 제강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마침내 천하를 차지해 맹주盟主가 되었다.

 

 

왕에게 남녀유별의 도리를 설파하다

 

위魏나라 곡옥曲沃에 사는 대부 여이如耳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秦나라가 위나라 공자 정政을 태자로 세우자, 위나라 애왕哀王은 사자를 보내 태자에게 비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왕은 그만 욕심이 생겻다. 즉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노파는 아들 여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 부자간의 유별을 어지럽히는데 어째서 바로잡지 않느냐? 지금 위나라는 강하지 않은데, 왕까지 도리를 어기고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보전하겠느냐? 네가 간언하지 않으면 위나라는 반드시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재앙이 일어나면 필경 우리 집까지 미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이를 간언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제나라 사신으로 떠나게 되자, 노파는 궁궐의 문을 두드려 왕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마침내 대면한 노파는 태자의 비를 왕의 후궁으로 삼으려 하는 일은 정절을 지켜야 할 여인의 도리를 훼손하고, 남녀 간의 유별을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당장 멈추라고 간언한다. 그래도 왕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었나 보다. 왕이 말했다.

 

"그렇군, 과인이 미처 몰랐소"

 

 

 

죽은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부인은 제齊나라 왕의 딸이다. 선공에게 시집가던 도중 성문에 이르렀는데, 불행하게도 선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함께 수행했던 보모가 제나라로 귀국해도 무방하다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위나라에 입국해 삼년상을 지켰다. 이후 선공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그녀에게 함께 살자고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이 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위나라 왕은 제나라에 있는 그녀의 형제에게 전통을 보내어 이를 설득해달라고 했다. 이에 친정의 형제들은 모두 지금의 왕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끝내 그녀는 "오직 부부만이 한 살림을 찰릴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이런 시를 지었다.

 

내 마음 돌이 아니니 굴릴 수 없고,

내 마음 돗자리 아니니 말 수도 없네. 

 

재난을 당하고 궁색한 처지에 놓여도 가엾게 여기지 않고, 고되고 치욕스러워도 구차하지 않은 연후에야 스스로 도리를 실현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뜻을 잃지 않아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식을 희생해 효공을 살려내다

 

효의보孝義保는 노魯나라 효공 칭稱의 보모이자 장臧씨의 과부이다. 효공의 아버지 무공武公은 주周나라 선왕宣王을 알현하러 갔는데, 이 자리에서 선왕이 차남인 희를 노나라 태자로 삼았다. 그가 바로 의공懿公이다. 효공은 당시 공자 칭으로 불렸는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 이에 의보는 자신의 이들과 함께 궁에 입궁해 공자 칭을 키웠다. 그런데, 무공의 장남 괄의 아들 백어가 난을 일으켜 의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공자 칭을 죽이려고 했다.

 

이때 보모 의보는 자신의 아들에게 칭의 옷을 입히고 칭의 잠자리에 누워 있게 했다. 백어는 의보의 아들을 죽여 후환을 없앴다. 한편, 의보는 칭을 안고 궁 밖으로 탈출해 멀리 도망갔다. 11년이 지나 노나라 대부들이 칭이 생존해 있음을 알고 백어를 죽이고 칭을 새로 왕으로 추대했다. 바로 효공이다.

 

 

독이 든 술을 엎어 주인에게 충성하다

 

주周나라 주충첩은 주나라 대부의 아내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시녀였다. 대부는 뱌슬살이를 한 지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내는 다른 사내와 사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를 독살할 계획을 짰다. 이를 눈치챈 시녀는 독이 든 술을 남편에게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인의 행동을 고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척하며 술병을 엎질렀던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대부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자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욕되게 죽었고 저 혼자 살아남았으니 이는 무례無禮이고, 주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역례逆禮입니다. 예의가 없거나 예를 거스르는 일 가운데 하나만 범해도 충분히 잘못인데, 지금 두 가지를 모두 저질러야 한다면 앞으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겁니다"

 

"충직한 시녀는 어질고 신의가 도타웠다"

 

 

걸왕과 말희 

 

 

여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다

 

이 책의 마지막 편은 <얼폐전>이다. 이는 음란하고 사악하며 나라를 망친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타의 모범이 되는 사례를 책에 담았음에도 이처럼 부정적인 행실을 굳이 보여준 이유는 아마도 반면교사의 교육 효과를 기대한 듯하다. 얼은 '재앙'이라는 뜻이고, 폐는 '총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의 총애를 받은 여인은 화근이자 악녀惡女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나치게 특정 인물을 총애하다 보면 배은망덕하게도 큰 사고를 치고 만다. 탄핵받은 대통령이 이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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