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어렸을 때는 누구나 다 예쁘죠. 살도 부드럽고, 어른들도 어린이는 누구나 다 예뻐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어린이처럼 돼라,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돼 있죠. 결론인즉 순순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게 핵심일 겁니다. 초심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받은 가르침이나 교훈을 잊지 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또 자아가 형성되면서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때가 묻습니다. 나이가 든 만큼 때가 많이 묻게 되는 거죠. 그러니 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 기자는 늘 초심을 잃지 않으니 존경한다고 말할 수밖에요. 저는 주기자를 만날 때마다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73)

미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퓨처(future),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오는 미래에요. 그런데 성서의 대림에서 말하는 미래는 앞당기는 미래, 선취하는 미래입니다. 선취적 미래, 그러니까 내가 지금 비록 2015년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미 2020, 아니 멀리 2050년을 살고 있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이룩되고 통일이 이룩된, 박근혜는 이미 타파된 그런 미래를 살고 있는 거죠. 여러분이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75)

하느님, 불의한 정치인과 관료들, 재벌, 부패한 모든 공직자들, 사법부와 검찰 인사들을 모두 정화해주시고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꼭 이루어주십시오. 저희와 국민 모두를 깨우쳐주십시오. 순국선열의 고귀한 뜻, 그리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애썼던 희생자의 삶을 늘 되새기며 아름다운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 역사를 배운다는 주제 속에서 나 개인의 삶, 가정의 삶, 공동체의 삶과 증언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핵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거짓된 자들이 잠시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만, 역사의 물줄기와 기록은 그것을 넘어서 언제나 정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꿈을 실현해가는 가족들, 그리고 우리 겨레와 동지들을 영육간에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옵소서. 이 밤, 기쁘게 잠들 수 있게 해주시고 희망찬 기쁨의 내일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우리 시대의 주역인 청년들에게 희망과 기적을 보여주옵소서.

(101)

저는 비례대표제가 바뀔 수 있다면 국회의원 수도 현행 300명에서 50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 때는 인구 10만 명당 한 명의 국회의원이 나왔어요. 그러니 인구가 5천만 영인 지금은 500명쯤 나오는 게 맞지요. 우리가 정책을 논할 때 300명이 논하는 게 좋겠습니까, 500명이 논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많은 쪽이 좋겠죠. 국회의원 늘리면 세비가 더 늘어난다고 하는데, 지금 대통령이 한 해 동안 주무르는 예산이 얼마입니까? 375조 원이에요. 이걸 청와대와 재경부가 마음대로 씁니다. 반면 국회 예산은 27백억 원, 인건비까지 합쳐도 54백억 원에 불과합니다. 비교가 안 되는 수치입니다. 국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감시하는 게 국회입니다. 더 많은 국회의원들이 감시할 수 있어야 해요. 다 우리 세금이니까요. 청와대와 재경부가 자기들 만대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해야죠.

(159-160)

제가 함석헌 선생님을 직접 뵙기도 하고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게 많아요. 그분은 자신을 소개하시길 나는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다라고 하세요. 그분이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서 서너 번 가신 분인데, 해방이 된 다음에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해요. 그 뒤 , 내 나라 내 땅에서 고문을 당하다니싶어 북한을 몰래 탈출해 남한으로 건너오죠.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이건 또 이승만 독재에 박정희 독재에 온통 독재뿐인 거예요. 여기 맞서 싸우다 보니 , 나는 일제와 싸우고, 소련과 싸우고, 북한 공산당과 싸우고, 남한에 와서는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와 싸우는구나. 이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 거죠. 그러면서 고백하신 말씀이 나는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우리 역사와 연결시킬 수 있을 때, 그러니까 순국선열, 한국의 역사, 우리 민족을 위해 나는 발길에 차인 사람이다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26-227)

우리 모두는 이 사회의 불덩어리예요. 더러운 것을 태우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이 불덩어리를 함부로 대하면 꺼질 수도 있고 짓밣힐 수도 있겠죠. 그러니 각자 주부는 주부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그냥 흘려듣지 마시고 왜 저렇게 보도하는지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그런 보도를 하는 저의가 있고 나름의 계획이 있는 거니까요. 이런 걸 파악할 때 우리는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겠죠. 새누리당이나 새정치연합 국회의원이 얘기하는 것, 박근혜가 이야기하는 것, 국무총리, 검찰, 법관들이 얘기하는 것의 속내가 뭔지도 다 보일 거고요. 이런 것들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집중하셔야 해요. 집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부모님이 내게 무엇을 가르치셨나내지는 이럴 때 나의 부모님이라면, 나의 스승님이라며, 예수님이라면, 또는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면서 우리 생각을 확장해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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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59호 - 2018년 3월~4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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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또다시 봄이 찾아왔구나. 예전에 봄이라고 하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떠오르지만, 봄이 온다고 하면 미세먼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구나.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식구가 봄을 맞이하여 놀러 가면 미세먼지가 언제나 따라와서 숙소 안에 콕 박히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올 봄은 아예 놀러 갈 생각을 접었단다. 역시나 시도 때도 없이 미세먼지가 습격하여 화를 돋구는구나. 그래도 최근에는 좀 나아졌지만, 언제 또 습격할 지 모를 일이야. 여름철에 더위에 의한 불쾌지수란 것이 있는데, 이젠 미세먼지로 인한 불쾌지수 또는 울화통지수라는 것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인가….

아빠의 어린 시절의 향기로운 봄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정말 답답하구나. 봄이 되어서 그런지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약간 봄과 비슷한 “농본주의가 세상을 살린다라고 정했단다. 농촌이 살아야 나라도 살고, 농촌이 살아야 미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단다. 이번호에 농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녹생평론에서는 그동안 줄곧 농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단다. 다시 한번 특집으로 정리를 해 준 것 같아 좋았어.

미래에 단 하나의 직업이 남는다고 하면 그것은 농업일 거야. 그런데 그 농업이라는 것은 산업농, 기계농은 아니고 소규모 자작농이 되겠지. 농업을 하라고 해서 무조건 하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산업농과 기계농 등 대규모 기업형 농사는 오히려 땅을 망치고 지구를 망치고 환경 오염의 주범인 것이야. 산업농 시스템은 엄청난 비효율을 자랑하고 있단다. 그런 비효율성 때문에 비료 사용이 날로 급증하게 되고, 이 비료는 지하수를 먹는 하마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물부족을 부추기게 되고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난화 가스의 주범을 배출하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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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산업농은 단절된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식품생산과 인간의 영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즉각적인 금전적 수익 추구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농민들과 농기업들은 갈수록 옥수수처럼 영양가 낮은 작물의 단일 재배에 집중하고 있다. 옥수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작물인데, 흔히 영양가 없고 열량만 높은식료품으로 가공된다. 그 결과 19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빈곤지역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불건강한 식생활 패턴이 빠르게 증가했다. 오늘날 비전염성 질환의 대부분이 식사와 관련되어 있는데, 2020년이 되면 그러한 질병이 전세계 사망 원인의 대략 75%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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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럼 대안이 있는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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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인위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공업이라고 한다면, 농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종하기보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틀에 순응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땅으로 돌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환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순환의 틀에 순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훼손은 되거든요. 자연이 소모가 돼요. 그렇지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어요. 그 방법이 유기농업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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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법의 소농이 답이 될 수 있단다. 그런데 작게 농사를 지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겠니.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으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빠는 다른 건 모르겠고, 농민들에게는 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것만이 죽어가는 농업을 살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

두달 후면 지방선거가 있단다. 이번 광역단체장 중에서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오는 후보가 있으면 좋겠구나. 이제,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는 많이 익숙해졌잖아. 이제쯤은 나올만한 공약 아니겠니…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이 책에서 생태순환농사, 즉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장길섭씨를 인터뷰한 글을 실었는데, 그 인터뷰를 맺으면서 장길섭씨의 농장을 묘사하는데,, 글쓴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낙원의 모습이 떠오르더구나. 아마 아빠도 마음 한 구석에는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없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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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농장을 둘러보았다. 집 뒤에는 농산물 가공작업을 하는 건물이 있고 안에는 저온창고, 곡물 가루를 찌는 커다란 솥, 제분기, 반죽기, 발효기 등의 설비가 잔뜩 있었다. 거의 모두 선생이 손수 설계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 강의실 겸 식당, 주방,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또 그 뒤에 축사가 있었다. 널찍한 축사에는 20여 마리의 암소와 송아지, 돼지 20여 마리, 산양, 닭이 느긋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잔돌이 많은 넓은 밭이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쪽에선 마늘과 양파가 추위를 피해 비닐을 덮고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옆에는 작은 비닐하우스 여섯 동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모두 녹비작물로 덮여 있었다. 증폭제를 만들어 보관해둔 상자도 눈에 뜨였다. 5,000여 평 땅에서 이 많은 일을, 선생 내외분의 힘으로 감당해오신 것이다. 이 농장은 선생 가족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학교이며,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 낙원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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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해가 메이시유신 150주년이라고 하는구나. 다른 나라 역사적인 사건을 뭐 좋은 거라고 이야기하나 싶을 수 있겠지만, 일본이 그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맞이하여 성큼 오른쪽으로 또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글들을 실은 것 같구나. 메이지유신 150주년과 요즘 일본 동향에 대한 글은 적은 이유를 알겠더구나. 일본이 점점 우경화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최근 들어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구나.

일본의 권력층인 속마음은 변한 것 없이, 그동안 꾹꾹 참고 지냈던 것은 아닌가 싶구나. 그리고 그 속마음을 다시 끄집어 내 행동으로 나타내는데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그런 모략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구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안 하는 일본의 자세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잖니. 1945년 종전조서에도 아시아 민중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언급이 안되었대. 이미 그때부터 사과라는 것은 마음에 없었던 거야. 그들은 종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들은 메이지유신을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자랑질을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제국주의국가의 시작이었고, 그로 인해 아시아 민중들이 오랫동안 고통 속에 살았던 것을 그들은 모른 채 하는 거야. 그럼에도 그들은 메이지유신에 대한 그림자는 보지 않고, 빛만 보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공로자를 드라마로 제작해서 영웅시 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역사왜곡은 끝이 없어 보이는구나.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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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현재 아베 정권은 단계적으로 현행 평화헌법을 전쟁이 가능한 헌법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와 아울러  교과서 내용에서도 점진적으로 제국주의시대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분량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 국가 틀(헌법)의 개편과 함께 국민들의 제국주의 역사와의 친화를 도모하기 위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은 그것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일등 공로자인 사이고 다카도리는 평화사절 파견론자로 계속 미화될 것이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일본 공영방송의 대화드라마는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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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한번 탈핵을 이야기를 다루었단다. 탈핵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독일의 환경단체 인터뷰를 실었어. 2020년이면 전면적인 탈핵을 하는 독일의 에너지 상황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가 싶었어. 정상적인 국가와 국민이라면 탈핵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연한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구나.

독일은 탈핵을 대비하여 재생에너지의 비율을 꾸준히 높이고 있대. 2016년에는 31.5%가 재생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대. 재생에너지 중에서는 풍력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바이오, 태양광 순서라고 하는구나. 재생에너지의 초기 설비 비용으로 전기료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하는데, 국민들도 그런 것을 감수하고도 찬성을 한다고 하는구나. 지금 돈이 문제인가? 나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데개인이 얼마의 돈을 써서 안전과 건강이 보장된다면, 누구나 돈을 쓸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

독일은 어떻게 이렇게 탈핵에 국민 전체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을까? 독일의 핵발전 반대 운동의 역사는 무척 길다고 하는구나. 1970년대부터 이미 반대 토론이 이루어졌어. 그리고 지방자치정치구조이다 보니 거센 지역 주민의 반대가 있으면 주정부는 주민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대. 그리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도 컸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독일은 녹색당이 의회에 상당수 진출하여 탈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는구나. 물론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그들은 기존의 화력발전소와 원전도 아직 가동을 하고 있어. 수출원이기 때문이야. 화력발전소와 원전에서 만들어낸 전기를 주변국가들에게 팔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다 보니 화력발전소, 원전 등이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있어.. 최근 정치권에서도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입장이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대. 이런 정치권에 대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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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탈원전은 이미 역사의 대세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력발전을 확실히 포기하는 일이다. 원전을 폐쇄해도 갈탄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독일은 세계 갈탄 소비 국가이고, 대형 전력회사들과 지자체들이 관련되어 있어 탈석탄은 쉽지 않다. 독일에는 이미 폐쇄된 원전들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그와 연계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폐쇄가 지역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탄은 다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까지 겪고 있다. 따라서 갈탄산업을 대체하려면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주에 대해서는 연방정부의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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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런 모습을 하면서, 부럽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나라는 언제쯤 국민들이 원전의 고위험성과 고비용에 대해 이해를 할까. 탄핵촛불처럼 탈핵촛불이 타오를 수는 없는 것일까.

4.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씨가 나눈 대담을 실었는데, 문재인 정부를 동학농민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정부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기대를 하는 것 같았어. 아빠도 물론 기대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시스템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런 것은 이해해 주어야지. 그리고 이왕이면 대한민국 시스템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딴지 거는 이들이 오늘도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데, 정말 꼴보기 싫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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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문재인 정부는 단지 양심적인 진보파 정부라는 자기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동학농민전쟁 이후 최초로 성립된 민주정부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사실 김대중 정부도 군사독재세력(김종필)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했고, 노무현 정부의 출현 역시 재벌세력(정몽준)과 어느 정도 손을 잡은 결과였다. 그래서 결국, 정권 탄생 시의 근본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이명박이라는 희대의 사기꾼과 박근혜라는 극단적으로 아둔하고 무책임한 인물에게 정권을 내주는 참사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등은 물론 군사독재와 오랫동안 싸워왔던 민주화 투사들이 집권하여 정부를 운영한 정권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최초이다. 이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이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요소요소에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사생결단을 한다는 각오로 온갖 부패, 비리, 부조리에 구조를 혁파하고, 역사의 진로를 용기 있게 개척해야 한다. 그런 안목과 결연한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실은 걱정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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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 소개된 서평들도 읽고 싶은 충동을 주는 책들이 실려 있었단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도 읽고 싶고, 이육사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강철로 된 무지개>도 꼭 읽어보고 있었어. 그 밖에 <시의 눈, 벌레의 눈>이라는 책과 기본소득에 관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란 책도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았단다.


(21)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 순환의 질서를 깨뜨리고 인간이 마음대로 인위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공업이라고 한다면, 농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조종하기보다 자연의 순환이라는 큰 틀에 순응해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또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땅으로 돌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환경을 더 풍요롭게 만들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순환의 틀에 순응하면서 산다고 해도 훼손은 되거든요. 자연이 소모가 돼요. 그렇지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어요. 그 방법이 유기농업적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보는 것이죠.

(102)

역사를 사람들의 주체적 선택의 누적으로 봐야, 역사의 실패도 잘못도 반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우리가 자립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과 표리의 관계에 있다. 그러한 자립한 자각적 주체성의 결여야말로 전쟁이라는 비참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었던가. 모든 것을 시세나 대세에 맡기고 책임을 방기하는 태도야말로 사대주의이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148)

탈원전은 이미 역사의 대세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화력발전을 확실히 포기하는 일이다. 원전을 폐쇄해도 갈탄 사용을 중단하지 않고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독일은 세계 갈탄 소비 국가이고, 대형 전력회사들과 지자체들이 관련되어 있어 탈석탄은 쉽지 않다. 독일에는 이미 폐쇄된 원전들이 있는데, 해당 지역에 그와 연계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폐쇄가 지역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탄은 다르다. 게다가 이 지역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며 높은 실업률과 인구 감소까지 겪고 있다. 따라서 갈탄산업을 대체하려면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주에 대해서는 연방정부의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174)

예를 들어, 당장 개헌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의 국회에서는 결코 정당한 개헌안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이다. 선거법을 개정하고 헌법을 보다 민주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게다가 자기들의 재선 가능성을 줄이거나 특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선거법 개정은 절대로 용납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헌이나 선거법 개정도 지난번 원전문제를 처리할 때처럼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다. 실은 최근에 몽골에서도 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론조사 방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나서서 이를 관철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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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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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세여자> 2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권의 줄거리는 다시 안 해도 되지?

..

고명자는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옛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를 소리를 듣고, 남은 가족들과 멀어지면서 혼자 외롭게 지내게 되었어. 경찰들은 계속 감시를 하면서도 전향을 했다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다그쳤어. 옛 동료들을 찾아가 회유하라고 협박까지 했어. 그 와중에 단야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 헛소문단야는 이미 모스크바에서 누명을 쓰고 죽었잖아. 단야만 생각하고 있던 명자는 그 소문을 듣고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무작정 나라밖으로 갈 생각에 신의주로 향했다가 사기만 당하고 빈털터리로 다시 경성으로 왔어.

그렇게 외롭게 지내던 명자에게 옛 동지 박희도와 김한경이 찾아왔어. 잡지사동양지광에서 같이 나와서 일하자고 했어. 명자와 같은 지식인 여성이 필요하다고 했지. 명자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어. 답변을 안 하자 경찰까지 찾아와서 협박을 했어. 다시 감옥을 갈래? 동양지광에 출근할래? 결국 명자는 동양지광에 기자로 취직을 했어. 명자가 망설였던 이유는 그곳은 친일잡지를 만들던 곳이었어.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전쟁에 자연하라는 내용이었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명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전향한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어. 다들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어 있었어. 또 한번 크게 실망.

고명자는 기자 일만 했던 것은 아니야.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어. 박헌영, 여운형을 회유해라…. 이걸 어떻게 하겠니..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양지광은 휴간을 했어. 다시 고독하고 우울한 시간들.. 멀리서 들려온 정숙의 소식.. 조선의용군에 들어갔다고비록 전쟁터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겠지만.. 고독하고 외로움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1.

1945 8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너무나 갑작스러운명자는 해방되기 얼마 전부터 여운형의 연락을 받고 건국동맹비밀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어. 그리고 해방 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여운형은 명자가 전향했던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견디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전향이라고 이해해 주었어. 해방이 된 조선땅에 소련과 미국이 진군한다는 소식은 모든 백성들에게 좌절을 심어주게 되었단다. 죄는 일본이 지었는데, 벌은 조선이 받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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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에 있던 정숙도 일본의 패전 소식과 항복 소식을 들었어. 조선의용군들은 모여서 경성 귀환에 대한 회의를 했어. 그동안 정숙은 창익과 다시 이혼을 하고 동지로 남았단다. 그들에게 소련과 미국의 분할점령 소식이 전해졌어. 다들 이해가 가지 않는 움직임이었지. 정숙을 비롯한 조선의용군은 평양으로 가기로 했어. 남쪽은 반공주의로 똘똘 뭉친 미국이 들어와 있다고 하잖아. 북쪽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성공한 소련이 와 있으니, 비록 고향은 서울이지만, 정숙은 평양행이 맞다고 생각했어.

행군으로 신의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단다. 그들을 반기는 환영인파는 기대도 안 했을지 몰라. 하지만, 무장 해제 당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 심사까지 했을 때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평양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어. 소련이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 대위를 앞세우고 있다는 소식이었어. 항일 투쟁에 있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김일성이 갑자기 나서게 되니 다른 이들은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어.

그 와중에 거기에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있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지. 평양에 도착한 정숙과 조선의용군은 김일성과 만났어. 생각보다 김일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어. 호감이 갔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도 해방 소식을 들었단다. 세죽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대를 잠시 했지만, 길이 보이질 않았어.. 길이세죽은 딸 영이, 아니 이제 러시아 이름이 더 익숙한 비비안나와 점점 멀어졌어.


2.

명자는 여운형 아래에서 일을 했지만, 미군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5년간 신탁 통치를 한다고 결정했는데, 이후에는 전국이 반탁과 친탁으로 갈리게 되었어. 이때 반탁이었던 박헌영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서자, 남한에서는 거의 매장 분위기였단다. 결국 박헌영은 북한으로 향했어. 남북을 초월했던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이끌던 박헌영이 북한에 오자, 대단한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북한의 일인자는 젊은 김일성이었어. 박헌영이 설 자리는 김일성의 옆자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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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는 해방을 했으니 단야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서울역에 나가보곤 했단다. 그런 명자를 보기가 안쓰러워 여운형은 사람을 시켜서 단야의 소식을 알아냈단다. 단야는 이미 10년 전에 죽었다고 했어. 더 이상은 알려 하지 말라고 했어. 더 이상이라 함은 죽기 전에 단야가 세죽과 재혼했다는 것이겠지. 명자가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동안 단야만 믿고 버텨왔는데…. 여운형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윤동명이라는 사람을 명자에게 소개시켜 주었어. 고명자는 윤동명과 재혼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비극 하나자신을 그렇게 잘 봐주고 지원해주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거야.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어. 일본의 총칼도 수십 년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는데, 같은 민족에 의해 죽는 사건들.. 정말 비참하고 슬픈 일들이구나.

한편, 정숙은 몇몇 불만들이 있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소비에트 국가 만들기에 협조하기로 했어. 김일성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어. 김일성파, 연안에서 온 연안파, 남쪽에서 올라온 조선공선당파, 소련파 등등…. 계속되는 분파들의 갈등들김일성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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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어. 세죽의 소식을 들은 거야. 세죽이 유형지에서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보내달라는 요청 문서를 보내온 것이야박헌영이 오케이만 하면 세죽은 평양으로 올 수 있었어. 하지만 박헌영은 냉담하게도 거절을 했단다. 세죽의 처지 좀 생각해 주지세죽은 남편 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있었고, 상황이 단야와 재혼하게 만들었고, 단야와 고작 3년 생활을 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형 생활을 7년이나 하고 있으니책을 읽는 아빠가 다 억울하더구나. 속 좁은 박헌영어찌 인민을 보살피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변한 것이냐…. 심지어 모스크바에 와서 딸까지 만났었는데, 세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박헌영, 너는 이미 변절한 사람이도다. 세죽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야. 세죽이 잘못한 게 뭐 있단 말이야. 이 속좁은 인간아.

명자는 남부연석회의의 남한대표 중 한 명으로 평양을 가게 되었어. 평양에서 정숙을 만나고 정숙을 통해 충격소식을 들었어. 단야와 세죽이 재혼했다는 소식그리고 세죽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자유 연애를 하는 정숙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단야 한 사람만 믿고 십 년 넘게 기다린 명자에게는…. 뒤늦은 심한 배신감…. 정숙은 명자에서 평양에 남아달라고 했지만, 명자는 서울을 선택하게 된단다.

비비안나는 무용수로 유명해져서 평양까지 공연을 하러 왔단다 평양에 있으면서 아버지인 박헌영도 만나고 허정숙도 만났어.

..


3.

1949년에서 50, 평양은 전쟁을 통한 남조선을 해방하는 의견들이 많았어. 정숙은 한 민족끼리 전쟁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대세는 전쟁으로 기울었단다. 참 안타깝구나. 일제의 지옥에서 벗어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이번에는 같은 민족끼리 전쟁이라니..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없었던 말인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전쟁의 불가피함을 설득해야 했어. 정숙은 모택동과 인연이 있어서 모택동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어. 중국은 개입을 안하겠다, 하더라도 미국이 먼저 개입하게 되면 하겠다고 했어. 그리고 1950 6 25일 전쟁이 시작되었어.

전쟁 직전 서울은 공산주의가 불법으로 되어 있었어. 공산주의자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어. 명자도 도망 중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고 있었어. 그 와중에 전쟁이 일어났어. 이때 남한은 후퇴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을 많이 죽였는데, 김삼룡, 이주하 등이 이때 처형되었다고 하는구나. 다행히 명자는 다시 풀려났어.

북한군의 진군을 본 명자는 마치 해방 때의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명자가 일했던 근로인민당 사무실에 다시 출근을 했어. 하지만, 노동당은 근로인민당이 중도 성향을 띠고 있어서 인정하지 않았고, 명자는 친일 활동을 했던 근거를 들어 전향서를 쓰라는 명령을 받았어.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니…. 해방이라고 느꼈던 명자가 며칠 만에 다시 수감되어 며칠 동안 전향서를 쓰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어. 집에 먹을 것도 없어서 굶주리는 날이 많았고, 당의 명령으로 툭하면 사역을 하러 나갔어. 결국 명자는 병에 걸려 외롭고 쓸쓸하게 죽고 말았단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면서, 북한군은 압록강까지 밀려났단다. 그러자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기 시작했어. 전쟁이야 최고 지도자의 책임이지 뭐 볼 게 있겠니. 다만, 그에게 니 책임이다 물러나라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문제지. 그러다 보니 그 밑에 어떤 사람한테 덮어 씌울까 그걸 고민하게 된 거야. 결국 3여 년에 걸친 전쟁은 남북을 둘로 그대로 유지된 채 끝나고 말았어. 전쟁을 왜 한 건지

전쟁이 끝나고 북한에서는 다시 책임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수상인 김일성은 이걸 이용해서 반대파를 제거해 나갔단다. 빨치산파, 남로당파, 연안파를 차례대로 숙청했어. 박헌영은 미국 스파이로 몰려 사형을 당했어. 문화선정상이었던 허정숙은 이런 사태를 일어나지 않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리고 자신도 연안파였잖아. 결국 허정숙은 생존을 위한 선택들을 했단다. 허정숙도 잠시 연안파 숙청 때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가족까지 끌어들인 협박에 결국 김일성 편에 서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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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세죽비비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크바에 왔어. 비비안나가 결혼하면서 비비안나도 조금씩 엄마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어. 1953년 전쟁이 끝나고도 여전히 세죽은 크질오르다에 있었어. 그곳에서 신문을 통해 박헌영의 체포 소식을 들었어. 비비안나가 걱정이 되었어. 당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도 벌을 받는 연좌제가 당연시되었거든..

비비안나가 걱정이 된 세죽은 모스크바로 향했어. 당시 공포 정치를 벌였던 스탈린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모스크바를 가득 메우고 있었거든하지만 모스크바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 이제 나이도 있으니…. 가는 길에 세죽은 폐결핵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모스크바에 도착했어. 딸 비비안나는 지방 공연 중으로 없었고, 사위 빅토르가 보살펴주었어.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그만 죽고 말았단다. 다음날 비비안나가 도착을 해서 엄마의 임종을 보지도 못했어.

세죽의 죽음의 여정을 읽을 때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졌단다. 이것이 단지 허구가 아니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아. 자신의 열정으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니너무 가슴이 아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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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중에 생존한 이는 이제 정숙 하나뿐이구나. 정숙은 숙청의 바람에서 살았고, 1980년대까지도 북한에서 여러 중요 요직을 맡아서 활동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1991년 눈을 감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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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이 소설을 가슴 아프지만 재미있게 읽었단다. 지은이 조선희라는 분은 처음 알게 된 분인데, 이 분이 쓰신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중간이 공직의 일을 맡는 바람에 소설을 쓰는데 12년이나 걸렸다고 했는데, 이런 소설을 써 주셔서 정말 고맙더구나. 직접 전할 길은 없으니, 아빠는 이 책을 주변 사람들한테 추천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달하기로 했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 보았던 드라마 <1945>가 많이 생각이 났고, 태백산맥, 아리랑 등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들도 생각이 나고, 이 책에 등장한 위인들의 평전들도 많이 생각이 났단다. 무엇보다 세 여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 세 분을 알게 되어 좋았고, 그들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더구나. 그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다시 만나, 화해를 하고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모습으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174)
815 해방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즈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지도자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282)
세죽에겐 함흥에서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다. 사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겨울이면 춥고 배고프고 여름이면 덥고 배고팠다. 게다가 고향도 조국도 잃고 남편을 두 번 잃고 아들도 잃고 낯선 나라에서 유형수로 홀로 늙어가다니, 상상도 못 한 불운이 끝없이 밀려왔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문당해 미치면서 마음자리가 한 번 깨지고 난 이후론 밑 빠진 독처럼 행복이 고이질 않았다. 사랑이 두려웠고 희망은 슬펐다. 단야와의 결혼생활도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했고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신혼의 훈정동 시절인지 모른다. 좁은 방에서 버글버글한 객식구들에 시달리며 끼니 걱정하고 밥해대느라 손이 마를 날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자 세죽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297-298)
그녀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내 나이 오십,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구나.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린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까.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의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한때 태산도 옮길 것 같았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349-350)
북조선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근사했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그 사상 위에 정부를 세우는 일을 해보았으니 행운이었다. 권력이라는 것도 누려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것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팔자를 고쳐줄 수 있는 힘, 싫어하는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은 권력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인격이라 믿게 만든다. 또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권력은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고 그 마력이란 때로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력하다. 그녀도 권력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게 묻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어 있는 것도, 똥이 묻어 있는 것도, 그게 권력이라면 털지도 않고 주워 먹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371-372)
1848년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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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더 큰 자괴감은 외부검열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하면서 찾아들었다. 교수님이나 간사 선배에게 한소리 안 듣기 위해, 막판에 대형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우리는 스스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누가 기획안을 내놓으면 그거 되겠어? 나갈 수 있겠어?”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갔다. 물정 모르고 용감한 제안을 내놓는 동료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안팎의 압력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유를 스스로 선택하는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표현도 점점 에둘러서, 비판인지 아닌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문장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검열의 눈을 피해가고 비껴갈 수 있었기에.

(49)

담배 없이 대체 무슨 낙으로 사니? 이 답답한 세상에 담배라도 없으면 정말 숨막혀 죽을 것 같 같은…… 너도 한번 피워볼래?”

담배 없이 무슨 낙으로라는 말이 내 가슴에 탁 꽂혔다. 그즈음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보사를 둘러싼 숨막히는 분위기, 신문사를 떠난 동기, 야학과 신문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

(89)

그도 그럴 것이 이날 언니가 연단에 선 장면은 그동안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에 깔려 있던 고정관념, 운동권의 기존 프레임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었다. 입학하고 난 뒤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은 이야기는 데모할 때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돌을 날라다주거나 마실 물을 떠다주거나 피를 닦아주었다는 등의 미담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 치마폭으로 돌을 나른 조선시대 여인들의 현대판이라고나 할까. 그런 남성 중심적인 대학에서 이념서클 출신도 아니고, 운동권에서도 사실상 무명이나 다름없는 여학생이 데모를 주동하다니, 일대 사건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 무성하게 나돌던 데모 주동자 예상 명단에 혜자언니는 올라 있지 않았다.

(117)

무고한 양민들이 좌익으로 몰려서 죽어간 4.3의 영향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도로 친정부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억울하게 몰리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으리라. 시장통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바쁜 일상에 휘둘리던 우리 부모의 정치의식도 제주도민의 평균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평균 이상의 우파 보수층이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강제 징용당해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남한을 선택한 이른바 반공청년단소속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당시 같은 문중이던 현씨 집안이 배출한 현오봉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던, 시장통의 공화당 조직책이었다.

(237)

그 좁은 방에서 영초언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등사하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광주를 찾아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기에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온몸으로 결기를 내뿜는 그녀 앞에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경험칙상 많은 걸 안다는 건 그만큼 위험해지는 지름길이었다. 이렇게 만든 유인물을 누구를 시켜서 어디에 배포할 것인지 나는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언니도 내게 같이하기를 권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한 차례 구속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했으므로.

(272)

행복! 당시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사전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그런 단어로 여겨졌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치부 기자들의 최대 전쟁터, 시사지의 판도를 좌우하는 대목인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사지 편집장인 내게 행복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는 총 맞고 전사하기 딱 좋은 전쟁터에서 이 악물고 용케 버텨내고 있었기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어가는 느낌이었고, 내 영혼의 우물물은 바싹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자각에서 진저리치는 나날이었다.

(280)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비참한 심경이 들더라고.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걸고 맞서 싸웠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가 그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다니. 우리가 젊은 날 한 그 모든 일들이 역사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느낌이랄까. 박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나는 텔레비전 뉴스만 봐도 입는 것 같아서 한동안 뉴스조차 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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