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블랑카는 알바 나이에 맞지 않는 책들도 있으므로 독서도 가려서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렇지만 하이메 외삼촌은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책은 절대 읽지 못하며, 만약 그 책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건 이미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다는 걸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하이메 외삼촌은 목욕과 식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론을 갖고 있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알기 때문에, 만약 알바가 목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건 목욕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이며, 애가 배가 고플 때는 뭐가 됐든지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0)

알바는 그때까지 죄악이라든가 젊은 요조숙녀들이 지켜야 할 바른 몸가짐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도 구분할 줄 몰랐다. 외삼촌 한 명은 복도에서 벌거벗은 채 가라테를 한답시고 뛰어다니고, 다른 외삼촌 한 명은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지내고, 외할아버지는 지팡이로 전화기와 테라스에 있는 화분들을 박살내고 다니고, 엄마는 촌스러운 가방을 들고 몰래 나갔다 들어오고, 외할머니는 삼각 테이블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고, 피아노 뚜껑을 열지 않은 쇼팽을 연주했다. 그런 것만 보고 자란 알바이니 당연히 틀에 박힌 학교 일과가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216-217)

대통령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앞으로 박해받을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심에 내 목숨 다 바쳐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조국과 조국의 운명을 믿습니다. 이 순간을 잘 극복하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보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유인이 지나갈 수 있는 드넓은 가로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입니다. 나는 내 희생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42-243)

알바는 군인들의 행동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중간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극우 쪽보다는 좌파에 더 가까웠다. 알바는 나라가 왜 내전 상태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은 군인들의 작품으로, 그들이 받은 훈련의 결정체이자 그들 직업의 빛나는 훈장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군인들은 평화 시에는 빛을 발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는 군인들이 병영에서 받았던 훈련과 맹목적인 복종, 무기 사용법, 그리고 일단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고 나면 습득이 가능한 다른 기술들을 실제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메모를 하면서 꼼꼼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다시 쓰려고 보니 이미 기억 속에서 많이 사라져 있더구나.  메모의 불분명한 내용은 다시 책도 뒤적거리기도 했단다. , 아빠의 짧은 기억력이 원망스럽구나. , 더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바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 동안 민란이 무려 75회나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그만큼 백성들은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야. 2권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신이 정권을 잡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했다면 백성들 지지를 받으면서 더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뇌가 없었어. 자시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급급했지. 그러니까 서로 치고 박고 죽이고 권력이 십 년 가기가 어려웠어. 이 때 일어난 난 중에 유명한 난을 두 개 이야기해줄게. 먼저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라는 곳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있었단다. 당시 행정 구역을 나눌 때, 급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급은 주현, 그 아래로 속현이 있고 그 아래 향, , 부곡이 있었단다.

=================

(31-32)

(이익주) 고려 시대 지방 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모든 군현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눠집니다. 가장 위에 있는 등급인,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을 주현으로 부릅니다. 주인 주() 자를 쓰지요. 그다음 등급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옆에 있는 주현으로부터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향, , 부곡이 있는데, 이 향, ,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좀 어려운 말로 잡척(雜尺)으로 부르지요. 이 작첩들은 일반 군현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세와 공물, 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유지를 경작하거나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생산해 국가에 납부하는 역을 더 지므로 살기가 더 힘듭니다. 사회적으로는 천대받고요.

=================

명학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 즉 급이 낮은 지역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으며 살았단다. 당시에는 이사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살아야 했어.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난을 일으켜서 관군을 투입했지만 관군은 패배하고 말았단다. 나라에서는 명학소를 주현으로 등극시켜주는 조치를 했어. 그러자 백성들이 너무 착했던지, 어리석었던지 백성들의 분노가 잦아들었지. 그렇게 난리가 수그러들자 관군은 망이, 망소이와 그들의 가족을 잡아가버렸어. 그제서야 다시 봉기를 했지만 리더가 사라진 봉기는 실패를 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주현'도 다시 명학소로 강등당했다고 하는구나.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또 하나 민란을 이야기해볼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노비의 난인 만적의 난이 이 시절에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망이 망소이의 난도 그렇고 만적의 난도 그렇고, 예전에 교과서에 나와서 이름들만 기억나는 그런 민란이란다. 만적의 난도 안타깝게 내부 배신자 때문에 실패를 했고나라에서는 이 난에 참여를 했던 100여 명을 모두 수장시켜 죽였다고 하는구나그래도 이런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민란이 계속 발생하자 향, , 부곡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1.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는데 실패를 했다는구나. 이 암살사건이 실패하고 나서 최충헌의 자신의 권력을 더 막강하게 했고, 암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위해 교정도감을 설치했는데, 이 교정도감이 나중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핵심적인 권력기구가 되었대. 그리고 그 교정도감의 우두머리를 교정별감이라고 했는데, 최충헌부터 4대 동안 교정별감을 세습했다고 하는구나.

신종이 죽고 제21대 희종이 왕이 되었는데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24살이었단다. 혈기 넘치던 시기에 왕이 되었는데, 모든 정권은 최충헌이 갖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들었겠지. 그래서 자객 10명을 시켜서 최충헌을 암살하려고는 시도를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단다. 그러자 최충원은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으니 그가 제22대 강종이었단다. 왕도 마음대로 폐위시킬 수 있는 권력이 최충헌에게 있던 거야. 왕 위에 교정별감이 있었던 거지. 강종이 왕 위에 오른 것이 60세였어그래서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단다. 고려 제23대왕 고종은 고려 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즉위했다고 하는구나. 46년간.

...

고종 3년 거란의 침입이 있었는데 관군이 변변치 않았어. 왜냐하면 유능한 장수는 모두 최충헌의 사병 소속이었거든. 그래도 사병이 얼마나 된다고 관군에 영향을 주냐고 할 수 있지만, 최충헌의 사병은 수만 명이나 되었대. 그 많은 사람들은 월급 주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얼마나 수탈을 해서 부를 챙겼을까 싶구나. 거란이 침입을 했지만 최충헌은 자신의 사병을 나라에 내주지 않았어그렇게 되자 화가 난 승려들이 최충헌을 상대로 군사를 난을 일으켰는데, 잘 훈련된 최충헌의 사병들을 이길 수 없었지. 이 난에 참여했던 승려들 800여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한편, 거란의 침입은 조충이라는 분께서 간신히 막았단다. 혼자 막은 것은 아니고 거란 위쪽에서 치고 내려오는 몽골족과 연합해서 막아낸 것이라고 하는구나.

자신의 개인 욕심만 채우던 최충헌은 장수를 누리고 71살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평생 자신의 권력에만 신경 썼던 최충헌. 그나마 다른 무신들과 달리 말년에 문인을 일부 등용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뿌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최충헌처럼 권력 욕심이 많은 사람의 후세들의 특징은 서로 싸우는 것... 역시나 최충헌이 죽고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어. 이 싸움에서 장남 최우가 정권을 잡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제 권력 욕심만 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몽골이 고려를 노리고 있었단다.


2.

앞서 거란의 침입을 이야기할 때조충이 거란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과 연합해서 거란을 물리쳤다고 했잖아. 몽골에서는 이 일로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했어고려에서는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단다. 몽골이 형이고 고려가 아우. 이 맹약 이후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어. 사신으로 왔던 제구예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몽골 사신 제구예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너머에서 죽은 사건이 일어났단다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몽골에서는 고려 사람이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책임을 물었단다. 고려로서도 억울한 일이었지. 압록강 밖이면 동진족, 여진족 등 외부 세력도 있었고, 몽골족 중에 원한이나 다른 이유로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 사건으로 고려는 몽골과 단절을 선언했단다.

약간은 무리한 선택이 아닌가 싶구나. 당시 몽골은 유럽부터 아시아 대부분의 땅을 정벌한 세계 최강 기마부대를 가진 나라였는데... 이 일이 있고 6년 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해 왔단다. 6년이나 걸린 이유는 그 동안 남송, 금나라를 공격하느라 늦은 것이란다. 남송과 사대를 맺고 있는 고려도 가만 둘 수 없으니 제구예 사건을 핑계로 고려를 쳐들어왔단다. 개경을 지나 충주까지 그래도 밀고 내려온 몽골군. 고려 관군이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단다. 이 때 백성들로 이루어진 초적들이 관군을 도와 몽골군과 싸웠단다.

=================

(102)

(최태성) 그 정체는 바로 초적입니다. 초적은 고려 민주이에요. 먹고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무리를 지어 도적질하는 무리가 된 거죠. 사실 이 초적들은 무신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몽골군이 오니까 무신 정권에 손을 내밀고 몽골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한 거예요. 심지어 마산, 이 마산은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인데, 그 마산에 있는 초적 우두러미 두 명이 직접 최우에게 와서 몽골과의 전쟁에 자기들을 써 달라고 자원합니다.

(류근) 초적들이 평소에는 관군들에 쫓기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라에 위기가 닥치니까 일단 묵은 감정은 접고 외적과 싸우자는 거네요.

=================

귀주성에서 박서, 김경손 등이 몽골군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뤘지. 아빠는 박서, 김경손이라는 분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분들인데, 엄청난 영웅이었더구나.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면 좋겠는데, 아빠의 기억력이 얼마나 버틸지

=================

(110)

(신병주) 귀주성의 승리는 이끈 김경손에 관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쏜 화살에 팔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김경손이 아주 중요한 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몽골군이 쏜 포탄이 계속 날아오자 부하들이 김경손에게 너무 위험하니까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권합니다. 근데 김경손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부하들이 동요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라면서 끝까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부대를 지휘하죠. 정말 대단한 장군입니다. 명장이죠.

(류근) 당대의 영웅이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거네요. 진짜 감동적입니다.

=================

하지만 고려는 역부족이었어. 결국 조공과 인질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었단다. 하지만 고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인질도 안 보냈어. 그리고 다시 항전 준비를 했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단다. 강화도로 옮겨 왕족은 대피할 수 있으나 육지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은 그대로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지.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최우는 반대 세력을 죽이면서까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단다. 백성들도 각자도생 한다고 산과 섬으로 피신했지만 역부족이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하는구나

...

몽골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단다. 최우는 강화도에도 몸 사리고 있을 때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몽골군은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단다. 몽골의 사령관 살라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은 대승이었어. 그래서 몽골은 잠시 물러나게 된단다.

1233년 홍복원, 필현보라는 사람이 서경성을 빼앗아 몽골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왕권이 상실되고 권력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으니 홍복원, 필현보 이 사람들도 아마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저런 짓을 한 것 같구나. 하지만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너무 나쁜 사람들이구나. 홍복원은 몽골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고려 침입의 선두에 섰다는구나.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이 약 5년간 이어졌단다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볼 수 있어. 이 때 경주 황룡사 구층탑과 초조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말았대그리고 불심의 힘으로 외세를 몰아내고자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도 이 때라고 하는구나몽골의 3차 침입은 본국에 있던 대칸이 죽으면서 철수를 했다고 하는구나

1247년 몽골의 4차 침입이 있었는데, 이 때도 2년만에 대칸이 죽어 철수를 했고,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있었단다. 이때는 칭키스칸의 조카 예쿠와 홍복원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어. 예쿠는 몽골 진영 내 내분이 일어나서 금방 돌아가고 홍복원이 혼자 군대를 지휘했다고 하는구나충주성에서 김윤후가 다시 대승을 거두어 몽골은 다시 물러났다고 하는구나. 처인성에서 활약을 했던 김윤후가 이번에는 충주성에서... 김윤후라는 분은 다시 봐야겠구나

=================

(179-180)

(신병주) 후대의 역사는 김윤후가 높이 평가받기에는 상당히 불리한 여건으로 지속됩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에 저항한 인물이니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려웠고,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승려인 김윤후가 크게 활약한 것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에 김윤후를 언급할 정도로 그 당시에 많은 백성 사이에서, 특히 의병장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윤후가 대몽 항쟁의 상징으로 분명히 회자되었다는 거죠.

=================

1254년 몽골의 6차 침입이 있었고,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에 머물면서 온갖 노략질을 했단다. 1258년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지배를 하기 시작했지. 고려가 몽골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냈지만결국은 역부족이었던 거지. 당시 고종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가 몽골 칸을 만나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에 갔단다. 그런데 칸이 죽고 동생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게 되었어. 원종은 어느 동생 편을 드는 것은 고려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어.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쿠빌라이가 다음 칸이 되었거든. 칭키스칸 다음으로 유명한 그 쿠빌라이 칸을 원종이 찾아간 것이지.

...

한편, 당시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가 잡고 있었는데, 문신인 유경과 무신인 김준이 손을 잡고 최의를 제거하였단다. 그렇게 최의가 죽으면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단다. (1258) 그런데 김준은 혼자 권력을 잡고 싶었는지 유경을 죽이고 전권을 잡았단다.

....


3.

원종이 몽골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 고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단다. 쿠빌라이 칸은 원종에게 왕을 임명하고 고려로 보내주었단다. 이 때부터 고려가 몽골에 사대하기 시작한 것이야. 이 때 원종이 쿠빌라이와 맺은 강화 조약은 비록 고려가 전쟁에서 지고 나서 맺은 조약이지만, 당당한 요구도 포함되어 있어 외교적으로 성공한 강화조약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하구나. 원종이 쿠빌라이와 친분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했고, 쿠빌라이도 이를 흔쾌히 받아준 것 같아. 그것으로 인해 그 이후에도 몽골이 고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하는구나.

=================

(216)

(이익주)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평가할 때는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제국이라는 점,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 가운데 국가를 유지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 고려라는 국가를 유지하게 한다는 쿠빌라이 칸의 약속을 뒷날 세조구제(世祖舊制)로 부르는데, 고려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고려 측에서는 세조구제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반대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점에서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죠.

=================

원종이 고려로 돌아왔을 때 정권은 김준이 잡고 있었는데원종은 임연이라는 사람을 이용하여 김준을 제거했단다. 그러자 이번에는 임연이 권력을 차지하고 원종까지 폐위를 시켰단다. 칼 잡은 자들의 끝없는 욕망을 보고 있는 듯하구나. 이 소식이 몽골에 있는 쿠빌라이의 귀에 들어갔어원종과 쿠빌라이는 돈독한 사이인데 원종을 폐위시켜? 쿠빌라이는 압력을 행사했고 원종은 복위를 했단다. 복위한 원종은 다시 쿠빌라이를 만나러 몽골에 갔단다그리고 몽골 군대를 빌려와 임연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지. 그런데 임연은 등창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길고 긴 무신정권이 끝이 나고 말았단다. (1270)

원종은 태자를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을 시켰단다앞으로 고려의 왕이 될 태자가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된 것인데, 이것은 이후 한동안 쭉 이어졌단다그런데 이런 원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어.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였단다. 원래 삼별초는 무신정권 때 만들어진 조직으로 치안을 담당하고 도적을 잡는 조직으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이루어졌단다. 이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배중손은 원종이 몽골에 강화조약을 맺은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계속 항전했던다. 또다른 왕, 온왕도 세웠어.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는데,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주둔지를 세웠어. 삼별초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세를 키워나갔단다. 몽골군과 싸워서 승리하기도 했어하지만 몽골과 고려관군의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패배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왕으로 세웠던 온왕이 죽고 배중손도 진도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돼. 배중손을 뒤이어 김통정이라는 사람이 남은 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향했단다. 몽골에서 회유를 했는데 거절했고, 몽골은 다시 대규모 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공격했어. 그렇게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삼별초마저 결국 제주도에서 궤멸하고 말았단다. 하지만 삼별초와 이를 지지했던 백성들의 항전은 잘 기억해야 할 것 같구나.

=================

(252)

(이익주) 우리가 흔히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삼별초만의 항쟁이 아니라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전 백성의 항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고 해서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죠. 고려가 28년 동안 몽골과 싸운 점, 강화를 통해 왕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항몽도 종합적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


PS:

책의 첫 문장: 1170년 무신 정변이 일어나고 한동안 무신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역사를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면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보인다는 사실을 삼별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됐습니다.


(신병주) 한때는 국사 시간에 향*소*부곡을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르쳤는데, 최근에 바뀌었어요.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가장 큰 구분점은 국역을 지는지 안 지는지입니다.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일단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죠. 다만 하는 일이 천역(賤役)이어서 일반적인 양인과는 좀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소라는 지역은 수공업을 전문으로 해서 물품을 조달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금소에서는 금을 생산하고, 은소에서는 은을 생산하죠. - P33

(이익주) 다소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최충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왕실은 그대로 두고 그 권위를 이용하면서 자기의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세습까지 했죠. 그래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가 권력을 4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 P76

(이익주) 고려에 호감이 있었다기보다는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알았다는 점이 컸을 겁니다. 훗날인 1259년에 고려 태자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그때 쿠빌라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에 당 태종이 친정했어요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나에게 왔으니 이건 하늘의 뜻이다."
(류근) 진짜 고려를 고구려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 몽골이 그 정도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는데도 패권 국가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고구려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간 보기 정도로 형제가 되자는 카드를 내밀어 본 거 같아요.
- P87

(신병주) 그래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란이 많아요. 강화 천도가 전략적 천도인지 도피성 천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전략으로 보는 쪽은 강화 천도가 항전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강조하고 해석합니다. 강화도라는 천연의 요새에서 오랫동안 버팀으로써 몽골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반면에 도피로 보는 쪽은 어차피 몽골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우라는 집권자가 자기 안위를 위해 안전이 보장되는 강화도로 천도했다고 해석하죠. 이런 지적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무렵에도 여전히 초적들이 준동하고 백성들이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몽골이 아니더라도 최우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 거예요. -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0)

이 깊은 곳에는 열수분출공이라는, 일종의 심해 생물들의 놀이터가 있는데 거의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는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심해에는 독일 과학자가 광합성할 만한 태양조차 없다. 지상의 생명체들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듯이 심해의 생물들은 바로 이곳을 근원으로 생존한다.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을 먹고 사는 세균들이 있는데 이들이 똥을 싸면 그게 바로 심해 생물들이 먹을 수 있는 탄수화물이다. 태양의 광합성이 없이 탄수화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게 세상의 진리다.


(69-70)

미래에서 온 관광객이 아직까지 없다는 점이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미국의 한 과학자는 타임머신이 일종의 체크포인트 역할을 해서 최초의 기계가 가동을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가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의 시작점이 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 타임머신이 작동되기 전의 과거는 타임머신상에서 없는 시대이며 오직 타임머신이 작동된 이후만 자유롭게 시공간을 오갈 수 있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직까지 미래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일리가 있다. 미래에서 봤을 때 지금 우리 시대는 돌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는 것이니까.


(90)

서울에 사는 결혼적령기의 한 남성의 경우, 서울의 인구를 1,000만 명이라고 가정하고 이 중 50퍼센트를 여성이라고 하자. 남성의 출퇴근하는 방법이나 동선에 따라 지나가다 이성을 만날 확률은 달라지겠지만 1퍼센트 정도라고 하면 이미 대상자는 5만 명으로 줄어든다. 같은 결혼적령기 여성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대상자의 나이 분포를 1세부터 100세까지 일정하다고 했을 때 15퍼센트 정도와 나이가 맞을 것이다. 비슷한 교육환경에 있을 확률은 1퍼센트 정도로 보고 매력을 느낄 확률은 5퍼센트, 서로 만날 때까지 살아 있을 확률 10퍼센트까지 계산을 하면 고작 0.375명이 이 남자와 연애 가능한 여성의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1명도 되지 못했다.


(113)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게 바로 이 현기증 뉴런 때문이다. 심해지면 두통이나 현기증까지 나기도 하지만 일단 현기증 뉴런이 활성화되면 불쾌하고 울적해진다. 반대로 음식을 먹어서 현기증 뉴런이 작용을 멈추게 되면, 뇌에서 보상회로가 가동되면서 평소에 먹던 음식이라고 해도 더욱 맛있게 느끼게 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맞다.


(117)

당신의 뇌는 매우 똑똑해서 혹시나 운동으로 평소보다 더 많은 칼로리가 소모되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당신이 더 많은 칼로리를 먹도록 만든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 라면을 끓여서 먹어보아라. 몇 젓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라면은 국물만 남아 있고 바로 하나를 더 끓여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 평소보다 더 먹도록 뇌가 유인하기 때문이다.


(137)

그리고 그 흔적은 당신에게도 남아 있다. 바로 흰자. 달걀 노른자 흰자 말고 눈동자의 흰자 말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은 눈에 흰자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흰자가 눈동자에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흰자가 많다고 시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동공이 크면 클수록 시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흰자가 많으면 보는 성능이 떨어진다. 그럼 왜 이렇게 불리한 상황을 감당하면서도 흰자가 많아진 걸까? 역시 뭔가 이득이 있을 것이다.

흰자가 있다면 멀리서도 상대방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서로 마주 본다는 것도 느낄 수 있고 소통하는 데 눈짓이 굉장히 많이 쓰인다. 눈동자의 방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서로가 잘 길들여졌다는 증거로 이만한 게 어디 있을까?


(175)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전자는 단백질을 조립하는 매뉴얼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을 제대로 조립하기 위해서 특이하게 생긴 레고블록 같은 것을 이용하는데 이걸 아미노산이라고 부른다. 출신이 고작 블록 조각 비스무리한 녀석이라 아무리 백날 열심히 조립을 해도 단백질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들은 못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 원래 단백질은 하늘을 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을 아무리 잘 조립해도 하늘을 날지 못한다.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218)

우선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가상화폐라는 표현부터 마음속에서 지우자. 가상화폐는 마치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통화와 같은 느낌이다. 정확하게는 암호화폐라고 한다. 단어의 핵심은 암호이며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필이면 최초로 발행된 비트코인이 화폐 기능에만 집중한 암호화폐다 보니, ‘실물화폐 대신 가능성만이 암호화폐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 덩달아 블록체인 기술마저도 가짜 화폐를 만들어내는 위조 수단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실물화폐의 단순한 대체품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기존 화폐의 역할을 그대로 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탈중앙화와 암호화라는, 상당히 불가능한 상황을 동시에 만족하는 방법을 찾아낸 해결사다. 바로 블록체인이라는 기술로 말이다.


(222)

거래 내용에 대한 신뢰도를 보증하는 중앙이 없고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 개개인이 모든 거래 내역을 기록하고 확인한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암호화에 도달한다. 기존의 보안 방식이 최대한 복잡하고 많은 자물쇠를 금고에 빽빽하게 거는 형태라면, 블록체인을 이용한 이 방식은 금고 자체를 전 세계를 셀 수도 없이 많은 곳에 뿌려두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금고들은 정기적으로 암호가 바뀌며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를 옮겨다닌다. 내가 해커라도 맥이 빠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를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는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그리고 광종, 천추태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있었잖아.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강조가 막아내려고 했으나 패배하고 개경까지 함락이 되었잖아. 그리고 당시 왕인 현종은 나주까지 천도를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지. 2권에서는 이 이야기부터 다시 해주었단다. 이때 고려가 나주로 몽진한 것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른 전략적 결단이었다고 하는구나. 조선 선조의 무작정 도망과는 다른 몽진이었어.

=========================

(42)

(류근) 제가 처음에는 몽진이라는 말만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조선) 선조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선조의 몽진이 지극히 보신적 도망이었다고 한다면 (고려)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분석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잖아요. 어떤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에 걸맞는 대안을 사유해 내는 능력을 보여 준 건데, 이래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거예요.

=========================

자 그럼 그 다음 이야기를 해줄게. 다행히 사신 하공진이라는 사람이 거란을 설득을 해서 거란은 개경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때 하공진도 인질로 같이 거란 진영으로 끌려갔단다.

..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필두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단다. 세 번째였어. 이때는 강감찬 장군이 분비를 잘 해서 흥화진이라는 곳에서 승리를 했단다. 그래도 거란은 강감찬 장군을 피해서 개경까지 접근했지만, 거란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군의 대피로 다시 퇴각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 거란의 퇴각은 쉽지 않은 길이었단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준비하고 있었거든. 거란 군대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한테 대패하고 세 번의 침략은 끝이 났단다. 이후 약 100년간 거란은 고려를 쳐들어오지 않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하는구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를 했을 때 나이가 72살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야말로 노익장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1104년 고려 제15대 숙종 때 이번에는 여진이 침략을 했단다. 이때 윤관 장군이 있었는데, 윤관의 제안으로 별무반을 조성해서 여진 공격에 대비하자고 했단다. 별무반이 정비가 되고 1107(예종 때)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했다고 하는구나.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해서 동부 9성을 차지를 했대. 역사 기록에 동부 9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하는구나. 다만 조선 세종 때 출간된 <지리지>에 따르면 두만강 북쪽 지역이 맞을 것이라고 했어. 이 지역이 세종 때 개척한 6진과도 같은 위치였거든.

그런데 멀어서 운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2년 만에 동부 9성을 여진에 반환했다고 하는구나.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 아쉬운 결정이구나. 그래도 이런 결정 때문에 당시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송과 거란을 침략하면서,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1.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이자겸이라는 외척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자겸은 제16대 왕 예종의 장인이고,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안 가는 관계인데, 아무튼 인종은 이모랑 결혼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이모 두 명이랑 결혼을 했어. 이렇게 두 왕의 장인인 이자겸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어. 이자겸은 인주(오늘날 인천) 이씨였는데, 그 전부터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란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너무 세다 보니 더 이상 볼 수 없고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을 공격했단다. 하지만, 이자겸의 반격에 인종은 신하 10여 명만 데리고 도망을 갔단다. 이 때 궁궐이 다 불타기도 했대. 이 사건을 역사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단다. 도망간 인종은 이자겸에서 왕위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자겸은 거절했단다. 지금처럼 왕의 뒤에 앉아서 권력을 독식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인종은 이번에는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했단다. 결국 이자겸은 지지 기반을 잃게 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고 얼마 안 있다 죽었다고 하는구나. 이자겸이 영광에 유배 갔을 때 말린 생선을 먹었는데, 그 생선에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 생선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영광 지역의 특산물인 굴비란다.

=========================

(107)

(류근) 근데 제가 인터넷에서 이자겸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연관 검색어가 나와요. 영광 굴비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자겸이 영광에서 말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비록 귀양을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겁니다. 그 생선이 바로 영광 굴비고요. 굴비가 한자로 굽힐 굴()자에 아닐 비() 자래요.

=========================

이후 척준경도 탄핵되어 귀향을 갔다고 하는구나.

, 이번에는 묘청의 난을 이야기해보자꾸나. 묘청이 원래는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대. 서경은 오늘날 평양인데,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는 것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좋고 여진을 공격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하자고 했어. 시인으로 유명한 정지상, 백수한 등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지지했단다. 그에 반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반대를 했지.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에 와서 서경의 입지 조건을 함 봐달라고 했고, 인종은 실제로 서경에 가려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가는 길에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대. 그리고 이 천재지변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라면서 서경 천도는 안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되니 묘청은 난을 일으켰단다. 묘청은 서경 천도에 진심이었나 보구나.

이 소식을 들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지지했던 정지상, 백수한을 왕명도 없이 참수해 버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정지상, 백수한은 개경에 있었거든. 이는 분명 과잉 진압이었는데, 정지상에 대한 사적 복수라는 이야기도 돌았다고 하는구나. 묘청의 난은 묘청의 측근 조광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단다. 조광이 묘청을 죽였거든. 뒤늦게 조광은 자신도 처벌 받을 것을 알고 약 일 년 간 저항했지만, 토벌대장 김부식이 이끌고 온 부대에서 패배하고 말았단다.

삼국사기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던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토벌대장이기도 했단다. 예전에 아빠는 다른 역사책에서 알게 되었는데, 정지상까지 자기 마음대로 죽였다니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구나. 묘청의 난이 1135년에 일어났는데,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시작해서 1145년에 완성했다고 하는구나.


2.

18대 왕 의종 때가 되면 고려 문신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그런 시대가 된단다. 지위가 낮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무신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하극상도 빈번했어. 의종은 이런 것을 좀 조정해야 하는데, 문신들하고만 술파티를 벌이는 등 주지육림에 빠졌고, 의종과 문신들의 파티에 볼거리로 무신들이 수박희라는 결투 경기를 벌여야 했단다. 무신들도 같은 신하인데 열이 받겠지. 불만이 고조된 무신들 중에 하급관리였던 이의방, 이고가 난을 일으키게 되었단다. 이의방과 이고는 하급관리다 보니 고위급 무신 인사인 정중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정중부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면 난이 시작되었단다.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의종을 지켜줄 이가 누가 있겠어. 의종은 무신들의 의견을 모두 받아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의종을 보좌하던 환관들이 무신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어. 그런데 환관들 중 한 명이 배신을 하면서 무신들이 환관의 계획을 알게 되어 오히려 환관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단다. 무신들은 환관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죽였는데, 3일 동안 140에서 150명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세웠는데 그가 제19대왕 명종이란다.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세워진 왕으로 허수아비 왕이었어. 무신들은 무신회의기구인 중방을 만들었고, 이 중방이 최고권력기구가 되었어. 무신들은 논공행상을 따지다가 자기들까지 다투게 되는데, 이의방은 이때 반대파를 숙청했는데, 함께 무신의 난을 주도했던 이고도 이때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들의 내분을 지켜보던 문신 김보당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는데 금방 진압이 되었단다. 그런데 김보당은 죽기 전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문신들이 난에 참여했다고 했어. 그래서 무신들은 또다시 많은 문신들을 죽였단다.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때 이의방의 부하 이의민은 유배가 의종을 찾아가 죽였다고 하는구나.

이의방은 무신의 일인자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어. 하지만 이의방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정중부와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실권을 잡았어. 이때 정중부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어. 무신들 사이에서도 일흔 넘어서도 권력을 탐내는 정중부를 좋게 보지 않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 5년간 이어진 정중부 정권은 25살 청년장수인 경대승에 의해 끝나고 만단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어. 하지만 경대승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경대승의 꿈에 죽은 정중부가 나온 다음 병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경대승이 죽고 나서는 명종의 명에 따라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 권력은 13년간 이어졌단다.

이의민은 최충헌에 의해 죽고 말았어.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최씨 무신정권이 4 62년간 이어지게 된단다. 그런데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는 것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는구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일로 시작된 싸움이 커져서 최충헌이 이의민까지 죽였대.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십조라는 개혁안을 제안했대. 그런데 이 명종이라는 왕은 무신정권 초기 이의민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인데 여전히 왕을 하고 있구나. 무신정권을 잡은 이들은 벌써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말이야.

=========================

(210)

(신병주) 흔히 하는 말로 가늘고 길게 살자라는 신조에 딱 맞는 왕이에요. 명종이라는 왕은 1170년에서 1197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위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는 아마 1위일 겁니다. <고려사절요>를 쓴 사관들의 평가가 핵심을 찌르죠. “왕은 천품이 아주 나약하고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놀랍고 두려워하여 아주 심기가 약했다. 그래서 모든 군국의 기무는 무신들에게 견제 되었다. 심지어 회노애락까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명종으로서는 자기가 왕위를 유지하는 한 집권 세력은 누구로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적절하게 타협한 거죠.

=========================

그런데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동생 신종을 왕위에 세웠단다.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는 신종의 며느리, 그러니까 태자비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에 세우려고 했어. 이 일로 최충헌과 갈등을 빚었단다. 결국 최충헌과 최충수는 싸우게 되었고, 최충수는 최충헌에 의해 척살당하고 말았단다.

무신 정권이 문신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권력을 잡긴 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내지 않고 문신들처럼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탐욕을 부렸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당시에도 역사적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 무신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오늘 편지를 마치도록 할게.

=========================

(179-180)

(이익주) 무신 정변을 세 가지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 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가운데 무신과 기타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조금 멀리서 보면 무신 전체와 문신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멀리서 보면 무신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죠. 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중하층을 구성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무신 대부분의 원류입니다.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가 무신이 되고,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드디어 장악한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무신 정변으로 일어난 권력 교체를 중하층의 무신이 상층의 문신들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신 정변은 권력의 상하이동을 의미하고요. 이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지방의 향리층이 이후 전개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


PS:

책의 첫 문장: 고려의 11세기는 정변과 전쟁으로 시작된다.

책의 끝 문장: 그래야 후세의 평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박금수) 별무반은 기병을 강화한 특별 군대입니다. 크게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으로 나누고, 그 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 부대들이 있습니다. 강한 활을 쓰는 경궁군이 있고, 노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를 연결한 강력한 노를 쓰는 정노군이 있죠. 또한 돌을 그냥 던지기도 하고 돌팔매에 끼워 먼 거리를 던지기도 하는 석투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 즉 뿔로 만든 악기를 입으로 부는 이 대각을 불어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옆에서 죽어 나가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끊임없이 대각을 불어 추정되는 도탕군이 있는데, 도탕군은 돌격 부대인데도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어요. 그래서 이 도탕군의 임무는 적이 공격대형을 제대로 형성하기 전에 돌입해 분탕질을 치며 적의 기세를 꺾는 소수 정예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P55

(최태성) 이자겸의 본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인주입니다. 인주 이씨죠. 인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인천이에요. 인주 이씨는 대대적으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데, 가계도를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순종, 선종, 예종, 인종에게 시집을 간 인주 이씨 집안의 딸이 총 열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16대 왕 예종과 결혼 사람이 이자겸의 둘째 딸 문경태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바로 제17대 왕 인종이 되지요. - P85

(신병주) 묘청의 난을 이제까지는 개경파 대 서경파 또는 문벌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국제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수립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 P144

(이익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환관은 거세한 남성이고,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내리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환관은 우리가 아는 그 환관인데,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총애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 관료들입니다. 내시들은 늘 왕과 함께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시종하는 사람들이죠. 문벌 귀족의 자제들 또는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젊은 관료들은 내시가 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다른 개념인데,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군뿐 아니라 환관마저도 권력자로 만들어 놓아 그들과 함께하는 측근 정치를 해 왔던 것입니다.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7-28)

부분적으로 서양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 그러나 그건 좋은 거네. 중전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네. 우리는 너무나 오래도록 낡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왔다고 말이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서양의 영향을 받도록 우리들 자신을 방임하자는 말은 아니네. 우리가 많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어느 정도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네.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 접목하고 혼합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 독립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네. 그러나 그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 그게 문제네! 나는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네. 그러나 이제 내 아이들을 위하여 해답을 찾아내야만 하네.”


(49)

그는 옆으로 본 여자의 얼굴에 감탄했다. 참으로 잘생겼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는 청나라나 일본 장사꾼들도 본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체구가 작고, 중국 사람들은 피부가 누런 데다 머리칼은 더 까맣고 빳빳하다. 이 고상한 사람들이 어떤 불행을 타고 났기에 남들이 탐내는, 좁고 산이 많은 땅에 갇혀 있는 것인가! 만약 이 백성들을 평화롭게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꿈을 꾸게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그들은 노래를 만들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바야흐로 주위의 굶주린 나라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고, 문관인 동반은 점점 부패해 가고 있으며, 호시탐탐하는 서반은 또다시 밑으로부터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80)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나라는 노서아와 일본입니다. 이 두 나라의 통치자들은 탐욕스럽고, 그 국민들은 통치자의 속셈을 모릅니다. 더구나 그 나라들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작은 나라이므로 야심이 큽니다. 작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못하기 때문에 한번 야심을 품으면 무섭습니다. 일본은 큰 머리를 가진 작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야심이 없는 큰 나라와 맹방이 되어야 이 작은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청나라라 할지라도 지금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양 우방을 가져야 합니다. 이홍장은 이 점을 알고 우리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려고 협조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미국과 조약을 맺으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0)

그는 이제 백성들의 참모습을 소상히 알게 된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조선 사람들은 용감하고 강인했으며, 용기뿐만 아니라 감탄할 만한 낙천성으로 시련을 견뎌내고 있었다. 부처님한테서도 임금님한테서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조그만 행운에도 고마워하며 스스로 돕고 또 서로 도왔다. 거칠면서도 순박했고 폭풍우와 추위와 먹구름 아래서 자연과 맞서 싸웠지만 혼자가 아니라 나란히, 다 함께였다.


(179)

조선 왕조 제 26대 왕인 고종은 아직도 한창 나이의 청년이었다. 왕이 된 이래 대비 조씨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자랐다. 두 분 다 성격이 강했다. 대원군은 저돌적인 의지를 가진 사내였고, 조대비는 여자의 완고한 고집을 깊이 간직한 분이었다. 두 분다 그를 어린아이 취급했고, 따라서 그는 더디게 철이 들었다. 그는 이따금 두 분 사이에서 씨름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민씨 문중의 아름다운 규수를 왕비를 맞이함으로써 세 사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신세가 됐다.


(211)

조선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를 떨쳐 버리고 현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희망을 갖게 됐어요. 이제 조그만 나라도 과학과 가계의 힘으로 강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오.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당신네 나라에 유학을 시킨 다음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해야 하오.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대학을 세워야 합니다. 허나 민 대감의 힘이 이리 막강한데 역시 설득할 수 없을 게 분명하오. 민 대감이 중전의 조카니까요. 그 짐작이 틀렸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오. 두렵고 안타까운 추측이긴 하지만, 민 대감은 자기가 본 것에 겉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척할 거요. 개혁을 건의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은밀히 방해 공작을 꾸밀 거라는 얘깁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을 바로 그거예요.”


(236-237)

대감, 저는 애국잡니다. 저는 백성들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대감보다 더 우리 백성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농민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장본인입니다. 세금을 내는 것도 그 사람들뿐이에요. 우리나라에는 대감께서 서양 나라들에 있다고 말씀하신 그런 산업이 없으니까요. 이 나라에서는 모든 세금이 땅에서 나옵니다. 상감께서 새로운 개혁 정책, 다시 말해서 외교관이나 사절단, 새 기계 등속은 말할 것도 없고, 신식 군대니 우정국이니 대감께서 하셨던 그런 해외 순방이니를 추진하는 비용이 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모두 농민한테 세금 물린단 말입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이, 왕실은 누구 돈으로 그리 사치를 일삼는 겁니까? 궐 밖도 마찬가집니다. 보잘것없는 고을 사또까지도 대궐 같은 집에 사니까요. 게다가 중전마마의 외척이며 총애하는 측근들이며그 돈을 다 누가 치릅니까, 누가요? 바로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민들입니다. 자기네 것도 아닌 따, 어느 대지주의 것이라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그런 따 말이에요. 게다가 지주들은 세금도 내지 않아요. 세금을 내는 것은 그 땅에서 소작을 부쳐 먹는 천한 농민들이란 말입니다! 대감께선 한 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290)

모든 일이 흡족하게 마무리되자 궁왕은 장례일을 선포했다. 밝고 화창한 날씨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녀의 온갖 변덕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쾌활함, 용기와 명석한 두뇌, 심지어는 그 억센 의지까지도 사랑했다. 중전이 죽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조국의 옛모습을 영원히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 일본이 조선의 옛 전통과 언어, 생활 방식을 말살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298-299)

아아, 당쟁 때문이지. 그게 우리의 죄야. 어떻게 해야 적을 물리치고 자유를 지킬 수 있는지, 우리는 그 방법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간만 허비했어. 수세기에 걸친 당쟁이 우리나라를 분열시켜왔어. 분열되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거야. 우리 자신의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어. 이씨, 민씨, 박씨, 김씨, 최씨 같은 명문가도 사라졌고 실학파, 동학당 등도 다 쓰러졌어. 다행히 지금은 상하 귀천 없이 온 백성이 잃어버린 독립을 되찾는 갈망으로 뭉쳐 있다. 이제는 우리들끼리 서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놈들만을 미워하게 되었으니 아마 일이 좀 더 쉽게 풀리겠지.”


(357)

제 이야기는아버님께서 제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시게 되면제 이름을 영영 들으실 수 없게 되면이 아들 역시 하나의 갈대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갈대 하나가 꺾였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수백 개의 갈대가 무성해질 것 아닙니까? 살아 있는 갈대들 말입니다.”


(480)

아무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농민은 땅을 경작했고, 바닷가 어민은 고기를 잡았고, 선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운하와 강줄기에서 북적거리며 살았다. 그는 이 방대한 대륙과 수많은 민중이 자발적으로 혁명에 동원될 수 있을지, 혹은 그들이 진정 동원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커다란 의구심을 품었다. 생활은 풍습과 전통 속에서 그런대로 안정되어 굶주리지 않았고, 어쩌다 욕심 낳은 지주를 빼고는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찻집에서 그는 웃음소리와 재치 있는 농담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통통하게 살이 쪘고 아낙네들은 분주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를 적으로 하여 봉기한단 말인가? 그들이 요구는 단지 자기들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늙은이든 젊은이든 그에게 수차례 해 준 말이 있었는데, 국민을 다스린다는 것은 조그만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으니, 되도록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는 노자의 가르침이었다.


(563)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의 아늑한 방에서 연춘은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닿을 수 있는 연락망을 짜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승전에 대비하게 하여 일본이 쫓겨 가면 곧바로 기능을 수행할 정부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나라, 특히 미국에 있는 동포들을 분발시킴으로써 승리를 촉진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수백 년 동안 조선의 해안과, 산지에 감추어진 귀중한 광물들, 어장들, 그리고 유속 빠른 강과 좋은 항만 조건을 탐내 왔다. 그는 혁명이 일어났다 해서 러시아의 본질까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야욕은 굶주린 이들의 새 정권에 의해 오히려 날카로워지고 강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아사지경의 농민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살찌고 부유해질 차례가 왔다는 것이었다.


(575-576)

선생은 열반의 의미를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열반은 비존재가 아닙니다. 사실은 고통의 부재, 죄업의 부재, 정욕의 부재, 그리고 미혹의 부재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지, 비존재라 해서 열반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로 열반을 선생이 말하는 바로 그 전존재이지요. 그것은 완전한 깨달은, 완전한 인식, 완전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말이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상태 말이지요. 말이 없어도 우리는 그냥 압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열반에 든 정신과 영혼한테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괴로움, 고통, 정욕, 미혹 자체의 부재는 이미 알고 있음의 결과, 즉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이 영원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 깨달음의 결과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