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경제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방법에 대한 과학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이 이 개념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랑은 아껴서 사용해야 하고, 불필요한 곳에 써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사회를 움직이면 개인적인 삶에서 사용할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찾기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자들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사랑 말고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8)

시장이라는 기계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기본적인 감정 같이 단순한 것을 가지고 세계 평화와 모든 이의 행복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것도 놀랍지 않다. 착취를 개인적 악감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급 7000원을 받으며 등골이 휘게 일하는 여성도 사악한 누군가가 강요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그리고 경제학은 피할 길이 없어. 우리의 본성에 있으니까. 사실 그게 우리의 본질이야.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니까.

(53)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은 1950년대 들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카고대 경제학과 소속의 남성 몇 명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경제학 모델을 이용해 분석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합리적 개인은 상여금을 놓고 남들과 경쟁하고 자동차 구매 시 더 좋은 조건을 취하려고 흥정을 벌일 뿐 아니라, 소파 뒤까지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자녀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59)

결혼한 여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부엌을 치우고 다림질을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다. 결혼한 남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깐씩 아이들과 놀아 줄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여가 시간을 집안일에 많이 쓰고,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피곤해진다. 베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성에게 더 낮은 보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부엌을 치우느라 여성은 남성보다 더 피곤하다. 따라서 근무 시간에 남성과 동일한 노력을 기울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커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경제학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설명도 내놓았다.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이유는 그들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족 전체로 볼 때 손해가 덜하다는 설명이다.

(86)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이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샅샅이 연구하면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진실 말이다.

(130)

금융계의 혁신은 항상 시간과 돈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금융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바로 금융이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간은 신에게 속한 것이고 신만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성경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을 시간을 파는 행위라고 봤다. 고리대금업자는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 사람이 내년이 되기 전에는 살 수 없을 물건을 오늘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빌린 돈에 대한 이자는 대출을 받을 시점과 내년 사이에 경과하는 시간의 값이다.

(152)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루커스가 여왕의 질문(“왜 아무도 이런 일이 생실 줄 몰랐나요?”)에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학자들이 위기를 예측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애초에 이런 일은 예측할 수 없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85)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게 하려 평생을 싸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다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204)

1970, 미국의 한 CEO는 근로자 보수의 30배 정도를 벌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이 숫자는 500배가 되었다. 유명한 금융가 J.P. 모건은 미국 기업의 CEO는 평직원 월급의 20배가 넘는 보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그 격차가 364배로 벌어졌다. 그리고 미국을 모방삼아 서구 사회에서 CEO 의 보수가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에서는 2002년에서 2012년까지 CEO들의 보수가 3배 증가했다. FTSE 100대 기업의 CEO와 평직원 평균 보수 격차는 1998 45배이던 것이 2010 120배로 벌어졌다.

(216)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으로서의 인간과 경제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가지 관계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경제적 관계다. 다시 말하면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동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220)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자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을 간단히 해결한다. ,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빵 한 쪽과 생선 한 마리로 신도들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먹고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는다. 험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우주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282)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학에 인류의 현실적인 경험을 위한 자리는 없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허구의 인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인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286-7)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298-9)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신시켜야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임무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는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해서 작별을 고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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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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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병자호란 2권을 이야기해줄게. 2권에서도 해 줄 이야기가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책 이야기를 해줄게. 1권은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을 거쳐, 인조가 겁도 없이 다시 후금과 절교한다는 내용까지 해주었잖아. 2권은 더욱 아픈 역사가 이어진단다.

패배의 역사. 그 패배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니 한번 살펴보자꾸나. 후금의 홍타이지는 몽골족마저 모두 차지하고 영역을 더욱 넓혀갔어. 사라졌던 칭기즈칸의 옥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도 홍타이지가 받았어. 그리고 명나라의 한족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귀순을 했단다. 그만큼 홍타이지는 포용정책을 썼어. 이제 동아시아의 대세는 후금이 되어가고 있었어.

후금의 만주족, 몽고족, 명나라의 한족을만몽한이라고 불렀는데, 몽타이지는 만몽한의 신료들로부터 황제가 되라고 강권 받았단다. 처음에는 몇 번을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어. 나라이름도 우리가 청나라로 부르는대청이라 하고, 연호는 숭덕이라고 했어. 이제 홍타이지는 거대한 나라의 황제가 된 거야. 이제 아빠도 후금이라고 하지 않고 청나라라고 이야기할게.

이제 청나라의 신료가 된 몽골족의 사신들이 조선에 왔는데, 조선은 몽골족의 사신을 야만족 다루듯 푸대접했단다. 이 일은 청나라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단다. 그뿐만이 아니야.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에 갔다가 황제에게 배례를 하라는 명령에 끝까지 거절했다가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어. 나덕헌, 이확이라는 신하들인데, 그 기개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정세파악을 못한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홍타이지가 뒤늦게 알고 때리는 것을 말려서 멈추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생각하기에 홍타이지는 이미 조선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 지금은 그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나두는 것 같았지. 나덕헌과 이확은 배례를 안 했다고 얻어맞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그때 청나라의 국서를 들고 귀국을 했는데, 그 국서에는 청나라의 불만이 가득 남겨있었어. 그리고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도 써 있었지. 이걸 가지고 갔다가는 왕에게 혼날 것 같아서 오는 길에 버렸는데, 그것마저도 인조는 벌을 내려 그들은 귀향살이를 했다는구나.

최후통첩을 받은 인조. 여전이 청나라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방어할 생각도 안하고. 그저 강화도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단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일단 백성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거짓이라도 머리를 굽혀야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성들 버리고 혼자 도망갈 생각만 하다니

정온, 최명길 등이 화친 맺지 않고 싸울 거면 강화도가 아닌, 압록강에 군대를 총집결 해서 싸우자고 했어. 거기서 싸워야 져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나라의 속내를 다시 확인하자고 했어. 하지만 인조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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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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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36 11 25. 홍타이지는 결국 조선과 전쟁을 선언했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지.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군사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향했어. 청나라는 철기를 중심으로 한 군대라서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산성에서 수비하는 방법을 선택했어. 그런데 청나라는 그런 산성을 굳이 공격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로를 통해서 서울로 향했단다. 산성을 지키던 조선군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청나라의 뒤꽁무니를 쫓는 격이었어.

인조도 청나라의 침입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한참 후에 들었어. 그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청나라 군대로 코앞까지 닥쳤을 때였지. 그 이야기는 강화도로 도망갈 타이밍을 놓쳤다는 거야.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어. , x됐다는 생각만이 머리가 가득 찼겠지. 강화도에서 수비하려고 그곳에 군비를 갖추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

결국 차선으로 결정한 것이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천험의 요새라서 방어하기는 좋지만, 중요한 것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야. 군량과 마초가 턱없이 부족했어. 조선은 청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따뜻한 봄이 되면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강화도에만 전쟁 준비를 하고.,. , 한심하십니다.

남한산성에 오긴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김류는 인조에게 몇몇만 몰래 강화도로 가자고 했어. 비겁한 인조는 그러자고 했어. 몰래 산성에 나와서 강화도로 향하다가 빙판길에 몇 번 넘어져서 부상만 입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단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후에도 어떻게 하면 강화도로 내뺄까 하는 생각만 했대.

.

청나라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공성전을 벌였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마냥 구원군만 기다리고 군량만 축내고 있었어. 그것도 얼마 없었어그리고 신하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논쟁만 벌였단다. 어떻게든 도망가자는 이들.. 끝까지 싸워보자는 이들지금이라도 화친하자는 이들결정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어. 몇몇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어. 그러다가 기다리던 지원군이 지방 곳곳에서 오지만, 그들도 제대로 된 체계가 없었고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각개로 왔다가 연이어 지고 말았어.

2.

결국 인조는 화친을 하기로 했어. , 조건을 걸었어. 남한산성에서 자신은 나가지 않겠다. 왕세자를 인질로 줄 수 없다하지만, 청나라는 지난날 조선의 잘못만 늘어놓으며, 화친을 위한 요구 조건을 점점 높여만 갔어. 청나라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의 기본은 조선의 왕이 산성에서 나와서 항복의례를 하라는 것이었어. 인조는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했지. 그런 와중에 강화도에서 소식이 날아왔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

당시 강화도에는 먼저 피신해 있던 왕의 가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이 있었어. 강화도의 군대는 김경징이라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청의 수군을 얕보고,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 그에 비해 청나라는 강화도 함락을 철저히 준비했어. 명에서 귀순한 공유덕, 경중명을 중심으로 수군을 갖추고 있었거든. 제대로 된 방어가 없던 강화도는 쉽게 함락이 되었단다. 강화도의 왕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그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어.

강화도의 패배 소식은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좌절케 했어. 청나라는 다시 왕이 나와서 화친을 하라고 요구했어. 말이 화친이지 나와서 항복하라는 거지. 결국 조선은 청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전쟁의 패배를 인정했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의례를 했단다. 그 유명한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했어. 그리고 나서 도성인 창경궁으로 돌아왔단다. , 얼마나 비참한 귀환이더냐

3.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앞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써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대신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데려가겠다.

조선 군대는 원조를 해야 한다.

특히, 곧바로 전함 50대와 수군을 지원해라.

주기적으로 대신들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쳐라.

외교 의례는 명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해라.

많은 수의 포로를 데리고 가겠다.

그런데 그 포로들이 도망 오면 다시 청나라로 보내라.

등등… 청나라의 요구조건은 엄청 많았고, 그 요구조건들 하나하나가 조선의 가슴을 베는 것 같았어. 그리고 청나라는 화친을 방해했던 신하들을 청으로 보내라고 했고, 자진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게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고 말았단다. 청은 조선 수군을 동원해서 오랜 목엣가시와 같은 가도를 정벌했단다.

이제 인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며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어. 예물과 군량미를 꾸준히 바치면서그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고소현세자. 일반적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는 사이가 좋이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데 그랬겠지.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갈 때, 청의 황세자 도르곤에게 잘 봐달라고 간절히 부탁도 했었어. 첫 번째 귀국할 때만 해도 소현세자를 극진히 대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청나라는 조선이 전쟁 패배에 대한 요구조건을 안 들어주자, 인조를 폐위하겠다고 경고를 하게 되었어. 여러 차례자신을 폐위시키면 누구를 왕에 세울 것인가?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왕위에 세울 것으로 인조는 생각했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어. 소현세자는 장인어른의 장례식 때문에 두 번째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인조는 냉대하였고, 세자빈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못 가게 하는 등 꼰대를 부리기 시 작했어. 나중에 소현세자가 완전이 귀국을 한 다음,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렸고, 병에 걸린 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단다. 검시 결과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무도 누구 짓인지 밝히려 하지 않았단다. 그저 불쌍한 죽음 하나 추가였지.

.

병자호란 이후 피로인은 커다란 사회문제였어. 피로인은 청군에 잡힌 민간인 포로를 이야기하는데 그 수가 약 50만이나 된대. 그들의 대우는 처참했고, 도망이라도 가면 다시 끌려가야 했어. 그리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부잣집 피로인들은 돈을 주고 데리고 오기도 했대. 그것을 속환이라고 해.

허박이라는 하는 신하는 나라차원에서 속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어. 속환하여 나라로 돌아온 이들에 대한 대우도 좋지는 않았어. 끌려간 것도 자신들 뜻이 아니었는데, 그들, 특히 여자인 경우는 속환녀라는 딱지를 붙이고 버림을 받았어. 한번뿐인 인생인데 그들은 시대를 잘못 만났고, 왕을 잘못 만난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일본도 조선이 청나라에게 패배한 소식을 전해 듣고, 온갖 간섭이 늘어나고 요구사항도 많아졌어. 힘없는 조선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니. 동네북이 되어버렸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많은 신하들은 조금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대. 몽골족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오랑캐 국가는 길어야 100년 밖에 못 간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청나라는 포용정책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했단다.  아빠가 오래 전에 청나라 전성기 역사를 다룬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라는 역사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그 소설을 통해 청나라가 그저 야만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그들 나름대로 통치철학이 있었고, 유능한 지도자가 있다면 오래 번창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여기까지가 병자호란에 관한 이야기란다. 패배의 역사라고 읽는 내내 가슴 아팠단다. 무능한 왕의 표본을 볼 수 있었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단다. 그리고 주변 강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 같구나.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오늘날의 우리나라균형 잡힌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인 듯 싶구나. 거기에 북한이라는 존재까지어쩌면 인조시대 때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북한, 중국을 다루시는 것을 보면 뛰어난 협상가이자 중재자라는 생각이 들어. 일 년 전 타임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표지모델로 삼으면서 뽑았던 Negotiator라는 제목이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구나. 그의 이런 노력들이 가까운 미래에 좀더 좋은 열매로 맺어지질 바랄 뿐이란다. 오늘은 그럼 이만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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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07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희극과 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희극보다는 비극 쪽이
우세하다다는 느낌이 드네요.

무능한 군주 / 정치지도자를 선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형극의 세월이었던 걸까요.

bookholic 2018-04-07 21:13   좋아요 1 | URL
앞으로는 다시는 무능한 리더를 국민들의 손으로 뽑는 비극은 일어나질 않기를 기원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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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초등학교 때 소풍을 장릉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관내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저학년 때라서 장릉이 누구의 무덤인지도 몰랐고, 그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주변 잔디밭에서 놀다 온 기억뿐이구나. 그리고 나중에 장릉이 조선시대 인조라는 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조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능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그런 왕의 무덤으로 소풍을 가서 그랬는지 소풍에 가서 무덤의 주인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구나. 선생님이 일부러 안 알려주셨던지, 아니면 아빠의 기억력의 한계이던지..

무능한 왕의 무덤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왕릉의 존재를 잘 모를 거야. 아빠처럼 그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알고 있지 말이야. 초등학교 때 소풍 이후에는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단다. 하기야 그렇다고 다른 왕릉에 가본 적도 별로 없구나. 우리집 근처에 있고, 아빠가 좋아하는 정조대왕의 왕릉만 여러 번 가본 것 같구나.

인조가 왜 무능한 왕이었는지, 아빠가 이번에 읽은 <병자호란>이란 책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단다. 지은이 한명기라는 분은 아빠가 십여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광해군>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란다. 그 책을 통해서 아빠가 광해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반정으로 내쫓길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인조. 그런 인조는 왕다운 왕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볼게.

1.

1623 3 13. 조카 능양군은 신료들의 힘을 등에 업고 숙부 광해군을 끌어내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인조이고, 역사는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하였단다.

광해군.

임진왜란 때 도망간 왕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로 국내에서 활약했던 세자 광해군.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선조의 정비는 이미 죽고, 후궁들만 있었는데, 뒤늦게 정비를 맞아들이고, 영창대군을 낳았어. 적자가 태어난 거야. 이미 후궁의 아들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분조까지 해서 왕이 될 준비까지 했는데 말이야. 영창대군이 크고 나면 세자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 광해군도 걱정이 되었겠지. 그런데 얼마 뒤 선조는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단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 영창대군은 언제든 자신을 위협할 존재였어. 결국 영창대군을 죽였단다.

조선시대에 왕 주변의 권력다툼으로 친인척을 죽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단다. 영창대군뿐만 아니라 반대측을 죽였는데, 그 중에 능양군의 아버지, 능양군의 동생도 포함되었단다. 그리고 관계상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도 유폐시켰단다.

능양군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생각했을 테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거야. 그런 능양군과 뜻이 맞는 신하들이 있었고, 반정을 계획했어. 궁 안에서도 그런 반정의 기미가 보였지만, 안일한 대응을 했고, 결국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늘 인조. 명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 명나라에서 반정을 인정해주고, 왕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어. 그렇다 보니 명나라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광해군을 몰아낸 이유 중에 하나라고 내세운 것이 후금에 공격을 받는 명나라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거든. 명나라는 인조 왕권을 미루면서 그런 인조의 처지를 이용했어. 2년이나 승인을 미루면서, 조선군의 지원을 받게 되었단다.

.

2.

인조 반정에 성공에 공을 세운 사람 중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분류되고 외지로 발령받는 등 불공평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괄은 다시 난을 일으켰고, 놀란 인조는 공주성까지 도망을 갔단다. 이괄의 난은 내부 배신자에 의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단다. 인조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작은 난에도 왕이 멀리까지 도망을 갔으니 민심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고, 개혁안을 밀어붙이기에는 능력 부족이었고, 명나라 사신들은 툭하면 와서 어마어마한 은과 인삼을 요구해서 강탈당하는 수준이었단다. 특히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함경도 앞에 작은 섬 가도에 머무르면서, 양곡을 수탈해갔어. 금과 조선을 견제한다고는 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본적이 없고, 조선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을 뿐이었단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가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공세가 소극적이었다는 것인데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어 광해군의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단다.

반정 왜들 했나.

명나라 모문룡.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사람이었단다. 앞서 아빠가 인조 책봉에 있어 명나라가 2년간 질질 끌다가 이루어졌다고 했잖아. 모문룡은 자신이 인조 책봉에 큰 공을 세웠다면서 이것저것 참 많은 것을 요구했어. 인조 정권은 모문룡을 위한 송덕비까지 만들어주었단다. 이 노회한 인물은 조선에 대해 갑질 자유이용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어. 모문룡은 광해군 때부터 가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광해군은 그의 노회함을 알고 그를 멀리 했어. 하지만 인조는 책봉의 은인으로 발목이 잡혀서 그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단다. 모문룡 한 사람만 거들면 참아보기라도 하지.. 그의 군사들도 가도 밖에 나가서 온갖 수탈을 했단다. 그런 그의 군사들을 처벌을 했다가 오히려 좌천된 조선의 관리도 많았어.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지만, 참 꼴불견이구나.

3.

당시 명나라 사정을 좀 이야기해줄게. 한마디로 지는 해였어. 망해가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다고 보면 돼. 온갖 비리의 중심이었던 만력제라는 황제가 죽고 장남 태창제가 즉위를 했어. 개혁시도를 했지만, 명나라도 운이 다했는지, 이 능력 있어 보이는 태창제는 즉위 한달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어.

그리고 16살의 준비라고는 전혀 안된 천계제가 즉위했단다. 이후 환관들이 권력을 잡고 정권농단에 앞장섰어. 그나마 웅정필, 원숭환 등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 덕으로 요동 지역을 후금의 공력으로부터 막고 있었어. 특히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두었고, 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루하치가 부상당한 후 죽었단다.

이후 누루하치의 후계자로 홍타이지가 즉위했어. 홍타이지는 참 영리한 사람이었단다. 홍타이지는 한인 포용 정책을 써서 명을 배신한 한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어.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한 강경파였기 때문에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명나라 공격에 걸리적거리던 조선을 공격하기로 했어. 조선 때문에 명나라를 공격할 때 늘 후미가 신경 쓰였거든.

그는 1627 1 8, 조선 정벌을 명령했단다. 그것이 바로 정묘호란이야. 홍타이지가 조선 공격을 서둘렀던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어. 누루하치의 후계자이긴 했지만 권력을 아직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홍타이지는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이 일인자임을 보여주려고 했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어. 조선의 군사였다고 후금에 투항을 했던 강홍립 같은 이도 같이 데리고 왔어.

후금 진격 소식에 방어할 생각은 전혀 없이 도망갈 생각부터 한 인조곧바로 강화도로 도망을 가버렸어. 후금은 대륙을 근거지로 한 나라이기 때문에 수군이 없었거든. 몇몇 장수들이 도망보다는 임진강에서 방어를 하겠다고 인조에게 군사를 요청했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자신들의 호위군을 보강하기 위해 군사를 지원해주지 않았어. 이괄의 난의 트라우마였나…. 나라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는 위대하신 왕이시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을 가자, 후금군 대장 아민은 화의를 제안했어. 사실 후금도 명의 후방공격에 부담이 있어 조선에 오래 머물 수 없었거든. 조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어. 쯧쯧 도망간 것들이 무슨그러다가 결국 화친을 맺었어. 후금을 형으로 모시고, 조선 자신은 동생이 되겠다고 했어. 참 이상한 관계가 성립이 되었네. 조선은 명을 부모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명과 전쟁중인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으니 말이야.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럴 거면 반정을 왜 했는지….

후금이 형이 되었지만, 그리 착한 형은 아니었어. 후금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가는 곳마다 온갖 약탈을 했단다.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그래서 평안도 정봉수 등이 자체적으로 의병을 만들어 후금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어. 그러자 후금은 심한 불만을 쏟아냈단다. 감히 형이 하는데 동생이 무슨 참견이냐.

후금과 조선의 화친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당연히 강한 불만을 가졌어. 그리고 가도에 틀어박혀 있던 모문룡은 전혀 도와줄 생각 안하고 관망의 자세를 보였어. 조선은 모문룡이 후금의 후방을 공격해주길 기대했지만 가마니 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어. 정묘호란이 끝나고 나서는 자신이 기책을 내어 후금을 쫓아냈다고 명에 거짓보고를 했지. 참… 어찌 보면 어리숙한 인조와 조선 조정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구나. 하지만 그런 무능한 왕으로 인해 받는 백성들의 고통은 너무 크구나. 촛불을 들 수도 없고..

4.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을 맺고 인조는 다시 서울 경덕궁으로 돌아왔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고, 곳곳마다 민란이 일어났어.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썼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도 기가 살아났어. 국내 사정을 일본에 숨기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일본은 국교 재개를 요청했는데,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있나. 후금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실리를 찾고자 일본과 교역도 다시 재개했어.

명나라는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했어. 가도의 모문룡의 지지기반은 천계제와 그 주변의 환관들이었는데, 숭정제가 즉위하고 지지기반이 없어졌어. 이를 이용하여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치하기로 했어. 모문룡을 초대해서 속임수를 써서 처단했단다. 그래서 원숭환은 가도의 군대를 이용하여 요동반도 전체의 수비를 강화하려고 했어.

하지만, 홍타이지.. 이 영악한 인간이 꾀를 썼어.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질시킨 거야. 명나라 사신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거야. 원숭환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숭정제는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원숭환을 단칼에 처형시켰단다. 숭정제도 정세에 어두운 황제였고, 역시 간신들로 둘러싸여 있었어.

결국 명나라와 후금의 운명은, 그 나라의 지도자인 숭정제와 홍타이지의 능력의 차이로 결정나고 있었어. 이것은 비단 명나라와 후금만 그런 것은 아니지.. 당시 조선도 인조라는 왕으로 인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봐도 바로 알 수 있잖니.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뿌듯하더구나.

다시 책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명나라와 후금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은 더욱 난처한 입장이 되었어. 샌드위치 신세라고 할까. 원숭환이 죽고 나서 가도는 무주공산.. 명나라의 유홍지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도의 일인자 되었어. 조선이 기회다 싶었어. 명나라의 반란을 일으킨 유홍치를 잡아 명나라에게 도움을 주고, 후금에게도 가도를 정리했다고 할 말이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고 가도 정벌을 나섰는데, 유홍치가 재빠르게 도망을 가버렸어.

그런데 도망을 갔던 유홍치는 명나라 정부를 어떻게 꼬득였는지, 반란군이 아닌 정식 관리인으로 다시 가도로 귀환을 했어. 모문룡이 유홍치로 바뀌었을 뿐 바뀐 게 없었어. 다시 조선을 괴롭히고 수탈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부 분란으로 죽고 말았단다.

정묘호란 이후 돌아간 후금은 조선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어. 화친을 맺으면서 약속했던 것들을 실행이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역 거래를 하기로 했는데, 조선이 무역 거래에 미온적이었고, 명나라보다 후금이 더 강한데 제대로 된 대접을 안 한다고 불만을 가졌어. 화친의 약속으로 조선의 배와 수군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조선은 그것도 빌려주지 않았어. 임진왜란에서의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주변국가들은 당시 조선의 수군과 전함이 명나라보다 낫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대. 그러고 보면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어서 그나마 결국은 승리를 했는데, 이때는 그런 영웅도 없고, 무능한 임금만 있었으니

5.

홍타이지는 명의 거점이었던 대릉하성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었어. 이 전투를 통해 명나라의 중요 장수들이 청으로 귀순을 했단다. 홍타이지는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고, 그들도 후한 대접에 보답을 하듯이 명군이 가지고 있던 대포와 전함 기술을 전수해주었어. 이로써 후금은 수군도 갖추게 되었단다. 조선은 여전히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장차 후금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가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면서 방어진지도 강화도에만 집중을 하였단다. 참나.. 백성들은 육지에 다 있구만

.

그 사이 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신경을 썼어. 자신의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데만 신경을 썼어. 이것으로 신하들과 계속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일이 년도 아니고 무려 10년이나 이어졌단다.

그 사이 후금은 계속해서 화친 때 약속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인조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의 처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후금과 절교 선언을 해버렸어. 대단한 용기일세. 많은 신하들이 만류하고 간청을 했지만, 절교 선언은 홍타이지에게 전달을 했어.

홍타이지는 오히려 조선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어. 지금은 명과의 전쟁에 치중을 해야 할 때였거든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존재로 생각을 했을 거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는이미 손 안에 든 물건이라고 생각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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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년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인조의 실정을 이야기하면서 정신 좀 차리라고 이야기했지만, 쇠 귀에 경읽기였어.. 강학년의 비판을 소개하면서 병자호란 1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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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1634 11, 강학년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부묘하려는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조반정 이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음의 내용이다.

<서경>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섰습니다. 여러 차례 대란을 겪었음에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만을 써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난정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세상의 드문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엄연년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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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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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05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정으로 명의 눈치를 봤다던 인조 이야기에서 부정선거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박근혜가 연상되네요...

bookholic 2018-04-06 00:10   좋아요 1 | URL
두 분 모두 무능함의 쌍벽을 이루고 있어, 저도 박근혜가 많이 생각났어요..^^

레삭매냐 2018-04-0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선조 다음으로 무능한 왕이 인조가
아닐까 싶네요.

오늘 장만 평전이 나왔다는 소식에 검색해
보니 이괄의 난이 엮어 있더군요...

조선 역사에서 외적이 아닌 국내 반군에게
도성을 뺏긴 모지리 국왕은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대요.

명나라 깡패 모문룡의 갑질 자유이용권...
빵 터졌습니다.

국가운영 대신 정권유지에만 관심있는 정권
의 말로는 결국 삼전도 치욕으로 이어졌지요.

bookholic 2018-04-06 00:13   좋아요 0 | URL
장만이라는 사람은 저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서..^^
<장만 평전>이라는 책 검색을 해봤어요...
관심리스트에 추가해야헸습니다^^
국가운영 대신 정권유지에만 관심을 갖다 보면
삼전도 치욕이나 탄핵 치욕으로 이어지네요~~
 
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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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콩쿠르를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단다. 아빠가 이번에 읽은 소설을 신간소개에서 봤을 때, 느낀 생각이야. 지은이는 유명한 일본 작가 온다 리쿠. 그런데 아빠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야….  이 소설로 2017년 나오키상을 수상했다고 했는데, 무려 156회 나오키상이라그럼 나오키상이란 것은 156년 전에 처음 생긴 거란 말이야? 1800년대에 문학상이라는 것을 만들 생각을 했다고?

나오키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단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년에 두 번씩 주는 문학상이더구나. 1935년에 처음 주기 시작했대.. 그러면 그렇지.. 아무튼 이 소설이 나오키상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눈이 가는 것은 아니었어. 아빠는 단지 콩쿠르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어. 11년간의 취재 기간, 집필기간 7년이라고 하는데, 소설가의 첫 번째 덕목은 역시 인내력과 끈질김이 아닐까 싶더구나.

너희들이 피아노를 배우면서, 피아노에 관심을 많아졌잖아. 그래서 얼마 전에 온 식구 다같이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봤고... 너희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면서, “치야키 센빠이~”라면서 흉내도 냈었지. 그리고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한동한 드라마 OST를 들었잖아. 그러면서 클래식 작곡가들도 몇몇 알게 되었고그래서인지, 이 책을 더 읽고 싶어져서 이번에 읽었단다.

온다 리쿠의 소설은 처음인데, 책이 술술 읽혔단다. 피아노 연주에 대한 비유도 아주 좋아서, 연주자가 어떤 식으로 연주를 했고, 어떤 소리를 냈겠구나 상상할 수 있었어.

집에서 읽을 때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음악을 검색해서 들으면서 읽었어. 너희들과 잠깐 여행을 갔을 때, 너희들이 자고 있을 때도 아빠는 이 소설을 늦게까지 읽었는데여행지에서 맥주 한잔 마시면서 읽는 재미있는 소설책너무 좋더구나. 그래서 이 소설의 기억은 더 오래 남을 것 같구나.

 

1.

이 소설은 일본 하마마쓰시에서 3년마다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모델로 했다고 하는구나. 이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조성진도 수성을 했었대. 이후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고그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지은이는 특별히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조성진과 인연도 이야기했어. 그리고 콩쿠르에 참가자들 중에 한국사람들은 많은 것으로 설정을 했더구나.

.

, 그럼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 사가 미에코 교수는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였어. 요가시에 피아노 콩쿠르 지역 예선이 열리고 있었는데, 미에코는 프랑스 파리의 심사위원이기도 했지. 서류 심사에서 떨어진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오디션이었어. 참가자 중에 잠을 확 깨우는 놀라운 실력자가 한 명 있었어. 가자마 진이라는 일본인으로 음악에 대한 아무런 경력은 없고, 단지 유지 폰 호프만이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부터 사사를 받았다고 했어.

유지 폰 호프만.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인데, 몇 달 전에 죽었는데, 죽기 전 유언으로 폭탄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미에코는 가자마 진의 피아노를 듣자마자 호프만의 유언이 떠올랐어. 그가 남긴 폭탄이 바로 가자마 진일 거라고 생각했어

가자마 진의 아버지는 양봉업자이고, 가자마 진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다가 바로 오디션에 와서 옷도 추레하고 더러웠지만, 그의 음악은 진흙 속 연꽃과도 같았어. 그는 자신의 연주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어. 미에코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진의 연주에 깜짝 놀랐고,  두려움마저 느꼈단다. 그래서 호프만이 폭탄이라고 했던 것 같아. 미에코는 그 두려운 감정 때문에 불합격 처리하려고 했지만, 다른 심사위원의 설득으로 합격 처리를 했단다.

소설의 시작은 콩쿠르에 참가하는 주인공들의 소개로 시작하고 있었어. 앞서 가자마 진을 소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에이덴 아야라는 사람이야. 에이덴 아야는 어려서부터 천재소녀로 불렀고, 이미 많은 리사이틀을 비롯하여 연주회도 가졌어. 그런데 갑자기 후원자인 엄마가 돌아가시고, 피아노를 그만 두었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지. 3 , 엄마의 대학 동기이자 어떤 대학의 음대학장인 하마자키 교수가 찾아와서 아야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고 싶다고 했어. 하마자키 교수는 아야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자신의 학교에 오라고 했어. 그리고 시험을 통해 입학을 했지. 잊고 지냈던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게 된 거야. 하마자키 교수는 아야에게 콩쿠르를 권했고, 아야도 고마움에 참가하겠다고 했어.

다카시마 아카시. 28살의 유부남이자 이번 콩쿠르 참가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야. 예전에 피아노를 쳤으나 그 꿈을 접고, 악기 회사에 다니던 그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콩쿠르 참가를 결심했단다. 일년 동안 준비를 하고 드디어 예선을 앞두고 있었지.

마사루. 줄리어드 음대의 비밀 병기라 불렸어. 미국인으로 참가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일본계 페루인이고, 아빠는 프랑스사람이야.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잠시 살기도 했는데, 그때 이웃집 소녀(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소녀가 아야일 거라고 쉽게 추측이 되는…^^)때문에 피아노를 접했어. 그때 마사루가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야와 아야의 선생님은 마사루에게 피아노를 배우라고 이야기했어. 마사루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2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줄리어드 음대까지 입학하게 된 거야. 아직 어렸을 때 일본에서 만난 어린 소녀를 잊지 못하고, 소녀가 선물로 준, 피아노가 그려진 음악학원 가방을 간직하고 있었어. 그리고 마사루는 큰 키에 준수한 외모로 인기가 좋았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주요 참가자는 네 명이란다.

가자마 진, 에이덴 아야, 다카시마 아카시, 마사루

 

2.

아야는 하마자키 교수의 딸 가나데가 콩쿠르 준비를 도와주었어. 가나데는 아야의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대. 콩쿠르에 나갈 때 입을 옷도 빌려주었어. 적극적인 협조를 했어. 아야는 연습하러 학교에 갔다가 정말 잘 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피아노 연주 소리에 이끌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어. 그곳에는 어떤 소년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그 소년은 아야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도망을 쳤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소년은 바로 가마자 진이었단다.

드디어 1차 예선. 5일간 진행되며 참가자 90. 한 사람당 20첫째 날, 눈에 띠는 참가자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온 제니퍼 챈과 마지막 주자였던 다카시아 아카시였어…. 둘째 날은 단연 마사루가 돋보였어. 피아노 실력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뛰어나 곧바로 스타가 되었단다. 마사루 때문에 마사루 다음에 연주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기도 했단다. 아야와 하자마 진은 마지막 날 연주했어. 하자마 진은 프랑스 지역 예선 때 있었던 일로 이미 소문이 자자해졌고, 아버지를 따라 양봉업을 해서 꿀벌왕자라는 별명도 붙었어. 그리고 그 소문이 헛된 것이 아님을 단 20분만에 보여주었어. 그리고 아야의 연주도 깊은 여운을 남겼단다. 아야의 연주를 관객석에 본 마사루.. 한 눈에 아야가 어렸을 적 일본에서 알게 된, 잊지 못하고 있던 그 소녀라는 것을 알았어. 아야의 연주가 끝나고 마사루가 아야를 찾아가고 재회를 했지. 아야는 마사루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사루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을 해냈어. 1차 예선이 끝나고 2차 예선에 통과한 사람은 모두 24명이었고, 예상대로 4명은 모두 통과했단다..

2차 예선은 40분 내외를 연주해야 해. 연주할 곡들은 주최측에서 선정한 주제곡들 중에서 고르고, 모든 참가자들이 주최국의 작곡가의 신곡을 연주하는 것이 있어. 올해는 히시누마의 <봄과 수라>라는 곡이야. 마사루와 아야는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준비를 했어. 그들은 콩쿠르가 끝날 때까지 어렸을 때 쌓다 말았던 우정을 다시 쌓았단다. 소설책 너머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카시는 무난하게 2차 예선을 연주했단다. 점점 실력도 늘어나는 것 같았어. 가자마 진은 스승님이 죽기 전에 해주신 말들을 생각하면서 준비를 했고, 가자마 진은 콩쿠르가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 기회라며 좋아했어. 마사루는 2차 예선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나, 특히 <봄과 수라>라는 곡의 카덴차가 뛰어났어. 카덴차라는 것은 연주자의 즉흥연주라고 생각하면 돼. 작곡자가 악보에 어떤 부분을 비어두어 연주가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란다.

콩쿠르에서 참가자들이 같은 곡을 연주하게 될 때, 이 카덴차 부분의 연주에 따라 곡의 성격이 많이 바뀔 것 같구나. 아무튼 마사루의 카덴차가 너무 뛰어나서,  아야는 그 음이 잊혀지지 않아 자신의 카덴차에 영향을 받을 것 같았어. 그래서 카덴차를 연습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스승님의 친구의 집에서 연습을 했어. 그런데 아야를 몰래 쫓아오는 이가 있었으니 가자마 진이었어. 진은 같이 연주를 하자고 제안했어. 그러면서 아야는 진과도 친해졌지. 그리고 진과 피아노 연주를 하고 난 이후, 아야는 무엇인가 변한 듯한 모습이었어. 진의 연주를 통해 자신의 실력도 올라갔고, 자신만의 카덴차를 완성할 수 있었단다.

..

2차 예선 마지막날, 진의 파격적인 연주로 연주회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어. 진의 뒤이어 나온 아야는 그 뜨거운 열기를 다른 방식으로 감각적으로 색다른 연주를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단다. 2차 예선 결과 12명이 통과했는데, 주인공들 중에서는 아카시가 탈락했단다. 그리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온 제니퍼 챈이 탈락했는데, 제니퍼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거친 항의를 하기도 했대.

가마자 진은 턱걸이로 합격을 했는데,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렸어. 그런데 공통적인 생각들은 다음 연주를 또 듣고 싶게 만드는 연주라는 거야.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불호보다 호가 점점 많아졌어. 한국 참가자들도 4명이나 12명이 하는 3차 예선에 통과한 것으로 나오는구나. 우리나라의 어린 피아니스트들이 국제 콩쿠르 대회를 많이 참석하는가 보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3차 예선과 여섯 명만 남은 본선그리고 최종 수상자…. 과연 누가 일등을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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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통해서 콩쿠르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게 되어 좋았단다. 이 책에서 소개된 음악도 찾아서 들어보았는데, 아주 좋았단다. 책의 앞부분에 이 책에서 소개된 음악의 작곡가와 제목을 정리해 주어서 찾아보기 편했단다. 새로 알게 된 음악가들도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온다 리쿠라는 좋은 작가를 뒤늦게 알게 되어 좋았단다. 그의 다른 책들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305)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버리기 때문이지.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다카시마 아카시라는 사람의 연주는 재미있었다. 수면의 잔물결, 시원스레 지나가는 바람, 칠흑 같은 우주까지 보였다. 저 사람 역시 자기만의 음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641)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처음 보았을 때는 이런 걸 어떻게 치란 말이야,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야말로 악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수많은 음표들. 양손 화음이 끝도 없이 잔뜩 늘어서 있는 새까만 악보.
동경하던 낭만적인 2번을 몰래 연습해보았을 때는 해서는 안 될 장난을 치는 기분이었지. 물론 그때는 결국 흉내도 내지 못했다. 띄엄띄엄 연주하는 게 고작이라, 한 곡을 끝까지 연주할 체력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654)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아주 조금, 지상의 중력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그에 가장 합당한 답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는 순간에 곧 사라지는 음악. 그 행위에 정열을 쏟고, 인생을 바치고, 마음을 강하게 빼앗기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덧붙은 작은 마법 같은 옵션 기능이 아닐까?
응, 어느 정도 진실을 담아낸 답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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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인위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공업이라고 한다면, 농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종하기보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틀에 순응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땅으로 돌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환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순환의 틀에 순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훼손은 되거든요. 자연이 소모가 돼요. 그렇지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어요. 그 방법이 유기농업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죠.

(22)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농장을 둘러보았다. 집 뒤에는 농산물 가공작업을 하는 건물이 있고 안에는 저온창고, 곡물 가루를 찌는 커다란 솥, 제분기, 반죽기, 발효기 등의 설비가 잔뜩 있었다. 거의 모두 선생이 손수 설계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 강의실 겸 식당, 주방,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또 그 뒤에 축사가 있었다. 널찍한 축사에는 20여 마리의 암소와 송아지, 돼지 20여 마리, 산양, 닭이 느긋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잔돌이 많은 넓은 밭이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쪽에선 마늘과 양파가 추위를 피해 비닐을 덮고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옆에는 작은 비닐하우스 여섯 동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모두 녹비작물로 덮여 있었다. 증폭제를 만들어 보관해둔 상자도 눈에 뜨였다. 5,000여 평 땅에서 이 많은 일을, 선생 내외분의 힘으로 감당해오신 것이다. 이 농장은 선생 가족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학교이며,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낙원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39)

산업농은 단절된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식품생산과 인간의 영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즉각적인 금전적 수익 추구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농민들과 농기업들은 갈수록 옥수수처럼 영양가 낮은 작물의 단일 재배에 집중하고 있다. 옥수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작물인데, 흔히 영양가 없고 열량만 높은 식료품으로 가공된다. 그 결과 19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빈곤지역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건강한 식생활 패턴이 빠르게 증가했다. 오늘날 비전염성 질환의 대부분이 식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2020년이 되면 그러한 질병이 전세계 사망 원인의 대략 75%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88)

현재 아베 정권은 단계적으로 현행 평화헌법을 전쟁이 가능한 헌법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와 아울러  교과서 내용에서도 점진적으로 제국주의시대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분량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 국가 틀(헌법)의 개편과 함께 국민들의 제국주의 역사와의 친화를 도모하기 위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은 그것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일등 공로자인 사이고 다카도리는 평화사절 파견론자로 계속 미화될 것이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일본 공영방송의 대화드라마는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102)

역사를 사람들의 주체적 선택의 누적으로 봐야, 역사의 실패도 잘못도 반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우리가 자립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한 자립한 자각적 주체성의 결여야말로 전쟁이라는 비참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었던가. 모든 것을 시세나 대세에 맡기고 책임을 방기하는 태도야말로 사대주의이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148)

탈원전은 이미 역사의 대세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력발전을 확실히 포기하는 일이다. 원전을 폐쇄해도 갈탄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독일은 세계 갈탄 소비 국가이고, 대형 전력회사들과 지자체들이 관련되어 있어 탈석탄은 쉽지 않다. 독일에는 이미 폐쇄된 원전들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그와 연계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폐쇄가 지역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탄은 다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까지 겪고 있다. 따라서 갈탄산업을 대체하려면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주에 대해서는 연방정부의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165)

문재인 정부는 단지 양심적인 진보파 정부라는 자기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동확농민전쟁 이후 최초로 성립된 민주정부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사실 김대중 정부도 군사독재세력(김종필)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했고, 노무현 정부의 출현 역시 재벌세력(정몽준)과 어느 정도 손을 잡은 결과였다. 그래서 결국, 정권 탄생 시의 근본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이명박이라는 희대의 사기꾼과 박근혜라는 극단적으로 아둔하고 무책임한 인물에게 정권을 내주는 참사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등은 물론 군사독재와 오랫동안 싸워왔던 민주화 투사들이 집권하여 정부를 운영한 정권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최초이다. 이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이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요소요소에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사생결단을 한다는 각오로 온갖 부패, 비리, 부조리에 구조를 혁파하고, 역사의 진로를 용기 있게 개척해야 한다. 그런 안목과 결연한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실은 걱정이 많이 된다.

(174)

예를 들어, 당장 개헌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의 국회에서는 결코 정당한 개헌안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다. 선거법을 개정하고 헌법을 보다 민주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게다가 자기들의 재선 가능성을 줄이거나 특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선거법 개정은 절대로 용납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도 지난번 원전문제를 처리할 때처럼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다. 실은 최근에 몽골에서도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론조사 방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나서서 이를 관철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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