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 이들은 뼈의 밀도가 조금 낮아지고 팔다리가 조금 가늘어진다. 눈에는 뭐라 말하기 힘든 광경들이 가득하다.


(24-25)

몽골이나 러시아 동쪽 끝 황무지에 사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누구도, 싸늘한 오후인 지금 비행기가 다니는 길보다도 더 높은 하늘에 우주선 한 대가 지나고 있으며, 거기 타 있는 인간이 무중력의 유혹에 굴복해 근육을 잃지 않기 위해, 새처럼 떠다니며 뼈를 다 소실하지 않기 위해 다리 힘으로 열심히 리프트 바를 들어 올리고 있다고는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힘쓰지 않으면 가엾은 우주여행자는 지구로 되돌아가 다리라는 게 다시 중요해졌을 때 온갖 문제를 겪게 된다. 열심히 들어 올리고 땀을 흘리고 밀어내지 않으면, 재진입할 때의 맹렬한 열기와 충격은 이겨 내더라도 캡슐에서 내릴 때는 한 마리 종이학처럼 맥을 못 춰 끌어내려질 것이다.


(26)

이들은 우주가 날짜 감각을 없애려 한다는 것을 느낀다. 우주는 말한다. 날이 대체 뭔데? 스물네 시간의 하루를 지키려 하고, 지상 근무원들도 계속해서 그 점을 일깨워 주지만, 우주는 스물네 시간을 열여섯 번의 낮과 밤으로 돌려준다. 그래도 이들은 악착같이 스물네 시간을 산다. 시간에 매여 사는 허약하고 작은 몸이 아는 게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잠을 자고 변을 누고, 모든 게 거기 묶여 있다. 하지만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마음은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하루 개념이 없는 기이한 영역으로 풀려나가 질주하는 지평선 위를 타고 넘는다. 분명히 낮인데 밀밭에 몰려드는 먹구름처럼 밤이 찾아오는 것을 본다. 그러다 45분이 지나면 또 낮이 찾아와 태평양이 깔린다. 과거에 생각했던 전혀 다른 세상이다.


(49-50)

우주에서 6새월을 보내고 나면 엄밀히 말해 지구에 있는 사람보다 0.007초 덜 늙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5, 10년은 더 늙는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이해할 따름이다. 시력이 약해지고 뼈가 삭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도 근육이 위축될 것이다. 피가 엉기고 뇌액의 흐름이 달라진다. 척추가 늘어나고 T세포는 재생에 애를 먹는다. 신장 결석이 생긴다. 이곳에서는 입맛도 잘 돌지 않는다. 부비강은 죽을 맛이다. 고유감각이 흐려져 눈으로 보지 않고는 신체 부위가 어디 달렸나 알기 힘들다. 몸이 이상하게 생긴 체액 자루가 된다. 체액이 상체에는 너무 쏠리고 하체에는 부족해진다. 안구 뒤쪽에도 몰려 시신경을 압박한다. 수면이 반란을 일으킨다. 장내미생물군이 새로운 박테리아를 키운다. 암 발병 위험이 올라간다.


(50-51)

가끔 지구를 보고 있으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지우고, 저 행성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저 행성은 무척이나 장대하며 위엄 있고 당당하다. 신이 왈츠를 추는 우주 한복판에다 저 행성을 떨어트린 것이라고, 자꾸만 믿고 싶어진다. 앞선 인류가 (발견 이후의 부정, 그 후의 발견과 은폐의 길을 위청이고 더듬거리며) 발견한, 지구는 그저 무()의 중심에 놓인 하찮은 반점에 불과하다는 진실도 죄다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보잘것없는 게 저렇게 빛날 수 없어. 멀리 던져진 별 볼 일 없는 위성이 구태여 저런 장관을 만들어 내고, 쓸데없는 돌덩이가 균류와 인간 정신처럼 복잡한 것들을 조율할 리 없어.


(57)

50년 넘도록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 우리의 달은 인간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리운 마음에 지구를 향해 밝은 면을 내보이고 있는 걸까? 우리의 달 그리고 다른 모든 달과 행성과 태양계와 은하계도 알려지기를 갈망하고 있을까? 떠난 지 사흘이 채 되지 않은 내일이 오면, 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 존재들이 가루로 덮인 달 표면에 귀환할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세상에 나부끼는 깃발을 꽂고 싶어 하는 존재들, 집요한 마시멜로들,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선원들은 자기네 깃대가 쓰러지고 성조기가 해진 것을 발견하리라. 50년 동안 자리를 비우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세상은 당신 없이 계속 돌아간다. 우주비행사 네 명은 그렇게 해변 막사에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면 새 시대가 도래하리란 것을 알고서.


(77-78)

콜린스가 촬영한 사진 속 달 착륙선에는 암스트롱과 올드린과 타 있다. 착륙선 바로 뒤에 달이 있고 25만 마일 위에는 푸른 반구 모양의 지구가 인류를 품고서 깜깜한 암흑 속에 떠 있다. 사진에서 빠진 인간은 마이클 콜린스가 유일하다고 전해진다. 그게 이 사진이 그토록 매혹적인 이유였다. 인류가 아는 한 현존하는 모든 인간이 빠짐없이 들어 있는 사진에 정작 그걸 촬영한 사람만 빠져 있다는 것이.


(112-113)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하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재사용하고 공유한다. 우리는 갈라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그럴 수 없으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오줌을 재활용해 마신다. 서로가 뱉은 숨을 재활용해 숨 쉰다.


(125)

처음에 이들은 밤 풍경에 매료되었다. 화려한 도시 불빛을 외피에 두른 지구는 인간이 만든 것들 것 황홀하게 빛난다. 도시 태피스트리가 두껍게 수놓인 밤의 지구는 또렷하고 선명하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유럽 해안지대에는 1마일이 멀다 하고 사람이 산다. 유럽 대륙 전체가 도시 별자리들과 황금빛 도로 실들로 아주 정교하게 엮여 윤곽을 드러낸다. 황금 실들은 눈이 내려 가의 언제나 회청색으로 보이는 알프스산맥까지 누빈다.


(128)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욕망이 싹튼다. 이토록 거대하면서 작디작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 아니 (열정이 추동하는) 요구. 이렇게나 기적 같으면서 별나게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대안이 마땅치 않으므로 지구는 의심할 여지없는 집이다. 무한한 공간, 충격적일 만큼 환히 빛나며 우주에 떠 있는 보석.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순 없는 걸까? 지구와도 잘 지내면 안 되나? 이건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다급한 요구다. 우리 삶이 달린 유일한 세상을 탄압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낭비하는 짓을 멈출 순 없을까? 그러나 이들도 뉴스를 보고, 이미 세상을 살아 봤다. 희망을 품는다고 순진해지진 않는다. 그러면 뭘 하지? 어떤 실천을 해야 하지? 말해 봤자 소용 있을까? 이들은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129-130)

그러다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이들은 지구를 보다가 진실을 마주한다. 정치가 정말로 촌극인 게 아닌가. 정치는 그저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가끔은 정신 나간 쇼일 뿐이며,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정치가 촌극이 아님을, 촌극에만 그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정치는 아주 거대한 힘이어서, 우주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힘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결정지었다.


(132)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 극지방, 저수지, 빙하, , 바다, ,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


(170)

빛나는 서구 자본주의가 꿈꾸는 우주 같은 건 여기 없다. 이곳은 불굴의 공학 기술과 천재적인 실용주의를 숭배하는, 칙칙하고 효용을 중시하는 육중한 사원이다. 소련 붕괴 후에 살아남은 타임캡슐, 지나간 세기의 마지막 메아리다. 이곳을 집처럼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가 바닥이고 여기가 천장이고 이렇게 서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정하면서, 위아래와 좌우 구분이 사라진 다른 모듈들을 지배하는 우주 공간의 우주다움을 무력화하려고 해 봤다. 그러나 아늑해지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벨크로가 붙은 벽과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케이블과 침침하게 깜박이는 불빛은 아늑해질 수 없다. 결국 이곳은 도래한 우주 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한 집도 아니며 그저 지하 벙커에 가깝다. 편안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끝내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애지중지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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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이야기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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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피츠제럴드라는 작가가 있단다. 풀네임을 다 이야기하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몇 년 전에 너희들과 함께 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리들이 좋아하는 배우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사람이 바로 피츠제럴드란다. 피츠제럴드의 사진을 보면 영화 속에서 톰 히들스턴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라 해도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이란다. 이 소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하단다. <위대한 개츠비>란 소설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그의 다른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그의 작품 중 또 유명한 소설로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것도 오래 전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유명해졌던 것 같다.

아빠도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위 두 작품만 읽었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작년에 신간 코너에 예쁜 책표지의 책을 살펴 보다가 지은이가 피츠제럴드인 것을 보았지. 이래서 책 디자인이 중요하다니까지은이가 피츠제럴드인 것을 보고, 책 소개를 보았고, 이제서야 읽게 되었구나.

책의 제목은 <바질 이야기> 책 소개를 보면 연작 소설이라고 나온단다. 총 아홉 편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 작품 <그런 파티>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인공이 바질이고 이야기도 어느 정도 이어진단다. 그래서 <그런 파티>만 제외한다면 그냥 장편 소설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단다. 10대 청소년인 바질이 주인공이라서, 아빠와 같은 아저씨가 읽으면 추억을 돋게 만들고, 너희가 읽으면 10대의 감성을 공감할 수 있을까? 소설의 배경이 지난 세기 중반의 이야기이고, 미국이라는 공간도 달라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너희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래도 사춘기 들어서면서 사랑이라는 감정도 생겨나는 이야기들은 너희들도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1.

첫 번째 작품 <그런 파티>는 열한 살 테런스 R. 팁턴이라는 아이가 이제 막 이성과 사랑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 돌리 바틀릿을 만나기 위해 테런스는 친구 조와 함께 파티를 주최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돌리의 초대를 받게 된다는 짧은 이야기인데, 이제 막 사랑의 감정을 알게 되는 순수한 십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단다.

두 번째 소설 <스캔들 명탐정>부터는 바질이 주인공으로 소설들이란다. 바질 듀크 리는 열네 살이고, 리플리 버크너와 친구 사이란다. 둘은 세상의 가십거리와 스캔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어. 나름 비밀스러운 책이므로 투명 잉크를 사용해서 글을 썼단다. 바질은 이모진 비슬이라는 여자 아이를 짝사랑했는데, 이모진도 바질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어. 하지만 이모진 비슬은 다른 여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휴버트 블레이어를 가장 좋아했단다. 휴버트가 이모진에 접근하자 바로 이모진은 휴버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어. 질투심에 바질은 친구들과 함께 휴버트를 괴롭히려고 했지만, 오히려 휴버트에게 영웅담만 생겨나게 되었단다.

<박람회에서의 하룻밤>에서는 바질과 리플리가 박람회 구경을 가게 된단다. 그곳에서 친구 엘우드 리빙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엘우드가 여자를 꼬셔보자는 제안을 하여 그들은 여자애들 무리와 어울리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바질만 짝을 만들지 못했어. 리플리와 엘우드는 짝을 만들어 함께 놀고 있는데, 그곳에 또다시 휴버트가 등장하여 잘생긴 얼굴로 그들의 연애를 방해하게 된단다.

<풋내기>에서는 시간이 좀 흘러 바질은 고향을 떠나 세인트 레지스 스쿨 기숙학교에 입학을 했어. 그 학교는 부잣집 애들이 주로 오는 학교인데, 바질은 집에서 좀 무리를 해서 보낸 것이야. 낯선 동네, 낯선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바질은 독재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고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등 쉽지 않은 학교 생활을 했어.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적응해 갔단다. 시간은 우리 편.

<걔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아>에서는 바질이 세인트 레지스 스쿨에서 1년을 마치고 잠시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란다. 1년 사이에 친구들도 많이 많이 변했고, 사랑과 시기가 피어올랐어. 그리고 1년 만에 본 바질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친구들이 있어. 바질에게 걔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안다는 소문이 퍼져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었어.

<포로가 된 새도>에서는 바질이 고향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하는 이야기란다. 바질이 직접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을 하는데, 연극에 배우로 출현하는 친구들과 좌충우돌하지만 결국 연극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친구들과 갈등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단다.

<완벽한 인생>에서는 다시 세인트 레시즈 스쿨로 돌아와 2년차를 보내는 이야기야. 미식 축구를 하였는데 바질은 쿼터 백 역할을 맡았어. 아빠는 미식 축구를 잘 모르지만, 쿼터 백은 공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잘 전달해야 하는 중요한 포지션으로 알고 있어. 그런 쿼터 백으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바질은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단다. 어느날 졸업 선배가 학교에 찾아와서 완벽한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바질은 그 조언에 감명 받아 실천하기로 했어. 그런데 그 완벽한 인생이라는 것이 청교도적 윤리 사상으로, 술도 먹지 말고, 담배도 피지 말고 키스도 하면 안 된다는 그런 내용으로, 너무 범생 같은 행동지침이었단다. 이제 친구들과 친해졌는데, 자칫 다시 멀어질 수 있는 그런 행동지침들. 바질은 추수감사절에 친구 조지의 집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는데, 조지의 여동생 조베나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단다. 조지는 조베나에게 자신의 완벽한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서 조베나에게도 조언을 해주었어. 조베나는 바질이 재수 없고,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내 그럴 줄 알았지. 바질도 이내 깨닫고 술 먹고 조베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서 해피 엔딩.

<전진하다>에서는바질의 외삼촌의 사업이 잘 안 되는 일로 시작한단다. 외삼촌의 사업에 바질의 엄마도 투자를 했는데, 엄마도 투자금을 잃게 생겼어. 그래서 바질의 예일대 입학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단다. 바질도 일자리를 구해보지만 쉽지 않았어. 바질은 용기를 내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연락을 한 동안 안 하고 지낸 종조부까지 찾아가서 일자리를 부탁했단다. 종조부는 바질에게 일자리를 주긴 했지만, 공짜는 아니었단다. 종조부가 젊은 여자와 재혼했는데, 그 여자는 이전에 결혼한 사람과 낳은 딸이 있었고, 그 딸과 주기적으로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거야. 어쩔 수 없이 그 딸을 만나는데, 바질은 당시 미니라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단다. 돈 벌기 쉽지 않구나. 그런데 얼마 후 다행히 외삼촌의 사업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어 바질은 종조부의 일을 그만 두고 억지 데이트도 그만 둘 수 있었단다.

<바질과 클레오파트라>에서는바질이 한 달 만에 미니를 다시 만났는데,  어째, 분위기가 싸했단다. 미니가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 같았단다. 그래, 사랑은 무슨, 공부나 하자. 바질은 예일대에 입학을 하게 되고, 여전히 미식 축구를 했어. 쿼터 백 후보로 경기에 참가했는데, 주전 쿼터 백이 부상을 당해 대신 경기에 참석했는데, 바질이 활약을 해서 프린스턴 대학교와 싸워서 이겼단다. 경기가 끝나고 파티를 열었는데, 우연히 미니를 만나고 미니는 바질에게 접근하려고 하지만, 바질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에게서 마음을 거두었단다. 백 점짜리 복수. 바질은 그렇게 또 자라는구나.

책은 이렇게 마무리된단다. 십 대 소년의 성장 드라마를 한 편 보는 것 같은데,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빠의 십대 생각도 떠오르더구나.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추억을 자꾸 들추면 늙은 것이라고 하는데, 떠오르는 옛 생각을 누르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했어. 너희들도 지금 한 편의 소설을 만들며 십대를 보내는 있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그 소설은 해피 엔딩뿐만 아니라 시작과 중간도 해피로 가득 차면 좋겠구나. 소설이 조금이 재미없더라도 말이야…^^ 피츠제럴드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다.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파티가 끝난 후 도도한 스티븐스 두리에이 한 대와 1909년형 맥스웰 두 대가 빅토리아 한 대와 함께 도롯가에 대기 중이었다.

책의 끝 문장: 비할 데 없이 찬란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사령관의 노련한 눈만이 그곳에서 하나의 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오랜 전통처럼 사내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제약을 이따금 푸념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소년으로 지내는 것이 마냥 좋은 시절도 오랜 기간 존재하는데, 그 만족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바질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긴 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긴 바지가 갖고 싶긴 했지만, 의상으로 따지자면 풋볼 유니폼이나 경찰 제복, 심지어 밤에 뉴욕 거리를 누비는 괴도 신사들의 실크해트와 긴 망토만큼의 낭만도 없었다. - P63

열다섯 살은 참으로 애매한 나이다. 손가락을 딱 짚으며 "그땐 이랬었지"라도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우울한 제이퀴즈는 열다섯 살을 언급하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곤 소년기의 한창인 열세 살과 일종의 가짜 청년인 열일곱 살 사이의 언젠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면서 생소한 경험들로 끊임없이 떠밀리고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려 헛되이 몸부림치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우리 자신도 또래들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해 여름 바질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들여다보기 위해 커튼을 걷어보려 한다. - P112

구제 불능의 주벌이 소유욕을 내뿜으며 다가오자, 바질의 심장은 분홍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우유부단함의 안개에 갇혀버린 바질은 베란다로 나갔다. 때 이른 눈이 대기에 흩뿌려지고 있었고, 별들은 차가워 보였다. 별들을 올려다본 언제나처럼 그의 별들, 야망과 고투와 영광의 상징들이 보였다. 별들 사이로 바람은 그가 항상 귀 기울여 찾던 높은 원음(原音)을 나팔 소리처럼 울렸고, 전투를 위해 찢겨 가늘게 흩어진 구름은 열병식을 거행하며 지나갔다. 비할 데 없이 찬란하고 장엄한 광경 앞에, 사령관의 노련한 눈만이 그곳에서 하나의 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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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예술은 왜 아름다운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삶은 왜 흉측한가? 온통 목적과 목표와 의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흉측하다. 인생의 모든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장소와 아무도 도달하지 않는 장소 사이에 길이 주어진다면! 누군가 들판의 중간에서 시작해 다른 곳의 중간까지 가는 길을 만드는데 인생을 건다면! 그 길을 연장한다면 유용해지겠지만 그러지 않고 기품을 중간 구간으로만 남겨둔다면!

 

(431-432)

내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소설 속에서만 인생을 살고 현실의 삶에서는 휴식을 누리는 것이다. 책에서 감정을 읽고 현실에서는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은 소설 속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진정한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의 모험은 곧 독자의 모험이 된다. 진실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맥베스 부인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근사한 모험은 없다.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의 삶에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쉴 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434)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간을 재는 정확한 척도가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시계로 시간을 잰다는 건 외부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가짜다. 감정으로 시간을 잰다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재는 것이므로 역시 가짜다. 꿈에서 시간을 재는 건 역시 잘못됐다. 꿈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시간을 스칠 뿐이고,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흐름 속의 무언가로 인해 바쁘거나 느리게 산다.

 

(445)

진실을 찾는 일은, 신념의 주관적인 진실이든, 현실의 객관적인 진실이든, 돈이나 권력의 사회적인 진실이든 간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진실을 찾는 노력으로 상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가져다준다. 인생의 커다란 행운은 우연히 티켓을 산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460)

인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는 실험적인 여행이다. 물질을 통해 떠나는 정신의 여행이고, 여행하는 것은 정신이므로 우리는 정신 안에 산다. 그러므로 외향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강렬하고 폭넓고 격동적으로 사는, 관조하는 영혼이 있다. 중요한 건 마지막 결과다. 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삶이다. 육체노동을 한 다음처럼 꿈을 꿀 때도 사람은 피로해진다. 어느 누구도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할 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다.

 

(501)

행복을 인식하지 않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의 인식은 곧 불행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행복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과 이제 곧 행복을 뒤에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에서도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곧 그걸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507)

자부심이란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감정적인 확신이다. 허영심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서 위대함을 보거나 우리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감정적인 확신이다. 이 두 감정은 반드시 함께 다니는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감정도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감정이고 양립 가능하다.

 

(516)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를 포기한다. 읽은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버린다. 나는 읽으면서 잠에 빠진다.

 

(544)

대체 내 안에는 어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이 있는가! 하지만 내가 삶을 반대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걸 본 적 있는가…… 나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 자신으로 쓴다.

 

(559)

신문을 읽는 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항상 불쾌한 일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종종 그러하다. 심지어 도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쟁 아니면 혁명이 항상 신문에 나오는데, 전쟁이나 혁명이 미치는 영향을 신문에서 읽다보면 공포보다도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읽다보면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 모든 죽음과 부상의 잔인함이나 싸우다 죽은 자들 또는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의 희생이 아니다.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들 때문에 인명과 재산을 희생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570)

평화, 그렇다. 평화다. 잉여로 남은 상태처럼 부드럽고 커다란 고요가 내 안에서 존재의 밑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이미 읽은 글들, 완수한 의무들, 삶의 발걸음과 우여곡절들, 이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어떤 고요한 것을 둘러싼 희미한 그림자, 잘 보이지 않는 후광으로 변해버렸다. 때로 영혼을 잃고 빠져들었던 노력도, 때로 모든 행동을 다 잊고 몰두했던 생각도, 두 가지 다 아무 느낌 없는 위로, 시시하고 허무한 연민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574-575)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선물했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해줬다.

인간은 강물이나 호수에만 자기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었다. 게다가 취하는 자세 역시 상징적이다. 자신의 얼굴을 본다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했다.

거울을 발명한 자는 인간의 영혼에게 독약을 준 것이다.

 

(583)

시간 안에는 수도원이 있다. 우리의 도피 위로 밤이 내린다. 연못의 푸른 눈 속에서 마지막 절망이 태양의 죽음을 반사한다. 우리는 오래된 공원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었다. 우리는 오솔길의 영국식 조경과 거기 있는 조각품들과 모습 안에 매우 관능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 의상과 검과 가발, 우아한 동작과 행렬은 우리 영혼을 이루는 실체의 진정한 일부로구나! 이때 우리란 누구인가? 날아오르려는 슬픈 시도에도 불구하고 높이 솟을 수 없는, 황폐한 정원 분수의 날개 달린 물줄기일 뿐이다.

 

(586-587)

아침 아홉시 반에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더러운 각반을 찬 평범한 노인은? 공연히 나를 성가시게 하던 절름발이 복권장수는? 담뱃가게 앞에서 시가를 피우던 얼굴이 둥글고 혈색 좋은 노인은? 낯빛이 창백한 담뱃가게 주인은? 규칙적으로 보는 사람들이기에 내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일이면 나도 프라타 거리, 도라도레스 거리, 판케이루스 거리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일이면 나 역시, 그렇다. 느끼고 생각하는 영혼이며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우주인 나 역시 이 거리를 더 이상 지나지 않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떻게 됐지?”라고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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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03)

사람이든 사랑이든 어떤 이념이든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 진실을 믿지 않고 진실을 안다는 것의 유용성도 믿지 않으며 초연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늘 사고하며 사는, 내면이 지성적인 자가 갖춰야 할 바른 자세라고 본다. 어딘가에 소속되며 평범해진다. 신념, 이상, 여인, 직업 이 모든 것이 감옥이고 족쇄다. 존재는 자유로운 것이다. 야망도 우리가 그로 인해 자부심을 갖는다면 한낱 짐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밧줄임을 안다면 야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안 된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묶이지 말 것! 다른 이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명상하되 황홀경에 빠지지 말고, 생각하되 결론을 구하지 말자. 우리가 신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감옥 마당에서 간수가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생긴 이 짧은 휴식 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사형이 집행될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면 그 다음날에 집행될 것이다. 계획하고 추구했던 것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 햇볕 아래서 거닐자. 태양이 우리의 주름살 없는 이마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은 기대를 접은 자에게 시원하게 불어오리라.

(310)

나를 찾는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내가 찾아낸 것은 의심스러우며, 내가 얻었던 것은 이미 내게 없다. 나는 길을 걷듯 잠을 자지만 사실은 깨어 있다. 나는 잠을 자듯 깨어 있고, 나는 내게 속해 있지 않다. 결국 삶이란 근본적으로 거대한 불면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의식이 또렷한 인사불성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323)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행동의 한 형태다. 절대적인 백일몽 상태에서, 끼어드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마침내 우리 자신의 의식조차 진창에 빠져 미지근하고 축축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327)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어울려 살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그 말의 위험을 모른 채 하는 말처럼, 만일 수많은 행복한 부부들이 상대방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정말로 이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결혼은 다 잘못된 결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악마의 영역인 비밀스러운 장소에 간직된 남성상과 여성상은 배우자가 구현할 수 없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이상형이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이들은 자신의 좌절된 욕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때로 불의의 습격이나 퉁명스러운 모욕으로 인해, 그들 안에 숨겨진 있던 악마, 고대의 이브, 기사와 요정 등이 행동과 언어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334)

예술의 역할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타인들도 느끼게 하는 것, 우리의 개별성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타인들이 스스로에게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의 진정한 실체는 절대로 전달될 수 없고, 나의 느낌이 심오할수록 소통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내가 느낀 것을 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즉 그들이 읽었을 때 내가 느낀 바를 정확히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예술의 정의에 따르면 여기서 타인이란 특정한 이 사람마다 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뜻한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 느낌의 진정한 본질을 다소 왜곡하더라도 나의 감정을 전형적인 인간 감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343)

여행은 독서와 같고, 독서는 다른 모든 것과 같다…… 나는 고전과 현대물이 고요히 공존하는 박학다식한 삶을 꿈꾼다. 그 삶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통해 내 감정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명상하는 이들과 대체로 생각만 했던 자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데, 그들 사이의 모순에 기반한 사고로 나 자신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이러한 꿈은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들자마자 사라져버리고, 책을 읽는 실제 행위는 읽고 싶다는 모든 욕구를 없앤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기차역이나 항구 같은 출발지에 가까이 가는 순간, 여행에 대한 모든 상상은 창백하게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확실한 두 가지, 나처럼 아무 가치 없는 두 가지로 돌아온다. 바로 아무도 모르는 나그네 같은 나의 일상, 그리고 잠들지 못한 자의 불면증 같은 나의 꿈이다.

(348)

사랑과 잠, 마약과 술은 예술의 기본 형태와 다름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과 같은 효과를 낸다. 하지만 사랑과 잠과 마약에는 환멸이 따른다. 사랑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실망을 준다. 잠을 자면 깨어나야 하고, 또 자는 동안은 사는 게 아니다. 마약을 복용하면 자극을 얻는 데 사용한 육신이 손상을 입는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예술에는 환멸이 따르지 않는데, 예술은 처음부터 환상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로부터 깨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 안에서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꿈꾸기 때문이다. 예술을 향유했다고 내야 하는 세금이나 요금은 없다.

(361)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교,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해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만일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고귀한 영혼과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귀족적인 노예, 지적인 노예일 뿐이고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다면 당신의 비극이 아니라 운명자체의 비극이다. 하지만 삶이 당신에게 노예가 되도록 강요한다면 당신은 불운하다. 이 경우 비극은 당신 것이고, 당신을 따라 다닌다.

(364)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삶에 충실하다가도 때로는 의구심이라는 이상한 감정이 엄습한다. 내가 과연 존재하는지, 혹시 내가 누군가의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나는 사실 어느 소설 속 인물이고 문체의 긴 파동을 타고 복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 속 현실 안에서 움직이는지도 모른다고,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본다.

(369)

삶과 멀리 거리를 두고 기대앉아 있노라면, 내가 결코 쓸 수 없을 문장들이 무기력한 나에게 들려오고, 결코 묘사할 수 없을 풍경들이 나의 명상 속에서 명료하게 표현된다. 모든 단어가 제자리에 들어 있는 완벽한 문장을 짓고, 정밀한 희곡의 줄거리가 마음속에 전개되고, 모든 단어들 속에서 위대한 시를 구성하는 어휘와 운율을 느끼며, 끝없는 열정이 보이지 않는 노예처럼 그림자 속에서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이 내 몸에서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인 상태로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 순간, 단어들은 달아나고 희곡도 죽어버리고 율동적인 속삭임을 하나로 모으던 살아있는 결합 관계도 사라져버린다. 그 자리엔 아득한 그리움, 머나먼 산 위를 비추던 햇빛의 자취, 황량한 변두리의 나뭇잎을 날리는 바람, 결코 밝혀지지 않은 친족 관계, 타인들이 즐기는 난잡한 잔치, 언젠가 우리를 뒤돌아봐줄 것 같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여인만이 남는다.

(390)

내 영혼은 비밀스러운 오케스트라다. 내 안에서 어떤 악기가 연주되고 울리는지, 현악기인지 하프인지 심벌즈인지 북인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교향곡 같다는 것만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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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북촌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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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그림을 볼 줄은 모르지만, 화가나 그림 속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란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우연히 알게 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북촌 편>이라는 책을 구입했었단다. 언제 산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어 해는 된 것 같구나.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리다가 이번에 우연히 눈에 맞아 읽게 되었단다. 원래 책 제목이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에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조그맣게 북촌 편이 붙어 있더구나. 그래서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서촌 편>도 있더구나.

이제 북촌이라고 하면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지란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들과 멀리 보이는 초고층 건물들이 잘 어우러진 배경으로 사진들을 많이 찍곤 한단다. 원래 조선시대 북촌에는 부촌들이 살았고, 그들은 광통교 근처의 많은 서화 가게에서 그림들을 샀다고 하는구나. 그러다가 일제 시대 넘어오면서 서화 가게들의 중심이 인사동으로 바뀌게 되었대. 오늘날 인사동도 서울의 주요 관광지 중에 하나인데, 그 탄생은 일제시대 행정 통폐합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관인방의 과 대사동의 를 따서 인사동이라고 했다는구나. 그렇게 과거 북촌에는 화가들의 후원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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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외에 주문을 받곤 했던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은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원 입장에서는 궁에서 멀지 않고, 부수 입을 올릴 수 있는 서화 가게들이 있는 광통교 근처이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지금의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전(典籍),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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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북촌에서 활동하던, 특히 서울을 경성으로 부르던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단다.

 

1.

아빠는 조선 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전후에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고, 조금은 놀랬단다. 그들의 작품들이 책에 실려 있었는데,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아빠이지만, 모두 범상치 않은 그림들이었단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문화강국의 저력은 여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들이 시대를 잘 만났다면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살았던 시절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사의 최악의 시절이었단다. 일제 강점기, 광복 후 남북으로 나뉘고, 또 처참한 전쟁에 이르기까지살아남는 것에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미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식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어떤 화가들은 미술에 재능이 있지만 나라의 독립이 중요하다면서, 미술을 관두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있었고, 어떤 화가들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친일 활동으로 인해 그 재능을 인정 받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또 어떤 화가들은 훌륭한 재능이 있었지만, 광복 후 자신이 믿는 사상에 따라 북으로 가서 남한에서는 잊혀진 이들도 있었단다. 이렇듯 그 시대를 사는 화가들은 시대와 싸워야 했단다. 이 책에 소개된 화가들은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단다. 그리고 작은 꼭지로 소개해 주어 읽은 지 두어 주 되었더니 또 다 잊혀져 가는구나. 요즘은 뉴스를 좀 즐겨 찾다 보니 책 읽는 시간도 줄고, 독서 편지는 더 밀리게 되었구나.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막상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주려니 잘 생각이 안 나는구나. 이 책에서 나온 화가들의 이름이라도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책의 목차에 나온 부분을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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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양화단의 좌장 안중식

다재다능하고 신비로운 서화가 지운영

근대 전각의 길을 개척한 전각 명인 오세창

근대 난초 그림을 정립한 서화가 김응원

근대 서화계의 어른으로 불린 김용진

서양화의 시작을 알린 고희동

조선조 마지막 내시 출신 서화가 이병직

독립운동에 앞장선 서화가 김진우

임금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의 귀재 김은호

금강산을 잘 그린 산수화의 거장 배렴

기억상실증으로 불행했던 비운의 화가 백윤문

남과 북에서 공명을 누린 서화가 이석호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가 김기창

한국 문인화의 정형을 정립한 장우성

한국적 인상파 화법을 완성한 화가 오지호

해방 후 좌익 미술계를 이끌었던 길진섭

월북한 감성적 모더니스트 최재덕

근대 나전칠기를 개척한 공예가 전성규

현대 건축의 산실 공간 사옥과 김수근

근대 미술의 요람 중앙고보와 휘문고보

사진관, 화랑까지 경영한 서화가 김규진

근대 서예의 체계를 정립한 김돈희

한국 최초로 시사만평을 그린 이도영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한 명월관 주인 안순환

금강산 그림 전통을 이은 산수화의 명인 변관식

늘 경계인이었던 월북 서양화가 임군홍

유럽에 이름 떨친 첫 한국화가 배운성

좌수서의 신경지를 개척한 서예가 유희강

한글 서예를 개척한 김충현과 김씨 4형제

죽음으로 예술을 완성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국립중앙박물관 최초의 유물사진가 이건중

화가들도 흠모했던 슈퍼스타 최승희와 매란방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설계한 나카무라 요시헤이

=================

이 훌륭한 화가들이 시대를 잘 만났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 독서편지는 짧게 마칠게. 아참, 오늘부터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어 정말 다행이구나.

 

PS,

책의 첫 문장: 조선 후기 예원을 이끌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문하에는 양반에서 중인, 평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드나들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런 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제8호 첫 페이지에 을사늑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기리는 <민중정공혈죽도>를 그려 싣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과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잡지 <청춘(靑春)>,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를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실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 P29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초’였음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영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치우친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 P88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박래현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그림은 어느 시기까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 P154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건물 건축의 첫째 의문은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크기가 너무 크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 실제 주변 다른 곳의 경우 고도제한을 받는다. 이런 높은 건물이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P235

2001년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이 대부분 유화 작품이어서인지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이 미술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문이었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 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대서특필한 기사도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했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판화를 전시하곤 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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