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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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리가 작년에 부여와 경주에 여행가면서 백제 역사 탐방, 신라 역사 탐방이라고 했잖아. 그 때 박영규 님이 쓴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을 읽었지. 고구려 역사 탐방은 비록 가지 못했지만,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은 읽어야겠다 생각했단다. 삼국시대 중에 가장 넓은 땅을 가졌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맞짱을 떴던 고구려. 누군가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 아빠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아빠와 너희들이 이 땅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단다. 과거 역사의 조금만 변해도 수 많은 우연으로 태어난 우리가 태어나질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야.

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륙으로 널리 뻗어나갔던 고구려의 700년 역사를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메모를 하면서 읽었지만, 잘못된 부분도 있으니 이해해주렴. 그리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책들은 지은이의 생각, 즉 사관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오는 일부 내용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하렴.


1.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고주몽이라는 것을 너희들도 알고 있잖니. 예전에 그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인기를 끈 적도 있단다. 아빠는 안 봤지만 말이야. 고주몽은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당시 해모수는 나이가 엄청 많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이미 아들 해부루와 손자 금와가 있었다고 했어.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몽을 임신한 유화는 왕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주몽을 돌보아준 사람이 금와였단다. 그런데 금와의 아들 대소는 주몽을 시기했단다. 아무래도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점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거야. 그래서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주몽은 친구들과 함께 졸본 땅에 있는 구려국으로 망명을 했단다. 그리고 기원전 37년에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사실 그 지역에 이전부터 구려라는 나라고 있었는데, 주몽이 더 발전시켜서 '숭고한'이라는 뜻의 '()'을 붙인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 실제로 고구려의 역사는 기원전 37년부터 더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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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과 소서노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이 계루부의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계루부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고 마침내 연노부를 누르고 왕이 됨으로써 계루부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연노부를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의 국호는 구려였는데, 계루부를 일으킨 주몽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위대한’, ‘숭고한등의 뜻을 가진 고()를 덧붙여 고구려라고 했다. 부족연맹체 성격이 강했던 구려는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인 고구려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으로 개국된 나라가 아니라 적어도 고()조선 말기부터 구려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주몽에 의해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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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성씨를 ''에서 ''로 바꾸었다고 하는구나. 고구려를 처음 세운 졸본이라는 곳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대. 졸본에서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 온조를 낳았는데, 주몽은 졸본으로 오기 전에 이미 예씨와 결혼하고 아들도 있었단다. 고구려 1대 왕인 고주몽은 동명성왕이라고 불렀고,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소서노, 비류, 온조는 나중에 고구려에서 쫓겨나듯 떠났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전에 이야기한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참고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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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책에 보면 고구려는 늘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와 교류 및 갈등을 보인 것은 훨씬 후대의 이야기이고,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압록강 북쪽의 광활한 지역에서 있으면서 그곳에 있는 나라들과 경쟁하고 협력을 하였단다. 그 곳에 위치한 나라들을 보면 동이, 예맥, 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말간, 비류, 행인, 북옥저 등의 나라들이 있었고 고구려는 이 나라들과 세력 다툼도 하고 협력도 하고 그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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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왕은 유리명왕으로 동명성왕 주몽의 맏아들이며 36년간 왕위에 있었단다. 어린 시절에는 주몽이 졸본 땅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어머니 왕후 예씨와 둘이 부여에서 지냈단다. 나중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 고구려로 왔고, 유리명왕은 태자에 책봉되었단다. 유리명왕이 왕이 된 뒤 위나암이란 곳으로 천도를 했는데 그 이후 유흥이나 즐기고 국정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어. 신하들이 조언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단다. 당시 태자는 해명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해명은 아버지와 달리 옛도읍지에 남아 그곳을 잘 다스렸단다. 이에 유리명왕이 화를 내고 태자에게 자살명령을 내려서 해명은 죽고 말았대. 아빠가 학교 다닐 때 "황조가"라는 시로 알려진 유리명왕(아빠가 배울 때는 유리왕이라고 했는데...)이라서 착한 왕인 줄 알았는데, 참 나쁜 왕이었구나. 태자뿐만 아니라 장남이었던 도절도 아버지와 의견 차이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유리명왕의 짓이 아닐까 싶구나.

태자와 장남이 죽고 유리명왕의 뒤를 이은 이는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 무휼인 제3대 대무신왕이란다. 대무신왕은 26년간 재위했고, 팽창정책을 써서 영토를 확장했다고 하는구나. 낙랑국을 정복했는데, 이때 활약한 이가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호동 왕자란다. 호동 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이란다.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호동 왕자는 나중에 누명을 쓰고 자살 명령을 받고 죽었다고 하는구나. 대무신왕 때 고구려는 부여와 전쟁을 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한나라의 침략을 을두지라는 사람이 격퇴시켰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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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왕은 민중왕으로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를 했대. 유리명왕의 다섯째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이었어. 태자가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어. 가뭄과 홍수가 잦아서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민중왕이 죽고 대무신왕 때 태자였던 대무신왕의 장남이 5대왕 모본왕이 올랐단다. 모본왕은 주변 사람을 너무 의심을 해서 늘 역모에 대한 걱정을 했단다. 의심을 받던 신하들 중 두도라는 사람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왕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모본왕은 재위 5년만에 신하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했어.

그리고 왕위에 오른 이는 6대왕 태조왕인데, 53년에 즉위하여 무려 93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게 가능이나 한 이야기인가 싶구나. 오래 산 것으로 유명한 장수왕보다 훨씬 오래 살았구나. 왕 위에만 93년간 있었다고 하니, 아빠가 아는 왕 중에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던 사람인 듯 하구나. 더 놀라운 것은 왕위에서 내려온 것도 죽어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동생 수성이 왕위 찬탈을 도모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구나. 유리명왕의 여섯째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7살에 왕위에 올라서 처음에는 모후가 섭정을 했대. 아무튼 7살에 왕위에 올라서 100살까지 왕위에 있었고, 왕에서 물러나서도 19년이나 더 살고 119살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오호 대단하시네. 그런데, 태조왕이라는 묘호는 원래 나라를 세운 왕에 보통 붙이는데, 고구려는 6대왕의 묘호가 태조였다고 하는구나. 그 이유는 당시 무척 강성해져서 그런 칭호를 붙였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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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태조라는 묘호는 고구려가 주변국에서 종주국으로 변모한 사실을 담고 있는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세력으로 봐서 스스로 종주국을 칭한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지 못할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제6대 임금의 묘호를 태조라고 붙인 것은 그가 고구려를 재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고구려가 종주국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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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대왕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태조왕의 동생 수성이 왕이 되었는데, 그의 묘호는 차대왕이었단다. 100살에 동생에서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동생 수성의 나이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텐데, 차대왕은 태조왕보다 24살이 어렸다고 하는구나. 차대왕은 독단에 오만 방자하고 유흥을 즐길 뿐만 아니라 태조왕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거나 자살하게 했다는구나. 폭정이 계속되자, 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그를 죽였다고 하는구나. 8대왕은 신대왕으로 태조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했고, 그는 태조왕보다 42살이 어렸다고 했어. 그렇다고 해도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77살 때였다고 하는구나. 차대왕을 죽인 것은 그의 폭정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 명림답부라는 사람이 주도를 했대. 그는 신대왕 때는 충신으로 일했고, 한나라가 침략했을 때 영리한 계략으로 한나라 대군을 격퇴했다고 하는구나. 이를 좌원대첩이라고 하는데 아빠도 처음 들어봤구나.

9대왕은 신대왕의 둘째 아들 고국천왕이란다. 슬슬 익숙한 왕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구나. 고국천왕이 즉위했을 때 외척세력이 득세를 해서 숙청을 시도했대. 그런데 오히려 반란들이 연이어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심지어 큰 형인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대. 다행히 진압을 했지만 말이야. 이 시대 유능한 재상 을파소가 개혁에 앞장섰다고 하는구나. 인재 등용 제도를 만들고 환곡 제도로 만들고 외교 정책도 잘 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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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죽었는데 왕후 우씨가 계략으로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 발기(앞서 이야기한 발기와 다른 사람)가 아닌 그 아랫동생 연우를 왕위에 세우려고 했어. 그러자 발기가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단다. 그래서 연우가 왕위에 올랐는데, 고국천왕의 왕비였던 왕후 우씨와 결혼하였단다. 그러니까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형수랑 결혼을 한 것이지. 막장드라마이지만 멀고 먼 옛날이니 그러려니 하자꾸나. 연우의 묘호는 산상왕이었단다. 산상왕은 환도성으로 도읍지를 옮겼어.

11대왕은 산상왕의 아들 동천왕으로 227년부터 248년까지 왕위에 있었단다. 서진정책을 펼쳐 나라가 크게 발전했고, 백성들의 신망을 많이 얻었단다. 당시 중국 땅에서는 삼국지로 유명한 위, , 오가 자웅을 겨루던 시절이었단다. 고구려는 그들 삼국 중 위나라와 패권 다툼을 하다가 화친을 맺기도 했어.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거절하기도 했다는구나. 삼국지 속 인물들이 나와서 친근하기도 하더구나. 삼국지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그들이 한창 싸울 때 동쪽에서는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구나.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와 위나라의 화친이 깨지고 전쟁도 벌였대. 밀고 밀리던 전쟁에서 위나라 관구검에게 고구려가 크게 졌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평양은 오늘날 북한 평안도에 있는 평양은 아니라고 하는구나. 당시 평양의 위치가 어디인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지은이 박영규 님은 요양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그리고 박지원의 말을 빌어 평양이라는 말 자체가 일반명사로 쓰였을 것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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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양이 어떤 특정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시대에도읍이 있던 곳을 부르는 일반명사였을 것이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박지원의 주장을 근거로 할 때, 고구려 영토 안에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평양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여러 지역이 있었고, 동천왕은 그 가운데 한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또한 동천왕 당시 고구려는 대동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동천왕의 평양이 평안남도 대동강변의 평양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천왕의 평양과 대동강변의 평양은 전혀 무관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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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왕은 동천왕의 장남 중천왕으로 248년부터 270년까지 재위했어. 위나라와 전투에서 승리를 해서 그 이후 위나라는 다시는 고구려를 못 쳐들어왔대. 위나라는 결국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사마염이 왕이 된 다음 진()나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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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왕은 중천왕의 장남 서천왕으로 270년부터 292년까지 재위했어. 직접 전쟁에 출정하여 북진 정책을 주도했어. 그런데 그 사이 수도에서는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다행히 진압되었단다. 14대왕은 서천왕의 장남 봉상왕으로 292년부터 300년까지 왕위에 있었어. 왕위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시기이구나. 그런데 봉상왕은 의심과 시기와 방탕의 왕이었다고 하는구나. 어쩐지 한동안 안정적인 국정이 이어진다 싶더니... 봉상왕은 의심병이 도져 숙부 달가를 죽였어. 그로 인해 조정은 혼란스러웠고 민심은 그를 떠났지. 아우 돌고도 누명을 씌워 죽이고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 재상이었던 창조리가 노력을 해보았으나 왕의 폭정을 멈출 수도 없었단다. 결국 창조리 주도로 반정을 일으키고 성공했단다. 반정에 성공한 창조리는 돌고의 아들 을분을 왕위에 앉혔단다.

그가 15대왕 미천왕이란다. 300년부터 331년까지 재위. 아버지 돌고가 누명을 쓰고 죽고 난 다음 을분은 도피생활을 했어. 소금장수, 머슴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창조리의 부하들이 힘들게 을분을 찾아내어 반정에 참여하게 되었단다. 왕위에 오른 을분(미천왕)은 재위 내내 민심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재상 창조리의 공이 컸다고 하는구나. 당시 중국은 516국의 혼란의 시대였는데, 미천왕도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팽창정책을 펼쳤다고 하는구나. 16대왕은 미천왕의 장남 고국원왕으로 331년부터 371년까지 재위. 모용선비의 남하정책으로 위협을 받아 성을 구축하였대. 환도성으로 천도를 하고 모용선비의 침략을 대비했어. 모용선비가 연나라로 바뀌고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후방에서 공격해오는 진나라에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미천왕 때 드디어 백제와 접촉하게 된단다. 당시 대륙백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공격해왔는데 이때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이었단다. 백제와 전투 중에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죽었단다.


3.

17대왕은 소수림왕으로 고국원왕의 장남이란다. 371년부터 384년까지 왕위에 있었어. 문치주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백제와 거란의 거듭된 침략으로 계속 전쟁을 해야 했어. 이런 외세의 침략을 막는데만 힘쓰다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그러나 소수림왕은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널리 알려진 왕이란다. 왜냐하면 그는 개혁에 앞장서서 불교를 공인하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했거든. 이런 소수림왕의 업적은 예전에 시험에도 자주 나왔던 기억이 있구나. 18대왕은 고국원왕의 차남인 고국양왕이란다. 384년부터 391년까지 재위. 백제와 계속 전쟁을 하면서 대립했단다. 그리고 드디어 19대왕 광개토왕.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담덕. 391년 왕위에 올라 413년까지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단다. 전방위 팽창정책으로 영토를 확장했어. 이에 신라는 미리 화친 제의를 했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였단다. 그러나 백제와는 계속 전쟁이었어.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도 갚아야잖니. 대륙백제뿐만 아니라 반도내의 백제도 공격했어. 관미성 전투, 패수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병신대원정으로 백제의 영토 많은 부분을 차지했단다. 그리고 백제 공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하평양을 설치를 했단다. 이 하평양이 오늘날 평안도의 평양일 것이라고 하는구나. 화친을 맺었던 신라에 침략한 왜도 공격하여 몰아냈다고 하는구나. 광개토왕의 업적은 광개토대왕비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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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왕은 장수왕으로 광개토왕의 아들이란다. 413년부터 491년까지 오랫동안 왕위에 올랐어. 광개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에 힘썼고 특히 백제와 전투에 집중했단다.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을 잡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고국원왕의 복수를 완성했단다. 잘 한 복수인지 모르겠구나. 신라는 태세 전환을 해서 백제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단다. 21대왕은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으로 491년부터 519년까지 재위했어. 신라와 백제 연합(나제연합)의 계속된 전투를 하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나라 운용을 했단다.

22대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인 안장왕으로 519년부터 531년까지 재위. 대륙 백제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며, 이때 대륙 백제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패배하고 수도를 부여로 옮기게 되었단다. 아빠가 계속 대륙 백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에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에서도 자세히 이야기했으니 그 때 쓴 독서편지를 참고하렴. 23대왕은 안원왕으로 안장왕의 동생이었고 531년부터 545년까지 재위했단다. 안원왕은 자연재해가 많아서 고생한 왕이었단다. 그리고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정권다툼을 했어. 형인 평성이 동생 세군을 죽이고 다음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24대 양원왕이란다. 545년부터 559년까지 재위. 북쪽에는 돌궐의 공격, 남쪽에는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영토가 줄어들었단다.

25대왕은 평원왕. 양원왕의 장남임. 559년부터 590년까지 재위. 북쪽에서는 여전히 돌궐이 공격이 있었고, 북주도 고구려를 공격했단다. 이때 우리에게 익숙한 온달장군이 등장하는데, 중국의 북주가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온달장군이 북주의 공격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고 하는구나. 결국 북주가 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되는데, 이 수나라도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려서 고구려는 이번에는 수나라 공격에 대비해야 했단다.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구축했다고 했어.

26대왕은 영양왕으로 평원왕의 장남이었어. 590년부터 618년까지 재위. 수나라의 4차례나 계속된 침략을 모두 막아냈단다. 이때 2차 침략 때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에 대승을 거둔 이가 을지문덕 장군이란다. 27대왕은 영류왕. 영양왕의 이복 동생. 618년부터 642년까지 재위. 중국은 수나라가 망하고 이연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를 세웠단다.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태자인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위에 올랐단다. 그가 당태종이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누군가 떠오르지 않니? 묘호도 동일하고... 당태종은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주변국을 위협하였단다. 이에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하여 성을 구축하였는데, 이 성 구축을 주도한 사람이 연태조라는 사람으로 연개소문의 아버지란다.

연태조가 죽고 나서 연개소문이 이어서 성을 구축했어. 영류왕은 당나라에 온건 정책을 펼쳤는데, 연개소문은 이에 반발하였어. 그래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켜 신하들과 영류왕을 죽였단다. 그리고 보장왕을 왕위에 앉혔어. 연개소문의 반정에 의해 왕이 된 28대 보장왕은 평원왕의 셋째 아들 대양왕의 장남이었단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앉힌 허수아비 왕이었어.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라는 직함을 사용했어. 드디어 당이 고구려를 공격했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여 당의 공격을 막아냈지. 그런데 안시성을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안시성 성주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고구려가 얼마 후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의 노력이 헛되어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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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의 영웅호걸로 통한 이세민을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쫓겨가게 한 안시성 성주는 불행히도 사서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 송준길과 박지원은 이름이 전하지 않던 이 안시성 성주를 양만춘(梁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구려 말의 학자 이색과 이곡은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싸움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당 태종이 눈에 화살에 맞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회군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성주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안시성을 지키며 고구려 재건을 노렸는데, 불행히도 671 7월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불세출의 영웅 안시성 성주가 이 때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뒤에 안시성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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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연일 공격을 해왔어. 남쪽도 정세가 복잡하게 흘러갔어. 당태종이 죽고 나서 당나라와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는데, 다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쳐들어왔단다. 이때는 이미 신라와 당나라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를 치던 시기였어. 연개소문이 뛰어나긴 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연개소문의 반도 쫓아오지 못했어.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은 권력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고구려도 몰락의 길을 걸었단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회광반조가 아니었나 싶구나.

당과 신라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고구려는 668년 하평양이 무너지고 보장왕은 항복을 했단다.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672년 모두 투항함으로써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정말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드디어 고구려왕조 28명의 왕에 대해서 다 이야기했구나. 생각보다 시간도 오래 걸렸네.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쓰면서 책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 있어 좋았단다. 하지만 이 기억력이 오래 가지 못함이 또한 아쉽구나.


PS:

책의 첫 문장: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일치한다.

책의 끝 문장: 불세출의 영웅 안시성 성주가 이 때 죽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뒤에 안시성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13 유리명왕 31년 기록에 서한의 왕망이 고구려를 낮춰 부르며 ‘하(下)구려’ 즉 ‘비천한 구려’라고 칭한 바 있는데, 이를 보아도 고구려의 역사는 구려를 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위대한 구려’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고구려 900년설은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했을 때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은 고구려를 ‘고려(高麗)’라고도 쓰고 있는데, 이는 고려에 대한 영어식 표기인 Korea의 어원이다. 흔히 Korea라는 말은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비롯했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조차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 그 명칭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 P21

‘동이’라는 말은 초기에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중국의 한(漢)족이 자신들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 명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렇지만 동이가 단순히 한족의 동쪽에 머무른다는 의미만 갖고 있지는 않다. 동이를 풀이하면 ‘동방의 이(夷)’족이란 뜻인데, 이(夷)에 대하여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으로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큰 것을 따르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사람들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설명은 이족이 ‘큰 것(大)를 숭상하고 활(弓)을 잘 다루는’ 특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동이는 단순히 한족이 머무르던 곳의 동쪽에 살던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지향하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 종족’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37

당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엔 말갈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갈은 신라와 고구려의 북쪽 변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틈만 나면 쉴 새 없이 백제와 신라를 공략했다. 백제와 신라를 공략한 말갈은 일곱 종류의 말갈 중 백산 말갈로서 압록강변과 청천강 사이에 거점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구려에 조공하면서도 한편으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백제와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 때에는 말갈군이 동원된 흔적은 전혀 없으며, 말갈을 통과한 기록도 없다. 다시 말해 고구려군은 말갈 지역을 통과하거나 말갈군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육로를 이용할 경우 말갈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광개토왕은 해로를 이용했던 것이다. - P288

이 같은 결과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고구려 멸망의 주된 원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비록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국력이 안정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그가 죽으면서 그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조정은 권력다툼의 장으로 급변하였고, 그것이 곧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권력다툼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그 누구의 의한 것이라도 독재체제는 국가를 멸망으로 이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연개소문이 진작 알았더라면 고구려가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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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대는 그대의 이야기이다. 그대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진리를 그대의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그대의 진리를 곧바로 주장하면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을 것이다. 고집 세고 에고가 강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대의 진리에 그대만의 이야기로 옷을 입혀라. 그때 그 진리는 설득력을 지닐 것이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먼저 삶을 경험해야 한다. 이야기는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26)

그때 구루의 시선이 소년이 배웠다고 말한 첫 번째 문장에 꽂혔다. 인도의 초급 교과서는 고양이같은 단어들로 시작하지 않는다. 인생의 조언으로 시작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의 알파벳 뒤에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이 적혀 있었다.

화내지 말라. 결과 흥분하지 말라. 이성을 잃지 말라.’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이것이었다.

진실을 말하라.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56)

그대에게는 뛰어는 음악적 소질이 있는데, 단 한 가지가 문제다. 누군가를 이기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훌륭한 음악성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그대의 가슴은 음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욕망은 그대를 음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이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탄센과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탄센에게는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그가 계속 이기는 이유이다.”


(86)

나는 특별한 진리나 비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목발을 집어던지고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대들도 나처럼 목발을 내려놓으면 된다. 나에게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다.”


(205-206)

삶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진행될 의무가 없다. 기차가 지연되고, 차는 진창길에서 고장 나며, 면접 일정은 틀어지고, 멋진 계획은 엉망이 된다. 잘나가고 있던 중에 갑자기 원숭이가 튀어나와 공을 홀컵에서 멀리 던져 버리고 그동안의 노력이 무효화된다. 그럴 때 우리는 절망하고, 자신과 타인을 비난하며, 운명을 탓한다. 자신이 이 경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먹는다.


(252)

차이는 각 개인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 우리 각자가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일어난다. 이것은 또한 각 개인이 어떤 성품인가에 달려 있다. 선한 사람은 그가 만나는 사람의 선한 자질을 보려 하고,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악한 면만 본다. 이것은 각 개인의 타고난 자질이다.


(266)

그대는 부처로 살아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대는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가 전혀 하지도 않은 말들을 내가 한 말들이라고 선전한다. 큰돈을 들여 알록달록한 절들을 짓고 불단 위에 불상을 세워 돈과 과일과 쌀을 끌어모은다.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에고와 부를 위해 나를 그러싸하게 포장하고 내 가르침을 사업 용도로 이용한다. 마라여, 붓다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그대가 안다면 그대는 결코 붓다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285)

문제에 맞서기보다 회피했을 때 문제는 더 커지고 단단해져 우리를 위협한다. 자갈과 모래 정도의 문제를 바위의 크기로 스스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305)

문제로부터 영원한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들을 신중하게 다뤄야 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잠들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낙타를 자신에게 묶어 놓았기 때문에 자신도 낙타에게 묶인 것이다. 문제들에 맞닥뜨리면서도 깊이 휴식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타들이 앉아 있든 서 있든 방해 받지 않고, 기나긴 사막을 건너기 위해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유목민들처럼. 여행자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앞에 놓인 길이 아니라 신발 속 모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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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8)

사진은 대체로 지시 사항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토는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순종의 표정은 미소도 아니고 찡그림도 아니고, 그 양쪽을 다 섞은 것도 같았다. 이토는 비서관을 불러서 같은 앵글로 찍은 다른 사진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다른 사진에서도 순종의 표정은 마찬가지로 모호했다. 다시 찍을 수는 없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이 사진을 공포하면 정책 효과가 클 것이었다. 이 사진이 조선 민심의 상처를 자극하겠지만 위력으로 압도하는 힘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도 폭민과 양민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폭민들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낼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남행의 성과는 작지 않았는데, 그 크기는 서서히 나타날 것이었다.


(69)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다. 분도는 방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헤어질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김아려는 기억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문중 사내 몇 명과 함께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아려는 남편이 결코 땅의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눈물을 흘렸다. 마을 어귀까지 따라온 사내들은 개울가에서 돌아갔다.


(159)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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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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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바로 직전에 읽은 책이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란 책이었잖니. 그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한 권 읽어봐야겠다 마음먹었단다. 어떤 걸 읽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낫겠다 싶었단다. 물론 아빠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단다. 그 당시 누구나 그랬듯 해문 출판사판으로 읽었지. 이 소설의 결론에서 나타나는 반전은 당시 어린 아빠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단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지 못한 아빠도 그 줄거리의 기억이 오래 갔단다.

몇 년 전에 너희들과 함께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도 같이 봐서, 너희들도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알고 있겠구나. 너희들이 좋아하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약간 찌질한 질데로이 록허트 교수로 나왔던 케네스 브래서라는 사람이 감독도 하고 주인공 푸아로 역을 맡았던 영화였잖니. 그 영화를 보고 그 원작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오리엔트 특급살인>이라는 책을 샀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구나.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추천했더니,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무서웠다면서 읽고 싶지 않다고 했지


1.

이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를 봤기 때문에 너희들도 모두 알고 있으니 최대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고 끝내련다. 시리아에서 사건 처리를 하고 이스탄불에서 출발하는 영국행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탄 푸아로. 그날 따라 침대 칸 객차는 만차였단다. 빈 자리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푸아로는 차장이 겨우 자리를 마련해주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단다.

다음날 승객 중에 라쳇이라는 사람이 푸아로가 탐정인 것을 알아보고, 자신의 안전이 위험하다면서 거금을 줄 테니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제안을 했지만, 푸아로는 편안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거절했단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고,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을 싫어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날 밤 엄청난 폭설과 눈사태로 인해 기차는 더 이상 운행을 못하고 멈추게 되었단다. 다들 한 동안 이 기차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객차 안에서 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도 했단다. 다음 날 멈춘 기차로 인해 사람들은 대부분 식당칸에 모여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어. 그런데 기차의 중역이자 푸아로의 지인인 부크가 푸아로를 찾았단다. 그는 무서운 소식을 전해주었단다.

라쳇이 칼에 찔려 죽었다는 거야. 그것도 열 몇 군데나 찔려 잔인하게 말이야. 푸아로는 어젯밤 소란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했지. 그리고 부크의 부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일단 열차는 눈사태로 한동안 정차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범인은 이 열차 안에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일 거야.

푸아로는 라쳇의 비서인 매퀸부터 심문을 시작했단다. 2 주 전부터 라쳇이 협박 편지를 받았다고 했어. 왜 라쳇은 협박을 받았을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푸아로는 라쳇의 소지품을 통해 라쳇은 가명이고 본명은 카세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카세티라는 이름은 악명 높은 이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단다. 미국에서 몇 년 전에 무서운 유괴 살인 사건이 있었어. 데이지 암스트롱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유괴해서 아이의 몸값으로 20만 달러를 받았단다. 더욱이 카세는 데이지를 이미 죽였단다. 정말 나쁜 놈이구나. 그가 범인인 것이 명백하였으나,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단다.

이 사건은 데이지가 죽은 것으로 희극은 끝나지 않았단다. 착하고 많은 사람들이게 존경을 받았던 데이지의 아빠 암스트롱 씨는 자살해서 죽고, 암스트롱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아이를 사신하고 사망하고 말았단다. 그런 카세티가 죽은 거야. 그의 진실을 알았다면 누구나 다 잘 죽었다고 할 것 같구나.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2.

이제 다시 푸아로는 승객들 열여섯 명에 대한 심문을 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빠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잖니, 그리고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푸아로가 어떤 대화에서 또는 어떤 단서를 통해서 이 범죄의 진실을 찾아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단다. 그리고 숨겨진 복선들을 찾으면서 읽어보았단다. 하지만, 결말을 알고 읽었는데도, 범죄의 진실을 찾아낼 단서는 쉽게 보이지 않았단다. 나중에 푸아로가 설명을 해주니, , 그렇구나하게 되었어.

….

푸아로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모든 사람들은 식당칸에 모아두고 이야기를 했단다. 자신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두 가지 추리를 내 놓았단다. 첫 번째는 라쳇에서 원한을 품을 사람이 몰래 열차에 들어와서 그를 죽이고 다시 열차를 빠져 나가 도망가버렸다는 추리. 하지만 이 추리는 다들 말도 안되고 허점투성이란 걸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두 번째 추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실이란다. 두 번째 추리를 이야기할 때 손님들은 그것에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없었단다. 누가 봐도 명백했거든. 두 가지 추리를 이야기한 푸아로는 어떤 것이 맞을 것 같은지는 그곳에 모인 이들이 결정하라고 했단다.

사건과 관련이 없던, 이 기차 회사의 중역인 부크 씨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부크 씨는 첫 번째 추리가 맞다고 했는데, 아빠도 같은 생각이었단다. 허점이 많긴 하지만 첫 번째 추리가 백 번 옳지. 푸아로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지. 이 소설은 얼음처럼 냉철하지 않고 인간미 풀풀 내는 푸아로의 모습을 볼 수 있던 작품이었단다. 이런 캐릭터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을까? , 그럼 오늘은 이만 하련다. 너희들도 함 읽어보면 좋을 텐데, 무섭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PS:

책의 첫 문장: 시리아의 겨울 아침 5시였다.

책의 끝 문장: 여러분 앞에 해결책을 내놓았으므로 전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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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3-03-01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었을 때는 결말에 꽤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서 대부분 살인범은 나쁜 사람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피해자가 나쁜 사람이어서요. 푸아로 씨는 첫 번째 추리처럼 허점이 많은 추리도 할 수 있기에 더 인간적이고 완벽한 탐정이라 생각합니다.

bookholic 2023-03-02 23:11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저도 푸아로가 냉정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20)

1584년경, 영국인 탐험가 월터 롤리는 지금의 미국 플로리다주 북구 해안을 탐사하던 중 영국인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땅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별명을 따 버지니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버지니아냐고요? 엘리자베스 1세는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라고 선언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때문에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 당시 버지니아에는 특정한 경계가 없었기에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플로리다에 이르는 지역을 대부분 버지니아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의 버지니아주와는 위치가 다르니 기억해 두세요.


(29)

그럼 현재 미국인들이 자기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첫 북미 대륙 정착민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1620,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해 약 65일 뒤 지금의 보스턴 부근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인이랍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뉴욕이 있는 허드슨강을 목적지로 영국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현재 보스턴 지역인 플리머스였습니다. 목직지가 달라졌으나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을 새로운 영국이라는 뜻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이름 짓고 일단 살아보기로 합니다.


(33)

질병과 굶주림으로 힘들었던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들까요? 그래서 다음 해인 1621, 옥수수를 수확한 청교도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원주민들에게 칠면조 등을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시작이라고 미국인들은 주장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미덕으로 포장해 매년 11 4번째 목요일이 되면 전국적으로 칠면조를 잡아 가족끼리 기도를 하며 그날의 아름다운 미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부분이 아는 미국 추수감사절의 아름다운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 후, 청교도 정착민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원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합니다. 왜 갑자기 은인들을 학살했느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점차 영국에서 사람들은 밀려 들어오고, 땅은 부족했습니다. 제임스타운의 경우와 똑같이 자신들이 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과 충돌한 것입니다. 청교도들을 도운 원주민들은 왐파노아그족(Wampanoag)이란 부족이었는데 1675, 중무장한 영국인들에게 거의 몰살당해요.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건국 초기의 흑역사이니까요.


(50)

카르티에가 프랑스령이라 선언한 지역이 바로 지금의 퀘백 지방입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대부분 영어를 쓰지만 퀘벡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어를 씁니다. 퀘백의 중심 도시 몬트리올에는 중앙 광장이 있는데요. 바로 자크 카르티에 광장입니다. 프랑스어가 쓰인다는 걸 잘 알 수 있지요. 카르티에가 그 동네 원주민에게 이곳의 이름을 물었더니 원주민은 카나다, 카나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카르티에는 그곳의 이름을 카나다로 알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곳 원주민 말로 마을이란 뜻이었거든요. 결국 그 카나다가 나라 이름인 캐나다(Canada)가 되었답니다.


(70-71)

1790년 본격적으로 이 늪지대에 새 수도 건설이 시작됩니다. 이제 새 수도의 이름을 정할 시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이란 이름을 일단 붙이고 그 뒤에 D.C.란 타이틀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여기서 D.C. District of Columbia의 준말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콜롬비아 특별구라는 뜻입니다. 콜롬비아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미국을 부르는 또 하나의 별명이었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한 콜럼버스의 땅이란 뜻이었지요. 결국 미국 수도 이름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이름이 들어간 워싱턴 D.C.로 정해집니다.


(113)

1817년엔 노예해방론자들이 아예 흑인 노예 수만 명을 배에 태워 다시 그들의 고향인 서아프리카로 돌려 보냅니다. 이들에 의해 미국을 탈출한 수만 명의 흑인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에 새로운 나라를 만듭니다. 이것이 1822년 서아프리카에 설립되어 1947년에 독립한 라이베리아(Liberia)’에요. 라이베리아의 국기를 보면 미국 성조기와 아주 비슷한데요. 자기들을 탈출시키고 고향 아프리카에 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 준 미국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답니다.


(137)

미국 백인들은 수족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더욱 잔인한 일을 벌입니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 가보면 러시모어산이 있는데, 그 산에 역대 미국 대통령 네 명의 얼굴이 크게 조각되어 있어요. 관광지로도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중서부 단체 여행 중 꼭 방문하는 미국의 성지거든요. 그런데 그 백인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러시모어산은 바로 수족의 터전이었고 그 산은 수족의 성지(聖地)였던 것입니다. 백인들이 자신들에게 덤비고 얼굴을 새겨 넣은 겁니다. 수족의 입장에선 부족의 성스럽고 상징적인 산에 백인 정복자 네 명의 얼굴이 새겨진 것이지요. 이건 마치 광화문 광장에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수족에게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70)

러시아 역사 가운데 여러분과 함께 시작할 시대는 로마노프 황족이 군림하던 로마노프 황조시대랍니다. 로마노프는 조선을 다스렸던 전주 이씨와 같이 당시 러시아를 다스리던 왕족의 이름이랍니다. 유럽 변두리 국가였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유럽사에 당당한 주요 국가로 등장한 시기도 이 로마노프 황조 때였어요. 이 로마노프 황조, 우리와도 관계가 깊어요. 고종이 수도 서울 안에서 도망간 러시아 외교 공관은 로마노프 황조의 외교 공관이었고,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대판 싸운 러일전쟁도 로마노프 황조 때 일어났답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으로 쫄딱 망한, 즉 러시아 역사의 마지막 황조 또한 로마노프 황조입니다.


(182-183)

여기서 잠깐만, 여러분 혹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아시나요? 아주 간단히 깊어 볼게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일단 자본주의는 나빠요. 그래서 사회가 궁극적으로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나누면서 사는 공산주의로 바뀌어야 해요. 그런데 공산주의로 바꾸는 것이 힘들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잖아요. 이 과정에서 잠시 노동자, 농민에 의한 강력한 독재를 토애 더 빠르게 공산주의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노동자, 농민에 의한 불가피한 독재 과정을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독재 과정인 사회주의를 잠시 견디면 누구나 평등한 공산주의가 온다고 믿었어요. , ‘자본주의 à 사회주의 à 공산주의순서로 세상이 변하리라 생각했습니다.


(227)

밥그릇 안에서 구더기가 나오자 수병들은 격분했습니다. ‘아니! 밥이라도 제대로 줘야 싸우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라는 불만을 장교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장교들이 한 대답은 그냥 구더기 건져 내고 조용히 먹어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더욱 격분한 수병들은 장교를 죽이고 배를 접수합니다. 바로 전함 포템킨 봉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영화를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러시아 천재 영화 감독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만든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입니다. 전함 포템킨 반란 사건 20주년을 기념해 1925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인류 영화사에 엄청난 영향을 준 영화랍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당시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시작됐고 전함 포템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229)

그리고 이 1905‘1차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조직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지휘하기 위해 총지휘부를 만들었어요. 그 지휘부는 러시아어로 노동자의 희회란 뜻인 소비에트(Soviet)’라고 불리게 됩니다. 당시 노동자들도 몰랐을 겁니다. 이 소비에트가 나중에 소비에트 혁명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라는 나라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질 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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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가 1957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11>은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곡 연주에 한 시간이 넘을 정도로 장대하고 거대한 음악 작품입니다. 여섯 개의 혁명가를 인용한 것 또한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의 악장마다 궁전 앞 광장’, ‘1 9’, ‘추도’, ‘경종등 피의 일요일 사건의 순서를 나타내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1악장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민중의 모습, 2악장은 학살 장면, 3악장은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 4악장은 비극을 딛고 일어나 전진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낯설고 멀게 만 느껴진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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