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사진처럼 편리하게 구겨버리거나 도려낼 수도 없다.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10~11)

세상은 말로 배울 수는 없어.”

하나같이 줄담배를 피우던 대학 선배들은 종종 역설의 정수와 같은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말. 그것은 말로 배운 말이었다. 말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말로 나도 후배를 타일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건 사실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아닐 것이다. 경험보다 말을 많이 가진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끝없는 말들. 세상보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이야기. 아마도 세상은 언어가 소멸하는 날에 종말을 맞을 모양이다. 이제 선배들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말과 함께 나이 들었고 나이와 함께 거짓말의 비중을 늘려왔지만 다 지나간 일을 굳이 거짓으로 덮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 묻습니다. 혹시 끊을 날이 올 걸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까?

(28)

빗줄기라는 표현은 틀렸어요. 빗방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한줄기처럼 보여도 띄엄띄엄 내리지요. 실은 세상 모든 게 띄엄띄엄 존재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가 띄엄띄엄 내리듯이 디지털 역시 띄엄띄엄의 기술이다. 양자 에너지도 띄엄띄엄이다. 사랑도 띄엄띄엄 찾아오고, 소변도 띄엄띄엄 마려운데, 그 이유는 심지어 시간조차 띄엄띄엄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만물이 띄엄띄엄하다! 그는 자기 철학에 이름까지 붙였다. 띄엄띄엄의 철학.

(43)

그런데 형사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묻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학생증을 넘겨받아 유심히 살펴본 다음, 무죄가 입증되었다는 듯이 그를 방생시켰다. 체포된 노동자들이 나오는 절차는 달랐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더러 유치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교도소로 바로 이감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관점에 따라 단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거나 혹은 서울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로 볼 수 있었다. 전자라면 대석 형은 술래잡기의 깍두기로 무시당한 것이고, 후자라면 장래가 창창한 명문대 학생으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씨발놈의 계급사회, 멸망해버려라!” 나는 그에게 학생증을 내밀지 않았으면 구속당할 수 있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는데 너무 치사한 질문 같아서 그만두었다.

(111)

, 진보적 자녀는 어떤 경우에나 나타날 수 있지만 보수적 자녀는 보수적 부모에게서만 나올 수 있어. 이 비대칭이 인류의 역사가 야금야금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원리일 거야.”

(223)

기숙사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선배들의 전설을. 온갖 고문을 당하고도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굳센 의지의 영웅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의 입을 여는 데는 고문은커녕 고만의 암시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나약해진 걸까? 세상이 너무 착해진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악을 악이라 믿지 않았던 게 아닐까? 우리는 악의 존재를 원했고, 우리 앞에 맞선 자들을 서슴지 않고 악이라 불렀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악을 신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227)

사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254)

마음속에서만 꾹 담아둔 말. 그런 말은 검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할 가치가 있는 말이라고 느꼈다. 마음속에서만 담아두면 검증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332)

하지만, 겨우 그 정도를 과대망상이라 부른다면 이런 상상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축제를 위해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다. 거꾸로 감옥에 보낸 사람들을 잊기 위해 우리는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축제란 불바다인 전쟁과 피가 튀는 학살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다섯 개 국가경축일 가운데 네 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새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축제는 인간의 죄에서 유래했다. 축제의 흥취에 익사 직전까지 젖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저지른 지나간 죄는 깨끗이 망각된다.

(352)

마르크스는 상품의 진정한 도량 화폐는 노동시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책장을 만들어내는 데 쓰인 노동시간은 책장의 사용가치를 자명하게 함축한다. 책장의 사용가치에 비해 노동시간이 크게 소요된다면 굳이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줄곧 평가된다. 바로 가격이다. 책장의 경우에는 4만 원이다. 이때, 책장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은 구체성과 특수성과 질적 차별성을 잃고 입에 넣어 우물거리는 한우 스테이크 한 점과 동등한 것으로 전락한다. 추상적 숫자가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되는 순간, 우리 세계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의 주인성은 박탈된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저작물을 아름답게 전시해놓을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 하루 열다섯 시간. 먼저처럼 날리는 톱밥. 유독한 휘발성 가스. 전기톱날이 앗아 간 손가락. 그 모든 것이.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와 같다.

(380)

이름이 없어서 세상을 정처 없이 표류한 사람. 세상은 이름들이 만물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곳이다. 부를 수 없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같다. 이름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가슴 언저리가 아려오는 슬픔을 느낀다.

(500)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드물기에 우리는 그것을 좇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대번에 홀린다.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그저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플라톤에 한 표를 던진다. 지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배운 게 아닌가? 부질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

그 상품이란 하나의 서비스도, 여러 서비스의 집합도 아니다. 심지어 즐거운 시간이라고도 딱히 말할 수 없다(크루즈 감독과 스태프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느낌에 가깝다. 그래도 진정한 상품이기는 하다. 그 느낌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니까. 여유와 자극의 혼합, 스트레스 없는 방종과 광적인 관광의 혼합, 굽실거리는 태도와 얕보는 태도가 특수하게 혼합된 느낌이. 그리고 이 느낌은 만족시키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마케팅된다. 모든 메가라인의 이런저런 홍보물에는 이 단어가 반드시 박혀 있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수준으로 당신을 만족시키는” “…자쿠지와 사우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우리가 당신을 만족시키도록 해주십시오” “바하마 제도의 훈훈한 미풍을 맞으며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28)

죽음에 대한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35)

이것은 내가 관찰했던 바와는 다르다. 내가 관찰했던 바에 따르면, 네이디어는 아주 엄격한 배였다. 냉혹한 그리스 장교들과 감독관들로 구성된 엘리트 간부단이 배를 운영했고, 하급 직원들은 늘 자신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관찰하는 그리스 상사들이 무서워서 겁에 질려 있었고, 승무원들은 진심으로 쾌활하기는 힘들어 보일 만큼 디킨스풍으로 중노동을 했다. 아마 쾌할함은 그리스 상사들이 클립보드에 끼워 다니면서 수시로 체크하는 직원 평가지에 민첩함고분고분함과 함께 평가 항목으로 올라 있으리라. 많은 직원은 손님이 아무도 안 본다는 걸 확인하면,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초췌한 피로함과 공포 어린 분위기로 금세 바뀌었다. 내가 볼 때 승무원들은 사소한 과실로도 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무서운 그리스 상사들에게 잘린다는 것은 티끌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상사의 구두로 엉덩이를 뻥 차여서 무지무지 오랫동안 헤엄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할 것 같았다.

(71)

예술인 척하는 광고는-아무리 훌륭하더라도-말하자면 당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스하게 미소 짓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런 부정직이 우리에게 미치는 누적적 영향이다. 진정한 선의 없이 선의의 완벽한 복사물이나 모조품만을 제공하는 그런 것을 자주 접하면, 우리는 차츰 혼란스러워져서 나중에는 진실된 미소와 진짜 예술과 진정한 선의마저 경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에게 혼란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분노와 두려움을 안긴다. 절망을 일으킨다.

(106)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솟과 육식동물이다.

(185)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 아우구스티누스

(309)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 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나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 잔인하고 지난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322~323)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점부터 인정하고 넘어가자. 동물이 통증을 느낄 줄 아는가. 느낄 줄 안다면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가, 우리가 그들을 먹기 위해서 그들에게 통증을 가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당화되다면 어떤 이유로 되는가 하는 질문들은 극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이다. 비교신경해부학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통증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이므로, 우리는 자신 외에 다른 인간이나 다른 동물의 통증을 직접 알아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간도 통증을 경험하고 따라서 그도 통증을 겪지 않으려는 타당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하도록 이끄는 원칙들은 본격적인 철학의-형이상학, 인식론, 가치 이론, 윤리학의-영역이다. 아무리 고도로 진화한 비인간 포유동물이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을 우리에게 언어로 소통할 줄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가 통증과 도덕에 관한 논증을 동물에게까지 확장될 때 부딪히는 추가의 어려움 중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고등 포유루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즉 고등 포유류에서 소와 돼지와 개와 고양이와 쥐로 갔다가, 그다음에는 새와 물고기로 갔다가, 이윽고 랍스터 같은 무척추동물로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애매해지고 점점 더 뒤엉킨다.

(352)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리고 이 점은 틀림없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예술은 온갖 장애물을 넘는 추가의 노력을 들이고서라도 감상할 가치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연코 그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서구 고전문학을 압도하는 거물이라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과 필수 교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가려지는 사실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할뿐더러 재미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에는 거의 늘 좋은 플롯이 있다. 강렬하고 복잡하고 철저하게 극적인 플롯이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와 경찰과 문제 있는 집안의 반목과 스파이가 나오고, 터프 가이와 아름답고 타락한 여인과 간지러운 사기꾼과 소모성 질환과 뜻밖의 유산과 반드르르한 악당과 흉계와 창녀가 나온다.

(366)

정보의 억압, 국가의 검열, 특히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자신의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경우가 많았던 계몽주의 이후 유럽 사상이 인기를 끄는 현실. 내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정말로 놀랍고 감동적이라고 느끼는 점은 그가 천재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용감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적 평판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굳게 믿되 세상에서는 인기 없는 신념을 세상에 퍼뜨리는 작업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에게 불친절한 문화적 환경을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요즘은 이런 방식을 초월한다거나 전복한다고 표현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해냈다.

(379)

이 윔블던 결승전에는 복수의 내러티브가, 왕 대 제왕 살해의 구도가, 극단적인 인물 대조가 갖춰져 있다. 이것은 남유럽의 열정적인 남성상과 북유럽의 섬세하고 임상적인 예술성의 대결이다.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이다. 식칼 대 메스다. 왼손잡이 대 오른손잡이다. 세계 이인자 대 일인자다. 나달은 현대적인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을 최대한 밀어붙인 선수이고그 상대는 속도와 발놀림 못지않게 뛰어난 정확도와 다양성으로 이 현대적 게임을 또 다르게 바꿔놓은 인물이지만, 앞의 선수에게만큼은 유난히 맥을 못 추는, 혹은 기가 눌리는 선수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기자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기자단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나. “이 시합은 전쟁이 될 거야.”

(384)

페더러의 서브 속도는 세계 정상급이고, 서브의 위치와 다양성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서브를 넣는 움직임은 유연하고 딱히 별난 점은 없는데, (TV로 볼 경우) 특징이라면 공을 때리는 순간 온몸에 뱀장어처럼 스냅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다. 페더러는 공을 예상하는 능력과 코트 감각이 비현실적인 수준이고, 발놀림은 이 게임의 역사상 최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릴 때 축구 신동이었다. 이 모든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어떤 말도 이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을, 그의 시합에 담긴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제대로 묘사하거나 환기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미학적인 것에는 비딱하게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에둘러 말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아퀴나스가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하는 수밖에 없다.

(395)

강한 서브로 넘어온 테니스공을 성공적으로 받아넘기는 데는 이른바 운동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작업들을 재빠르게 수행함으로써 육체와 그 인공적 연장을 잘 통제해내는 능력을 뜻한다. 영어에는 이 능력의 다양한 측면을 뜻하는 용어가 한 무더기는 된다. 느낌, 터치, 기량, 자기 수용 감각, 신체 조화 능력, 손과 눈 조화 능력, 근육 감각, 우아함, 통제력, 반사신경 등등. 이 운동감각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유망한 주니어 선수들이 매일 실시하는 극단적으로 힘든 연습의 주목적이다. 이때 훈련은 근육적인 것이기도 하고 신경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수천 번씩 스트로크를 연습하다 보면, 보통의 의식적인 생각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을 느낌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 외부인의 눈에는 이런 반복 연습이 지루하거나 심지어 잔인해 보이겠지만, 외부인은 선수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선수의 몸속에서는 미세한 조정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며, 각각의 변화가 주는 효과에 대한 감각은 설령 의식에서는 멀어지더라도 점점 더 예리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추전국 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2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책은 <춘추전국이야기> 2권이란다. 작년 이맘때쯤에 1권을 읽었는데, 이제서야 2권을 읽었구나. 1권의 기억도 이미 가물가물…. 그래서 그때 썼던 독서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어. 그리고 2권의 책을 펼쳤단다.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어.. 중국역사가 가장 치열한 전쟁과 권력다툼이 있었던 혼란의 시기. 그래서 그런 혼란의 시기에 나타난 수많은 사상가와 영웅들의 이야기.. 이런 것을 기대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인데, 아직 초반이라서 그런지 아빠의 기대에 못 미치더구나.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역사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 자꾸 들더구나. 역사 교과서조차 재미있게 읽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야기 중심으로 호기심이 일어나게 전개해 나갔으면 좋겠는데, 약간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2권의 부제는영웅의 탄생이었단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영화 속 영웅과는 다르지만, 지략과 용맹을 갖춘 역사 속 인물을 그리고 있단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마.

 

1.

제나라 이후 여러 나라들이 세력을 키워가면서 강국이 출현하는 시기의 이야기란다. 그래서 제나라를 더불어 , , 이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야. 당시는 방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유리한 태행산 골짜기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어졌어. ,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중원을 차지하려면 동쪽을 진출해야 하는데,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동쪽 진출이 어려웠대.

먼저 나라 이야기부터 해볼게. 헌공이라는 왕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점령하면서 내실을 다져갔단다. 제나라가 주도한 회맹에 참석을 하긴 했지만, 제나라와 거리적으로 멀어서 영향권 밖에 있어서 나중에는 그 회맹을 탈퇴했어. 헌공에게는 아들이 네 명이 있는데, 신생, 중이, 이오, 해제가 그들이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배다른 아들들이었어. 가장 어린 해제의 엄마인 여희가 영향력이 셌는데, 여희가 헌공을 꼬득여서 신생, 중이, 이오를 지방의 성으로 보내버리고 해제를 태자로 삼게 했단다.

특히 그 전에 태자였던 신생을 주변국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곳으로 보내버렸어. 완전 사지로 내몬 격이었어. 그리고 헌공에게 신생에 대한 험담을 쏟아부었어. 이 사실은 신생도 알고 있었어. 신생의 측근들은 외국으로 도망가라고 했지만, 신생은 효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목매고 자살을 했단다. 이런 소식을 들은 중이와 이오는 자신의 근거지에서 도망을 갔어. 중이는 외숙부 호언의 말에 따라 적나라로 망명했고, 이오는 사부인 극예의 조언으로 양나라로 망명했단다.

그런데, 헌공이 오래 가지 않아 죽고 어린 해제가 왕위에 올랐어. 여희의 만행을 보던 신하 중 이극이라는 사람이 이때다 싶어서 해제를 죽이고, 외국에 있는 중이와 이오에게 연락을 취해서 왕 자리를 제안했단다. 중이는 외숙부 호언의 조언에 따라 거절을 했고, 이오는 사부 극예의 조언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귀국을 했어. 이오는 주변 강대국인 에도 도움을 청했어. 이오는 그렇게 왕이 되었고, 혜공으로 불렀어. 혜공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불러들였던 이극을 죽이고, 목공에게 했던 약속도 어겼대. 그러자 목공은 치기로 했어. 한원이라는 곳에서 이뤄진 전투에서 목공은 세 번이나 연속해서 이겼고 혜공을 포로로 데리고 왔는데, 여론이 좋지 않았고 아직 천자로 불리고 있는 주나라에서도 풀어주라고 했어. 그렇게 다시 혜공은 으로 돌아왔어. 혜공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는지, 중이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적나라로 보냈지만, 중이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어.

 

 

2.

한편 적나라에 머물고 있는 중이는 적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어. 그때 이미 55세였어. 제환공이 중이를 반기며 받아주었어. 중이는 제나라가 마음에 들어 그곳에서 계속 살려고 했으나, 측근과 부인이 부추겼어. 외숙부인 호언에 의해 강제로 제나라로 떠나게 되었고,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등 작은 나라를 거쳐 초나라에 도착을 했어. 초나라 성왕은 중이를 받아주어 이번에는 초나라에 머물게 되었어. 그리고 목공이 중이를 초대해서 이번에는 나라로 향했단다. 목공은 중이를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어.

그런데 모국에서 소식이 전해졌어. 혜공이 죽고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대. 목공은 중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으로 환국을 하였고, 혼란을 정리하면서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문공이란다. 그가 왕위에 오른 나이가 오늘날도 적지 않은 60세의 나이였어. 그는 왕위에 오르고 국정 안정을 위한 노력을 했단다. 인재를 등용하고 전투에 대한 신상필벌을 원칙적으로 했대. 경제제도를 정비하고, 부세경감, 빈민구제, 농상업 장려를 하였다고 하는구나. 관료 체제를 확립하고 군대를 확충하기도 하고마치 외워야 할 것 같이 지은이는 정리를 해두셨어. 국가가 안정이 되고, 문공은 밖으로 눈을 돌렸어.

문공은 목공과 협력하여 주변국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이때 초나라가 제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하게 되었는데, 제나라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초나라와 친분을 갖고 있던 나라는 초나라와 결별을 하게 되었어. 결국 두 나라는 성복에서 대 전투를 하게 되었고, 역사는 이를 성복대전이라고 했어. 성복대전은 당시 춘추 4강이 모두 관여한 전투였어. , , 연합을 해서 나라를 상대했던 거야. 결국 연합국이 승리를 거두었어.

.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놓은 문공은 즉위 9년 만에 세상을 떠났어.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이 이미 예순이었으니, 당시 나이로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 비록 9년 간 제위기간이지만, 그는 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등 나라의 기반을 잘 쌓았다고 할 수 있어.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인지 문공이 죽고 나자, 목공이 천자에 대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어. 먼저 정나라를 공격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라를 허락 없이 통과했어. 이에 나라 일부 신하들은 분개를 했어. 문공 상중인데 문상은 오지 않고, 허락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나라를 통과한다고신하들 사이에서는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어. 그렇게 방심하고 통과했던 것은 상중이라서 그들을 공격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야. 그런데 군대를 공격하기로 결정을 했고, 효산에 매복병을 두어 군대를 공격하여 거의 전멸을 시켰어. 그렇게 우국이었던 문공이 죽고 나자마자 앙숙이 되어버렸단다. 두 나라 모두 손해만 있던 전투였어.

한편 초나라에서는 성왕이 충신들의 말을 안듣고 아들 중에 상신을 태자로 삼았다가 아들 상신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대충 이 정도가 2권의 이야기란다.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아서 계속 읽어야 하나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일단 3권까지는 구해 놓아서, 3권까지 읽어보고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 <춘추전국이야기> 1권에서는 관중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춘추시대의 얼개를 짜는 것을 보았다.

책의 끝 문장 : 도성 터가 돈벌이를 위한 유원지가 되지 않고 인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남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자아빠 2018-10-20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어 봤는데 책 좋습니다

bookholic 2018-10-21 21:46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취록 -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조완선 작가의 책이 이번에 세 번째란다. 처음에 읽은 책이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이란 책이었는데,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다른 책들도 찾아 보았어. 그래서 읽었던 것이 <천년을 훔치다>라는 책이었단다. 역사 미스터리라는 장르라는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하면 <천년을 훔치다>는 좀 실망을 했었단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비취록>이란 책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책을 들었단다.

결과는… 음, 아쉽게도 좋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더구나. 비취록이라는 예언서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실존하는 책은 아닌 것 같고, “정감록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구나. “정감록”은 조선시대에 실존했던 예언서로 홍경래의 난의 토대를 마련했던 예언서로 유명한 책이었단다. “정감록”으로 검색해보면 관련된 많은 책들이 조회가 된단다. 이 소설에서 비취록은 홍경래의 난 이후 여러 예언서들을 엮은 신비의 예언서라면서 비취록을 소개했단다.

 

 

1.

그럼 이야기를 해줄게. 강명준이라는 역사학과 교수가 있는데, 어느날 그에게 중절모의 중년 사내가 찾아왔는데 고서 진위를 문의하려고 왔다면서 비취록이라는 책을 보여주었어. 진짜 같았어. 그 사나이는 복사본 10여 장만 두고 사라졌단다. 한번 정밀하게 검토해 보라고 했어. 그 복사본을 통해 비취록에서 예언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고 그 책 또한 진짜 같았어. 그렇다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비취록의 실체를 보게 된 것이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단다. 연락처를 받아 놓지 않아서 전화를 못하고 있는데, 또다른 사람이 중절모의 사내가 전화했었냐고 물어보는 전화를 걸어왔어. 일단 모르겠다고 했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중절모의 사나이로부터 전화가 와서 이틀 뒤에 찾아오겠다고 했어.

그런데 그가 온 것이 아니고 형사 둘이 찾아 왔어. 오재덕 반장과 조두호 형사. 최용만 씨가 실종되었다고.. 최용만 씨가 바로 그 중절모의 사내였단다. 강명준 교수는 최용만씨를 찾아 대전 고서점으로 향했단다. 그리고 최용만과 오랫동안 거래를 했던 안기룡씨도 찾아갔어. 안기룡이 바로 강명준 교수한테 전화해서 최용만을 찾던 사람이란다. 그런데 그 사람도 보름 전부터 집에 없었어. 얼마 뒤, 최용만씨, 안기룡씨는 연이어 살해되어 발견되었어. 그들이 죽기 전에 쌍백사에 자주 들렀다는 점, 어떤 예언서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그래서 형사 오재덕 반장과 조두호 형사는 쌍백사에 가 보았단다.

계룡산 쌍백사. 쌍백사라는 절은 실제 있는 절은 아니고 소설 속에서 지은이가 만들어낸 절이란다. 계룡산 쌍백사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래서 중허 스님은 그 절로 젊은 해광 스님을 보내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어. 해광 스님도 그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갑자기 입적했다는 편지를 받게 된 거야. 그래서 해광 스님의 입적과 죽기 전 그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유정 스님을 다시 쌍백사에 보냈단다. 유정 스님은 여러 정황상 해광 스님이 자연사한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냈단다. 하지만 이미 화장까지 해서 어떤 이의 진술이 아니면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어. 이때 나타난 스님이 경운 스님이라는 스님인데, 해광의 죽음에 의문점이 있다면서 따로 만나자고 했어.

 

 

2.

그 즈음에 오재덕 반장과 조두호 형사가 쌍백사에 온 거야. 그들이 와 있을 때 한 스님이 실족사로 죽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경운 스님이 실족사로 죽고 말았어. 이것 또한 의문사였단다. 경찰이 와 있을 때 죽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부검을 하기로 했어. 경운 스님의 식도에 삼족오가 그려진 천 조각이 발견되었단다. 유정 스님은 오재덕 반장에게 따라 만나자고 했어. 그리고 해광 스님과 경운 스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쌍백사에 온 이유도 이야기했어.해광 스님이 남긴 수첩 등을 경찰에게 넘겼지. 오재덕 반장은 그 수첩을 들고 강명준 교수를 찾아갔고, 이후부터 강명준 교수는 오재덕 반장의 수사를 본격적으로 돕게 되었단다.

..

도대체 쌍백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쌍백사의 주지는 형암 스님으로 오래 전 다른 절에서 파계한 스님이었는데, 쌍백사에 와서 쌍백사를 다시 재건한 스님이야. 그런데 예언서를 지나치게 믿고 있고 예언도 잘 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에게 최측근은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준 백공 스님이었단다. 그들은 백화원이라는 건물에서 몰래 보천교 의식을 벌이고 있었어. 보천교는 일제시대 민족종교로 비취록을 받들어 모시는 종교였어. 일제의 패망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종교였단다. 해방 이후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암암리에 그 종교가 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 맥을 이어가는 곳이 쌍백사와 쌍백사 근처에 터를 잡은 사하촌이었어. 최용만, 안기룡 모두 사하촌에서 4년 동안 생활을 했는데, 아마 그때 비취록의 존재를 알았던 것 같았어. 뒤늦게 조사를 하다 보니 몇 년 전에 사하촌에서도 3건의 의문사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어. 점점 의문의 사건들의 범인들은 쌍백사의 스님들로 향하고 있었어.

간간히 뉴스를 통해서 일왕 방한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것이 너무 큰 힌트가 되더구나. 갑자기 약간은 뜬금없는 일왕 방한 소식이 나온다는 것은 그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어. 그것도 일왕이 계룡산 근처인 국립현충원과 독립기념관에 방문한다는 거야. 쌍백사의 스님이 받들고 있다는 비취록의 예언 중에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것 중에 하나는 분명 일왕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읽은 이들이 눈치를 챌 것이야. 그런 것들이 아빠가 이 소설에 대해 실망을 느낀 것이란다. 결말이 좀 뻔히 보였거든. 그리고 그 일왕 타겟으로 삼았던 장소도 국립현충원으로 관심을 끌고 있지만, 분명 그곳이 아닌 다른 곳일 것이라는 것도 너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어. 그렇다 보니 미스터리의 중요 요소 중에 하나인 반전에 대한 재미가 없었단다. 쌍백사 스님들의 일왕 기습으로 많은 피해만 남기고 실패로 끝이 났단다.

쌍백사 주지인 형암 스님은 살아 남았고, 이번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았어. 다만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여전히 비취록의 예언을 굳게 믿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쉬웠던 작품이란다. 독자로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좀더 소설을 다듬었다면 좀더 좋은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PS:

책의 첫 문장 : 내가 <비취록>을 처음 본 것은 1984년 겨울이었다.

책의 끝 문장 : 천운이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래식 중독 -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
조선희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지난 봄에 재미있게 읽은 책 중에 <세 여자>라는 소설이 있단다. 그 소설을 쓴 지은이는 조선희라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 분께서 쓰신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았단다. 처음부터 소설을 쓰셨던 분이 아니고 기자 생활을 하다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고 했어. 기자 시절에 <씨네 21>이라는 영화 관련 잡지 회사의 편집장으로도 일했대. 그런 이력 때문인지 그의 책 중에 영화에 관련된 책이 있더구나.

클래식 중독. 처음에는 이 책이 영화가 아니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어. 보통 클래식이라고 하면 고전 음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야. 아빠도 그런 고전 음악에 관련된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또 다른 고전 음악의 책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그 책의 소개를 읽어 보았는데, 음악이 아니라 영화에 관련된 책이더구나. 그것도 우리나라 고전 영화에 관한 이야기였어.

아빠가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나라 고전 영화는 거의 본 것이 없었어. 서양의 고전 영화는 명작이라고 소문이 난 영화들을 찾아 본 적이 있는데 한국 고전 영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 것이 생각이 나질 않더구나. 아빠가 20대 들어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하던 시절 이후의 한국 영화는 좀 봤지만 말이야. 한국 고전 영화라고 하면 왠지 시대에 뒤떨어지고 촌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거의 찾아보지 않았던 것 같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성행을 했던 비디오 가게에서도 한국 고전 영화 코너는 못 봤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구나. 그만큼 보려고 했던 사람도 적었고, 보기도 쉽지 않았던 것 같아. 아무튼 그런 한국고전영화의 이야기야…. 아빠가 영화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어.

 

 

1.

지은이 조선희는 <씨네21> 편집장 경력으로 한국영상자료원장을 맡게 되었고, 3년 임기를 마치던 시기에 이 책을 출간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고전 영화에 대한 소개를 한 가장 좋은 책이 아닐까 싶구나. 물론 아빠가 이와 관련된 책들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나라 고전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도대체 무엇을 봐야 할지 선택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나침반 역할을 할 것 같아.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영화와 영화인들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읽는 것만으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책이었어. 다만 아쉬운 것은 세대차이에 따라 이 책에 대한 공감도가 많이 차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빠도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 중에 본 영화가 몇 편 안되어 많은 공감을 하지는 못했단다. 옛날에 이런 영화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

최근까지 활동을 하는 임권택 감독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그나마 아빠가 알고 있는 감독이었어. 임권택 감독이 <춘향전>이라는 영화를 찍었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춘향전>이라는 소재로 찍은 영화가 무려 16편이라고 하는구나. 이 통계는 이 책이 출간된 2009년 기준이니까 그 이후에 더 늘어났을 수도 있고 말이야. 다른 고전에 비해 춘향전이 왜 이렇게 많이 영화로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서사의 탁월함을 받침으로 사랑, 반전, 코믹 등 영화의 성공 요소를 다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

(33)

우선은 서사의 탁월함이다. <춘향전>은 한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다. 다만 이 사랑의 행로에 온갖 사회, 정치, 문화적 난관들이 겹겹이 치고 들어오면서 러브스토리가 전투를 방불케 하는 모험의 여정이 된다. 여주인공이 애정다툼으로 인해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살해 위협에 놓이는 이런 살벌한 러브스토리가 어디 흔한가. 이 같은 치명적인 삼각관계가 <춘향전>의 극적 긴장을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이다. 여기에 이별과 재회, 원한과 복수, 억압과 저항, 고난과 극복, 출세와 영락 등 명암이 뚜렷한 이야기의 원형들이 드라마를 종횡으로 얽어나간다. 그러니 이야기 구조가 입체적이고 디테일이 풍부할 수밖에. 강력한 코미디의 매력 또한 <춘향전>의 강점이다.

===================================

그리고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검열에 관한 이야기였단다. 요즘에도 검열을 하긴 하지만, 옛날에는 검열이 엄청 심했다고 하는구나.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잘려나갔대. 음악이나 소설 등은 다 만든 다음에 검열을 하지만 영화의 경우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한번, 다 만든 다음에 한번 더 검열을 한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어떤 영화는 3분의 1 이상이 잘려 나가는 경우도 있고, 원작 소설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대.

예전에 아빠도 괜찮게 읽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있어.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경우도 검열을 피해갈 수 없었다고 하는구나. 원작 소설이 철거민의 약자의 시선에서 다룬 영화로 공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어. 이 영화는 시나리오부터 제재를 받기 시작해서 몇 번의 수정을 통해 간신히 통과를 하게 되었는데, 배경도 바뀌는 등 원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로 변질되었으며, 포스터를 보면 에로영화인줄 알 정도로 다른 영화가 되었단다. 원작 소설을 본 사람이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았다면 잘못된 포스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사람이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았다면, 야한 영화로 생각하고 영화를 보러 왔다가 실망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구나. 원작 소설의 지은이 조세희님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지금이라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제대로 영화로 다시 만들어서 원작 소설의 명예를 회복했으면 좋겠구나.

 

 

2.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옛날 고전 영화는 보기가 참 힘들단다. 그런데 요즘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대부분 VOD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는구나. 그래서 아빠도 한번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어. , 그런데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는 안되더구나. 아빠는 당연히 VOD라서 스트리밍 서비스인줄 알았는데, 오프라인으로 직접 영상자료원에 가서 봐야 하는 것이더구나. 관심 있는 사람이야 발품 팔아서 가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좀더 접근하기 쉽게 인터넷에서 스트리밍 등으로 제공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PS:

책의 첫 문장 : 한국영상자료원에 와서 3년 동안 정말이지 한국영화 실컷 보았다.

책의 끝 문장 : 앞으로 내가 문학상 같은 데 응모하게 될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혹여 그런 날이 올 때 김연수 씨가 심사를 맡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88)
그것은 당시 청년문화의 한 아이콘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꿈이되 이룰 수 없는 꿈을 의미했다. 일탈에의 꿈, 현실 저 너머 어떤 곳,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로부터 멀리멀리 떠난 곳, 탁 트인 대양과 무한의 자유, 권위적인 아버지를 뛰어넘은 젊은 세대의 미래, 그 모든 것을 통칭했다. 또한, 난숙한 풍요의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든 서구사회가 달라이라마나 라즈니쉬, 참선 등 동양적 패러다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듯, 과학문명과 경제개발의 중심인 서울에서 바라보는 동쪽 끝, 바다와 고래가 갖고 있는 어떤 근원의, 원시의 이미지에 대한 동경이었다. 하지만 해외이민이나 입산수도라면 몰라도 ‘동해바다의 고래’는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투지가 안 보이는 이루기를 진즉에 포기한 꿈이다. 청년기의 잠재울 수 없는 갈증과 허기와 객기, 군사정권 아래 숨죽인 병영사회 속에서 폭발할 듯한 대학사회의 스트레스가 거기 담겨 있었다.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좌절의 부호였다. 하시 말해, ‘허공에의 질주’였다.

(114)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됐을 때 부푼 꿈이 깨져 허탈해 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싫지만 진실에 가깝다. 총독부가 손목을 비틀어서 이광수가 <전망>이나 <조선의 학도여> 같은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들의 저류에 깔리는 필자의 정서는 억압과 굴종이 아니라 낙관과 투지에 들뜬 비상한 흥분 상태다. 다만,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광수가 어찌해서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멀쩡한 조선의 영화인들이 어찌어찌해서 마친내 ‘민족의 죄인’이 되고 말았는지는 연구 대상이다. 그것을 ‘시대적 조울증’과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237)
‘꿈’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잠 속의 환각도 꿈이고, 미래의 소망도 꿈이다. 두 가지는 성질도 다르고 차원도 다른, 전혀 동떨어진 영역에 속해 있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유사성을 갖고 있다. 모두 마음의 작용이며, 물리적 실체가 없고, 지금 현실과의 관계란 그저 가느다란 끈 정도다. 나는 문득, 그 꿈도 꿈이라 부르고 저 꿈도 꿈이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우리말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만든 사람들도 똑 같은 발상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어의 ‘dream’ 역시 두 가지 꿈이다. 중국어의 ‘夢’도 그렇다. 프랑스어의 ‘reve’(레브)나 스페인어의 ‘sueno’(스에뇨)도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8-10-11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음산책 ㅡ 이었네요!^^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태인 2018-10-14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영상원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유튜브에서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회원들한테 문자 보내더라고요.유튜브에도 올리니 보러오라고...

bookholic 2018-10-15 08: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일단 회원 가입이 우선이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