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하지만 성스러운 음악이란…… 이것도 변칙이다. 내세가 온갖 좋은 것들이 영원히 다 함께 존재하는 곳이라면, 거기에 음악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음악이란 서로 인접한 소음들이 떠듬떠듬 연이어지는 것이다. 강세, 불협화음, 부조와, 협화음, 그리고 해소에 이른다. 이어진다는 건 시간차가 있다는 뜻이다. 음악을 이루는 소리들이 모두 함께 존재한다면, 즉 모든 음이 동시에 울린다면, 그리고 영영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소리일 것이다. 탁하게 흐린 소음 덩어리이자 청각을 교란하는 윙윙거림의 바다이리라.

 

(457)

거기에는 언덕 아래 네 번째 아이가 있었어요. 날씨를 볼 줄 알아서 벼락이 칠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 여자애는 달음질쳐 올라가서 다른 아이들을 모두 언덕 꼭대기에서 내려가게 할 수 있고, 그러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죽음을 무릅써요. 만약 그 용감한 아이가 벼락을 맞아 죽음을 당하면 그것은 엄정한 운명이 작용한 거예요. 그러나 다른 아이들의 인생은 달라졌지요. 역사는 줄곧 소수의 놀이꾼들의 간섭에 휘둘려 왔어요. 그게 우리가 소망하는 바이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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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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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유튜브를 통해 즐겨보는 EBS <건축탐구 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단다. 그 중에 특히 시골에 지은 집이 나올 때 유심히 보곤 한단다. 나이가 들다 보니 그런 시골살이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아. 어느날 아주 작은 시골 집에서 생활하는 인상 너그러운 할머니의 영상을 보게 되었어. 처음에는 시골의 여느 할머니라고 생각했는데, 반전의 반전집에 잔뜩 쌓여 있는 책들. 독문학 일인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경력에, 괴테의 모든 책을 번역하셔서 괴테 할머니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 전영애라는 분이었단다. 2011년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괴테 금메달이라는 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는구나.

그가 번역한 책들을 조회해 보니, 아빠가 읽은 책들도 두어 권 있더구나. 아빠가 번역가들을 유심히 보지 않은 죄가 크구나. ^^ 가끔씩 그 분의 유튜브를 보면서 배우고 힐링하고 그랬단다. 몇 달 전에 책도 출간하셔서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빠 친구 중에 한 명이 전영애 님의 <인생을 배우다>라는 추천해 주었단다. 이 책은 최근에 출간된 것은 아니고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이었단다. 전영애 님의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차에, 친구가 추천해주니 반갑기도 해서 얼른 읽어보았단다. 겉보기와 다르게 참 치열한 삶을 살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리고 평생 공부를 하신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마치 공부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단다. 자신의 공부에 열중하면서도 서울과 독일을 오가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후학 양성에도 무척 힘을 쓰셨더구나. 일분 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으셨는데, 그가 소원하는 후회하지 않은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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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작가 헤벨이 주는 정답은 이렇다. 천사가 당신에게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물어줄 경우 답해야 할 첫째 소원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 둘째 소원은 무얼 빌어야 할지 물어서 알게 된 그 소원을 비는 것. 마지막으로 빌어야 할 세 번째 소원이 중요한데, 바로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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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과 서울을 오가면서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뒷전이라고 했어. 그래도 다행히 아이들이 알아서 잘 큰 것 같다고 했단다. 그렇게 공부만 엄마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가긴 쉽지 않겠지. 유전자도 물려받았다면 더욱 엄마를 닮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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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어두운 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불 켜진 딸의 방을 쳐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안에 정말로 따뜻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구나, 작은 한 송이 지혜의 꽃이. 세상의 비바람 속에서도 견뎌야 할 텐데. (어미가 일하며 힘든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인 탓인지 딸은 용돈을 달라고 떼를 써야 할 나이에도 용돈은커녕 학교에 내는 돈조차 안 받으려 들었다. 훗날 장학금 주며 데려가 공부 잘 시켜준 좋은 학교를 잘 마쳤다.)

만년필을 잡으면 글을 쓰지 않아도 손이 따듯하다. 만년필을 놓고 스탠드 불빛 앞에서 손을 펴본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펴면, 내 손안에서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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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전영애 님은 아이들을 혼자 키운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대. 이웃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구나. 우리와 같은 아파트 생활은 쉽지 않은 생활인 것 같구나. 아니다, 요즘은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그런 생활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웃들과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말이야. 그래도 아빠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아서 그런지 집 문은 늘 열려 있었고, 이웃에 일이 있으면 서로 아이들도 봐주고 음식도 전해주고 그랬던 같구나. 책을 읽을 때는 전영애 님의 육아 방식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아빠도 어렸을 때 그런 생활을 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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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아이를 나 혼자 기른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어차피 세상에서 살 것이기도 하지만 당장 있으나마나한 어미 대신, 주변 사람들이 내 아이를 한번이라도 아끼는 눈길로 보아주길 바랐다. 나도 이웃아이들에게 그렇게 했다. 늘 문이 열려 있다 보니 가끔씩은, 냉장고 안에는 이웃이 넣어두고 간 김치나 다른 반찬이 들어 있기도 했다. 헌 신발이나 옷가지가 현관문 안에 놓여 있기도 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내 아이들이 어디선가, 아프거나 슬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그 분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주셨을 것이다. 내 아이들은, 절절 매며 시간을 쪼개 쓴 어미가 아니라, 그 분들이 키워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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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야 우리나라 문화가 다른 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 전영애 님은 어떤 상을 받았는데 그 상금으로 독특한 일을 하셨단다. 독일 도나우 강변에 한옥을 짓는 것이었어. 한옥의 자재를 독일에서 구할 수 없으니 한국에서 자재들을 조달하여 독일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한옥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한옥의 이름을 시인의 집이라고 짓고 다른 문인들이 와서 머물다 갈 수 있게 했다는구나. 자재를 독일로 공수하고 그곳에서 조립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일까? 아빠 같았으면 생각이 있었어도 그런 번거로움 때문에 실천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자신의 제자들 이야기도 해주었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인 것 같더구나. 전영애 님은 스승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삶을 통해 자신도 배우는 자세를 보여주었단다. 자신의 자세의 낮추는 모습도 보기 좋았단다. 독일의 여러 문인들과 만남도 이야기를 주었는데, 특히 라이너 쿤체라는 시인과는 각별한 관계였다는구나. 독일에서 전영애 님의 시집을 내주기도 했대.

독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에서 오랫동안 독문학을 가르치셨어.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경기도 여주에 여백서원이라는 집을 지으셨는데, 그 여백서원이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건축탐구 집>에 소개된 집이란다. 책을 읽고 그 프로그램을 다시 한번 보니, 괴테 할머니는 정말 존경하실 만한 분이구나. 여백서원이 3200평인데, 대부분이 손님들과 책들의 공간이고 자신은 1평도 안 되는 방에서 지내면서 내내 행복한 표정을 갖고 계셨어. 책을 바라보는 표정은 더욱 그래도 전영애 님은 문학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전영애 님께서 생각하는 문학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결국 사람과 연결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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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252)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현실에서는 일일이 다 만나낼 수 없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만나보는 일은 세상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의 갈피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은 아마도 함께 살아가면서 가능 필요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배우고 읽는 궁극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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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애 님께서 최근에 출간한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그토록 따뜻한 분들을 처음 만났던 건, 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해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확회에서였다.

책의 끝 문장: 향기롭기까지 할 리야 없지만, 내 자신에게 혹시 어떤 양질(良質)의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스려온 긴 기다림, 견뎌온 어둠의 덕인 것 같다.



세상의 일은 다 어렵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면서, 이를테면 내가 죽지 못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 일인걸요" 하면서 성실히 임하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일의 성과도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이 다를 겁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지금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 P35

아이들은 아이들일 때 놀아야 한다. 놀아야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고 주위를 살피며 세상 이치도 깨닫고, 무엇보다 심심해서 이것저것 해보는 가운데 진정한 창의력이, 생각이 자란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이 때 아이노릇 잘 해야 학생 때 학생노릇 잘 하고 어른 때 어른 노릇 잘 하는 건 자명한 이치이다. 아이 때는 공부하고, 어른 되어서는 남의 눈치나 보며 그저 놀고 싶어 하고,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되겠는가. - P40

공부하느라 고생이 막심한 어미를 일찍부터 보아온 탓에 어려서부터 공부는 절대로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좌우명 삼고 산 것 같다. 그러나 자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도 끝도 없이 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점에서는 어미로부터 그리 멀리 가지도 않은 것 같다. 온 식구가 그렇다. 다들 가끔씩 만나면 매우 반가워하는 그런 사이가 일찍부터 되어버렸다. - P57

남의 살을 세세히 알 수야 없다. 그러므로 남들은 대체로 편안하거나 그저 그만한 것 같고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 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 P139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고, 어딘가에서는 무얼 읽었고, 또 어딘가에서는 뭔가 간절한 생각을 했고, 그런 이유로 소중해진 곳들이 어느새 다 내 자리가 되어 있다. 푸코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서 자리 하나 만드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개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는데 ‘나는 참 부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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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2)

네가 그런 사람이니까, 네 외모는 사랑 넘치는 할아버지면서 동시에 대량 학살범이 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네가 그 두 가지 역할을 너무나 잘 해냈기 때문에 난 네게서 눈을 뗄 수 없어. 변호사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을지 몰라도, 네가 미국에서 감탄이 나올 만큼 하찮은 삶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은 네가 최악의 변호다. 네가 오하이오에서 소박하고 지루한 삶을 그토록 훌륭하게 살아냈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너는 여기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거야. 넌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삶을 차례로 살아냈을 뿐이다. 나치라면 이렇다 할 부담감 없이 동시에 즐길 수 있었던 그 두 삶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지. 그러니 결국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독일인들은 서로 크게 다른 성격, 그러니까 아주 착한 성격과 그리 착하지 못한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 이제는 사이코패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온 세상에 확고하게 증명해 보였다. 트레블랑카에서 최고의 시간을 보낸 네가 미국에서 상냥하고 근면하고 하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너의 명령으로 시체를 치웠던 사람들, 여기서 널 고발한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들한테 그런 일을 당한 뒤 평범한 삶과 조금이라도 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수수께끼.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게 믿기 힘든 일이라고!

 

(114-115)

홀로코스트의 현실은 모두의 상상력을 뛰어넘었습니다. 만약 내가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면,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시의 나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위인 여자아이를 선택하는 순간, 기억의 힘센 순아귀에서 내 인생 스토리를 빼내 창조적인 실험실에서 넘겼습니다. 거기서 기억은 유일한 주인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인과관계에 입각한 설명, 사건들을 서로 묶어주는 가닥이 필요합니다. 예외적인 일은 전체 구조의 일부로서 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 스토리에서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덜어내, 좀 더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내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75)

놈들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보세. 놈들이 싸움에서 이겨 나블루스의 모든 아랍인, 헤브론의 모든 아랍인, 갈릴리와 가자의 모든 아랍인, 세상의 모든 아랍인이 유대인의 핵폭탄 덕분에 사라진다고 생각해봐. 앞으로 오십 년 뒤 놈들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중요성이라고 전혀 없는 작고 시끄러운 나라뿐이겠지. 팔레스타인을 박해하고 파괴한 결과가 그렇게 될 거야. 유대인만으로 이루어진 벨기에 같은 나라가 만들어지는 거지. 하지만 그나마 자랑할 만한 브뤼셀 같은 도시도 없는 나라. 진짜유대인들이 문명에 기여한다면 그런 것뿐이야. 유대인을 위대하게 만들어준 모든 특징이 없는 나라! 자기들의 사악한 점령체제하에 살아가는 다른 아랍인들에게 자기들의 우월성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주입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난 자네의 민족과 함께 사람이야.

 

(185-186)

이스라엘의 군사적 팽창을 유대인의 희생에 대한 기억과 결부시켜 팽창주의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점령지를 꿀꺽 집어삼킨 뒤 팔레스타인인들을 살던 땅에서 또다시 몰아낸 일을 역사적인 정의, 정당한 보복, 그저 자기방어로 정당화하기 위한 캠페인. 이스라엘의 국경선을 넓힐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움켜쥐는 모습을 무엇이 정당화해주는가? 아우슈비츠, 베이루트의 민간인들을 폭격한 일을 무엇이 정당화해주는가? 아우슈비츠,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뼈를 박살 내고 아랍인 시정들의 팔다리를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행동을 무엇이 정당화해주는가? 아우슈비츠, 다하우, 부헨발트, 젤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벨제크. “그건 거짓이라니, 필립. 어찌나 잔인하고, 냉소적인 거짓인지! 영토를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의미를 지닌다. 딱 한 가지 의미만, 이런 정복을 가능하게 해준 물리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 영토를 다스리는 것은 지금껏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특권을 행사하는 일. 남을 억압하는 희생자로 만드는 경험, 이제는 타인들을 다스리는 경험. 권력에 미친 유대인,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야.

 

(189)

전세계 유대인들의 눈에도 유지되는 나라라는 것, 점령지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봉기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마키아벨리 국가라는 것, 이 나라가 마키아벨리식 세계에 있는 것은 사실일세, 시카고 경찰국과 마찬가지로 성결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들은 이 나라가 유대인 문화, 민족, 유산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지난 사십 년 동안 선전했지. 사실 이 나라의 존재는 품질과 가치 면에서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선택적인 것이었는데도 이스라엘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라고 선전하는 데 온갖 술수를 동원했어.

 

(204-205)

사람은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이건 아주, 아주 기본이죠. 사막에서 온 겁니다. 저 풀잎은 내 것이고, 내가 기르는 짐승은 그 풀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 우리 집 짐승이 먹을 것이야, 너희 집 짐승이 먹을 것이냐, 여기서부터 타키야(시아파 신도들의 박해의 위험이 있을 때 신앙을 감추는 행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대개 위장이라고 하죠. 시아파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지만, 사실은 이슬람 문화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장은 이슬람 문화의 일부입니다. 위장을 허락하는 분위기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위험해지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문화, 상대가 분명히 솔직하고 진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문화죠.

 

(229)

당신은 그냥 정치투쟁이라는 저열한 어리석음보다 대학이라는 고상한 어리석음이 더 좋은 거겠지. 지금 이 일이 멍청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심지어 쓸데없는 일이라는 말도 할지 몰라. 하지만 이런 게 원래 이 지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야

 

(392-393)

그 작품의 첫 번째 대사, 그러니까 1 3장을 여는 대사에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사백 년 전 샤일록이 세상의 무대에 나와 자신을 소개한 말 때문에요. 그래요. 사백 년 전부터 유대인들은 이 샤일록의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유대인은 항상 재판을 받는 신세였어요. 지금도 유대인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형태로, 유대인을 상대로 한 현대의 재판, 결코 끝나지 않는 이 재판의 시발점이 바로 샤일록 재판입니다. 전세계 관객들에게 샤일록은 유대인의 화신입니다.

 

(469)

관용구, 관심사, 정신적인 리듬 면에서 K의 일기나 A. F.의 일기 같은 글들은 훤히 눈에 띄는 애잔함을 확인해준다. 첫째, 유대인은 평범하다. 둘째, 그들은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이다. 평범한, 단조롭고 눈부시며 축복받은 평범함, 모든 관찰, 모든 감상, 모든 생각에 이것이 있다. 유대인이 꾸는 꿈의 중심, 시온주의와 디아스포리즘 모두에 열기를 제공해주는 것은 유대인이 유대인임을 잊었을 때 사람이 되리라는 것. 평범함. 지루함.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단조로움. 진을 치지 않는 삶. 각자 자기만의 유람선에서 반복적으로 느끼는 안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대인의 삶이라는 믿을 수 없는 드라마.

 

(499-500)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권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라서 벗어날 수 없는 도덕적 의무도 갖고 있소.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할 의무.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소. 그들을 쫓아내고 억압했으니까. 그들을 추방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살해했으니까. 유대인 국가는 처음 생겨난 순간부터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땅이었던 곳에서 팔레스타인들의 존재감을 지우고 그 땅을 빼앗는 데 전력을 다했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 손에 쫓겨나 이리저리 흩어지고 정복당했지. 유대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배반했소. 그리스도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했다는 뜻이오. 그들을 경멸과 예속의 대상인 타자(他者)’로 만들어, 인간의 지위를 빼앗았소. 테러나 테러리스트나 야세르 아라파트의 어리석은 정치행보와는 상관없이, 사실은 이것이오. 팔레스타인 민족은 전적으로 무고하며, 유대 민족은 전적으로 유죄다. 내게 있어 경악스러운 일은 소수의 부자 유대인이 PLO에 거액을 기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대인이 자기도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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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5년 봄호 - 통권 189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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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철마다 읽는 계간지 <녹색평론 2025년 봄 호>, 통권 189권을 이야기해줄게. 지난 녹색평론이 출간되고 이번에 출간되는 사이에 가장 큰 일은 아무래도 12.3 계엄령, 친위쿠데타, 내란이 아닐까 싶구나. 그래서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도 그와 연관된 <시민이 주도하는 개헌운동>으로 되어 있단다. 녹색평론사에서 <녹색평론 2025년 봄 호>을 준비할 즈음에는 당연히 탄핵이 인용될 것이라고 확신하던 분위기여서인지 글들이 모두 탄핵 인용 이후의 대한민국과 헌법이 나아갈 길에 대해 다루고 있단다. 하지만 아빠가 이 책을 읽은 것이 3월말인데, 탄핵 선고가 계속 미루어지면서 설마라는 불안감이 엄습하던 때였단다. 당연히 탄핵 인용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란 수괴가 구속 취소되어 무죄인양 거리를 활보하고, 폭력적인 탄핵 반대를 선동하는 이들이 난동을 부리는 것을 설마라는 불안감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단다. 그래서 <녹색평론 2025년 봄 호>에서 탄핵이 당연하다는 글들이 다소 거리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단다.

그래도 다행히 조금은 늦었지만, 탄핵이 인용이 되어 심리적인 안정감을 찾았었단다. 하지만 여전히 내란 세력들이 도처에서 속 터지는 짓들을 하고 있으니, 아직도 불안함이 자리를 잡고 있구나. 내란 동조자인 대통령권한대행이라는 자가 월권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내란의 잔재 세력들이 득실거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단다. 지금은 내란의 잔불을 완전히 꺼야 하는 시기란다. 대통령 선거와 함께 개헌 이야기도 오가기도 하는데, 개헌은 새 정부 들어서서 시민들의 의견을 오랜 시간 신중하게 경청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단다. 기한을 두고 졸속으로 하는 개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야.

….

 

1.

이번 탄핵 선고를 기다리면서 불안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불법 계엄을 저지르고,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유리창을 깨는 것을 온 국민이 전세계 사람들이 다 보고,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증거물과 증언들이 차고 넘쳤는데도 탄핵 인용이 안 될까 불안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이 헌법의 기준대로 판단하지 않고, 정무적인 판단을 할까 그랬던 것 같구나,. 헌법재판소는 항소도 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정무적인 판단을 해도 되는가. 이 책에서는 그런 헌법재판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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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첫째, 9명 임명직 헌법재판관으로 구성된 헌재가 국민이 선출한 300인 국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둘째, 헌재 결정의 타당성 여부를 가릴 견제 기관이 존재하는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가 아니므로) 과두체제이며, (견제받지 않으므로) 독재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두적인 독재기관은 때때로 민의를 배반하고 독재지향적인 권력, 특권층의 이해에 영합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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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AI가 대신 결정을 한다면 더 일찍 더 정확하게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

녹색평론에서 오랫동안 주장한 것 중에 하나가 시민회의의 구성이란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특히 기한이 오래 걸리는 정책에 대해서는 국민들 중에 차출로 뽑힌 시민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란다. 대한민국 정치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시민 회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 정권에서는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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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시민의회는 일반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소규모 대표들이 공공정책에 대해 심도 있는 숙의를 거쳐 결정을 내리는 민주적 기구이다. 시민의회는 통계적으로 전체 시민을 대표할 수 있도록 추첨으로 구성되면, 운용은 숙의를 핵심으로 한다. 숙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이성적 토론을 통해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흔히 다수가 참여하는 방식은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의 충돌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나, 시민의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참여하더라도 숙의를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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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이 있었단다. 역사는 이 시대를 탄핵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왜 이런 무능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런 대통령이 무식한 짓을 하는데 시스템으로 막을 수 없었을까? 그래서 개헌의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단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아빠도 개헌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란다. 1987년 개정된 헌법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시대도 변한 만큼 그 시대에 맞는 헌법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란다. 앞서 이야기했던 시민회의도 개헌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단다.

이 책에서는 개헌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나라의 개헌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칠레에서 시도했던 개헌은 정권이 왔다갔다 하면서 결국 실패했다고 하는구나. 핀란드와 뉴질랜드에서 이루어진 개헌의 성공은 개헌을 준비하는 우리나라에서 배울만하다는 생각이, 읽을 때는 들었는데, 지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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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헌법을 개정을 한다면 오늘날 가장 직면한 기후 변화에 대한 내용도 담겼으면 한다는 의견에 아빠도 격하게 공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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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나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좋은 삶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라고 믿는다. 자연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존중이 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나의 믿음이 법은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 그리고 집단 책임성에 대한 개인 권리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생태적 상호의존성을 인정해 인간 삶의 자연적 조건을 내재화하고, 이를 헌법과 인권법, 재산권, 기업의 권리 및 국가 주권을 포함하여 모든 법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오슬로선언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을 함께 생각하고, 이를 이뤄나가기 위한 개인적인, 또 집단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좋은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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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이 책에 실린 정치 이외의 주제들은 크게 와 닿지 않더구나. 몇 개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모두를 환대하는 공원이라는 글에서는 조경가 박승진 님의 공원의 설명을 읽을 수 있는데,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가 보고 싶더구나. 통의동 브릭웰, 대구 미래농원, 목동 오목 공원이 그 공원들이란다.

생태예술가 퍼트리샤 조핸슨의 인터뷰를 실려있는데, 다음 발췌글로 감상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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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나쁜 디자인이 없습니다. 나쁜 디자인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자연의 어떤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그 기능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이 결합돼 있을 것을 알 수 있어요. 자연의 또다른 속성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바로 이게 예술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학교에서 저는 예술은 완벽한 형태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예술작품은 단 하나의 요소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이 미켈란젤로나 르 코르뷔지에 등으로 이어져 오는 고전예술 전통입니다. 그런데 제가 했던 작업은 그것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어요. 우선 살아있는 세계를 작품 속에 들어오게 허용하면, 완벽함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자연은 쉴 새 없이 변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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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남일 님의 히말라야 트래킹 여행기는 부러움만 가득 채웠단다. 아빠는 가까운 산이나 가야겠다. 그리고 이번 호에도 읽을만한 책들의 서평이 실렸는데, <몸이 기후다>라는 책은 읽어보고 싶었단다.

….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다행히 탄핵이 인용되어 대한민국의 창피함이 많이 상쇄된 것 같구나.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못난 짓을 많이 해서 전세계적으로 엄청 창피했는데, 이젠 그런 내란 수괴를 내쫓아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구나.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을 탄핵시켰다는 것에 대해 외국에서도 칭찬하고 좋게 평가하는 분위기더구나.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부러워하기도 하고… ^^ 이제는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내란을 동조했던 정당에서는 대통령이 나오질 않길 바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실로 끔찍한 가정이긴 하지만 12.3 쿠데타가 곧바로 제압될 수 없었다고 상상을 해보자.

책의 끝 문장: 무엇보다도 그에게 천지간 농업으로서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논밭 신령님들의 말씀들을 받아 쓰”(<다시 심고心告-혼자 보고 혼자 들은 말>)는 일이기도 할 터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윤석열과 그 일당이 주장하는 통치행위라는 예외적 권력은, 왕에게 법을 지키지 않아도 특권을 주었던 중세에나 있을 법한 일로서 독재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윤석열이 입에 달고 다니던 자유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왕이나 권력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법치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비상계엄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동한 것인지를 헌법과 법률에 규정해 놓았다.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길이다. 윤석열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자였다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이 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전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며 압제를 저지를 수 있는 이상성격자에 불과하다. - P43

한국사회가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시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모델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시민의회와 양원제를 결합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의회와 양원제의 도입은 일회성 개헌을 위해서도 유용하지만, 지속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읍면동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기초지자체 민회, 광역지자체 민회를 거쳐 국가 민회를 구성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이는 국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고,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완화하는 유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정치권이 아닌 국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 P71

취재 후 1년 6개월가량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치는 더욱 오염됐다. 그 결과 우리 앞에 남은 것은 폐허다. 가장 정치적이어야 할 대통령은 철저하게 정치를 버렸다. 가장 헌법을 할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다. 이 위험하고 불성실하며 비민주적인 대통령은 분명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이후’는 얼마나 다를까. 국민의힘은 내란우두머리 피의자 대통령과 절연하긴커녕 부정선거 음모론과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마저 에둘러 감싸고 있다. 방탄 논란과 강경 일변의 전략에 갇힌 민주당은 갈등과 대립을 끊어내고 미래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정당의 적대적 공생만 견고해지는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만 말하는 것은 정확한 처방이 될 수 없다. 오랜 실패에서 확인됐듯 개헌은 신속한 방법도 아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이 맡겨져 있는, 선거 직전에 반짝 다루다 거대 양당의 최대 이익만 반영하고 마는, "정말 중요한" 선거제도를 논의해야 할 때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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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0)

그렇다. 이따금 정말이지 이상한 생각이, 얼른 보기에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생각이 머릿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결국에는 그런 생각이 실현될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런 생각이 강렬하고 열정적인 소망과 합쳐지게 되면 때로는 그것을 숙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어떤 것, 예정된 어떤 것으로, 또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예감의 결합이라든지, 예사롭지 않은 의지의 강화, 그리고 자신의 상상에 의한 중독이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 밤(나는 평생토록 이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그 사건이 산술에 의해 완전히 증명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아직까지도 기적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이 내게 그토록 단단하고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분에게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나는 그것을 수많은 것들 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그러니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206-207)

그런데 나는 빨간색이 연이어 일곱 번씩이나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오기가 생겨서 일부러 빨간색을 물고 늘어졌다.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자존심도 절반쯤 작용했다고 보는데, 정말이지 나는 앞뒤 가리지 않는 모험으로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야릇한 느낌이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전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는데도 별안간 모험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영혼은 수많은 느낌들을 거쳐 왔으면서도 그것들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만을 받은 채 완전히 진이 빠질 때까지 더 많은 느낌들, 더욱더 강렬한 느낌들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거짓이 아니라 정말인데, 만일 게임의 규칙상 한꺼번에 5만 플로렌까지 거는 것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나는 분명히 5만 플로렌을 걸었을 것이다. 주위에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난리들이었다. 빨간색이 벌써 열네 번이나 나왔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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